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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칼빈의 이성관 /이정석교수

by 【고동엽】 2021. 10. 28.

칼빈의 이성관

국제신학, 2, 2000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교수)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는 이성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였으며, 르네상스에서 출범한 이성의 지배를 종식시키려고 시도한다. 과연 기독교는 이런 상황에서 이성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1998년 10월 로마 카톨릭교회는 교황 바오로 2세의 회칙서 {신앙과 이성 Fides et Ratio}를 발표하여 이성의 회복과 중요성을 강변하였다.1 이에 대해, 대표적인 개혁파 철학자인 알빈 플랜팅가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이성의 수호가 시대적으로 중요하다는데 동의하였다. 플랜팅가는 전통적인 카톨릭 입장에 비판적이면서도,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이즘, 상대주의, 자연주의, 허무주의 등과 같은 "공동의 적들"이 이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성에 대한 신앙을 잃지말라"는 권고에 대해 이 면에서 카톨릭은 개신교와 "놀라운 동지"라고 논평하였다.2 더욱이, 월터스토프는 그동안 카톨릭이 이성에 대해 과도한 신뢰를 보여 왔으나, "이성이 죄로 인해 상처받고 약화되었다"고 인정함으로서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인간 이성과 실제적으로 기능하는 인간 이성을 구별"함에 대하여 "칼빈주의자로서 더 요구할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거의 완전한 동의"를 표명하였다.3

개혁신학의 이성관은 자연히 그 창시자인 존 칼빈의 이성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 과연 칼빈은 이성(理性, ratio)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는가? 그가 이성주의자인가 아닌가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존 르 콕은 "칼빈이 철학자였는가?"라는 논문에서 부정적으로 답변하며 칼빈에게 합리성과 논리성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4 그러나, 보다 보편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로버트 아이어스는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칼빈의 언어, 논리, 그리고 이성"이라는 논문에서 칼빈이 이성을 높이 평가했다고 주장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칼빈은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와 마찬가지로 이성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5 심지어, 존 레이스는 칼빈의 형식적인 원리는 sola Scriptuta였지만 실질적인 원리는 이성주의였다고 주장하였다.6 그러면, 과연 칼빈은 이성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으며, 그의 신학에서 이성이 어떤 역할을 감당하였고,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우리는 이 문제를 칼빈의 주저인 {기독교강요}를 분석함으로서 대답하려고 한다.7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이해하였으며, 스토아학파도 이런 생각을 추종하였다. 시세로는 이성이 인간을 짐승보다 더 우월하게 만든다고 가르쳤으며, 세네카는 인간을 '추론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하였다.8 그들과 마찬가지로, 존 칼빈도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는 견해를 수용하였다.9 수사적으로, 칼빈은 인간이 결코 '이성이 없는 피조물 sine ratione creaturae'이 아니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10 그런데, 그는 이성이 존재하는 증거를 인간에게 '신지식의 씨앗 semen notitia Dei'이 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이와 같이 이성과 '종교의 씨앗 semen religiones'을 연결시킨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칼빈에게서 이 둘은 불가분리하게 결합되어 있다. 신의 섭리는 우리로 하여금 신을 관조하도록 만든다: "이런 일은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난다."11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사람들은 이것이 '신성의 표지'라는 사실을 알도록 요구된다. '종교의 씨앗'이 인간 본성에 심겨져 있다.12 그것은 인간 정신 속에 존재하는 자연적 본능에 의한 '신성의 자각'이다. 칼빈은 "그 누구도 무지의 핑계로 도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모든 인간 속에 자기의 신적 위엄성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두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이 종교의 씨앗이 인간을 짐승과 구별한다13 이성과 종교는 신의 형상 imago Dei이 인간에게 있다는 증표이며,14 칼빈에게 종교는 인간 이성에 본질적이다.

타락이 인간 내면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으나,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여전히 사실이다. 바로 종교의 씨앗이 모든 인간에게 존속하고 있기 때문에, 칼빈은 "이성의 빛이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데 동의한다.15 이성은 사회적 질서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모종의 정치적 질서의 씨앗이 모든 인간 속에 심겨져 있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인간 조직체들이 법률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리고 그러한 법률의 원리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16 우리의 정신이 어떤 것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규정하기 위하여, 칼빈은 '지상적인 것 res terranas'과 '천상적인 것 res coelestes'을 구별하였다:


나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 진정한 정의 또는 미래의 축복에 속하지 않고, 그 의미와 관계가 현세와 관련되며 어떤 의미에서 그 경계 안에 제한되어 있는 것을 '지상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나는 순수한 신지식, 진정한 정의의 본질, 그리고 천상적 왕국의 신비를 '천상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정부, 가정 경영, 모든 기계적 기술, 그리고 인문학들을 포함한다. 한편, 후자에는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지식, 그리고 우리가 그에 따라 살아야 하는 규칙들이 들어있다.17


이와 같이 구별한 후에, 칼빈은 인간 이성이 비록 천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이 되었지만, 여전히 지상적인 것에 대한 능력을 계속 보유하고 있다고 분류하였다. 한편, 이것이 바로 "인간 속에 심겨진 이성과 이해능력의 보편적 인식을 분명히 증언하는 증거"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경건한 자나 불경한 자 모두에게 무차별적으로 부여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자연적 은사 dona naturalia의 하나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18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 은사와 초자연적 은사를 나누는 칼빈의 또다른 구별을 만나게 된다. 전자 가운데는 "신앙, 하나님에 향한 사랑, 이웃에 대한 자선, 거룩과 의를 향한 열정"이 있고, 후자는 "정신의 건전성과 마음의 올바름"을 포함한다. 칼빈은 "자연적 은사가 죄를 통하여 인간 안에서 부패되었으나, 그의 초자연적 은사는 그로부터 박탈되었다"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른다. 따라서, 이성이 자연적 은사이기 때문에, 그것이 완전히 제거될 수 없고 단지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부분적으로 부패되었다 partim debilitata partim vitiata fuit". 이것은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서 짐승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9

인간의 정신이 비록 타락하고 그 통전성으로부터 이탈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탁월한 은사들로 옷입혀지고 장식되어 있다. 주님은 심지어 그것이 그 참된 선을 박탈당한 후에도 인간 본성에 많은 은사를 남겨 두었다. 그는 수사적으로 묻는다:


시민 질서와 제도를 그와 같이 위대한 공정성으로 건설한 고대의 법률가들에게 진리가 그 빛을 비추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인해야 되겠는가? 자연의 수려한 관찰과 예술적 서술을 제시하는 철학자들이 맹목상태에 있었다고 우리가 말해야 되겠는가? 토론술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합리적으로 말하도록 가르친 사람들이 이해력을 결핍하고 있다고 말해야 되겠는가? ... 모든 수학에 대해 우리가 뭐라고 말해야 되겠는가? 우리가 그것을 광인들의 축적물이라고 말해야 되겠는가?20


칼빈은 그와 같은 주제에 대한 고대인들의 저작을 크나큰 경외심 없이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 질문들에 단호하게 아니요 라고 대답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인정한다면, 당연히 인간 이성의 사역은 성령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공동선 generis humani bonum'을 위하여, 동일한 성령이 불신자의 기능과 사역에서도 역사한다.21 그러므로, 칼빈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든 활동을 성령의 사역으로 간주한다. 그가 요약한 대로, "우리는 모든 인류에게 있어서 이성이 우리 본성에 합당하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를 이성이 없는 짐승과 구별한다." 만일 우리를 보존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타락이 우리 본성 전체의 파괴를 결과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성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는 일종의 흔적 notas으로서, 모든 인류를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는 특징이다."22

우리의 추론작용이 성령의 사역이라고 칼빈이 말했기 때문에, 토랜스는 이성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오해하였다: "칼빈의 이성관은 실체적이 아니라 기능적이다. 이성은 하나님이 부여한 고정적 선물로 볼 수 없고, 심지어 죄인에게 있어서도 창조의 연장 creatio continua으로서 하나님의 영에 의해 유지되는 기능이다."23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성령에 의해 유지되지만, 모든 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며, 영혼은 이성과 의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 인간의 구성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이성에 초점을 맞춰 살펴 보기로 하자.24

