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n>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적인 성령론
천국 도서관장 2010.08.03 01:07 http://blog.daum.net/godlysalvation/226
이 소논문은 이상웅 목사님의 박사 논문의 요약이다.
이상웅 목사님에게서 배운 것은 사랑의 관계성, 대상성이다. 사랑은 복수의 관념이며, 반드시 대상성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에드워즈 목사님의 삼위일체론의 핵심이다. 또한 경향성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경향성을 본질로 가지신 존재이다. 따라서 그 사랑은 먼저 내재적 사랑이 되며, 시공간을 통해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서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삼위일체의 위격성은 니케아 콘스탄디노플 신경을 따른다. 인격의 person은 단순한 개체의 단위가 아니라, 상호내재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개별적 단위를 말하며, 성령은 그런 관점에서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그 자체이며, 중생자에게 적용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성령 자신이 중생자에게 전하는 사랑 자체다. 이런 점에서 성령의 위격이 에드워즈 목사님에게서 강조된다. 이는 계몽주의 시대의 실체에 대한 개념의 전환에 맞서 하나님의 실체를 경향성, 즉 발산하는 목적론적이고 관계적인 힘의 속성을 통해 변증하고, 그와 더불어 삼위일체론을 변증하는 과정에서 에드워즈에게서 새롭게 발견된 신적 조명의 결과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적인 성령론
이상웅
본 논문은 18세기 청교도 목사이자 미국 식민지 시기의 위대한 철학적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을 체계적으로 탐구한 논자의 연구의 한 부분이다 에드워즈의 성령론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삼위일체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그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많은 논란과 시비가 있었지만 현금의 에드워즈 학계에 있어서는 그의 삼위일체론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정립된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충실하게 대변하였다는 점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그의 생전에는 삼위일체론을 다룬 어떤 글도 출판한 적이 없었지만, 그가 회심이후 부터 그의 생애 말년까지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을 믿고 변호했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체험하고 살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회심 사건을 중심한 초기 생애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그의 『자서전』속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기에 영광스럽게 보여졌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이 내게는 하나님에 대한 품격 높은 사상을 가지게 만들었다.” 에드워즈는 조금 뒤에 가서 노스햄튼 목회 초기에 경험한 한 체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여러 번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세 번째 위격의 영광을 느꼈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느꼈다; 그 분의 거룩한 역사들 속에서 신적인 빛과 생명을 영혼 속에 전하시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은 성령의 전달하심 속에서 신적인 영광과 달콤함의 무한한 샘으로 보였다. 그 샘은 영혼을 채우고 만족시키기에 충만하고 충분했다. 그것은 태양의 광채가 달콤하고 즐겁게 빛과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처럼 달콤하게 쏟아 부어지면서 전달되었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자신의 신학적 묵상을 사적으로 기록한 Miscellanies 속에서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을 하고 있다: “나는 때때로 홀로 이런 생각을 하곤했다. 삼위일체 같은 교리들과 규례들이 참이라면 어떤 필요에서 복음 속에 그런 것들이 계시되었을까? . . . 나는 이런 교리들이 얼마나 유용한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 . 이와 같은 교리들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과 식견, 그리고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묵상으로 이끄는 영광스러운 관문이다. 나는 이러한 지식이 마음의 수양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하는지 경험했다.” 이상의 인용구들만 보더라도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특히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난해해 보이고 오해의 가능성도 있지만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에드워즈는 생애 만년인 1757년 2월 11일자로 당시 하버드 대학의 교수였던 에드워드 위글스워스(1693-1765)에게 편지를 보내어 뉴잉글랜드에 만연하고 있던 반(反) 삼위일체론 분위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면서, 특별히 조나단 메이휴가 공개적으로 삼위일체론을 조소하고 있는데 젊은 신학도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위글스워스 교수가 나서서 직접 정통 삼위일체론을 변호해야 하지 않느냐는 취지로 권면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회심 체험 이후부터 시작해서 생애 만년까지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정통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는 그의 삼위일체론의 특징들을 살펴보고, 특별히 성령에 대한 삼위일체론적인 견해를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삼위일체론이 개진되고 있는 여러 자료들에 대해서 확인해 보고, 삼위일체론에 대한 연구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I.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 자료와 간략한 연구사
1.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담긴 자료들
조나단 에드워즈는 생전에 삼위일체론에 대한 저술을 출간한 적은 없지만, 유고들 가운데는 삼위일체론을 다루고 있는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선 그의 신학적 사유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신학묵상집』( The Miscellanies ) 속에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많은 묵상과 연구 결과들이 산재해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여러 성경 구절들에 대한 에드워즈의 묵상 내지 연구 결과들도 그의 Notes on Scripture 나 Blank Bible 등에 담겨 있고 온전한 형태로 출판되어 있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목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1730년초에 쓰기 시작한 "삼위일체론"(Discourse on the Trinity)이다. 에드워즈는 1730년대 중반, 후반에 자신의 원고를 다시금 검토하였고 다른 연구 결과를 첨부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에드워즈가 이 원고를 출판을 위해서 의도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연구 자료원(a source book)으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하는 점이다.
