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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 제3부 신약 성경신학 (박윤선 목사)

by 【고동엽】 2021. 11. 4.

성경 신학 제3부 신약 성경 신학
제 1장 : 언약론
마1: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 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고(창12;3) 또한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고 하셨는데(창22:18)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것(갈3:16)과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원 축복에 참가할 자들이 많으리라는 것이다.(롬4:12,23~24)
뿐만 아니라 다윗에게 주신 언약도 역시 메시야를 중심한 것이니 예를 들면 삼하7:12~17의 말씀이다
마1;1의 말씀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각각 주셨던 그 언약들을 함축한 계시로서 아브라함과 다윗은 그들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약속을 받은자들의 대표자들이다.


1. 종교와 언약
인간은 피조물일뿐더러 타락한 죄인이므로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과 권리를 가지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자비의 덕에 의하여 인간을 찾아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 비로소 진정한 신인 교통이 열리는 언약 관계가 성립됨으로서 진정한 종교가 성립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이며 이 외의 다른 종교들은 엄정히 따지면 모두 다 자연신론이나 범신론에 근거한 것이니 만큼 그것들은 종교로서 상대할 계약적 대상을 가지지 못하였다.


1)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독생자를 보내셔서 구속 사업을 이루시는 것만큼 우리는 언약 성취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이 언약 성취는 현제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사건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받으며 그 말씀을 통하여 거룩하여지는 은혜를 받는다.(벧후1:4)


3) 언약 성취로 되는 구원은 신자들에게 위로를 주는데 곧 환난의 때나 시험의 때에 우리의 심령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고 끝까지 견디게 하여 준다.
그 이유는 구원의 은혜가 광대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그 약속들이 진실 그 자체이며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약속들이 모두 “아멘”이 되어 확실히 성립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2. 언약에 대한 역사적 고찰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취하신 솔선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1) 계약(언약)의 의미
계약이란 것은 인격과 인격이 결성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인격으로 상대하시고 계약적으로 관계해 오신다.


2) 역사상에 나타난 언약의 종류
(1) 행위 언약
하나님께서 아담을 상대하고 정하신 것인데 아담이 지키지 못하여 벌을 받게 되었다.


(2) 은혜 언약 : 하나님께서 아담이 지키지 못하여 받게 된 벌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다시 세우신 것이 은혜언약이다.
① 옛 언약 :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설정하신 예약적인 언약 (참조 : 출24장)
② 새 언약 :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우신 언약이다.(마26:26~28, 눅22:15~20)
?언약의 피(마26:28) : 제물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약의 당사자들인 죄인들에게 아무런 부담 언약도 받지 않고 자기 홀로 그들에게 모든 구원 축복을 베푸실 뿐이다.
이처럼 은혜 언약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그 구원을 언약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믿음을 방편으로 하여 그들에게 거저 주실 뿐이고 인간 자력으로 얻는 것이 결코 아니다.


3) 언약들의 관련성
(1) 새 언약과 옛 언약과의 관계
옛 언약도 행위적 언약이 아니고 은총에 의한 언약으로 율법과 예언은 그리스도와 모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서 옛 언약에 있어서 율법 수행의 요구도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택한 백성답게 행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2) 은혜 언약과 행위 계약과의 관계
은혜 언약은 행위 계약(아담에게 지적하였던 것)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실현 또는 완성시키는 새로운 방도로서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키셨다.(고전15:45~49)


3. 언약의 성취로서의 기독교 구원론
1) 언약의 전개
삼위의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인류를 구원하실 언약을 의정(議定) 설치하셨는데 그것이 곧 영원한 언약이요 이 영원한 언약에 뒤이어 역사상에 나타난 것은 행위계약과 은혜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조종적(祖宗的)인 은혜 언약(창3:15)의 발전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창12,15,22장), 모세에게 주신 언약(출19:5~6, 24:8, 신29:13), 다윗에게 주신 언약 들이 모두 다 옛 언약에 속하면서 은혜의 성격을 띤다.


2) 은혜 언약의 성취와 관련된 신약의 사상
(1) 은혜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솔선하시며 전담하시는 단독으로 역사하신다.
(2) 구약의 예언들은 언약에 속한 것들이고 구약의 말씀들은 신약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성취 되었으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의 구원 운동은 구약이 성취된 열매이다.
(3) 구약 계시는 실질적으로 신약 계시와 동일하다.
(4) 구속 받은 사실을 전제로 하여 율법을 주시는 원리는 아브라함이 칭의를 받은 후에(창15:6) 주님 앞에서 올바르게 행해야 될 지시(창17:1)를 받았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은혜를 받아 애굽에서 나온 후에 그들의 생활이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사실(출20:2)에서도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구원 운동은 자초지종 언약(혹은 약속)과 은혜의 원리에서 움직이는데 이것은 구약이나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도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제 2장 : 산상 보훈의 구원론
1. 팔복에 나타난 교훈
팔복을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을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그 반대 사실을 가르친다.


