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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개론 녹취 3

by 【고동엽】 2021. 10. 28.
이스라엘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고대 근동의 대부분의 민족들은 다신교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신교에는 상위신, 하위신이 있습니다. 상위신은 주로 놀고 먹고 안식을 누립니다. 하위신들은 상위신들이 늘 안식하고 지낼수 있도록 노동을 합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를 보시면 어느 날 노동에 시달리던 하위신들이 파업을 합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까 우리도 신인데 맨날 일만 하고 너희들은 놀기만 하고 더 이상 힘들어서 못하겠다 하면서 파업을 한 겁니다. 그들의 하소연을 듣고 나니 상위 신들이 조금 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하위신들의 노동을 전담할 새로운 존재를 창조합니다. 그 창조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이것이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입니다. 상위신들은 늘 안식하고 하위신들은 늘 노동한다


여기에 어떤 가치관이 배여 있습니까? 노동은 천하다는 것입니다. 노동은 밑바닥 인생이 하는 보잘것 없는 일이라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이런 신화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친히 노동하십니다. 친히 흙을 빚어서 동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에 안식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한 예수님을 유대 종교 권력자들이 뭐라 하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렇게 답합니다.


6일 동안 노동하시고 7일에 안식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6일의 노동과 7일에 안식을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노동을 중히 여기십니다.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가치관처럼 노동을 천하게 여기지 않고 노동을 성스럽게 여기십니다. 그 노동을 통해 우리는 자아실현을 할 수 있고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노동을 귀하게 여기시고 중히 여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어로 노동한다는 동사가 아바드입니다. 이 아바드라는 동사 안에 예배드린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일반적 종교는 노동과 예배의 현장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노동의 현장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일상의 자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가 되길 원하십니다. 노동을 중히 여기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이게 하나님과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신과의 차이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헌제자,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삶을 그가 가지고 온 재물보다 더 중시하시는 분입니다.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신들을 보면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심지어 신들이 하는 말은 주로 “야 너희 요즘 바치는 제물이 좀 별로네, 예배 드리는 시간이 적네” 이런 것으로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이게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신들이 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중에 예언서를 보시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책망받은 주요 이유는 예배를 안 드린다, 기도소리가 작다 이런 것 때문에 책망받은 경우는 없습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책망받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배도 자주 드리고, 찬양도 화려했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이 책망받은 이유는 종교의식에는 최선을 다했지만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이 들고 오는 제물보다 그 제물을 들고 온 사람의 삶을 주목하십니다. 창세기 4장에 보시면 카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카인과 아벨이 제물을 바쳤는데 카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제물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 4~5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카인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아니하셨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풀어서 읽으면 우리 하나님이 아벨을 열납하시고 그리고 그의 제물을 열납하셨다,


카인을 열납하지 아니하셨고 그리고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셨다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것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그 제물을 들고 온 사람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이전에 그의 삶입니다. 두 번째가 그의 제물입니다. 제물을 들고 온 사람의 삶이 앞섭니다. 사람이 들고 온 제물보다 이 제물을 들고오기 까지의 그의 삶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듣지 않겠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의 손에 피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에 피가 묻었다는 것은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힘없고 연약한 자를 짓밟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신들이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건 그가 들고 온 제물 하나 잘 바치면 그들의 모든 삶을 용서해주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들고 온 제물이나 화려한 종교의식보다 일상의 삶을 더 주목하십니다. 일상의 삶이 열납된 자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제물보다 헌제자의 삶을 더 중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세 번째가 하나님께서는 권력자나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소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십니다. 구약을 보시면 고아와 과부에게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행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신약에 보시면 소자 중 한 사람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세상의 일반적 질서와 다른 모습입니다.


고대 근동의 일반적 신화에서는 왕은 신의 대리자이며 현현입니다. 왕의 명령에 복종을 잘하는 것이 신에게 순종을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힘 있는 자에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행하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으시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밑바닥 인생, 소자들 이런 사람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신 유일한 신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믿는 신앙인이라면 나보다 힘 있는 사람 앞에서 굴종하고 연약한 자 앞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연약한 사람을 하나님을 대하듯 존귀하게 대하는 자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신 유일한 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특징은 하나님께서는 유일 신앙을 요청하십니다. 하나님외에 다른 것을 겸하여 섬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성경은 이를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다섯 번째 특징은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믿었던 주신임에도 불구하고 아내신이 없습니다.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신화는 이시스와 오시리스, 마르둑과 이쉬타르, 바알과 아세라 등 주신 남신과 그의 아내신이 있습니다. 남편신과 아내신을 함께 섬겼던 이유가 뭘까요? 나중에 역사서를 보시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바알 숭배에 금방 빠지게 됩니다. 바알 신앙은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합니다.


