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의 흐름
제 4 장 현대신학의 도전
Ⅰ.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한국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1. 보수주의 신학의 정립
한국 교회는 보수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선교사들에 의하여 자라왔다. 특히 한국의 장로교회는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의 신학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초대 선교사 윌리엄 헌트는 1889년 이미 북장로 선교사 중에 성경 유오설을 말하는 한 사람의 선교사로 평양 신학교 설립자 마포삼열로 지적한다. 당대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였던 평양 신학교는 복음적 성격위에서 기독교의 근본 진리와 신조를 철저히 가르칠 것을 주안점으로 한다. 이러한 보수신학의 입장은 그 다음 세대의 선교사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선배 선교사들이 뿌린 신앙을 따라 일제 말엽, 신앙탄압의 시기에 한부선(Bruce Hunt) 선교사 같은 분은 선교부에서 한국 철수를 결정한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신앙보수를 위해 수난당하는 한국 성도와 함께 기꺼이 감옥을 택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세계 교회가 놀라울 만큼 단기간에 급진적인 신앙의 성장은 오늘에 와서 자유신학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신학적 혼선과 함께 급기야 교회의 분열현상으로 나타났다.
자유주의 신학의 한국교회 침투를 잠복기, 발아기, 성장기로 나눌 수 있다. 잠복기는 1934년까지 즉 신학지남 권두언 사건이 일어날 때 까지를, 발아기는 1934-1940년까지 조선 신학원(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이 설립될 때까지 그리고 성장기는 조선 신학원이 생긴 뒤에 그 출신들이 오늘날 기독교 장로회를 주도하고 있는 현재까지로 볼 수 있다.
2. 자유주의 신학의 잠입과 득세
간하배 교수는 그의 “한국 장로교 신학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침투 요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캐나다 선교부 중심으로 자유주의적 선교사 서고도(Scott), 프레이저(Frazier)등의 영향, 2)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학적 좌경화에서 오는 점차적인 좌경 신학적 영향, 3) 일본 유학을 하는 동안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임으로 생기는 일본 신학의 영향, 4) 초대 선교사들의 교구 조정으로 일부 지역이 자유주의 신학의 성역화되어 버린 사실등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초기 선교사들이 딱아놓은 신앙의 터 위에 후기 선교사들은 자유주의적 한국 교회 건설에 수종들어 신학노선의 궤도수정에 큰 몫을 한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유일한 보수주의 신학의 보루로 1920년대까지 건재해 오던 프린스톤 신학교가 1920년대 후반 교수진의 개편으로 말미암아 점차 좌경화됨으로 그 뒤에 프린스톤에 갔던 유학생들이 귀국하여 이전에 배웠던 보수주의 신학자들과는 다른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게 되었고 이것은 곧, 미국 신학의 싸움의 한국판 재연이자 연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당대 한국 교회 내에서 특별히 캐나다 선교부의 지지로 인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대거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 지역적이고 부분적이었지만 함경도 출신이 많았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목회자 양성을 바라보는 견지가 보수주의 선교사들보다 먼저 있었기에 유망한 후진들을 캐나다나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반면에 보수주의 선교사들은 국외보다 국내에서 후진 양성을 하면서 결국 선교사들보다는 낮은 후진교육에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한국 내 자유주의 잠복기에서 발아기까지 가장 큰 사건은 1934년 남궁혁 박사와 가까운 사이로 “신학지남”을 통한 김재준박사의 자유주의적 사상이 노출된 권두언 사건이다. 그는 신학지남을 통해서 동정녀 사건의 여자잉태문제, 표적을 이적으로 볼 수 없다는 초자연주의에 대한 도전 등, 무려 여덟 편이 넘는 자유주의적 논문을 발표하였다. 신학지남은 평양신학교의 학지이자, 한국 장로교를 대표할 만한 유일한 신학적 방향성을 제시한 학술지였다. 이일로 편집위원이었던 박형룡박사는 남궁혁 편집장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신학지남과도 관계를 끊어버렸다. 한국 교회사학자 김양선 교수는 김재준을 통해서 한국 교회에 자유주의 신학이 싹트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이런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교수와 가장 큰 신학적 대적은 박형룡교수였다. 두 사람은 같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같은 학교 출신이면서 신학적 상반된 입장을 취한 것은 1920년대까지 보수주의 신학의 보루로 건재해 오던 프린스톤 신학교가 교수진의 개편으로 신학이 점차 좌경화 된 이유 때문이다. 메이첸을 위시하여 몇몇 분들의 교수들은 미국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다. 박윤선, 명신홍, 이상근 목사 등이 수학한 분들이다. 이런 변혁을 겪는 동안 박형룡 박사는 개편 전 프린스톤 신학을 했고 한경직, 김재준, 송창근 박사 등은 개편된 이후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에 수학을 했다. 따라서 김재준의 불평은 신학지남을 통해서 이미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가 1929년을 기해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는데 유독 평양신학교만은 보수 신학의 입장만을 고수 할 수 있겠는가의 의문이었다.
