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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by 【고동엽】 2021. 11. 13.

제 2강
조직 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이승구 교수
국제신학 대학원 대학교 / 조직신학

들어가는 말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의 종교적 관행과 저책을 비판하고, 특히 교회의 예배와 교회의 통치 방식을 개혁하려고 했던 개신교도들이 비난 어린 어조로 1560년대부터 그렇게 불려지기 시작한 “청교도”(Precisians or Puritans)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영국과 당시 신대륙이었던 미국에서 나타나고 전개된 청교도 운동은 사실 여러 면에서 매우 범위가 큰 운동이다. 따라서 청교도 운동과 사상에 대한 조직신학적 접근은 수많은 책을 쓰도록 만들 것이다. 범위를 좁혀서, 청교도 사상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인다고 해도 결국 다양한 사상이 그 가운데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에 대한 교리에 대해서만 말해도 청교도드 가운데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와 중도적 입장을 지닌 이들(moderate Calvinists), 그리고 알마니안주의자, 또한 그런 차이를 강조하지 않으려는 박스터주의자가 있었다. 예를 들어서, 알마니안주의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었고 많은 알마니안을 요직에 등용했던 찰스 1세를 처형하는 것이 옳았다고 논의한 대표적인 청교도 John Milton은 알마니안주의자였다. 또한 청교도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 미치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이해에서도 상당히 다른 이해가 존재하고 있다. 교회론에서는 청교도들 사이의 의견의 차이가 특히 심했다고 할 수 있으니, 청교도 안에는 국교회주의자와 장로교주의자와 회중교회주의자가 있었다. 예를 들어서, 1640년 11월 소집된 장기 의회에 의해서 교회의 신조와 행정을 위한 규정을 만들기 위해 1643년 121명의 목사와 30명의 성도들로 구성된 자문 위원회 성격의 웨스트민스터 회의(Westminster Assembly)의 구성도 장로파(특히 스코티쉬 컴미셔너즈[Alexander Henderson, George Gillespie, Samuel Rutherford, Robert Baillie], 그리고 영국의 Edwards Reynolds)와 몇몇 독립교회파(Thomas Goodwin, Philip Nye, Jeremiah Burroughs, William Bridge, Sydrach Simpson), 그리고 몇 감독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었음은 기지의 사실이 아닌가? 또한 그들 가운데는 John Lightfoot, Thomas Coleman, Stephen Marshall, 그리고 John Seldon 같은 에라스티안주의자들까지도 있었다. 심지어 한때(1641) Laud 등이 대표하는 주교 제도가 독재의 수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장로교주의를 주장했던 죤 밀턴 같은 청교도는 후에 장로교적 체제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장로”(New presbyter)는 “옛 사제”(old priest)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청교도군의 총사령관(Lieutenant General)이었고 후에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된 올리버 크롬웰은 스스로는 전국적인 장로교 조직이 세워져 이전의 주교 제도를 대신하게 될 것을 염려하는 독립파였으나 그는 온건한 감독제적 청교도 장로교 주의자, 독립파, 심지어 약간의 침례교도들도 자신이 수립하는 새로운 제도권 안으로 포섭해 들었다. 또한 유명한 청교도 목사 리쳐드 박스터(1651~91)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결과로 부과된 전국적 언약에 대해서 자신의 목회하던 키더민스터의 교인들로 하여금 그 언약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였고, 우스터셔의 목사들에게도 그것을 교인들에게 부과하지 말라고 설득했을 정도였다. 그는 장로교파, 독립파, 심지어 감독파들 차이의 차이를 될 수 있는 대로 무시하고, 각 지역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공동의 목회적 사역을 위해 협동을 이루어 내려고 노력한 중도를 중시한 사람(a champion of moderation)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단 하나의 청교도 사상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이런 형편을 잘 표현하는 것은 아마도 패트릭 맥그라뜨의 다음과 같은 표현일 것이다: “(청교도들 사이에는) 무엇이 없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견의 일치가 있었지만,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가 없었다.” 위리엄 플래처도 같은 뜻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혁을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청교도들은 그들이 무엇을 지지하는지를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명확하게 그들이 무엇을 반대하는 지 알았다. 어떤 사람들은 영국 교회 내에서 개혁을 위해 일하기를 원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희망없이 타락했다고 생각한 교회로부터 그들의 모임을 분리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적당히 개선된 주교를 용인할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스코틀랜드나 제네바의 그것과 같은 장로회 조직을 주장했으며, 말없는 다른 사람들은 각각의 회중의 독립성을 지지했다. 그런가 하면 존 로저스 같은 일부 사람들은 오직 명확하게 밝힐 수 있는 종교적 경험을 가졌던 사람들만이 공동체를 받아들였다…(그런가하면) 백스터는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도리에 맞게 선한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지지했다. 어떤 사람들은 유아 세례를 받아들였고, 다른 사람들은 신앙고백을 한 어른들에게만 세례를 주었다. 오늘날 침례 교인들의 기원은 원칙적으로 이러한 급진적인 영국 청교도들 속에 있다.

