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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에 끌려간 사람(사도행전 16장 6절~10절)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만이 가지는 특별한 고민이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이 가지는 고민과는 다릅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고민은 그 성격적 차원에서 안 믿는 사람들의 고민과는 질적으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고민은 일반적인 고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고민은 이 같은 일반적 고민이 아닙니다. 적어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하여 고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고민합니다. 물론 추상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진리, 선, 사랑, 의, 그리고 희생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이 같은 하나님의 뜻은 압니다. 그러나 모를 것이 있습니다. 내게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어디에 있는지, 이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가야 합니까, 아니면 와야 합니까? 버려야 합니까, 아니면 취해야 합니까? 이 싯점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듯 내게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몰라서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은 알지만 그 뜻이 내 마음에 합당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뜻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부인하고자, 거역하고자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으려면 내 뜻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뜻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함께 이루어졌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이 되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내 소원 그대로가 하나님의 뜻이었으면 좋겠다, 내 의견과 내 노력과 내 계획…… 이것이 그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내 뜻과 내 소원 위에 하나님께서 그대로 복을 내려주셨으면 좋겠다---이러한 마음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같은 욕심을 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과 욕심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짐짓 억지를 부려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떠나지 않고 여기서 그냥 하나님의 일을 하면 안되겠느냐고, 이 상태 이대로 복을 주시면 안되겠느냐고 억지를 부려봅니다. 그래서 고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에도 마음 한가운데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고민에 붙들린 채 돌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은혜를 입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입니까? 그는 '네가 하는 일이 옳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칭찬을 듣고자 예배당에 나와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결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옳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길과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같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길과 내 뜻을 고치고 싶지도, 버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모습 이 대로를 심판하고 계실 것이라는 사실 역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왔다가 더 큰 고민을 안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만이 가지는 고민이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몇 가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선지자의 말씀이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부단히 들려오던 하나님의 말씀이 중간중간 몇 년 혹은 몇백 년씩 끊어지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길이 없습니다. 선지자의 말씀을 들을 수 없을 때가 민족적으로 가장 큰 위기를 맞는 시기요, 가장 어려운 고통을 당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선지자의 말씀은 전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듣지를 않는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에스겔 2장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4, 5절)." 이렇듯 이스라엘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고민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말씀을 듣기는 했으나 순종하기 싫어서 고민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안고 있던 문제였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 '환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로 Vision이라고 하는 이 환상은 개념과 차원에서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정신주도의 환상이 있습니다. 사람의 과거잠재의식과 미래에 대한 강한 욕망이 집중되면서 생겨지는 특수한 정신현상을 환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많은 피해를 입었던 사람은 그 피해의식이 계속 작용함으로 큰 충격을 받아 무엇엔가 쫓기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욕망이 너무 강한 사람은 그 욕망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환상이나 언덕의 정상에 우뚝 올라섰다가는 뚝하고 떨어지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너무 강한 욕망이 환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 환상은 하나님의 세계와 우리 인간이 만나는 특수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분명 사람의 인격에는 영적 기능이 있습니다.
사람은 영성(靈性)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영성이 물질계와 육체의 모든 것을 극복할 때에 영적 기능이 극대화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비로소 사람은 영계(靈界)에 도달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영적 존재까지도 직접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에로스적 환상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peak experience---절정경험 또는 엑스터시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의 환상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요, 천사도 영적 존재입니다.
이 영적 존재가 우리의 물질계를 자유롭게 다스리시며, 물질계의 모든 것을 극복하십니다. 또한 물질계로 파입하셔서 물질의 세계를 자유롭게 이용하시어 지극히 인간적인 문화 안에서, 인간 지식과 인간적 여건 속에서 가시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이렇듯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환상'에 대하여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환상은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특수한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로서의 아가페적 계시환상이라고 합니다. 특별한 때에,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임의로 사람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뜻을 가르쳐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탈무드」에서는 환상을 '개봉되지 않은 편지'라고 꽤 재미있게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봅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듯이 지극히 인간적인 음성으로 아담을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또한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재물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지 않음으로 몹시 분해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듯이 가인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아주 인간적인 음성으로 친절하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관계입니다.
