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에 헌신한 사람(마태복음 1장 18절~25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성탄의 의미는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23절)"----바로 그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여기서 '말씀'이라는 것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좀더 폭넓게 생각을 해서 비교종교학적으로 보면, 모든 종교와 철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서로 대결하고 있는 두 가지 중 하나는 아가페적인 것이고 하나는 에로스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니그렌의 유명한 학설입니다. 잘 분류했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사람은 분명히 동물인데, 스스로 동물이 아니고 사람이고자 합니다. 좀더 나아가 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몸부림치고, 고행하고, 고통 당하고, 자학하고, 그 밖의 모든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이렇듯 사람에게는 사람의 위치를 떠나서 어떻게든 하나님같이, 또 무슨 신(神)처럼 되어보려는 피나는 노력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가페적 타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바로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는 엄청난 사건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고용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들을 지명하셔서 그들을 통하여 역사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뺄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많은 선지자들입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열 여섯 명도 넘을 많은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계시를 받고, 핍박과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저 멀리 메시야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면밀히 연구해본 분의 말에 의하면, 구약은 총 456회나 메시야의 나심에 대하여 예언하고, 미리 증거하고 있다 합니다. 이 예언자들이 다 성탄을 위하여 미리 고용된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소중한 분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여인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셔야 하므로 마리아의 헌신이 필요했습니다. 대단히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장 38절에서 우리는 그녀의 유명한 헌신의 고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마리아는 그 엄청난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희생이나 하나의 생명을 바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다가올 많은 문제, 그 복잡하고 풀리지 않고 답답하기만 한 문제를 그대로 안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그 일생을 바쳤습니다. 바로 이 여인의 헌신을 통하여 임마누엘이 가능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마리아의 헌신과 희생에 대하여 생각을 합니다마는 깜빡 잊어버리고 지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 요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있음으로써 이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성탄을 중심으로 여기에 관계되는 4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고, 성령이 역사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리고 마리아의 순종, 성령의 강한 능력, 요셉의 절대적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임마누엘이 역사 속에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옛날의 결혼 풍속이 어떠했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유대사람들의 결혼 풍속을 보면 3단계로 나뉘어 결혼이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은 약혼이요, 다음은 정혼이요, 마지막으로 결혼입니다. 약혼이라는 것은 중매하는 사람과 부모님들 간에 합의하는 것입니다. 양가의 부모들이 결정을 해버립니다. 정혼이라는 것은 본인들도 서로 만나고 '부모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하고 약속을 하고 랍비 앞에서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받습니다. 이것이 정혼입니다. 이렇게 정혼이 이루어지면 정혼 기간이 1년 지나가고, 1년 후에 이제 잔치를 하는데 이게 결혼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번 즐겁게 잔치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그 의미는 희박한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잔치는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1년 동안의 정혼기간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서로에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혼하면서 이미 서로를 아내요 남편이요 하고 부를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불러야 합니다. 이는 내 아내요, 내 남편이오, 할 수 있습니다. 그 1년 동안에 앞으로 살아갈 것을 준비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기간입니다. 만일 이 정혼기간 중에 신랑 될 남자가 죽었다고 하면 신부 될 그 여자를 '과부처녀'라고 불렀습니다. 참 불행한 일이지요. 저들의 결혼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다시 본문을 보세요. 여기에 정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혼'을 '키우싱'이라고 합니다. 약혼이 아니라 정혼입니다. '후파'라고 하는 혼인예식은 그 뒤에 있는 일입니다. 