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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개혁신학 (나용화 교수)

by 【고동엽】 2021. 11. 6.

칼빈과 개혁신학

* 본 자료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그의 신학 사상을 요약한 것입니다.

나용화 교수

지금의 한국사회와 교계는 사회적 불안심리를 틈타 극성을 부리고 있는 시한부 종말론의 다미선교회와 김기동의 귀신론 그리고 각종의 불건전한 은사운동으로 인하여 혼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진정으로 성경적인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이며 전통적으로 우리 교회 가운데서 가르쳐져 내려온바 확실한 교리체계는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이같은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길은 칼빈과 개혁신학의 체계를 요점적으로 살펴보는 것일 것이다.


칼빈의 대표적인 저서인 기독교강요는 그의 사상이 철저하게 성경계시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가 기독교 강요를 쓴 목적도 기독교의 교리들을 단순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성도들이 성경에 쉽게, 그러면서도 걸려 넘어짐이 없이 접근할 수 있게 하려는데 있었다.


칼빈의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 곧 우리의 사랑 많으신 아버지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 하나님의 면전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 아는 지식에 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을 모든 좋은 것의 원천이신 아버지로 알뿐만 아니라 절대 주권적 소유주시요 통치자인 주님으로 아는 지식이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고 성령께서 성경으로 교회를 통해서 증거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경건을 낳는다. 그러기에 경건한 자는 하나님을 모든 좋은 것의 원천되시는 아버지로 알고 그를 사랑하며 신뢰할 뿐만 아니라 주님이신 하나님을 절대 주권자로 알고 경외하며 순종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에 의하여 강화되는바 기도는 믿음의 으뜸가는 연습이다.


칼빈의 이와 같은 중요한 관심은 그의 요리문답들에 나타나있는데 그가 1538년에 만들어 낸 요리문답에서는 “하나님 밖에는 어디에서도 영원하고 불멸한 생명을 아무도 찾아 얻을 수가 없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활에 으뜸 되는 관심사는 우리의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으며 그를 사모하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이 예외없이 하나님에게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에 모든 찬양이 그에게로 돌려져야 마땅하다”고 가르치는가 하면 1542년 제네바 요리문답에서는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고 가르쳤다. 그의 이러한 요리문답에 기초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는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진술되어 있다.


이로 보건대 칼빈과 그의 개혁신학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는데서 오는 신앙의 지식과 그 지식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우리의 생명의 근원으로 알고 그를 사모하며 찬양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해 하는 바로 그 경건을 인생의 으뜸가는 목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건은 지혜를 통해서 얻는다. 그리고 지혜는 지식을 통해서 가능한바 이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것과 인간에 대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칼빈은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과 사람에 관한 이중의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 우리로 내세의 소망을 갖도록 이끌어주는 것 그리고 우리를 참되고 온전한 행복에로 초대하는 것 등을 목적으로 한다. 이로 보건대, 칼빈이 말하는 지식은 머리로만 아는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으로 참된 예배, 내세 소망 그리고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아버지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감사하고 찬미하며 질서있고 규모있는 삶을 살므로 행복을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목적이요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어디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이 지식의 원천으로 칼빈은 세 가지를 거론하는데 첫째는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심기워져있는 신의식 또는 종교의 씨 곧 주간적 내적 계시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와 권능을 선포하고 있는 우주의 정교한 질서 곧 외적 계시이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계시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충분하게 그 효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실상 소멸되었다. 그래서 셋째로 칼빈이 강조하는바 신지식의 원천은 성경계시이다. 이 성경계시는 신적권위가 있고 스스로 구원의 지식을 증거하지만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심령 속에서 확증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이 성경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증거해 줄 때 우리의 신의식이 온전하게 회복되고 창조에 나타난 계시를 터득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풍부하게 알게 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특별한 원천인 성경은 그것의 저자가 하나님이시기에 신적 권위가 있으며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진리를 담고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절대로 필요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까닭에 완전무오하며 자명하고 또한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우리가 얻는 때 충분하여 이제 우리에게는 성경 이외의 다른 새로운 계시가 전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처럼 칼빈은 성경의 신적 권위, 완전 무오성, 필요성과 자명성 및 충분성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믿음을 심어주며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 수 있게 삶의 규범을 제시하는 등 지금도 활동적이다. 성경은 사변적인 교리서이거나 죽어있는 문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있고 활동적인 말씀인 성경 이외에 다른 계시나 환상 또는 새로운 예언의 은사를 구하는 것은 성경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요 하나님이 친히 주신 성경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지와 미성숙한 신앙 때문인 것이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유일한 원천으로 성경만을 안다. 즉 성경을 안경으로 삼을 때 주관적 내적 계시인 신의식 또는 종교의 씨와 객관적 외적 계시인 창조사역 또는 자연계가 계시로서 즉 신지식의 보조적 원천으로서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으로 믿고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신의식과 자연계를 신학의 자료가 되는 계시로 인정하지만 어디까지나 성경계시가 창조사역에 나타난 계시를 읽을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이 계시하여 가르쳐주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을 참되고 풍부하게 알 때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찬미하며 그를 즐거워할 수 있고 이로써 우리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으므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충분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시는 인격적 존재요, 작정하고 창조하며 섭리하시는 활동적 존재이시며, 사탄의 미혹으로 타락하여 악해진 인류와 자연을 구원하시는 은혜로운 분이시다. 다시 말해서 그는 피조물과 구별되는 창조주이시오, 그 피조물을 사랑하여 함께 하시고 돌보시는 구속주이시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하나님과 피조물을 구별하지 않는 범신론과도 다르며 또한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사랑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이슬람교와도 다르고, 하나님과 자연을 대립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도 다르다.