이제 유고로 남아있던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의 출판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미간행 원고로 남겨진 까닭에 에드워즈의 정통성 시비가 불거졌는데, 그의 삼위일체론이 비정통적이지 않음(not unorthodox)을 증명하기 위하여 원고 출간의 시도가 1880년에 시작되었다. 최초로 세간에 나온 것은 에드워즈의 신학묵상집 1062번으로서 엑버트 C. 스미스의 편집에 의해서 Observations concerning the Scripture Oeconomy of the Trinity and Covenant of Redemption 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을 다룬 논문의 출간은 1903년에 이르러 죠지 피셔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피셔는 에드워즈가 육필로 남겨둔 삼위일체론 강론을 출판하는 기회에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의 정통성 시비에 관련하여 반박하는 장문의 글을 수록하기도 하였다. 이 논문은 1971년에 폴 헬름에 의해서 다시 재출간되었으며, 2003년에는 예일 전집 21권 속에 편집 출간되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이상현 교수에 의해서 편집된 WY 21 속에는 에드워즈가 쓴 "Discourse on Trinity"와 on the Equality of the Persons of the Trinity"라는 다른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하의 논의에서는 에드워즈의 출간된 모든 판본을 다 참조하였지만, 특별히 최종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예일대 판본을 기준으로 삼았다.
2.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정통성 시비와 연구
에드워즈의 유고들을 맡은 이들이 삼위일체론 관련 문헌들의 출간을 미루는 바람에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정통성 시비의 도마에 오르게 되었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의 정통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시비를 건 사람은 회중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인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이었다. 그는 1851년에 출간한 Christ in Theology 라는 저서 속에서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를 위한 선험적인 논증(a priori argument for the Trinity)"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나오심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에는 호의적이었다. 본격적으로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비판의 글을 쓴 사람은 19세기 후반 보스턴의 엘리트 사회에서 명사였던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이다. 그는 에드워즈의 노스햄튼 목회기를 "공포의 통치"였다고 맹비난하고, 그의 신학 체계는 "야만적이고, 기계적이며, 유물론적이며, 비관주의적(barbaric, mechanical, materialistic, pessimistic)"이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홈즈는 에드워즈에게서 희망의 미광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후기의 에드워즈가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아리안주의 혹은 사벨리우스주의로 위대한 변화를 했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홈즈의 비판은 근거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홈즈가 왜 에드워즈를 아리안주의자 내지는 사벨리우스 주의자라고 부르는지 그 동기에 주의해야 한다. 피어스가 잘 지적한대로, 홈즈는 정통 신앙을 버리고 유니테리안주의를 받아들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학적 입장의 변화를 에드워즈를 이용하여 정당화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쉬넬이나 홈즈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의 정통성에 대해서 시비를 걸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공이 전혀 없는 바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비난 때문에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저술들이 세간에 빛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앤도버 신학교의 교수였던 엑버트 C. 스미스는 1880년에 에드워즈의 신학묵상집 1062번을 담은 Observations concerning the Scripture Oeconomy of the Trinity and Covenant of Redemption 을 출간하였다. 에드워즈의 글 속에는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부에 대한 성자의 경륜적 종속(the economic subordination of the Son to the Father)에 대한 견해가 표명되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19세기 뉴잉글랜드 신학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내용들이었다. 에드워즈를 신학적 조상으로 삼고 있지만 뉴잉글랜드 신학자들(특히 Emmons)은 성자의 영원출생을 부정하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연관성을 염두에 둔다면 에드워즈의 유고를 맡았던 에드워즈 후손들이 왜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빨리 출판하는 것을 꺼려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9세기 뉴잉글랜드 신학의 마지막 대표자였던 에드워즈 A. 파크(Edwards A. Park)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변호하기 위하여 쓴 두 편의 논문을 1881년에 Bibliotheca Sacra 에 게재하였다. 우리는 파크의 에드워즈 변호중 두 가지 사항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삼위일체론에 관해 쓴 에드워즈의 저술들이 임시적인 신학적 묵상이지, 완전하게 개진된 사상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 둘째, 에드워즈의 교리적 신앙 고백은 정통적이지만 에드워즈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론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공정한 변호가 아니었다. 오히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그의 제자 중 하나인 알렉산더 알렌(Alexander V. G. Allen)은 1891년에 간행한 최초의 비평적인 에드워즈 전기 속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에드워즈를 비평하였다. 그는 특히 에드워즈의 신학에서는 인간론이 제대로 설 자리가 없으며, 그리고 그의 신학 체계 속에서는 기독론이 아무런 구성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비평하였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Discourse on the Trinity)이 출간된 것은 그의 출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1903년이었다. 