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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의 인간학적 삼위일체론
- 『신앙론』- 을 중심으로
Ⅰ. 들어가는 말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현대신학에 크고 혁명적인 기여들을 한 신학자이다. 그럼에도 그는 각종 오해와 더불어 가장 강하고 폭넓은 비판에 직면했는데 특히 삼위일체에 대한 것이 가장 크다. 삼위일체와 관련된 슐라이마허의 접근에 대한 비판들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비판은 그의 교의학적 체계의 완성인 신앙론에서 확인되는 삼위일체에 관한 언급들의 내용과 그 언급들이 보여주는 그 전체 저작 안에서의 위치를 고려할 때,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의 의의를 과소평가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비판은 슐라이어마허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은 사벨리우스주의, 또는 심지어 유니테리어니즘에 차라리 가깝다는 것으로서, 즉 그의 삼위일체 이해가 각 위격들을 계속 달라지는 하나님의 활동의 각 측면들을 가리키는 단순한 이름들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Ⅱ. 배경적 고찰
1. 생애와 사상적 배경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가 현대의 정신과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시대를 살았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과 과학을 중시하면서 성서의 기록이 과학과 충돌할 때는 성서가 종교적 경험에서 나온 인간의 오류라고 보았다. 오직 성서의 권위를 두고 해석하던 것이 이제 해석하는 인간에게 중심이 옮기어간 것이다. 성서가 인간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서를 해석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된 상황은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이 가장 분명하게 대표하는 바대로, 주관적 경향이 신앙과 기독교 교리의 기초임을 확신하는 근대 개신교 신학으로의 이행을 가져왔다. 계몽주의 이후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인간이성이 최고법정이 되었다. 존재하는 대상에 인간의 생각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해야 그 대상은 존재한다. 이것을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 전환이라 한다. 데카르트 이후 칸트에게 그 절정을 이르게 되는데 칸트는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주관적으로 생각해도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곧 순수 이성의 한계를 지적했다. 칸트의 이러한 인식론적 제한은 고전적인 형이상학적인 신학과 계몽주의의 자연종교 둘 다 불가능한 것을 의미하며, 결국 칸트에게서 종교는 도덕으로 환원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슐라이어마허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것을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이성이 하나님에 대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면 어떻게 종교를 변증할 수 있겠는가? 둘 중에 하나다. 칸트처럼 종교는 도덕으로 가든지 아니면 폐기해야 한다. 여기서 종교개혁자들의 개인의 체험을 중시한 것을 바탕으로 계몽주의의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의 주체와 결합하여 새로운 신학적 방법론을 도출한다. 그것이 의식-경험이다. 칸트가 종교를 도덕의 자리 곧 의지의 자리에 두려고 했다면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의 감정의 자리에 두었다.
한편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에게 경건주의적 신앙 유산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모라비안 형제단으로부터 경건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14살이 되던 때에 회심을 체험했다. 슐라이어마허가 종교의 본질을 감정으로 간주한 것이나 특히 그의 『신앙론』에서 소위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주장한 것은 모라비안 경건주의 영향이 크다. 또한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에 대항해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나 당시의 철학, 문학, 음악, 그리고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대의 낭만주의자들은 18세기 계몽주의 연장선상에 서 있었지만, 계몽주의나 합리주의의 기계론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직관과 느낌, 그리고 상상력 등에 더 관심을 두었다. 낭만주의는 자연을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물질로 보는 기계론적 물리학적 관점을 거절하며, 그 대신 자연의 모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이 현존하며 자연을 새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역사는 만물 가운데 현존하는 신적 정신에 의해 움직여 나아가는 유기적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칸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무한한 간격을 말했다. 이원론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길을 발견했는데 스피노자의 유기적 일원론의 철학에서 칸트의 오류에 대한 수정의 길을 발견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오직 한 실체인 하나님만이 존재하며, 이 실체는 하나이며 나누어지지 않으며 무한하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바로 이 한 실체의 변형일 뿐이다. 곧 모든 것은 한 실체의 변형이며 이 실체가 바로 하나님이다. 소위 범신론이다. 범신론은 모든 개체들의 총계를 말하며 결국 모든 개체들은 분리할 수 없는 동일성의 원리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는 범신론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2. 종교론(1799)과 신앙론(1821-1822)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초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 『종교론』에서 종교의 본질을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종교의 본질은 사유도 아니고, 행위도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직관이란 우주의 본성과 실체에 대한 파악 내지는 인식이라기 보다는 우주의 행위를 받아들이고 체험하는 것이다. 이 직관은 필연적으로 감정과 연결되는 것으로 하나님인 우주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체험하는 전 인격적인 측면을 뜻한다. 기독교는 최고의 우주 직관에 도달한 종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구원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들 중의 종교이다.