칼빈은 인간의 이분설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단언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영혼을 불멸적이면서도 피조된 본질로 이해한다. 칼빈은 영혼의 본질을 입증하기 위한 질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본질이 없는 동작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며, 자신의 죄책을 그토록 무섭게 자기에게 부과할 수 있단 말인가?" 육체는 영적 형벌의 두려움을 인식하지 못하며 그것이 오로지 영혼에게 엄습하기 때문에, 바로 이 점으로부터 영혼에게 본질이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이 추론된다. 인간의 이해력은 확실히 육체의 감각을 초월한다. 우리는 육체가 결코 인지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우리의 지성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인간 속에 육체와 분리된 무엇이 숨겨진 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칼빈은 최종적으로 성경에 호소한다: "만일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 본질적 실체가 아니라면, 성경이 결코 우리가 흙집에 살며(욥 4:19), 죽을 때 썩을 것을 벗어버리고 육신의 장막을 떠난다고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25 그는 영혼이 "비물질적인 실체 substantia incorporea"라고 결론 내린다.26

칼빈에게 있어서, 영혼은 거의 이성과 동일시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에게 근접하려고 더 노력할수록, 그는 자기에게 이성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더 입증하는 것이다."27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의 인간관이 영혼 중심적이며, 그의 영혼관이 이성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두 기능, 즉 이해력과 의지 intellectum et voluntatem로 구성"되며, 따라서 영혼의 활동은 이 두 기능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정신은 그 자체적인 동작을 가지지 않고, 선택에 의해 작동된다." 그래서, 의지의 선택이 결정적이지만, 칼빈은 오히려 이해력을 "영혼의 지도자와 통치자"로 인정한다.28 칼빈이 "안내자로서의 이성" 또는 "이성의 안내"라는 표현으로 전환하였을 때, 그는 이해력과 이성을 동의어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의지는 이성에 순종해야 하며, 일부 의지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 반대가 될 수 없다. 육체가 영혼을 따르고, 의지가 이성을 따르는 것이 창조질서이다. 어거스틴이 비유한 대로, 인간의 의지는 승마자의 명령을 기다리는 말과 같다.29 만일 의지가 동물과 같이 이성이 아니라 자기 본성의 경향성을 따른다면, 그는 육신을 따르게 될 것이다.30 그러므로, 부패한 의지는 불완전한 이성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의지의 중생은 이성에게 순종하는 의지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의 제한성


인간의 원초적 능력에 대해 상당한 신비적 미신이 그리스도인과 신학자들에게 유포되어 있다. 따라서, 본래 창조시에 설정된 인간 능력의 제한성을 죄악적 타락으로 인한 부패의 제한성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칼빈은 창조시에 하나님이 설정한 인간 존재의 원초적 능력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이 점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다. 이성에게는 하나님 자신과 그의 뜻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것은 부패한 이성뿐 아니라, 부패되지 않은 원초적 이성에게도 사실이다. 칼빈은 이 사실을 세가지 이론으로 증명한다: 신적 본질의 불가해성, 계시의 제한성, 그리고 적응의 필요성. 이 논의는 분명하고 솔직하게 우리가 죄로 인해 무엇을 상실하였으며, 우리가 인간 이성의 분야에서 중생을 통하여 무엇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흔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현재적 회복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실로, 신은 신이며, 인간은 인간이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창조됨으로 인한 우리의 본질적 제한성은 우리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신과 인간 사이에 분명한 선을 유지하도록 만든다. 비록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감정과 이성과 의지를 신과 인격적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질과 양에 있어서 제한되어 있다. 우리 영혼은 불멸하고 초월적이지만, 육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칼빈은 "실로, 그분의 본질이 불가해하다. 따라서, 그의 신격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훨씬 넘어선다"고 이해한다.31 따라서, 신은 그를 알 수 있는 다른 길을 주었다. 비록 인간이 신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가 자기의 작품 하나 하나에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자기 영광의 증표들을 너무 분명하고 너무 탁월하게 새겨놓았기 때문에, 그 결과 심지어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도 무지의 변명을 할 수 없다." 대우주의 지극히 광대하고 아름다운 구조와 정교한 질서는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관조할 수 있는 일종의 거울 speculum"이다.32 그러므로, 칼빈은 모든 사람에게 그의 작품들을 진지하고 신실하게 관조하라고 요구하였다.33 레로이 닉슨이 이해한 대로, 칼빈은 신의 속성을 그의 작품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에 대하여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34 그래서, 그는 "천문학과 의학, 그리고 모든 자연과학의 대상에 대한 보다 면밀한 관찰"을 적극 권장하였다.35

더욱이, 인문학 연구를 향한 칼빈의 사랑과 열정은 매우 강렬하고 존경할 만하다. 왜냐하면 칼빈이 인간을 '소우주 microcosmos'로 보는 철학자들과 동의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멀고 광활한 우주를 모두 연구함으로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또 하나의 탁월하고 더 결실있는 방법은 소우주이며 imago Dei인 인간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길이다. 인간의 이성, 정신, 양심, 감정, 행동, 역사, 관계, 언어 등을 연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그의 뜻을 이해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길이다. 따라서, 칼빈주의 전통은 인문 교육과 그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자연 과학이든 또는 인문 과학을 통한 것이든지,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우리 지식은 간접적이고 반성적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신은 순수하게 영적이고 초월적이다. 이와 같이, 직접적이고 실체적인 방식으로 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존재론적 제한성에 근거한다. 우리 존재가 영원에 적응하도록 변화되기까지, 인간 이성이 신을 직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며, 그것은 신이 인간을 이 세계에 살도록 창조할 때 결정된 것이다.

심지어 간접적인 지식으로도, 우리가 신과 그의 뜻에 대하여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오로지 신이 자기와 자기 뜻을 자연과 성경에 계시한 범위안에서 아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 이 계시의 제한성은 인간 이성이 원초적 부여에서 제한된 또하나의 이유이다. 심지어 아담도 하나님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 이외에는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자연에 나타난 신의 계시는 비록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변명하지 못하도록 모든 사람의 입을 막을만큼 충분하지만, 일반적이고 제한되어 있다. 칼빈은 성경도 엄밀한 의미에서 제한된 계시라고 생각하였다: "성경은 성령의 학교로서, 알 필요가 있고 알아서 유용한 것은 아무 것도 거기에 생략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알도록 기대되는 것외에는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36 따라서, 칼빈은 신학자의 임무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여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말하거나 추측하거나 심지어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성경에 나타난 계시로 만족하고 오로지 주어진 계시의 한계 내에서 연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37

신의 섭리는 우리의 이해를 훨씬 초월한다: "왜 그가 그렇게 의지하는지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이성의 탐구 대상이 아니다."38 또한, 인간 이성은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친 목적을 파악하지 못한다."39 우리의 정신적 능력은 우리 이성을 초월하는 신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의 뜻이 그안에서는 하나이며 단순하지만, 우리의 정신적 능력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여러개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의지하고 의지하지 않는지를 파악할 수 없다."40 신비스럽고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심지어 그의 뜻에 역행하는 것을 포함하여 어떤 일도 신의 의지 없이 일어나지 않지만, 우리 이성은 "어떻게 그들(사탄과 모든 악한 자)을 이용한 행위에서도 그가 그들의 범죄로부터 어떤 오염에도 개입되지 않고, 심지어 공동적 수행에서도 모든 비난에 자유로우면서 그들을 공의롭게 정죄할 수 있는지" 거의 이해할 수 없다.4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호기심에 몰입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42 그와 같이 '공허한 사색'은 어리석고 백해무익하며 불법적이고 따라서 징벌을 받을만 하다. "가멸적인 인간이 신의 비밀에 침투하려는 것은 합법적이 아니기" 때문에,43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적 지혜의 고지에 오르려고 시도할 때 인간 이해력의 우매성이 무서운 파멸로 징벌받는 것이 공의롭다."44

