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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튜돌 치하의 청교도주의

by 【고동엽】 2021. 11. 16.

1. 메리의 개신교에 대한 봉사(奉仕)


여기서 메리(Mary)의 통치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전의 두 통치시대에 정착된 모든 교회적 조직들은 금새 사라져 버렸다. 크랜머, 리들리, 후퍼, 라티머와 그 밖의 에드워드 시대의 다른 감독들은 감옥에 수감되었고, 적당한 때에 화형장으로 보내어 졌다. 가디너(Gardiness), 보너(Bonner), 히드(Heath), 그리고 다른 로마 카톨릭 교회 감독들이 다시 복직하게 되었다. 런던의 감독으로서의 보너(Bonner)는 그 자신과 그의 권력이 '핏빛'이라는 별명을 얻어낸 가혹한 비극의 시대에 메리의 가장 충실한 하수인이 되었다. 로저스, 후퍼, 리들리, 라티머 그리고 크랜머들의 기억할만한 순교조차도 간과되어졌으며, 3년 동안 약 300명의 희생자가 화형대 위에서 불태워졌으며, 마지막까지 여왕은 그녀의 가혹함을 누그러뜨리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가장 최근의 연구는 메리 그녀 자신이 영국사의 페이지 위에 남겨 놓은 그녀의 단명한 통치의 결과인 깊고도 지울 수 없는 핏빛 오점에 대하여 책임감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가 붙여놓은 불에 타서 순교한 순교자들에 의해 그녀가 행한 주된 봉사는 영국민의 가슴속에 교황권에 대한 깊은 상처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라티머의 마지막 말을 인용해보면, 순교자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2. 망명한 영국 개혁자들


그러나 다행하게도 그 박해자의 손에 모든 개혁자들이 다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약 천명을 웃도는 영국인들이 메리 치하의 위험 속에서 대륙으로 도망하여 쥬리히, 바젤, 스트라스부르그, 엠덴, 프랑크포트, 그리고 제네바 등의 도시들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그러나 색소니와 그 근처의 다른 지방에 은거했던 망명객들은 성경에서 시볼렛을 발음할수 없었던 에브라임 사람들처럼 근본적인 그 지방들과의 이질감 때문에 쫓겨나게 되었다. 같은 개신교파이면서도 이렇게 차별 대우를 받은 것은 루터파에 의해 저술된 그들의 논문을 통하여 루터파 교회의 역사 속에 어두운 얼룩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개신교회의 보다 호의적인 울타리 안에서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피신처를 발견했다.


3. 프랑크포트에서 시작한 청교도주의와 영국 국교회주의의 투쟁


제일 먼저 우리의 주의를 끄는 사람들은 본토의 프랑크포트에 있던 망명객들이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에서 영국국교회자들이 한편이 되고, 청교도들이 한편이 되어 이 당시까지 계속된 분열을 종식시키는 투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분열은 너무나 영구적인 것이 되어 왔는데 그것의 결말은 너무 순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에 있어서 그것은 영국에서 즉시 재현되었다. 우리는 그것이 자라난 그 상황을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4. 프랑크포트에서 안식처를 찾은 영국의 망명객들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글래스턴 버리(Glaston bury)에서의 예배를 보기 위한 회합을 허락받아왔던 왈룬(walloon)과 프랑스의 회중들은 메리의 즉위시 영국에서 추방되어질 때, 그들의 목자인 발러란드 플래인(Vallerand Pullain)과 같이 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교회가 있고, 말씀과 성례의 두 가지 문제에 있어서의 그들의 모든 교회행정의 자유를 상원으로부터 획득한 프랑크포트에서 안전한 휴식처를 발견했다. 그후에 위팅검(Whittingham)과 함께 수많은 영국의 망명객들이 1554년 6월에 프랑크포트에 왔는데 그때에 그들은 소수의 프랑스 회중들이 거기에 이미 정착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도착하던 저녁 프랑스 목사인 플레인은 그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설명하기를, 기증된 교회와 그들이 획득한 예배의 자유는 그들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영국으로부터 복음을 위해 탈출해 나온 모든 사람들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한 그는 그들에게 그의 회중과 연합하기를 요청했다. 여기에 대해 그들은 설명하기를, "대다수의 사람이 프랑스 말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들은 그 도시에 머무를 수 있는 승인을 받았고 교회를 번갈아 사용할 수 있도록 왈룬 사람들과 타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상황은 그들이 교리나 의식면에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프랑스인에게 동의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프랑스말로 펴낸 신조를 인정하고 찬성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의 조건에 그들은 쉽게 동의했다. 그들은 이런 조건에 맞도록 영국기도서를 변조했다. 연도(連禱 : 사제가 먼저 읊는 기도문을 따라 신도들도 읊는 형식의 기도)와 응창(應唱 : 사제를 따라 성가대가 창화하는 예배 형식)과 백의(白衣 : 예배의식 때 성직자가 입는 의복)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영국인의 예배를 위한 프랑스, 화란, 그리고 다른 개혁교회를 본따 "평범한 박자와 운율의 찬송"인 고백문을 닮은 새로운 고백이 대용되었다. 영국의 망명객들의 공동체는 로마교의 의식과 용어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영국 기도서보다 더욱 제네바식을 따른 교회조직을 원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5. 그들과의 합세를 위한 동료망명객들을 초청함