종교는 애당초 사유와 행위의 차원에 구속되지 않으며, 또한 철학적 사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종교는 이론도 아니고 실천도 아닌 제3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종교의 본질은 경건이고, 경건의 감정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만일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참 종교인이다. 그는 기독교의 유일한 본질을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 만들어 버림으로 어떤 신학 이나 신조들에 부여하는 객관적인 가치를 부인한다.
슐라이어마허의 명성을 보다 항구적인 것으로 만든 다른 주요 저작은 그의 『신앙론』이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의 종교 의식을 다른 형제들의 종교 의식으로부터 구별시키고, 또한 그것을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말하는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생각은 도리어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구원이란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의 인격 됨에 감명을 받음으로써 죄를 더 잘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감명을 받은 인간은 더욱 죄를 멀리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인간은 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변화된 삶은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의 초점은 성서로부터 떠나 기독교 공동체로 옮겨졌다. 여기서 그는 기독론을 교회론과 결합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교회는 가톨릭에서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개인적 경험을 가진 기독교 공동체는 성서와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를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 정의할 때, 이 감정 또는 이 직접적인 종교적 경험이 개인에게 있어서 참된 종교적 권위다. 그에게 있어서 교리와 신조는 단지 이 감정에 대한 표현과 해석에 불과하다. 교리와 신조는 단지 파생물로서 상대적이고 변할 수 있는 반면에 경험은 심오하고, 절대적이다. 따라서 슐라이어마허에게 교회 안에서 궁극적 권위는 교회, 성서, 신조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궁극적 권위는 교리, 성서와 신조를 낳은 종교적 경험 안에서 발견된다.
Ⅲ. 슐라이어마허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비판들
1.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했는가?
술라이어마허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비판을 받는 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취급을 그의 『신앙론』의 맨 끝에 위치시킴으로써 마치 그의 교의학 체계 전체에 첨부된 하나의 부록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 교리는 실제적 가치를 거의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것이 신앙의 본질과 거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확신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슐라어어마허는 “우리는 이 교리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별로 없는데, 그 이유는 이 교리가 개신교회가 세워질 때 별다른 새로운 고려를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삼위일체론은 모든 기독교 종교적 경험에 전제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슐라어어마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이 믿는 자의 직접적 자기-의식으로서의 경험에 대한 현대적 의식 개념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판단은 슐라이어마허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해석들에 있어서 가장 공통적인 의견인 것이다. 그의 『신앙론』에서 최고 존재 내의 영원한 상호 구분, 즉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회의를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다. “결과는 친숙한 이원론, 즉 본질의 연합과 위격들의 삼위성이다. 그러나 최고 존재 내의 영원한 상호구분에 대한 가정은 종교적 의식에 관한 진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그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곧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체험은 중요하지만 그 하나님이 삼위로 구분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함께 우리의 자기-의식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식만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내의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되는 것으로의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신앙 진술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굳이 사변으로부터 그것을 빌려와야 한다.” 슐라어이마허는 현대 신학의 두 가지 명제를 세웠다. 첫째, 종교적 지식이 어떤 믿을 만한 외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오직 개인적 경험에서 발견될 수 있다. 둘째, 교리들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되거나 또는 ‘믿기 어렵다’고 오늘날 말해지는 그런 사실에 대한 진술들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개인적 경험에 대한 상징적 표현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초자연적 사건들은 실제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들 또는 상상들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경험이야말로 그 앞에서 모든 객관적인 신앙 진술(성서,신조들,또는 어떤 다른 근거이든지)이 자신을 정당화해야 하는 심판관이다. 어떤 교리나 가르침이 개인적 경험에서 체험된다면 받아들여질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제쳐두든지 거부된다. ‘우리가 죄가 많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 하는 것은 개인적 경험으로 의미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네 분, 다섯 분 또는 여섯 분 이 있다고 느끼는 것보다 세 분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 하나의 기독교인의 공통적인 경험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전적으로 구원에 집중되어 있으며 구체적으로 말해서 구원 받은 자의 자기-의식의 내용들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는 구원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는다. 그러한 교리는 하나님을 경험 한데서 나온 교리가 아니라 단지 몇몇의 진술을 조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슐라이어마허는 사벨리우스주의자인가?
