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성령론 차영배(기독교학술원대표) A. 칼빈의 사도행전 주석 A-1. 사도행전 1장 8절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주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성급하게 나아가서 복음을 증거할 수 없음을 보이신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으면,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둘째, “사마리아”가 여기에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인들에게만 복음을 증거 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게도(요4:9)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씀이다. 셋째, “땅끝까지”라 하심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장벽이 무너져야 함을 의미한다. 이방인인 고낼료가정은 이스라엘 땅에 거주했지만, 이스라엘인들과의 거리는 땅끝처럼 멀었다. 이방인들은 무할례당으로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약속 밖의 외인들이며,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엡2:11-12).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그리스도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회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3-18). A-2. 행2:17-21: 요엘선지의 예언 “말세에”: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을 사도시대로 제한함은 극히 불합리한 생각이다. “말세에”라 함은 말세의 시작에 불과하고, 크고 영화로운 날 곧 주 예수의 재림까지를 뜻한다. “내 영을 모든 육체에”(행2:17): 남녀노소 연령의 제한 없이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뜻한다. “부어주리니”: 구약시대보다는 훨씬 풍부하게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A-3. 행2:37-39 베드로사도는 외치기를 오순절 성령의 약속은 첫째 유대인들에게, 둘째 그 자녀들에게, 셋째 “모든 먼 데 사람”에게라 한다. 칼빈은 먼데 사람을 이방인들이라 해석한다. 따라서 고넬료는 팔레스틴에 살고 있었지만, 먼 데 사람에 속하고, 소아시아와 로마를 비롯하여 땅 끝에 거하는 우리에게는 물론이다. B. 기독교강요 제 III 권 칼빈의 성령론은 기독교강요 제3권과 성령에 관한 그의 성경주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기독교강요 제III권에 나오는 성령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B 1-1.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주시는 띠로서의 성령: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하늘에 계시고, 우리가 분리되어 있는 한, 그가 인류를 위해 받으신 고난과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질 않는다. 따라서 그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우리의 소유가 되셨고(롬11:17), 그리스도로 옷입는다 한다(갈3:27). 그가 우리 속에 거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머리이며(엡4:15),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고,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총들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신비한 능력을 고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하신 것을 성령이 증거하신다(요일5:6-7). 성령의 증거는 우리 마음에 인친 것처럼 새겨진 것을 느끼게 하신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신 것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성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신비하게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의롭다 하신다(고전6:11). 성령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효과적으로 결합시켜 주시는 띠이시다. B 1-2.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받으신 이유 :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 모아 영원한 기업을 사모하는 백성으로 만드시려는 것, 우리를 소생시켜 성장케 하실 뿐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생명의 뿌리가 되시기 위해서, 또한 성령을 보다 풍성하게 만민에게 부어주시려고(욜2:28),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다. 이로써 성부께서는 아들의 종보직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요3:34), 따라서 성령을 때로는 아버지의 영, 때로는 아들의 영이라 불리운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히시면,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롬8:9), 주 예수를 부활케 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우리의 죽을 몸도 부활케 하신다(롬8:11). 그리스도께서 목마른 우리를 초대하여 성령을 마실 수 있게 하신다(요7:37-39),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각 사람에게 성령이 부어진다(엡4:7). 그리스도는 살리시는 영으로서 우리를 부활케 하신다(고전15:45-49). 성령과의 교통하심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볼 수 없고,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롬5:5). B 1-3. 성령의 칭호: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 함은 독생자 안에서 성부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를 증거하기 위함이고, 또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신다(롬8:15, 갈4:6). 성령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 안에서 안전하다는 보증이며(고후1:22, 엡1:14), 열매맺는 땅으로 만들어 의의 싹을 내게 하는 물이며(사55:1),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는 생명의 원천이며(사44:3), 목마른 자가 그리스도에게 가면, 언제나 성령으로 생명수를 마실 수 있다(요7:37). 성령은 우리의 사악하고, 무절제한 욕망들을 지속적으로 없애버리시는 한편,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과 열렬한 헌신으로 불타오르게 하심으로 ‘불’이라고도 불리운다(눅3:16). 성령은 하늘에 속한 모든 부요가 우리에게 흘러나오는 ‘샘’이다(요4:14). 우리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힘으로 일하게 하시며, 우리 속에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성령의 은혜이다(갈5:19-21). 우리의 마음이 성령에게 몰두하기 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엡4:15), 그리스도롤 옷입듯 하는 것도(갈3:27)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가 되게 하시는 이도 성령이시다(엡5:30). 성령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며,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수 있다. B 1-4. 