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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의 원리 / 신동식 목사

by 【고동엽】 2021. 11. 6.

칼빈주의의 원리

Ⅰ.하나님의 주권

1. 소극적인 생각들(Negative Considerations)

우리는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한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칼빈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또한 그들을 이끌어 가는 원리가 무엇인지 고찰해 봐야 하겠다. 루터와 루터주의 그리고 칼빈과 칼빈주의를 비교 연구할 때 근본 원리에 관심을 갖게 하는 기본적인 특징들이 명백히 드러난다.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이 항상 교회와 사회 안에서 취해야 할 행동 요목(program)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마음과 생활의 끊임없는 변화(renewal)를 주장했다. 이에 반해 루터와 루터주의자들은 세상에 대한 신비적이고 명상적인 태도-수동적 태도는 아닐지라도-를 나타내었다. 칼빈주의자들의 한 특징은 삶의 제 국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이 보여 주는 적극성(dynamic quality)은 칼빈주의 근본 원리가 아니다.

2. 신조에 대하여(Confessional)

칼빈주의는 특정한 나라 또는 문화에 국한되지 아니한다. 오히려 우리는 칼빈주의의 보편적 성격을 거론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화란, 스코틀랜드, 남아프리카, 호주 그리고 미국에서 뿐 아니라 헝가리, 오스트리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나라에서도 칼빈주의자들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칼빈주의는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것은 칼빈주의가 모든 민족과 문화에 대해 살아 있는 메시지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때로 엄격한 신조주의(confessionism)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칼빈주의자들은 특정한 신조의 제물로서 묘사되기도 한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존 칼빈의 신앙고백서(Confession)와 교리 문답서(Catechism)가 칭송을 받고 고백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루터의 대·소 요리문답이 루터파 교회에서 지금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듯이). 그러나 칼빈의 저작들은 민족과 문화를 달리하는 많은 칼빈주의적 교회들을 위해 작성된 그리고 그들에 의해 채택된 칼빈주의적 신조들과 교리 문답서들에 의해 대치되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칼빈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시대와 상황에 맞은 신앙고백의 상징들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신조, 하나의 교리 문답서에 의해 칼빈주의자들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교리 표준의 단일성은 칼빈주의의 보증이 아니다.

3. 교리에 대하여(Docrtrinal)

교회론에 있어서 칼빈주의와 루터주의 그리고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의 차이는 현격하다. 이 차이를 무시할 만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역사적 증거가 도외시되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보통 칼빈주의의 근본 원리는 예정론이라고들 말한다. 이것은 아마 루터주의의 근본 원리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라고 주장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신칭의의 교리는 이미 1512년에 쟈크 르 페브르(Jacques Le Fevre)에 의해 옹호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칼빈도 이 교리를 해설하였다.

종교 개혁 시대에 루터, 멜랑히톤, 그리고 부쳐(Bucer)는 칼빈 못지 않게 예정 교리를 고백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칼빈과 루터는 이 교리를 해설함에 있어서 어거스틴(353-430)을 따랐다. 칼빈이 살아 있는 동안 때때로 예정론이 논의되었는데 그것은 단 문제의 성격이 그러한 논의를 요구할 때 그러하였다.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서(Heidelberg Catechism)와 같은 문서는 결코 그 교리에 대하여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 돌트 총회(1678-1619) 이전과 또한 바로 그 총회에서 예정 교리는 그 탁월함을 인정받았으며 칼빈주의자들은 성경 진리의 옹호자들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시대에도 이 특수한 교리가 칼빈주의의 근본 원리가 되었던 적은 없다.

4. 교의에 대하여(Dogmatical)

칼빈은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또한 그렇게 가르쳤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그에게 제공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드러내시는 자기 자신의 광채임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해야 한다.

칼빈주의자들에게 두 라틴 경구(maxims) Soli Dio Glㅇ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와 Ad Majorem Dei Gloriam(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은 잘 알려져 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추구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탈취할 뿐 아니라 그(하나님)로 하여금 자신이 반사하는 광채를 받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처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은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며 인간은 그 자신 무익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의적 강조가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발견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성경적 교리를 주장함에 있어서 그들만이 유일한 존재는 아니었다.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을)란 말은 역시 다른 기독교도들에 의해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그 한 예로서 루터파에서는 이 말이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Ad Majorem Dei Gliream(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이란 표어는 기독교 시대였던 16세기에 이미 사용되었으며 후에는 약간의 변화와 함께 제수이트(Jesuits) 교단의 구호가 되었다.

