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신학
청교도 시대는 ‘개혁신학의 황금 광맥’이 형성되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청교도란 누구인가?
1560~1700년 까지 후기 종교 개혁기에 여러 세대에 걸쳐 잉글랜드 지방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신대륙인 아메리카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과 경건한 성도들이 주도한 교회의 청결 운동을 퓨리턴 또는 ‘청교도’ 라고 부른다. 청교도들의 공통 분모는 종교 개혁이 시작된 교회를 보다 철저히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종교 개혁의 갱신’ 이라는 표어는 신앙이란 인간들의 바램이나 요구를 따라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교회는 모든 세례 받은 영국 국민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모인 소소의 선택된 자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문헌상으로 볼 때 ‘청교도’란 말이 맨 처음 사용된 것은 1564년 경인데 이는 영국의 성공회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로마 카톨릭의 미신적인 요소들’과 ‘교황 체제’를 거부하고자 노력하던 개신교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밀턴의 용어를 빌리자면 “종교 개혁의 개혁을 위하여” 세속 정권이 발표한 교회의 정책에 맞서 교리의 확고한 정착을 위해서 노력한 운동을 말한다. 종교 개혁시대의 초기 청교도들은 후에 활약한 17세기 청교도들과는 달리 영국 성공회 내에 머물면서 갱신운 동을 주장했으며, 국가 교회 체제를 완전히 거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저을 부려할 필요가 있다. 칼빈이나 부처나 낙스까지도 감독 제도로 되어 있던 영국 교회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기성 교회 내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혁주의’라는 관점을 구현하고자 했다.
성경에 근거한 순수한 신앙생활
청교도의 신앙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은 교회가 결정하여 집성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계시로 받아들여졌으며, 모든 권위의 완벽한 근거로 인정되었다. 청교도들은 인습적인 모든 것들을 거부하였다. 1570년에 이르면 통일된 국가 교회 체제에 남아 있는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더욱 깨끗하게 청산하려는 인식이 강력하게 표출된다. 청교도들은 성직자들의 의복문제, 성상문제들과 같은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까지 열정을 갖고 거부하였다. 아마 청교도들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철저한 주일성수에 있을 것이다. 청교도들의 예배는 성경에 대한 경외심과 그에 상응하는 예배자의 조건들을 요구하였다. 그 특징은 순결성, 단순성, 그리고 영적인 것들이었다.
칼빈 신학의 계승자들
청교도들의 교회 개혁은 그 신학적인 기초의 대부분을 대륙의 종교 개혁자들, 특히 존 칼빈의 신학 체계에 광범위하게 의존하였으며, 이는 테오도르 베자 시대에 제네바를 다녀온 지도자들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시대에 청교도들이 모두 다 칼빈주의자라고 볼 때 특히 선봉에 선 지도자들은 케임브리지 칼빈주자들이었다.
청교도들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순결한 교회에 대한 염원이요, 둘째는 하나님과 선택받은 자들 사이의 언약 관계에 대한 확신이며, 셋째는 기독교화된 사회의 건설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대륙의 종교 개혁에서 영향을 받아 발전된 것으로서, 청교도 운동은 이 세 가지 원칙을 일관되게 이상형으로 간직하고 전개된 교회의 개혁 운동이요,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생활 갱신 운동이었다.
순수한 교회론
청교도들은 로마 가톨릭을 개혁한 성공회 혹은 국교회를 비롯해서 여러 교파로 나뉘어졌는데, 그 이유는 교회론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청교도의 계보
국가 교회(state church) - 성공회 또는 낮은 청교도들(conformists)
- 장로교회 청교도들 (Cartwright)
- 회중교회 혹은 독립적인 청교도들(Jacob)
분리 주의(No state church) -브라운파(Robert Brown)
-그린우드와 바로우(Greenwood and Barrow)
-스미드와 로빈슨(Smyth and Robinson)
영국 성공회는 모든 종교적 권한을 국왕에게 귀속시키고 국가의 모든 국민은 반드시 성공회 교회의 회원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점차 청교도들의 대세는 로마 가톨릭에 저항하던 것처럼 세속 정치와 교회를 분리시키는 원리를 내세우게 되었다.