청교도주의는 이런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일반적 연대와 연합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릴란드 라이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처음부터 그들의 모습에 대해서는 “복잡한 그림”(a chaotic picture)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16세기 영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오늘날의 소위 “복음주의 모자이크”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청교도들의 유대감과 연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훨씬 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다양한 청교도주의를 한 마디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그 범위를 좁혀서 한국 장로교회에 가장 긍정적이 영향을 미칠 수있다고 판단되는 청교도 사상에 대한 몇 가지 논의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즉, 나는 결국 “비록 청교도주의와 칼빈주의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청교도적인 이상은 칼빈 주의자들 내에게 보일 때 가장 잘 이해되었다”는 오웬 채드윅의 표현에 동의하면서, 청교도 사상 가운데서 가장 칼빈주의적인 사상과 실천을 이끌어 내어 그 함의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논문의 일차적인 목적은 청교도 사상 가운데서 가장 칼빈주의적 모습을 보이는 측면을 잘 드러내어 그것의 의미를 밝히는 일을 하려는 것이다(청교도가 모두 다 칼빈주의적이 아니었음을 다시 말한다. 그러므로 이 논문의 논의는 매우 선택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청교도 사상의 한 부분을 깊이 있게 생각하는 것이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청교도 사상내의 다른 여러 측면과 사상적 동향을 비판하는 기능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비판적인 기능은 더 깊은 논의에 의해 보충되어야 할 것이지만 말이다. 요약하여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모든 청교도들로부터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 따라 거룩하게 살려는 열망을 본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다 우리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판단하기에 가장 성경적인 방식으로 제시된 그들의 사상과 실천을 드러내어 그것의 의미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다른 청교도 사상과의 대조를 하며, 그런 대조 작업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청교도의 가장 큰 기여 : 성경 번역과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

