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n>성경해석학 요약
박윤선 박사는 세계 교회의 성경해석사를 화란 주석가 크레이다너스(Greijdanus)의 「성경해석의 성경적 원리」라는 책을 초역하여 제시하였다.
제1장 성경해석의 역사와 원리
1. 세계 교회의 성경해석사
1) A.D. 70-170
사도들은 신약의 사실들을 구약으로 해석하였다. 1세기 말에 로마의 클레멘트는 사도적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풍유(諷諭=비유법)적인 해석으로 기울였다. 바나바 서신도 같은 경향을 보인다.
2) 170-5세기
a. 서부학파
이 학파는 재래의 유전적(전통적) 해석 원리를 그대로 따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학파에 속한 이레니우스는 "우리는 교회로 말미암아 전승되어 내려오는 진리를 배울 것이다"고하여 교회 전통을 강조하는 해석적 입장을 밝혔다.
교회 전통을 성경해석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단과 경솔한 오석(誤釋=잘못된 해석)을 방지하는 장점이 있으나 전통에 맹종하는 것은 폐습이 될 수 있다.
b. 알렉산드리아 학파
오리겐을 대표로 하는 이 학파는 과도한 풍유적 해석을 택했다. 이 해석법은 성경의 역사를 중시하지 안고 성경에 감추어진 신령한 의미를 찾는 데 중점을 둔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성경 전체가 풍유라고 하였고, 오리겐은 "성경에는 공각(空殼=빈껍질)이 하나도 없고 각 문자까지 영감되었다"고하여 계속된 문자에서도 신령한 의미를 추구하였다.
성경에는 풍유적 요소들이 없지 않으나 성경 전체가 풍유라는 것은 오작이다.
c. 안디옥 학파
성경의 인간적 요소를 중시하여 문법적, 역사적 해석 원리를 따르는 학파이다. 추상성을 피한다는 점에서 좋으나 간혹 성경의 진정한 영적 의미를 무시하는 점에서 유감스럽다.
3) 중세 시대
이 시대는 독자적인 시대가 아니라, 고대 교부들의 해석법을 집합해서 종합적인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나 한편 위클립 같은 학자는 이 시대에도 개혁주의 해석가였다.
4) 근대의 그릇된 해석 원리들
a. 소시니안파의 해석
성경해석에 인간의 이지를 도구로 사용할 뿐 아니라 그것을 진리 판단의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성경을 오석했다.
b. 재세례파의 해석
성경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고 일개의 경험 문서로 보고 성령의 내증만을 중시하였다. 성경의 글자들을 무생명한 것들로 보고 성령을 받은 인물들에게는 성경이 불필요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성경의 객관적 가치를 모른 오해이다.
c. 레몬스트랜쯔(Remonstrants)의 해석
이 학파는 중립불편의 태도로써 성경을 해석하겠다는 학파로서 전통과 교리에 예속되지 않고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인간의 이지를 성경의 신률(神律)이상에 두는 것으로서 인간의 이지 자체가 편견이 없는 줄로 착각하여 합리주의적 해석으로 전락될 위험이 있다.
d. 합리적의 해석
이 학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도 않고 성경을 인간의 지식과 지연에 의하여 해석하는 학파이다.
e. 편해주의적 해석
여자적 해석의 극단과 지나친 영해의 극단이다.
f. 심리적 해석
이 학파의 대표 슐라이엘마허는 성경 저자들의 심리작용의 독특성을 살려 해석하려고 했다. 각 저자의 독자적 심리를 강조하여 성경 전체가 성경 한 저자의 일관성 있는 작품임을 무시한다. 또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은 무시하고 일반과학적 방법에 의해 저자의 심리는 파악하려는 착오를 범한 학파이다.
g. 양식사학파
궁켈로부터 시작된 이 학파는 성경(특히 공관복음)이 본래 정체가 없는 설화로 있다가 구전을 통하여 다소 변이되어 후에 현존의 정형이 나타났다고 보고, 해석자는 현존의 정형에서 전승사를 통하여 부가 또는 감삭된 요소들을 탐지하고 그것을 제거 또는 첨가하여 설화의 원체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것은 성경의 역사적 진실성(눅 1:1-4)을 무시한 것이고, 성경이 유일회적 역사적 계시임을 무시한 오류이다.
5) 개혁주의적 성경해석
개혁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성경의 자증과 성령의 내증으로) 가경을 성경으로 보지 안으며, 성경의 필연성, 완전성, 충족성, 명백성을 믿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억지해석하는 것을 금하며, 원어에 의해 문법적으로 해석하고 역사적으로 해석하며, 정당한 추론을 인정하고, 교회의 전통에 예속되지 않으면서도 역사적 교리를 중시하고, 의미가 불분명한 구절은 분명한 구절에 의해 해석하되, 성경해석의 최종심판은 성경 자체로 본다.