그들에게 보여준 호의에 감사하면서 그들은 그들이 프랑크포트에서 누리는 특권을 소개하고, 그들에게도 와서 그들과 함께 그 특권을 나누자는 편지를, 쥬리히, 스트라쓰부르그, 또 그밖의 도시들에 있는 그들의 고향 친구들에게 보냈다. 스트라쓰부르그의 형제들은 비록 프랑크포트의 교회들이 영국 감독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 오는 것을 거절했다. 쥬리히로부터 온 회신은 에드워드의 제2기도서를 사용하고 그들이 '다른 어떤 것도 사용치 않고 오직 그것을 완전히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프랑크포트에서 보낸 또 다른 서신들에 대한 대답으로 쥬리히의 망명객들은 에드워드의 기도서를 여전히 고집하면서, 그들 가운데의 한 사람인 리챠드 챔버스(Richard Chambers)를 협상의 대표자로 파견했다.


여기에 대하여 프랑크포트의 망명객들은 지금의 교회를 사용할 수 있는 이런 상태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완전히 영국기도서만을 사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챔버스가 가지고 돌아간 편지에서는 지적하기를, "그 기도서에는 그들이 인정할 수 없는 몇 가지가 포함되어 있고, 처음의 형태에서 이미 많은 것이 변해 있으며, 또한 왕의 목숨이 남아 있었다면 더욱 더 변경되었을 뻔한 기도서이다. 그러나 그 기도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 정당성을 인정하는 한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프랑크포트의 사람들은 그것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쥬리히 형제들에게 전달이 되어 있었다.


6. 목사가 된 녹스와 레버


제네바에서는, 죤 녹스(J. Knox)와 쥬리히의 토마스 레버(T.Lever)에게 프랑크포트에 있는 회중의 연합목사가 되어 달라는 청탁을 보내었다. 녹스가 그 부름을 받아들인 것은 오직 칼빈의 힘있는 중재에 의한 것이었다. 그린달과 챔버스로 구성된 스트라스부르그와 쥬리히에 있는 망명객들의 대표단은 그 자신들의 정착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만약 그 책의 내용과 취지가 용인되기만 한다면 그들은 그 지방이 요구하지 않는 것들과 의식들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들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런 시도도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7. 기도서에 대한 칼빈의 판단


녹스는 철수하여 제네바로 돌아가기 위한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이 일은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녹스와 위팅검(Whittingham)은 칼빈에게 기도서 안에 있는 유익하지 못한 의식들에 대한 요약을 쓰고, 그의 의견을 밝혀주기를 요청하는 글월을 보냈다. 칼빈의 기억에 남을 만한 그 문제의 판단은 그 서신에 대한 응답 속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그 안에 있을 수 있는 많은 우매한 것들과 하찮은 것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고쳐질 수 없었고, 묵인되어졌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학자와 위엄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령한 목자들을 보다 확고하게 하며, 무절제에서 보다 절제 있게 세우며, 보다 순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만약 오늘날까지 영국에 종교가 번창했다면, 이것들 중의 많은 것들이 옳게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질서를 정립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 위한 장소에 교회가 선 이래로 나는 교황적 잔해의 쓰레기들을 그토록이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외도하는 것을 말할 수 없다.


8. 타협된 기도서가 적용됨


칼빈의 기도서를 본딴 예배서가 녹스, 위팅검, 길비(Gilby), 폭스(Foxe), 그리고 콜(Cole)들에 의해 도입되어졌다. 그러나 녹스는 그것을 프랑크포트에 있는 교회에서 강요하기를 거절했다. 1556년 4월까지 앞으로의 석달 동안 대중의 동의에 의해서 활용되어야할, 온당치 못한 것을 제거해버린 영국교회의 기도서를 출판해야 하며, 칼빈, 머스큘러스(Musculus), 마터(Martyr), 볼링거(Bullinger) 그리고 비렡(Viret)들에 근거한 토론을 해주어야 할 위원회를 녹스의 제의에 의하여 지명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의서는 모든 당파들에 의하여 작성되었고 서명되었다.