더욱이 이 경구들(maxims)은, 그것들이 칼빈주의자들의 교의 사상을 규정하는데 사용될 때, 그 한계성을 암시해 준다.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교리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상대적으로 다른 교리들을 약화시킨다. 하나님의 계시는 전(全) 포괄적이며 어느 한 교리보다 훨씬 더 방대하다. 하나님의 영광 교리는 전체의 한 부분인 것이다.

5. 긍정적 접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으며 따라서 단일성(uniformity)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단일성의 결여는 반드시 통일성(unity)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칼빈주의는 하나의 근본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통일된 체계이다. 또한 이 근본 원리 때문에 통일성은 칼빈주의 체계의 명백한 특징이다.

칼빈주의에 의해 확립된 사상 체계는 보편적인 법주를 가진다. 그것은 생(生)의 모든 영역, 특히 신학, 정치학, 교육, 노동, 그리고 통신 등의 영역을 포함한다. 과연 이 체계는 칼빈주의자의 세계관이며 또한 인생관인 것이다.

칼빈주의자는 주일 날 하루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한 주간 내내 생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간다.

그로서는 생의 모든 것이 다 종교적이다. 그는 이 세계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았으며 이제는 기독교인의 사역의 장이 된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생의 모든 영역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해야 한다. 따라서 종교와 생활은 두 개의 분리된 실체가 아니다. 종교와 생활은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며, 이 종교적 국면을 나타내는 모든 소명은 하나님 면전에서 영광스러운 것이다. 구속함을 받은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에서 적극적인 태도로 사역한다. 왜냐하면 그는 주기도문의 두 번째의 간구인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기도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는 그 성취를 위해 역사하기 때문이다.

6. 근본 원리

칼빈주의의 핵심 원리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뛰어나신 자이시다. 그리하여 칼빈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 제1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다루고 있다. 칼빈 개인의 좌우명은 Coram Deo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면전에서”란 뜻이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을 보았으며 그는 성경을 통해 여호와의 눈이 항상 자기를 통촉하시는 것을 알았다. 칼빈은 범사에 하나님의 손을 인식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문은 롬 11:36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신학적으로 볼 때 칼빈주의의 근본 원리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이라는 표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중심에 계신다. 만물 위에 뛰어나신 절대 주권, 그것은 그의 독점적인 권한이다. 칼빈주의자는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속하셨으며 또한 그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신령한 계시로 말미암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도자가 되신다. 그는 만사가 코람 데오(Coram Deo) 곧 하나님 앞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生의 단 한 국면도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는 그의 全 존재, 곧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으며 또한 生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자이시다.

7. 적용(適用)

다른 개혁가들과 같이 칼빈은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 생활과 교리 문제에 있어서 절대 권위를 갖는다고 가르쳤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회복시켰으며 따라서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으며 단 하나의 질문, 곧 “성경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묻곤 하였다. 그의 생활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이 급선무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의 원리를 교회와 국가의 영역에도 적용시켰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암흑시대(Da가 Ages)초기에 폐지되었던 장로직제(長老職制)를 재도입하였다. 또한 말씀에 근거하여 칼빈은 국가가 아니라 장로들이 교회의 영적인 문제들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제네바에서 사역하는 동안 - 특히 그가 처음 그곳에 체제하는 동안-그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탄원하였으며 또한 그렇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르베투스(Servetus)의 처형에서 볼 수 있듯이 칼빈이 항상 이 분리의 입장을 고수한 것은 아니다. 한편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헌정사(獻呈辭)에서 국가-즉 왕들과 제후들 그리고 집정관들-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기록하였다. 국가는 하나님께 대하여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데 그것은 국가 역시 Coram Deo 곧 하나님의 면전에 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 원리를 적용시킴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의 영역에 국한시키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바라본다. 그러므로 제외된 영역은 아무 것도 없으며 주께서 통치하신다는 원리는 각각의 국면에서 고백되어지고 또한 선포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그들이 어떻게 듣겠느냐고 사도 바울은 외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받은 자들로 하여금 교훈을 받고 지식과 은혜 가운데 성장하며 生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는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선포하고 파수해야 하며 교인들로 하여금 범사에 그 진리에 의해 인도함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 어느 곳에서든 구속받은 자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것이다.