2. 한국교회 주경사
1) 한국교회 초창기(약 1900-1936)
교회가 은혜롭게 정통을 보수하며 발전하였으나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가 만족스럽게 사용되지는 못했다. 이 시대에는 구역성경(개역은 1937년 완역)이 사용되었는데 구역은 번역상 부족한 점들
(예 : '언약'이 '허락'으로 번역한 것이나 "옛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으나"라고 번역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성경해석에 정확성을 기하기가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초창기 지도자들 중에는 세대주의 사상이 농후한 자들이 많아서 신구약의 통일성을 살리지 못하는 면도 드러났다.
이 시대의 성경 주석은 또한 칼빈주의적인 주석을 드러내지 못하고, '복음주의적 경향'으로 많이 흘렀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체험과 에화가 중심을 이룬 점.
(2) 교회와 사회의 구분을 막연하게 보여주는 대다수의 신자들이 현실과 국사에 대하여 도피적인 태도를 취하게 한 점,
(3)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왕성한 점에서 드러난다.
이 시대의 한국교회는 또한 성경을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근본주의는 구약을 신약으로 설명하는 것과 신약을 구약으로 해명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빈약하다. 근본주의는 구약 속에 신약이 예언됨에 있어서 전면적으로 그렇게 된 사실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2) 현대주의 주석 운동
1938년에 나온 아빙돈 주석은 현대주의 사상이 표현된 것으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를 등한히 하였다. 이 주석은 출 6장이 모세가 부름받은 사실을 말해주는 제사문서 (P)라고 하는 고등비평을 그대로 따른다. 출 7:3-5에서는 종교진화론을 주장한다. 출 10:21-23에 기록된 흑암 재앙은 사막의 모래 바람 때문에 된 듯이 말하고, 출 14:12-13의 홍해기적을 동풍으로 바닷물이 물러간 것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을 배제한다. 이 주석은 이렇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따라 인간의 철학과 합리에 의해 문제를 다룸으로써 성경의 풍부한 영적 양식을 끌어내지 못했다.
3) 보수주의 주석 운동
장로회 총회는 1934년 "표준 성경해석"을 교계에 내어 놓기로 결정하고 박형룡 박사가 편집부장으로 수고하였다. 제일 먼저 욥기, 시편 주석이 한 책으로 간행되었고, 뒤이어 잠언, 전도, 아가서 주석,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이사야서 주석, 요한복음 주석, 창세기 주석, 마가복음 주석, 사도행전 주석 등이 간행되었다(1961년까지). 이 주석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보수주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믿는 학자들이 집필진으로 의뢰되었고, 그들은 학구적/비판적/통일적/실용적/정통적 주석을 시도하였다.
이 시대에 표준주석 운동 외에 개인들의 주석 운동이 있었다. 통합측의 이상근 박사의 주석은 교계에 많은 유익을 주고 있고, 성결교 김응조 목사의 성서 대강해가 한국교회를 많이 돕고 있다.
제2장 성경해석의 원리
1. '해석학'이란 명칭
'해석학'(hermeneutic)이란 원래 '번역하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후에 어려운 시를 설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마침내 해석의 법칙을 연구하여 체계화하는 과학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것은 예술이 아니라 과학이다. 왜냐하면, 해석의 법칙을 체계화 내지 조직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성경해석의 필요성
로마교회는 "성경의 비밀"이란 교리 하에서 성경해석권은 성직자가 독점하고 최종 해석권은 교황에게 있는 것으로 교육하지만, 개혁교회는 '성경의 명백성'이란 교리하에서 신자면 누구나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성경이 명백하다면, 성경을 해석할 필요가 있는가? 성경은 명백하지만 인간은 죄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명백한 성경 내용을 오해한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명백한 성경의 풍부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피상적으로 보면 오해될 수 있다. 예컨데,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오해했고, 제자들이 "나사로가 잔다"는 말씀을 오해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피상적으로 보지 말고 깊이 연구 해석할 필요가 있다(시 119:18).
3. 성경해석 방법의 기초로서의 계시 의존 사색
(1) 자유주의의 불가능성
인간은 자력과 자유로써는 절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 1:20-21).
자율주의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 중립적이고 편견없는 자세로써 우주를 바로 알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도 알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재판장의 자리에 앉는 것으로써 인간 타락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면, 인간이 과연 하나님 없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인간 스스로 편견없는 중립성을 취할 수 있는가?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창조자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인데, 지율주의는 이 사실을 무시하는 편견과 편파성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율주의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무시하고 비절대가 절대와 자신을 동등시하는 편견이요 반역이다.
