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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제14강 (김세윤 교수)

by 【고동엽】 2021. 11. 12.

바울신학 제14강

 

지난 시간 줄거리

 

유대교에서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로 실체화하고 인격화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 묵시문학에서 소위 이위일체론적 신 개념을 살펴보았다.

 

묵시문학에서의 이러한 신학적인 발전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보자 개념이 발달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신성에 동참하는 소위 Apotheosis에 대한 관심-이스라엘이 궁극적인 구원이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상속받아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됨에 있음을 나타내는 신학적인 발달이라고 하는데까지 했었다.

 

③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이스라엘인들

 

유대교에 있어서 또 하나이 발달은 모든 이스라엘이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내에서 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이스라엘인들과 언약을 지키지 않는 패역한 이스라엘인들을 구분하고 전자-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이스라일인들에게-에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제한한다.

 

이런 경향이 유대교에서 점차 발달을 한다.

 

그래서 가령 지헤문서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 언약에 신실하도록 -언약에 신실한 것이 어덯게 표현되냐면 율법을 잘 지키므로 표현됨-곧 율법을 잘 지키도록 깨우침을 받는 자들을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이 곧 의로운 자들이고 그리고 이들이 하나님이 아들이다.

 

지혜로운 자들=의로운 자들=하나님의 아들

 

가령 외경중에 ‘Jesus ben Sirach1)’는 책이 있다. Sirach은 원래 사두개 출신 서기관이었다. BC 2세기(190년경)에 쓰여진 서기관 작품인데 이 Jesus ben Sirach의 손자가 그의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쓴 책이다. 이것이 지혜서로 분류된다. 이것은 외경중의 하나이다.

 

Jesus ben Sirach 책 4장 10절 또는 ‘wisdom of Solomon’ 라는 책이 있다. 이 책 2:18/5:5 등에 지혜에 의해서 언약에 신실하고 율법을 잘 지키도록 깨우침을 받은자들을 지혜로운 자들,의로운 자들이라고 하고 이들만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칭호를 받고 주의 종들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솔로몬의 지혜 2:13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묵시문학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가령 단 7장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종말로 받는다. 곧 인자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의 대표로 나온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는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고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에 충실한 자들이다. 이들이 하나님 우편이 높임 받아서 인자의 하나님 아들됨에 참예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또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유대 신학자 philo의 작품 중에 ‘congi Ling’ 라는 책이 있는데 이것이 ‘언어의 혼돈’이라는 책이다. 이 책 46장에 의하면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그는 맏아들인 λογος의 품안에 안겨야 할 것이다. 이 λογος는 하나님의 첫 아들로서 천사들 중에 제일 우두머리-그러기 때문에 천사장-이고 그의 이름들 중 시작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의 말씀이기도 하고 그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기도 하고 또는 보는자 곧 이스라엘이기도 하다.’ 아주 중요한 text이다.

 

λογος=맏아들=시작=하나님의 이름(말씀)=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스라엘

 

중요한 것은 λογος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아담이다. 그래서 바울의 아담 기독론을 논할 때 항상 인용되는 말이 philo의 'confi Ling' 46장이다. philo도 벌써 아담 시작이 있었다는 식으로 해서 이런 것이 아주 중요한 text dlek.

 

여기에서 관심은 λογος가 하나님의 맏아들인데 시작이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축4:22-23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다름 아닌 λογος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필로가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 중에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에 합당하지 못한 자들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λογος의 품에 안겨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됨을 얻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적인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림받을 만한 자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림받은 자들은 λογος의 를 받은 자들이다. 곧 지혜 문서의 지혜를 가리킨다. 지혜문서에서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지혜의 근본이 잠언에 의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다.