예일대 교수였던 조지 피셔에 의해서 빛을 보게 된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본문과 피셔 교수의 해설문 등을 통해 에드워즈의 어거스틴과의 친화성이 밝혀지고, 그의 삼위일체론이 이단적인 것이 아니라 니케아 정통(Nicene orthodoxy)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스투더베이커는 이 저서의 출간과 더불어서 19세기 후반 50여년 동안 거론되었던 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추문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렇다고 해서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어졌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구 프린스턴의 워필드 교수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증명을 아주 매력적이라고 하면서도 일종의 삼신론적인 경향을 가졌다고 비평을 가하였다. 그런가하면 네덜란드에서 헤르만 바빙크의 지도하에 에드워즈의 신학에 대한 연구로 1907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얀 리덜보스(Jan Ridderbos)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속에 양태론적 경향이 있음을 비판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을 제외한다면 20세기 전반기에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 이런 경향은 삼위일체 교리 자체에 대한 시대적 무관심과 궤를 같이 한다고 스투더베이커는 지적한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학자들이 다다시금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62년 허버트 W. 리처드슨의 학위논문에서 부터이다. 리처드슨의 학위논문은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해 집중하여 쓰여진 최초의 연구서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논의가 성황을 이루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부터이다. 현금에 이르기까지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몇 편의 박사논문이 쓰여졌고(예를 들면 Richardson, Sairsingh, Pauw, Stahle, Studebaker, Caldwell III, Danaher 등), 여러 연구서들과 연구 논문들이 출간되어 왔다. 최근의 연구 결과를 일별해 보면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일신론이나 삼신론이라고 몰아붙이는 경향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대다수의 학자들은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의 전 신학 사상과의 연관성을 찾는다든지, 현대적인 삼위일체론적 관심과 연계시킨다든지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둘러싼 현대적 논의의 쟁점들을 알기 위해 몇 명의 학자들의 연구 경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크리스터 세르싱그(Krister Sairsingh)는 에드워즈가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쓴 초기 작품들 속에서 관계적 존재론(relational ontology)과 교회론적 이상(ecclesial idea)의 관계를 발견해 내었다. 세르싱그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교회란 창조 속에 나타나고, 삼위 하나님의 위격들 간의 관계에서 표현된 대로의 신적인 영광을 재현(re-present)한다고 생각하였다고 본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연구에 있어서 비중있는 학자중 한 사람은 에이미 플랜팅가 포우(Amy Plantinga Pauw)이다. 그녀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으로 박사논문을 썼고, 후에 수정하여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포우의 주요 요점은 에드워즈가 삼위일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두 가지 모델을 사용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두 모델이란 어거스틴적인 심리학적 모델과 동방 정교회 신학에서 온 사회적 모델이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속에는 이 두 가지 모델이 채용되고 있기 때문에 때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포우와 동질성을 가지고 있고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학자들 중에 한 사람은 프린스턴 신학교에 재직중인 이상현 교수이다. 이상현 교수는 특히 에드워즈의 신론에 있어서 경향적 삼위일체론(Dispositional conception of the Trinity)이라는 독특한 입장을 천명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또한 신학적 관점에서 가족(family)을 논의하는 중에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에 대해서 박사논문을 쓴 수전 레이철 스탈(Susan Rachel Stahle)은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그 자신의 독특한 삼위일체론에 근거하고 있고 통합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삼위일체는 모든 실재의 국면들을 통합시키고, 시간, 역사, 선택과 성화, 종교적 체험과 신앙 부흥, 영화와 영벌, 이런 신적인 계획의 수행과 성취의 모든 부분에서 그 길을 만들어 나간다."
리처드 웨버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 진술에서 떠났지만 전적으로 정통적이라고 평가하였다 스티븐 마이클 스투더베이커( Steven Michael Studebaker) 는 에이미 플랜팅가 포우의 두 모델이론에 반대하여 에드워즈는 한 모델만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회적 모델을 에드워즈가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거스틴적인 삼위일체론의 문맥 안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윌리엄 J. 데너허 2세(William J. Danaher, Jr.)는 에이미 포우가 주창한 두 종류의 삼위일체론적 유비들을 수용하여 삼위일체론을 이해하며, 삼위일체론이 도덕적 숙고를 위하여 어떻게 도구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논구하고, 현대 윤리학적 논의에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추구하였다.
II.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실제 내용에 있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확립된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에서 떠나지 않았다. 로저 올슨과 크리스토퍼 홀은 심지어 니케아 정통신학에서 벗어나는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대체로 에드워즈는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해 새롭게 기여한 것은 없다"라고 단언하기도 하였다. 한편 리처드 웨버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 진술에서 떠났지만 전적으로 정통적이라고 평가하였다.