청교도들은 무엇보다 먼저 성경을 사랑한 이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청교도주의를 “성경이 모든 것에 중심이라는 운동이었다”고 정의한 릴란드 라이켄의 말은 매우 저확한 말이다. 또한 “초기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하고 묻고는 “그들을 다른 영국 개신교도들과 구별되기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다”고 말하는 데렉 윌슨도 옳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생각하려는 청교도들의 모든 기여는 성경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1565년 Matthew Parker 대감독의 후원 하에 이루어져 1568년에 나온 소위 주고성경(The Bishop’s Bible)보다는 엘리자베뜨 시대의 가장 대중적인 비공식 역본이었던 1560년에 완성된 제네바 성경(Geneva Bible)을 애호했고, 그에 따라 그들의 생각과 삶을 형성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제네바 성경은 William Whittingham의 지도하에서 일단의 탈출자들이 (Marian Exiles)원문에 근거한 학문적 번역을 하고, 많은 주석을 붙여 만든 것이다. 그리고 제임스 1세가 등극할 때 햄프턴 코트에서 와을 알현한 청교도들과의 약속에 따라서(1604), Jhon Rainolds와 같은 청교도를 포함한 54명의 번역자들이 6단위로 나뉘어 옥스퍼드, 캠브리지,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에서 번역하여 빌손 주교(Bishop’s Bible)와 Miles Smith의 마지막 교정을 통해서 본래는 ‘주교 성경’(Bishop’s Bible)을 가볍게 개정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1611년에 그 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번역본으로 완성된 KJV이 세상에 등장하여 그것이 다른 영역본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기여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회의(1643. 7.1 ~1659.2.22)의 산물인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에서도 그들의 성경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 처음에는 39개조 신조를 개정하는 정도의 작업을 하려고 하였으나 새로운 신앙 고백서를 작성할 필요를 느껴 1646년 11월 26일에 의회에 제출된(그리하여 1647년 8월 27일 스코틀랜드 총회에서 받아들여지고, 1648년 6월에 영국 의회에 부분적 수정을 거쳐 받아들인 그러나 영국에서는 한번도 철저히 받아들여진 적이 없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그리고 대소요리 문답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이해를 제시해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어떤 이들이 제기하는 이상스러운 반론과는 달리, 그들은 의도적으로 성경에 대한 고백으로 그들의 신앙고백서를 시작하였다. 그들이 믿는 바의 기초가 성경이며, 앞으로 논의해 나갈 모든 교리에 대한 최종적 판단 근거가 성경임을 분명히 하면서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성경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여기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충실한 청교도들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여기 신학의 인식론적 기초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있다. 모든 신학적 논의는 성경으로부터 시작되고 성경으로 마쳐져야 한다는 그들의 원리가 여기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보기에는 매우 자명한 66권 성경의 각 책의 이름을 열거한 이유도 당시 천주교회나 루터파 신학자들이 오직 이 정경에 속한 책들로부터만 신학적 논의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대한 강한 반대가 숨겨 있는 것이다. 이를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제3항에서는 ‘외경’은 영감된 책들이 아니며 따라서 정경의 일부가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무 권위가 없음을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66권만을 성경에 속한 책으로 너무도 자명하게 생각하는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과연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사유를 성경에 근거하여 전개시키려고 하는가를 심각히 질문해야 한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이 익숙한 신앙의 분위기 가운데서는 성경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 가운데서 1항 마지막에 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지되어 버렸다”는 진술과 6항 중에 진술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아니면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이든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는 말에 우리는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른 부분들도 그렇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제 2항이나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제 3항 등은 개혁파적 이해를 간절히 그러나 온전히 잘 제시한 대표적인 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예정과 관련해서는, 그 회의의 의장되는 William Twisse의 타락전예정설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타락후예정설(infralapsarian)의 