 

이 말은 언약을 지킨다는 소리이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하나님 됨을 인정하고 언약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왜 이것이 지혜로운 일인가? 천지를 지으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힘에 덕입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성공적인 삶이 있겠는가? 지혜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곧 야웨의 올바른 언약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philo에 있어서 λογος는 지혜와 거의 상호교환할 만한 개념이다. 앞의 지혜 문서-Sir이나 Wis,Sol-에서는 “지혜를 받아서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의 관계 속에 있어야 하나님 아들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philo는 우리에게 λογος를 받아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됨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또 유대 후에 신비문서들에서는 이적을 행하는 자들이나,또는 환상가운데 하나님을 보는 신비로운 체험을 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유대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앞에서 살펴본 나단의 전승이 계속 유지된다. 삼하7:12-14의 나단의 신탁의 전승이 유대교에서도 계속 유지된다. 그래서 메시야의 하나님 아들됨이 특별한 의미로 계속 천명이 된다. 그래서 가령 쿨란에서 발견되 조그마한 문서 하나가 있다. 그 문서는 4Q Florilogium 이라는 것인데 이 조그마한 문서는 구약의 여러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text들을 가령 삼하 7:12-14의 text와 시편 2:7-예수의 세례 때 울림과 시편110:1-신약성경 중 가장 많이 인용된 ‘주께서 내 주께 말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나님 우편에 승천 받음을 이 시의 성취로 본다. 또 기타 몇 곳에 구약을 상호 연관시켜서 종말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문서가 4Q Florilogium 이다. 그런데 여기 -삼하7:12-14-에서 바로 이 text가 다윗의 아들을 하나님께서 종말에 일으켜서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우시의 집을 견고하게 짓는다. 곧 다윗 왕조를 견고하게 재건한다는 것이다. 나단의 예언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구야에 있어서 중요한 메시야 사상의 뿌리라고 했는데 그것이 쿰란 공동체에서 아주 생생하게 전승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메시야-다윗의 아들-가 특별한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또 IQS의 2장 11절 이하 또 하나 중요한 text가 4Q ps DanAa2) 라는 괴상한 부호가 달린 문서인데 이것은 4Q 243 이라고도 한다. 이 문서-text가 4Q ps DanAa가 상당히 재미있는데 이 문서에서 단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 같은 이-가 지극히 높으신 이-하나님의 성도들,종말의 성도들의 예표-의 성도들이 그들의 대표인 하나님 아들로서 한 사람의 같이 나타나는 이를 통해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는 단 7장의 예언을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text가 4Q ps DanAa로 해석한다.

 

단7장⇒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하나님 나라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이??

 

그래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덕을 보게 하는 분이 바로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석해 놓고 있다.

 

그래서 최근가지도 가령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은 전적으로 헬라적 배경을 가진 헬라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으로 한 신앙고백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게 이상한 것은 구약에서 분며히 왕을 하나님의 아들이로 지칭하는데 어째서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하지 않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드디어 이와 같은 쿰란 문서들에서 메시야를 하나님이 아들로 지칭하는 예가 최근에 발견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 나단의 신탁의 해석상에서 메시야,다윗의 아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더 이상 유대교에서는 메시야를 하나님 아들로 지칭하는 전통이 없었다고 쿨란문서가 발견도니 이후로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쿰란 문서들이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할 때 그것을 나단의 신탁에 근거한다. 그래서 가령 마14:61에 예수의 재판때에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묻는다. ‘네가 메시야 곧 복받으실 이-하나님의 아들-의 아들이냐’고 묻는다.

지금까지 많은 비평가들은 이 말은 전적으로 역사상이 없다고 보았다.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하는 예가 유대 전승에서 발견이 안되었는데 어떻게 해서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네가 곧 메시야 복받으실 이의 아들이냐’로 묻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나주에 헬라 그리스도인들이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왜? 팔레스틴 유대문서에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하는 증거가 나온다. 그런데 메시야를 하나님이 아들로 지칭하는 것도 다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서 하는데 바로 예수의 재판 때에 대 제ㅏ장의 질문도 나단의 신탁에 의거해서 질문한 것이다.