창조주이시오, 구속주이신 성경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경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가 없다.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이다.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삼위 하나님은 한 분의 단일한 하나님이시다. 이 삼위 간에는 정연한 차서가 있으며 고유한 특질에 의한 구별은 있으나 세위격으로 나뉘어진 분할은 없다. 즉 삼위 하나님은 각기 자신에 대하여 한 동일한 하나님으로서 자존하신다. 예컨대, 성자는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존재하시나 그가 성자이시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여 존재하시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성자는 성부가 아니고, 성령은 성자가 아니며, 그들은 고유한 특질에 의하여 구별되어 있다. 성부는 활동의 시작이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와 모사이시고 만물을 질서있게 배열하는 분이시나, 성령은 그 활동을 가능케 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삼위 하나님은 영원부터 스스로 자존하시는 까닭에 영원이라는 개념 속에는 시간상의 선후가 있을 수 없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가운데 시간적으로 아무도 아퍼거나 뒤서지 않는다. 그러나 위격간에 구별상 차서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가 성부에게서 낳으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신 것이다. 성자는 성부에게 전적으로 순복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뜻을 따라서 행하신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간에는 사귐이 있고 협의하여 약속하거나 자원하는 일이 있다. 서로 간에 질서있게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오히려 신적 본질의 단일성이 보전되고 적절한 차서가 유지되며 성자나 성령의 신격에는 조금도 손상이 없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전에 작정하시고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시며 항상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우리를 그의 성전삼아 교제를 나누시는 하나님의 깊은 언약적 사랑을 몸으로 체험하여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삼위 하나님은 각자 자존하시는 분이시면서도 차서를 따라 순복하는 사실을 알 때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나 서로 간에 존중하며 권위와 질서를 따라 순종하는 것이 화평과 행복에의 길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런데 칼빈은 성경에서 삼위일체교리를 가르침에 있어서 초대교회에서 나타났던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나 역동적 단일신론을 이단으로 거듭 규정하여 거부하였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새시대를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각각 분장하여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고 보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거부했으며 한편 성부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완전한 신이고 성자는 성령으로 신적능력이 충만하지만 성부보다는 열등한 피조된 신적 존재이며 성령은 권세있는 힘이라고 보는 역동적 단일신론을 거부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단일신론을 칼빈이 거부하는 것은 이같은 하나님을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도 없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 풍부한 지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성경의 가르침과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독특하고 신비하여 자연계에서는 그 비유를 사실상 찾을 수 없다고 보고 결코 예화를 드는 일을 하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예화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삼갈 것을 강력하게 권한다.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바 삼위일체에 대한 예화들은 대부분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뒷받침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만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으뜸가는 목적대로 살기 위해서는 참되고 건전한 지혜와 경건과 믿음이 필요하며, 이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이중적 지식의 유일한 원천은 다름아닌 성경임을 칼빈은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먼저 성경계시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하여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그리고나서 사람을 아는 지식에 대하여 우주창조(I권 14장)와 인간창조(I권 15장)를 다루며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이중적 지식을 체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섭리에 대하여 다룬다(I권 16~18장).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며 감사할 수 있으려면 그가 우리를 본래 어떤 존재로 만드셨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우주창조에서 우리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부성애를 깊이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하여 우주 가운데 모든 종류의 좋은 것들을 아낌 없이 만들어 놓으신 후에야 아담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좋은 것들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하고 그를 온전히 신뢰하며 우리의 희망을 오직 그분에게만 걸어야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나 하나님께 간구하고 우리의 몫으로 주어진 모든 은택은 그에게로부터 온 축복으로 알고 감사하게 받으며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고 섬기기를 힘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칼빈이 자연계를 하나님의 부성애의 표현으로 인식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그의 백성된 인류에게 선물로 베풀어 주신 이 자연환경은 우리가 함부로 경멸하고 착취하며 오염시키거나 무절제하게 낭비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잘 받아 누리고 또 잘 관리할 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다음에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 칼빈은 인간의 구성요소 가운데 영혼이 불멸적이고 더 고상하다고 보며 육체는 감옥소나 흙집과도 같다(욥 4:19)고 말하면서도 육체 자체에도 하나님의 형상과 광채가 빛나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육체의 귀중함을 균형있게 다루려 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이 또한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신 까닭에 본래 우리의 지식은 밝고 마음이 올바르며 우리가 건강하고 거룩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래서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은 그의 몸의 모든 유기적 부분들이 하나님을 잘 순종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것들이 저절로 움직여 나가도록 방임하거나 초연해 있지 않고 오히려 보존자요 통치자로서 천체를 움직이실 뿐 아니라 모든 만물을 보존하시고 양육하시며 돌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지식과 의지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눈에 우발적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은밀한 의지에 의하여 계기가 마련되어 있다.