입장을 온건히 표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장 뛰어난 부분의 하나는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잘 정리하여 제시한 제 7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라는 용어를 보편화시킨 대표적인 정리라고 할 수 있는 이 부분은 언약 신학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의 논쟁의 맥락에 비추어 보면 제 18장에서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3항에 “이 무오한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은 아니라, 참 선지자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많은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야 이 확신을 갖게 된다”고 진술한 것은 성경과 신자의 경험 모두에 매우 충실한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서 오늘날 새롭게 제시되는 논의의 빛에 비추어 볼 때 강조되어야 할 몇가지 측면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사람과 같은 성정 가지지 않으심에 대한 분명한 진술(Ⅱ, 1)
② 사람이 영혼과 몸으로 구성된 전인임에 대한 진술(Ⅳ, 2,; ⅩⅩⅩⅡ, 1, 2)
③ 언약의 다양성과 연관성을 잘 드러내면서 하는 다음 같은 진술:
“본질면에서 차이가 있는 두 종류의 은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세대에 걸친 하나의 동일한 언약(one and the same under various dispensations)이 있을 뿐이다.”(Ⅶ, 6)
④ 무죄 상태의 인간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묘사: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에 자연적 자유를 부여해 주셨기 때문에 그 의지는 선이나 악을 행하도록 강요되거나 또는 그 어떤 본성의 절대적 필연성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Ⅸ, 1).
“인간은 무죄한 상태에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원하고 행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가변적이어서(yet mutably) 인간은 그런 상태에서 타락할 수 있었다.”(Ⅸ, 2)
⑤ 전 생애에 걸친 성화 과정에 대한 정확한 진술:
“ 이 성화는 전인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지만 금생에서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모든 부분에 얼마간의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로 인해 계속적이고 화해할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나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는 것이다. 그 전쟁에서 그 남아있는 부패한 부분이 당분간은 상당히 우세할지 모르나,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계속적인 힘이 공급되므로,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 되고, 그리하여 성도들이 은혜 안에서 자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ⅩⅢ, 2, 3)
이를 믿음과 관련하여 다시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 믿음은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약한 믿음도 있고 강한 믿음도 있으며, 자주 여러 모양으로 요동하고 약해질 수도 있으나 승리를 얻는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서는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한 확신을 얻는 데까지 자라기도 한다”(ⅡⅤ, 3)
⑥ 기독교적 선행의 능력에 대하여:
“선행을 행하는 신자들의 능력은 결코 그들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들이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으려면 그들이 이미 받은 은혜에 더하여, 그들 안에서 성령의 기쁘신 뜻을 원하고 행하도록 하는 성령님의 실제적 영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성령님의 특별한 지시가 없이는 아무런 의무를 실천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오해하여 나태에 빠져서는 안되며,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불일듯하는 데 힘써야만 한다”(ⅩⅥ, 3)
⑦ 기도에 대하여:
“기도가 열납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해와 경외심과 겸손과 열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하되, 만일 소리를 내어 하는 경우에는 알 수 있는 말로 해야한다” (ⅩⅩⅠ 3)
⑧ 결혼과 남녀의 관계에 대하여:
“결혼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돕도록(the mutual help of husband and wife) 제정된 것이다. 또한 합법적인 방법으로 인류가 번성하고 경건한 자손들을 통해 교회가 번성하고, 부정을 막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ⅩⅩⅣ, 2)
⑨ 사후 상태에 대하여:
“의인의 영혼은 죽는 순간에 거룩함으로 완전케 되어 최고의 하늘(the highest heavens)에 들어가 거기서 빛과 연관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린다. 그러나 악인들의 영혼들은 지옥에 던져져서 거기서 고통과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서 지내며,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몸에서 분리된 영혼들이 있게 되는 이 두곳 외에는 성경은 다른 아무것도 인정하고 있지 않다.”(ⅩⅩⅩⅡ, 1) 또한 이후에 있을 마지막 날의 부활과 심판에 대한 언급에도 주의해야 한다.