삼위일체와 관련된 슐라이어마허에 또 다른 비판은 삼위일체 대한 그의 설명이 사벨리우스주의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해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성과 일치성 사이의 간격의 문제에 대해 논하면서 결국 그 중간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세 위격들 모두 안에 있는 신성은 하나의 신적 본질의 신성과 동일한 것이라는 입장이 위격들의 삼위성과 본질의 일치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을 지배하는 규칙이어야 한다”그런데 “한편으로 더욱 실재론적으로는 우리는 그 일치를 세 위격 모두에 공통적인 본질로서 상위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 경우에 위격들의 구분은 하위의 것으로 드러나 뒤로 떨어지게 되면서 신적 군주만 명백해진다. 또는 다른 한편으로 더욱 유명론적으로는 우리는 그 삼위성을 상위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그 경우에 추상적인 것으로서의 그 일치성은 뒤로 떨어지게 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종교적 의식을 위해 직접적 존재를 가지는 것은, 성령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신성, 즉 아들인 그리스도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가 전면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이것은 결국 ‘삼신론으로 떨어지게 되는 위험처럼’보였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는 그것은 계시의 직접적인 내용도 아니고 신앙의 직접적인 표현도 아니다. 기껏해야 삼위일체 교리는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한 방법으로, 즉 사벨리우스주의 형태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차리리 하나의 가능성인 것이다.
Ⅳ. 슐라이어마허의 인간학적 삼위일체론
슐라이어마허에게 삼위일체론은 적어도 그의 신학에서 기독교 진리의 판단기준이 되고 있는 “기독교적 자기-의식에 관한 직접적인 관심은 아니다” 즉 삼위일체는 기독교적 의존 경험에 필수적인 “감정”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신자가 구원 받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과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교회의 공통의 영에 대한 숙고의 결과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의 중심은 구원론이고 그것은 바로 기독론 중심이다. 그의 기독론에 따르면 슐라이어마허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의 진정한 인간’으로 확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과 같으나 완전한 신-의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든 인간과 구별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신성이란 표현 대신에 신-의식이란 말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의식을 지닌 원형적인 인간으로 보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성령론을 신자들이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참여하는 교회라는 콘텍스트에서 분석한다. “성령은 신자들의 공통의 삶 안에서 삶을 살아 있게 하는 공동의 영의 형태로 의 ‘신적 본질과 인간 본성과의 연합’이다” 다시 말해, 신자들의 공통의 종교적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성령의 사역의 한 형태이다. 즉 신학은 일종의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 가지는 개인적 의식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변증적 언어로 진술인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삼위일체론이 기독론과 성령의 조화라고 할 때 그 공통분모는 신적 본질과 인간적 본성의 연합이다.
곧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신과 인간의 만남이다. 성령론도 이와 같다. 슐라이어마허가 삼위일체를 그의 신학에 마지막에 둔 것은 우리와 신과의 관계를 기술한 다음, 신적인 것 그 자체를 향하여 선을 그어 나아다가 마침내 삼위일체론적 진술에 다다른 것이다. 그는 한 하나님이 창조자, 구속자, 그리고 성화자이며 이것은 모든 삼위 하나님께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Ⅴ.나가는 말
당시의 계몽주의와 칸트의 철학 그리고 과학적 사고가운데, 이 도전들 앞에서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와 교회를 변호하고 싶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이성의 한계 안에서 규정짓고, 나아가 자신의 실천이성 비판에서 종교를 윤리의 틀로서만 해석하려고 했던 칸트를 겨냥하고, 심지어 종교를 도그마적인 규범이나 형이상학적 지식으로만 풀어내고자 했던 17세기 정통주의를 겨냥함으로써 종교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신자의 근본적인 경험과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교회의 공통의 영에 대한 숙고의 결과이다. 삼위일체는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와 기독교인들 안에 있다는 진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대한 신학들이 삼위의 상호성에 대한 주장에 치중하고 있다면,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적 경험 사이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하는데 치중했다.