 

(총괄)

 

헬라 문서와 구약과 유대교에 있어서의 여러가지 하나님 아들에 대한 배경을살펴 보았다. 한편 헬라 문서에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이 우리 기대와는 별로 아나온다는 것이다. 반면에 구약과 유대문서에는 하나님 아들이 중요한 개념이다. 그래서 신약에 있어서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전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에서 그 배경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 예수와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인식하고 혹 그렇게 지칭하셨나? 지금까지 배경을 했고 지금은 예수와 하나님 아들을 하겠다. 여기서는 이른바 간접적 증거에서 간접 기독론을 살펴 보겠다. 예수가 진짜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렀나를 볼려면 방법론적으로 간접 기독론을 통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보통 신약신학 1에서 자세히 다룬다. 예수의 자기 이해-예숙께서 자기를 뭘로 보았느냐? 어떻게 인식했느냐? 자기를 어떻게 계시하셨느냐?를 따져보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두세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간접 기독론 또 하나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선포했는데 그 하나님 나라 선포에 반영된 자기 이해가 무엇이었난? 자기가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았느냐? 하나님 나라 선포한 권위가 어떤 성질의 것이고 무엇이라 보았느냐? 또 하나는 예수의 자기 칭호-그 사람의 아들 또는 인자-를 불렀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주로 세가지 방버븡로 지금까지 많이 써왔다. 예수의 자기 이해를 예수 스스로가 뭘로 보았느냐? 그래서 신약신학1-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는 이런 것을 자세히 다룬다.

 

1)간접기독론

 

간접기독론을 하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우리 공관복음-요한복음 제외-에 예수께서 당싱 유행하던 메시야적 칭호들을 꺼린다(적용을 잘 안하신다). 남들이 예수에게 당시 유행하던 칭호-가령 다윗의 아들, 다윗의 씨,하나님의 아들,메시야-들로 예수께 신앙고백하면 그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스스로는 이런 칭호들을 적용안하신다. 스스로는 항상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메시야적 칭호들을 배제한다. 둘째로(더 중요한 이유) 비판학자들이 예수는 스스로를 메시야로 보지 않았다.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이후 그의 추종자들-그리스도인들-이 비로소 예수를 베시야로 인식하고 예수의 메시야됨을 당시 유행하던 유대교적 칭호와 나중에 헬라 종교들이 신에 대한 칭호-주,하나님의 아들-등으로 예수에게 신앙고백을 했다.

 

초대교회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 예수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의 입속에 자기가 그리스도됨,또는 하나님의 아들,주됨 등을 가끔 집어 넣었다. 이렇게 회의적으로 주장하므로 이것을 반박하려면 그냥 그렇지 않다고 자꾸 반박하면 토론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칭호들이 일체 안나온 중립적인 자료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즉 우리에게 알려진 유대교나 헬라 세계에서의 메시야나 신에 대한 칭호가 예수에게 전혀 적용되지 않는 얼핏 보기에 예수의 메시야도미괴 아무 관계 없는 중립적인 자료들만 살표봄으로서 이런 자료들이 혹 예수의 어떠한 자기 이해를 독자들에게 보여 주느냐를 살펴보아 가지고 예수께서 스스로 메시야로 인식했나 안했나를 규명하여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래서 쓰는 방법이 간적기독론이다. 메시야적 칭호들이 직접 나오는 자료는 일단 제쳐놓고 메시야적 칭호들이 안 나오는 자료들을 살펴봄으로 간접적으로 예수의 메시야적 자기 이해를 규명하는 방법이다.

 

I.Howard Marshall의 “The Origins of New Testmet”(신약 기독론의 기원)을 읽오보면 자세히 썼다.

간접기독론에서 다루는 것은

 

(1)어법??αμεν

??αββα

 

①αμεν

 

어법(말버릇) 중에서 αμεν 사용법과 독특한 하나님에 대한 칭호 αββα 이다. I.H. Marshall의 책과 김세윤 교수의 신약신학에서 잘 다루어 놓았다. 이 두마디에 있어서 예수의 어법이아주 독특하다. 그래서 예수삭 이 두 말을 쓴 것이 독특하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이 두말을 번역하지 않고 히브리어로 또는 아람어로 그대로 표기하였다. 그런에 우리 성경에는 다 번역해 놓았다. 가령 αμεν을 진실로 다 번역해 놓았다. 예수께서 “Amen I your 에게” 말한다는 중요한 선언을 할 때 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αμεν을 꼭 우리와 같이 썼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 끝에 또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 끝에 또는 기도 끝에 응답으로 썼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하나님이 말씀 또는 기도 끝에 응답으로 썼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하나님의 말씀, 또는 우리가 기도가 진실하다. 확실하다. 사실이다는 의미로 αμεν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αμεν이라는 말은 진실하다 확실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응답용으로 사용했다. 유대인들은 우리와 같이 아멘을 사용했다.