성경의 계시가 제한되고 간접적일뿐 아니라, 그것은 또한 인간 이성에 적응된 것이다. 그러므로, 심지어 성경으로부터 얻는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우리 지식도 그 원형적이고 자체적인 지식이 아니다. 신의 인식론적 적응은 직접적으고 완전한 방식으로 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우리 이성의 제한성을 전제한다. 칼빈의 소위 "적응이론 accomodation theory"을 조셉 하루튜니안이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이 사용하는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다 ... 그는 외계인의 언어와 외계인의 논리로 말하지 않고, 인간의 공통적인 논리와 친숙한 언어로 말한다.45


하나님은 마치 유모가 아기에게 대화하듯이 "자기에 대한 지식을 우리의 연약한 능력에 맞도록 적응해 주었으며",46 성령은 "그 말씀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적응해 주었다."47

성경의 표현들은 "그리스로부터 분리된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고 황폐한지를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 능력에 맞게 적응되었다."48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 언어로 하나님을 묘사해 준다": "우리의 연약성이 그의 고귀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그의 묘사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 능력에 적응되었음에 틀림없다." 칼빈은 적응의 방식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 신 자체의 실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는 신의 모습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49 적응의 필요성은 지능이 다른 존재 사이에 필수적이며, 따라서 그들의 의사교환은 제한되고 완전하지 못하다.


이성의 타락과 회복


칼빈의 신학적 구조에 있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수반되지 않는 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분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소유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지식은 두가지로서, 창조시의 순수한 인간과 타락후에 변질된 인간에 대한 것이다. 이 둘중에서, "그 비극적인 파멸에서 우리 본성이 어떻게 부패하고 기형화되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50 즉 우리가 단지 우리의 선한 면만을 본다면, 그것이 "자기에 대한 지식에 별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나아가 최악의 무지로 추락할 것이다"고 생각하였다.51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불가분리하게 상호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비참한 실상을 수용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도 바르게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52

칼빈의 인간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원죄와 전적 타락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 결정적이다.53 그러나, 보다 더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논쟁은 어디까지 그리고 얼마나 인간이 원죄에 의해 오염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칼빈의 대답은 매우 근본적이다: 그것은 "영혼의 모든 부분에 확산되었다." 칼빈이 "반절은 살아있다"는 이론을 비판했을 때,54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공격이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가 비교한 대로, 아퀴나스는 "죄가 우리의 자연적 능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 그 자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 반면에, 칼빈은 "죄가 우리의 이성을 포함한 모든 능력에 영향을 미쳤으며, 따라서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하였다"고 주장하였다.55 칼빈은 전적 부패와 인간의 능력 사이에서 방황하며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이중적 언사를 발하는 신학자들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56

비록 "모든 교회 저술가들이 인간 이성의 건전성이 죄로 인해 심하게 손상되었다는 사실과 인간의 의지가 악한 욕망들에 의해 매우 심각하게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둘 다 인정"했지만, 칼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중 다수가 철학자들과 매우 흡사하며", 그 결과 "성경의 교리를 반쯤 철학자들의 신념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데 불만을 표시하였다.57 둔스 스코투스를 비롯하여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오로지 감각적 부분만이 부패하였으며, 이성은 전혀 결함이 없고 의지도 거의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생각한다.58 그러나, 칼빈은 이렇게 외친다: "온갖 육욕적이고 어리석은 것을 제외하고 인간의 마음이 무엇을 산출할 수 있겠는가?"59 이제, 우리는 "지혜와 덕을 모두 상실하였다."60 그에 의하면, 의지와 감각뿐 아니라 이성과 이해력도 완전히 오염되었다. 우리는 이성과 이해력이 부여된 원초적 상태로부터 타락하였다.61 우리 이성은 수많은 형태의 기만으로 압도되고 수많은 오류에 복속되었으며, 수많은 장애에 시달리고 수많은 난관에 봉착하여, 우리를 올바로 인도할 수 없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가 받은 선물중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의 이성을 "공허한 것 nihil"이라고 비판하였다.62

물론, 그와 같이 과격한 표현은 "수사적" 언사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우리의 근면성과 통찰력과 이해력과 주의력이 그토록 완전히 부패하여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것을 아무것도 계획하거나 준비할 수 없단 말인가?"라는 말을 보면 그러하다.63 인간 이성의 절대적 무능은 오히려 하나님과 그의 뜻을 이해하는 지식의 영역에 제한된다. 칼빈은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 통찰력에 관하여 무엇을 분별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이러한 영적 통찰력은 크게 세가지로 구성된다. 즉, (1) 하나님을 아는 것, (2) 우리를 위한,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부성적 사랑을 아는 것, (3) 그가 준 율법의 규범에 따라 우리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고 분석하였다. 그러나, 처음 두가지, 특히 둘째에 대해서는 칼빈이 철저하게 부정적이다: "최고의 천재라도 두더지보다 더 맹목적이다." 그는 "인간 이성이 그런 이유로 참 하나님이 누구이며 그가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가지기 원하는지에 대한 이 진리에 접근하지도, 그것을 향해 노력하지도, 심지어 그것을 목표로 삼지도 못한다"고 결론 내렸다.64 즉, "하나님에 대해 순수하고 분명한 지식으로 나아가는 본성적 능력을 우리가 결여하고 있다"는 말이다.65 인간이 일반적인 신지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나가야 하는데, 죄의 지적 영향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66 우리가 앞에서 논의한 대로, 우리 이성은 '지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에 대해서는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상당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마치 전혀 아무 능력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 칼빈의 혹독한 인간 이성 비판은 수사적이고 강조적이다. 칼빈의 진심은 우리의 능력을 더도 덜도 아니라 정확히 평가하는데 있다: "왜 우리는 인간 본성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가? 그것은 상처입고 손상되었으며, 고장나고 상실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된 변호가 아니라 진실된 자기고백이다." 칼빈은 겸손을 중시하는데, 그것은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그리고 언제나 '겸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67

칼빈은 이성의 타락을 다섯가지 측면에서 명백하게 입증하였다: 단순성, 복수성, 사유성, 자율성, 그리고 부도덕성. 첫째로, 이성은 오로지 단순한 것만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제한되었으며, 그리하여 논리의 노예가 되었다. 신과 진리는 보다 복잡하고 상관적이며, 심지어 역설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타락한 이성은 단순 논리 이상의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 누가 그것을 말했든지, 또는 진리가 무엇이든지, 타락한 이성은 논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수용하지 못한다.68 따라서, 그것은 역설이나 신비를 모두 거부한다.

둘째로, 우리의 타락한 이성은 전혀 결론의 통일성을 이룩할 수 없다. 복수성은 이성이 우리의 안내자가 될 수 없다는 충분한 논증이다. 단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성과 학문을 가지고 천상적 지식까지 통달하려고 하는 철학자들도 그러하니, 이 복수성 varietas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타락한 이성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여러개의 대립되는 해답들을 산출한다. 인간이 단지 본성만을 따른다면 확실한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없고, "매우 혼란된 복수적 결론"을 얻게 된다.69 칼빈은 "이성의 작용이 정도에서 이탈되었으며, 그 결과 이제 이성이 자체적으로도 일치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70 따라서 이 모든 과정이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는데 얼마나 부적합한가를 자증한다고 주장한다.71 우리의 이성적 추론에는 "아무것도 확고한 것"이 없다.72

셋째로, 타락한 이성은 이기적이어서 자기의 개인적 정당화를 위하여 악용한다. 모든 인간은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롬 1:21) 실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권위, 판단, 전통에 따라, 또는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한다.73 칼빈은 "지성이 보편적인 정의나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는 거의 기만당하지 않지만, 그것이 거기서 나아가 개별적인 경우에 적용될 때는 혼미하게 된다"는 테미스티우스의 법칙에 동의한다. 예를 들자면, "모든 사람이 살인은 악이라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적을 죽이려고 계획하는 사람은 살인을 선한 것으로 전제하고 그에 임한다. 간음자도 간음 일반을 정죄하지만, 자기 자신의 간음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자기를 변호할 것이다." 실제적으로, "사람은 개별적인 경우에 직면하면 보편적인 원칙을 망각하고" 자기 자신의 경우를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74