Ⅱ.영역의 주권(Sphere Sovereignty)

기독교인은 여호와께서 그의 피조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반면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권위를 위임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위정자들(magistrates)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께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진다. 목사들과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교회를 돌봐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파생된 권위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에 보면 이미 권위가 아담과 그의 후손에게 위임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또한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계의 영장(靈長)으로서 땅을 정복하고 문화적인 사명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윗은 인간의 위엄과 피조계 내에서의 인간의 존귀한 위치를 노래하였다. 시편 8편에서 다윗은 인간을 영화(榮華)와 존귀로 관(冠) 씌움을 받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부여받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기 때문이다. 죄는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세를 파멸시켰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8편을 주석하면서 인간이 존엄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지한 고찰을 하였다.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8-9). 그러므로 시편 8편은 타락 전 아담의 모습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시편 8편의 메시지를 성취하시며 인간의 본래적 위치를 회복시키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2. 만유(萬有) 주(主) 예수 그리스도

둘째 아담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곧 이 피조 세계에 대한 그의 구속의 임무를 성취하셨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명을 완수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하자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께 만물이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로 회복시켰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와 인간-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타락된 위치에서 회복된-은 하나(one)인 것이다.

제 2의 아담인 그리스도는 피조계의 왕으로서 만유를 통치할 권세를 부여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통치하시는 것은 그가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셨고 세계의 회복을 위해 그 근거를 마련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인간은 그의 존귀한 위치를 회복 받은 존재이며 그는 감사함으로 그리스도를 새로운 대표자 곧 피조물의 머리요, 왕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동시에 낙원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책임을 다시 한번 받게 된 것이다.

3. 영역 주권(Sovereignty of the Sphere)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이전에 이미 다른 사람들이 개체 영역에 있어서의 주권을 언급했을지라도 그는 이 원리를 우주적인 의미에서 파악하였다. 이 원리는 피조계의 모든 영역이 창조주의 법칙과 질서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시 24:1에서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카이퍼에 의하면 주권자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내가 그 대상을 지었다.
(2) 그 대상은 나에게 속한다.
(3) 나는 이 대상에 대해 법칙을 부여하였다.
(4) 이 대상의 구성 요소는 물론 이 대상은 나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사물에 대하여 주권자가 될 수 없다. 그는 자동차를 조립할 수 있고 또한 그에 자기의 기호에 맞는 형태를 부여할 수도 있으나 그는 결코 그 차량이 완전히 자기에게 종속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자동차를 만드는데 사용된 부분품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닌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의 주권자이시다.

영역(phere)이란 말은 피조물의 구조와 관련된 것으로서 바로 그 구조를 통해 온갖 사물들(식물, 동물, 인간, 모든 관계)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위치를 발견하며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동식물계에 있어서처럼 인간의 삶은 단순한 것도 또한 획일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복잡한 실재이다. 인간은 많은 영역 곧 예술, 과학, 교육,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 등의 모든 영역에 관련되어 있다. 이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는 피조계의 머리요, 왕으로서 통치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 모든 영역에 대해 계시의 빛을 발하신다.

4. 위임받은 권위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일부 영역에서 인간에게 권위를 위임하시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의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잠 8:15)라는 말씀과 라틴어 경구인 “Rex Die gratia”(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왕)라는 말은 국가의 영역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위가 위임되어 있음을 암시해 준다. 가정의 영역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과 같이(엡 5:23을 참조할 것) 남편과 아버지가 가정의 머리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회중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임명되었다. 바울은 모든 회중 교회에 장로들을 세울 것을 명(命)하였으며 또한 그렇게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위임하신 권위는 그 어떤 영역에서든 영역 자체의 본질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위정자는 시민을 다스릴 권한(authority)을 가지고 있으나 가정집이나 혹은 교회로 들어갈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권한은 다른 영역들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정상적이고 건전한 영역들 간에는 상호작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영역의 권위는 오직 그 영역의 책임자들에게 위임된 임무와 사명에 대한 관심에서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5. 제도로서의 교회