성령의 역사로서의 믿음: 믿음은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는 것은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으로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데, 이는 혈과 육으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야한다(이것은 곧 성령으로 나는 것을 의미함: 요3:5).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은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 함에 있다(엡1:13-14).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도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확실히 안다(요일3:24, 4:1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의 내용들을 성령에게 맡겨 기억나게 하셨다(요14:17). 빛이 눈 먼 자에게는 비쳐도 소용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천국의 보고를 알 수 없다. 바울이 성령의 사역을 그토록 높이 평가한 이유는 만일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목사들이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배푸셔서(눅3:16), 우리를 그의 복음을 믿는 믿음의 빛 가운데로 이끄시고, 우리를 중생케 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며(고후5:17), 우리의 세속적인 더러움을 씻어버리고, 하나님께 거룩한 성전들이 되게 하신다(고전3:16-17, 6:19, 고후6:16, 엡2:21). 이로써 칼빈은 오순절 성령으로 중생한다는 것을 가르친 샘이다. B 1-5.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만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율법의 어느 부분이라도 지키지 못하면, 영원한 사망의 선고가우리를 기다릴 뿐이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정사(釘死)를 통한 구속(救贖)의 은혜뿐이다. 오직 성자 하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만, 성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눅10:22). 여기서 주의할 것은 기록되어져야 할 계시는 종결되었으나, 그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깨닫게 하시는 계시는 계속된다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계22:18-19, 마11:27). 성령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빛이 비친다(고후4:6).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만,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수 있고, 주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성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B 2-1. 영생에 이르는 믿음은 신령한 일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함(요17:3).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꿈같은 일이었으나 현실로 목격했을 때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눅24:11, 요20:28). B 2-2. 맹목적 신앙: 로마교의 맹목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오류를 진리로, 어두움을 빛으로, 무지를 올바른 지식으로 착각한다. B 2-3. 주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 제자들이 무덤으로 달려 가 빈 무덤인 것을 확인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지 아니했더라면, 그들의 믿음은 완전히 소멸되었을 것이다. B 2-4. 성령의 확증: 버림받은 자들은 은혜의 그림자를 파악할 뿐이지만, 택함 받은 자들에게는 성령께서 죄 용서를 확증하여 주셔서, 그들이 특별한 믿음으로 용서를 자신의 삶에 적용토록 하신다. B 2-5. 성령의 보증과 사랑의 부어짐: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진 사실을 확실히 보증하시고, 인쳐 주신다(엡1:14, 고후1:22).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흔적은 결코 지워질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지체들 속에 사랑의 성령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부어진 것이다(롬5:5). B 2-6.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부어짐으로 “사망이나 생명이나 ...현재 일이나 장례 일이나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롭8:38-39). B 2-7. 우리는 주 예수께 돌아가면, 복음으로 시야를 가리는 수건을 벗은 얼굴로 하나님을 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의 형상으로 변화하는데, 이것도 오직 성령으로 가능하다(고후3:18). B 2-8. 믿음의 뿌리: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그 힘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지성이 성령의 조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스콜라 신학은 지식에 조명만 받으면, 믿음이 가능한 것으로 가르쳤지만, 단순한 동의를 믿음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성령은 믿음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천국에 이를 때까지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자라게 하신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1:1) 한다. 복음을 믿는 믿음의 뿌리도 성령이시다. B 2-9. 오직 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2장34절). 우리 속에 있는 성령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2:9-10).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이끄시면, 우리의 지성과 마음을 높이 들어 우리의 오성을 초월케 하신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안다(고전2:16). 성령으로 우리는 새로운 통찰력을 얻어, 찬란한 하늘의 비밀을 응시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아서 눈먼 사람들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다. 원래 우리는 모두 눈먼 소경이었다. 따라서 성령이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어올 수 있다(강요 2:34). B 2-10. 기업의 보증: 오직 성령이 장차 누릴 기업의 보증이 되사, 우리 마음에 인치신다(고후1:21-22). 우리의 장막집인 몸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신령한 몸이 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탄식하는 것은 덧입고자 함인데, 그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고후5:1-5). B 2-11. 성령을 자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다. 우리는 성령을 담대히 자랑해야 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다(롬8:14). 오직 성령만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증거하신다(롬8:15-16).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사람, 행11:26, 롬8:9). 