넷째로, 우리의 타락한 이성은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과 무분별에 치우쳐 독자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뜻을 타락한 이성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성과 신앙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분리할 수 없지만, 타락한 이성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신앙과 예배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이 유기적 불균형은 이성의 한계를 정한 그 부여자에게 대항하는 문제점을 자증한다.75 칼빈은 자기들이 더 객관적이고 의지할만 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형평성 판단, 즉 "인간의 권위에 의하여" 선택과 유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였다.76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칼빈은 인간적 정의라는 기준으로 신의 정의를 저울질하는 사람들은 "개와 돼지"라고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사악하게 행동하는 것이다고 비난하였다.77

다섯째로, 타락한 이성은 그 중심적 원리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육욕을 관용하는 부도덕한 윤리를 개발한다. 그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첫째 돌판의 명령에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신적 윤리의 중심 원리, 즉 사랑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 이성의 공통적 판단이다: 그것을 인내로 견디는 것은 노예근성의 비굴한 인간의 모습이며, 존경스럽고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의 특징은 그것을 떨쳐 버리는 것이다. 철학자들도 피해의 복수를 악으로 보지 않는다."78 십계명의 두 돌판과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은 비록 "육신의 이성과 결별하고 우리의 욕심을 제어함으로서, 아니 그것들을 벗어버림으로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우리 형제에게 헌신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성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이성과 의지가 지시하는 것을 거부하라고 명령한다."79

타락한 인간은 "올바른 이성과 의지"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며,80 이성은 그 원초적 올바름을 상실하였다.81 인간의 마음은 교만과 거만으로 가득차 있어서,82 겸손하게 낮추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혼란과 부도덕을 결과하는 타락한 이성은 그것이 머물 닺으로서 신앙과 권위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전혀 이성에 의해 설득되지 않고, 항상 권위를 요구한다."83 그리고 신앙이 의심되고 권위가 무시되는 곳에서는 단지 이성만으로 별 진전을 이룩할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 이성을 회복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성경에 기록된 그의 뜻을 믿는 신앙을 부여한다. 이성의 회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며, 우리는 과거에 상실했던 것을 다시 얻는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각자는 과거에 철저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상실했던 그 좋은 것들을 회복할 수 있다."84

칼빈은 우리 타락한 본성의 완전한 회복을 믿는데, 그 갱신은 이성과 의지로 구성되는 영혼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에서, 그는 우리에게 "참되고 전적인 완전성 vera et solida integritas"을 회복시켜 준다.85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그 회복과 갱신도 반드시 전적이고 완전해야 한다.86 그는 이성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대표하는 우리 영혼의 가장 고귀한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중생이 우리 이성의 중생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추론한다.87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원초적인 imago Dei를 우리 영혼에 회복시키는 일은 성령의 사역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머물러 있고 우리가 그와 분리되어 있는 동안에는, 그가 고난당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무용하고 무가치하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택을 향유하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리스도와 우리를 유효적으로 연합시켜 주는 "결합의 매체 vinculum"이기 때문이다.88 인간의 모든 생각이 우매하고 경솔하고 불건전하고 사악한 것을 보면 인간의 이해력이 심각하게 부상 당한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에,89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되어야 한다. 신의 은혜와 호의가 없이는, 인간의 마음이 영원히 "혼란의 무질서"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90

영혼의 회복을 위해, 성령은 신앙을 준다. 본성의 타락으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 신앙을 소유할 수 없다. 따라서, 성령의 도움 없이는 인간이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실로 인간의 지성은 맹목적이고 암담하여서 심지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도달하고 통달하는데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 마음도 끊임없는 주저함으로 요동하고 있어서 그러한 확신에 안정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온전한 신앙을 획득하려면 우리의 지성이 조명되고 우리의 마음이 회복되어야 한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말씀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91 자연의 빛에 의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92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를 우리의 척도로 측량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개탄하면서, 칼빈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의 지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신앙으로 하여금 인식하게 하라. 성령은 분리된 것들을 올바로 결합한다."93

신앙은 '이해의 정신 spiritus intelligentiae'이다.94 비록 신앙이 마음의 문제이지만,95 "이해력이 신앙과 연결된다."96 중생시에 부여되는 이 '이해의 빛'은97 기독교 이성에 결정적이다. 이 '이해하는 마음'이 없이는 어떤 가르침이나 권면이나 책망으로도 우리의 정신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98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배도하면서 야기된 '이해력의 결함'을 치유한다.99 인간 이성이 신앙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에 의해 이 세계가 창조된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100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히 11:3) 이와 같이, 신앙으로 구속된 이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모든 진리를 이해한다. 그 이성은 성령으로 회복된 신앙하는 이성이기 때문에, 말씀과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와 함께 즐거워한다. 신앙은 올바른 추론의 전제조건이다: "신앙이 학문에서 전체적으로 종합적이고 통일성과 일관성을 가진 참된 이론체계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으로 인식된다."101 그러므로, 신앙은 이성적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102

그러나, 신앙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기초한다.103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기초하며,104 그것은 구체적으로 성경이다. 그러므로, 구속된 이성은 성경의 도움을 받을 때 진리를 인식하게 된다105: "늙고 흐린 눈을 가진 사람이나 약한 시력을 가진 사람은 그 앞에 가장 아름다운 책을 안겨주어도, 심지어 그것이 무슨 책인지 안다 할지라도, 두 단어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지만, 안경의 도움을 받으면 분명히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성경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혼란된 신지식에 초점을 부여하며 우리의 둔감성을 제거함으로서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106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선물'로 성경의 도움을 주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찾는데 성경이 우리를 안내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즉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107 그러므로, 성경은 신앙 없이 완전하고 올바르게 작용하지 않는 이성의 안내자이며 권위이다.

칼빈은 어거스틴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회복한다는 말이 '새로운 이성'과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는데 동의한다.108 중생이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자신이 죽는 것을 전제하는 것처럼, 우리 이성의 회복은 우리의 타락한 이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이성과 연합하는 것을 전제한다. 칼빈은 선언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로 하여금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 ...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의지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게 하라."109 타락한 이성과 구속한 이성의 차이는 무엇이며, 그 둘의 철학과 논리와 합리성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칼빈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한 구별을 제시한다: "그들(불신 철학자들)은 인간 안에 오로지 이성만을 지배원리로 설정하고, 그것만이 청종되어야 하며 그것에게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인간이 더 이상 혼자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살도록 그리고 자기와 함께 지배하도록, 이성으로 하여금 성령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복속하며 순종하도록 권고한다."110 회복된 이성은 종교, 경건 또는 하나님의 예배와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왜냐하면 양자가 본래 하나님의 형상 안에 함께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성의 신학적 사용


그의 생애를 일관하여, 칼빈은 신학이 경건하고 실천적이며 합리적이어야 된다는 신학관을 유지하였다.111 신학계 전체가 자만한 억측과 불경한 오류의 난폭한 우매에 붙잡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통탄하면서,112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결코 차가운 사변적 추측에 근거할 수 없고, 그분을 경외할 때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113 경건 pietas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실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이 합쳐진" 신앙 또는 경건이 없으면 하나님이 인식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모두 순종에서 발생하며,114 신학자의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 복속이다. 따라서, 칼빈은 올바른 신학의 유일한 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누구라 할지라도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올바르고 건전한 교리에 대하여 심지어 추호의 감각도 얻을 수 없다."115 그리고, 경건한 마음이 인지하는 것은 아무 쓸모도 없는 어떤 추측보다도 더 확실하며 견고한 '실천적 지식 practia notitia'이다.116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다.117 마찬가지로, 참된 신학은 "입술이 아니라 생활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다른 분야와 같이 이해와 기억만으로 인식되지 않고, 오로지 영혼 전체를 소유할 때만 주어진다.118 그래서 칼빈의 신학을 생활의 논리라고 말하다: "개념의 논리가 있는가 하면, 또한 생활의 논리 또는 실제의 논리가 있다."119