토마스 카트라잇은 1570년에 감독 체제를 거부하고, 장로교회 제도를 정착시켰다. 잉글랜드 지역의 첫 장로교회가 1572년에 Wandsworth에 세워졌다.
장로교회를 따르지 않는 독립된 청교도 파의 시조는 헨리 제이콥 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회중교회나 독립교회 모두 교회 제도와 국가 체제를 부정하는 분리주의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오직 성도들은 특정한 교파가 아닌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는 교회 언약 사상을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도 있었다. 초기에 나타는 그룹은 케임브리지 출신의 로버트 브라운 이었으며 브라운 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입장에 섰던 파는 그린우드와 바로우 였다. 세 번째 분리주의자들은 존 로빈슨의 지도하에 네덜란드에 정착했다가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인도 아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이주하였다.
청교도들이 독특하게 보여준 특징적인 신앙은 무엇보다도 순결한 교회에 대한 소망이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청산하고 보다 철저하게 개혁신학을 적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불신자들마저 뒤섞여 있는 회원권을 분명히 가려 내고자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단순히 국가의 수단이거나 죄인들을 위한 옹호 집단을 넘어서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통회와 회개를 통한 회심의 체험이나 거듭남의 개인적인 경험이 없는 성도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청교도 교회의 회원 이 되려면 첫째 개혁주의 신학과 교리를 믿어야 하고, 둘째 회심의 체험이 있어야만 하며, 셋째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정치적 격동기에 형성된 청교도 신학
개혁신학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 가운데서 일반 사람들이 체험적으로 가장 먼저 변화를 느끼게 된 부분은 예배였다. 헨리 8세 시대, 켄터베리 대주교로 영국 국교회의 기초를 놓은 토마스 크랜머는 영국 개신교 종교 개혁으로 가는 서막을 준비하였다. 공동예배서와 공동기도서를 출간했지만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에드워즈 6세가 죽기전에 발표한 ‘42개 조항’에서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 강령은 시행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지배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 시도는 보다 많은 피를 흘린 후에야 출현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성공회를 그냥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신앙의 개혁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권련자에 대한 중대한 도발 행위자로 취급되어 왕당파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히고 탄압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시절에 작성된 ‘39개 조항’은 절충적인 신앙 고백서여서 중용의 도를 발휘한 것이었다. 이 고백서는 당시 영국의 정치적 혼돈의 실상이 교회에 반영된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케임브리지 칼빈주의자들
청교도 지도자들은 당대에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대학 교육의 혜택을 받은 훌륭한 ‘엘리트’들이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경국 청교도들은 국교회에 대해 철저히 비타협적인 개신교 신앙을 명백히 주장했는데, 그들에게 근본이 되는 신학 사상은 스위스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의 은총론과 예정론이었다. 1559년 통일령이 발표되자 그들은 로마 가톨릭처럼 교황의 흔적이 남아있는 성직자들의 가운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성직 제복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국교회의 예전 의식, 행정 체계과 정치적 통일성을 거부했으며 모든 성상, 그림, 조각, 십자가의 표식등 등을 철폐하고자 노력했다.
칼빈의 저술은 거의 모든 대학에서 교과서로 읽혀졌으며, 특히 케임브리지대학은 영국 국교회 제도를 거부하는 칼빈주의적인 성공회의 대표적인 중심기관으로 급부상하였다.
윌리엄 휘태커는 헬라어네 능통한 학자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케임브리지의 정통신학으로 확립시키는데 앞장선 장본인이었다. 휘태커가 실제로 믿는바를 적용했던 신천적 칼빈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면 위기프트는 칼빈을 인용한 개혁사상가였지만 이론적 칼빈주의자로 그쳤다고 볼 수 있다.
