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경구속사 제1강 총론/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본문 : 다니엘서 2장 31절~45절
Ⅰ. 도입
"이 열왕 王)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단 2:44∼45).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서(啓示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 마음에 품으신 계획과 작정을 세상역사 가운데 펼쳐 보이신 책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40여명의 저자들을 특별히 부르셔서 무려 1500∼1600여 년에 걸쳐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쓰게 하였습니다. 이 때 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담당하신 분이 하나님의 영이시며, 주님의 영이기도 한 제삼위 하나님이신 성령님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이는 성령께서 학생들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듯 저자들에게 기계적으로 간섭하여 기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자들의 전 인격을 유기적(有機的)으로 사용하셔서 자원하는 심정으로 쓰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에 의해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쳐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성령의 내적 간섭과 감동을 입어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지식을 발동시켜 자연스럽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배후에서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해 전체의 과정을 주도적으로 간섭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님을 진리의 영(요 14:16∼17)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이는 성령님이 성경의 원저자가 되신다는 의미인 동시에 진리와 함께 일하셔서 성경을 친히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분임을 시사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서인 성경이 없으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믿을 수도, 섬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전인적(全人的)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더 이상 스스로 하나님을 더듬어 알 수도, 찾을 수도, 나아가 자력으로 섬기거나 무슨 선한 일을 행할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와 영적 파산자로 정의(定義)하고 있기 때문(창 3:8∼10; 마 8:21∼22; 롬 3:10∼12; 엡 2:1)입니다. 처음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인격과 본성은 죄로 인해 타락하고 오염된 나머지 하나님과의 교제와 예배의 통로인 영적 기능이 마비돼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향한 종교심의 발동이 방향감각을 잃게 된 바,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기게 된 것”(롬 1:21∼23)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나님의 계시서로서 성경을 주신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타락한 인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씀중심의 신앙 또는 신학적으로 계시의존사색신앙(啓示依存思索信仰)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딤후 3:16∼17; 행 17:11). 왜냐하면, 기독교신앙은 처음부터 성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를 철저히 의존(依存)하는 것으로서 성립됩니다. 이렇게 성경계시를 생명과 신앙으로 고백하고 이를 삶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올바른 성경적 신앙에 접촉됩니다. 성경을 주신 일차적 목적이 이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에 무지하거나 결핍되면 그것에 비례해 자신의 종교심을 발동시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바, 곧 자의적(自意的) 숭배신앙에 빠져듭니다. 자의적 숭배신앙은 신앙의 근거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곧 자신의 내적 종교심의 발로로부터 나와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본래적 계시에서 이탈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상존합니다. 인본주의를 지향하는 신앙의 중심에는 항상 인간의 행복과 안녕이라는 현세적 복과 성공의 개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 일의 성취를 위한 수종자로 전락하게 마련입니다. 인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이렇습니다. 이런 자의적 숭배신앙의 모습은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타락하므로 항상 신앙의 내용과 방향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창 3:5; 왕상 12:25∼33; 사 1:10∼14; 마 16:23∼24)으로 나타납니다. 제자도의 첫걸음이 자기 부인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옛사람의 자아는 항상 그 생각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한다는 것(마 16:21∼24; 민 13:31∼33)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언제든지 당사자들을 사단의 미혹에 빠지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에덴에서의 처음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배경이 그랬습니다. 주님의 지상적 사역의 절정인 예루살렘의 고난을 막무가내로 만류했었던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이렇게 인본주의적 신앙의 배후에는 항상 사단의 역사와 시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성경은 늘 경계해서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여전히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 머물러 있으므로 자신이 인본주의적 유사 기독교 신앙관에 붙들려 있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자기 기만적(欺瞞的) 신앙에 깊이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정상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더욱 한 시대에 절대 다수가 이런 신앙관을 공유하여 제도권을 이룰 때, 막강한 세력을 발휘하여 그들의 신앙이 당대의 객관적 진리와 가치를 대변하게 됩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는 여전히 왜곡된 진리와 가치로 판정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교회역사 속에서 신약시대에 유대교와 중세 구교(舊敎)의 실체가 이랬습니다. 거기에도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용과 성격과 방향성에 있어서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의 체계인 계시를 의존해서 좇는 것이 아닌, 자신의 종교적 의를 힘써 추구해 나가는 것임으로 불복종과 불법으로 정죄 당했던 것입니다(마 7:21∼23; 롬 10:2∼3). 이런 이유로 교회의 세속화와 신앙의 타락은 언제나 말씀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왜곡된 해석에 기인된 것이 교회역사의 증언입니다.
오늘날이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범죄이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치열한 접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으로 결정적인 구속사의 승패가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림(再臨) 때까지는 아직도 사단의 잔존세력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갱신은 곧 말씀의 성경적 회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힘써 공부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기를 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바른 해명(解明)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여 교회와 신앙을 동시적으로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 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4).