오늘의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는 바로 정혼 기간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이 크고 놀라운 섭리와 함께 임마누엘 사건이 이 기간에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우리를 향하여 강하게 증거 하는 진리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심이요 또 하나는 요셉의 아들,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 다윗의 후손이라고 할 때에는 어디까지나 요셉의 계통을 탄 아들이라는 뜻이고, 동정녀 탄생이라고 할 때에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만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 가운데서 탄생하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동정녀 탄생과 요셉의 아들이심, 이 두 사건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조화 있게 설명하느냐, 그것이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사건 속에 엄청난 교리가 담겨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 의문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신앙을 다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는 사건, 즉 성육신(incarnation)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건의 상징으로, 표지로 동정녀 탄생이 있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정녀 탄생을 놓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참 위트 있는 이야기라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는데 보통 사람들의 방법으로 하시지 않고, 뭐 여자든 남자든 다 마찬가지로 죄인이지마는 좀 특별한 방법, 바로 동정녀 탄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오시겠다, 또 그렇게 오셨다, 하면 우리가 이 일을 받아들일 때에 "예, 그러셔야지요"라고 하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무얼 복잡하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 참으로 말되는 소리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지요. 우리들 보통사람처럼 태어나셔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빌어서 오시는 순간입니다. 그 상징으로 이런 특수한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보면 이스라엘사람들은 문제가 많습니다. 하지만 옛날의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아도 이 문제는 역시 복잡한 것입니다.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됩니다.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상식은 어떻습니까? '또 누군가 장난쳤구만, 속도위반을 했구만……'합니다. 이에 대하여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일반상식입니다.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대개 이런 경우라면 여자는 남자의 이름을 대야 합니다. 나는 어느 남자로 인하여 아이를 가졌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 남자가 책임을 지게 되고, 다시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부정을 할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다. 나는 그런 책임질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한다면 그 때에는 문제가 됩니다. 특별히 남자의 이름을 대지 못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그 여자는 부정한 여자가 되고, 창녀가 되고, 분명 어느 남자와든 불륜의 관계에 있다고 전제하게 됩니다. 그리고 끝내는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끌어내다 가차없이 쳐죽입니다. 신명기 22장 20절로 24절에 있는 말씀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부정은 용납하지 말아라, 끌어내어 돌로 쳐 죽이라, 그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악을 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창녀를 용납치 않으십니다. 부정행위를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오시는 성육신의 사건, 여기에는 보호자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정혼한 여자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정혼자인 요셉의 절대적 헌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다(19절)"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이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몇 가지로 그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9절)"---먼저는 그 엄청난 소식을 듣고도 겉으로 드러내지 아니하고 그저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의 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람됨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요셉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마리아와는 정혼한 사이입니다. 자기와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지금 임신중이라고 합니다. 눈이 뒤집힐 이야기지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다. 요셉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만일에 소문을 내고 문제를 제기한다면 마리아는 가차없이 돌에 맞아죽습니다. 이 때, 요셉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필유곡절(必有曲折)이겠지. 내가 마리아를 사랑하고 마리아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데…… 무엇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일이 있을 거야.
만일 나 외에 다른 남자가 있었다면 할 수 없지만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이유가 있었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가만히 그녀와의 정혼관계를 끊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닌 그 사람에게로 마리아를 돌려주려고 합니다. 여기서 요셉의 인간됨, 그 덕성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한창 단꿈을 꾸고 있는 어느 신혼가정의 일입니다. 하루는 남편이 마을 밖에 나갔다가 밤중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전깃불이 없이 호롱불을 켜고 살았을 때라 뭐가 뭔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주위는 컴컴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 방문 앞에 신발이 둘 있는 것입니다. 아, 이럴 수가 있나 하고 들어가 보니, 상투를 튼 웬 남자하고 자기 아내가 나란히 누워서 자고 있습니다. 컴컴한 방에서 단둘이 말입니다. 깜짝 놀란 것은 물론이고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른 남편은 당장에 그들을 죽이려고 부엌에 가 칼을 집어들고 왔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렇게 상냥하고 그렇게 틀림없는 내 아내였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더 생각하니까 그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좌우간 확인이나 한번 해보자.
이렇게 마음먹고 방에 들어가 불을 밝힌 다음 이불을 들춰보았습니다.
그런데 남자인 줄 알았던 사람이 바로 자기 처제였습니다. 자매가 서로 제 남편, 제 형부를 놀려주겠다고 상투를 틀고 장난을 치려 하다가 그만 잠들어버린 것입니다. 아차 했으면 아내와 처제를 죽일 뻔했어요.
