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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항상 즐거워하는 자(로마서 5:1-8)

by 【고동엽】 2023. 4. 8.
목차


항상 즐거워하는 자(로마서 5:1-8)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 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한때 관능미로써 전세계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전남편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는 그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She has everything to live with, but nothing to live for.'--'그녀는 세상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가졌지만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하는 목적은 가지지 못했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당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요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정말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의 목적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그가 추구하는 목적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길은 그가 지향하는 즐거움에 의해서 잡힙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짜릿짜릿하고 화끈한 순간적 쾌락을 즐기고 있습니까? 충족된 소유욕의 기쁨을 즐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도박판에서 화툿장을 쥐고 있을 때와도 같은 즐거움을 즐기고 있습니까? 바로 이러한 즐거움이 그 사람을 평가해주는 기준이 됩니다.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을 때에 마침내는 실망과 절망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기뻐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을 두고 기뻐하는 사람은 실성한 사람입니다.
과거를 기뻐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그리고 현재만을 기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현재라고 하는 것은 필경 피곤으로, 실망으로, 허무로 끝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바른 즐거움입니까? 미래를 즐기고, 미래지향적 의미를 즐기는 것이 바로 인간의 바른 즐거움입니다. 문제는 그 미래가 얼마나 멀리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한 시간 뒤면 뻔히 후회할 일을 지금 행하고 있습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뉘우쳐야 할 일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어렸을 적에 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동네를 거닐다가 본 일입니다. 저희집 앞에 비교적 잘산다고 소문난 집이 있었습니다. 그 주인양반이 그렇게 얌전하고 과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어쩌다 한번 술이 들어가면 온 동네가 소란할 정도로 주정을 부립니다. 대문에서부터 할것없이 보이는대로 다 때려부숩니다. 그리고는 술이 깬 아침이면 연장도구를 주섬주섬 챙겨들고 나와서 대문을 수리합니다. 뚝딱뚝딱 열심히 수리합니다.
바로 그 장면을 저희 아버지와 함께 보았습니다. 그 때 아버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저 양반 좀 봐라. 어제 때려부수고 오늘 아침에 다시 수리할 것을 왜 때려부수는지…… 한 번도 아니고 일년에 몇 번 아니게 저 짓을 하고 있구나. 바로 저런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한단다."
여러분은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불과 하룻밤 뒤면, 며칠 뒤면 부끄러움과 후회로 끝날 일을 즐거움이라고 할 것입니까? 그것을 쾌락이라고 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영원한 미래를 지향하는 기쁨, 영원히 기뻐할 수 있는 기쁨, 현재에서 영원으로 연결되는 그런 기쁨만이 기뻐할 가치가 있습니다. 영원한 미래지향적 의미를 지닌 현재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른 인간입니다.
헬라어로 '카우코메타'라고 하는, 이 '즐거워하다'라는 말이 오늘의 본문말씀에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보통의 즐거움보다 더 높은 차원의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랑'이라고도 번역합니다. 너무나 기뻐서, 참을 수 없을 만큼 벅차서 떠들고 찬송하고 소문내고 자랑하는 기쁨,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정도의 벅찬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다'라는 이 말은 신약성경에만도 150회에 걸쳐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형용사까지 합치면 200여 회가 넘습니다. 이렇듯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누누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즐거워하라, 기뻐하라'입니다.
도대체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기독교인이란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자유와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축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즐거워해야 할 일을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즐겁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보람차고, 생각할수록 잘했다 싶습니다. 더욱 더 큰 기쁨에 살아갑니다. 산을 보나 들을 보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구원받은 은혜 안에서 생각할 때에 즐겁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풀 한 포기를 보아도 즐겁고, 꽃 한 송이를 보아도 즐겁습니다. 아침에 눈을 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입니다. 찬송과 더불어, 축제와 더불어 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떠날 때에 어떤 찬송을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않은 찬송을 부탁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임종을 지키기 위하여 모인 성도들에게 그분이 부탁한 곡은 「참 아름다워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하고 주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찬양하며 임종을 맞는 사람이야말로 잘 믿는 사람입니다. 늘「이 세상 험하고」만 부르고있으니 초보적인 신앙단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지요. 주님의 세계를 노래하는 기쁨을 지녀야----잘 믿는 사람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 마는, 저는 얼마나 봉사를 했느냐, 얼마나 헌금을 했느냐,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느냐, 얼마나 금식을 많이 했느냐로 성도들의 믿음을 가늠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수준은 그가 누리는 기쁨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즐거움의 근거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즐거워해야 하고, 그 즐거움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를 아주 논리적으로 하나씩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먼저, 즐거움은 의롭다 함에 있다고 말씀합니다(1절). 한 마디로 말해서 즐거움이란 '의(義)'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고 관심사는 의에 있습니다. 기쁨도 의에 있습니다. 따라서 불의(不義)를 통하여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악마적인 것입니다.