복된 부활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가능하다(롬8:11).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안다(요일3:24, 4:13).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종으로 여김 받을 것을 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밖에 없다(강요 2: 39). B 2-12. 칼빈의 중생관: 성령으로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곧 중생이다. 곧 mortificatio와 vivificatio를 중생으로 본 것이다(III권3장3절). 옛사람의 육욕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로워지는 일은 어려운 일이나, 성령으로 가능하다(엡4:22-23, 골3:10).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이러한 중생에 의해서 아담으로 인해 상실했던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접근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안에서 더욱 빛난다(III권 3장 9절). B 2-13. 성화의 근원으로서의 성령: 사랑, 겸손, 근신, 온화, 절제의 근원은 성령이시다. 주의 영은 혼란을 야기하는 유령이 아니고,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하여 주어졌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많은 죄와 연약함에 얽매여 있는 형편 속에서 성령의 성화를 통해 정결케 된다. B 2-14.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 성령이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롬8:26, 제III권 20장 5절). 이것은 성령이 실제로 기도하거나,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확신과 소망과 탄식을 일어나게 하여, 우리의 자연적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롬8:26).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라(방언기도) 하면서도 깨어 기도할 것을 권한다(고전14:15). 요컨대, 우리는 성령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끝까지 견디며, 모든 역경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도 성령으로 가능하다. 참조: 칼빈주의의 五大敎理: 인간의 전적 무능, 무조건적 선택, 제한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들의 견인(TULIP). 칼빈의 영성: 영성신학자 칼빈 김영한 (기독교학술원 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원장) 머리말 일반적으로 칼빈을 매우 이성적이고 냉정한 신학자로 표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의 이중예정 사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내세운 칼빈의 사상은 스콜라주의적이라고 평가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미국의 칼빈주의 신학자 존 헤셀링(John Hesseling)이 밝힌바와 같이 칼빈이야말로 성령과 말씀이 균형잡힌 신학자1)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칼빈에 있어서는 성령론이 메마르다는 언급이 있으나 칼빈만큼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 신학자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빈은 영성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구 프린스턴 신학교의 워필드(B. B. Warfield)는 칼빈에 대하여“하나님 말씀의 실천을 위하여 그의 전 생애를 바치고 따뜻하고도 호의에 찬 충고를 하였고,“ ”일반 은총과는 달리 항거할 수 없이 역사하는 성령의 특별 은총교리를 명백히 하여“ ”교회에 알찬 유익을 가져오게 한 깊게도 상세한 성령론을 수립한“ ”가슴의 신학자“2)라고 평가하였다. 워필드는 교리사적 측면에서 칼빈의 위상을 다음같이 피력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죄와 은총의 교리가 어거스틴에서 시작되었고, 보상(報償)에 대한 교리가 안셀름에서 시작되었고, 이신칭의론이 루터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교리는 칼빈이 교회에 준 선물이라고 말해야 한다.“3) 영성이란 단지 기도나 훈련이나 명상이나 인간의 종교적 행동만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이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경건, 즉 전인격적 실천이다.4) 칼빈은 그의 목회사역에서 영성이란 용어를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이를 “경건”(pietas)이라는 말로 대체하였다.5) 칼빈연구 신학자들(버르카워G. C. Berkouwer, 베틀즈 J. T. Bakker. 호트롭 Philip C. Hotrop, 배커 J. T. Bakker, 로소 W. D. Rossouw, 존커 W. D. Jonker 등)은 한결같이 칼빈의 신학을 경건의 신학(theologia pietatis)이라고 특징짓고 있다.6) 칼빈에게서 경건은 오늘날에서는 영성으로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칼빈의 영성을 다음 여섯가지로 특징지우고자 한다. 그것은 첫째, 삶을 하나님 주권에서 이해하는 영성, 둘째, 경건으로서의 영성, 셋째, 말씀의 영성, 넷째, 교회중심적 영성, 다섯째, 성령에 지배받는 삶의 영성, 여섯째, 성화의 영성: 신앙과 삶의 일치이다. I. 삶을 하나님 주권에서 이해하는 영성 칼빈은 어거스틴을 계승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을 높혔다. 믿음의 삶에 관한한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것 외에는 우리 안에 한가닥의 원기도 존재하지 않는다.”7) 하나님의 주권은 나의 영혼구원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 미친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주의 가장 멀리까지 미치며 시간과 영원을 포괄하여 작용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창조와 보존, 섭리적 통치 속에 나타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왕적 통치와 다가올 재림 속에 나타난다.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촛점이 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에게 모든 권세를 주셔서 성자의 손으로 우리를 통치, 양육, 유지하여 우리를 돌보고 도우신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상 주로 부르는데, 이것은 성부께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그의 통치권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 위에 두셨기 때문이다.”8)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에서 나온다. 예정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값이 없이 주시는 은총을 극대화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립 휴즈(Philip E. Hughes)의 다음 해석은 정당하다: “성경의 그 어떤 교리보다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 은혜의 절대적 우선권을 더 많이 지원한다. 선택 그 자체는 은혜와 관련된 하나님의 주권이다.”9) 예정교리의 진정한 의미는 숙명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경건이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예정교리의 핵심구절인 에베소서 1장 4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의 피택에 대한 확신을 발견할 것이 아니다. 