1) 처음 네 가지 복
사람이 자기에게 의가 없음을 발견하는 단계들을 말씀하신 것으로 “심령이 가난하다”고 함은 사람에 대한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의를 가지지 못하였음을 발견한 것을 말함이며 “애통 한다”는 것도 자기에게 옳은 것이 없고 죄만 있음을 보고 회개함을 말함이며 “온유하다”는 것은 위아 같이 자기에게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처분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려는 태도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함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자기의 죄를 원통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 곧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그 의를 얻으려고 갈망함을 말하는 것이다.


2) 다음 네 가지 복
여기서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자가 된 후에 신자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가르치시는데 “긍휼히 여긴다”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받은자가 아직 그 의를 받지 못한 가련한 사람들을 볼 때 불쌍히 여김을 말함이며 “마음이 청결하다”함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중생함을 받은자가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섬김으로 그 영혼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더욱더 많이 알게 됨을 말함이며 “화평하게 한다”함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과 화목한 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할 때 복음을 듣는 자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것을 가리키며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다”함은 신자로서 받을 가장 큰 복이기 때문에 맨 나중에 말씀하신 것이다.


2. 율법 완성 자이신 은혜의 구주 예수
예수님께서 자신은 율법을 패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함이라고 마5:17에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도록 율법을 완수하여 주시는 이는 예수님 자신이시라는 엄숙한 선언으로서 자신의 백성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은혜로운 메시야의 선언인 것이다.


3. 율법을 해석한 도덕적 표준
마5:17~7:29의 말씀은 소망 없는 율법 주의적 선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 받게 되는 도리를 간접적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참된 율법의 표준은 높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지키기 어려움을 주나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기대하도록(믿도록) 가르친다.


1) 피상적인 바리새주의와 반대되는 예수님의 영적 율법관
예수님께서는 구약이 메시야이신 자신을 증거 한다고 하셨으며(요5:39) 구약의 말씀들이 자기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고(마5:17) 마5:21~에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반대하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 해석과 교훈을 반대하신 것이다.[참조 : 마5:21~22,27~29,33~34,38~39,43~44] 그리고 예수님이 산상 보훈에서 해석하신 율법 앞에서는 누구든지 자기의 무능함과 죄인 됨을 깨닫고 그리스도만 신뢰하도록 만들어 준다.


2) 산상 보훈에 있어서 예수님의 율법 교훈의 필요성
(1) 율법을 바로 알지 못하는 자는 죄를 바로 알지 못하고 죄를 모르는 자는 속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 있던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율법관을 교정해 주실 수밖에 없었다.


(2)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이 속죄 자이신 처지에서 인류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성립됨을 가르치시면서 은혜가 율법을 폐지하지 않는 것도 가르치셨는데 그런 의도에서 행위 계약도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① 우리 인격에 죄책감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사죄의 행복감도 그만큼 계속될 수 있다.[성경에 은혜 언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위 계약이 계속 고소하고 있다.]
② 행위 계약이 폐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것은 그 청구하는 것이 그 존재의 이유이며 진리는 진리대로 나타날 뿐 행위 계약은 은혜 언약 때문에 그 자체의 사명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③ 산상 보훈은 예수님의 계시의 완료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왜곡된 율법관을 교정시키는 교훈이며 이 과정에서 율법을 그대로 해명하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④ 예수님의 명령 속에는 그 명령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그는 손 마른 자에게 “손을 펴라”고 명령하심과 동시에 그 손을 펼 수 있는 능력도 주신 것이다.


3) 하나님의 자녀들의 행동원리
마6:1~18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행동 원리와 바리새인의 행동을 대조시켜 말씀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은 외부에 나타내기 위해 행하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내적이고 신본 주의로 행해야 된 다는 것이다.




제 3장 : 천 국 론
1. “천국”이란 말의 배경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사용한 “천국”(마3:2, 4:17)이란 말의 단어는 구약에 없지만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사상이 많이 있는데 천지를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점과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점에서 왕이시며 메시야 대망 사상들일 그것이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천국 사상은 중간시대(말라기 이후부터 예수님의 초림까지)에 나온 계시문학[예 : 솔로몬의 시편, 12족장의 언약서, 에녹서, 모세의 승천}에서도 약간은 비추어 지지만 그것이 배경이라고 간주 할 수는 없는데 그것들에는 천국 개념이 일정한 형태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상은 천국을 중심했지만 계시문학의 사상은 천국을 중심으로 하지 않았다.


2. 천국 운동과 교회
천국 운동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내포하면서도 더욱 광범위한 하나님의 약속 성취와 완성을 바라보는 우주적인 구원 운동이고 하나님의 교회는 그 택하신 백성을 말한다.