윌리엄 퍼킨스(1558~1602)는 유럽 전체에 알려닌 ‘케임브리지의 칼빈’ 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교에서 죽을 때까지 열정적인 강의와 설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영국에 칼빈주의가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성경에 기초한 매우 실천적 저술을 남겼으며 좀더 정확히 보면 베자의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케임브리지의 베자’라고 하는 것이 맞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그리스도 대학에서 퍼킨스 의 제자로 영향을 입은 윌리엄 에임즈는 칼빈의 신학을 계승하면서도 자못 다른 방법론을 가지고 접근한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저서 신학의 정소는 신학의 교과서로 널리 읽히게 되었다. 퍼킨스와 에임즈의 신학에서 중요시된 몇 가지 주제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 언약과 믿음, 구원의 확신으로 집약해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칼빈주의자로 박해를 받으면서도 영국 설교자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으면서 칼빈주의 신학을 전파한 온화한 설교자이자 교수인 리차드 십스와 성경 연대기 작성으로 유명한 존 어셔 감독, 크롬웰 기간 동안 군목으로 활동하면서 장로교회와 회중교의 통합을 위해서 진력한 존 호웨를 들 수 있다.
청교도 신학의 공통점과 다양성
신학적으로 볼 때 케임브리지 칼빈주의자들의 특징은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매우 조직적이요 논리적인 구조를 가진 신학을 구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런 매우 고답적인 신학의 주제들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문제 즉 경험주의가 대두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끝으로 기독 신자의 생활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가질 수 있도록 생산적인 작업을 하게 만들었다.
16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성공회는 주로 왕실은 비롯한 상류층에서 칼빈주의적인 장로교회는 중류층에서, 독립 교파들은 하류층에서 널리 퍼져 나갔다.
영국 칼빈주의자들 대두분이 교회의 청결 즉 교리적으로 순결한 교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는데 그들 모두가 똑같은 교회 정체 체계를 신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영국 종교 개혁운동이 유럽의 영향을 다양하게 흡수하였기 때문인데, 교회 갱신의 방침도 통일되기 어려웠다.
케임브지리 칼빈주의자 일부는 성공회의 개혁이 좀 더 발전해서 교회 정치의 감독 체계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제네바와 에딘버러의 정치 체제를 원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청교도들의 일차적인 관심은 교회 정체 제도보다는 오히려 실제적인 경건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을 대치할만한 교회 제도로서 장로교회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회중교회적인 칼빈주의자로 각광을 받았던 사람은 토마스 굿윈이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 고백 작성에 참여했으며 정치적으로 국가 단위의 감독 정치를 반대하고 독립교회를 인정하도록 주장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남겼다. 그는 정치와 교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철저히 정통 칼빈주의 노선에서 설교와 저술 사역을 했다. 존 오웬은 영향력에 있어서는 퍼킴스 다음에 놓아야 하지만 학문에 있어서는 그 시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청교도 신학의 최고봉이다. 코튼의 천국의 열쇠를 읽고 장로교인에서 독립 회중교회 지지자로 선회하였다. 상호 의견을 달리하는 청교도들 사이의 연합과 조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꽃을 피운 곳은 스코틀랜드였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 존 낙스가 돌아 오게 되면서 개신교는 교회개혁과 함께 정치 개혁까지 성공하는 놀라운 성취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개혁 교회가 자라도록 적극적인 설교를 통해서 심각하게 도전을 던짐으로써 씨를 뿌렸고, 하나님서는 잘 자라도록 돌보아 주셨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킴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언약’ 이라는 말이 ‘복리’라는 말을 대체하게 되었다. 낙스는 장로교회를 정착시키고자 스코트랜드인의 신앙 고백서를 작성하여 순수한 복음과 성경의 진리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기독교 강요와 개혁파 신조들을 참조한 ‘제 1치리서’를 만들었다. 스코틀랜드 칼빈주의는 이러한 원대한 세계를 향한 거보를 내디뎠는데 칼빈주의 목사가 배출되기도 전에 칼빈이 만든 제네바 교회 법력에 기초한 완전한 개혁방안이 제시된 것이다. 제 1치리서는 신앙 고백서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는데 이 문서는 교회를 어떻게 잘 운영하고 치리하는 가를 다룬 것으로 신앙생활을 규정하는 직접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의 교회들 마다 설교가 감상과 흥분, 쟁론과 욕설에 짜지지 않도록 감독하는 모음을 갖게 하였다.