[출처] 슐라이어마허의 인간학적 삼위일체론|작성자 kaistq
- 『신앙론』- 을 중심으로
Ⅰ. 들어가는 말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현대신학에 크고 혁명적인 기여들을 한 신학자이다. 그럼에도 그는 각종 오해와 더불어 가장 강하고 폭넓은 비판에 직면했는데 특히 삼위일체에 대한 것이 가장 크다. 삼위일체와 관련된 슐라이마허의 접근에 대한 비판들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비판은 그의 교의학적 체계의 완성인 신앙론에서 확인되는 삼위일체에 관한 언급들의 내용과 그 언급들이 보여주는 그 전체 저작 안에서의 위치를 고려할 때,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의 의의를 과소평가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비판은 슐라이어마허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은 사벨리우스주의, 또는 심지어 유니테리어니즘에 차라리 가깝다는 것으로서, 즉 그의 삼위일체 이해가 각 위격들을 계속 달라지는 하나님의 활동의 각 측면들을 가리키는 단순한 이름들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Ⅱ. 배경적 고찰
1. 생애와 사상적 배경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가 현대의 정신과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시대를 살았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과 과학을 중시하면서 성서의 기록이 과학과 충돌할 때는 성서가 종교적 경험에서 나온 인간의 오류라고 보았다. 오직 성서의 권위를 두고 해석하던 것이 이제 해석하는 인간에게 중심이 옮기어간 것이다. 성서가 인간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서를 해석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된 상황은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이 가장 분명하게 대표하는 바대로, 주관적 경향이 신앙과 기독교 교리의 기초임을 확신하는 근대 개신교 신학으로의 이행을 가져왔다. 계몽주의 이후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인간이성이 최고법정이 되었다. 존재하는 대상에 인간의 생각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해야 그 대상은 존재한다. 이것을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 전환이라 한다. 데카르트 이후 칸트에게 그 절정을 이르게 되는데 칸트는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주관적으로 생각해도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곧 순수 이성의 한계를 지적했다. 칸트의 이러한 인식론적 제한은 고전적인 형이상학적인 신학과 계몽주의의 자연종교 둘 다 불가능한 것을 의미하며, 결국 칸트에게서 종교는 도덕으로 환원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슐라이어마허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것을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이성이 하나님에 대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면 어떻게 종교를 변증할 수 있겠는가? 둘 중에 하나다. 칸트처럼 종교는 도덕으로 가든지 아니면 폐기해야 한다. 여기서 종교개혁자들의 개인의 체험을 중시한 것을 바탕으로 계몽주의의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의 주체와 결합하여 새로운 신학적 방법론을 도출한다. 그것이 의식-경험이다. 칸트가 종교를 도덕의 자리 곧 의지의 자리에 두려고 했다면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의 감정의 자리에 두었다.
한편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에게 경건주의적 신앙 유산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모라비안 형제단으로부터 경건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14살이 되던 때에 회심을 체험했다. 슐라이어마허가 종교의 본질을 감정으로 간주한 것이나 특히 그의 『신앙론』에서 소위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주장한 것은 모라비안 경건주의 영향이 크다. 또한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에 대항해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나 당시의 철학, 문학, 음악, 그리고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대의 낭만주의자들은 18세기 계몽주의 연장선상에 서 있었지만, 계몽주의나 합리주의의 기계론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직관과 느낌, 그리고 상상력 등에 더 관심을 두었다. 낭만주의는 자연을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물질로 보는 기계론적 물리학적 관점을 거절하며, 그 대신 자연의 모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이 현존하며 자연을 새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역사는 만물 가운데 현존하는 신적 정신에 의해 움직여 나아가는 유기적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칸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무한한 간격을 말했다. 이원론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길을 발견했는데 스피노자의 유기적 일원론의 철학에서 칸트의 오류에 대한 수정의 길을 발견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오직 한 실체인 하나님만이 존재하며, 이 실체는 하나이며 나누어지지 않으며 무한하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바로 이 한 실체의 변형일 뿐이다. 곧 모든 것은 한 실체의 변형이며 이 실체가 바로 하나님이다. 소위 범신론이다. 범신론은 모든 개체들의 총계를 말하며 결국 모든 개체들은 분리할 수 없는 동일성의 원리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는 범신론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2. 종교론(1799)과 신앙론(1821-1822)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초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 『종교론』에서 종교의 본질을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종교의 본질은 사유도 아니고, 행위도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직관이란 우주의 본성과 실체에 대한 파악 내지는 인식이라기 보다는 우주의 행위를 받아들이고 체험하는 것이다. 이 직관은 필연적으로 감정과 연결되는 것으로 하나님인 우주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체험하는 전 인격적인 측면을 뜻한다. 기독교는 최고의 우주 직관에 도달한 종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구원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들 중의 종교이다.