눈은 빛을 통해서만 만유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눈은 마땅히 빛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눈이 빛을 무시하고 스스로 만유를 편견없이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눈은 암흑만 볼 뿐 아무것도 바로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바른 지식을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은 마땅히 창조주를 인정하고 창조주에게 의존해서 인식할 수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우주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자율주의이니 이것은 언어도단이다.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창조주에게 의존해야 바른 인식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은 타락해서 어두워졌기 때문에(엡 2:1) 자유적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망원경을 써야 보이는 것을 육안으로 보려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인간 역사는 불행하게도 자율주의로 흘러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나간 자들이 많다. 헬라 철학의 초점으로 플라톤 철학을 보라. 그는 인간이 스스로 영원계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영원을 알 수 있는 지능을 속성으로 가진 영혼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을 필요도 없이 자유적으로 이상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플라톤의 신생관을 극단적으로 이해한 클레옴브로터스는 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떠나면 자동적으로 이상세계에 갈 줄 알고 높은 벼랑에서 떨어졌다. 플라톤의 자유주의 오류를 이 극단적인 예에서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또한 현상세계가 이상세계에서 유출되었다고 하였다. 이 말은 현상세계가 하나님(이상세계에 속함)의 피조물이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이상세계와 일체라는 뜻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유출론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유주의이다.
(2) 계시의존 사색
이상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은 피조물이고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존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셨다. 이것이 계시이다. 하나님은 신현(theophany)과 예언과 이적을 계시의 방법으로 쓰셨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정점 계시로 주셨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들이 기록된 성경으로 전승되었다. 인간은 이렇게 기록된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산 음성"이요, "피조물에게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편지"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기운을 우리에게 불어넣는다."
(3) 교회 역사상의 타율주의와 자유주의
- 고대
사도들의 사상은 계시의존적 타율주의였다. 이것을 어거스틴이 이어받아 하나님의 계시지식에 준거한 추론적 인식론을 주장했다. 인간에게는 불가사의한 것이라도 하나님은 다 아시므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여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여지지 못한 자는 찾아 만날 수 없는"분이라고 했다.
- 중세
중세의 스콜라 철학은 14세기에 전성시대를 맞았고 그 대표가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을 사용하여 교리들을 변호하였다. 이것은 명백히 자유주의로 다시 접근한 경향이다.
여기서 신학이 철학을 사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 박윤선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기타 철학자의 사상을 비판하고 형식상으로 어느 정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일에 있어서 그것과 협력하는 행위는 배척되어야 한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에 이웃 나라 물자 같은 것을 이용한 일이 있으나 그 나라와 더불어 합작하여 성전을 지은 것은 아니다. 제 2차로 성전을 재건할 때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합작하기를 원하였으나 진정한 유대인들은 그것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중세대 스콜라 철학이 반유신론 철학을 채용하였으니, 그것은 성전을 건축하는 데 있어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협력을 받는 것과 같은 잘못이다."
스콜라 철학의 영혼론을 예로 들어보자. 스콜라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본질로 보지 않고 하나의 덧붙인 선물(donum syperadditum)로 보았다. 타락으로 인간이 상실한 것은 덧붙인 선물인 하나님의 형상 뿐이고 인간의 본질에는 지식적으로 크게 상실한 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계시 의존 사색이 아니라 인간 자율적인 추론적 사색의 소산인 것이다.
- 종교개혁
(신인협동설)
루터교회는 신인협동설(synergism)을 교리로 채택하였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로운 행동영역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그만큼 포기한 사상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역을 절대성있게 신종(信從=믿고 따르지)하지 못한 기맥을 내포하는 불충족한 유신론이다.
(알미니안주의)
알미니안 주의는 신인협동설보다 더 심하게 인간의 자율사상으로 기울었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길에서 장애물을 치워버린 정도의 일을 하셨고 인간은 그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배척할 수도 있다고 본 사상이다.
(칼빈주의)
칼빈주의는 절대 주권자인 인격적 신을 믿으며 계시의존 사색을 한다. 성경을 유기적으로 전체와 문자에 이르기까지 영감된 책으로 원본에 있어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다. 칼빈주의는 이렇게 철저한 계시의존 사색을 하는 학파이다.
4.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박윤선 박사는 이상과 같은 계시의존 사색을 성경 해석법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것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성경은 성경으로라야 해석된다는 개혁주의 원리를 우리는 그대로 믿는다."
그렇다면 성경은 성경의 해석자(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성경을 가지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읽어서 깨달은 것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기타 어떤 책들도 참조하지 말라는 뜻인가? 박윤선 박사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성경해석 원리 속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했다.