성부를 성자와 구분된 분으로 안다면 성부 하나님에게서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선택되었음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거울이다.”10) 『기독교 강요』초판과 최종판 모두는 시민정부에 대한 장으로 결론짓고 있다.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시민정부와 국가에 대한 칼빈의 관심은 지대했다. 그는 제네바에 아카데미를 세웠다. 이것이 칼빈의 보편성(catholicity)이다. 칼빈은 설교하면서 가르쳤으며, 목회하면서 행정을 하였다. 그는 제네바 행정에 참여했고 제네바를 신정정치의 이상이 실현되는 도시로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경제적 사회적 시민적, 국제적 문제들에도 관여하였다. 세계는 그의 교구였으며 삶의 어떠한 영역도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10) 칼빈은 하나님이 삶의 모든 영역에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주권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칼빈의 영성은 그의 소명관과 관련된다. 하나님은 성령의 은사로서 다양한 재능을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단 한줄기 햇살만으로는 세상을 밝게 할 수 없고 모든 빛줄기가 합쳐야 하듯이 모든 인류들이 상호협력하는 가운데 이 세상이 보존되고 발전되도록 하기 위하여 다양한 은사를 각 개인의 분량에 따라서 나누어 주셨다.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재능과 직무와 의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재능과 직무와 의무를 받아 들일 때 확고한 소명(calling)을 갖게된다. 인간의 직업이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순종하는 응답이다.11) II. 경건으로서의 영성 칼빈의 영성은 그의 경건의 삶에서 나온다. 그의 경건은 루터와 같이 개인적인 회심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이 경건은 하나님의 존엄하심의 체험과 성령의 조명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경건은 성경을 귄위와 영감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데 기초하고 있다.12) 칼빈에게 있어서 신학은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천에서 나온다. 단순히 관찰이나 발견 또는 기억에 의해 얻어지는 학문적 지식이 아니다. 신학은 전 영혼을 송두리째 집중할 때 이해되는 것이요,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그 좌소와 거주하는 곳을 발견한다.13) 칼빈의 영성은 중세 말기 천주교 신학자들이 주장하였던 영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갬블(Richard Gamble)에 의하면 칼빈의 영성이란 “첫째, 선택된 백성을 위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과 하나님의 본성을 아는 지식이며, 둘째, 그 지식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14) 칼빈의 영성이란 기독교 신자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삶의 태도요 경건이다. 칼빈은 신자의 삶의 동기를 두가지로 특징지웠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명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거룩한 삶을 위한 구원을 예비하셨다.15)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모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이 세상의 고난을 이겨내는 경건을 강조한다. 경건(pietas)이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을 바르게 유지하는 태도이다.16) 경건의 의무(officia pietatis)로서 헌신적인 삶의 핵심은 예배이다. 예배는 단지 예식에 불과 한 것이 아니라 신학이 관련된 신앙적 삶의 총체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반응이다. 경건이란 금욕적이고 고립적이며, 개인적이며, 피안적인 실천이 아니다. 경건은 모든 문화와 삶에 철저하게 참여하는 하나님 앞에 사는 태도이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경건을 다음같이 말한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그 분이 주시는 유익들을 앎으로써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되는 것을 가리켜,‘경건’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베푸시는 보호와 양육을 받는다는 것과 자기들이 누리는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과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들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17) III. 말씀의 영성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의 진리와 권위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거교리를 역설하고 있다; “만일 참다운 종교를 조금이라도 알고자 한다면, 먼저 하늘의 교훈을 받아야 하고 또한 누구든지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는 참되고 건전한 교리의 작은 지식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원칙으로 알아야 한다.”18) 성경에 대한 칼빈의 관심은 “우리의 가슴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준비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의심이 추방되는 것에 있다.” “성경은 인간이 진실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생생한 말씀을 듣는 것처럼, 천국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으로 간주할 때만이 신자들 사이에 그것의 완전한 권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19)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을 설득당하기 전에는“20) 성경의 메시지를 믿지 못한다. 성경의 신적 기원에 대한 여러가지 외적 증거들은 이것들이 아무리 인상깊고 유용한 것이라 할찌라도 “우리의 연약함을 받쳐주는 이차적인 보조물”21)에 불과하다. 오직 성령만이 성경의 신적 기원에 대한 확실성을 보장해 준다: “의심 혹은 동요의 불안정에 의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또 하찮지만 까다로운 비판에 겁먹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위해 가장 좋은 길을 제공하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인간의 이성, 판단들, 혹은 추측들 보다, 더 높은 곳, 곧 성령의 비밀스러운 증거에서 찾아야 한다.”22) 오늘날 성경의 무오와 영감에 대한 논의는 헤롤드 린셀(Harold Lindsell)이 시도하는 바같이 논쟁과 변증으로 수행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과 변증은 끝이 없다. 이미 구(舊)프린스턴의 핫지와 워필드가 시도하였다. 그러나 성공적이라고 볼 수 없다. 린셀은 성경의 신뢰성을 확립하는데 이러한 칼빈의 접근 방법을 거부하고 무오한 원본을 강조하고 있다. 린셀의 의도는 좋지만 그는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성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거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데 한계가 있다.23) 칼빈은 말한다: “성령께서 내적으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실로 성경을 의지하며, 그러므로 성경은 실로 자증적(自證的)이다. 그래서 증명과 이성적 추리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24) "논쟁을 통해 성경에 대한 신앙을 확립하려는 자는 사실상 신앙에 역행하고 있다.