3.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전파하신 천국의 일반적 특징
1) 하나님 중심
천국 운동은 하나님 중심 사상에 근거하고 보아야 되는데 구속이 아무리 중요할 지라도 그것은 천국 운동 자체가 아니라 그 운동의 선물에 불과한 것이다.
천국 운동은 하나님께서 창조자이시며 언약자이시며 왕이시며 구원자이심을 보여주는데 신약은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시작하고 또한 그것으로 마친다.


2) 능력 중심
복음서는 천국에 대하여 장소적인 의미보다 운동적인 의미를 세우며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씀(마3:2,4:17)은 인격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포함하여 그 인격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중심이 되어 모든 일들을 나타낸다.


3) 메시야 중심
메시야의 탄생과 함께 천국의 임재가 증거 되었는데(눅1:32~33, 1:5~14) 메시야의 임함과 천국의 임함을 병행시키고 있으며 메시야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것도(마3:11) 메시야의 구원 운동과 심판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4) 장래성 혹은 미래성
세례 요한은 그의 전도에 있어서 “장래의 진노”란 말로 천국의 미래성을 표시하였고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세의 형편과 미래의 축복에 대하여 많이 말씀하셨다.


5) 현재성
천국의 현림(顯臨)은 종말적 최후 계단을 의미하지 않고 과도적 내림(來臨)을 의미한다.
이것은 악한 자의 활동 기간이 아직 남아 있어서 활동하는 가운데 천국 운동을 방해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참조 : 눅22:31~32, 눅4:13, 마12:43~45, 13:24~28]
(1) 천국의 현림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이기신 사실이 증거 한다.(눅11:20~22)


(2) 천국의 현림은 예수님의 이적이 증거 하는데(마11:5 단7:13~14) 이적은 천국의 임재를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것인데(눅1:17~20) 그 능력의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그의 이적은 복음 전도와 함께 그 이적을 보는 자들에게 천국에 들어가는 여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의미 있는 것이었다.(마12:30, 13:58)


(3) 천국의 현림은 복음 전도로 증거 된다.(마11:5)
“복음”(복된 좋은 소식)이란 말은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한 것이다.(사52:7)


(4) 천국의 현림은 신자가 현재 이미 구원을 소유한 사실로 증거 한다.(마13:44, 눅19:9)


(5) 천국의 현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로 증거 되는데 예수님께서 땅에 오셨을 그 때에 현재적으로 온 것이다.
①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마3:17) 변화 산상에서 세 제자가 그 말씀을 들었다.(마17:5)
② 예수님께서 절대적인 권위로 행하신 행적들은 그가 땅 위에서 그의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신 사건들이다.[참조 : 마11:27, 눅10:22, 마11:2~6, 눅4:17~19, 요5:39~47, 마7:23, 25:12, 마11:28, 마10:32~42]


(6) 천국과 계명의 관계로 증거 된다.(마19:12, 눅12:33)


4. 천국의 도래에 관한 문제
다가올 천국에 대한 대망의 구절들은 마10:23, 막9:1, 13:30 등이 있고 그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가까운 장래에 내세 천국이 임할 듯이 가르치시는데 임박한 천국 대망 구절들의 의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신약 시대가 완전히 올 것을 내다 본 것이다.


5. 천국과 대종말의 문제
대 종말은 신약적인 구원 역사의 종점으로서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미 이루어진 새 시대에 분리 될 수 없는 종점이므로 그것이 이미 현 시대와 맥을 통하고 있다.




제 4장 : 공관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
신약의 “그리스도”[Cristov"]란 말은 구약의 “메시야”[aj;yvim]=기름부음 받은자]란 말의 헬라어역으로 그리스도는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강림하신 세상의 구주이시다.


1.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
요일2:22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였고 공관복음에서도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사실에 대하여 증거 한다.[참조 : 마16:16~20, 11:25~27]


1) 예수님의 자증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이 구약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사실을 거듭 주장하셨다.(눅4:17~21)


2) 복음서의 초자연성에 의한 증거
복음 문서는 초자연적 성격을 지녔는데 예수님의 메시야 격과 신성에 대한 증언이 있고 또 ① 하나님의 아들(막1:1) ②다윗의 자손(마1:1, 9:27, 15:22, 20:30~31, 22;41~45) ③ 인자(마12:40, 16:27, 막8:31, 13:26,29, 14:62, 눅9:44) ④ 성부의 모든 것을 받으셨다고 자증(마11:27, 눅10:22) ⑤ 사죄의 대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심(막2:9~11) ⑥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언(막1:15) ⑦ 마귀의 왕국을 절대권으로 제재(마12:22, 막1:25~26)등 이런 초자연적인 말씀들이 성역 초기나 성역 말기에 똑같이 나왔으며 이와 같은 초자연성은 역사성과 합체(合體) 되어 있다.