2. 청교도적 예배의 개혁과 갱신

비단 칼빈 주의적 청교도들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노력의 하나는 자신들이 이해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예배를 개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다른 분야보다도 무엇보다 먼저 특별히 예배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전의 칼빈 주의자들의 노력과 보조를 같이 한 청교도들의 이런 예배 개혁은 기존의 예배에서 비성경적이라고 판단된 부분을 제거하는 노력과 긍정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예배를 제시하는 적극적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2-1. 청교도들이 개혁하려고 한 예배의 요소들

청교도들은 이전 칼빈주의자들의 강조점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면서 세례 예배 때에 신부가 아기의 머리에 십자가를 긋는 것, 대부 대모를 세워 세례식을 진행하는 것, 산파들이 세례하는 것 등을 비판하면서 개혁하려고 했다. 또한 주교가 견신례를 하고서야 성찬에 참여시키는 것, 성찬 때에 제단(altar)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반복하여 제사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무릎을 꿇고서 받는 것, 성체에 대해서와 제단에 대해서 꿇어 절하는 것, 십자가에 대해서도 그리하는 것,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 예배를 인도하는 자가 중세 때의 독특한 의복(medieval! vestments)을 착용하고 인도하는 것, 예배당에 십자가를 놓는 것, 예배 때 촛불을 밝히는 것과 향을 피우는 것을 의식적(ritual) 행위로 만들어 시행하는 것, 심지어 성인들의 상에 대해서도 무릎을 꿇는 것 등의 중세적 사제주의에서 나온 미신적인 것들로 여기면서 거부하였다. 이와 함께 숙련된 성가대, 벨을 울리는 것, 오르간 연주 등을 예배중에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루터와 칼빈의 가르친 성경적 원리에 따라서 청교도들은 ‘제단’(altar)이라는 말을 폐하고 성찬상(table)이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제사 드린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으며, 제사장(사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혼인식도 성례가 아님을 강조하고 심지어 반지 끼우는 것도 불필요하다고 했을 정도이며 혼인식보다는 정혼을 좀더 강조하고, 장례 때에도 아무런 다른 의식을 행하지 않고 바로 장사하기를 선호했다. 천주교회에서 개발된 목회적 의식들을 모두 미신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 가운데서 폐하라고 한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키는 것”에 대해 충실하기 위해 그 동안 발전되어 거룩한 날들로 지켜 오던 40여일의 성자들의 날들과 100여일의 금식일들을 6일 동안 힘써 일하라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폐하고, 심지어 성탄절도 지킬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리쳐드 그린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들의 부활절, 우리의 승천절, 우리의 성령 강림절은 매주일이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예배당 창문의 스테인드 글래스를 금했다.
이제까지 열거한 것들을 종합해서 말한다면, 청교도들은 이전의 제네바의 개혁자들의 전통을 따르면서 연합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영국 교회의 기도서(the Prayer Book)에 나타난 천주교적 전통을 버려 버리려고 했다. “의식들(ceremonies)이 없는 곳에는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 켄터베리 대 주교 Richard Bancroft에 반해서, 캠브리지 출신의 목사로서 Dry Drayton과 런던에서 목회했던 청교도인 Richard Greenham은 “의식이 많을수록 진리가 적은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청교도들은, 윌리스턴 워커가 잘 요약한 바와 같이, “로마적인 미신의 잔재라고 생각하는 것을 예배에서 제거시키고, 모든 교구에 진지하고 영적인 설교를 하는 목사를 영입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이 파괴적이거나 부정적인 이들이었기 보다는 보다 긍정적 작업에 관심을 가진 이들로 보여져야 한다. 그들이 이런 제안을 한 것도 결국 교회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2-2. 예배 개혁에 대한 청교도들의 적극적(긍정적) 노력

청교도들은 미신적인 의식의 수행 대신에 하나님 말씀의 공적이고도 연속적인 설교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것이 “사람의 구원을 위한 일상적인 수단과 방도”라는 것을 강조했다. 청교도들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원문에 근거한 자연스러운 해석에 근거해서 교리와 실천적인 적용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성경에 대한 자연스러운 해석으로부터 찾아 전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는 당대의 상황가운데서는 매우 중요한 공헌이었으니, 예를 들어서 엘리자베뜨 1세는 온 나라에 설교자가 3-4명이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에게는 설교자와 설교 사역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말로 하는 것이나 글로 하는 것이나 설교는 청교도들에게 생명이었다.”는 뉴(New)의 말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월져는 설교자가 “16세기 청교도의 영웅”이었다고도 표현했다. 이것은 청교도 설교자들이 열심히 자신들의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것도 표현하지만 동시에 일반 성도들이 때로는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 먼곳까지 가서 주일이나 주간 중에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힘썼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일리의 주교인 Richard Cox에게 자신의 유일한 관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자신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라고 써서 그를 감동시킨 바 있는 청교도 목사 Richard Greenham이 캠브리지 근처의 Dry Drayton에서 목회할 떼(1570~1588) 캠브리지 학생들과 멀리서 온 방문객들이 늘 그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고 한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설교할 사람들을 잘 훈련할 수 있는 교육기관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엄격한 훈육 가운데 개신교 설교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Walter Mildway경이 1587년에 세운” 캠브리지의 엠마뉴엘 컬리지 창설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심지어 그들의 교회 건물까지도 설교를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그래서 제임스 화이트는 청교도 예배당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깨끗하고 조명이 잘 된 예배당은 청교도 예배의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였으니, 그것은 아무런 방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예배에 대한 규정적 원리’를 말하고 확정한 것이 예배에 대한 청교도들의 가장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오직 성경으로부터만 예배의 요소들을 찾아 그에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전에 성경에 없는 데도 사람들이 만들어낸 예배의 요소들을 전부 거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이 친히 제정하셨고, 그 자신의 계시된 뜻에 의해 한정되어 있다”고 믿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교도는 “성경은 하나님의 예배에서 실천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안에 규정되지 않은 그 어떤 다른 방법이 그 어떤 방식으로 제안되어도 그것은 옳지 않은 예배의 방법이라고 한 것이다: “말씀되어진 말씀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불법적인 것이다.”
이런 규정적 원리를 성경으로부터 찾아 제시하려고 한 대표적인 예의 하나를 우리는 토마스 카트라이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예배의 구체적인 것들이 그에 따라 규정되어야만 하는 다음 네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