 

그런데 예수는 독특하게 αμεν을 먼저 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고 중요한 말을 선포한 것이다. 아주 독특한 말이고 이렇게 말한 사람이 없다. 예수 전에도 없었고 예수 후에도 없었고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도 따라서 하지 않았다. 따라서 안한 것이 아니라 못했다.

 

첫째로 어법이 독특하다. 이 독특한 어법을 쓸때는 아지 이해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어법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이 어법과 형식이 비슷한 것과 비교해 보애야 하는데 그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말투(어투)이다. 선지자들 보통 말할 때 “야훼의 말씀이 또는 야훼의 영이 내게 임했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임한 말씀 또는 야훼 영이 자기에게 계시하는 말씀을 선포했다.

 

αμεν과 선지자들이 선포가 넓게 보면 형식적으로 비슷하다. 중요한 말씀의 선포에 서문을 단 것이다. 그러나 그 낸용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선지자들의 말투의 의도는 자기가 선포하는 말에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그 권위를 말하고 있는 인간 자기에게서 청중의 관심을 여호와에게 돌림으로서 확보할려고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의 “αμεν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는 서문에 의도는 정반대로 청중의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 끄는데 있다. 여호와에게 돌릴 것도 없이 자신의 권위로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선포하는 말에 진리됨, αμεν됨을 보장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가 비교해서 예수가 선지자의 계시의 권위를 능가하는 권위를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신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선지자는 자신의 신적 권위를 야훼에게 호소했는데 예수는 자기 스스로 진리됨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계시에 있어서의 신적 권위를 은근히 나타낸다. 그래서 H.Schlier-Kittel 사전의 αμεν에 대한 Article을 쓴 사람-라는 사람은 αμεν이란 말 속에 신약기독론이 다 들어 있다고 말한다.

 

②αββα

 

예수께서 하나님께 독특하게 αββα라고 부른다.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출 4:23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맏아들임” 이것이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말읻.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부자간이 관계라는 것은 언약의 관계를 나타내는 metaphor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됨은 언약신학의 표현으로서 구약에서 아주 중요한 metaphor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유대인-은 하나님을 한번도 αββα라고 부르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피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대칭어-전능하신 이,거룩하신 이,천지를 지으신 이,천지의 주재자,임재하시는 이,영광-를 많이 개발하였다. 특히 기도 언어였는데 하나님을 부를 때에 하나님에 대한 대칭어를 많이 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αββα라고 부른 예가 일체 없다. 왜 그러냐면 αββα라는 언어가 원래 우리말 “아빠”와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의 아비에 대한 부름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귀에는 이 말이 아주 경망스럽게 들린 것이다. 하나님께 감히 함부로 부를 없다는 것이다. 다만 예수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 αββα라는 말이 우리말 “아빠” 보다 확대해서 쓰여졌다. 원래 근원은 똑같다. 그래서 어린 아이만 쓴 것이 아니고 장성한 아들이 늙은 아버지에게도 아빠라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나 스승(랍비)에게도 “아빠”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그때 “아빠”라는 말은 전부 항상 아주 밀접한 친근감으로 쓰였다. 그리고 종경심,의존심,경외심,순종심 등을 묶어서 나타내는 칭호가 αββα라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께서 독특하게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αββα라고 불렀다.

 

둘째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αββα로 부르도록 가르쳤다3).

 

세째로 그러나 항상 예수는 자기와 제자들을 구분했다.