2.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가 반드시 수난 당하셔야 할 이유는 인류가 범죄하고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저주 받은 인류를 구원하실 구주는 백성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보스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자기를 이사야서 53장의 “여호와의 종”에 해당하는 메시야로 생각하시고 마20:28을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이 두 사상 사이에 서로 부합하는 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1) 생명을 준다는 사상(사53:12)
2) 섬긴다는 사상(사53:11 = 70인역대로)
3)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적인 봉사의 사상(사53:11)
4) 속가를 지불한다는 사상(사53:5)




제 5장 : 사도 요한의 신학
1. 그리스도론
1) 영원 전재하신 로고스의 화육
요한복음의 로고스[lovgo"]론은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본 구약의 사상이다.


2)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① 일반적신자설 ② 성령적신자설 ③ 종교 윤리적신자설 ④ 역사적신자설이 있는데
벤트는 요한복음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자격이 일반 신자들이 갖는 하나님의 자녀의 격과 동일한 내용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평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성구들을 곡해한 오류이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존재론적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모든 신자들은 역사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진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을 가리키며 예수님 자신은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영원하신 신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뜻이다.[참조 : 요1:34~36, 시82:6]


2. 요한복음과 영지주의
1) 실현된 종말론
불트만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구속 사업이 요한복음에서는 영지주의의 표현으로 발견되며 예수님께서는 전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말씀으로서 그는 빛으로서 소경된 자들을 밝혀 주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고(요9:39) 생명과 진리이신 그는 계시자로서 모든 구원과 축복을 가져오며 진리에 속한 자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시며 그는 자기 사업을 완성하신 후 땅에서 들리어 하늘로 올라가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시며 그렇게 하심으로 저들을 하늘로 영접하시는 그곳에 이르는 길이시다.”라고 하는 표현들에서 영지주의의 신화 사상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구속이란 것을 현재적 실현으로 말하며 요한복음에서는 종말적 사건이 현재에 이미 실현된 것으로 이와 같은 사상은 유대식 종말론과 다르다.
그러나 불트만의 학설이 옳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신약의 모든 책들에 시종일관 수평선적으로 하나님의 세계 심판 기록된 모든 것을 다 제거할 수가 없다.
(2) 신약이 말하는 구원사의 수평선적 시간관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하나님께서는 때가 찼을 때 성취하신다.)
(3) 영지주의는 언제나 미래의 전망을 가지지 않지만 요한복음은 현재에 실현되는 종말론 속에도 미래의 전망을 내포한다.
(4) 사도 요한은 요5:28~29에서 명백히 수평선적인 역사의 심판을 말하고 있으며 6장에서도 역시 그렇게 말한다.


2) 중생
불트만은 요3:3의 “중생”이란 용어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어느 정도는 영지주의의 사상 내용을 채택하였다고 했으나 그 문헌들의 대부분이 그리스도 이후의 것들이라는 것에서도 그들의 과오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중생”이란 말이 구약에는 별로 나오지 않지만 구약에 중생 사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구약의 중생 사상이 신약에 헬라의 용어로 표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약에는 “양심”이란 말이 없지만 양심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인간의 심리에 대하여 구약은 많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신약에 이르러 비로소 “양심”이란 말로 표현된 것과 같다.


3) 윗 세상과 아래 세상의 대조
불트만은 요한복음의 아랫 세상과 윗세상의 대조(요8:23)를 영지주의 사상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잠15:24의 말씀에 이런 대조적인 표현이 있는데 이러한 구약의 사상들이 신약에 이르러서는 좀더 명확한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심
불트만은 윗세상과 아랫 세상의 대조는 영지주의 사상인 것만큼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셨다는 신약의 사상도 영지주의에 속한다고 하는데 영지주의 사상 가운데는 구속된 구속자란 사상이 있는데 그는 선사 시대의 원시인으로서 친히 물질을 이기고 나타나서 물질 속에 갇힌 후대의 영혼들을 건지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너무도 사실에서 이탈된 것으로서 영지주의의 것은 비역사적인 신화에 불과하지만 요한의 증거는 역사적인 인물에 관한 것이다.
공관복음의 그리스도께서 선재하셨던 분으로서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다는 사상과 “내가 왔다”는 사상(마5:17, 눅12:49~51)은 분명히 하늘에 계셨던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상은 예수님께서 친히 알려 주신 것이다.


5) 예수님과 하나님의 부자 관계
요5:20의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부자 관계에 대한 기록을 불트만은 영지주의의 현상세계를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영지주의 사상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사상은 요한의 사상과 다른데 요한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고 구약의 예언 성취라고 말했다.