퀴리너스 브린은 왜 신학이 합리적이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신학을 할 때, 우리는 신앙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다른 선택이 존재하지 않는다."120 칼빈은 합리적 신학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신학은 "가장 아름다운 신의 선물이며, 모든 철학보다 훨씬 더 확실하다."121 그는 자기의 고도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신학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자, 도덕철학이 오로지 철학자들에게서만 타당하고 체계적으로 제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에게서 어떤 철학자보다 더 탁월한 학문을 발견하게 하라!"122 도날드 윌리암스에 따르면, 칼빈은 분명히 의사전달 communication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그의 동시대인이었던 로렌조 발라의 다음 말에 동의한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신학이 문법에 복속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만, 나는 신학자도 말할 때나 글을 쓸 때 언어의 법칙에 순종해야 된다고 말한다. 실로,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훼손하고 당신이 말하는 대상에게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있겠는가?"123

만일 신학이 의사전달을 원한다면, 그것은 의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대상이 이해할 수 있는 공통적인 언어와 공통적인 논리를 사용하여 논술되어야 한다. 물론, 신학은 신앙의 연구이지만,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의사전달능력을 요구한다. 한 마디로, 그것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신학은 자연 이성을 초월하지만, 그것을 위반해서는 안된다. 오로지 구속된 이성만이 성경을 신학의 참된 기초와 원천으로 수용하지만, 신학은 그것에 근거하여 이성에도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칼빈은 생활의 교리 또는 모형을 "성경의 여러 구절들에서 형성하는" 귀납적 방법론을 사용하였다.124 히그만이 올바로 지적한 대로, 칼빈은 이성을 탐구가 아니라 설명을 위해 사용하였다.125

그러면, 칼빈이 신학에서 이성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칼빈의 합리적 신학은 성경이 합리적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는 성경이 '추론 argumentum'으로 가득차 있다고 이해하였다. 하나님도 추론하고, 예수님도 추론하고, 바울도 추론하고, 모든 저자들도 추론하고 있다.126 따라서, 비록 그 일부는 육신적 이성에게 이해될 수 없지만, 성경은 전체적으로 합리적이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는 학자로서 불경이 아니라 그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려는 동기에서 성경에 대한 문학적 비평을 시도하였다. 이 점은 성경의 참된 본문을 회복하려는 그의 열정, 발라와 에라스무스의 비평적 작업에 대한 그의 호의적 언급, 그리고 환상적인 우의 allegoresis의 비약을 취하기 보다 성경을 실제적인 역사적 상황의 실제 메시지로 이해하려는 그의 해석학적 원리를 보면 자명하다. 칼빈은 "성경 저자들이 모든 지각있는 필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하나의 구체적인 생각을 전달하고자 했다는 건전한 해석학적 원리를 확신하고 적용하였다." 그래서, 샤프는 그를 현대 문법적-역사적 해석의 창시자라고 부른다.127 칼빈은 성경의 합리적 해석, 즉 상황적 성경해석을 추구하였으며, 비합리적 해석에는 분개하였다: "우리는 자기들의 악한 주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성경을 무관한 의미로 오도하는 그리스도의 적들을 용인하지 말아야 한다."128

칼빈은 귀납, 분석, 종합의 방법으로 자기 신학을 구성하기 위하여 자연 이성의 논리를 사용하였으며, 또한 그릇된 교리와 신학을 공격하는데도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이성에 호소하였다. 주로, 이러한 사용은 '건전한 이성', '명백한 이성', 또는 '공통적 이성'에 호소함으로서 그들의 형식적 비논리성 또는 비합리성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가끔 칼빈은 그릇된 교리 자체의 비합리성을 입증하는데도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자면, Psychopannychia(1534)라는 그의 최초 신학논문의 서문에서, 칼빈은 중간상태의 영혼수면설이 "이성과 판단력에 의해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129 전반적으로, 칼빈은 그릇된 교리의 논리적 비합리성을 비판하는데 자연 이성을 네가지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그릇된 보편화, 순서의 역행, 모순, 그리고 차원적 혼란.

첫째로, 칼빈은 개별적인 것을 보편화하는 그릇된 추론을 지적하였다. 세르베투스 비판에서, 칼빈은 "제한된 수에 대하여 말한 것을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하는" 그의 비합리성뿐 아니라, "단지 성인에 대해 말한 것을 유아에게 적용시키는 그릇된 추론"도 지적하였다.130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으로 보는 견해를 거부하면서, "개별적인 예로부터 보편적인 법칙을" 만들어 내는 잘못을 비판하였다. 그는 묻는다: "어떤 사람이 열두명의 대표였다고 하여, 이로부터 그 사람이 수십만명의 대표도 된다는 주장을 끌어낼 수 있는가?" 나아가, 그는 성경에 나오는 특정한 경우를 보편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거부하였다.131 한편,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을 추론하는 것은 허용하였다."132

둘째로, 칼빈은 순서가 뒤바뀐 비논리적 추론도 지적하였다. 오로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변호하면서, 그의 반대자들이 하나님의 상급 약속을 보고 인간의 공로를 가정하여 "어리석게도 상급으로부터 공로를 추론"하는 잘못을 비판하였다.133

셋째로, 칼빈은 자체 모순의 근거에서도 그릇된 교리를 거부하였다. 모든 교회회의의 결정이 절대적 진리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칼빈은 '교회결정에 역행하는 교회결정'의 문제를 공격하였다. 예를 들자면, 레오황제의 주도 하에 개최된 콘스탄티노플회의는 교회 내에 설치된 성상들을 와해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레네황제가 첫번째 교회회의에 불만을 가지고 소집한 니케아회의는 성상의 회복을 결정하였다. 칼빈은 냉소적으로 묻는다: "내가 이런 교회회의들의 자체모순을 다 열거할 필요나 있겠는가?" 그는 "서로 모순되는 것에 합법성이 없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는 유일하게 확실한 판별의 원리인 성경으로부터 어떤 결정이 정통적인지 또는 아닌지를 결정하였다.134 결론적으로, 칼빈은 교회회의의 투표에 의해 채택된 성경 해석이 항상 참되고 확실하다는 주장을 부정하였다.135 또한, 그리스도 육체의 편재성이라는 로마교회의 교리에 대하여, 칼빈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실로 성령의 강림과 그리스도의 승천은 대조적이다. 따라서, 그가 그의 영을 보내는 동일한 방식으로 육신을 따라 우리와 동거할 수 없다."136 그리스도가 실제로 부활되었고 "육체의 실제적 본성이 공간 안에 내포되며 그 자체의 차원과 그 자체의 모양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137 칼빈은 이성적으로 "그가 승천에 의하여 모든 장소에 있을 수 없고 이동함에 따라 이전의 장소를 떠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138 그리고, 칼빈은 할례와 세례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근거에서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하였다: "더욱이, 그 차이들이란 ... 악의적이고 합리성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을뿐 아니라 상호 모순적이다."139

넷째로, 칼빈은 추론에 있어서 물질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을 구분하였다. 이러한 논리적 구분에 근거하여, 칼빈은 중간상태에서 영혼을 위한 장소를 가정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였다: "그 장소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적지 않게 어리석고 무모한 일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육체와 동일한 차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기 때문이다."140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나라 전체가 영적이기 때문에, 그가 자기 교회에 대해 하는 일들을 이 세상과 연결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다."141 나아가, 그는 영적인 소명이 "인간적이고 철학적인 이성의 판단"에 검증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142

상식이나 건전한 이성에 대한 칼빈의 호소는 칼빈의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그의 모든 신학적 반대자들을 "부적절하고 불합리하게 추론"하는143 어리석은 추론자라고144 비판하였다. 칼빈의 눈에, 그들은 너무 어리석고 비지성적이었다. 그는 왜곡된 추론을 개탄하였다: "그들이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원리들을 얼마나 무감각하게 날조하는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145 건전한 정신과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은 합리적인 삼단논법으로 아름다운 논증을 산출한다.146 칼빈은 "그리스도와 성령과 교회를 한 장소에 속박하고, 그리하여 누가 그곳을 통치하든지, 심지어 그가 마귀라 할지라도, 그것이 과거에 베드로의 자리였기 때문에 여전히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이것이 단지 불경하고 그리스도에게 모욕적일 뿐 아니라, 일반 상식에도 극도로 이질적이고 불합리하다고 본다"고 비판하였다.147

