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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설과 extra calvinisticum/이승구교수

by 【고동엽】 2021. 10. 28.

루터파 교회의 성찬 이해와 그 문제점들
이승구 박사
[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강해 52 : 언약의 성례(9): 성찬에 대하여(4) ]

[ 본문: 마태복음 26:26-30 ]

지난번에 천주교회의 성찬관인 화체설의 문제점을 생각했으므로 이번에는 종교개혁시대에 이 화체설을 재고하면서 제안된 루터파 교회의 성찬 이해를 생각해 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같이 종교개혁의 교회에 속해 있는 루터파 교회와 우리 개혁파 교회는 공통점이 많이 있는 형제 교회이지만 몇 가지 점에서 서로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다른데, 그렇게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찬에 대한 이해의 차이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루터파 교회와 개혁파 교회 사이에 이 성찬 문제에 대한 이견을 조정해 보려고 수 차례 회합과 토론을 가졌었으나 좀처럼 이 문제에 대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습니다.^!4y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요리 문답이 생성된 배경 때문에 성찬 문제에 대한 루터파 교회와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명시적으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면만을 살피면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은 개혁파와 루터파의 공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서로 입장이 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성찬관의 차이를 낳게 하는 근본적 입장은 개혁파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찰에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작성자들의 표면적 의도에 반해서, 그러나 그들의 본래적 입장에 충실해서 루터파의 공재설의 의미를 드러내고, 개혁파 신학의 성찬 이해와의 차이점을 드러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루터파 교회의 공재설의 의미

성찬의 떡과 포도주의 본질(substance)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substance)로 바뀐다는 화체설에 대해 생각하다가 한편으로는 그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과연 봉헌 후에는 떡의 본질과 포도주의 본질이 없는 것인가를 고민하던 루터는 결국 성찬 집례자의 봉헌 기도 후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이 떡의 본질과 포도주의 본질과 함께 있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루터는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아래"(in, with and under)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이후로 이런 표현은 루터파의 전형적인 표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재설은 일단 화체설과 함께 봉헌 기도 후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물리적으로 성찬의 요소에 현존한다는 것을(the local presence of the physical body and blood of Christ)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화체설과는 달리 떡과 포도주의 질료만이 아니라 본질도 계속해서 존재하므로 봉헌된 떡과 포도주는 두 가지 본질이 함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두 본질(substance)이 함께(con) 존재한다는 뜻에서 공재설(the theory of consubstantiat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파 교회에 의하면 우리가 신앙으로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충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입으로'(manducatio oralis)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된다고 합니다.

2. 공재설의 문제점

이렇게 이해된 공재설에는 일단 천주교회의 화체설의 문제점이 그대로 상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루터파에서는 "성찬이 그 자체로 역사한다"(ex opere operato)는 기계론적 성례주의에 대한 비판이 복음 선포의 중요성과 함께 지적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루터파의 견해 가운데서는 성찬을 그 자체로 역사하는 듯이 보려는 견해가 늘 흥기해 왔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어떤 엄격한 루터파 교인들은 천주교도들과 같이 성찬을 받을 때에 무릎을 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그대로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화체설의 문제점을 생각할 때 지적한 바와 같이 우상숭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루터파의 이해 속에서 새롭게 드러난 문제점이 있기도 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천주교회의 화체설에도 있던 문제이지만 이전에는 별로 깊이 있게 생각되지 않다가, 후에 루터파의 공재설에 대한 논의와 비판 가운데서 새롭게 논의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 즉 그리스도의 인성이 어떻게 여러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느냐는 논의와 관련된 문제점입니다. 루터파에서는 이를 별 문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독론에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특히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더 분명하게 그의 신성에 속한 성질들과 인성에 속한 성질들의 교류가 있다는 속성 교류설(the doctrine of communicatio idiomatum)을 자명한 것으로 여겨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루터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속하는 그의 몸과 피가 신성과 같이 온 세상 어디에나 편재하실 수 있다고(the ubiquity of Christ's body)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동시에 이 한국 땅에 있으며, 미국에 있고, 독일에 있고, 덴마크와 스웨덴에도 있고, 영국에 있고, 일본에도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신성만이 편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도 신성과 같이 이제 편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적 속성이 그의 인간성에게 전달되어서 성찬의 요소들(elements)인 빵과 포도주 "안에, 그와 함께, 그 아래"(in, with and under) 그리스도께서 신체적으로 (즉, 물리적으로) 임하여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터파가 이해하는 속성 교류설입니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루터파 신학자들은 개혁파 신학자들이 이 '속성 교류'(commmunication idiomatum)라는 용어는 사용하면서도 루타파 신학자들이 말하는 의미는 부인하고, 오직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신성에 속하는 속성을 돌릴 수도 있고, 인성에 속하는 속성을 돌릴 수도 있다고 이해하는 것을 '말뿐인 속성 교류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파 신학에서는 루터파적인 의미의 속성 교류설은 부인한 것입니다.