6) 생명을 주시는 이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살아남
요5:25을 물트만은 영지주의 신화인 만데안 문헌[① 생명의 음성이 부르짖는다. 깨어 있는 귀는 듣는다. 어떤 자들은 듣고 살아나고 어떤 자들은 계속하여 잔다. ② 생명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믿고 그것의 교훈을 받아 죽음을 미워하고 생명을 얻는다. ③ 혈육으로 된 자들의 영들이 생명의 소리를 듣고 믿으면 생명의 집에서 존전에 거하게 되리라]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나와 있는 만데안 문헌의 내용은 사도 요한의 사상과 아주 다르다.


(1) 만데안문헌에서 사람의 영혼에게 외치는 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가상적인 우주적 실존인 반면 요한은 역사적 인물이며 인간성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2) 만데안문헌에서는 성령을 가리켜 흑암의 신이라고 하며 예수님을 가리켜서 거짓 메시야라고 했는데 어떻게 사도 요한이 이런 괴이한 문헌에서 그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3) 만데안 문헌은 A.B. 7세기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학자들이 공인하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 마호메트의 이름도 나오기 때문이며 비록 그 문헌 중에 부분적으로 그리스도 이전 것으로 생각되는 것도 있지만 거기에 포함된 사상은 파사의 이원론과 관련되어 있다.


(4) 만데안 문헌에서 말하는 구원론은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라고 하나 사도 요한의 구원론은 신자들의 부활을 구원의 완성으로 본다.


7)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심
요6:51~58의 말씀을 불트만은 기독교 성찬과 관련되었다고 하며 그 성찬은 헬라 종교들의 신비적 의식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헬라의 신비의식은 연대적으로 사도들보다 훨씬 뒤에 생겼으며 더욱이 요한복음 6장의 성찬은 유월절 양을 먹는 구속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8) 하늘 세계에 대한 요한의 사상
요14:1~6의 말씀을 불트만은 여기서 언급된 내세 소망이 유대적기독교의 색채를 지니지 않고 개인 본위로 말하는 영지주의의 신화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영지주의의 내세관은 범신론적이며 유출설에 속하며 그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이라고 하며 그것은 마치 광선이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것과 같다고 한다.
[헬메티즘의 책 Libelius 1:25~26 : 승천에 대하여 몸이 용해되면 하늘들을 통과하게 되는데 첫째 하늘은 일이 증감되는 곳, 둘째 하늘은 악한 계획들이 있는 곳, 셋째 하늘은 사람을 속이는 정욕이 있는 곳, 넷째 하늘은 교만을 다스리는 곳, 다섯째 하늘은 거룩하지 못한 용기와 담력이 다스리는 곳, 여섯째 하늘은 부하기를 원하는 악한 욕심이 있는 곳, 일곱째 하늘은 사람을 해하려는 거짓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인데 영혼이 이 모든 하늘들을 지나서 여덟째 하늘에 있는 본체에 올라가 그 본래의 능력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완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들의 사상은 별세한 영혼이 질적으로 하나님과 재 연합함과 점차 성화되어 하늘 세계로 올라감을 의미하며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사상이다.
그러나 요한의 구원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단독 역사로 말미암는 구원론(요14:2)이며 성경은 성경이 사람의 말로써 기록 되었지만 성령님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므로 정확무오하다고 증거 한다.




제 6장 : 오순절 성령 강림
사도행전의 주요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속죄 사역에 대한 성령의 증거로서 예수님께서 땅에 계실 때 약속하신 말씀과 같이 그가 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다.


1. 오순절 성령 강림의 장소
제자들이 모였던 곳은 성전이 아닌 개인의 다락방이었다.(행1:12~14, 2:1~4)
이때의 성령 운동은 구약의 예배의식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외부적 제도에 매이지 않고 교회를 위한 개인 심령의 성전화를 위주 한다는 것이다.[건물 성전의 휘장은 이미 찢어졌다.(마27:51, 눅23:45)]


2. 하나님의 약속 성취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 욜2:29을 믿고 기다렸으며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눅24:49에서 이 성에 유하라고 하신 최후적인 부탁까지 들었으며 예수님의 승천하시는 광경을 직접 보았고(행1:9~11)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와(눅24:52) 다락방에 모였는데 그들이 대망하던 아버지의 약속 성취라는 것은 종말론적 성격을 띤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약속이 바로 베드로가 설명한바 성령 강림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3. 오순절 성령 강림의 목적
성령강림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시려는 것인데(행1:8)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건의 완성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다시 살지 않으셨다면 죽음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가 정복되지 않았다는 뜻이 되며 승리자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사탄이라는 뜻이 된다.
우리의 구원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일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보장하는데 ① 그의 메시야격 ② 그의 하나님 아들 되심 ③ 구원의 은총 ④ 그의 높아지심 ⑤ 칭의 ⑥ 영적축복의 근원 ⑦ 부활 ⑧ 교회의 기초 등을 보장하는데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이런 복된 일들이 성립될 수가 없다.