9. 깨어진 평화


석달이 경과하기 오래 전에 그 상황을 변화시키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에드워드 6세의 개인교사였고, 개정된 에드워드 기도서의 위원회 일원이었으며, 거만하고 완고한 기질을 가진 콕스 박사(Dr. Cox)가 새로운 망명객들과 같이 프랑크포트로 왔다. 그리고는 타협의 기도서에 묶이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영국에서 해온 것처럼 할 것이며, 영국교회의 면목을 지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첫 번째 주일에 그들은 타협에 위반하여 예배 중간에 응답의 순서를 넣었으며, 다음 번의 주일에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이며, 레버(Lever)에게서 설교할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제웰(Jewel)이 그의 친구들이 응답을 하는 동안 연도를 읽었던 것이다. 녹스가 오후에 설교하기 위하여 이곳에 돌아왔을 때 그는 평화를 깨뜨리는 자들과 기도서를 참조하는 문제에 대하여 명백히 그의 의견을 말할 기회를 가졌다. 여러 파벌들 가운데 한 의견에 일치를 보지 못하고, 많은 논의를 한 끝에 행정장관은 회중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고통스럽지만 그들 평화를 깨뜨리는 자들에게는 교회의 문을 닫고 프랑스 기도서를 지금부터 사용하라고 말했다.


10. 논쟁을 예측한 녹스


프랑크포트의 상원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녹스와 그의 친구들은 만약 그들이 불평하고 있는 그 잘못된 일이 바로 잡혀지지 않는다면 "영국에서는 결코 이 논쟁의 끝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먼저 이름을 든 다섯 사람들 - 칼빈, 머스클러스, 카터, 불링거, 그리고 비렡 - 그들을 참고하여 그 일을 하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후손들은, 그리고 우리 전체 영국민과 모든 선한 사람들은, 이 위대한 혜택을 준 여러분들의 의견에 순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예견했던 것처럼 그 사건이 영국에서 정확하게 일어났고, 지금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는 분열이 거기서 재현되었으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녹스의 현명함과 예지의 증거이다.


11. 녹스를 제거하려는 비열한 술책


녹스의 적들은 그를 퇴치하기 위하여 괴이하고도, 부끄럽고, 비열하고, 가증한 수단을 사용했다. 기이한 감독파교회의 역사가인 토마스 플러(Thomas Fuller)의 말을 들어보자 : "억압된 콕스파는(Coxian Party) 그 자신들을 일으키기 위해 색다른 방법을 받아들여서 녹스를 반역죄만큼 중한 죄목으로 국가에 고발했다. 처음에 버킹검 주에서 개인적으로 선포했고 지금은 전 세계에 공공연히 출판된 그의 영어로 저술한 책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훈계'라는 것에서 그는 제왕을 '네로(Nero)에 못지 않은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와 언어 속에서, 다른 어떤 자연스러운 제왕을 향한 충성도 녹스는 가지고 있지 않은(비록 그가 제국의 도시로 이동함으로 생긴 막연하고도 우연한 것은 있었지만) 그 제왕에게 거슬려서 이 불행한 위기의 시간에 그 자신의 종교를 위해 도망친 망명객들에 의해 그의 생명의 위험까지 곁들여진 그 말들이 그후로 계속 문제시되어 졌다는 것은 너무나 낯설은 일이라 하겠다! ...... 그러나 감정의 격양 속에서 어떤 논쟁을 놓고 생각할 때 그 논쟁이 그들과 싸우는 사람들이 멸망하는 경향을 띤 공정한 경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선한 사람들의 나쁜 점이다. 여기 제왕의 총애가 높게 집중되어 있는 제국적인 도시 프랑크포트의 정부에서는 녹스가 그 도시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 그는 1555년 3월 25일 그의 친구들과 추종자들에게 커다란 유감을 표시하면서 그 회중을 떠났던 것이다."


12. 제네바로 돌아간 녹스


그가 떠나기 전날 저녁 오십 여명이나 되는 그의 친구들이 그의 오두막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리고서 그로부터 '가장 안락한 설교'를 들었다. 그 다음날 그들 친구들은 그를 그 도시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까지 환송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 그에게 있기를 빌어주었다. 녹스가 떠난 후 콕서와 그의 친구들은 칼빈에게 그들의 행동을 변호하는 글을 써보내었다. 그러나 칼빈은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 판단에는 저 녹스 선생의 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처리된 것도, 형제들에 의해서 처리된 일도 아니었다"라고 했다.


