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뜻의 계시
이런 이유로 성경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라고 부르고 우리 모두가 죽음과 파멸로 무모하게 나아가고 있다고 선포한다(엡2:1-3, 롬3:9-20). 따라서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 가운데서 자신의 의, 능력, 생명, 그리고 구원을 찾을 명분이 남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자신으로부터 불행, 연약함, 불법, 그리고 마침내 지옥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인 사람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흩어졌으며 나눠졌기 때문이다(호13:4-9).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이것들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도록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율법을 새겼다 - 말하자면 인쳤다(롬2:1-16)
참으로 이것이 다름아닌 양심이다.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에 대한 내부적 증인이며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자리매김하고 우리 자신이 우리의 직무를 합당하게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심판에 매이게 한다. 그러나 사람은 여전히 교만과 야망으로 심히 부풀어 있으며 자기 사랑에 아주 맹목적이어서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 - 즉 자기 자신으로 내려가서 자신을 쳐서 굴복시키는 것을 배울 수 없으며 자신의 비참을 고백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성문법을 제정하셔서 완전한 의를 가르침으로써 율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함으로써 그것을 지키게 되는지를 모두 알려 주셨다. 즉 만약 우리가 그에게 깊이 매여 있다면, 오직 그분만을 향할 것이며 무엇을 인식하든지, 원하든지, 행하든지, 말하든지 오직 그분에게만 목적을 둘 것이다.
이러한 의에 대한 교리는 우리가 정도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심지어 여기에 율법 자체가 우리에게 규정한 모든 약속과 저주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무엇이든 명령한 것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행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구원의 상이 돌아갈 것이라고(레18:5) 약속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율법이 가르치는 삶의 완전함은 주님께서 그것이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되면 합당한 상을 주시리라 마음 속에 헤아리고 계시는 바로 그 의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지적하신다. 반면에 모든 율법의 의를 충분하고 예외없이 지키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는 저주를 발하시고 영원한 사망의 심판을 선포하신다(신27:26, 갈3:10)
확실히 이 죄과로 행했고, 행하고, 행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억제시키신다. 이들 가운데 아무도 율법을 어기지 않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를 억압해서 일을 행하게 하고 우리를 그토록 얽매게 하는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한,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 중에 우리가 정확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한 (롬3:19, 7:7-25), 율법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우리 얼굴의 때와 얼룩을 거울에 비춰보듯이 우리의 죄와 저주를 헤아리고 묵상하기에 적합한 거울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이성문법 자체는 단지 자연법의 증언으로서 우리의 기억을 더욱 자주 상기시키며 자연법이 내부적으로 가르칠 때 충분히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되풀이하여 가르친다.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배워야 할 것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시며 우리의 주시요 아버지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 분께 영광과 찬미와 사랑을 빚지고 있다. 실로 우리 가운데 아무도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는 저주와 심판, 마침내 사망이 합당하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행위의 의를 통하지 않는 다른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죄사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재능으로는 율법에 규정된 의무를 다 이행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좌절할 수 밖에 없고 다른 것으로부터 능력을 구하고 바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어서 겸손과 복종으로 내려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비추셔서 자신을 유순하시고, 자비롭고, 온유하시고, 관대하신 분으로 나타내시고, 기록된 바와 같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4:6, 벧전5:5)
첫째로, 만약 우리가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그분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그분의 은총을 구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마땅히 받았어야 할 어떤 것이라도 사해 주시고 은혜로 받아 주신다.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이런 이유로 성경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라고 부르고 우리 모두가 죽음과 파멸로 무모하게 나아가고 있다고 선포한다(엡2:1-3, 롬3:9-20). 따라서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 가운데서 자신의 의, 능력, 생명, 그리고 구원을 찾을 명분이 남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자신으로부터 불행, 연약함, 불법, 그리고 마침내 지옥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인 사람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흩어졌으며 나눠졌기 때문이다(호13:4-9).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이것들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도록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율법을 새겼다 - 말하자면 인쳤다(롬2:1-16)
참으로 이것이 다름아닌 양심이다.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에 대한 내부적 증인이며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자리매김하고 우리 자신이 우리의 직무를 합당하게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심판에 매이게 한다. 그러나 사람은 여전히 교만과 야망으로 심히 부풀어 있으며 자기 사랑에 아주 맹목적이어서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 - 즉 자기 자신으로 내려가서 자신을 쳐서 굴복시키는 것을 배울 수 없으며 자신의 비참을 고백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성문법을 제정하셔서 완전한 의를 가르침으로써 율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함으로써 그것을 지키게 되는지를 모두 알려 주셨다. 즉 만약 우리가 그에게 깊이 매여 있다면, 오직 그분만을 향할 것이며 무엇을 인식하든지, 원하든지, 행하든지, 말하든지 오직 그분에게만 목적을 둘 것이다.
이러한 의에 대한 교리는 우리가 정도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심지어 여기에 율법 자체가 우리에게 규정한 모든 약속과 저주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무엇이든 명령한 것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행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구원의 상이 돌아갈 것이라고(레18:5) 약속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율법이 가르치는 삶의 완전함은 주님께서 그것이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되면 합당한 상을 주시리라 마음 속에 헤아리고 계시는 바로 그 의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지적하신다. 반면에 모든 율법의 의를 충분하고 예외없이 지키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는 저주를 발하시고 영원한 사망의 심판을 선포하신다(신27:26, 갈3:10)
확실히 이 죄과로 행했고, 행하고, 행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억제시키신다. 이들 가운데 아무도 율법을 어기지 않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를 억압해서 일을 행하게 하고 우리를 그토록 얽매게 하는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한,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 중에 우리가 정확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한 (롬3:19, 7:7-25), 율법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우리 얼굴의 때와 얼룩을 거울에 비춰보듯이 우리의 죄와 저주를 헤아리고 묵상하기에 적합한 거울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이성문법 자체는 단지 자연법의 증언으로서 우리의 기억을 더욱 자주 상기시키며 자연법이 내부적으로 가르칠 때 충분히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되풀이하여 가르친다.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배워야 할 것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시며 우리의 주시요 아버지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 분께 영광과 찬미와 사랑을 빚지고 있다. 실로 우리 가운데 아무도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는 저주와 심판, 마침내 사망이 합당하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행위의 의를 통하지 않는 다른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죄사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재능으로는 율법에 규정된 의무를 다 이행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좌절할 수 밖에 없고 다른 것으로부터 능력을 구하고 바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어서 겸손과 복종으로 내려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비추셔서 자신을 유순하시고, 자비롭고, 온유하시고, 관대하신 분으로 나타내시고, 기록된 바와 같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4:6, 벧전5:5)
첫째로, 만약 우리가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그분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그분의 은총을 구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마땅히 받았어야 할 어떤 것이라도 사해 주시고 은혜로 받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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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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