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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 본회퍼의 수용

by 【고동엽】 2021. 10. 27.
>Ⅰ. 역사적 배경들
손 규 태(성공회대 교수)
본회퍼의 삶과 사상은 1960년대말 그리고 1970년대 초에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고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하고 억압적인 통치를 고정화 하던 시기였다. 군사정권은 그동안의 약속했던 민정이양을 지키지 않고 정권연장을 위해서 두가지 계획을 은밀히 실천하고 있었다. 하나는 1965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한 자본과 기술의 도입으로 근대화를 추진하자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1969년 삼선개헌을 통한 정권연장의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를 통해서 그리고 후자는 1972년도 유신헌법을 통해서 강행되었다. 말하자면 경제적 성과를 통해 굶주린 국민들을 달래는 한편 위장된 민정을 통해서 군정을 지속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군사독재 정권의 시도들은 인권과 민주화를 향한 각계각층의 광법위한 국민들의 열망과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서의 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이끌러 가던 주동세력은 진보적 그리스도교인들과 함께 과거에 일제에 저항했던 전통을 가진 보수적인 교계 지도자들로서 개신교회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일본과의 굴욕적인 국교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던 군부세력에 대항해서 당시 진보와 보수를 가릴 것 없이 하나가 되어서 반대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특히 1965년 7월 1일 영낙교회에서 기도회 형식을 빌어서 전개된 "한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은 한국교회사에서 해방 이후 교회가 신앙고백의 형식을 통해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항거한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보수와 진보가 하나가 되어 특정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같은 의견을 제시한 처음이고 마지막 모임으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이날 예배 후에 채택된 성명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넘치는 저수지 물이 출구를 찾는 것과 같은 '일본 자본'이 한국에 범람하는 경우에 한국은 일본자본의 '水沒地帶'로 화할 우려가 크다. 그러므로 한국정부는 정상화 이전에 강한 견제력을 가진 외자도입법과 관리법을 제정해야 한다.
2) 일제 36년간의 한국착취와 병합에 대한 사과의 보상과 금후 행동에 대한 다짐을 받고서 회담을 개시해야 한다.
3) 강력한 독립정신으로 국산장려와 국기이익 보호의 국민운동을 전개하도록 정부가 앞장 서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웃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지만 그 이전에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청산과 함께 앞으로의 정의로운 양국관계형성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만일 군사정부가 국민의 뜻을 반대해서 굴욕외교를 강화하고 비민주적인 통치를 계속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항거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라고 이해한 것이다. 한국기독교 연합회는 이미 4월 17일자의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온갖 형태의 독재의 모든 불의, 부정, 부패에 항거한다. 우리는 경제, 문화, 도덕, 정치등 온갖 부문에서 불순 저열한 외세에의 에속만은 추종을 배격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와 기도와 봉사로 조국의 역사건설에 봉헌하기를 기약한다"고 했다.

신학사나 교회사적으로 볼 때 1965년은 토착화와 세속화 신학의 논의가 문화신학적 차원을 뛰어 넘어서 정치신학적 차원으로 방향전환하는 전환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개신교회가 본격적으로 사회정치적 문제를 신학적 교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이들의 해결을 선교적 과제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한국개신교의 정치적 봉사의 신학적 근거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우리는 서구신학 가운데 특히 본회퍼의 참여와 행동신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바르트나 불트만등 서구의 변증법적 신학을 통해서 선교사들을 통해서 들어온 보수적 정통주의 신학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없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으로 왜곡되고 낙인찍혔으며 이들의 신학이 교회적 변혁을 가져오는 일에는 크게 기여헀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본회퍼의 신학, 특히 그의 용기있는 삶은 사회문제를 놓고 고심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 깊은 감동과 함께 투쟁을 위한 영감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한국교회의 3.1운동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저항전통을 들 수 있다. 3.1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난 운동이었지만 외세에 대한 항거와 함께 근대적 민주주의적 국민주권국가의 건설이라는 이상을 담지하고 있던 운동이었다. 이러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그 목표로 했던 3.1 운동의 정신은 전체 국민들 속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연연히 전승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본회퍼의 참여와 행동의 신학과 3.1정신이 결합됨으로써 한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이라는 폭발력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이다. 나치의 독재정권 하에서 투쟁했고 순교당한 본회퍼의 삶과 사상에 영감을 받은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투쟁의 동력을 그에게서 볼 뿐만 아니라 과거 1919년에 일본에 항거했던 3.1정신을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과 결합시킨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본회퍼의 삶과 투쟁을 통해서 주어진 신학적 영감은 1969년 박정희의 삼선개헌 반대투쟁을 통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1967년 당시 교계에서 이 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어 가던 장공 김재준은 '불의에 대한 투쟁은 신앙고백이다'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불의가 있을 경우에는 어느 편, 어느 누구의 소행이든지간에 우리는 이를 묵과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 땅에 의를 세우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 대항한 교회의 투쟁, 그리스도인의 항거운동은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군사독재의 인권압살과 반민주적 폭거에 대항한 투쟁은 곧 신앙고백상의 문제(status confessionis)라는 말이다. 이는 마치 핵무기의 제조, 배치 스리고 사용을 승인하는 것이 신앙고백의 문제와 결부된 것으로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핵을 승인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인것 처럼 독재에 순종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고백이 이러한 불의에 대한 투쟁의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치적 투쟁을 신앙고백에서 도출한 것은 당시의 이러한 투쟁을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서 비신앙적인 것으로 오도하고 매도하던 정통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적 무지와 함께 이들의 도피적 사고를 비판한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1965년 한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을 기점으로 해서 한국의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는 정교분리론자들과 그리스도의 왕권통치론자들 사이에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분명하게 갈라지게 되었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해서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은 반공등의 이름으로 일부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일부는 소극적으로 박정희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세력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군부독재 30년 동안 일부 카톨릭 세력과 함께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은 이들의 충실한 지원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투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매도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었다. 이러한 정교분리자들과 그리스도 왕권통치론자들 사이의 갈등은 군사독재 정권이 종식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본회퍼에 대한 한국소개가 본격화 된다. 이것은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우선 이러한 본회퍼의 신학사상을 소개한 사람들이 예외 없이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했고 이러한 투쟁을 그리스도인의 증언의 행동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역사적 전통 3.1 운동을 통한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과 정치적 우상화에 항거했던 신사참배반대운동이 본회퍼의 정치참여의 행동신학과 결합되면서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등장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윤리적 판단의 기초로서의 그리스도 고백