우리는 한 가지 단순한 예를 들음으로써 주어진 영역 내의 권위의 한계를 설명할 수 있다. 장로들은 회중을 돌보기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하나님 말씀의 순수성을 파수하며 성찬(table of the Lord)을 거룩히 지키며 또한 모본과 사랑 그리고 권징에 의해 교회의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장로들에 의해 수행되는 일은 영적인 것이며 장로들이 회중들에 대하여 가지는 권위는 오직 영적인 문제들과 관련될 때만이 유효한 것이다. 스미스(Smith)장로는 정기 당회에서 등록 교인인 죤스(Jones)씨가 지난 수년 동안 여러 동업상사(同業商社)들에게 자기의 부채(debts)를 지불하지 못했다고 보고한다. 많은 구역원들은 무책임이 재정난의 원인이며 죤스씨는 채권자들의 독촉에 대해 매우 냉담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스미스 장로는 죤스씨에 대해 당회가 그를 방문하거나 필요하다면 교회의 권징권을 행사함으로써 제재(制裁)를 가하자고 제안한다.

당회가 그러한 행동을 취한다면 그것은 본래의 임무를 넘어서는 행위이며 주어지지도 않은 권위를 행사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당면한 문제는 죤스씨가 비록 등록 교인이라 할지라도 전혀 영적인 영역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교인 중의 하나가 절도죄를 범했다면 교회는 마땅히-또한 국가도-그를 징계해야 한다. 국가는 범죄에 대한 법적 국면을 판단하며 교회는 영적인 국면을 판단한다. 그러한 문제는 두 분리된 영역에서의 동등한 권위를 요구한다.

6. 교회와 국가

교회는 그 직무와 예배 행위에 있어서 하나의 명백한 국면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영적 국면을 가진 교회는 제도적 교회로서 알려져 있다.

당회의 장로들은 生의 다른 국면들 속으로 들어가서 정치, 과학,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적절한 충고를 해 줄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제도적 교회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하고 부지런히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의 의무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가지고 생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켜 나가는 것이다.

제도적 교회가 교회 자체의 영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변증하는 반면 때로는 제한된 범주를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정부가 하나님의 계명을 파괴하는 행위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면 제도적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호하고 정부로 하여금 이 기본적인 명령을 상기할 수 있도록 일깨워 줘야 할 의무가 있다. 만일 정부 지도자들이 주일성수(主日聖守)를 훼방하는 정책을 펴 나간다면 전체로서의 교회는 그러한 당국자들에 대하여 항거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법을 고의적으로 파괴할 경우 제도로서의 교회는 범법하는 자들과 범법 행위를 두호(斗護)하는 자들에게 항의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은 모든 영역의 범주들과 교차한다. 그러므로 제도적 교회는 필요하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영역에서도 선포해야 한다.

7. 유기체(有機體)로서의 교회

제도적 교회가 담당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남아 있는데 그것은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 지식을 갖추고 그것을 교육, 정치, 노동, 그리고 언론 등 여러 분야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영적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성경은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생의 다른 영역들 가운데서도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는 그 어떤 암시도 주지 않는다. 그들의 임무는 복음을 증거하고 성례를 관장하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을 세워 나가는 것이다.

교권주의(clericalism)의 위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개개 신자들에게 위탁함으로써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제도적 교회가 生의 다른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노력한다면 그것은 한계선을 넘는 행위일 뿐 아니라 개개 신자들에게 주어진 권리와 의무에 대한 침해 행위이다. 모든 신자들은 산업, 교육, 사회 기관, 그리고 통신 등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성경-역자 부연)으로 하여금 친히 말씀하도록 해야 한다.

신자가 생의 그 어떤 영역에 처해 있든지 그는 Coram Deo 곧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신자의 직무는 그가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대의(cause·大業)를 발전시켜 나갈 때 드러난다. 동료 신자들과 함께 그는 성경의 가르침과 합치된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기독교 학교 공동체(Christian School Society)를 조직한다. 그러므로 그 공동체에 의해 선임 구성된 교육 위원회는 교사들을 임명하고 학교의 제반사(諸般事)를 관장한다. 즉 교육위원들은 학부모들의 지원과 함께 교육 정책을 결정한다. 제도적 교회, 곧 장로회(consistory)는 기독교 학교 공동체와 교육 위원회에 대하여 권한을 갖지 않는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교육 분야에 적용시켜 나가는 사명을 수행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개개 신자들에게 그의 권한을 위임하여 학교 교육위원의 자격으로 그리스도를 서길 수 있게 하였다. 이와같은 신자는 생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고 말씀의 교육을 적용시켜 나가며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활동적인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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