“25) 칼빈은 말씀과 성령의 상호관련성과 성경을 여는 열쇠로서 언약사상을 강조한다. 1. 말씀과 성령의 상호관련성 성령없는 말씀은 죽은 바리새주의적 정통주의를 생산하며, 말씀없는 성령은 경험주의적 신비주의를 생산한다. 칼빈의 영성에 있어서는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적인 생동적 연관성에 있다: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다. 그 안에는 알아서 유용하고 필요한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고, 알아야 할 중요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25)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피력한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관조케 하는 성령이 비칠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완전한 말씀의 종교(신앙)가 거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 곧 말씀 안에서 그를 인정할 때, 결코 기만 당한다는 두려움 없이 성령을 품을 수 있도록 접착제 같은 것으로 그의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서로 연결시킨다.”26) 칼빈에 의하면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 없이는 말씀은 역사하지 않는다”(proinde, sine spiritus sancti illuminiione, verbo nihil agitur).27) 칼빈의 이 구절은 당시에는 말씀과 성령을 분리시키는 천주교와 열광주의를 비판한 것이었다. 로마 천주교는 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중요시하였고, 열광주의는 주관적인 체험을 중요시하였다. 칼빈이 강조한 이 말씀과 성령의 상호관련성은 오늘날 개혁교회 신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의 삶에 타당한 영성의 원리이다. 칼빈은 하나님 말씀을 바로 경건의 원천으로 보았다.28) 2. 언약 1) 성경을 여는 열쇠 칼빈은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그것의 해석의 원리를 제시해주었다. 올바른 성경관은 바른 성경해석의 원리에 의하여 뒷받침 되어야 한다. 올바른 성경 해석의 원리가 있어야 한다. 해석의 원리에 의하여서 우리는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는 구속사의 발전을 이해할 수 있다. 칼빈은 츠빙글리가 제시한 언약개념을 발전시킨다. 당시 열광주의자들이었던 재세례파와 신구약 사이에 아무런 연속성이 없다고 주장한 마르시온 주장 이후 구약성경을 평가절하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여 칼빈은 근본적으로 오직 하나의 언약, 곧 은혜 언약(covenant of grace)만이 존재한다고 역설한다.29) 언약은 구속 역사의 전개에 따라 다양한 형태(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새 출애굽 언약,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새 언약 등)를 취하지만 이 언약의 본질은 언제나 동일하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본질과 성취를 이루었다.30) 2) 그리스도 중심 이 언약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언약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전개되고,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로부터 전개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요한복음 5장 39절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것을 기대하면서 읽어야 한다. 이 목적에서 벗어나는 자는 평생동안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한다고 해도 진리의 지식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31) 그렇다고 바르트가 말하는 것 처럼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킴으로써 그리스도 보편주의에 빠지고 율법과 복음의 역설적 관계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틀 안에서 언약이 갖는 폭넓은 구조, 율법과 복음의 구조를 강조해야 한다. 알렉산드라 가노치(Alexandra Ganoczy)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으로 현존한다.32) 율법은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요, 복음은 율법이 약속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심장, 생명, 영혼, 목적 그리고 성취라고 본다. 페터 오피츠(Peter Opitz)에 의하면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33)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참으로 율법의 모든 교리와 모든 명령과 모든 약속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가르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율법을 그 분에게 적용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라는 이 목표에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자는 결코 정확하게 율법을 이해할 수 없다.”34) 3) 보편적 확장 언약 사상은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자들이 해석하는 것 처럼 모든 언약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모든 비칼빈주의자들을 은혜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배타주의 사고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배타적 태도는 칼빈주의적 정당, 시장 조합 등을 낳게 한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 사상35)에 의해 한층 강화되었다. 더욱이 카이퍼의 영역주권 사상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보수적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흑백분리정책(apartheid)에 신학적으로 오용되었다.36) 언약 사상이란 칼빈에 있어서 후기 개혁주의나 청교도 신학에서 처럼 우월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 사고 방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16세기 언약신학(federal theology)은 언약 개념에 행위언약 개념37)을 넣어서 우월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 사고방식을 낳았다. 칼빈이 말하는 것 처럼 언약의 본질이란 항상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며 다양한 것은 하나님의 집행이다.38) 언약은 항상 동일한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는 것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가 말하는 것 처럼 은혜언약이란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쌍방간의 계약이나 상호동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처분에 달려 있다는 뜻에서의 섭리이다.“39) 언약사상은 자기 백성과 나누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기인한다. 하나님은 다른 백성 아닌 자기의 백성에게 언약적 관계를 먼저 시작하였으며, 그를 자신과의 지속적인 교제로 초대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은 “선택된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2;9)이다. 