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구약개론 녹취 5

by 【고동엽】 2021. 10. 28.
그다음 중요한 것이 출애굽의 2단계입니다. 2단계는 가나안 땅 정복입니다. 여기서 많은 신앙인들이 딜레마를 느낍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 있어 뜨거운 감자같은 겁니다. 여호수아를 보시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전멸하라 명하십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많은 신앙인들이 윤리도덕적으로 힘겨움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렇다고 아무 죄도 없는 가나안 사람들을 전멸하라고 한 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라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식의 문제제기를 AD 140년 경에 로마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제기하였습니다. 뭐라고 하였냐면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편드는 피를 좋아하는 하나님이다, 전쟁을 좋아하는 하나님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자비와 긍휼이 많은 하나님이라 고백했던 그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고 우리가 진짜 믿어야 될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이다, 이런 식의 주장을 했고 그 마르시온의 주장이 2천년 교회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울려 퍼졌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신앙인들이 여호수아를 읽다 보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이 가나안 정복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꼭 기억해야 할 신학적 내용이 있는데 바로 땅신학입니다. 땅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보셔야 될 말씀이 레위기 25장 23절입니다. 인간이 발딛고 살아가는 모든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주인이신데 하나님이 모든 땅을 다 점유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시고 나서 특정한 민족과 공동체에게 그 땅에 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땅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임차인으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임대해주신 겁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레위기 25장 23절입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나온 신학이 바로 땅신학입니다.


땅신학은 한 마디로 인간이 발딛고 살아가는 모든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인간이 발 딛고 살아가는 모든 땅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과 공동체에게 그 땅에 거주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임대를 하시는 겁니다. 민족과 공동체 입장에서는 그 땅을 임차해서 사용하는 겁니다. 그 민족과 공동체가 계속해서 그 땅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해야 합니다. 그 임대료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와 체다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임대료입니다. 미쉬파트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압축해 보자면 사법적인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 바로 미쉬파트입니다. 사법적인 정의가 구현된다는 것은 뭐예요? 보통 사회는 힘있는 강한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죄를 범해도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피해갑니다. 아무리 큰 죄를 범해도 힘 있고 능력 있는 변호사를 고용해서 빠져 나갑니다. 의지할 곳도 없고 호소할 곳도 없는 사람들은 법의 심판을 받지만 강자들은 죄에 대한 처벌을 잘 받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부익부빈익빈의 사회,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유한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모든 사람들이 법 앞에 평등하길 바라십니다. 사법적 정의가 온전히 구현되길 바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미쉬파트가 구현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를 하나님은 기대하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런 사회가 구현되면 하나님은 땅신학의 맥락에서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한 것처럼 받아주십니다. 또 하나가 체다카입니다. 체다카는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 대하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형제를 대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나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에게 사기치지 않겠죠? 사람들이 왜 폭력을 행사하고 사기를 치고 하는거죠? 나와 아무 상관 없는 타자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형제가 되길 기대하십니다. 그런 사회가 구현되는 상태를 체다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집에 쌀이 10가마니가 쌓여 있는데 이웃집 굴뚝에서 1주일 내내 연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 사람을 형제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집에 있는 쌀을 이웃집의 형제를 위해 당연히 풀게 되겠죠? 이것이 바로 체다카가 구현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옆에 있는 사람을 내 가족, 형제라 생각한다면 나의 이익을 위해 그 사람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진실하게 만나게 되겠죠. 이런 것들이 온전히 이뤄지는 것을 체다카가 구현된다고 말합니다. 땅신학에 근거할 때, 그 땅에 살고 있는 임차인들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해야 하는데 그들이 바쳐야 하는 임대료가 바로 미쉬파트와 체다카입니다. 미쉬파트와 체다카가 구현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께 임대료를 납부하는 겁니다. 미쉬파트는 사법적 정의가 구현되는 것, 체다카는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 대하는 것, 그런 사회를 건설하게 되면 이것이 땅신학의 맥락에서는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렇게 되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거기에 살고 있는 임차인들이 그 땅에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지 못하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미쉬파트와 체다카를 구현되지 못하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는 사회를 만들게 되면 땅신학의 맥락에서는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임대료를 납부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임대료를 체납하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 땅의 임차인들에게 임대료가 체납된 것을 경고하십니다. 누구를 통해 하십니까? 예언자들을 통해 하십니다. 구약의 무수한 예언자들이 바로 이 역할을 했던 겁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미쉬파트와 체다카가 구현되는 사회를 건설하지 못했다, 이런 삶을 지속하게 되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지금이라도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미쉬파트와 체다카가 구현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이렇게 외쳤던 사람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의 경고를 듣고도 그들이 돌이키지 않았을 때, 즉 그 땅에 살고 있던 임차인들이 하나님께 임대료를 납부할 마음이 제로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임대료를 오랜 세월 체납한 임차인들을 내어 쫓으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임차인을 그 땅에 거주케 하십니다.