과연 어떤 평가가 공정한 것일까? 우리가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면 리처드 웨버의 평가가 좀 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공정하게 논구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삼위일체론이 흔히 비판되어 왔듯이 일신론이거나 삼신론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정통적인 표현들과 다른 점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가 삼위일체론을 숙고하고 대변했던 시대적 상황을 잘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에드워즈는 신비와 합리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전반적인 거부를 당연시했던 계몽주의 시대에 산 사람으로서, 당시 풍미하던 반 삼위일체론에 대항하여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을 변증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그의 삼위일체론의 특이한 면모들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기독교 신앙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계몽주의의 도전에 대하여 얼마든지 변증 가능하다고 초기부터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비록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의 저술 계획 중 하나는 『기독교 주요 교리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A Rational Account of the Main Doctrines of the Christian Religion Attempted)이었다. 에드워즈가 남긴 저술 계획 윤곽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 창조된 마음들, 자유의지 등을 다루고 나서 세 번째로 탁월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아래 삼위일체,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들을 다루려고 의도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에드워즈가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최초로 신학묵상록을 남긴 것은 1723년 12월경(20세)으로서 Miscellanies, 제94번에 보면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나는 순수한 이성의 범위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셋이 있으며, 이들 각각은 동일한 [하나님]임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마치 에드워즈가 성경 계시와 아무런 관계없이 중생자든 비중생자든 관계없이 순수한 이성(naked reason)의 힘으로 삼위일체와 같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오해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에드워즈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에드워즈는 삼위일체론의 신비를 이성의 힘으로 풀어헤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반대 입장을 1730년대에 작성했던 "삼위일체론"속에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해설하여 삼위일체의 신비로움과 그 불가해한 것을 펼쳐 보이고 해결한다고 결코 단언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언급되었듯이 이 교리와 관련해 일부 난제들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고, 이로 말미암아 뭔가 신비롭고 기이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점점 더 증대되고 있다. 이 사실을 나는 감지하고 있다. 나는 삼위일체를 단지 거룩한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이 이 위대한 신비와 관련하여 우리 마음에 조금 밝혀 제시해 준 것만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감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에드워즈의 입장을 정리해 보면 에드워즈는 삼위일체론의 신비를 다 파악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으며,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해 준 만큼"알 수 있을 뿐이라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성서적 토대 위에 굳게 서는 한편, 동시에 기독교인의 경험에서 나온 이성적 추론과 동시에 아름다움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관계론적 개념에서 삼위일체를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당대의 합리주의적 사조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론이 비합리적이라고 배척하는 이들에 대항하여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앙을 이성적으로 변증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라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1. 에드워즈의 새로운 실체 개념과 성향적 존재로서의 하나님 이해
우리는 에드워즈가 삼위일체론을 전개해 나가거나 변증하는 방식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실체관과 달리 에드워즈가 견지하였던 실체관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는 실체 개념에 대한 존 로크의 도전에 직면하여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실체 개념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새로운 실체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전통적으로 실체는 속성들의 소유자(the owner of proprieties)로 이해되었으나, 에드워즈는 행동들의 행위자(the doer of deeds)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실체를 ‘성향’(disposition)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향이나 경향성은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며, 법칙적으로 원인적으로 작용하는 힘이기까지 하다. 실체들과 마찬가지로 경향성들이나 성향들도 영속적인 요소로서 기능하고, 하나의 실재의 성질을 가진다고 이해하였다. 또한 역동적인 힘을 발휘하는 주체라고 보았다. 이처럼 실재를 본질적으로 성향적으로 보는 것은 실재 자체를 정태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보는 것이며, 행동과 사건을 만드는 성향으로 보는 것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에드워즈는 모든 존재는 어떤 실제적인 힘들과 경향성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또한 존재란 비례적 균형, 곧 아름다움이라고 에드워즈는 생각하였다. 이상현이 정리하는 바에 의하면 "성향과 아름다움은 동일한 실재를 바라보는 두 개의 방법이다. 성향은 아름다움의 역동적 측면을 나타내는 반면, ‘아름다움’은 성향이 나타내는 방식, 곧 방향을 말한다." 그리고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다. 또한 존재란 더 많은 관계와 행동을 향하는 경향이다. 존재는 본질적으로 반복되는 성향을 지니며 자기실현을 증대한다. 이 말은 존재가 실제적이며 동시에 자기실현적이고, 또 계속해서 자기를 나타내며 이로 말미암아 보다 더 실존하고 아름답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존재에 대한 성향적인 이해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새로운 실재 개념 혹은 존재 이해에 근거하여 "자신을 전달하려고 하는 성향이 [하나님의] 본질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심과 풍성하심과 지혜와 의와 진리 등을 드러내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셨으며, 자기 자신을 밖으로 전달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주장이다. 바로 이러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신적 본질 안에서의 복수의 위격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생각하였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참된 아름다움이고 전지한 존재이며 사랑의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참된 아름다움을 계속 알고 계속 사랑하려는 주권적 성향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이라는 성향을 가지신 존재이신데, 이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관계적(relational)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름다움이란 동의의 관계, 즉 비례와 조화의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수가 아니라면 관계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본원적으로 복수이며 관계적이다는 것이 합당하게 도출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 존재 자체의 본성이 하나님 안에서의 내적 관계성과 복수성을 요청한다고 보았다.