성경을 읽어가느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이 불붙는 숲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대로 들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린아이 사무엘도 "사무엘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또한 모세도 "모세야, 네 발의 신을 벗어라" 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밖에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계속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주신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특별히 경건한 사람들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의인도 아닙니다. 이렇듯 때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이나 죄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도 만나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이가 많은 엘리 같은 사람으로부터 사무엘처럼 어린아이 같은 사람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필요한 때에 자유로 만나주신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환상'은 헬라어로 '호라마'라고 합니다. 이 '환상'이라고 하는 말은 신약성경에 꼭 열두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무려 열한 번이 모두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이 환상에 의해서 사울은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십시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붙잡아오기 위하여 영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람입니다. 여기서 시간과 장소는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극악한 자세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피난가 있는 다메섹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길을 가는 사울 앞에 주님께서 홀연히 나타나십니다. 정오, 곧 한낮에 예수님께서는 빛과 함께 나타나시어 그의 길을 가로막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말씀으로 사울은 예수님의 제자 바울이 됩니다. 바울은 이런 시간이 있으리라고 기다렸던 것도, 이런 시간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정오에 다메섹 도상에서 이같이 엄청난 환상을 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바울은 이 환상에 붙들려서 결국 그의 운명이 180도로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 한 사람의 변화가 아닙니다. 이로 인하여 세계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환상으로부터 바울의 새로운 삶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 환상을 따라 평생을 살았으며, 바로 이 환상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일생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몽상가가 아닙니다. 명상가도 아닙니다. 입산수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행동의 사람이요, 지성적인 사람이요, 적극적인 사람이요, 강한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말씀 가운데는 '애쓰되'라는 말과 함께 '힘쓰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들이 헬라어로는 '페라조'가 됩니다. '에페라조'에서 파생된 '페라조'는 '시도한다, 노력한다, 있는 힘을 다해서 애쓴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노력의 사람이었습니다. 늘 마음을 열어놓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조심스럽게 살아갔습니다. 그는 강한 의지의 사람이요,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그 많은 핍박을 무릅쓰고, 그에 대항하면서 자신의 의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늘 하나님께로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을 그릇에 비유하여 말씀한 바 있습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딤후 2:2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 4:7)"---사도 바울은 '나는 깨끗한 질그릇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주님께 바쳐졌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한 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주님의 음성을 가까이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민감했습니다. 또한 그는 눈앞에 닥치는 현실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더욱 더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음성을 기다릴 줄 아는 경건한 안목이 있었습니다. 경건한 시각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3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막혔다고 하는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서를 비롯한 그의 여러 편지에 "주의 뜻이면 갈 것이다, 주의 뜻이면 만날 것이다, 주의 뜻이면……"이라는 말씀이 거듭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바울의 앞에 있는 막힌 길은 지금 우리가 삼팔선을 넘어 북녘 땅을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것처럼 막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배를 타고 로마로 건너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늘 현실상황을 조심스럽게 판단하면서, 그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리는 지각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늘 순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무리하지 않았습니다.
길이 막혔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자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훌륭한 점입니다.
또한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하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결코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뜻보다 뒤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세히 모를 때에는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에는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시도했던 것, 계획했던 것, 수고했던 것을 모두 저버리고 과감하게 주님의 뜻을 따라서 모험의 길을 나섰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6절)"---이 말씀은 결코 핍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매맞는 것이나 감옥에 갇히는 것 따위의 핍박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영적인 지각 속에 감지된, 주님께서 강하게 금하시는 일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7절)"---예수님의 영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 나아가 복음을 전하게 하는 열정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하셨다니, 이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마게도냐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9절)"---바울은 자신을 부르는 마게도냐사람을 환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꾸준히 애를 씀으로써 금지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닫히는 문과 함께 열리는 문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십니까? 반드시 다른 길을 열어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셨습니까? 반드시 다른 문을 열어놓고 계실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것을 바로 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점에서 민감했습니다.
영적인 지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정열적인 실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바울은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문이 닫힐 때에는 어느 쪽 문이 열린 것인가, 이 길이 막힐 때에는 어느 쪽 길이 열릴 것인가 하고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새로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 때마다 환상이 작용합니다. 지금까지 애쓰고 계획하고 노력하던 바를 다 포기하고 큰 모험의 길을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이 환상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역사의 변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리빙스턴은 주님 앞에 헌신할 초기에 중국대륙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계획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환상을 보고 아프리카로 갑니다. 윌리엄 커레이(William Carey)는 폴리네시아에 가기로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도로 갑니다. 미국인 선교사 저드슨(Judson Adoniram) 역시 인도로 가려고 계획하여 많은 준비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가 가게 된 곳은 버마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환상에 이끌리어 다른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언더우드(Underwood) 박사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나옵니다. 언더우드 박사는 1884년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로 굳게 결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인도 행을 결심합니다. 당시 많은 질병과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던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1년 동안 의학과 그 나라의 언어를 배웠습니다. 이렇듯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 무렵, 어느 날엔가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한국으로 가지 않느냐?" 그는 환상을 겪은 뒤에, 정신을 수습하고 한국이 어디 있나를 지도상에서 확인해봅니다. 이것이 언더우드 박사가 한국에 오게 된 동기입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인천항에 첫발을 내림으로 한국교회의 토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내 뜻대로의 길을 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환상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내 의견이나 계획을 깨끗이 포기하고 주님의 지시를 따를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환상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좌절이 없습니다. 실패가 없습니다. 낙담이 없습니다. 오직 용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왜입니까? 만일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웠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환상을 따라서 아시아 행을 포기하고 유럽으로 갑니다. 이로 인하여 마침내 세계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이렇듯 환상을 따름으로써 새 역사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환상에 사는 사람은 항상 긍정적입니다. 적극적이고 창조적입니다. 좌절이 없습니다. 나아가 환상에 사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 처해도 굴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과거에 의해서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저 미래, 약속된 미래에 의해서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초월합니다. 자기 욕심, 자기 능력, 자기 지혜, 자기 나약함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환상에 끌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문명적인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느라고 무진 고생을 하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곳의 추장 하나가 이 젊은 선교사를 측은하게 보고 위로하고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나라를 두고, 왜 여기에 묻혀서 고생을 하며 일생을 보내려고 하느냐?" 이 말을 들은 선교사는 "아닙니다. 여기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여기에 심기우는 것입니다. 반드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0절)." 효과적으로, 현실적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하나님의 환상에 끌려갑니다. 이 소명에 끌려서 바르게 응답합니다. 이렇듯 환상을 따라서 바로 살 줄 아는 사람이 지혜의 사람이요, 은혜의 사람이요, 능력의 사람이요, 용기의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승리가 있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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