(1) 예수님의 성경해석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구약 해석법을 보면, 우선 예수님은 성경의 단일성을 인정하심으로써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할 근거를 제공하셨다. 가령 율법과 선지서가 다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말씀이나(요 5:39, 6:32, 눅 24:25-27) 율법과 선지서의 요점이 윤리적으로는 사랑(마 7:12)이라고 하심으로써 구약의 단일성을 지적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성경을 추론적으로 해석하였다. 가령 부활을 증명하실 때에 출 3:16에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말씀에서 하나님은 산 자들의 하나님이시므로 족장들이 죽었으나 부활하여 살아 있다고 추론하신 것이다(마 22:23-32). 여기서 역사적인 해석주의를 암시적으로 금하신 것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또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마귀를 물리치신 사건에서 보여주셨다(마 4:5이하). 마귀를 대적하실 때 성경을 인용하신 것은 예수님이 성경의 절대권위를 인정하신 점도 보여준다.
예수님은 또한 역사적 성경해석을 중시하셨다. 이혼의 부당성을 역사적 형편을 고려하시는 방식으로 논증하셨다.
예수님은 성경을 일개 경험문서로 제자들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보시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상대하는 보편문서라는 것을 보여주셨다(마 15:7, 8:, 사 29:13, 히 1:1).
(2) 문법적 해석
사상 교환 수단인 언어가 사상 오해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신약도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해석자가 직접 들은 것이 아니어서 명쾌한 맛이 없다는 사실, 저자의 이론을 금방 파악하기 어려운 점, 문맥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깨닫기 어려운 점, 기록된 사상에 동감하기 싫어하는 점 등으로 인한 난관이 있다. 뿐만 아니라, 언어 자체의 본질상 생겨나는 난관들도 있다. 언어는 단체 생활의 구체적인 표현이라는점, 서로 다른 단체 사이에 표현을 달리하는 면이 있다는 점, 언어가 진리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점, 언어가 인류의 죄악으로 혼란하고 어두워졌다는 점 등으로 인한 난관이 있다.
박윤선 박사는 이러한 사실들을 크로솨이데(F. W. Grosheide)의 「해석학」에서 그냥 요약 소개했을 뿐, 언어의 불완전한 본질과 성경의 무오성과의 갈등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해석자는 언어의 본질과 신약 헬라어의 특성을 고려하면서 동사의 형태나 단어의 위치, 문장구조, 비유나 풍유 등을 살펴 해석해야 하는데 이것이 문법적 해석이다. 이 해석법은 또한 병행문구를 고려한다. 그러나 본문의 관점에 따라서 표면상 동일한 병행구도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더욱이, 세속문학의 문구가 표면상 병행구(竝行句)일 때는 성경 본문의 문맥을 기준으로 해석 비판하면서 참조해야 한다.
(3) 역사적 해석
본문이 관련되어 있는 시대나 환경의 요소들을 찾아보는 해석으로 여기에서 고고학이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들은 다만 참조할 뿐, 세속 역사를 성경 본문 보다 우월하게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
(4) 심리적 해석
본문에 나타나 있는 말씀이나 행위의 동기를 살펴보는 해석으로 그 동기의 배후에 하나님의 계시 운동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만일 이 사실을 잊으면 성경을 단순히 인간의 작품으로 취급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5) 학문적 해석
해석자에게는 일반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예컨대 어학, 철학, 심리학 등이다. 또한 신학적 지식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6) 영적 해석
이상에서 언급한 과학적, 신학적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지식이다. 성령의 인도 없이는 성경해석을 바로 할 수 없다. "성경에 대한 생명 있는 교통과 성령님의 조명"이 있어야 성경을 바로 해석할 수 있다
이상의 해석법들을 사용할 뿐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비로소 "성령님이 의미하신 참뜻, 곧, 모든 시대의 신자들에게 주신 교훈, 곧 그리스도 중심의 뜻"을 찾아낸다. 이런 '깊은 의미'(sensus
of plenior)를 찾는다는 관점에서, 영적 해석은 그 이전의 모든 해석법을 쓰고 난 후에 고려하는 '종합적해석'이라 할 수 있다.
(7) 해석자의 중요성
이상의 해석법이 중요하지만 해석자도 역시 중요하다. 개혁교회는 로마교회처럼 개인의 해석권을 배제하는, 그런 교회의 해석권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해석자의 자격이 무엇보다 먼저 교회에 부여되어 있는 만큼(롬 3:2), 교회의 택함을 받은 신학자가 특수한 해석작업을 할 수 있다.
해석자는 성령을 해석의 주인으로 모시고 의지해야 하며, 그리스도가 계시의 중심임을 기억하고 모든 중요한 부분에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막을 발견하고, 교회의 교리를 중시하되 그것이 최종 권위가 아니라 성경 자체가 최종권위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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