1723년말에 작성한 "정신"(The Mind)의 첫 항목에서는 에드워즈는 탁월성에 대한 철학적 숙고로 시작하여 복수성이 없는 존재는 탁월성이 있을 수 없다고 추론해낸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탁월하시다면 복수성을 가지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학묵상집』제117번에서는 "따라서 만약 하나님이 뛰어나다면 하나님 안에 복수가 있기 마련이다"고 에드워즈는 적고 있다 에드워즈는 존재를 탁월성으로 재규정하고, 이것을 삼위일체에 적용하여 이해함으로써 그 자신의 뿌리인" 오래도록 전승된 철학적 신학의 전통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길로 나아갔다. 왜냐하면 에드워즈의 견해는"하나님의 선하심은 자기 존재의 절대적 유일성과 그 단순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관계를 형성하는 복수를 구성할 때만 그 선하심이 자신에게로 귀속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2. 삼위일체의 두 모형(Two Trinitarian Models)?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한 에이미 플랜팅가 포우(Amy Plantinga Pauw)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두 종류의 삼위일체론적 모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 두 모형이란 하나님은 자신을 알고 사랑하는 정신과 유사하며, 또한 셋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내지 가족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모형은 심리학적 모형이라고 불리우며 간접적으로는 어거스틴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카튼 마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 모형을 알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에드워즈는 "삼위일체론"속에서 어거스틴적인 심리적 모형을 활용하여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전개해 나간다. 에드워즈는 성부의 관념으로서의 성자의 구별된 존재 또는 위격을 논증하고 나서, 사랑과 기쁨으로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의 제3위격인 성령에 대해서 논증해 나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해 나갔다.
포우에 따르면 에드워즈가 사용하는 두 번째 모형은 사회적 모델(social model for Trinity)이다. 포우에 따르면 이 모형은 12세기 어거스틴주의자인 빅토르의 성 리처드(St. Richard of Victor)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리처드에 의하면 어떤 인격의 완전성은 다른 인격을 사랑하는데서 발견되어 지기 때문에, 하나님도 인격적 존재들의 공동체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고, 또한 둘뿐이라면 서로 간에 누리는 행복의 기쁨을 소통하고 공유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사랑과 의지의 완벽한 일치로 연합된 세 인격적 존재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에드워즈는 "삼위일체론"에서 이 모형을 적용하고 있는듯이 보인다.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16)라고 말하는 것은 신격 안에는 한 분 보다 더 많은 위격이 계심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이 신격에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것으로 보여 주며, 그분의 본성이 사랑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랑은 다른 이, 즉 사랑 받는 자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영원하고 필수적인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에 의하여 우리는 그 분들 사이에 있는 위격적 상호 동등성을, 즉, 그 분들이 세 분으로 구성된 사회 혹은 가정 안에서 모든 면에서 동등하시다는 점을 더욱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분들은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명예 외에 명예에 있어서 동등하시다. 즉, 그 분들은 모두 하나님이시며, 그 사회 혹은 가정 속에서 각자 자신의 독특한 명예를 가지신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이처럼 신격 안에 사회성과 교제를 적용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에드워즈가 그와 같은 모형을 사용한 것은 개혁주의의 신학적 틀 안에서 감히 결행하기 어려운 큰 모험을 한 것이었다고 포우는 지적한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두 가지 모형을 상호보완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독창적인 신학적 탐구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었다고 포우는 그 공을 인정한다. 이처럼 조나단 에드워즈가 삼위일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어거스틴적인 심리적 모형과 빅토르의 리처드식의 사회적 모델을 사용했다고 하는 포우의 견해에 대해서 이상현 교수도 대체로 공감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스투더베이커의 경우는 포우의 견해대로 에드워즈가 사회적인 모델을 사용했으며, 신적인 삼위일체성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하는 점에서는 동의를 표하지만, 그런 에드워즈의 경향이 그가 어거스틴적인 심리적 모델에 대하여 비호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에드워즈가 사용한 사회적 모델의 출처가 포우가 주장하는 것처럼 빅토로의 리처드가 아니라, 오히려 어거스틴적인 상호적인 사랑의 모형의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
이제 우리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적 삼위일체론으로 양분해서 논구해 보도록 하겠다. 에드워즈에 의해서 개진된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B. B. 워필드에 의해서 "매우 매력적인 삼위일체의 존재론적인 증명"이라고 일컬어지고, 그 정통성에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던 부분과 관련되어 있다. 사실 에드워즈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의 내용은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난해한 전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오해도 발생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성부 하나님을 "제일의, 기원이 없고, 가장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신성"이시라고 정의 내린다. 그리고 성부는 존재의 제일의, 무한한 탁월성을 가진 직접적인 실유이시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성부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보편적이시고,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실유이시기 때문에 최고로 탁월한 존재이실 밖에 없다. 하나님은 무한하게 동의하는 존재, 아름다움이시오, 탁월하신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무한히 탁월하신 존재이시기 때문에 영원전부터 자기 자신을 향유하시고 무한히 행복하신 분이시다.