오직 의로운 일에만 기쁨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속담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서울은 못가더라도 바로는 가야지요. 그 의가 중요합니다. 부와 가난, 명예와 부끄러움, 이런 것이 문제일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의입니다. 욕망의 충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의입니다. 의와 선(善)---여기에 기쁨의 근거가 있습니다. 의를 추구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의롭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이 충족되는 데에, 의가 이루어지는 데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고는 아무리 좋은 여건에서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를 벌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의로웠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기쁨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즐거움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많이 벌면 그만큼 즐거울 것이라고 착각하지 맙시다. 그것은 인간답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의로웠느냐 입니다. 비록 가난할지언정 의롭게 살았다면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1절)"--의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의가 없는 우리는 믿음으로만 칭의(稱義)의 의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당신을 믿으매 그를 의롭다 여기셨다고 친히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하나님께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데 있습니다.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자녀를 키우며 경험하기도 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믿습니다. 보세요. 자녀가 부모를 완전히 믿고 의지할 때, 부모에게는 자녀의 단점과 잘못된 행동과 실수마저도 예쁘게 보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 신의와 덕의, 바로 이 의(義) 자체에 우리 기쁨의 원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기쁨이란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즐거움은 화평을 누리는 데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화평의 기쁨이 있습니다. 나 스스로 화평하고, 하나님과 화평하고, 이웃과 화평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1절)" 합니다. 하나님을 우러르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사람에게만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감기만 걸려도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번갯불만 번쩍해도 벼락맞는 줄 아는 사람에게 무슨 기쁨이 있다는 말입니까? 늘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에게만 기쁨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받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 바 된 가운데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사는 사람에게만 기쁨이 있습니다.
즐거움은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 데에 있습니다(2절). 이것은 로마서 전반에 흐르는 주제로, 율법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율법적 질서 속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율법적 심판과 판단 속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비로소 죄와 사망의 법, 곧 율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은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보아도 은혜요, 하나님을 뵈어도 은혜요, 이웃을 보아도 은혜요, 자연을 보아도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이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만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공로가 아니요 내 선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일 뿐입니다.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여기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데에 즐거움이 있습니다(2절). 바라보니 영광이 보입니다. 여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바라보니 지옥이 보입니다. 멸망이 보입니다. 자살의 시간을 정하는 문제만이 남아 있을 뿐, 이것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쁨이란 저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 8)"-----기뻐하노라, 고백합니다.
스데반은 유대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도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환상을 봅니다. 순교당하는 그 순간에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스데반의 눈이 마주칩니다. 지금, 스데반은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문입니다. 현재의 아픔이나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듯 영광을 바라보는 자에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즐거움은 아는 데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소망을 이루는 줄 앓이로다(3, 4절)"--깨달음이 즐거움을 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 안토노프스키(Antonovsky, A.)는 그의 저서「Health, stress and coping」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고난이 설명될 수 없을 때에 훨씬 견디기가 어렵다.' 내가 왜 이 고난을 당하는지, 이 고난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이것이 전혀 설명되지 않을 때에 그 고통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겁게 와 닿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 특별히 그 미래적 의미가 설명될 수 있다면 그 고통은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날이 가까워올수록 불안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 고통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에 넉넉하게 그 고난을 잘 참고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환난 가운데 얻는 유익을 알기에 즐거워합니다. 그 고난의 의미를 알기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디까지 깨달았습니까? 얼마나 깨닫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시다.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이 엄청난 진리를 깨닫고 있다면 세상에 슬퍼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형통한 중에도 즐거워할 것입니다.
모든 일 가운데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서 '인내'라는 말은 시련을 이기는 끈기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 끈기를 키웁니다. 환난을 통해서 사람이 강건해집니다. 정신이 강건해집니다.