13. 첫 번째로 조직된 청교도회중


녹스는 프랑크포트를 떠나 제네바로 왔는데 거기에서 그는 보다 평화롭고, 마음에 맞는 일할 터전을 발견했다. 칼빈의 훌륭한 일을 통해서 제네바에 온 영국의 망명객들은 예배를 드릴 교회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녹스는 그들의 목회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목회사역은 스코틀랜드를 방문하느라고 즉시 중단되었다. 1년 동안의 부재 후에 1556년 9월 그의 아내와 장모를 동반하고 그는 돌아왔다. 그가 부재했던 동안 그의 회중들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위팅검과 다른 몇 사람들이 프랑크포트에서 왔다. 지금은 철학의 전당(Auditoire de philosopie)으로 불리우는 새 노틀담의 사원이 그들의 예배를 위해 제공되었다. 매년마다 있는 목회자의 선거에서 녹스는 크리스토퍼 구드맨(Christopher Goodman)을 동역자로 하고 재선출되었다.


'일반적 기도서'(A Book of Common Order)가 사용되었다. 그 책의 초판은 아마도 이미 프랑크포트에서, "제네바의 영국회중이 사용했으며, 저명하고, 신학적으로 박식한 사람, 칼빈에게 인정을 받은 성례전과 기타의 사역과 기도의 형태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만들어져 있었다. 그 책은 때때로 '녹스의 기도서'라고 불리우기도 하고 '제네바의 책' 그리고 약간 변경되어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일반적 공중 기도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 책의 헌정은 에드워드의 예배서에 있는 법의와 의식들이 버려진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노회적 청교도주의가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도 점점 한 개의 세력이 되어 가면서 그 자신을 조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녹스와 구드맨을 목회자로 하고, 위팅검, 샘슨(Sampson), 그리고 마일스 커버데일(Miles Coverdale) 같은 사람들을 장로로 하며, 엘리자베스 왕가의 회계검사관이 된 프란시스 놀리스(Francis Knollys) 같은 사람들을 평신도로 둔 독특한 회중이었다. 흄 브라운 박사(Dr. Hume Brown)는 말한다. "녹스와 구드맨의 당파를 지적하는 영국사에서 너무나 유명한 그 당파의 이름만 아직 창안되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근본적 형태에서 그 파는 이미 완전히 명백한 실체를 갖추었던 것이다. 첫 번째 청교도 회중으로서 제네바에서 녹스와 구드맨에 의해 통솔된 교회는 강조할 필요가 있는 역사적 중요성을 함축한 교회였었다. 후에 엘리자베스에 의해 설립되어진, 타협의 종교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가장 꾿꾿한 '불복종자'들이 속했던 것이 이 회중의 사람들이었으며, 녹스와 구드맨의 글 속에서 보면 그들의 교리들은 처음에 단호하게 설명되어 있으며, 그것이 결국에는 청교도주의의 전통이 되었던 것이다.


카알라일(Carlyle)은 청교도주의의 전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종교개혁이 여러 곳에서, 특히 우리 영국에서 취한 가장 흥미있는 국면은 그것이 진정한 마음의 일로서 되어진 것이며, 세계에 가장 주목할 만한 열매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하늘과의 진정한 영혼의 교통을 가지고, 또한 그 자신을 역사 속에 그런 모양으로 표현해낸 청교도주의의 유일하게 강조할 만한 사건인 것이며, 역사는 언젠가 다시 나타날 이 청교도주의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14. 번역된 성경


제네바의 영국 망명객들이 이루어놓은 가장 값어치있는 일은 몇 세대 동안 가장 보편적인 영어성경으로 읽혀진 '제네바 성경'(Geneva Bible)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주로 위팅검에 의해 번역되었고, 구약성경은 커버데일, 길비, 샘슨 그리고 다른 히브리주의자들에 의해 번역되어졌다. 성경을 장으로 구분한 것이 처음 나타난 곳이 바로 이 번역성경이었다.


15. 옹호된 합법적 정부


또 다른 주시할만한 논문이 크리스토퍼 구드맨의 펜으로, "어떻게 최상의 권력이 그들의 백성들에 의해 복종되어 저야 했는가 : 그리고 거기서 그들이 어떻게 불복종되었고 거부되었는가"라는 제목으로 나타났다. 그 글은 그것을 위해 청교도들이 싸우기를 결코 쉬지 않는 교회와 국가의 합법적 정부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은 '왕자들과 백성들이 똑같은 신성한 율법에 복종하게 되거나, 왕자들의 독재나 백성들의 반란이 없어지는' 그런 상황을 제외하고는 시민의 힘에 복종한 것이 명령되어 있는 것이다. 후세대에 그것은 존 밀턴(John Milton)에 의해 따뜻한 칭찬을 받았다. 풀러가 청교도주의의 '바다 너머의', '그 탄생'이라고 부른 말에 보다 많은 주시를 하면서 우리는 다음에 그것이 엘리자베스의 시대에서 어떻게 '보호되고 젖을 떼었는가'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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