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청교도 설교
* 브루스 비클 지음 / 원광연 옮김 / 청교도 신앙사 (김재윤 요약)
이 책은 청교도들의 강단의 능력의 비밀과 그들의 목회의 광맥을 다루고 있는 명저이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들은 오늘날 교회에 가장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강단의 회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의 귀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Ⅰ. 청교도들의 강단에 대한 인식
청교도들로서는 인간이 기도나 찬양을 통해서 무한히 높으신 하나님께 올라가는 일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무한한 간격을 넘어 오셔서 설교를 통해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일이 말할 수 없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해명하고 논의하는 일을 예배의 두드러진 특질로 만들었다. 예배를 위한 유일한 표준으로 성경을 높이고 기림으로써, 그들은 설교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절정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해명을 순종하는 자세로 경청하는 일이야말로 예배의 클라이막스였다.
청교도 목회자에게는 주임무가 바로 설교하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사역의 목적은 그 목표에 비추어 결정되었다. 그 목표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또한 각 사람을 권하여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청교도 설교자에게는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심히 주를 이루었으며, 회중을 부지런히 방문함으로써 설교를 보완했는데, 이들은 마치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이 목표를 위하여 전력을 경주한 것이다.
청교도 설교의 성격은, 마음에 와 닿기에 족할 만큼 수사적인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단순한 사람이나 진지한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는 법이 절대로 없다는 것이었다. 청교도 설교는 반드시 확실한 성경 본문에서 출발했다. 일단 본문이 선정되면, 설교자의 그 다음 의무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 본문의 뜻을 명확히 밝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아주 긴 청교도 설교라도 반드시 나름대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청교도 설교는 세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곧 가르침(Doctrine), 논증(Reason), 사용(Use)이 그것이었다.
청교도들의 설교들은 거의 전반적으로 성경 이외에는 인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설교의 첫째 되는 목표였기 때문이다. 각 설교마다 본문에서 신학적 명제를 이끌어 내고 그 실제적 적용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우선 본문을 취하여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하며, 그 분석한 내용을 다시 하나의 명제로 제시하였다. 본문에 대한 논리적 분석이 끝나면, 실천적 적용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실제의 삶에 적용시키는 시도가 이어졌다.
청교도 설교자가 청중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설교를 준비했다는 것이 설교들 자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설교의 제일 되는 목적이 '사람들의 영혼과 삶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킴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설교가 회중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그들의 지극한 바람이었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설교를 가능한 한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청교도들은 설교를 예배의 최정점이요 중심점으로 회복시켰다. 그들의 설교의 내용은, 죄인에게나 성도에게나 똑같이, 은혜의 도리였다. 그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관적인 은혜를 인식하였고, 그리하여 설교할 때에나 다른 사람들의 회심을 구할 때에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게 된 것이다.
청교도 설교의 내용은 죄인의 회심은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로운 주권적 역사라는 확신의 일관된 표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지 않으면 아무리 스스로 노력하고 결심한다 해도 소용이 없음을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설교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사상을 그렇게도 강조하고 높인 이유는 바로 사람이 죄 가운데 죽어 있으며, 완전히 부패해 있고, 어찌할 수 없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죄가 그토록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그 죄의 멍에를 깨뜨릴 수 있으며,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진지하게 믿었던 것이다. 청교도들은, 타락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며 따라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다 받으신다는 것을 가르쳤다.
목회 사역의 임무를 이야기할 때에, 그들은 실질적인 목회에 들이는 시간의 양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을 감독하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였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목회 사역이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이 넘처흘러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목회를 위한 실제적인 갖가지 임무에 들이는 시간들을 절대로 짐으로 여기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잃어버린 자들을 하나님의 교회에 모아들이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에 함께 동참한다는 즐거움이 있었던 것이다.
청교도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 설교'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말씀을 선포할 수 없다고 믿었다. 설교 사역의 수고는 먼저 설교자 자신의 경건을 위한 수고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강단에 대한 청교도들의 사고는 그들의 설교의 방향을 결정하고 설교자의 수고와 노력을 좌우하는 것은 물론, 목회의 임무를 규정짓기까지 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목회의 일이란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임무의 본질적인 부분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설교를 예배의 중심으로 여기고 최우선적인 것으로 여겼으며, 동시에 목회의 여러 가지 임무들은 설교를 양떼들 개개인에게 적용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양떼들을 치는 이 위대한 대리 목자들에게 있어서는 목회의 사역이란 곧 설교에서 선포된 진리들을 그 설교를 들은 이들에게 적용시키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영적으로 감독하는 사역을 그저 바람직한 것 정도로만 생각하지 않고, 신성하고도 정말로 심각한 일로 보았다. 청교도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양떼들을 보호하는 파숫군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런 책임을 감당하는 핵심적인 일은 바로 교회에 속한 개개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었다. "교인들을 위하여 골방에 있기보다 강단에서 교인들 앞에 서 있기를 더 자주 하는 사람은 정말 가엾은 파숫군일 뿐이다"라는 존 오웬의 말이, 청교도 설교자들이 양떼들의 영적인 복지를 얼마나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하겠다.