(1) 첫째는 그 누구도, 특히 하나님의 교회에 손상을 주어서는 안된다.(고전 10:32)
(2) 둘째는 모든 것이 질서 가운데서 그리고 자연스럽게(comeliness) 행해져야 한다(고전 14:40)
(3) 셋째는 모든 것이 건덕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전 14:26)
(4)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

청교도들은 그런 성경적 원리에 충실하게 자신들이 제안하는 예배 모범을 제시하기도 했다. 1644년 작성되어 의회에 제출되어 1645년 1월에 영국 의회가 기도서를 폐지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예배 모범은 이전의 영국 교회의 기도서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성경의 규정적 원리에 충실한 것이면서 또한 한편으로는 양심의 자유를 충분히 고려한 예배 모범의 제시였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배의 순서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해 주고 있지 않으므로 이런 점에 대해서는 성경의 원리에 근거한 모범을 제시하여 이에 따라 주님을 경배하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의 예배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의 예배는 (1) 성경에 대한 깊은 존중과 (2) 경배자들의 상태에 대한 적합성에 대한 고려가 작용하고 있었으며, (3) 그들이 예배를 즐겼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그리고 특히 오늘날에는 청교도들이 말하는 규정적 원리에 따른 예배는 지루하고 생기가 없으며 성도들의 상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전혀 즐길 수 없는 고역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청교도들은 같은 말이 반복되고 의식 중심의 당대의 예배에 비해 청교도적 예배가 하나님 말씀에 일치하는 것이므로 귀한 것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그 예배를 즐겼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심지어 홀톤 데이비스 같은 이는 청교도 예배가 “순수성, 단순성, 그리고 경건함으로 특징지워진다”고 하면서 “그것은 오순절적 열심과 사도적 교회의 기대를 재창조하려는 시도였다”고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청교도의 예배나 그들이 존중한 성경적 원리에 따른 예배가 생기 있고, 사람을 살게 하며, 주께 더 헌신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 교회 제도의 청교도적 개혁