개혁파의 이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에도 신성은 신성이고, 인성은 인성인 것입니다. 즉, 신성에 속한 성질과 인성의 속한 성질이 혼합되거나 합하여 제 3의 성질을 구성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렇게 보는 것만이 신성과 인성은 혼합과 혼동됨 없이 그러나 분열과 분리 없이 한 인격 안에 있다고 정의했던 칼시돈 정의(Chalcedonian definition)에 충실한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인성의 한계 내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인성의 밖에서도(extra humanum) 존재하며 작용한다는 태도를 분명히 해왔습니다. 이렇게 "인성의 밖에서도"(extra humanum)를 개혁파 신학자들이 강조하면서 그런 입장에서 루터파 교회의 성찬과 그리스도 이해를 비판하자, 루터파 신학자들은 이를 '칼빈주의 신학이 말하는 밖에서'(extra Calvinisticum)라고 말하면서 비판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이후로 이 extra Calvinisticum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용어가 되어 개혁파 신학자들의 기독론을 잘 표현하는 말로 인정되었습니다.

개혁파 신학의 이 'extra Calvinisticum'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우리는 아마도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진술하고 있는 다음의 말을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육신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성자께서는 하늘(heaven)을 떠나지 아니하시면서 동정녀의 복중에 잉태되시고, 땅 위를 걸어 다니시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런 방식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그리하셨던 것과 같이 계속해서 온 세상을 가득 채우시며 계셨던 것이다.

칼빈의 이 말을 깊이 생각하면서 읽지 않으면 많은 이들이 이를 오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칼빈이 말하고 있는 이 말이야말로 extra Calvinisticum의 극치요, 칼시돈 신조에 가장 충실한 것이다.

칼빈의 이 말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지상 생활의 기간에도 성자의 신성은 그의 인성의 한계 내에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 인성과 함께 하시면서도 동시에 인성 밖에서도 존재하며 작용하고 계셔서 그가 창세 때부터 하고 계시던 온 세상을 충만히 채우시며, 붙드시며, 통치하시고 인도하시는 일을 계속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 계실 때에도 그의 신성으로는 그가 계신 곳 하늘(heaven)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계속 우주적 통치 사역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 분들은 현재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시면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승천하신 이후에 예수님은 재림하여 이 땅에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그의 인성으로는 하늘(heaven)에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성은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무소부재(無所不在, omnipresence)하시며 어디에나 그 대권을 행사하십니다.

승천이후 재림 때까지 예수님은 인성으로는 하늘에만 계시나 신성으로는 어디에나 다 계신다는 이 상황과 정반대 상황이 성육신하여 지상 생활을 하실 때 예수님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인성으로는 지역적으로 팔레스타인에만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그의 신성은 무소부재하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가 행사하신 우주적 통치의 대권을 다 행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한순간도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가 잠시라도 그의 신성을 비우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성은 인성이고, 신성은 신성이다"는 개혁파 신학자들의 말이 지닌 의미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도 이 extra Calvinisticum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파 요리문답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이전에 고찰한 바 있는 제 48문답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성은 제한되어 있지 않고 어디에나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가 취하신 인간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신성은 그의 인간성 안에 있는 것이고 여전히 인격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대한 강력한 부인이고, 칼케톤 신조를 확언하는 것이라는 클로스터 교수의 말은 아주 적절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의 한계 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을 생각하듯이 생각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성찬과 관련해서 이를 좀더 부연한다면, 그리스도의 신성은 항상 무소부재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것은 그의 영적인 임재(spiritual presence)입니다.

3. 공재설에 대한 우리 비판에 함의된 교훈

이제까지의 논의와 관련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승천 이후 재림 때까지는 그의 인성으로는 그가 승천하여 오르신 하늘(heaven)에 계심을 아주 분명히 이해하고 천명해야 합니다. 사도 행전에 나타나고 있는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서 베드로가 잘 표현하고 있듯이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고(행 3:21) 우리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늘은 "우주 어디에나 다"(everywhere)가 아니라, 아주 명확히 그 경역을 차지하고 있는 하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성으로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으로는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명확히 의식하고, 항상 그의 큰 통치를 인정하고, 그 통치를 기꺼이 받아 가면서 이렇게 우리를 다스려 주심에 대해서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인성으로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이 땅에 있는 우리 사이에 영적인 교통이 있는 것입니다. 이 영적 교통을 아주 현저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드러내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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