여기에 자칫 유대인들 처럼 배타주의적 정신과 분리주의적 자만심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40) 독일의 언약신학자 아이히로트(Walther Eichrodt)에 의하면 언약적 교제란 “결코 객(客)을 배제하는 명확한 한계선을 긋지 않으며, 외인들을 지속적으로 언약 교제 안으로 흡수하고 있다.”41) 언약 사상은 아브라함의 축복에서도 나타나는 것 처럼 보편성을 지닌다. 언약은 유대인을 넘어서 “땅의 모든 인류에게까지” 확장된다. 칼빈이 강조한 것은 언약적 신분(covenant status)이 아니라 언약적 책임(covenant responsibility)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은 저들이 지니고 있는 언약의 충족을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이들과 나누어야할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언약의 백성으로 부르신 이유이다. IV. 교회중심적 영성 칼빈은 초대교회 교부 키프리안(Cyprian)의 교회중심적 사고를 계승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는 신자에게 교회는 어머니다”라고 한 키프리안의 교회론을 수용하였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흥왕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보배를 교회 안에 간직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교회의 품속으로 모으셔서 유아와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는 동안 교회의 도움과 사역을 통하여 그들을 기르실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장성하여 마침내 믿음의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어머니와 같은 보살핌을 통하여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42) 칼빈은 고(高)교회주의자였다.43) 칼빈 교회론의 특징은 비가시적 교회와 더불어 가시적 교회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했을 때 교회헌장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는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도 교회조직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다. 1641년에 교회헌법까지도 만들었다. 그는 장로제도를 교회정치의 근간으로 삼았고, 교회행정, 예배, 교단의 신조들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들은 반드시 장로회의 2/3(혹은 3/4)의 비준을 얻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장로제도는 개교회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회중교회(자유교회, 침례교)와 감독이 궁극적인 권위를 소유하는 계급교회(감리교, 성공회, 천주교) 사이의 중도적 제도이다. 이러한 장로제도는 권위와 자유라는 두 쌍둥이를 가치를 절묘하게 결합시키고 있다.44) 칼빈은 말씀과 성례 두가지를 교회의 표지로 가르쳤다.45) 칼빈은 이상적 기독교 공동체란 제네바 교회를 시의회로부터 독립시키고 독립적으로 성찬 참여자 여부를 결정하고, 출교와 권징을 시행하는 권한을 확보하고 목사선임의 자유권과 설교에 있어서 간섭받지 않은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제도적으로 개혁하여 개혁교회로 정착시킴으로써 실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그의 목회사역을 통하여 제네바 시(市)가 질서와 법규를 준수하는 도시국가로서 민주적으로 정착하고 사회적으로 안정을 갖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칼빈이 자신의 시대에 성공한 종교개혁자로서 큰 족적(足跡)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하게 조직된 제네바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46) 칼빈은 제네바 교회 내에 설치된 당회와 목사회를 통해서 제네바시를 자유와 인권이 보장받는 안정된 도시를 만드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당회는 정치적으로 독립권을 보장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시는 기관이요, 제네바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곳이었다. 당회는 세속적 권위인 시의회와는 독립적으로 영적 권위를 행사하면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켰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 칼빈의 개혁교회 체제는 스위스, 독일, 화란, 영국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어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47) V. 성령에 지배받는 삶의 영성 1. 성령의 실재와 사역을 중요시 칼빈은 사랑이 메마르고 성령이 없는 교리주의자가 아니었다. 루터가 가진 온정과 토속성은 부족했으나 칼빈에게는 따뜻하고 열정적인 경건이 마르지 않았다. 칼빈은 피력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뇌를 거쳐야 신앙으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인간 마음의 깊이에 까지 뿌리 박혀야 난공불락의 방어력을 가지게 된다“48) 칼빈은 자주 건전한 경건을 주장하였다. 칼빈은 ”불붙는 가슴“(flaming heart)을 경건의 목표로 삼았다. 루터와 같이 칼빈도 이성의 신학자가 아니라 정서의 신학자였다. 머리의 신학자가 아니라 가슴의 신학자였다. 미국의 구프린스턴 신학자 워필드(B.B. Warfield)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49)라고 묘사하였다. 구(舊)동독 루터교 감독인 베르너 크루쉬(Werner Krusche)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칼빈의 성령론에 관하여 썼고50),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도 “성령론은 존 칼빈으로부터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어진 선물이다”51)고 피력하였다. 성경의 본질과 권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칼빈의 가장 독창적인 공헌은 “성령의 내적인 증거”라는 그의 가르침이다.52) 칼빈에 의하면 성령의 비밀스러운 사역과 증거 없이는 기록된 말씀이나 선포된 말씀도 아무런 권능이나 설득력도 갖지 못한다.53) 칼빈은 하나님 지식에 관하여 다음같이 피력한다: "어느 누구도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교리에 대해 극소량도 맛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 깨닫지 못할 것이다.“54) 2. 신앙은 지식 아닌 성령의 사역 칼빈은 그의 교리문답서(Catechism)에서 참된 신앙에 대하여 다음같이 피력한다: “이제 우리는 신자의 신앙을 머리 주위에서만 재잘거리고 가슴에는 전혀 주지 못하는 신지식 혹은 성경이해로 인식하지 않는다.”55) 신앙이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깨닫는(에베소서3l18019) 능력”이다.56) 교리문답서 뒷부분에 칼빈은 다음같이 부언한다: “신앙은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의 지성이 조명을 받아 우리의 가슴이 확신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분명히 공급할 것이며, 그의 거룩한 말씀으로 행할 것이란 것이 너무도 확실하다는 것을 믿게 한다.”57) 칼빈은 1559년 출판된 『기독교 강요』최종판에서 신앙은 지식과 이해를 필요로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슴의 문제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기초한, 즉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었으며, 동시에 성령을 통해 우리의 가슴에 인쳐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굳건하고도 확실한 지식이다.”58) 칼빈은 신앙을 “머리보다는 가슴의 문제이며, 이해보다는 성질의 문제”59)로 본다. “신앙은 인간 이해보다 더 높은 차원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슴이 성령의 권능으로 강건해지고 지원을 받아야 한다. 