더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나오기 까지 80여년 동안 개혁신앙의 헌장을 존중을 받았는데 그러나 지금도 '스코틀랜드인의 신앙 고백서‘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이 고백서가 훨씬 더 순수하고, 신선하고 솔직 담백하며 실제 상황에서 빚어 낸 살아있는 신앙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고백서는 모두 25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이 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는 것음 모두 다 거부한다는 원칙하게 작성되었다. 이 고백서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가장 오랫동안 칼빈주의가 영향을 미친 나라로 자리매김되었다.
청교도 운동이 전개되던 시대에 사무엘 러더포드가 그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의 경건과 기여는 교회 정치와 토이 부분에서 빛을 발휘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웨스트 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요리 문답을 크게 영향을 받았다. 러더포드의; 기념비적인 저술은 ‘법이 왕이다’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니 앞에서 평등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저술들로 인해 혼돈 없는 시민 운동의 근거가 마련되었고, 후기 칼빈 주의는 근대 유럽 국가의 건설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청교도 사상’ 이란 개인적인 신앙과 개신교 종교 개혁 운동에 가담하는 헌신적 참여 정신이 골자다. 그것은 복음의 부름에 응답하여 생동적인 믿음을 소유하고 능동적으로 순종하는 특성이 있다. 여기서 신앙 생활에의 개인적인 참여의 극대화가 이루어졌다. 청교도들은 초기부터 내적으로는 거룩한 생활을 도모하고 외적으로는 적극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칼빈이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을 슬기롭게 주화시켰다. 그들은 딱딱한 교리 중심의 이론가로 전락하지 않았고, 강압적인 율법주의로 흐르지도 않았다. 청교도들은 점점 더 경험적이요 체험적이 되어 갔다. 훗날 대륙에서 발전된 경건주의 운동의 초기 형태가 이미 청교도의 경건에서 발견된다.
제 3장 청교도 신학.hwp
청교도 시대는 ‘개혁신학의 황금 광맥’이 형성되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청교도란 누구인가?
1560~1700년 까지 후기 종교 개혁기에 여러 세대에 걸쳐 잉글랜드 지방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신대륙인 아메리카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과 경건한 성도들이 주도한 교회의 청결 운동을 퓨리턴 또는 ‘청교도’ 라고 부른다. 청교도들의 공통 분모는 종교 개혁이 시작된 교회를 보다 철저히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종교 개혁의 갱신’ 이라는 표어는 신앙이란 인간들의 바램이나 요구를 따라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교회는 모든 세례 받은 영국 국민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모인 소소의 선택된 자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문헌상으로 볼 때 ‘청교도’란 말이 맨 처음 사용된 것은 1564년 경인데 이는 영국의 성공회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로마 카톨릭의 미신적인 요소들’과 ‘교황 체제’를 거부하고자 노력하던 개신교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밀턴의 용어를 빌리자면 “종교 개혁의 개혁을 위하여” 세속 정권이 발표한 교회의 정책에 맞서 교리의 확고한 정착을 위해서 노력한 운동을 말한다. 종교 개혁시대의 초기 청교도들은 후에 활약한 17세기 청교도들과는 달리 영국 성공회 내에 머물면서 갱신운 동을 주장했으며, 국가 교회 체제를 완전히 거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저을 부려할 필요가 있다. 칼빈이나 부처나 낙스까지도 감독 제도로 되어 있던 영국 교회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기성 교회 내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혁주의’라는 관점을 구현하고자 했다.
성경에 근거한 순수한 신앙생활
청교도의 신앙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은 교회가 결정하여 집성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계시로 받아들여졌으며, 모든 권위의 완벽한 근거로 인정되었다. 청교도들은 인습적인 모든 것들을 거부하였다. 1570년에 이르면 통일된 국가 교회 체제에 남아 있는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더욱 깨끗하게 청산하려는 인식이 강력하게 표출된다. 청교도들은 성직자들의 의복문제, 성상문제들과 같은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까지 열정을 갖고 거부하였다. 아마 청교도들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철저한 주일성수에 있을 것이다. 청교도들의 예배는 성경에 대한 경외심과 그에 상응하는 예배자의 조건들을 요구하였다. 그 특징은 순결성, 단순성, 그리고 영적인 것들이었다.