자신을 즐거워하심 가운데 누리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행복은 그 자신의 탁월한 본질과 완전성을 완전하게 보시고 완전하게 즐거워하심으로부터 비롯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지식처럼 관념(idea)을 매개로 한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의 관념과 달리 하나님의 관념은 지식에 있어서 완벽하고 완전하기에 사물 그 자체이라고 하는 것이 다르다. 즉,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가지시는 관념은 자신과 동일한 본질, 동일한 완전성, 동일한 실체를 가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숙고하심에 의해 하나님의 실질적인 형상이 출생하게 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직접적으로 존재하시는 신성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 자신에 대한 성부의 완벽한 관념으로 출생하신 신성이신 성자가 영원전부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에드워즈의 논의는 비형이상학적인 마인드를 가진 현대인들이 따라잡기에는 너무나 난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자신의 생각이 성경에서 성자를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고 칭하고 있음에 근거하여 확증할 수 있다고 본다. 에드워즈는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16)는 구절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사랑은 본질적이고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자기 사랑일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해야 하므로 삼위의 제2위격이신 성자 외에는 그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에서 제3위신 성령은 어떻게 설명되어지는지 보도록 하자.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거룩하신 사랑을 그의 아들에게 베푸신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주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성부에게로 되돌아온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상호적이지 않은 사랑은 고통이며, 유쾌한 것이 아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는 상호적인 사랑이 존재한다. "성부와 성자간의 사랑은 서로가 각자를 사랑하고 기뻐한다는 점에서 상호적이다"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부와 성자 간에 주고받는 상호적인 사랑이 다름 아니라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이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동일시하는 요한일서 4장 12, 13절 그리고 18절을 인용하면서, 사랑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생자들에게 적용하시는 분(agent)이 아니시고, 오히려 성령 자신이 중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시라고 한다. 에드워즈는 신약 성경 가운데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 등에 대해서는 찾아볼 수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성령의 사랑을 말하는 구절이 전혀 없음을 주목하고 깊은 묵상을 했다. 그와 같은 표현의 결여는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령이 바로 성부와 성자간의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성도들에게 부어주신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란 바로 성령을 가리킨다고 이해하였다.
이제 우리는 filioque 교리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filioque 교리란 성령의 나오심(processio)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도 또한"인지 아니면 오로지 "아버지에게서만"인지에 대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간에 일어났던 교리적 논쟁을 가리킨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비중있는 논문을 처음으로 쓴 리처드슨의 경우에는 성령의 성부에게서만의 단독 나오심이 에드워즈의 입장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에드워즈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리처드슨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부의 성자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을 말한 적이 없다. 오직 성부와 성자간의 상호적 사랑(mutual love)을 주장했고, 그 상호적 사랑이 바로 성령이시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부는 누구에게서 나시지도 않았으며 발출하시지도 않으신다. 성자는 성부에 의해서 출생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 에드워즈는 "은혜론"(Treatise on Grace)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힌다.
성령께서도 말로 형용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어떤 방식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고 숨쉬어지신다(proceed and is breathed forth both from the Father and Son). 성부와 성자로부터 끊임없이 그리고 변함없이 발산되는 저 무한히 강렬하고 거룩하며 순결한 사랑과 기쁨 가운데서 신적 본질이 1차적으로는 서로를 향하여 2차적으로는 피조물을 향하여 전적으로 다 부어지고 흘러나오는데, 그 신적 본질이 다른 존재와 다른 인격 안에서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흘러 나감으로써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면,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한 하나님 되심을 믿었고, 삼위는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주장하였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삼위일체에는 질서상 앞서고 뒤서고 하는 바가 있다고 해도, 존귀와 탁월성의 등급들과 같은 것들이 있지는 않다. 한 분이 다른 분에게서 출래한다고 해서, 전자가 후자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자가 성부에 비해 열등하시지 않듯이, 성령도 성부나 성자에 비해 열등하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에드워즈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같은 실체, 같은 신적 본질을 소유하고 계신다는 점에서 같은 하나님(same God)이시다고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그 분들 모두는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그리고 따라서 어떤 열등함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 분 모두가 동일한 실체, 동일한 신적 본질이시고, 따라서 신적 본질에 속한 어떤 완전성, 위엄 혹은 탁월성이라도 그 분들 각각에게 속한다. 세 분 중 어떤 분도 신적인 본질에 속한 탁월성, 완전성, 혹은 위엄보다 더 큰 것을 가질 수는 없으며, 각자는 신적 본질을 가지고 계시며, 각자가 신적인 본질이시기 때문에, 그 정도만큼 가지신 것임에 틀림없다. 신적인 본질에 속한 어떠한 능력 혹은 지혜 혹은 거룩성 등이든지, 그것들은 어떠한 위격 안에서 실재하고 있든지 간에, 즉 [아버지, 아들 혹은 성령] 안에 실재하고 있든지 간에,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 속해 있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요약은 다음의 글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거룩한 성경에서 읽는바 복되신 삼위일체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제일의, 기원이 없고, 가장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신성이시거나 혹은 그 직접적 실존에 있어서 신성이시다. 아들은 하나님의 이해에 의해 출생되어지거나 하나님의 자기 자신에 대한 한 개념을 가지심에 의해서 출생되어지고, 그 개념 안에서 실재하시는 신성이시다. 성령은 행위 안에 존재하는 신성이시거나, 혹은 하나님의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기쁨 안에서 흘러나오고 내쉬어지는 신적 본질이시다. 그리고 나는 전 신적 본질이 참으로 그리고 구별되게 신적인 개념과 신적인 사랑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세 분들 각각은 완전히 구별된 위격들이라고 믿는다.”