청교도들은 강단의 임무들을 그렇기 진지하게 여긴 만큼 목회적인 기타 의무들도 똑같이 진지하게 대했다. 목회의 여러 임무들은 강단의 임무들을 개개인에게 적용시키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런 임무들을 수행하는 수단에는 요리문답 공부, 상담, 위로, 교회원 개개인들과 함께 예배를 통해서 함께 사적인 교제를 나누는 일 등이 포함되었다.
청교도들의 사역의 전반적인 특징은 바로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일을 하실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완전히 지치도록 공부하고, 성도들을 돌보는 일에 일관성 있는 왕성한 노력을 기울이며, 자기들 자신의 영적 상태를 끊임없이 살피면서도, 청교도 목회자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 속에 은혜로 역사하시지 않으시면, 그들의 모든 노력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있었다.
목회 사역의 바른 동기는 성공에 대한 기대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회자 개인에게 행하신 일에 대한 사랑의 응답이라는 믿음이다. 바로 이것이 목회 사역을 바라보는 청교도들의 사고의 핵심이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에 대한 사랑의 응답, 바로 이것이 목회 사역의 동기였다는 말이다.
Ⅱ. 청교도 설교와 복음의 문제
청교도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는 만큼 죄에 대하여 반응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본성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신 거룩하신 분으로 보았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부르심을 효력 있게 만드실 수 있으며 또한 그가 자신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렇게 효력 있게 만드셨다고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죄인이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그렇게 신론을 가르쳤고, 현대 전도에서 행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무언가를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인상을 절대로 심어 주지 않았다. 청교도 설교가 전도 설교였던 것은 그들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형편과 하나님의 성품 사이에 무한한 간격이 자리하고 있음을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하남과 화목을 이루려면, 사람이 자기의 영적 파산 상태를 인정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무가치한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청교도들이 죄인을 깨우는 일에서 하나님을 높이 기리는 이유는 사람이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엡 2:1) 그들이 그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청교도 설교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주 자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인도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간다는 것이지, 하나님을 끌어내려서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필요을 맞추어 준다는 것이 아니었다. 청교도들은 사람이란 자기의 진정한 필요를 알지도 못하는 존재라고 믿었다.
청교도 설교의 중심은 하나님과의 화목이었고 거기서 영생이 하나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었지, 영생 그 자치게 복음 선포의 대상은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죄의 끔찍함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고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성령의 중생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나아에게 된 사람에게 목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잘못은 그 죄인에게-그가 아직 자기의 죄도 잘 알지 못하고 있고 그 죄들을 버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죄에 대해서는 이제 잊어버리고 즉시 그리스도를 신뢰하라고 독려하는 일이다. 청교도들은 회개를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요 또한 필연적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청교도는 회개와 믿음을 따로 분리시킬 수가 없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져 역사하지만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나느냐 하는 따위의 문제는 그들에게는 논란거리가 아니었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구원의 확신 문제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권위로 보았으므로,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 거짓된 소망을 갖게 하거나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구주님의 발 아래로 끌어다 놓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청교도들은 모든 신자들 각자가 주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의 의무를 시행하는 가운데 기쁨과 평안과 즐거움을 체험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자신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견고히 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청교도들은 행위에 중점을 둔 믿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회심한 자들에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여 그들의 마음속에서 확신의 열매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확증하라고 교훈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교도들이 실천적인 거룩을 강조하는 이유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마음에 은혜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줄 정도의 거룩성에는 절대로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중생자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도록 하나님 편에서 은혜를 주시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런 일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거룩성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증거였던 것이다.
청교도 설교는 성경적이며 교리적인 동시에, 또한 균형 있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경륜을 온전히 담고 있었던 것이다. 청교도들은 청중에게서 반응이 업을까 두려워하여 어느 본문의 의미를 드러내기를 꺼리는 식으로 행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볼 때에 대다수의 청교도들은 율법의 역사를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에 대해 마음속으로부터 자각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으로 아주 건전하게 이해하였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깨달음이 없이는 복음이 제시하는 모든 은혜들이 가볍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상 이 책의 개략적인 내용을 튐어보았다. 이 책의 제2부는 특히 현대 복음전도의 문제점을 청교도들의 복음에 대한 강조와 대비하여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우리의 서재에 꽂혀 우리의 목회를 기름지게 해 줄 또 하나의 목회의 광맥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걸작이다.
http://lloydjones.org/zbxe/1078
출처 : 예수님없인못살아요
글쓴이 : 예수님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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