칼빈 신학의 계승자들
청교도들의 교회 개혁은 그 신학적인 기초의 대부분을 대륙의 종교 개혁자들, 특히 존 칼빈의 신학 체계에 광범위하게 의존하였으며, 이는 테오도르 베자 시대에 제네바를 다녀온 지도자들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시대에 청교도들이 모두 다 칼빈주의자라고 볼 때 특히 선봉에 선 지도자들은 케임브리지 칼빈주자들이었다.
청교도들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순결한 교회에 대한 염원이요, 둘째는 하나님과 선택받은 자들 사이의 언약 관계에 대한 확신이며, 셋째는 기독교화된 사회의 건설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대륙의 종교 개혁에서 영향을 받아 발전된 것으로서, 청교도 운동은 이 세 가지 원칙을 일관되게 이상형으로 간직하고 전개된 교회의 개혁 운동이요,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생활 갱신 운동이었다.
순수한 교회론
청교도들은 로마 가톨릭을 개혁한 성공회 혹은 국교회를 비롯해서 여러 교파로 나뉘어졌는데, 그 이유는 교회론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청교도의 계보
국가 교회(state church) - 성공회 또는 낮은 청교도들(conformists)
- 장로교회 청교도들 (Cartwright)
- 회중교회 혹은 독립적인 청교도들(Jacob)
분리 주의(No state church) -브라운파(Robert Brown)
-그린우드와 바로우(Greenwood and Barrow)
-스미드와 로빈슨(Smyth and Robinson)
영국 성공회는 모든 종교적 권한을 국왕에게 귀속시키고 국가의 모든 국민은 반드시 성공회 교회의 회원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점차 청교도들의 대세는 로마 가톨릭에 저항하던 것처럼 세속 정치와 교회를 분리시키는 원리를 내세우게 되었다.
토마스 카트라잇은 1570년에 감독 체제를 거부하고, 장로교회 제도를 정착시켰다. 잉글랜드 지역의 첫 장로교회가 1572년에 Wandsworth에 세워졌다.
장로교회를 따르지 않는 독립된 청교도 파의 시조는 헨리 제이콥 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회중교회나 독립교회 모두 교회 제도와 국가 체제를 부정하는 분리주의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오직 성도들은 특정한 교파가 아닌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는 교회 언약 사상을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도 있었다. 초기에 나타는 그룹은 케임브리지 출신의 로버트 브라운 이었으며 브라운 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입장에 섰던 파는 그린우드와 바로우 였다. 세 번째 분리주의자들은 존 로빈슨의 지도하에 네덜란드에 정착했다가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인도 아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이주하였다.