칼빈의 섭리론에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하나님이 섭리하신다하여 인간의 책임이 면제되거나 신중한 사려분별이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섭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보전하는 방편과 수단을 제공해 주고 예방조처와 구제책도 마련해 주셨으므로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이 제공하신 모든 방편과 수단과 구제방법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즉 병들었을 때는 병원과 약품을 활용하고, 고속버스를 탈때는 안전밸트를 착용하며 건강한 체력을 위해서는 각종의 음식을 골고루 섭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말하기를 섭리에 대한 무지는 최고의 불행이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지식에 있다고 했다.


창조와 섭리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는 모든 만물과 인간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우주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창조에 속하지 않은 것이없고 우리의 역사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들 중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과 무관한 것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사역에서 그의 부성적 사랑을 맛보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을 산뢰하며 사랑하며 즐거워하고 그를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칼빈의 사상과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섬세한 손길을 순간마다 민감하게 느끼고 깊은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며 그것이 바로 건전한 경건이요 믿음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사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고서 그를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최고의 행복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건과 믿음은 앞으로 언급하게 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지만 칼빈의 사상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사역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가르침과는 달리 우리 교회와 많은 성도들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마 16:1) 그리고 칼빈 당시의 카톨릭 교회처럼(기독교 강요 ‘머리말’ 참조할 것) 항상 새로운 표적과 능력을 구한다. 칼빈은 희한한 이적들을 통하여 오히려 사탄이 미혹하고 우상숭배가 조장되어 왔다고 카톨릭 교회의 불건전성을 반박하였으나 우리 교회 안에서는 성령의 이름을 빙자하여 교회를 미혹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성령의 권능이 임할 때 입신하여 넘어지는 현상이 신구약성경과 교회사에서 있어왔다고 주장하며 집회시에 넘어지게 만드는 일을 행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말씀의 압도하는 권위 앞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발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창 17:1; 삼상 10:10; 눅 5:8) 간절하게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스 10:1) 그리고 많은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할 때 엎드릴 수 있으나(눅 22:41), 별다른 의미도 없이 집단으로 그리고 상습적으로 넘어지게 하는 현상은 성령의 권능의 임재라기보다는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 그룹에서 불안정한 심리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사용되는 최면술(mesmerism, 독일의 심리학자인 Mesmer가 발견해냄)과도 유사하다.