 

자기와 제자들을 통틀어 싸 잡아서 하나님을 예수는 항상 “우리 아빠”하지 않았다. 나의 아빠, 너희들의 아빠로 구분했다. 이와 같은 예수의 아빠 사용의 3가지 관찰점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는 스스로를 독특한 하나님의아들로서 그의 제자들-추종자들-에게 하나님 아들됨을 증계해 주는 자라는 자기 이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추종자들을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는 자라는 자기 이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 예수의 αββα 가르침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심지어 롬8:15,갈4:6에 헬라말을 쓰느 로마에 그리고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아람어 αββα라는 말을 쓴다. 이것이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예수로부터 왔기 때문). 에수의 족특한 어법에서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 되게 하고-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부요함을 덕입어 살 수 있는 사람되게 함-하나님을 우리에게 절대로 계시하는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다.

 

(2)예수께서 용서해 주는 권위 주장(막2:10).

 

이것은 하나님의 대권자로서의 자기 이해를 나타내는 것이다. 죄용서는 하나님만 하시는 것인데 예수께서 죄 용서하는 권위를 주장한다. 곧 하나님의 대권자로서 자기 이해를 나타내고 자기가 죄의 용서를 선언한 자들은 곧 하나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의 관계 있음을 의도하기 위해서 예수가 항상 회개하고 그를 믿고 따르는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그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됨을 말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항상 잔치로 비유했다. 그 잔치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고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들어오라고 초대한 뒤에 그 초대에 응한 자들은 예수께서 항상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래서 그들의 죄가 용서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잔치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부요함에 참예하게 될 것을 극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일련의 죄를 용서해주는 권위를 주장하고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잔체를 베풀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대권자로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게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아들들 되게하는 것이라는 자기이해를 나타낸다. 그리고 간접 기독론에 다른 요소들인 예수가 모세보다 더 위대한 권위를 주장하고 하는 것은 αββα와 다 연결되지만 이상의 것으로 충분하다.

 

2)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선포했는가-를 조목조목 설명한 뒤에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의도가 무엇인가?- 신약신학 1에서 아주 자세히 다룬다-의도는 죄인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초대장 발부를 말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와서 하나님 백성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이 되라는 초대장 발부이다. 또는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가 내 백성”이라는 것이 언약의 형식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단의 사람들을 택하여서 “너희가 나의 백성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제부터 너희 하나님 노릇 해 주겠다”로 약속하는 것이 언약이다. “내가 너희들의 하나님으로서 너희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복주고 구하겠다 즉 너희들에게 하나님 노릇 해주겠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제 나의 백성으로 나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나에게 순종하며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였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대신 우상을 의존하기도 하고 앗수르가 위협하면 애굽에 의존하고 애굽이 위협하면 바벨론에게 의존하는 짓을 하다가 하나님 백성 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래서 새 언약을 세운 것이다. 새 언약을 세운 것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고 초대하고 또는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곧 그의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에 자기를 받침으로 우리를 실제로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예수이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의 선포는 약속이요, 초대이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약속의 성취이다. 그러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나타나는 결과가 무엇인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되게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 아래 살 수 있는 것이다.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 아래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이전된 하나님의 백성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십자가의 죽음은 궁극저긍로 우리를 하나님 백성-하나님의 아들들-되게 함에 목적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되려면? 하나님의 아들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의 상속자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하나님 나라로서는 하나님이 베푸는 잔치로 비유해서 하나님이 베푸는 부요한 잔치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다 같은 그림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해 줌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나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아들이나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나 다 똑같은 그림이다. 이것을 해주는 것이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하는 구원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나타난 자기 이해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하나님 아들들-되게 해 주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앞에서 말한 간접 기독론의 αββα라는 기도와 똑같다. αββα 기도에 나타난 예수의 자기 이해는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추종자들을 하나님 아들들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피조물의 제한성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제한성 때문에 우리 인생은 항상 결핍 상태에 있다. 우리 인생의 근본 문제가 결핍이다. 시간이 짧다. 짧은 지혜,조그만 능력,조그만 사랑 등 인간의 근본문제가 결핍성에 있다. 여기서 모든 불안,갈등,두려움 등 모든 인간의 문제가 온다. 그러니까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해서 얻는 삶을 영생이라고 한다. 우리의 결핍된 부족한 자원들로 이루어지는 것을 삶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을 병이 든 거지 같은 삶이다.