참된 신학이 인간의 이성을 위반하지 않는 반면에, 그릇된 신학은 항상 이성과 충돌한다: "실로 그리스도가 만든 것과 너무 다르고 너무 이질적인 모든 것은 당연히 교회의 초기 제도나 관습으로부터 변질된 것이며, 또한 자연이나 이성과도 상충한다."148 죽음의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평신도가 세례를 베푸는데 대하여, 칼빈은 "어떻게 이런 일이 건전한 이성으로 변호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149 성찬 요소의 하나, 즉 떡이나 포도주가 둘을 대신하기에 충족하다는 로마교회의 교묘한 추론에 반대하여, 칼빈은 열렬하게 그들의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인간 이성의 대담성은 마치 주님이 자기의 살과 피를 구별할 이성이 없었던 것처럼, 떡이 피이고 포도주가 살이라는 주장에 반대하여 울부짖는다."150

비록 그가 자연적 이성의 비판적 기능을 충분히 사용하였지만, 칼빈은 결코 신학을 자연적 이성의 학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신학적 이성은 경건과 겸손을 가진 구속된 이성이어야 한다. 자연적 이성은 성경에 기록된 기독교 신앙을 신학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칼빈은 구속된 이성을 빙자하여 신학을 비합리적으로 전개하는 일부 신학자들을 비판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학적으로 합리적이려면 성경의 통일성, 그리스도의 신성, 신적 의지의 불가해성과 하나님의 능력같은 신앙에서 추론해야 한다.

첫째로, 칼빈은 그의 추론을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신앙에서 출발한다. 성경을 한 저자, 즉 성령의 작품으로 믿고 결코 인간 저자들의 다양한 주장들로 전락시키지 않는 것이 경건과 겸손의 참된 신학에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성경에 대한 유기적, 전체적, 축자적 영감관은 그의 신학적 추론에 기초를 형성한다. 성경의 통일성이라는 이 개념이 '합리적 신학'이라는 이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레로이 닉슨에 따르면, 복음서들을 조화시키려는 칼빈의 석의 방법론은 합리적인 접근이었다.151 더욱이, 칼빈은 성경에 나타난 모든 개별적 개념들이 내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성경에서 외형적으로 대치되는 구절들에 대하여 아무 문제도 느끼지 않았다.152

둘째로, 칼빈은 그의 모든 신학적 추론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에 근거하였다. 그리스도 없는 신학의 시도는 무엇이든지 구속된 이성에게 합리적일 수 없다. 칼빈은 이렇게 추론한다: "만일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사람은 항상 그 영원한 지혜에 의해 지도되어야 함에 틀림없다."153

셋째로, 칼빈은 신의 불가해성과 전능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우리가 신적 의지의 합리성이나 신적 능력의 가능성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극도로 비합리적인 것이다. 로마교회가 모두 포도주를 마셔야 된다는 영원한 하나님의 칙령에 반하여 평신도에게 피의 상징을 거부하는데 대하여, 칼빈은 그와 같이 "자기들의 하나님을 비합리적으로 거스리는" 법제자들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만일 이 거룩한 잔이 모두에게 공유적으로 제공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주장하며, 마치 그러한 위험을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가 예견하지도 고려하지도 않은 것처럼 말한다!"154 더욱이, 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창조, 계시, 신비, 이적, 성육신 또는 부활과 같이 자연적 이성에게 비합리적인 진리가 구속된 이성에게는 완전히 합리적이다. 물론, 그는 "언어의 의미를 초월하고 지각의 범위를 상회하며 이해의 능력을 초월하는" 신비적 신학은 인정하지 않았다.155


결론


우리는 칼빈의 이성관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 보았으며, 그 과정에서 서두에 제기한 문제, 즉 칼빈이 이성주의자인가라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답변하려고 시도하였다. 하비 칸이 잘 지적한대로, 칼빈은 이성을 일반적으로 보지 않았다.156 구속된 이성과 타락한 이성의 구별이 그의 이성관을 올바로 이해하는 관건이다. 과연 칼빈이 이성적인가? 구속된 이성을 가리킨다면 그 대답이 긍정적이고, 타락한 이성을 의미한다면 부정적이다. 이성의 구속은 필연적인 구원론적 과정으로서, 구속된 이성은 오로지 신앙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모든 계시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을 전제한다. 따라서, 구속된 이성은 피조물로서의 창조적 한계를 제외하고는 진리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전달하고 추론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인간의 정당한 기관이다. 실로 구속적 의미에서, 칼빈은 건전한 이성주의자였고, 그의 신학은 매우 이성적이다. 신학적 이성은 당연히 구속된 이성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타락한 이성은 성경을 수용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며, 따라서 성경을 신학화할 능력도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

안토니 후크마는 개혁파에게 부정적인 인간관이 만연된 점을 인식하고 긍정적인 인간관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 신학적 배경이 되는 칼빈의 인간관은 대표적으로 두 개의 교리, 즉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형상 교리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양면성은 카이퍼파에서도 반정립을 강조하는 좌파와 일반 은총을 강조하는 우파로 분리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성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니와, 이러한 양극화현상은 칼빈의 근본적 오해에서 발생하였다.157 신앙주의와 이성주의로 대립한다든지, 어느 한쪽의 수위성을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두가지 측면, 즉 이성과 신앙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둘의 분리가 이성의 타락을 결과하였고 다시 그 연합은 이성의 회복을 성취한다. 둘중의 어느 하나가 없으면, 하나님의 형상이 불완전하다. 물론, 이성은 피조된 본질적 기관으로서 실체이기 때문에 상실할 수 없으나, 신앙은 상실할 수 있다. 신앙을 상실할 때 우리 이성은 부패하고 혼란되며 천상적인 것에 대하여 맹목화된다. 신앙이 회복될 때, 즉 이성이 구속될 때, 이성은 천상적 진리를 수용할 수 있다. 물론, 불완전한 지상적 진리에 대한 이해도 온전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 이성의 관계론적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 교리에 있어서 칼빈의 이성관이 지닌 탁월한 특징이다.

따라서, 신앙과 분리된 타락한 이성 혹은 자연적 이성은 천상적인 것에 관한 한 아무 능력도 없다. 신앙은 이유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수용과 헌신으로서,158 신앙의 회복에 이성이 아무런 기능도 수행할 수 없다. 자연적 이성은 "종교적인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도 없으며, 종교적 진리를 발견하는 도구도 될 수 없다."159 신앙은 성령에 의해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며, 따라서 그것은 선이성적이며 초이성적이다. 이와 같이 칼빈은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한다. 그래서 그는 변증학을 어리석은 행위로 일축하였다: "불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명하려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신앙으로만 sola fide 그것이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160 칼빈에게 있어서, 이성은 "신앙의 불가결한 종"이다.161 이는 '믿음을 통하여 지식에 이른다 per fidem ad intellectum'는 어거스틴의 원리나 '믿음이 지성에 선행한다 credo ut intelligam'는 안셈의 원리와 상통한다. 신앙이 없는 이성은 성경계시를 비롯한 천상적 진리에 대하여 철저히 무능하고 맹목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한 이성은 신앙하는 이성으로서 성경계시를 전적으로 수납하고 진리를 올바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한국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박형룡은 분명한 이성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실로 칼빈의 이성관과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그는 '중생한 이성'과 '비중생 이성'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구별하였다:


(바빙크가) '신앙하는 이성'이라고 말할 때에 중생한 이성이 신앙의 보강에 이바지함을 긍정한다. 이성의 사색에 의한 자연신학 자체가 기독교의 근본진리들을 수립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진리들이 이미 성경계시를 통하여 나타나고 신앙에 의하여 인식된 후에 중생한 이성의 봉사를 받아 일층 더 명료히 인식됨은 사실이다. 우리는 비중생 이성이 신학의 사건들에 혹은 그것과 관계되는 다른 사건들에 판단을 내릴 권리가 있다고 허용할 수 없다. 성경은 아무 곳에서도 비중생 이성을 유자격한 재판관으로 인정하여 호소하지 않았고 반명에 그것을 전연 무자격한 재판관이라고 반복 언명하였다. 동시에 성경이 중생 이성의 소유자인 하나님의 백성에게 향하여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하였다.162