종교는 애당초 사유와 행위의 차원에 구속되지 않으며, 또한 철학적 사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종교는 이론도 아니고 실천도 아닌 제3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종교의 본질은 경건이고, 경건의 감정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만일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참 종교인이다. 그는 기독교의 유일한 본질을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 만들어 버림으로 어떤 신학 이나 신조들에 부여하는 객관적인 가치를 부인한다.
슐라이어마허의 명성을 보다 항구적인 것으로 만든 다른 주요 저작은 그의 『신앙론』이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의 종교 의식을 다른 형제들의 종교 의식으로부터 구별시키고, 또한 그것을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말하는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생각은 도리어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구원이란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의 인격 됨에 감명을 받음으로써 죄를 더 잘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감명을 받은 인간은 더욱 죄를 멀리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인간은 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변화된 삶은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의 초점은 성서로부터 떠나 기독교 공동체로 옮겨졌다. 여기서 그는 기독론을 교회론과 결합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교회는 가톨릭에서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개인적 경험을 가진 기독교 공동체는 성서와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를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 정의할 때, 이 감정 또는 이 직접적인 종교적 경험이 개인에게 있어서 참된 종교적 권위다. 그에게 있어서 교리와 신조는 단지 이 감정에 대한 표현과 해석에 불과하다. 교리와 신조는 단지 파생물로서 상대적이고 변할 수 있는 반면에 경험은 심오하고, 절대적이다. 따라서 슐라이어마허에게 교회 안에서 궁극적 권위는 교회, 성서, 신조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궁극적 권위는 교리, 성서와 신조를 낳은 종교적 경험 안에서 발견된다.
Ⅲ. 슐라이어마허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비판들
1.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했는가?
술라이어마허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비판을 받는 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취급을 그의 『신앙론』의 맨 끝에 위치시킴으로써 마치 그의 교의학 체계 전체에 첨부된 하나의 부록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 교리는 실제적 가치를 거의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것이 신앙의 본질과 거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확신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슐라어어마허는 “우리는 이 교리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별로 없는데, 그 이유는 이 교리가 개신교회가 세워질 때 별다른 새로운 고려를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삼위일체론은 모든 기독교 종교적 경험에 전제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슐라어어마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이 믿는 자의 직접적 자기-의식으로서의 경험에 대한 현대적 의식 개념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판단은 슐라이어마허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해석들에 있어서 가장 공통적인 의견인 것이다. 그의 『신앙론』에서 최고 존재 내의 영원한 상호 구분, 즉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회의를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다. “결과는 친숙한 이원론, 즉 본질의 연합과 위격들의 삼위성이다. 그러나 최고 존재 내의 영원한 상호구분에 대한 가정은 종교적 의식에 관한 진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그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곧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체험은 중요하지만 그 하나님이 삼위로 구분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함께 우리의 자기-의식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식만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내의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되는 것으로의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신앙 진술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굳이 사변으로부터 그것을 빌려와야 한다.” 슐라어이마허는 현대 신학의 두 가지 명제를 세웠다. 첫째, 종교적 지식이 어떤 믿을 만한 외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오직 개인적 경험에서 발견될 수 있다. 둘째, 교리들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되거나 또는 ‘믿기 어렵다’고 오늘날 말해지는 그런 사실에 대한 진술들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개인적 경험에 대한 상징적 표현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초자연적 사건들은 실제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들 또는 상상들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경험이야말로 그 앞에서 모든 객관적인 신앙 진술(성서,신조들,또는 어떤 다른 근거이든지)이 자신을 정당화해야 하는 심판관이다. 어떤 교리나 가르침이 개인적 경험에서 체험된다면 받아들여질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제쳐두든지 거부된다. ‘우리가 죄가 많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 하는 것은 개인적 경험으로 의미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네 분, 다섯 분 또는 여섯 분 이 있다고 느끼는 것보다 세 분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 하나의 기독교인의 공통적인 경험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전적으로 구원에 집중되어 있으며 구체적으로 말해서 구원 받은 자의 자기-의식의 내용들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는 구원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는다. 그러한 교리는 하나님을 경험 한데서 나온 교리가 아니라 단지 몇몇의 진술을 조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슐라이어마허는 사벨리우스주의자인가?