지성이 성령의 조명을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60)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로움, 긍휼, 은총에 대한 약속에 근거한다.61) 칼빈은 신앙의 본질이란 내용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특징지운다. 그는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의 상관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신학적 인식론을 주도하는 이중신지식론(duplex cognitio Dei)이다.62) 그러나 이 지식은 머리로만 아는 이성적 이해가 아니다. 이 지식은 “공허한 추측이나 머릿 속을 맴도는 사변이 아니라 가슴에 뿌리박으며 견실해지는 지식이다.”63) 신앙의 지식은 계시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마음의 확신으로 주어진다: “우리의 신앙의 지식은 이해가 아니라 확신”이다.64) 이러한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통한 하나님 인식은 한편으로는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 신학의 이성주의적 사변신학을 극복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말씀의 규제없는 영의 조명만을 강조한 종교개혁의 열광주의의 신비신학을 극복하도록 하였다. 온건한 성령의 신학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칼빈의 신학은 그 후 개혁교회의 신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의 18세기 대각성운동의 주요 인물인 에드워즈의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드워즈는 칼빈처럼 신앙을 하나님의 성령의 일로 봤으며, 또 신앙은 지적인 면을 갖고 있는 동시에 의지적인 면을 갖고 있다고 보고 그 중에서 의지적인 면을 더 강조했다는 점에서도 칼빈과 생각을 같이했다.”“칼빈과 에드워즈는 이신득의를 강조하면서도 신앙의 실천을 강조했다.”65) 3. 신자의 삶: 성령의 사역 안의 존재 1) 거룩한 열정 칼빈은 신자의 삶 전부가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의 결과로 본다, 신자의 삶은 성령의 은총과 능력에서 발원하여 지속적으로 새롭게 된다. 그는 피력한다: “성령께서는 그의 신적인 감동으로 신적인 생명을 우리 속에 불어 넣으셔서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그의 역사하심과 자극의 지배를 받도록 하시는 것이다.”66) 또한 성령은 세상에서 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일하면서 세상을 보존하고, 회복하고, 인도하신다. “만물에 편재해 계시며, 만물을 유지하시며, 성장케 하시고, 천지의 모든 것을 소생시키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67) 이 세상의 선하고 참되며, 아름다운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이방인들과 무신론자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이라도 궁극적으로 성령에 의한 것이다.68) 칼빈은 신자의 삶에 관하여서 성령에 의한 중생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69) 요한복음 주석에서 그는 다음같이 피력한다: “삶의 새로움과 성령의 은사들만이 아니라 신앙까지도 중생으로부터 흘러 나온다.”70) 여기서 칼빈은 신자의 신앙을 지적 활동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의 불가분적인 사역의 결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칼빈은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의 신비로운 신앙의 연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성령의 비밀스러운 능력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다.“71) “머리와 지체들의 연합, 우리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거하심, 즉 신비적 연합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인 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소유가 되신 후에 우리로 하여금 그가 주신 선물들을 그와 함께 나누게 하셨기 때문이다.”72) 여기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본질을 우리의 본질과 혼동하는 신비주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오시안더가 본질적 의(essential righteousness)라는 괴상한 괴물을 소개하여 칭의의 교리를 깊은 안개로 휩싸이게 만들어서 경건한 사람들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생하게 누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고 있다.”73)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신자는 날마다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한다. 칼빈은 신자들이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삶을 날마다 경건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을 당부한다: "성도들은 거룩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노력하기 위해서 믿음의 눈으로 하늘나라를 묵상해야만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나타날 것이다.“74) 칼빈은 제네바시의 성 뻬에르 교회의 ”한 사람의 목사이자 신학교수“로서 점차 그의 명성과 영향력이 증대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책과 호칭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항상 하나님만을 높이려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순종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칼빈으로 하여금 경건의 생활화를 이루게 하였다.75) 칼빈은 하나님 앞의 삶을 살았고 자신의 양심에 진실하게 살았다. 그는 자신이 기도한대로 살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항상 그렇게 살도록 가르쳤다. 그는 1546년 4월 아미 뻬링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심지어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해온 자신의 모든 사역과 걸어온 생애를 조사해보아라고 촉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삶의 진실됨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76) 칼빈은 그의 삶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그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종종 인간적인 배려와 관심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칼빈이 남긴 공적 이미지는 매우 딱딱하고 냉정하고 무뚝뚝하다. 그것은 칼빈 자신이 항상 스스로를 엄격히 다스리고 연단하기 위하여 자기를 쳐서 복종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soli deo gloria) 라는 목표를 위하여 거룩과 훈련, 말하자면 경건으로서의 영성의 삶을 항상 실천하였던 것이다. VI. 성화의 영성: 신앙과 삶의 일치 1. 교리와 거룩함의 균형 칼빈은 교리와 거룩함이 균형잡히는 성화의 삶을 신자의 영성으로 삼았다. 칼빈의 삶에는 교리적 순수성과 거룩한 삶이 항상 같이 균형잡혀 있었다. 칼빈은 중세 스콜라신학에서 경직된 사변과 신학의 공하고 헛된 철학화를 혐오하였다. 