여러분, 가나안 정복전쟁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살게 하기 위해서 아무 죄도 없는 아모리 7부족을 몰아낸 사건이 아닙니다. 아모리 7부족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땅에 거주할 기회를 먼저 주신 겁니다. 아모리 7부족들이 가나안에 거주하면서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하지 않은 겁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사건들과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셨고 그것을 듣고도 그들이 하나님께 임대료를 납부할 마음이 제로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새로운 임차인으로 이스라엘을 그 땅에 들이신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땅 신학의 맥락에서 이해하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 드린 설명을 지지해주는 말씀이 창세기 15장 13~16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문제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400년 후입니다. 왜 400년 후일까요? 이게 16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모리 사람들에게 이 땅에 먼저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거든요. 그런데 이들이 임대료를 성실하게 납부하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인자와 긍휼이 충만하신 하나님께서는 임대료가 좀 밀린 이 사람들을 금방 내어 쫓은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신 겁니다. 언제 쫓아내십니까? 더 이상의 기회를 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임대료를 낼 마음이 제로 상태가 되었을 때, 이것을 창세기 15장 16절에서는 죄가 가득하지 않았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죄가 가득했을 때 라는 말은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미쉬파트와 체다카의 공동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돌이킬 마음도 없는,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임대료를 오랜 세월 체납했던 아모리 7부족을 몰아내시고 새로운 임차인으로 이스라엘을 들이실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창세기 15장 13~16절에 나옵니다. 이처럼 가나안 정복전쟁은 땅 신학의 맥락에서 이해하셔야 합니다.