청교도들이 독특하게 보여준 특징적인 신앙은 무엇보다도 순결한 교회에 대한 소망이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청산하고 보다 철저하게 개혁신학을 적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불신자들마저 뒤섞여 있는 회원권을 분명히 가려 내고자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단순히 국가의 수단이거나 죄인들을 위한 옹호 집단을 넘어서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통회와 회개를 통한 회심의 체험이나 거듭남의 개인적인 경험이 없는 성도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청교도 교회의 회원 이 되려면 첫째 개혁주의 신학과 교리를 믿어야 하고, 둘째 회심의 체험이 있어야만 하며, 셋째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정치적 격동기에 형성된 청교도 신학
개혁신학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 가운데서 일반 사람들이 체험적으로 가장 먼저 변화를 느끼게 된 부분은 예배였다. 헨리 8세 시대, 켄터베리 대주교로 영국 국교회의 기초를 놓은 토마스 크랜머는 영국 개신교 종교 개혁으로 가는 서막을 준비하였다. 공동예배서와 공동기도서를 출간했지만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에드워즈 6세가 죽기전에 발표한 ‘42개 조항’에서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 강령은 시행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지배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 시도는 보다 많은 피를 흘린 후에야 출현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성공회를 그냥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신앙의 개혁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권련자에 대한 중대한 도발 행위자로 취급되어 왕당파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히고 탄압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시절에 작성된 ‘39개 조항’은 절충적인 신앙 고백서여서 중용의 도를 발휘한 것이었다. 이 고백서는 당시 영국의 정치적 혼돈의 실상이 교회에 반영된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케임브리지 칼빈주의자들
청교도 지도자들은 당대에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대학 교육의 혜택을 받은 훌륭한 ‘엘리트’들이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경국 청교도들은 국교회에 대해 철저히 비타협적인 개신교 신앙을 명백히 주장했는데, 그들에게 근본이 되는 신학 사상은 스위스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의 은총론과 예정론이었다. 1559년 통일령이 발표되자 그들은 로마 가톨릭처럼 교황의 흔적이 남아있는 성직자들의 가운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성직 제복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국교회의 예전 의식, 행정 체계과 정치적 통일성을 거부했으며 모든 성상, 그림, 조각, 십자가의 표식등 등을 철폐하고자 노력했다.
칼빈의 저술은 거의 모든 대학에서 교과서로 읽혀졌으며, 특히 케임브리지대학은 영국 국교회 제도를 거부하는 칼빈주의적인 성공회의 대표적인 중심기관으로 급부상하였다.
윌리엄 휘태커는 헬라어네 능통한 학자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케임브리지의 정통신학으로 확립시키는데 앞장선 장본인이었다. 휘태커가 실제로 믿는바를 적용했던 신천적 칼빈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면 위기프트는 칼빈을 인용한 개혁사상가였지만 이론적 칼빈주의자로 그쳤다고 볼 수 있다.
윌리엄 퍼킨스(1558~1602)는 유럽 전체에 알려닌 ‘케임브리지의 칼빈’ 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교에서 죽을 때까지 열정적인 강의와 설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영국에 칼빈주의가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성경에 기초한 매우 실천적 저술을 남겼으며 좀더 정확히 보면 베자의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케임브리지의 베자’라고 하는 것이 맞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그리스도 대학에서 퍼킨스 의 제자로 영향을 입은 윌리엄 에임즈는 칼빈의 신학을 계승하면서도 자못 다른 방법론을 가지고 접근한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저서 신학의 정소는 신학의 교과서로 널리 읽히게 되었다. 퍼킨스와 에임즈의 신학에서 중요시된 몇 가지 주제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 언약과 믿음, 구원의 확신으로 집약해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칼빈주의자로 박해를 받으면서도 영국 설교자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으면서 칼빈주의 신학을 전파한 온화한 설교자이자 교수인 리차드 십스와 성경 연대기 작성으로 유명한 존 어셔 감독, 크롬웰 기간 동안 군목으로 활동하면서 장로교회와 회중교의 통합을 위해서 진력한 존 호웨를 들 수 있다.
청교도 신학의 공통점과 다양성
신학적으로 볼 때 케임브리지 칼빈주의자들의 특징은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매우 조직적이요 논리적인 구조를 가진 신학을 구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런 매우 고답적인 신학의 주제들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문제 즉 경험주의가 대두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끝으로 기독 신자의 생활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가질 수 있도록 생산적인 작업을 하게 만들었다.
16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성공회는 주로 왕실은 비롯한 상류층에서 칼빈주의적인 장로교회는 중류층에서, 독립 교파들은 하류층에서 널리 퍼져 나갔다.
영국 칼빈주의자들 대두분이 교회의 청결 즉 교리적으로 순결한 교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는데 그들 모두가 똑같은 교회 정체 체계를 신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영국 종교 개혁운동이 유럽의 영향을 다양하게 흡수하였기 때문인데, 교회 갱신의 방침도 통일되기 어려웠다.