그는 항상 “전전하고도 결실있는,” “유용한,” “유익한“ 교리에 관심을 가졌다.77) 칼빈은 삼위일체론을 간략하게 논하면서 “도가 지나칠 정도로 사변에 탐닉하는 자들은 결코 만족함이 없다”고 피력한다. 칼빈은 신학적 연구가 교회에 유익성을 끼쳐야할 것을 강조한다: “교회의 건덕(edification)을 열망하는 나는 교회에 유익함을 주지 않으며, 나의 독자들에게 무익한 괴로움의 짐을 지우는 많은 논쟁적인 것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78) 칼빈은 순수한 교리, 건전한 신학, 진리의 보존 등이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경건함이나 교회의 건덕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칼빈의 태도는 정통주의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이 진리 자체의 사변을 즐기는 것에 치우치고 교회의 경건함과 거룩성과 덕성 계발을 게을리 하는 것이 대하여 좋은 경고를 주고 있다. 칼빈은 교리적 순수성과 삶의 거룩성은 같이 가야 한다고 보았고.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루터가 칭의 교리를 강조한데 반해서 칼빈은 성화 교리를 강조하였다. 루터가 율법을 주로 죄를 깨닫게 하는 정죄하는 기능으로 부정적으로 본데 반하여 칼빈은 율법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중생한 자들에게 적용되는 율법의 제3의 사용(the third use of law)이다.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율법은 기독교적 삶을 사는데 필요한 자극제와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79) 율법을 바리새적으로 적용하게 될 때는 율법주의적 삶에 빠질 수 있으나 바르게 사용한다면 신자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화의 삶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이러한 칼빈의 윤리는 도덕주의가 아니라 감사의 윤리이다. 로마 천주교처럼 나의 행위로 적선(積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응답하는 윤리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감사의 윤리로써 응답하는 것이다. 루터가 기독교 신자의 삶을 의인(義人)인 동시에 죄인(罪人)(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칭한 것에 반하여 칼빈은 성화의 삶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성화의 삶을 강조하면서 “매일 아무런 삶의 진보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피력하고 있다.80) 신앙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를 주장한 루터 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가 칼빈은 행위의 칭의(justification of works)를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이유로 신자들을 받아들이시는 데, 이것은 오직 그가 우리 행위의 근원이시며 은혜스럽고 관대하셔서 자신께서 직접 우리에게 주신 선한 행실로 우리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황송하게도 나타내 보이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81) 2)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mystica unio cum Christo) 칼빈에 의하면 성령은 신자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로 이끌고 그리스도와 함께 성장하게 하며,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 됨(unio cum Christo)82)으로 이끄신다. 그리스도와 함께 성장함은 중생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삶 속에 함께 거하심으로 시작된다. 신자는 중생한 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성장하여 결국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은혜를 체험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바깥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 끈끈한 교제의 끈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와 밀착되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연합을 통하여 날마다 점점 더 우리와 한 몸으로 자라나셔서 결국 우리와 완전한 하나가 되신다는 것이다.”83)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됨이란 그리스도와 인간의 혼합을 의미하지 않는다.84)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mystica unio)이다. 이러한 신비적 연합은 “오로지 성령을 통해서만”(einzig und allein durch den Heiligen Geist) 이루어진다.“85)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비가시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교회의 구체적인 은혜의 수단인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가시적으로 이루어진다. 칼빈은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말하고 있다. 신자는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접붙임을 받아 가시적인 신자들의 회중에 받아들여진다.86) 신자는 성찬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은 성령이 떡과 포도주에 영적인 임재를 통해서 일으키는 신비한 사역이다.87)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속하지만은88) 떡과 포도주를 매개로 하여 그의 영을 통해서 신자와 하나를 이룬다. 이것은 이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적 체험이다.89) 이것은 “이해하기 보다는 체험하는 것이다.”90)따라서 신비로운 하나(mystica unio)이다. 맺음말 칼빈의 영성은 단지 개혁파라는 교회에 국한되는 종파적인 영성이 아니라 국가와 문화, 자연과 우주라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찬양하는 영성이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가 오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성(kingdom spirituality)이다. 칼빈은 영혼의 목자로서 제도적으로 개혁교회를 정착시키려 노력했던 영성의 지도자였다. 그의 영성은 단지 영혼의 목자로서 영적 돌봄에 그치지 않고 제네바에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지는 신정정치의 이상이 실현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는 설교자로서, 저술가로서, 신학자로서 교육자로서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형제들의 보호자로서 구제에 앞장선 자선 사업가였다. 칼빈은 삶의 총체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이 제네바 도시국가에서 실현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다. 하나님 영광이라는 모토 아래 그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 경건은 윤리적인 열매로 나타나는 칭의 신앙적 인격의 핵심이었다. 경건으로서의 그의 영성은 하나님 면전에서 그와 동행하는 삶, 성화의 삶이었다. 그의 영성은 그리스와 신비로운 하나가 되는 영성이며, 이것은 세례와 성찬을 통한 은혜의 가시적인 수단을 통해서 성령의 비가시적인 사역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신비로운 하나됨(mystica unio)이며, 영적인 신비로운 현실이며 체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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