우리가 복음의 권세를 온전히 체험하지 못하거나 그 복음 권세 자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아니하며 또 칼빈이 강조하는 대로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섭리사역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깊은 사랑을 느끼며 감사하지를 아니하기 때문에 예수와 그의 복음을 알지못한 신약시대 바리새인들이나 중세시대의 로마 카톨릭 교회처럼 희한한 이적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본래 우주와 인간을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하셨고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섭리하시는 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인간의 으뜸가는 목적대로 살지 못하고 불행과 비참을 맛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우리의 일그러지고 추해진 모습도 제대로 보고 알아야 하는가? 칼빈에 의하면 그것은 죄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추한 모습을 제대로 보고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겸손하여져 하나님을 열심히 사모하고 그에게서만 모든 좋은 것을 기대하며 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칼빈이 말하는 죄는 무엇인가? 그는 창세기 3장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충과 불순종이 죄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경외심을 버리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충실하게 되면 배은망덕과 더불어 야심과 교만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참으로 모든 정욕을 억제하는 가장 좋은 굴레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서 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본성은 전혀 선한 것이 없을 뿐만아니라 각종 악을 생산해내며 우리 인간은 온통 육욕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의를 추구하거나 선한 일들을 행할 수 있는 아무 능력도 없다. 즉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력한 존재가 되어 버린 까닭에 완전히 죄의 포로가 되어 있어서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지의 자유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필요성을 간파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바로 잡으며 차료하기 때문에 은혜가 모든 선행에 앞선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죄와 관련하여 칼빈에게는 중요한 개념들이다. 말씀의 권위가 멸시되는 곳에 죄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 그래서 죄를 치료함에 있어서 말씀과 성령이 함께 역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교회는 말씀의 권세와 성령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 같으면서도 인간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에 앞서고 인간의 감정적 충동이 성령의 은혜에 앞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교회마다 기독교적 역사관과 세계관이 투철한 일군들을 양성하고 말씀이 삶의 모든 영역에 구체적으로 적용되게 설교하며 가르치기보다는 그저 교회에게 맹종하는 사람들을 길러내는데 관심이 많고 은혜체험을 빙자하여 감정과 충동에 호소하여 북치고 박수치며 나이트클럽이나 록음악에서나 사용되어져야 할 드럼과 전자기타가 예배시에 연주되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뜨거운 감정이 요구되고 박수치는 일도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지 않는 한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성령의 은혜가 선행되지 않을 때 교회는 윤리적으로 성숙될 수가 없으며 우리의 죄가 근본적으로 치료될 수도 없다. 복음은 감정적 일시적 치료제가 아니고 우리의 삶의 체계를 개혁하는 것이며 우리의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을 바꾸는 것이기에 우리의 신앙은 감정적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우리의 의지를 순복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교회 안에서 말씀의 권위가 우선되지 않고 또한 그 말씀을 통하여 성령이 은혜로 우리를 주장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교만과 정욕을 억제하거나 치료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두 가지 방법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면적으로 하나님은 자기의 성령을 통해서 선택된 자들의 지성을 깨우치고 마음을 개조하여 의를 사랑하고 함양하게하여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시고 외부적으로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을 고무시켜 바로 그같은 갱신을 소원하고 추구하여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의지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회복시켜 주며 그것을 교정하고 개혁하고 갱신함으로써 지도하고 규제하는 성령의 통치이다.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 죄를 제거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위한 중보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다. 하나님의 웅대한 극장인 하늘과 땅을 통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새한 지식을 거의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신다. 이는 아담의 타락 이후로는 중보자 없이는 어떠한 지식도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에 대하여 그것은 옛언약의 백성들을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그분 안에 있는 속죄와 구원에 대하여 소망을 키워주고 자기백성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요컨대, 오직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타락하여 범죄한 인간을 진정으로 도울 수가 있고 중보자 없이는 은혜로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결코 있을 수 없으므로 타락한 인간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구해야 한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시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오셨지만 실은 하늘을 떠나심이 없이 자의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시며 지상에서 다니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으면서도 여전히 그는 태초부터 그가 하셨던 대로 세상에 계속적으로 충만하셨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는 죽음을 당하실수 있는 분이시되 하나님으로서는 죽음을 이기실 수 있는 분이시다.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영원하시고 살아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부으심을 받으셨기에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세우셨던 선지자, 제사장, 왕 등 삼중의 직분을 그는 한 몸에 지니셨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어서 아버지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며 가르치실 뿐 아니라 그는 왕적 권능을 가지고 교회를 보전하고 보호하고 돌보시며 자기의 피와 살을 가지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심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 그는 구속주로서의 삼중의 직분을 성취하심에 있어서 마리아의 몸에서 낮고 비천한 사람으로 태어나 일평생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여 빌라도 앞에서 죄인으로 정죄받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친히 저주를 받아 죽으셨다. 그가 흘리신 피는 속상(贖償, satisfaction)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패를 씻어내는 물대야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에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사망에서 구출하셨다. 그리고 그가 땅에 묻히심으로 우리의 육이 죽게 되었다. 그가 십자가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심으로 그는 마귀의 권세와 사망의 공포와 지옥의 고통에 대하여 승리하셨으며 이로써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하셨다.