 

그것이 비해서 하나님의 부요함-전지하심,전능,영원,완전사랑-으로 이루어진 구성된 삶은 완전히 신적인 삶일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구성된 삶이기 때문에 신적인 삶인 것이다. 이런 삶을 성경에서는 영생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 되어서 그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됨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 아들들 되어서 신적인 삶을 살게 될 때에 피조물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Apotheosis라고 한다. 즉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됨인데 이스라엘이 이것을 받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그들의 숙명이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해서 하나님과 같이 됨을 말하다. 그것을 에수가 성취해 준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도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삶 곧 영생에 참여하게 하는 자라는 자기 이해를 하였다.

 

의도⇒초대⇒하나님의 백성⇒약속⇒십자가⇒대속,새언약 제사⇒새로운 하나님의 백성⇒결과

 

3)예수의 자기 칭호(그 사람의 아들-인자)

 

예수께서 자기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에 의도는 무엇이고 그 뜻은 무엇인가를 여기서는 간단히 결론만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가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단7장에 쓰여 있음-에 대표로서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αββα라고 부르며 그의 사랑과 부요함에 힘입어 살 수 있게 하는 자라는 듯으로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간접 기독론에서 살펴본 바오 같이 예수의 αββα라는 말,예수의 자기 이해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하나님 자녀들-되게 해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덕입어서 살 수 있게 하고 그래서 신적인 삶에 참여하게 하는 자라는 것이다.

 

4)예수에게 있어서 나단의 신탁에 근거한 시험.

 

예수에게 있어서 나단의 신탁에 근거한 시험이 여러번 왔다. 곧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들되는가 하는 시험이 예수에게 여러번 왔다.

 

광야에서의 시험이 “네가 하나님이 아들이거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것이 예수의 시험이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구문은 막12:35과 그 이하에 쓰여진 메시야의 다윗의 아들됨에 관한 예수의 논쟁이다.

 

예수께서 당시의 정통 서기관-신학자-들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서기관들은 나단의 신탁-삼하7:12f-에 근거해서 “메시야는 다우시의 아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시 110:1을 인요하면서 다윗이 여기에서 메시야를 “나의 주”라고 한다. 그래서 유대교의 고정된 이해에 의하면 앞선 것이 높다 .그러면 다윗의 아들 보다는 다윗이 앞선다. 그러니까 다윗이 높아야 한다. 그런데 다윗이 시편 110;1에 메시야를 “나의 주”라고 높인다. 그러니까 분명히 다윗보다 더 높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보다 뒤진게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이게 알쏭달쏭한 말이다. 예수가 나단의 신탁을 부인하는 것인가? 나단의 신탁을 부인해서 그곳에서 유래하는 전통 메시야사상-메시야는 다윗의 아들-을 부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으로는 부족한다는 것인지. 메시야를 기껏해서 다윗의 아들 쯤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다윗의 주라고 예수가 주장할려고 하는 것이다. 이 논쟁에 담긴 예수의 자기 이해가 무엇이냐? 여기서 적어도 한가지는 확인할 수 있다. 다윗의 주라는 것이다. 그럴려면 적어도 하나님 아들 쯤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논쟁도 예수의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됨을 암시한다. 다윗의 아들로서 이스라엘 왕위에 오르는 자로서의 의미로서는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나단의 신탁이다. 다윗의 아들을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 백성 위에 하나님 대신 전통성으로 가지고 합법성을 가지고 통치하는 자라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그가 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의 등극식에 항상 이스라엘 왕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예수는 지금 이 말에서 그 정도가지고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왕으로서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보다 더 독특한 의미로에 하나님 아들됨을 은근히 주장한다. 다윗의 주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원수들을 평정하는 자로서 하나님 아들됨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칭호가 나오지 않는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아들이라는 칭호가 나오는 곳이 두세곳이 있다. 이런 자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 직접적으로 아들이라는 칭호를 쓰는 자료들)

 

①마11:25-27

 