박형룡 박사는 평양 숭실대 시절에 미이 배위량(W.M.Baird) 박사, 마포 삼열 박사 등의 칼빈주의 신학 입장을 받아들여 신앙의 기초를 닦았다. 숭실대 학생시절 그는 전도 여행중 멀리 목포에서 행한 ‘강한 설교’ 때문에 일본 경찰에 붙들려 반년의 옥고를 살았던 때가 있었다. 후에 프린스톤 신학교에 핫지, 워필드, 메이첸 노선의 철저한 칼빈주의 보수 신학으로 그의 신학 사상을 굳혔다. 1953년 장로회 신학교 교장 취임사에서 그는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들은 학생들에게 명확한 신학적 자아 의식을 가지도록 학적으로 교육하고자 한다. 우리 학생들은 근대 신흥한 모든 비사도적인 신학 사상에 대항하여 사도적 전통의 바른 신앙 입장을 명확히 인식하고 또 그 위에 확고히 서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모든 신학설을 다 섭취하되시비 판단을 똑똑히 하여 정확한 결론을 지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 신학의 수립이란 결코 우리가 어떤 신학 체계를 창작함으로가 아닌, 사도적 전통의 정신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 우리 교회가 70년 전 창립되던 당시에 받은 그 신학을 우리 교회의 영구한 소유로 확보함을 이름이다.” 그 당시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대립은 박형룡 박사와 김재준 교수와의 대결 구도로만 설명이 다 된 것은 아니다. 이때 일본 유학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적지 않은 신진신학자들이 한국 교회에 돌아와서 보수 일색이었던 한국의 신학 판도에 이미 총회적으로 그리고 교회의 평화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슈가 되었던 것은 창세기 저자 문제와 교회 안에서 여자의 지위 문제 그리고 감리교에서 출판된 자유주의 성경주석,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과 “적극 신앙회”라는 단체, 무엇보다도 일제말엽에 일본 정부의 신사참배 강요사건이다.
또 한 차례의 파동은 1940년 4월에 정식으로 ‘조선 신학원’이란 이름으로 서울에서 새로운 자유주의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초대교수로 채필근, 김영주, 함태영, 이정로 등, 그 신학적 성분으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다. 그후 송찬근, 김재준, 윤인구, 한경직 등 새로운 교수 보강을 한다. 1946년 그동안 장악했던 교권의 여세를 몰아 남한에서는 총회 직영 신학교로 단독 인정을 받는다. 따라서 평양신학교와 대결을 목표로 한 것을 이루게 된다. 그후 남한의 장로교의 모든 목사들은 속절없이 이 자유주의 신학을 배울 수밖에 없어 다시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 보수 신학교를 하나 새로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시대적 요청에 의해 주남선 목사를 중심으로 이약신, 한상동 목사등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가 세워졌다. 이렇게 해서 서울에는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지금의 ‘한국신학대학교’의 전신 ‘조선 신학교’와 부산에는 ‘고려 신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만주 봉천신학교에서 가르치던 박형룡 박사를, 1947년 10월 고려 신학교 초대 학장으로 모시기 위해 송상석 목사는 구사일생으로 38선을 뚫고 모셔오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의 거세를 위한 노력으로 1949년 4월 19일 서울에서는 또 하나의 옛 평양신학교의 재생을 의미하는 장로회신학교를 창립한 것이다.
출처: DANIEL OH 2010.03.18 12:05 http://blog.daum.net/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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