임대료를 오랜 세월 납부하지 않은 아모리 7부족을 몰아내시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임차인으로 들이신 사건이 가나안 정복전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스라엘도 가나안 땅의 주인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모리 7부족과 동일하게 임차인의 자격으로 그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임차인은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가 미쉬파트와 체다카가 구현되는 사회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시면 이스라엘은 그 땅에 거주하면서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원하셨던 미쉬파트와 체다카가 구현되는 사회를 건설하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또 하나의 애굽을 건설하였습니다. 무엇이 애굽이죠? 힘 있는 강자가 연약한 약자를 억압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는 사회입니다. 이스라엘은 또 하나의 애굽을 가나안 땅에 건설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예언자들을 보내서 경고하셨습니다. 어떤 경고죠? 너희의 임대료가 밀려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납부하지 않고 돌이킬 마음이 없을 경우에 그 땅으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한다, 임차인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다는 것을 오랜 세월 예언자들을 통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경고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내어쫓김을 당합니다. 남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을 통하여 내어 쫓김을 당합니다. 아모리 7부족을 대신하여 새로운 임차인으로 들어왔지만 이스라엘도 미쉬파트와 체데카의 임대료를 성실히 납부하지 않은 결과 그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부터 내어쫓김을 당한 이야기가 구약입니다. 정리하자면, 출애굽의 1단계는 몸과 정신의 탈출, 2단계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믿음으로 정복하는 겁니다. 여호수아와 사사기에서 알 수 있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아모리 7부족을 온전히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일부는 쫓아내었지만 대다수는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동거를 하게 됩니다. 그 동거의 결과 이스라엘은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겸하여 섬겼던 이스라엘의 패악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1단계도 실패했지만 2단계인 가나안 정복사건도 온전히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출애굽의 궁극적인 3단계는 무엇일까요? 1단계가 몸과 정신의 애굽탈출입니다. 2단계는 가나안을 믿음으로 정복하는 겁니다. 가나안 정복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이 땅신학입니다. 땅신학의 핵심적인 원리는 인간이 발 딛고 살아가는 모든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왜 모든 땅의 주인이십니까? 모든 땅을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과 공동체에게 그 땅에 거주할 기회를 주십니다. 특정한 민족과 공동체는 그 땅의 임차인으로 거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임차인으로 그들이 그 땅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해야 합니다. 임대료는 미쉬파트와 체데카가 구현되는 겁니다. 미쉬파트는 사법적 정의가 구현되는 것, 체데카는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건설하게 되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땅에 계속 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문제는 임차인들이 그 땅에 거주하면서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하지 못하고, 미쉬파트와 체데카가 구현되는 사회를 건설하지 못하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를 만들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임대료가 체납되어 있다고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이런 경고의 메신저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예언자입니다. 구약에 얼마나 많은 예언자들이 있습니까? 문제는 이스라엘이 예언자들을 통한 경고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부터 내어쫓김을 당한 것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출애굽의 3단계를 정리해보면, 1단계는 몸과 정신의 애굽 탈출, 2단계는 가나안땅을 믿음으로 정복하는 것, 3단계는 가나안 땅 위에 애굽과 전혀 다른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되는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현실이 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 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실하고 정직하고 거룩함이 충만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롭게 대하는 아름다운 사회가 건설되길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보시면 출애굽 1단계 뿐만 아니라 2단계에서도 실패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건설되어야 할 가나안 땅 위에 또 하나의 애굽을 건설한 것이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실패입니다.


이후에 역사서를 공부하면서 강의하겠지만 출애굽의 실패에서 중요한 부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솔로몬왕입니다. 많은 한국교회 교인들은 솔로몬 하면 지혜의 왕, 성전을 건축한 왕 이렇게 이해하지만 42명의 이스라엘왕 가운데 이스라엘을 망가뜨린 주범을 뽑자면 단연 솔로몬이 탑입니다. 솔로몬은 야훼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기도 했지만, 바알을 위해서도 신전을 지었습니다. 아세라를 위해서도 지었습니다.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만 수십 개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야훼 하나님을 위한 성전입니다. 솔로몬은 이방의 신들을 위해 성전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친히 나아가서 이방신들에게 경배도 드렸습니다. 제가 첫 번째 시간에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의 핵심이 뭐라고 했죠?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그 우상숭배를 행한 대표적 인물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행한 큰 죄악 중 하나는 하나님에 의해 자유인이 된 사람들을 다시 노예로 전락시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자들을 해방시켜 주셔서 그들을 자유인되게 하셨습니다. 노예였던 사람들을 자유인되게 한 것이 출애굽사건의 핵심입니다. 솔로몬은 자유인된 이들을 다시 강제 노역에 동원합니다. 자유인을 다시 노예로 만든 것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가나안 땅에 등장한 또 하나의 바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이후에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성경은 솔로몬을 부정적으로 그립니다. 열왕기상 4장부터 11장까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리해보면 이스라엘은 출애굽에 실패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출애굽에 실패한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구현되기를,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되는 그런 사회가 가나안 땅위에 세워지길 하나님께서는 원하셨는데 이스라엘은 가나안땅 위에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또 하나의 애굽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출애굽에 실패한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울서신 5강] @@갈라디아서,엡에소서  (0) 2021.10.28
[바울서신 4강] @@고린도후서  (0) 2021.10.28
구약개론 녹취 4  (0) 2021.10.28
구약개론 녹취 3  (0) 2021.10.28
구약개론 녹취 2  (0) 2021.10.2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