얼마전 어떤 분에게서 참으로 가슴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4대독자인지라, 아주 귀하게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웠다고 합니다. 꾸지람 한번 하지 않고 칭찬만 하고 키웠습니다. 공부를 못해도 칭찬하고, 좀 못된 짓을 해도 감싸주고…… 이렇듯 귀하게만 키웠습니다. 요샛말로 하자면 '마마 보이'로 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군대에 가서 호되게 한번 기합을 받더니 그만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인생무상 어쩌고……'라는 유서를 남겨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내 잘못이 크다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그분을 보고 참으로 가슴아팠습니다. 여러분, 혹시 자식 군에 보내는 것을 꺼려하십니까? 이제, 그 잘못된 생각은 버리십시오. 군에는 한번 갔다와야 합니다. 가서 욕도 먹어보고, 매도 맞아보고 해야 합니다. 하긴 요즘의 군대는 매를 안때린다고 합디다. 옛날에 제가 군대생활을 했을 때에는 하루도 안맞고 지나가는 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안맞고 지나가는 날은 왠지 좀 심심합니다. 잘못해서뿐만 아니라 어떤 때에는 잘하고도 맞습니다. 번번이 연대기합을 받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람을 얼마나 강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환난은 우리를 끈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요즘 조금 춥다고 해서 자꾸 안에서만 돌려고 하는데, 잘못하는 것입니다.
추우면 추운대로 견디고, 더우면 더운대로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합니다. 겨울은 여름처럼 살겠다고 하고, 여름은 겨울처럼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일찍 세상 뜹니다.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이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더라도 장수하는 사람들은 전부 북쪽에 있습니다. 추운 지방 사람들이 장수합니다.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고작 40세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듯 입으나마나한 옷을 입고 덥게 사는 사람들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약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신이 강해지겠습니까? 공부를 많이 하면 정신이 강건해집니까? 도를 닦으면 정신이 강건해집니까? 천만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보다 환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 강건한 정신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 못지 않게 건강하기로 소문난 재벌 인사가 있습니다. 주위의 젊은 사람들도 그분을 도저히 못 따라가겠다고 하더군요.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 옛날에 칡뿌리로 목숨을 연명하기도 하고, 지게를 져서 생활을 꾸려나가기도 하고…… 별의별 고생을 다 했습니다. 그러니 '인큐베이터에서 자란' 요즘 사람들이 그분을 당할 수 있나요?
여러분, 환난을 마다하지 마십시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鍊鍛)을 낳습니다. 헬라어로 '도키메'라고 하는 이 말은 본디 '성품'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연단'을 'character'라 번역해놓고 있습니다. 좀더 의역을 하자면 인간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이라는 말씀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사람되게 함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 못된 성격을 바로 만들기 위해서는 환난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온전한 성품을 이를 수가 없습니다. 교양서적을 많이 읽는다고 사람되지 않습니다. 환난과 역경과 시련을 통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스한 성품의 사람, 겸손한 성품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환난과 역경 속에서, 소망될 수 없는 것을 다 제하고, 바랄 것이 못되는 것을 다 제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끗하고 영원하고 순수한 참소망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순수한 소망-----환난 속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악성(樂聖)으로 불리는 베토벤이 남긴 편지 가운데 말년에 동생 칼한테 쓴 편지가 유명합니다. 그 편지가 유서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 글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 읽어드릴 수는 없으니, 몇 구절만 소개할까 합니다. '아우야, 나는 귓병이 언젠가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이제는 버렸다. 나는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을 피하고 있다.' 여러분, 음악가로서 귀가 먹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작곡가로서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들을 수 없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러나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된 후에 저 유명한 전원교향곡이며 합창교향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저는 일부러 오늘 아침에도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어보았습니다. 귀먹은 음악가에게서 이렇듯 밝은 음악이 나올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더군요. 언제 들어봐도 그 곡에는 어두움을 뚫고 나가는 그의 밝음이, 빛이 있습니다. 베토벤은 편지 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속에서만 기쁨이 태어난다.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환난과 역경 속에서 바른 소망의 사람이 되고, 바른 기쁨의 사람이 됩니다. 영원한 기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즐거움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의 영광은 어떤 것입니까? 부끄러워할 일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후회할 일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언젠가는 가슴을 치며 후회할 일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영광된 미래를 바로 즐길 줄 아는 오늘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믿음과 의와 화평과 깨달음으로 가능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환난이 영광으로 이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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