여기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있는데 25절에 αββα라는 말이 나온다. “전지의 주이신 아빠여 내가 당신에게 감사함으로 부르짖습니다” “이것들(ταυτα)을-해석하기 어렵다-지혜 있고 이해한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숨기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계시하는 것을 감사합니다” “아빠여 이것이 당신이 기뻐하는 뜻입니다” 해놓고는 자신(예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αββα라는 말로 표현했다. 하나님을 αββα로 부를 수있는 자이기 때문에 독특한 하나님 아들과의 관계로 표현했다. 27절에 “모든 것들이 나의 아버지로부터 나에게 위임되었다” 그러니까 지가(예수)가 하나님을 αββα로 부를 수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전권대사:모든 것이 나에게 위임되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27절에 αββα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했다. 아들 외에는 또 아무도 αββα를 알지 못하는데 여기에 예외가 하나 있다. 아빠에 대한 계시를 받은 자만 아빠라고 말한다.

Q

αββα ??????????????????????????⇒아들

아들 ??????????????????????????⇒αββα

 

도표에서는 아빠와 아들간이 상호 앎(mutual knowledge)을 말한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하나님을 안다는 말이다. αββα가 아들을 알고 아들은 αββα를 안다. 이것이 배타적인(exclusive)-다른 존재는 모른다. αββα만 아들을 알고 아들만 αββα를 안다.-관계이다. 이들의 아주 독특한 배타적인 상호 앎의 관계-자기와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다른 어떤 존재에 의해서도 나누어지지 않는 독특한 관계를 말한다. 그런데 그 앎이라는 것은 union(하나됨)-밀접한 관계-이다. 그런데 예외는 아들에 의해서 αββα에게 계시를 받은 자만 αββα라고 한다,. 그런데 아들이 이렇게 αββα를 계시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αββα를 알게 할 수 있는 이유는 27절 전반부-모든 것을 위임 받음-에서 αββα의 전권을 위임-그의 전지전능,완전한 사랑-받았기 때문에 아들이 이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αββα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들-하나님의 전권대사-을 봄으로서 αββα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자기가 독특한 관계를 가진 하나님 아들-다른 어떤 존재와도 나눌 수 없는-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라는 자기 이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한동안 E.Norden의 영향을 받은 Bultmann 같은 사람은 눅10:22/마11:27 말을 요한복음적인 자료가 어떻게 해서 공관복음에 떨어진 운석이라고 표현하였다. “요한복음이 하늘에서 공관복음의 땅에 떨어진 운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이런 말투는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자주 대하는 말투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에는 전혀 이런 말투가 없다. 여기 -마11:27/눅10:22-만 독특하게 나온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하늘에서 공관복음의 땅에 떨어진 운석이라고 표현하다. 이것은 전적으로 헬라적인 신비주의 곧 상호 앎을 통한 하나됨 사상을 나타내는 헬라적인 신비주의이다. 가령 요한복음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이런 것은 헬라적인 신비주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런 말을 했을리가 없다는 식으로 이 말의 진짜성을 부인했다. 이런 사람-Norden,Bultmann-들은 대게 헬라 문서만 조금 알고 유대교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유대 문서들을 진짜 잘 아는 사람-T.W. Manson, J.Jeremias-들은 이말(마11:27/눅10:22)이 완전히 셈족적 성격을 강력히 증거했다4).

 

J.Jeremias에 의하면 예수께서 세례 때에 메시야로 소명받을 때에 계시의 일부가 이것(셈족적인 성격)이다. 그래서 이것의 진짜성을 굉장히 강조했다. 그런데 Jeremias의 토로이 조금 잘못된 것은 이때의 αββα와 아들을 독특한(고정된)의미로 보지 않고 하나의 비유-예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유로 보았다-보았다. 그래서 a father,a son으로 해서 부정관사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the father,the son 이 아니고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아는 것이다. 여기에 숨어 있는 그림은 고대사회에서 직업전수의 그림이다.