4.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
경륜적 삼위일체란"세계와의 관계에 나타난 대로의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삼위 하나님의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외향적 사역(opera ad extra)은 경륜적 삼위일체의 일이다." 에드워즈 역시 내재적 삼위일체론뿐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논구하였다. 에드워즈는 창조 사역뿐 아니라 구속 사역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이 동등하게 관여하셨다고 말한다. 성부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어 그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신 외아들을 내어 주셨고, 성자는 세상을 사랑하여 자신을 주셨다.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시기에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기 위해 오셨던 택자들을 향하여 흘러넘쳤다. 따라서 영광은 삼위 각위에게 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주장하는 바이다.
에드워즈는 구속 사역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이 구속의 첫 번째 기원이시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한다. 삼위일체의 수장으로서 가지시는 경륜적 특권 때문에 성부는 "우리 구속의 문제에 있어서 제일 동자이시며 개시자(the first mover and beginner in the affair of our redeption)이시다. 죄인들의 구속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하실지 말지를 결정하시는 분도 아버지시이며, 누가 구주가 될지를 결정하고 임명하신 것도 성부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영적 유익들을 얻게 하시는 분도 바로 성부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구속의 사역에서 있어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하였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구속의 중보자의 역할을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중보자는 소원한 관계 가운데 있는 두 당사자간에 중간 역할을 하는 자이며, 평화를 만드는 자이다. 성자는 성부와 성령 사이에 middle person이며, 성부와 죄인들 사이에 중보자이시다. 성부가 중보자가 되실 수 없는 것은 중보자가 유화시켜야 할 피해자 편이시고, 신격의 권리를 유지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은 타락한 인간 가운데 들어오셔서 내주하시면서 그들을 중생케 하시는 거룩과 생명의 원리이시기 때문에, 중보자는 오직 성자 한 분밖에는 없다. 내재적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보면 성자는 성부와 성령 사이에서 중재자이시고, 신적 경륜의 관점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시기에 적합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중보자 혹은 구속자의 권세와 직무는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중보자를 주실 뿐 아니라 그의 중보를 받아들이시고, 중보자의 능력과 은혜로 사놓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 주신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구속 사역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의 상호동등성(coequality)을 강조하기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삼위일체론"속에서 삼위일체의 동등성을 논하면서 "삼위는 모든 면에서 동등한 셋으로 된 공동체이고 가족이며, 이들 세 분이 모두 하나님으로서 각자 자신만의 독특한 영예를 그 공동체와 가족 안에서 지니고 있다"고 말하였다 성부는 그의 무한한 기쁨의 대상인 성자를 내어 주신 분이시고, 성자는 자신을 내어 주사 자기 목숨을 구속의 대가로 지불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구속에서 주어진 유익 자체이다. 우리는 특히 에드워즈가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전통적인 신학보다도 더 강조하고 있는 점을 유념해 보아야 한다. 즉, 전통적으로 성령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객관적 구속을 신자들에게 적용하시는 분(agent)이라고 파악되지만, 에드워즈는 성령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서 값주고 사신 유익 자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1747년에 간행한 『성경-종말에 관한 약속과 예언들-에 준하여 기독교의 부흥과 지상에 그리스도 왕국의 확장을 구하는 비상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분명한 일치와 가시적 연합을 증진시키기 위한 하나의 겸손한 시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축복들의 총체 (the sum of the blessings)는 바로 성령 하나님이셨다 . . .성령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얻어진 위대한 축복이며 모든 구원받은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다. 성령은 그분의 내주와 감화와 열매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사람들을 위하여 값을 치르고 사신 모든 영적인 축복의 총체(all the spiritual good)이며, 모든 은혜와 거룩과 위로와 기쁨의 총체이시다. 또한 성령은 내세에 있을 사람들을 위하여 그가 값주고 사신 완전함과 영광과 영원한 희락의 총체가 되신다. 성령은 영원한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이 제공하는 모든 약속들의 중심 주제가 되실 정도로 위대한 은총이다. 또한 성령은 구약에 약속되고 예언된 대로 메시아의 왕국이 가져올 축복들을 다 포용해낼 수 있는 거대한 주제가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에드워즈는 타락한 인류의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의 중요성을 제대로 강조하고, 구속 사역에서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 동등성을 명확하게 천명하게 되었다. 에드워즈는 경륜적 삼위일체론 속에서 성자의 성부에 대한 종속, 그리고 성자에 대한 성령의 종속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경륜적 질서 속에서 그러한 것이고, 결단코 삼위격의 상호 동등성을 부정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III.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위격성)
그러면 이제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위격성)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를 살펴 보도록하자 에드워즈가 서 있는 서구의 어거스틴적 전통은 성령을"사랑의 끈(vinculum caritatis)"라고 칭하므로서 제3위격을 추상화하고 비인격화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에드워즈 역시도 성령을 성부와 성자 간에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라고 말한다든지, 아니면 성부와 성자간의 연합의 끈이라고 칭하기 때문에 성령의 위격성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성령의 신적 위격성에 대해 불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성령의 신적 인격성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앞서도 보았다. 그가 보기에 "성경은 성령을 독특한 신적 위격으로 충분하게 계시하고 있다"고 한다. 에드워즈는 성령을"구별된 위격적인 행위자"로 생각해야 한다고 "은혜론"에서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성경은 성령을 한 분의 위격으로, 인격의 여러 가지 행동들을 통해 계시된 한 분의 인격으로 자주 말한다. 