그뿐 아니라, 그는 중생한 이성의 성격을 규정하여, 그 회복은 원칙적 혹은 신분적이며, 완전하지 못하다고 말하고,163 따라서 중생한 이성이라 할지라도 진리의 심판자가 될 수 없고 항상 신앙에 복속해야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신앙과 이성을 동일한 존재론적 범주로 이해함으로서 이성을 경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칼빈은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혼은 이성과 의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성은 창조된 실체로서, 비록 부패하고 오염될 수는 있으나 상실할 수는 없는 인간의 구성적 '기관 organ'이다. 반면에, 신앙이란 인간의 구성요소나 기관과 같은 실체가 아니라, 같은 입이 선한 말과 악한 말을 하고 같은 마음이 착한 생각을 했다가 악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하나의 상태 혹은 성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워하는 마음이 성령의 감동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이성이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믿는 이성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신앙의 주체 subjectum fidei recipiens'인 것이다.164 복음을 믿는 것은 타락한 이성에게 불가능하지만, 구속된 이성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하다.165 그러므로, 신학의 내적 인식원리는 신앙하는 이성, 즉 중생한 이성이다. 성경을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즉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의 길 via을 통하지만, 일단 이성이 믿은 다음에 성경을 연구하고 분석종합하며 신학화하는 것은 이성의 논리적인 기능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화란신학과 프린스톤신학 사이에서 '이성이 수위냐, 신앙이 수위냐?'하는 불필요한 수위성 논의를 함으로서, 신앙을 주요한 내적 원리로 이성을 종속적 내적 원리로 구분하였다. 그것이 불필요한 이유는 신앙과 이성이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신앙과 분리된 이성은 아무런 신학의 원리가 될 수 없고, 신학의 원리로 인정된 이성은 이미 그 안에 신앙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수위성 논의를 하는 이성은 자연적 이성, 즉 중생하지 않은 일반 이성이며, 따라서 그것은 신학에서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중생한 이성' 혹은 '신앙하는 이성'만이 신학의 원리가 될 수 있으므로, 그것은 구별되거나 대립되는 두 개의 실체로 양자택일을 할 수도 없으며 주종이나 고하를 논할 수도 없는 하나의 실체일 뿐이다.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으로 시작된 근대의 이성숭배는 서구사회의 반기독교적 세속화를 초래하였으나, 오늘날 발생하는 포스트모던이즘과 상대주의, 다원주의, 허무주의는 이성을 불신하고 심지어 부정함으로서 더 큰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신앙의 이름으로 신학을 불신하는 반신학주의나 신앙과 이성을 대립시키는 반지성주의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혼란시키면서 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혼란은 불가피하게 교회의 혼란과 세속화를 초래한다. 이와 같이 내외적으로 합리성을 결여한 시대에 칼빈의 이성관은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회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본문은



http://www.vatican.va의 교황 회칙서를 보라.

2. Alvin Plantinga, "Faith & Reason: Philosophers respond to Pope John Paul II's encyclical letter, Fides et Ratio", Books & Culture, July/August 1999, 32ff.

3. Nicholas Wolterstorff, op. cit., 28ff.

4. John P. Le Coq, "Was Calvin a Philosopher?", The Personalist 29(1948): 254, 256.

5. Robert H. Ayers, "Language, Logic and Reason in Calvin's Institutes", Religious Studies 16(1980): 285.

6. John H. Leith, "Calvin's Theological Method and the Ambiguity in His Theology", Reformation Studies: Essays in Honor of R. H. Bainton (1962), 112.

7. 본 논문은 필자의 석사학위 논문, John Calvin on Human Reason in His Institutes, Calvin Theological Seminary, 1984에 기초하고 있다.

8. 칼빈이 1532년 그의 첫 저서로 세네카의 De Clementia에 대한 주석을 저술하였는데, 이러한 인문주의적 배경이 칼빈의 사상적 구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대개 인정된다.

9. Charles Brook Partee, Jr., Calvin and Classical Philosophy, Princeton University Ph.D. dissertation (Leidem: E. J. Brill, 1977), 32-33.

10. Inst., I.v.15

11. Inst., I.v.11

12. Inst., I.vi.1

13. Idem; Inst., I.iii.3: "인간을 짐승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이며,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그들이 불멸성을 갈망한다."

14. 칼빈의 하나님의 형상관에 대한 논의는 다음 문헌들을 참고하라: David Cairns, The Image of God in Man (London: SCM, 1953), 특히 9장 "The Image of God in John Calvin"; Sumito Harana, "Calvin's imago Dei problem from the viewpoint of Christian philosophy: the principle of antithesis and the principle of relation between the regenerate and the unregenerate in theoretical thinking", in Calvinistic Heritage in Asia, ed. Nobuo Watanabe (Huogo: Kwansei-Gakuin University Press, 1989), 69-99; Felle Faber, "Imago Dei in Calvin: Calvin's doctrine of man as the image of God in connection with sin and restoration", in Essays in Reformed Doctrine (Neerlandia: Inheritance Publications, 1990), 251-81; 최홍석, "칼빈의 imago Dei교리", {신학지남} 57(1990) 가을호: 128-52; 권호덕, "하나님의 형상과 현대인의 딜렘마", {신학지남} 60(1993) 겨울호: 171-91; Idem., "거울의 관점에서 본 칼빈의 하나님 형상 이해: 패러다임의 변화와 연관하여", 한국개혁신학회에서 2000년 발표; Brian A. Gerrish, "The Mirror of God's Goodness: A Key Metaphor in Calvin's View of Man", Concordia Theological Quarterly 45(1981): 211-22; Randall C. Zachman, "Jesus Christ as the Ima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Calvin Theological Journal 25(1990): 45-62; Richard Prins, "The Image of God in Adam and the Restoration of man in Jesus Christ",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25(1992): 32-44.

15. Inst., II.ii.13

16. Idem.

17. Idem.

18. Inst., II.ii.14

19. Inst., II.ii.12

20. Inst., II.ii.15

21. Inst., II.ii.16

22. Inst., II.ii.17

23. T. F. Torrance, Calvin's Doctrine of Man (Grand Rapids: Eerdmans, 1957)

24. Cf. 최홍석, "칼빈의 인간구성론", {신학지남} 58(1991) 봄호: 130-46.

25. Inst., I.xv.2

26. Inst., I.xv.6

27. Inst., I.xv.6

28. Inst., I.xv.7

29. Inst., II.iv.1

30. Inst., II.ii.26

31. Inst., I.v.1

32. Idem.

33. Inst., I.xiv.21: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거룩한 명상에 부단히 임하도록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모든 피조물에서 마치 거울과 같이 그의 지혜와 공의와 선과 능력을 관조하는 동안, 우리가 단지 그것들을 호기심으로, 말하자면 무관심한 일별로 지나치지 말고, 오래동안 숙고하며 우리 마음 속에서 진지하고 신실하게 고찰하고 반복적으로 회상하여야 한다."

34. Leroy Nixon, Calvin's Teaching on Human Reason, New York University Th.D. dissertation, (New York: Exposition Press, 1963), 62-3.

35. Inst., I.v.2

36. Inst., III.xxi.3

37. Inst., I.xiv.4

38. Inst., III.xxiii.5

39. Inst., III.xx.3

40. Inst., I.xviii.3

41. Inst., I.viii.1

42. Inst., I.xiv.4

43. Inst., III.xxi.3

44. Inst., III.xxiv.4

45. Joseph Haroutunian, "Introduction", Calvin's Commentaries, LCC, vol. XXIII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35.