4. 성령의 세례
세례란 언약에 참가함을 말하는데(고전12:13) 성령의 세례는 불신자로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어 언약 백성의 단체(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말한다.


5. 방언의 은사
행2:1~4은 성령 강림에 따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방언은 이 세상 여러 나라들의 언어였다.(행2:8)
우리는 오늘날의 방언을 사도들의 역사에 나타났던 그 시대의 방언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지만 현대의 방언 운동에는 많은 그릇된 방언들도 드러나는데 그러한 방언들은 물론 금지되어야 한다.
다만 방언을 함으로 자기에게 유익한 줄 아는 이는 고린도 전서14장의 교훈을 지켜야 될 것이며 성경의 교훈을 지키면서 참된 방언을 하는 운동이 있다면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조심해야 하는데 교회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방언이 있기 때문이다.


6. 선교 운동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선교 운동이다.
행2:1~4의 성령 강림 묘사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바람 같은 소리”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과 함께 나타난 사실이다.
그 때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위에 임하였다고 했으니 120명 개개인 위에 각각 타나났었다는 것과 각 사람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니”라고 한 말씀도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이처럼 생명의 역사는 증거의 역사(혀의 역사)를 동반하는데 성경에서 “불”은 심판과 정복의 의미를 가진다.
이같이 생명의 역사와 증거의 역사는 한 성령님의 동시적 운동으로 생명이 있는 곳에는 증거의 운동 혹은 정복의 운동이 동반하는데 창조 질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생결이 되게 하시고(창2:7)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8)고 하신 것처럼 구원 질서에 있어서도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새 생명의 성령을 주셨으니 생명을 받은 그들은 “혀”로써 복음을 증거 하는 운동을 통하여 세상을 정복하도록 되어 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각국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구원역사)”을 말한다고 하였으니(행2:11) 이것이 그 사실을 가리킨다.




제 7장 : 종 말 론
1. 실존주의 종말론
실존주의 신학자들은 신약의 종말론을 수평선적인 미래로 보지 않고 수직선적인 현재로 보는데 그것을 가리켜 신학계에서는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부른다.
실존주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종말이란 것을 바로 이해하는 자는 그것을 역사의 끝이나 멸절과 혼동하지 않는 자이며 종말은 오직 어느 때나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초자연적인 우주 변동의 시대에도 종말은 가까웠다고 말할 뿐이므로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은 오늘이나 미래에 대해서 언제나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불트만은 요3:18의 “벌써 심판을 받은 것 이니라”란 말씀에 근거하여 심판이 극적인 우주적 사건임을 부인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다.
그러나 요3:18의 “벌써 심판을 받은 것 이니라”란 말씀은 전후의 맥락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래에 당할 불행도 있지만 그 판가름이 이미 현세에서 나타났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2. 신약의 종말론
1) 종말이 가까웠다는 사상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종종 종말이 가까웠다는 말씀들을 보게 되는데[참조 : 롬13:12, 고전7:29, 빌4:5, 약5:8,9, 벧전4:7] 그것은 시간에 대한 양적 관점이 아니라 질적 견지에서 그렇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신약 시대의 시간 성격이 이미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히1:2)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생각되었는데 신약 시대의 복음 운동은 곧 종말 운동의 일부로서 구원 운동의 미래적 완성 후에 실현될 종말론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종말의 시기 문제
주님의 재림 시기에 대하여 복음서와 서신부의 말씀은 복잡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지 않은데 계20:1~6의 말씀은 여러 가지 해석을 산출할 만큼 복잡하다.
(1) 자유주의적 후 천년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초월적 하나님과 영적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그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도덕가로 여기고 그의 교훈으로 세상이 점점 진화되어서 지상낙원이 세워지게 된다고 믿는데 그것이 천년왕국이란 것이다.


(2) 보수주의적 후 천년설
미래적 황금기로 구속받은 공동체의 최적의 상태로 마 24장의 대 환난, 살후 2장의 배도 사건이 이미 지나가버린 것으로 해석함으로 세상이 점차 복음화 되고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간의 긴장을 올바로 알지 못한 결과이다.
[주장하는 학자 : 어거스틴, 핫지, 댑네이, 스토롱, 위필드, 갬벨, 뵈트너.......]