여러분, 이런 극적인 장면은 아니더라도 혹 여러분의 생애에 이런 유의 실수는 없었습니까?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되는데, 한번만 더 참았으면 되는데, 한 계단만 내려섰었으면 되는데, 행동이고 말이고 그만 실수해버렸습니다. 불쑥 그래놓고 일생동안 씻지 못하는 후회를 남기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본문의 요셉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위대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당장 돌로 쳐죽여도 누구 하나 요셉보고 잘못한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소문내었다고 '허물할'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요셉은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조용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겠지' 그리고 소리 없이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고자 합니다. 그뿐입니까? 성경을 보면 요셉은 깊이 생각에 잠깁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계신지, 마리아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두루두루 생각을 합니다. 그야말로 위대한 침묵입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분들 많습니다. 한참 부부싸움 할 때에 하는 말인데, 서로들 '내가 십 년을 두고 참았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참은 것이 아닙니다. 버틴 것이지요. 어디 두고보자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어디 참은 것입니까? 십 년을 참았다는 그 말도 안해야 참은 것이지요. 정말로 말없이 말입니다. 말없이 따질 수나 있습니까? 말을 하면 무엇합니까? 시원해집디까? 여러분, 침묵이 필요합니다. 보다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을 앞세우지도 말고, 행동이 앞서지도 말고, 생각을 깊이 해야 합니다.
‘논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아홉 가지를 생각한다.
볼 때에는 보는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에는 듣는 것을 생각하고, 항상 내 얼굴빛이 어떤가 생각하고, 내 자세가 공손한가 생각하고, 말은 충실하게 하는가 생각하고, 일은 신중히 했는가 생각하고, 의심할 때에는 물어보았는가 생각하고, 분이 날 때에는 환난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이득이 있을 때에는 의리를 먼저 생각한다'-----무슨 말들입니까? 생각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짓들이 언제나 사고를 일으킵니다. 좀더 깊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나 자신도 생각하고, 이 사건 뒤에 올 일도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이 없는 일, 그것은 경거망동이요 불신앙입니다. 요셉은 깊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습니다. 깊이 생각할 때에 천사의 계시가 옵니다.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절)"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일도 없거니와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천사의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하기를 인간의 사고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calculative thinking--계산적이고, 타산적이고, 추리적이고, 예상을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입니다. 또 하나는 inspired thinking--영감적인 직감입니다. 직감되는 생각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인간의 계산, 경험, 지식, 이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요사이 흔히들 컴퓨터 좀 만진다고 하는데 그래서 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컴퓨터는 창작을 못합니다. 누가 그럽디다. 설교 준비하느라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그러느라 자꾸 시간만 많이 보내게 되고 얼굴이 노랗게 되었다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컴퓨터는 성령을 못 받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창작은 과거 추리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영감적인 것이예요.
우리는 조금 전에도 좋은 성가를 들었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성가를 들어왔는데 오늘들은 것은 처음 들어봅니다. 참 좋은 성가입니다.
누가 작곡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곡도 영감으로 이룩된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하이든이 그 유명한 오라토리오「천지창조」를 작곡하여 청중 앞에서 연주하게 되었을 때에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디서 이런 것을 배웠으며, 누구의 영향을 받았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하이든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감적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없이 고요히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요셉 그는 모든 명예, 모든 이성적 비판과 거기서부터 오는 인간적인 비난에 대해서는 다 포기해버렸습니다.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상관할 것 없습니다.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상관할 것 없습니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직선적으로 순종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를 데려옵니다. 아기를 낳기까지는 동침하지 아니하고 거룩히 구별합니다. 그래서 그는 구세주 예수를 가정에 모시기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쓰십니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 자신보다 남의 처지와 남의 입장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아직 듣도 보도 못했고 많은 의심이 있습니다. 많은 갈등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를 믿습니다. 설명들을 것 없습니다. 사랑하면 그만입니다. 그런고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간의 오해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명예는 다 버릴 수 있습니다. 고통도 비난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절대순종 하는 사람을 쓰셨습니다. 순간의 희생이 아니라 일생 전체를 바쳐버리는 것입니다. 사실은 여기에 비밀한 행복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바로 이러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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