또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으로써 우리의 의와 칭의가 회복되고 사망에 대해 우리의 믿음이 승리하고 새로운 생명과 우리의 부활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지금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 앞에 상임 대언자로 나타나셨으며 날마다 신령한 축복들을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쏟아부어 부요케 하신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복음을 통하여 영원한 복을 지금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마지막날 심판 때에는 그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요약하여 모든 종류의 좋은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 넉넉하게 저장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다른 곳에서 말고, 바로 이 원천에서 마음껏 마셔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기의 순종 곧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사실상 확보하여 우리에게 값없이 주셨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의 의지(또는 작정), 그의 긍휼(또는 은혜), 그리스도의 공로(순종)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다. 이는 하나님 자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에서 나온 그의 작정이 우리의 구원의 첫째가는 궁극적 원인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앙이 구원의 둘째가는 방편적 근인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기독론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그의 신성과 인성이 신비하게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그래서 속성교통이 가능하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구속주이시자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제물이시라는데 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신성이나 인성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우리가 부인하면 우리의 구원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자 우리의 모범이시다. 그가 유일한 중보자이시기에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 지는 삶을 통하여 구원을 성취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범이 되신 까닭에 우리는 그를 본받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본받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생활은 성령과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가능하며 성령은 하나님의 방편으로 하여 우리 안에 믿음을 심어주고 배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구원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개인적으로 베풀어지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성경을 방편으로 삼아 믿음을 심어주셔야 한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그의 구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성령의 주관적 사역과 더불어 성령의 외적 방편(교회)을 강조한다. 성령의 주관적 사역이란 우리 안에서 믿음을 일으키는 일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띠이며 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심어주시는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만 우리가 거듭나고 회개하며 우리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의롭다 함을 받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믿음은 기도에 의하여 강화될 수 있고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택들을 받는다.


칼빈의 경우 신앙의 유일한 근원은 오직 성령 뿐이고 신앙의 유일한 기초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 뿐이며 신앙의 내용은 우리를 양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식이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참되심을 그의 말씀에서 발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없는 신앙은 뿌리없는 나무나 태양없는 빛과도 같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에서 겉돌기만 하면 그 말씀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며 성령께서 우리의 우둔함을 제거하고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 그 말씀을 깨우쳐 주실 때 믿음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신앙을 심어주실 뿐만 아니라 점진적으로 그 신앙을 장성하게 하여 마침내는 그 신앙으로 우리가 천국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와 같이 칼빈의 구원론에 있어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은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 구원을 풍성하고도 확실하게 누리는데 있어서 믿음의 주요한 행사인 기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믿음의 열매인 거룩한 순결과 이웃사랑을 통해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에 힘서야 하는 것은 비록 죄와 사탄이 우리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지는 않지만 중생한 사람 안에도 하나님의 의를 거스리는 정욕의 부패성이 거하고 있어서 죄에 대하여 우리가 일평생 투쟁하고 회개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며 죄용서의 은혜를 항상 계속적으로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와 관련하여 칼빈이 주의 시키는 바에 의하면 기도가 신앙의 순수한 표현이 되기 위해서는 즉 기도가 믿음 충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그의 뜻을 계시하고 있는 말씀에 기초되어야 한다. 기도를 불러 일으키는 신앙은 말씀에 의하여 생겨나고 말씀의 약속들을 경청함으로서 더욱 활성화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문이 열리고 틀이 형성되며 방향이 정해지고 뜨겁게 달구어진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또 그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우리 자신의 마음의 생각, 특별히 순간적인 감정적 충동을 따르거나 우리의 헛된 생각을 따라서 우리의 소원을 지어내서는 안된다. 칼빈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 비추어볼 때 우리의 기도는 너무나도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못하고 있어 보인다.