(3) 무 천년설
천년 왕국을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여 재림 전까지 그리스도가 성도들과 더불어 이 세 상에서 통치하는 전 기간을 바로 천년 통치 기간으로 이해하는 견해이다.
[주장한 학자: 아브라함 카아퍼, 바빙크, 벌콥, 보스, 해밀턴, 머레이, 헨드릭슨 그리어]


(4) 전 천년설 :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과 역사적 전 천년설로 나누어진다.
천년 왕국에 대한 양대 견해의 지지자는 거의 반반인데 그 이유는 신학 교리상의 문제가 아니라 묵시 문학인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천년’이란 기간의 이해와 그 해석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인데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몇 가지 기준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좋다.
① 종말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② 성경은 종말론적 과정에 대한 신비주의적 계시가 아니라 그 목적과 결과에 중점을 두는 객관적 진리를 선포한다.
③ 성도는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연구 자세를 견지하는 가운데 종말이 가까움을 인식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담대한 소망으로 늘 깨어서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제 8장 : 신약의 윤리
신약이 가르치는 윤리는 세속적 윤리와 다르다.
1. 윤리를 명령하시며 실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세속의 윤리 철학자들은 윤리의 내용을 교시할 뿐이고 그 실현을 가능하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윤리의 내용을 교시하실 뿐만 아니라 그 윤리의 실행을 가능하게 하여 주시는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윤리의 표준은 그의 말씀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고 하신 이 말씀이 비록 짧지만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사랑해야 할 것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단지 소극적으로 자기에게 해로운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공자의 도덕률과 같지 않으며 상대방의 행위에 좌우되지 않고 그에게 유익한 것을 행하라는 적극적인 사랑의 도덕률일 뿐만 아니라 여기에 “원수사랑”(레19:18, 눅6:27)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높은 도덕률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겠는가에 대한 방법이다.
인간 자신은 전적으로 악하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신약의 교훈인데(롬3:10~18, 엡2:1)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백성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의를 완전히 이루심으로 믿음으로 그와 연합한 자는 죄악의 통치에 완전히 해방되며 그의 부활의 능력(성령)이 그를 믿는 자들의 생활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계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높은 도덕률을 실행 가능하게 해 주신다.(골1:9~12)


2. 내부 주의적 윤리
예수님께서는 외부주의에 치중하는 바리새주의를 반대하셨고 책망하시며 인간의 행위가 그의 심령 속에서부터 판단을 받아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참조 : 마5:21~22, 마5:28, 마6:1,
마6:3~4,6,18, 마15:8~9]
1)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여 선을 행함[참조: 눅7:47, 롬12장, 요일4:11]
2)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고 선을 행함(종말론적 상급)
3) 성령감동과 인도하심으로 선을 행함[참조: 고후5:17,벧전1:22~23,요일3:6,9,갈5:22~23]
4)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하여 선을 행함


3. 신본 주의적 윤리
1) 교회와 관련된 윤리
로마서12장은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1절의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크로솨이데는 “성도는 생활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물”로 해석했고
보스는 신약의 윤리 성격에 대하여 “사람이 행해야 할 의는 하나님을 그 근원으로 하며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있다 또한 하나님에게 판단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2절의 말씀 역시 신본주의 윤리를 보여 주는데 성도의 행동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행함으로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3~10절에서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전체를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을 가르치며 11절은 형제 사랑을 그리고 12절은 사랑과 관련이 없게 보이지만 사랑이란 소망심과 수고를 동반하는 것(고전13:7, 살전1:3)을 알게 하며 또한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생활로 이루어지게 되므로 그 말씀도 사랑에 부합된다고 여겨진다.


2) 국가와 관련된 윤리
롬13:1~7의 말씀은 성도가 국가 관련해서도 역시 신본주의로 행해야 될 것을 보여준다.
인류 사회에는 여러 가지 분야가 있는데 가정, 과학, 예술, 공예, 상업, 산업, 농업, 교회 등으로서 이 모든 분야는 하나님께서 각각 그 임무를 실행하도록 임명하신 것이니 만큼 각기 자체의 분야에서 절대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국가나 교회나 기타 어떠한 사회단체 같은 외부의 세력이라도 그것을 침해할 수 없는데 만일 침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분야에 대표시킨 권위를 침해함이다.
그러나 롬13:1~7에 언급된 정권에 대한 성도의 순종은 어디까지나 정권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을 명령하지 않을 때에 국한 된 것이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의미에서 집권자들에게 순종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지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지의 여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터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간접적 역할에 대하여 “교회는 국민과 공무원들의 양심에 영향을 줌으로써 국가에 간접적 감화를 끼칠 수 있으며 그들의 양심이 기독교 정신대로 되어 질수록 국가는 종교와 도덕에 있어서 더욱 하나님의 법에 가까워지는데 ① 복음을 전할 때 인간 생활의 전반(정치포함)에 적용되는 하나님 말씀의 원리들을 가르치게 된다. ② 성도가 시민 생활에 관계되는 성경의 원리들을 해명해야 한다. ③ 기독교는 신문이나 모든 선전 기관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반인의 환심을 얻으며 그들을 감화시키도록 힘써야 한다.” 교회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가야 한다고 했다.