 

a father---------------- a son

the father the son

 

가령 요한복음 5장에도 나온다. C.H. Dodd가 잘 지적했듯이 고대 사회에서 직업 전수할 때 아버지가 일생동안 닦은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안가르쳐 준다. 아들에게만 고스란히 전스한다. 그러니까 아버지만 아들을 안다. 아들만 αββα의 전권을 고스란히 위임받아 가지고 αββα의 기술을 전적으로 안다. 그래서 아들과 아버지의 직업 전수에 있어서의 관계는 배타적 관계이다. 이것을 예수께서 자기와 하나님과 독특한 그림으로 쓰고 있다고 J.Jeremias는 말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H.Marshall의 중요한 artide이 있다. 이 때 부정관사의 a가 아니고 the son으로 보아어 한다고 H. Marshall은 굉장히 강조ㅎ나다. M.Hengel도 Marshall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런데 Jeremias 책을 읽으면서 이 점을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런데 Jeremias의 발견에 덧붙여서 W.Grim이 마11:25-27까지 또는 30절까지를 아주 의미 깊에 해석한 책을 하나 출판했는데 Grim에 의하면 마11:25-27까지는 단 7:19-23에 근거하고 있고 예수의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낸다.

 

최근에 Jeremias나 Grim의 연구로 이말(a father,a son)이 헬라 세계의 신비주의를 반영하는가짜 예수 말이 아니라 완전히 셈족성격-셈족언어-이 잘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만이 할 수 있는 진짜 예수의 말인 것이 증명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 말씀(마11:27/눅10:22)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 있는 분으로 하나님을 유일하게 계시할 수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자가 디ㅗ도록 하는 자라는 것이다. 곧 하나님을 독특하게 αββα로 부른자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들들되게 하는 독특한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여기서 잘 나태내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아들이라는 말이 직접 쓰인 자료이지만 이 자료는 진짜이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의 자기 이해를 직접 잘 나타낸 자료라고 말할 수 있다.

 

②막12:6

 

이 말씀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포도원의 주인으로서 이스라엘 지도자들-포도원 농부-에게 열매를 구하기 위해서 종-선지자-들을 보냈다. 악한 농부들이 주인에게 세금을 안 바치려고 종들을 때려서 보내 버린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낸다. 그러니까 농부들이 멀리서 아들을 보고 “아들이 오는 구나” 저자는 상속자라 저자를 죽이면 포도원이 다 우리 것이다. 이것은 다시 갈릴리에 농업제도의 상황을 아주 잘 반영한 비유이다. 갈릴리의 농장이 많은 경우 이와같이 소작농의 경우였다. 대 지주는 도시-예루살렘-에 살고 가난한 농부들은 소작농을 했는데 가끔 소작농들이 반란을 일으켜 상속자를 죽여 없애면 그 땅이 자기들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 자세한 해석이 M.Hengel의 책중에서 농업 제도와 관련된 언급이 있고 또 K.Snodgrass의 좋은 책히 있다. 시카고에서 가르치는 K.Snodgrass의 “The parable of the wicked peasant”라는 좋은 책이 있다. 하여간 비유에서 예수는 은근히 자신을 아들이라고 나타낸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이스라엘 지도자-포도원 농부-들에 의해서 죽음을 당할 것을 나타내고 그러나 곧 예수는 시편 118편을 인용한다. 그래서 건축자들에 의해서 버리진 돌이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될 것을 곧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되고 높임받을 것을 예고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비유의 진위서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는 비판학자들도 참 많으나 최근에 M.Hengel 이나 K.Smodgrass등의 연구로 이 비유의 진짜성이 많이 증명이 되었다. 그래서 이 비유도 예수가 굉장히 직접적으로 분명히 자신을 선지자들과 구분되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고 있다.

 

③막13:22

 

여기서 언제 종말이 임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아들도 천사들도 모른다. 단지 아버지만 안다고 한다. 여기서도 내가 하나님 아들이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어느 곳에서도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하지는 안는다. 마11:27/막12:6/막13:32 하지 않는다. 그러나 들을 구 있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론

 

예수께서 어떻게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는가를 말했다. 다음에는 예수가 어떻게 다른 존재-귀신들,제자들-들에 의해서 하나님 아들로 고백되었는가? 이것에 대해서 예수가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하고 그 다음에는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었는가? 하고서 바울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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