성령안에서 말씀에 기초하며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예정대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는 긍휼의 원천으로부터 연유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있을 육체의 부활을 날마다 간절하게 소망하게 된다. 그리서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구원론을 다룸에 있어서 성령의 주요한 사역인 믿음과 회개를 먼저 강조하고 그 믿음이 말씀에 기초하고 있음을 유의하며 그 믿음은 참되고 살아있는 까닭에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십자가를 짊어지는 생활에서 결실하되 우리의 참된 자기부인이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진실한 감정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케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십자가의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내세를 묵상하게 할 뿐 하니라 현실의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잘 사용하게 한다는 것을 말하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되고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 믿음은 기도로 표현되고 말씀에 기초한 기도를 통하여 믿음이 강화되며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을 확신할 뿐 아니라 최후의 부활을 소망하게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유일한 방편이요 오직 성령의 역사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방편으로 하시되 우리가 무지하고 나태하며 연약한 것을 아시고 교회를 외적 방편으로 사용하신다. 이 교회에서는 인간적 방편인 목사와 교사 및 장로와 집사 등을 세워 복음을 선포하며 성례를 잘 감당할 수 있게 한다. 칼빈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공동체 곧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지체된 성도들이 성령과 말씀으로 유기적으로 교통하는 몸(공동체)이라고 정의한다. 그러기에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이자 학교이며 교회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성도들의 교통은 두 개의 띠 곧 건전한 교리상의 일치와 형제사랑에 의해 유지되며 여기서 교리상의 불일치가 있게 되면 그것은 이단자들이요 형제사랑이 약하면 분파주의자들이다. 그래서 칼빈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그 기능을 제대로 하려면 교리상의 일치와 형제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말씀선포(케리그마), 성령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 그리고 사랑과 성령의 은사를 통한 섬김(디아코니아)이 있어야 참된 교회다. 이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감사하게 됨으로 우리의 삶이 복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복된 삶과 최종적 구원은 마지막날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우리의 몸이 부활하므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종말론을 구원과 관련하여 다루었다. 즉 믿음의 으뜸가는 행사인 기도를 다루고 나서 예정론과 육체의 부활을 다룬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참된 삶과 구원과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찾아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였고 우리가 이 땅에서 죄용서를 받아 의롭게 된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이며 장차 우리의 몸이 부활되는 것도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지금 계시는 곳이 하늘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삶과 소망을 찾아야할 곳은 하늘과 내세이지 이땅과 현세가 아니다.


이로 보건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칼빈의 관점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종말론적 전환점이다. 첫째 아담을 통해 죄와 사망이 이땅의 역사 가운데서 인류위에 왕노릇 하였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십자가의 죽음 및 부활을 통해서는 의와 생명이 왕노릇하게 되고 무질서 대신 질서가 회복되었다. 즉 하늘과 땅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며 질서를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은 되었지만 아직껏 죄와 사탄의 세력이 남아 있어서 완성되지 못하고 있으며 죄와 사탄이 심판받게 될 그 마지막 날에 최후의 완성이 있게 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개혁(즉 세상에 대한 변화)이 장차 그 날에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을 대망하면서 그 개혁운동을 이 땅에서 죄와 사탄과 대적하여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속시켜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칼빈은 시작된 종말과 미래의 종말 뿐만 아니라 복음 선포를 통한 이 땅에서의 개혁운동을 균형있게 강조한다.

출처 : Hopes&Joys - 미국 플로리다주 잭슨빌의 신앙인 모임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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