그러면 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본회퍼의 살봐 심학이 한국 힌학과 교회에 어떻게 수용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이들의 삶과 행동에 영향을 주었는가? 다시 말하자면 본회퍼의 삶과 신학이 한국의 행동적이고 참여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윤리적 판단을 제공했는가? 몇몇 지도적인 신학자들의 글들을 소개하고 분석함으로써 그의 삶과 신학의 한국적 수용이 어떻게 구형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69년 오재식은 기독교 사상 특집 '오늘의 딜렘마와 복음'에서 "본회퍼의 현대적 의미"를 다루고 있다. 이 글이 본회퍼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한 최초의 글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본회퍼가 '미친 운전사에게서 핸들을 빼았으려고 했던 행위'는 전적으로 신앙고백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와 그 일당에 전제적 지배에 대한 '노'(No)는 그의 (신앙) 고백이었다. 그것은 성명서거나 메시지거나 선언문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의 자세였다. 자기의 생명까지를 불사르는 자세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복종이었다." 이것은 "히틀러의 국가가 교회를 부른다"는 제국교회의 표제어에 대한 반제어였다. 이 고백은 히틀러의 제단에 충성하던 독일적 그리스도인들(Die Deutsche Christen)에 대한 고백교인들(Die Bekennende Kirche)의 그리스도 고백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한국교회의 인권과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인물인 박형규목사의 글 "본회퍼와 독일고백교회"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본회퍼는 유태인에 대한 국가의 박해에서 권력의 과잉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신앙고백의 사태'라고 그는 파악했다... 그리고 이 투쟁은 '복음적인 교회의회'를 통해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에 대한 교회의 결단을 밝히는 것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박형규 목사도 여기서 분명하게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봉사(Politische Diakonie)를 "신앙고백의 사태"(status confessionis)로 판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판단은 따라서 '정치적 고백'과 '그리스도 고백' 사이에서의 신앙적 결단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어려운 투쟁을 회고하고 동시에 이 과정에서 얻은 결험을 분석해 볼면 본회퍼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유형의 인물들과 집단들의 행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본회퍼가 살았던 국민교회(Volkskirche)적 전통이 없는 한국으로서는 Hanfried Mueller에 준하는 성직자적 팟쇼주의자들은 등장할 수 없었다 해도 박정희 통치하에서 여기에 준하는 인사들이 존재했었다. 삼선개헌을 전후해서 한국교회협의회(KNCC)에 대항하여 조직한 '대한기독교 협의회'와 같은 관변어용종교단체들과 그 주도자들이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이들은 대체로 반공주의로 무장된 윤리적 열광주의의 길을 택하거나 기존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승인함으로써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에 매어달리는 이른바 의무의 길을 선택하기 일수였다. 이들이 걸어간 길은 본회퍼가 말하고 있듯이 '성공의 우상화'의 길이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정의와 불의, 진리와 허위, 정당한 승부와 비겁한 행위를 구결할 시력을 잃고" 복음의 이름으로 대교회에 설립에 열중했다. 이런 집단들은 일견 경건하고 융성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다음과 같은 오재식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노회나 총회가, 교단이나 연합체가 다 차례로 (정치적 권력에) 굴복할 수 있다. 그들은 실존적 자세와 고백을 기피하며 자기 기능의 사회적 기능을 축소해석하여 도피구를 찾는 것을 목도하는 시기가 우리에게도 올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윤리적 결단에 있어서 율법주의를 택하거나 아니면 상대주의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1970년대 이른바 '이론적 윤리학자들'이 걸어간 실패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다수의 정통적인 보수교단들은 율법주의를 택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반공적 윤리적 열광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악마에 대해서도 의무수행을 할 수 밖에 없는 의무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니면 상대주의의 길을 택해서 '이성적인 길'을 통해서 수많은 양자택일 가운데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거나 '절대적 자유'에로 도피하여 '사적 덕행'에 치중하거나 했다. 이들은 사실상 기민하게 처세하고 책략도 사용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귀족으로서의 지위와 영예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물적 지원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역사와 교회의 변혁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본회퍼는 그의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억압적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즉 단순하고 현명한 눈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적인 것'을 제대로 파악했고 그리스도에 복종했던 것이다. "모든 개념이 혼돈되고, 왜곡되고 전도된 것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는 자"만이 역사의 변혁에 동참할 수 있었다. 개념의 왜곡과 전도는 놀라운 것이어서 지배자들은 온갖 매스콤을 다 동원해서 진보적 세력들이 사용하는 개념들을 먼저 사용하거나 오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왜곡을 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수하게 따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그의 뜻에 한 마음으로 복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민하게 처세하거나 책략을 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단순하게 서는 자, 하나님의 진리를 단순하고 현명하게 응시하는 눈만이 윤리적 현실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회퍼가 지적하고 있듯히 단순함(Einfalt)과 현명함(Klugheit)를 결합하고 매개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고백을 통해서만 가눙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현실과 세계현실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고의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세계는 더이상 두개의 각기 다른 영역으로 사고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고백의 사건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고백교회"란 이런 신앙고백 위에 선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고 성립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세계를 갈라서 보지 않는 자세를 의미한다. 이러한 그리스도 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다. 하나님의 현실과 세계의 현실을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통전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회퍼의 사상과 행동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윤리적 행동이란 이러한 그리스도와 화해된 현실에 준하는 행동(Wirklichkheitgemaessheit)이다. 이것은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사건의 신학'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재식은 그점을 이렇게 설파하고 있다. "우리는 특별히 비상시국을 위해서 마련된 행동강령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상황과의 함수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다양한 조건상황을 꿰뚫고 고수되어야 할 것은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여기서 그는 현실에 준하는 행동이란 어떤 원리나 법칙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 고백이 기준이라면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을 화해시키려는 활동들은 예기치 않은 사건들 계시사건들을 들어냈던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능성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현실적인 것을 용감하게 움켜잡을 수가 있었다.