사람들이 왜 바알을 숭배하죠? 바알이 거룩한 신이기 때문입니까? 바알을 숭배하면 내가 좀 더 정직해지고 거룩해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바알 신앙에는 그런 윤리 도덕적인 계명이나 명령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바알에게 예배합니까? 바알을 예배해야 바알이 풍요를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 남성들은 매일 바알신전에 가서 예배를 드렸을까요? 바알 신전의 예배는 1부와 2부가 있습니다. 1부는 짐승 제사입니다. 2부는 바알신전에 여사제들이 있습니다. 타이틀은 여사제인데 실제로는 신전 창기들입니다. 신전의 규모에 따라 수십 수백 명의 신전 창기들이 있었습니다.


남성 예배자들은 1부에서는 제물을 바치고 2부에서는 바알 신전에 있는 창기들과 잠자리를 갖습니다. 바알 신전에는 지붕이 없습니다. 왜 지붕이 없냐면 남성예배자와 신전 창기의 잠자리를 하늘에 있는 바알이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알이 보면 흥분한다는 겁니다. 흥분하면 오줌을 누는데 그게 비라는 겁니다. 너무 교리가 빈약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비를 내려야 농사가 잘되는 것입니다.


풍성한 수확을 해야만 부유해 지는 것입니다. 모든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숭배로 귀결됩니다. 그 신을 믿는 이유가 나를 위해서입니다. 모든 우상숭배는 나를 위해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 그 신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농사를 지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농사를 주관하는 신, 비를 내리는 신을 바알이라고 하니까 이스라엘은 바알 신앙에 금방 동화되어 버립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바알을 열심히 섬겨야 비를 내려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풍성한 수확을 누리고 부해질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열심히 바알을 섬긴 것입니다. 두 번째가 바알 숭배에는 신전 창기들과의 잠자리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종교의 이름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 금방 바알 숭배 문화에 동화되어 버립니다.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신들이 남신과 여신의 성적 결합을 통한 풍요와 다산의 제공, 이것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믿었던 야훼 하나님은 아내신이 없습니다. 구약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거기에 성적인 음란, 남성과 여성의 성적 결합을 통한 풍요와 다산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십니다. 성적인 음란제의, 풍요와 다산을 허용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호세아서에 보시면 하나님은 누구를 자신의 아내라고 하십니까?


당신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내라 하십니다. 이사야, 예례미야에서는 내가 이스라엘의 남편이라 하십니다. 그래서 남신과 여신의 성적 결합을 통한 풍요와 다산, 이런 식의 샤머니즘적, 자기 욕망추구적인 그런 식의 교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거룩하신 것처럼 이스라엘도 세상의 주류 문화, 가치에 동화되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이 다섯 가지를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신앙과 이스라엘이 믿은 하나님의 차이가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일반적인 고대근동의 신앙에서는 노동을 천시했다, 하나님께서는 노동을 천시하지 않으시고 중시하셨다, 그리고 일상의 노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두 번째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신들은 사람들이 들고 온 제물에 관심이 있었지, 그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보다 그 제물을 들고오기까지의 그가 살아온 삶, 헌제자의 삶을 제물보다 더 중시하십니다. 세 번째 하나님께서는 왕이나 귀족이나 권력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시고 소자들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나보다 배운게 없고 가진게 없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을 하나님을 대하듯이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참된 신앙인다운 모습입니다.


네 번째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종교는 다신교 내지, 일신교였지만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믿는 유일신앙을 요청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는 하나님만을 믿지 않고 겸하여 섬기는 것인데 이것을 성경은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다섯 번째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종교는 남신과 여신의 성적결합, 그 성적 결합을 통한 풍요와 다산의 제공이 그 종교가 강조한 매력포인트 입니다.


대부분의 종교 제의가 음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아내신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음란하거나 이를 부추기는 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하라 말씀하시고 그 거룩하심을 하나님의 아내인 이스라엘이 지켜내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믿었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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