다음으로 상당히 많은 청교도들이 문제 삼은 것이 교회 제도였다. 특히 감독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화 제도가 과연 성경적인지를 그들은 묻기 시작했다. 물론 초기에는 주교 제도의 성경적 근거를 의문시하는 목소리와 주교 제도를 용인하는 것이 공존했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청교도적인 사람들이 감독(주교)의 자리에 올라 그런 식으로 교회를 개혁할 생각도 하였으나, 뛰어난 청교도들이 주교의 자리를 거절하고 후에는 정부가 청교도들을 주교 제도를 사용하여 청교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자 주교 제도에 대한 비판은 더욱 강해졌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모든 설교자들의 동등성을 선호했다. 즉, 그들은 “영적 직책 맡은 자들의 본질적 동등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당대나 지금의 주교제도를 주장하는 이들의 입장과는 대착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주교 제도의 신봉자의 한 사람인 William Laud가 “주교는 사도들의 계승자로서 그 권위를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다”고 주장했던 것과 대조하면, 청교도들은 칼빈주의에 충실한 조직관을 드러내면서 모든 직분의 동등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함께 마태복음 18:17 등과 같은 말씀에 근거한 교회의 치리에 대한 강조가 청교도들의 교회 제도 개혁의 큰 관심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왕이라도 이런 영적인 치리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모든 점에서 청교도들은 성경에 순종하려고 했고, 자신들이 그 어떤 신학적 운동을 따른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저 성경에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청교도 운동에 반대하는 이들은 우리가 신약성경의 교회 형태를 분명하게 알 수 없으며 증거가 모호하므로 신약 성경으로부터 어떤 모델을 찾으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는 주교 제도가 최선의 교회 통치라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런 주장을 하던 휘트기프트(1530~1604)나 후커(1547~1616)의 입장에 따라 중도파인 오늘날의 성공회주의의 기초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이런 입장이 과연 성경에 충실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의 청교도들의 기여를 생각할 때는 초기 복식 논쟁의 논쟁자들이었던 Laurence Humphrey(1527~1590), Thomas Sampson(1517~1589), 캠브리지의 레이디 마가렛 신학 교수로서 사도 행전 강의를 통해 하나님의 법에 기초한 장로교적 교회 체제를 제안하면서 각 교구내 치리를 위한 장로의 선출, 회중에 의한 목사의 선택, 그리고 대주교좌나 부주교좌 등의 폐지와 성직의 동등성을 주장한 Thoams Cartwright (1535?~1603), 1572년에 “오직 주께서 친히 그의 말씀에서 명령하신 것들만을 교회 안에 있게 해달라”고 국회에 청원한 “An Admonition to the Parliament”를 쓴 것으로 알려진 런던의 목사들이었던 (퓰리탄의 총무라고 불리운) Jhon Field( ~1588), Thomas Wilcox(1549? ~1608), Cartwight가 쓴 의회에 대한 두번째 권고, 1572년 런던 근처 Wansworth에서 처음으로 교구 노회를 조직한 일, 그리고 1574년 “A Full and Plain Declaration of Ecclesiastical Discipline”이라는 팜프렛을 낸 캠브리지의 Walter Travers(1548?~1635)등의 입장을 깊이 고려해 볼 만하다. 그리고 웨스트 민스터 회의의 결과로 제시된 장로교적 제안들과 1646년 3월에 의회에서 의견의 일치에 이른 영국 전역에 걸쳐서 노회를 세우기로 한 것 등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때부터도 혹시 출교 당한 이들은 의회 위원회에 호소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올리버 크롬웰 사후 복잡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George Monch가 인도하는 스코틀랜드 군대의 도움을 입은 장기 의회가 1660년 3월 16일에 스스로 해산하면서 교회 안에 온전한 장로교 제도가 도입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나타내 보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이런 제도가 온전하게 시행된 일이 없다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

4. 청교도 강의 혹은 강해의 전통

소위 청교도 강해의 전통은 (1) 교회 개혁의 중요한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교도들의 관심과 (2) 그런데 모든 목회자들이 다 신실한 강해자이지 않다는 당대의 현실 가운데서 나온 일종의 고육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청교도들은 때때로 강해자들을 따로 선정해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했다. 특히 소위 담임 목사가 (그 당시의 용어로는 십일조를 받는 사제가) (적어도 청교도들이 듣기에는)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상황일 때에는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경비를 따로 내면서까지 이런 청교도 강해의 전통을 만들고 감당한 것이다. 이들 강해자들은 회중에 의해서 초빙되어서 교회의 정규 예배 시간이 아닌 시간에도 강의를 하곤 했었고, 청교도들은 이런 강의를 매우 존중하며 그 일을 위해 재정적 부담을 기꺼이 감당하면서 그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또 한편으로는 당대 제도화된 교회의 :규정된 방식으로는 성례를 양심적으로 집행할 수 업는 설교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게 해준 효력이 입증된 청교도들의 방식이었다.” 이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에 대한 열심과 이 제도가 신축성 있게 사용될 수 있는 제도 였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개 이런 설교 예배는 상당히 길고 깊이가 있었으며 대개 이웃의 청교도 회중의 목사님들과 회중들이 많이 참가했다고 한다.
이는 청교도 설교나 청교도 사상을 표현하는 논집들의 출판과도 깊이 연관시켜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 교구에서 19년 동안 사역하다가 제임스 1세에 의해서 더 이상 설교하지 못하도록 조치된 John Dod는 한 시골 지주에 의해서 Northamptonshire에 있는 다른 교구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되었으며, 그의 정확하고 위트 있는 설교는 인쇄되어 그가 1645년 죽기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5. 청교도적인 삶