성경은 성령이 한 분의 인격으로서 행하심에 대해서 말하고, 성경은 단순하게 구별된 인격을 적절하게 가르키는 모든 것들을 그에게 귀속시키고 있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물론 에드워즈는 성경 가운데 인격이라는 용어는 거의(rarely) 사용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기로는 영원한 삼위 하나님의 구별,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에 관하여 성경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영어에서는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계신다’라는 말뿐이다"라고 에드워즈는 진술한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성령을 "삼위일체에 있어서 세 번째 위격(the third person in the Trinity)"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또한 에드워즈는 다른 위격들에게 신적 본질(또는 신적 속성들)이 귀속되듯이 성령께도 귀속된다는 점을 주목한다. 혹은 다르게 말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나누어지지 않고 독립적인 신적 본질"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성령께서는 두 다른 위격처럼 영원적이고 필연적인 존재이심을 말하였다. 또한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처럼" 동일한 실체,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셨으며,"신적 본질에 속하는 완전성, 위엄, 혹은 탁월성"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인식하고, 사랑하고, 이 인식과 사랑을 자기 반복하며, 그렇게 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시다고 한다. 에드워즈는 『신학묵상집』제308번에서 "성부도 이해하고, 성자도 이해하고, 성령도 이해한다. 왜냐하면 모두 동일한 이해력의 신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신만의 독특한 이해력을 지닌 것이 아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의 충만하심은"신성의 거룩과 행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령은 거룩의 영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주고받으시는 신적인 사랑이라고 불리우신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사랑과 거룩 그리고 아름다움은 동일한 성령을 가리킨다. 따라서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령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 그리고 아름다움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처럼 성령의 신성과 위격성, 혹은 신적인 위격성에 대해서 정통적인 입장을 잘 개진하였다. 심지어 에드워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성령이 어떤 의미에서는 우월성을 지닌다고 말하기도 한다. 1740년 초반에 쓴 "삼위일체의 위격들의 동등성에 관하여"라는 짧은 글 속에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밝힌다:
“어떤 면에서 성부 하나님이 우월성(superiority)을 지닌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다. 성부가 사랑하는 성자를 낳았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성자가 우월성을 갖는다. 성자는 신적인 사랑의 위대한 첫 대상이다. 말하자면 사랑을 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 보다 우월성을 갖고 사랑하는 자를 지배한다. 반면에 신적인 사랑인 성령이 우월성을 갖는다. 말하자면 신격을 지배하고 그의 마음을 다스리고 전체적으로 모든 일에서 성부와 성자 양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에드워즈는 이처럼 성령의 구별된 위격성을 분명하게 해명하려고 하였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간의 상호적 사랑이라고 해서 결코 위격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자로서 지배하고, 다스리고, 그리고 다른 두 위격에게 영향을 미치는 분으로까지 묘사되고 있을 정도이다
IV.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과 삼위일체론적 맥락에서 성령론을 논구해 보았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오랫동안 오해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현금에 이르러서는 그의 삼위일체론의 정통성을 시비하는 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에드워즈는 초자연적인 것을 모두 거부하고 합리주의적인 사고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았던 계몽주의 시대에 살아가면서, 그 시대정신에 대항하여 기독교 근본 교리인 삼위일체론을 변증하려고 하다 보니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본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증을 전개하였던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그의 글들을 읽는다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되어진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표현된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동일한 하나의 신적 본질과 세 분의 위격성(una substantia, tres pesonae)에 대하여 정통적으로 변호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삼위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same God)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삼위의 위격적 구별을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서 "삼위로 [구성되는] 사회 혹은 가족(the society or family of the three)"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고 있음도 보게 되었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성부, 성자뿐 아니라 성령의 신성과 위격성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논설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성령은 서구적 전통에서 고백해 온대로 성부와 그리고 성자에게서도(filioque) 나오시는(=출래하시는) 분이시라고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성자의 출생이나 성령의 나오심은 영원적이고, 필연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도 잘 지적하였다. 에드워즈는 성령께서 다른 두 위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셨으며, 구별되는 위격으로서의 모든 특성들을 가지셨음을 주장하였다. 사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것이 있다면 바로 성령님에 대한 이해와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간에 영원전부터 주고 받으시는 상호적인 사랑이며, 성부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며, 성자에게서 나오는 은혜 그 자체이다. 따라서 구원 사역에 있어서도 성자께서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서 택자들을 위해서 획득하신 구속의 내용은 바로 성령이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령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을 개인 신자들에게 적용하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개인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속의 선물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이 에드워즈의 아주 독특한 견해라고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면들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하게 정통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의 성령의 신성과 위격에 대한 이해도 전적으로 정통적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성령에 대한 이해는 정통적인 범위 안에서 건전한 진보를 이루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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