3) 신앙 양심의 자유와 신본주의
롬14장에서 성도의 신앙 양심의 자유 곧 아디오포라(adiaphora)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어떤 고기를 먹는 문제와 종교적으로 절일을 지킴에 있어서의 날짜 문제와 같은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도는 자기의 신앙 양심의 결정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것인데 이 자유는 결코 자율주의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대로 행한다는 것이니 그것 역시 신본주의에서 고려된 자유인 것이다.






제 9장 : 바울의 신학
1. 바울의 개종 체험의 성격
바울의 개종 체험은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되어있는데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사도적 권위를 성립시킨 것으로(고전9:1, 15:8) 이때 바울은 환상을 본 것이 아니고 하늘이 열려서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 초자연적 사건이었던 것이다.[참조 : 행22:14~15]


2. 바울이 본 예수 그리스도
바울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비평가들의 말과 같이 인간을 신화하는 사상이 아니며 종교 사학적으로 유래한 것도 아닌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친히 깨달은 바이다.


1)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화설
이들은 마가복음을 가장 믿을 수 있는 문서라고 하며 예수님은 단지 도덕적 인물에 불과한데 그의 제자들과 바울이 절대화하여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잘못된 주장을 하는 자들이다.
신화라는 것은 흔히 그 관계 인물이 지나간 지 오랜 세월 후에야 나오는 법인데 그리스도의
(1) 동정녀 탄생 기사가 들어있는 누가복음은 예수님 당시의 인물로서 바울의 동행 전도자였던 의사였던 누가가 기록한 것이다.


(2) 기독교의 본질은 어떤 중요한 관념들(혹은 이상들)을 인류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속죄의 사건만을 전파하는 것으로 그 사건의 역사성과 진실성으로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하므로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는 어떤 이념들을 가르치기 위한 신화주의 종교들과는 정 반대가 된다.


(3) 신화주의는 타락한 인간이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고로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념을 그대로 표시할 수 없어서 자기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만드는 행동으로서 신화라는 것은 모든 자율주의 종교에만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서 이루어진 진리로서 신화주의를 파괴하며 기독교는 계시 의존주의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신화주의를 배척한다.


(4) 사도들의 전도는 기독교의 중심 사상이 아니라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들을 사실대로 증거하는 기독교의 중심 사건들로서 이들은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쳤다.


2) 종교사학적인 학설들
궁켈은 말하기를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계시문학의 메시야(그리스도) 관념은 바울의 메시야관과 다르다.
솔로몬의 시에서는 정치적인 메시야로 묘사되고 에녹 1서의 메시야는 천계에 있으면서 성도들과 뜨거운 관계가 없는 자로 묘사 되었으며 에스라 4서에는 메시야를 정치적 메시야로 400년 동안 있다가 죽으리라고 하였으나 그 죽음을 대속의 죽음이 아니며 이와 같이 유대주의자들은 메시야의 속죄적 죽음을 몰랐으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들을 넘어지게 했다.
그런데 바울이 개종 후에 본 메시야는 창조 때에 하나님과 함께 역사하시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백성과 뜨거운 관계를 가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분이다.
바울 당시에는 철학도 재래의 종교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는데 사실상 그 시대의 종교들은 저급 종교들뿐이었는데 그런 저급 종교들이 바울의 흥미를 끌었을 리는 없으며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특색은 남의 것을 섞어 가지지 않는 것인 만큼 이때에 바울도 다른 종교와 타협했을 리는 만무한 것이다.(라이첸슈타인, 부세트)
결론적으로 리델보스의 말을 인용한다.
(1) 헬라 종파의 이야기는 일정하지 않고 역사적인 것도 아닌 반면 바울의 예수 부활 사상은 역사적 사실이며 일정한 것이다.
(2) 헬라 종파의 이야기는 윤리적이 아니며 대속의 사상을 말해 주지도 않지만 바울의 종교는 윤리적이고 대속적인 속죄에 관한 것이다.


3. 바울 신학 발원의 독립성
바울의 행적은 사도행전과 그의 서신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서신 중에는 갈라디아서가 그 대표이다.(갈1:16~17)[참조 : 갈1:1]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여러 번 대면하였지만 그들에게서 추가해 배운 것 없이(갈2:6) 자신의 신학이 독립적이었지만 사도들의 복음관과 동일하였으니 그들의 복음이 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분명하다.


4. 바울의 구원론
바울의 구원론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이 됨을 말하는데 이같이 그는 그리스도만이 우리 신자들에게 의(義)가 되심을 강조하며(롬1:17, 고전1:30, 고후5:21) 인간 편에서 취할 태도는 오직 믿음 밖에 없다고 확언하는데(롬4:5) 그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밝혀준다.(엡2:8, 살후3:2)
1) 믿음은 선을 발생시키며 악한 생각들이 사라진다.
2) 선을 행하지 않으면 믿음이 식어진다.
3) 선한 행실 자체가 믿음의 구체적 방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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