청교도의 삶에 대한 이해도 성경에 따라 그것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청교도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모두 옮은 것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삶은 아주 풍성한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 나름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의 삶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숨막히는 삶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 말씀에 의해 삶 전체를 조망하며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삶의 17세기적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삶을 신약 성경에 대한 순종 가운데서 개혁하도록 담대하게 줄기차게” 논의했다. 17세기말의 청교도였던 George Swinnock은 그리스도인은 “예배당뿐만 아니라 상점도 거룩한 땅으로” 여기는 이라고 했다 여기서 초기 개혁자들의 사상을 잇는 소명론이 강조된 것이다. 1584년 캠브리지 Christ’s College의 fellow로 선임되고 1602년에 죽은 청교도 신학자 윌리엄 펄킨스의 성경에 근거한 실천적 신학 제시의 한 부분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확인하도록 하는 소명론이 그 하나의 예이다. 이렇게 모든 척면에서의 거룩한 삶을 추구하면서 청교도들은 흔히 다른 이들을 비판하는 바리새적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다른 이들보다는 자신들을 정죄했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능력 주시기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가정과 그 이웃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정예배가 매우 중요했고, 가정 예배가 이들의 기독교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고 유지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마치는 말

이 논문을 시작하면서 처음에 강조한 바를 다시 상기시킨다면 청교도 운동은 다양한 성향과 사상과 분위기를 가진 운동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다양한 결과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청교도 사상을 재조명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첫째로 청교도 사상 가운데서 우리가 생각할 때 가장 성경적인 사상을 잘 드러내고, (혹시라도 그런 것이 있다면) 오늘날 더 밝히 이해된 성경의 빛에서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칼빈주의적 입장에서는 “칼빈주의 청교도의 제왕 존 오웬”이라는 제목의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는 성경에 대한 청교도들의 헌신과 사랑, 성경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믿는 바를 고치고, 이를 위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교훈을 정확히 표현해 보려고 한 것, 또한 성경에 근거해서 예배와 교회 조직과 삶을 개혁하려고 한 것들을 강조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개혁파적인 청교도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으로 강조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1) 성경에 대한 진정한 사랑, 성경의 사람이 되는일(성경적 뿌리와 토대내림)
(2) 성경에 충실하게 우리의 믿는 바와 생각하는 바를 고쳐나가는 일, 이를 위해서 우리의 믿는 바를 가장 성경적으로 표현해 보는 일(신학적 관심)
(3) 성경에 근거해서 우리의 예배를 성경의 요소들로부터만 구성하되, 살아계신 하나님께 구속의 감격을 가지고 예배하는 일의 회복(성경적 구속적 예배의 회복)
(4) 성경에 근거한 교회 조직, 교회 회원 의식, 직원들에 대한 의식의 회복(성경적 교회 제도의 회복)
(5) 성경적인 삶을 실천해 나가는 일(성경적인 삶의 회복)
(6) 그리고 이를 돕기 위한 성경적 설교와 강의제도의 활용, 기본적으로는 각 회중이 목사님들로부터 정상적인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의 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사용하던 강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모든 교회가 다 같이 잘 성장해 가는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다양한 입장의 청교도들이 같이 있으면서 좀더 성경적인 방향에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던 바를 우리는 의미있게 보아야 한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청교도들로부터 우리 자신의 주장의 근거만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되고, 청교도들이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청교도로서 그 때나, 역사의 한 페이지에 다 같이 있을 수 있었던 그것을 의미있게 보아야 한다. 또한 그들이 그저 같이 있기만 하여 결국 온세상에 좀더 효과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만 것에 유의해서 서로가 자신의 주장만을 하는 입장으로서는 역사적 사명을 다하지 못할 것임에 대한 의식과 아울러서, 그들을 절충해 보려고 한 영국 교회의 중도의 길이 결국 교회를 이롭게 하지도 못하고 교회의 개혁도 온전히 이루지 못했음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노력의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의 몇가지 필요한 것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들 각자가 가장 성경적이려고 노력해 나간다
(2)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이들을 그들이 스스로 성경적이려고 하는 한 그들대로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때 그들이 진정으로 성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이렇게 성경적이기를 원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식을 가지면서 일정한 일에 함께 협력해 가며, 온 세상이 좀더 성경적인 방향에 가깝게 나아가도록 하는 일에 함께 힘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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