46. Inst., I.xiii.1; cf. Ford Lewis Battles, "God Was Accomodating Himself to Human Capacity", in Readings in Calvin's Theology, ed Donald K. McKim (Grad Rapids: Baker, 1984), 21-42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인간의 연약성으로 내려오는 낮추심의 극치로서 accomodatio의 핵심이라고 보고, 대화의 가교(speech-bridge)인 로고스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47. Inst., III.xxiv.9

48. Inst., II.xvi.2

49. Inst., I.xvii.13: "따라서, 적응의 방식은 그가 우리에게 자신을 표현하되, 그의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인식될 수 있는 바를 표현하는 것이다."

50. Inst., I.xv.1

51. Inst., II.i.2

52. Inst., I.i.1-2

53. Inst., II.i.7: "천상적 형상이 그에게서 희미하게 된 후에, 그리하여 그에게 입혀준 장식들, 즉 지혜, 덕, 거룩, 진리, 그리고 정의가 있던 자리에 가장 오욕스러운 오염, 맹목, 무력, 허영, 그리고 불의가 들어 왔을 때, 그가 이 형벌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또한 자기 후손들을 동일한 비참에 속박시키고 전락시켰다."

54. Inst., II.v.19

55. Nicholas Wolterstorff, Reason Within the Bounds of Religion (Grand Rapids: Eerdmans, 1976), 108, n.12.

56. Inst., II.ii.9

57. Inst., II.ii.4

58. Idem.

59. Inst., IV.x.24

60. Inst., II.ii.1

61. Inst., II.i.1

62. Inst., II.ii.25

63. Idem.

64. Inst., II.ii.18

65. Inst., I.v.15

66. Donald T. Williams, "John Calvin: Humanist and Reformer", Trinity Journal 5(1976): 72.

67. Inst., II.ii.11

68. Inst., III.xi.6

69. Inst., I.v.12

70. Inst., II.ii.12

71. Torrance, Calvin's Doctrine of Man, 123.

72. Inst., I.xv.6

73. Inst., I.v.13-14

74. Inst., II.ii.23

75. Inst., I.xvii.2: "그들은 자기들의 이성이 스스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신에게 합당하다고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다."

76. Inst., III.xxii.1

77. Inst., III.xxiv.17

78. Inst., II.ii.24

79. Inst., III.vii.3

80. Inst., II.v.19

81. Torrance, Calvin's Doctrine of Man, 120, 116.

82. Inst., I.xi.8

83. Inst., IV.x.26

84. Inst., II.i.1

85. Inst., I.xv.4

86. Inst., II.iii.1: "만일 단지 그 일부만 개혁되었다면 영혼이 중생하지 않은 것이다. 오로지 그것이 전체적으로 새롭게 될 때만 그러하다."

87. Inst., I.xv.4: "그(바울)는 최상위에 지식을 위치시킨다. 그리고 ...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정신의 빛, 마음의 올바름, 그리고 모든 부분의 건전함에서 가시화된다고 추론한다. 비록 이런 방식의 언사가 제유라는 사실을 자인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 갱신에서 일차적인 것이 또한 창조 자체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원칙은 무너질 수 없다."

88. Inst., III.i.1

89. Inst., II.iii.1

90. Inst., II.ii.18; III.i.3: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선한 것은 모두 그의 은혜가 빚어낸 결실이며, 그 은혜가 없는 우리의 능력은 정신의 암흑과 마음의 도착이다."

91. Inst., III.ii.33

92. Inst., II.ii.20

93. Inst., IV.xvii.10

94. Inst., II.xii.5

95. Inst., III.ii.36

96. Inst., II.ii.3; cf. Richard A. Muller, "Fides and Cognitio in relation to the problem of intellect and will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25(1990): 207-24.

97. Inst., III.ix.5

98. Inst., II.v.4

99. Inst., II.iii.2

100. Inst., I.xiv.1-2

101. Wolterstorff, Reason Within the Bounds of Religion, 27.

102. Inst., III.ii.14

103. Inst., III.ii.2

104. Inst., III.ii.8

105. Inst., II.ii.19

106. Inst., I.vi.1

107. Inst., I.xiv.1

108. Inst., II.v.15

109. Inst., III.vii.1

110. Idem.

111. Cf. Ronald Stewart Wallace, "A Christian theologian: Calvin's approach to theology", Scottish Bulletin of Evangelical Theology 5(1987): 123-50.

112. Inst., I.xi.1

113. Inst., I.xii.1

114. Inst., I.vi.2

115. Idem

116. Inst., I.xiii.13

117. Inst., I.ii.1-2.

118. Inst., III.vii.4

119. Partee, Calvin and Classical Philosophy, 35.

120. Quirinus Breen, "St. Thomas and Calvin as Theologians: A Comparison", The Heritage of John Calvin, ed. John H. Bratt (Grand Rapids: Eerdmans, 1973), 25.

121. Inst., III.vi.1

122. Inst., III.vi.3

123. Donald T. Williams, "John Calvin: Humanist and Reformer", Trinity Journal 5(1976): 74; cf. Cynthia B. Cohen, "The Logic of Religious Language", Religious Studies 9(1973): 144, 148, 154. 여기서 코헨은 이안 램시에 반대하여, "그가 우리 언어의 많은 의미를 곡해하였으며, 그 결과 종교적인 언어를 너무 비상적으로 만들어 일상적인 언어와의 모든 관련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하였다. "지식행위는 단지 지식자의 정신상태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 규칙과 상관된 증거에도 의존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종교적인 언어를 특수한 형태의 기호언어로 전락시키는데 반대하였다.

124. Inst., III.vi.1

125. Francis Higman, The Style of John Calvin in His French Polemical Treatise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7), 40.

126. Inst., II.iii.1, III.xxiv.16, II.iii.2 et al.

127. Williams, "John Calvin: Humanist and Reformer", 70-71.

128. Inst., IV.viii.11

129. John Calvin, "Psychopannychia", Selected Works of John Calvin: Tracts and Letters, ed. and trans. Henry Beveridge (Grand Rapids: Baker, 1983 reprint), 414.

130. Inst., IV.xvii.31

131. Inst., IV.xiii.13

132. Inst., IV.xvii.21

133. Inst., III.xvi.2

134. Inst., IV.ix.9

135. Inst., IV.ix.13

136. Inst., IV.xvii.26

137. Inst., IV.xvii.29

138. Inst., IV.xvii.30

139. Inst., IV.xvi.16

140. Inst., III.xxv.6

141. Inst., IV.xvii.32

142. Inst., III.xi.6

143. Inst., III.xx.26

144. Inst., III.xviii.10

145. Inst., III.iv.18

146. Inst., III.xviii.8

147. Inst., IV.vii.29

148. Inst., IV.v.13

149. Inst., IV.xv.20

150. Inst., IV.xvii.47

151. Leroy Nixon, John Calvin's Teaching on Human Reason, Th.D. dissertation, New York University (New York: Exposition Press, 1963), 64-65.

152. Inst., III.xxii.10: "나는 다른 곳에서 모두가 외적인 설교에 의해서 회개하고 믿도록 부름 받는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신앙의 영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두가지 개념을 성경이 어떻게 조화시키는지 설명한 바 있다."

153. Inst., IV.viii.5

154. Inst., IV.vii.47

155. Inst., I.xiii.5

156. Harvie M. Conn, The Concept of Reason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Th.M. thesis, 1958, 171.

157. Kent D. Lawrence, Calvin and the New Man, 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Th.D. dissertation, 1972, 91.

158. Alvin Plantinga, "Is Belief in God Rational?", in Rationality and Religious Truth, ed. C. F. Delaney (Notre Dame, I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79), 26-27; Norman Malcolm, "The Groundlessness of Belief", in Reason and Religion, ed. Stuart C. Brown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79), 143.

159. Marcel Jean Brun, Religious Knowledge and the Honor of God in Calvin's Theology, New York Union Theological Seminary Th.D. dissertation, 1932, 109.

160. Inst., I.viii.13

161. Ayers, "Language, Logic and Reason in Calvin's Institutes", 296.

162.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전집 1권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169-170.

163. Ibid., 186-7.

164. 바빙크, {개혁주의 교의학}, 김영규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I: 805.

165. Ibid., 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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