삼위일체와 관련된 슐라이어마허에 또 다른 비판은 삼위일체 대한 그의 설명이 사벨리우스주의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해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성과 일치성 사이의 간격의 문제에 대해 논하면서 결국 그 중간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세 위격들 모두 안에 있는 신성은 하나의 신적 본질의 신성과 동일한 것이라는 입장이 위격들의 삼위성과 본질의 일치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을 지배하는 규칙이어야 한다”그런데 “한편으로 더욱 실재론적으로는 우리는 그 일치를 세 위격 모두에 공통적인 본질로서 상위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 경우에 위격들의 구분은 하위의 것으로 드러나 뒤로 떨어지게 되면서 신적 군주만 명백해진다. 또는 다른 한편으로 더욱 유명론적으로는 우리는 그 삼위성을 상위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그 경우에 추상적인 것으로서의 그 일치성은 뒤로 떨어지게 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종교적 의식을 위해 직접적 존재를 가지는 것은, 성령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신성, 즉 아들인 그리스도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가 전면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이것은 결국 ‘삼신론으로 떨어지게 되는 위험처럼’보였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는 그것은 계시의 직접적인 내용도 아니고 신앙의 직접적인 표현도 아니다. 기껏해야 삼위일체 교리는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한 방법으로, 즉 사벨리우스주의 형태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차리리 하나의 가능성인 것이다.
Ⅳ. 슐라이어마허의 인간학적 삼위일체론
슐라이어마허에게 삼위일체론은 적어도 그의 신학에서 기독교 진리의 판단기준이 되고 있는 “기독교적 자기-의식에 관한 직접적인 관심은 아니다” 즉 삼위일체는 기독교적 의존 경험에 필수적인 “감정”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신자가 구원 받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과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교회의 공통의 영에 대한 숙고의 결과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의 중심은 구원론이고 그것은 바로 기독론 중심이다. 그의 기독론에 따르면 슐라이어마허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의 진정한 인간’으로 확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과 같으나 완전한 신-의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든 인간과 구별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신성이란 표현 대신에 신-의식이란 말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의식을 지닌 원형적인 인간으로 보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성령론을 신자들이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참여하는 교회라는 콘텍스트에서 분석한다. “성령은 신자들의 공통의 삶 안에서 삶을 살아 있게 하는 공동의 영의 형태로 의 ‘신적 본질과 인간 본성과의 연합’이다” 다시 말해, 신자들의 공통의 종교적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성령의 사역의 한 형태이다. 즉 신학은 일종의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 가지는 개인적 의식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변증적 언어로 진술인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삼위일체론이 기독론과 성령의 조화라고 할 때 그 공통분모는 신적 본질과 인간적 본성의 연합이다.
곧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신과 인간의 만남이다. 성령론도 이와 같다. 슐라이어마허가 삼위일체를 그의 신학에 마지막에 둔 것은 우리와 신과의 관계를 기술한 다음, 신적인 것 그 자체를 향하여 선을 그어 나아다가 마침내 삼위일체론적 진술에 다다른 것이다. 그는 한 하나님이 창조자, 구속자, 그리고 성화자이며 이것은 모든 삼위 하나님께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Ⅴ.나가는 말
당시의 계몽주의와 칸트의 철학 그리고 과학적 사고가운데, 이 도전들 앞에서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와 교회를 변호하고 싶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이성의 한계 안에서 규정짓고, 나아가 자신의 실천이성 비판에서 종교를 윤리의 틀로서만 해석하려고 했던 칸트를 겨냥하고, 심지어 종교를 도그마적인 규범이나 형이상학적 지식으로만 풀어내고자 했던 17세기 정통주의를 겨냥함으로써 종교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신자의 근본적인 경험과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교회의 공통의 영에 대한 숙고의 결과이다. 삼위일체는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와 기독교인들 안에 있다는 진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대한 신학들이 삼위의 상호성에 대한 주장에 치중하고 있다면,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적 경험 사이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하는데 치중했다.
[출처] 슐라이어마허의 인간학적 삼위일체론|작성자 kais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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