케임브지리 칼빈주의자 일부는 성공회의 개혁이 좀 더 발전해서 교회 정치의 감독 체계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제네바와 에딘버러의 정치 체제를 원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청교도들의 일차적인 관심은 교회 정체 제도보다는 오히려 실제적인 경건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을 대치할만한 교회 제도로서 장로교회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회중교회적인 칼빈주의자로 각광을 받았던 사람은 토마스 굿윈이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 고백 작성에 참여했으며 정치적으로 국가 단위의 감독 정치를 반대하고 독립교회를 인정하도록 주장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남겼다. 그는 정치와 교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철저히 정통 칼빈주의 노선에서 설교와 저술 사역을 했다. 존 오웬은 영향력에 있어서는 퍼킴스 다음에 놓아야 하지만 학문에 있어서는 그 시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청교도 신학의 최고봉이다. 코튼의 천국의 열쇠를 읽고 장로교인에서 독립 회중교회 지지자로 선회하였다. 상호 의견을 달리하는 청교도들 사이의 연합과 조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꽃을 피운 곳은 스코틀랜드였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 존 낙스가 돌아 오게 되면서 개신교는 교회개혁과 함께 정치 개혁까지 성공하는 놀라운 성취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개혁 교회가 자라도록 적극적인 설교를 통해서 심각하게 도전을 던짐으로써 씨를 뿌렸고, 하나님서는 잘 자라도록 돌보아 주셨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킴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언약’ 이라는 말이 ‘복리’라는 말을 대체하게 되었다. 낙스는 장로교회를 정착시키고자 스코트랜드인의 신앙 고백서를 작성하여 순수한 복음과 성경의 진리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기독교 강요와 개혁파 신조들을 참조한 ‘제 1치리서’를 만들었다. 스코틀랜드 칼빈주의는 이러한 원대한 세계를 향한 거보를 내디뎠는데 칼빈주의 목사가 배출되기도 전에 칼빈이 만든 제네바 교회 법력에 기초한 완전한 개혁방안이 제시된 것이다. 제 1치리서는 신앙 고백서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는데 이 문서는 교회를 어떻게 잘 운영하고 치리하는 가를 다룬 것으로 신앙생활을 규정하는 직접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의 교회들 마다 설교가 감상과 흥분, 쟁론과 욕설에 짜지지 않도록 감독하는 모음을 갖게 하였다.
더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나오기 까지 80여년 동안 개혁신앙의 헌장을 존중을 받았는데 그러나 지금도 '스코틀랜드인의 신앙 고백서‘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이 고백서가 훨씬 더 순수하고, 신선하고 솔직 담백하며 실제 상황에서 빚어 낸 살아있는 신앙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고백서는 모두 25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이 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는 것음 모두 다 거부한다는 원칙하게 작성되었다. 이 고백서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가장 오랫동안 칼빈주의가 영향을 미친 나라로 자리매김되었다.
청교도 운동이 전개되던 시대에 사무엘 러더포드가 그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의 경건과 기여는 교회 정치와 토이 부분에서 빛을 발휘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웨스트 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요리 문답을 크게 영향을 받았다. 러더포드의; 기념비적인 저술은 ‘법이 왕이다’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니 앞에서 평등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저술들로 인해 혼돈 없는 시민 운동의 근거가 마련되었고, 후기 칼빈 주의는 근대 유럽 국가의 건설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청교도 사상’ 이란 개인적인 신앙과 개신교 종교 개혁 운동에 가담하는 헌신적 참여 정신이 골자다. 그것은 복음의 부름에 응답하여 생동적인 믿음을 소유하고 능동적으로 순종하는 특성이 있다. 여기서 신앙 생활에의 개인적인 참여의 극대화가 이루어졌다. 청교도들은 초기부터 내적으로는 거룩한 생활을 도모하고 외적으로는 적극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칼빈이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을 슬기롭게 주화시켰다. 그들은 딱딱한 교리 중심의 이론가로 전락하지 않았고, 강압적인 율법주의로 흐르지도 않았다. 청교도들은 점점 더 경험적이요 체험적이 되어 갔다. 훗날 대륙에서 발전된 경건주의 운동의 초기 형태가 이미 청교도의 경건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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