본회퍼는 그의 윤리학에서 이러한 윤리적 판단의 준거가 될 수 있는 내용을 다음과 같은 "행위"라는 시를 통해서 설파하고 있다.

순간의 쾌락에 동요되지 말고, 정의를 단호히 행하고,
가능성 가운데서 동요하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담대히 붙잡으라.
사고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동에만 자유가 존재한다.
두려워 주저하지 말고 인생의 폭풍우 속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의 계명과 너의 신앙이 너를 따르며,
자유는 그대의 혼을 환호하며 맞아주리라.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인간이 되고 동시에 수난을 당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되고 심판을 당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은 모습을 취하는 것 -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윤리적 삶의 구성요소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성의 윤리학(Ethik der Gestaltung)은 한국의 경우는 민중목회자들의 계층자살(Klassenselbstmord)을 통해서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났으며 또 일련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통일을 위한 정치적 봉사와 투쟁 그리고 수난과 영광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이 점에서 하인리히 오트가 지적하고 있듯히 본회퍼에 있어서는 결의론적 윤리(kasuistische Ethik)도 아니고 순수한 상황윤리도 아닌 현실의 윤리가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결의론적 윤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고정된 일반적 법칙으로 보고 그것으로부터 신의 뜻을 연역하기 때문에 결국 자유를 상실하게 되며 상황윤리는 추상적이며 내용 없는 형식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구체적인 기독교 윤리는 형식주의와 결의론을 초월한다...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이고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와 세계가 화해한 사건, 하나님에 의해서 현실의 인간이 받아들여지는 곳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1960년대말 그리고 70년대 초 본회퍼의 한국수용에 있어서 이루어진 결정적 역할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봉사와 사회적 책임성을 '신앙고백의 행위'(status confessionis)로서 파악한 것이었다 할 것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한국에서는 보다 윤리적 책임성을 담은 언어인 "선교적 과제"(Missionarische Aufgabe)로서 파악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선교적 과제로서의 정치신학적 봉사들은 60년대와 70년대의 인권과 민주화를 거쳐서 80년대는 '통일'로 그 역점이 이동해 오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그리스도 고백과 그것의 윤리적 표현으로서의 선교적 과제의 구체적인 장으로서의 '교회갱신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본회퍼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취해가는 형성으로서의 윤리의 장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것을 통해서 사건이 일어나는 장으로서의 교회"를 고려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교 윤리는 이러한 교회의 선교와 서건에 봉사하는 데서 성립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의 윤리는 일차적으로는 교회의 윤리다.

마지막으로 본회퍼의 그리스도 고백과 그리스도 형성의 윤리는 한국의 전통적 유교정통주의 가부장적 계급윤리와 결합된 교회들의 질서윤리의 문제점들을 밝히고 그리스도의 왕권통치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윤리의 길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신학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세계형성을 지향한다고 생각된다.


출처 : http://sgti.keh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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