Ⅱ. 전개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의 총화(總和)로서 성경은 과연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대 주제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오늘 첫 번째 강의(講義)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성경이 총체적으로 말씀하는 바에 우리의 신앙을 고정시키고 그 내용과 방향성을 신앙과 생명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데서 참된 성경적 신앙의 의미와 본질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명제와 관련하여 다니엘서 2장 31∼45절에서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자태가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본문의 역사적 배경
성경의 역사는 계시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깊은 곳에 간직해 두셨던 영원하신 계획과 목적을 마침내 인류의 역사 속에 언약을 도구로 펼쳐 보이신 구속사(救贖史)입니다. ‘구속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활동역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당신의 신묘막측 하신 구속사의 경륜을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모형(模型)적, 예표(豫表)적으로 계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서 택하셔서 선민(選民)으로 삼으시고 열방 앞에 당신의 구속사를 나타내시는 계시적 도구로 삼으신 배경이 이렇습니다(신 7:7∼8). 따라서 이스라엘의 존재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언약(창 12:1∼3) 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신정(神政)통치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하나님의 친(親)백성들로 삼으시려는 거룩한 사역 곧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담당하는 자들로 존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가 구체적으로 성취된 시기가 바로 다윗과 솔로몬 통치 초기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통일 이스라엘 왕국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를 역사 속에서 현시(顯示)하는 계시적 도구 내지는 한시적 예표로 선용됐기에 하나님 나라의 신정적 통치체제를 영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 통치 후기에 가서 통일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져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라는 서로 다른 이름의 분열왕국으로 체제가 바뀝니다(왕상 12장). 이는 모세를 통해 주신 시내 산 언약(출 19장, 24장)에 대한 불순종으로 야기(惹起)된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의 일환입니다.
이후 북이스라엘 왕국은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백성들은 앗수르가 통치 관할하는 전지역에 포로로 잡혀가 흩어져 살게 됐을 뿐 아니라(디아스포라),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지역에 이방인들을 집단 이주시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을 혼인시키니 그로 인하여 태어난 혼혈족 소위 ‘사마리아인’이 입니다. 유다의 포로귀환 시기 후부터 이들은 유대사회에서 동족(同族)으로 여기지도 않게 돼 일체의 교제권에서 외면당합니다. 따라서 사사건건 유대인들과 마찰을 빚으며 적대적인 관계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에 위치한 수가성의 한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요 4:7∼9)를 보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반목과 불신의 골이 얼마나 깊고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됐는지를 생생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특별히 9절에서 여인은 물을 달라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 함이러라.”
남 유다 왕국 또한 북 이스라엘 보다 대략 136년 후인 BC586년경에 앗수르를 패배시킨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1차(605), 2차(597), 3차(586)에 걸쳐 남 유다를 침략해서 결국은 삼차 침공 시에 유다는 완전히 패망하고 많은 유다인이 포로로 잡혀가는 치욕적인 굴욕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의 말발굽아래 항복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는 시내산 언약에 근거한 남북의 분열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결과입니다. 일찍이 시내 산 언약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로 존재할 때에 이방의 신을 섬기고 율법을 신실히 청종치 않을 때, 이와 같이 열국에 흩어서 저들의 압제를 받으며 저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는 것으로 심판하실 것(신 4:23∼28)을 이미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런 하나님의 심판의 구체적 시행인 바벨론의 1차 유다 침공(BC605)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1차 침공 시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당시 유다의 젊은 엘리트들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비록 적국이라 할지라도 유능한 인재를 등용시켜 자신의 왕위를 든든히 세우는 일에 출신배경의 차별을 두지 않은 듯 합니다. 비록 그것이 전략적인 정치적 목적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여튼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이런 식으로 주님의 각별하신 섭리적 인도 아래 바벨론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고급 관리의 위치에서 업무를 관장하게 됩니다. 다니엘서 기자는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나라를 포함한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단 2:21, 4:17, 25. 32; 롬 13:1∼2)을 성경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본문에서 왕이 꾼 꿈의 내용을 통해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극명하게 소개함으로써 과연 인간이 누구를 위해, 어떻게,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될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서인 이유가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합니다.
2. 왕의 꿈 내용
이제 오늘 강의의 주제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다니엘서 2장 31∼35절입니다. 본 절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다니엘에게 이상을 통해 보여주신 내용이 소개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말씀으로 최종 완성되기 전, 특별히 구약계시의 역사 속에서는 꿈이 종종 하나님의 계시전달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로 완성된 성경이 주어져 하나님의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완성된 이상,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구하려는 시도는 구속사 진행의 점진성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일의 계시로 완성된 성경이 주어진 이상 구약적 방식, 곧 꿈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이나 선지자의 예언 등을 통한 하나님의 추가적 계시의 말씀은 이 시대에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성경은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오직 성경만이 유일하고도 완성된 계시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최종적 계시의 마침이 됨을 자증하기 때문입니다(딤후 3:16∼17; 히 1:1∼2; 계 22:18∼19).
왕이 꾼 꿈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먼저 31∼33절에서는 왕이 꿈에서 본 것이 큰 신상(神像)으로서 인위적으로 고안되고 제작된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 신상의 모습은 크고 광채가 나는 것으로 기이한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고 저자는 기록합니다(31절). 이 뿐만이 아닙니다. 신상의 구조에 있어서도 범상치가 않은 것이 머리는 정금으로, 가슴과 두 팔은 은으로, 배와 넓적 다리는 놋으로, 종아리는 철로, 그리고 발의 얼마는 철로 나머지는 진흙으로 혼합해 만들어 져 보기에 두렵고 특이한 신상이라고 소개합니다.
34∼35절에서는 또 다른 꿈 곧 뜨인 돌이 소개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제작되지 않은 것’(34절상)이라고 설명으로 그 존재와 출처가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위적인 신상과 신적 기원에 의한 뜨인 돌이 왕이 꾼 두 종류의 꿈입니다. 이 두 꿈은 출처와 기원과 성격에 있어서 각각 이질성을 자체에 담고 있지만 내용의 전개상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뜨인 돌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뜨인 돌 하나가 앞서 본 신상의 발을 무서운 속력과 힘으로 내려치니 거대한 신상은 한순간에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우상을 친 뜨인 돌은 이 후에 태산을 이루는 가운데 온 세계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신상으로 대변되는 인간통치 나라는 이 뜨인 돌로 인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뜨인 돌로 인한 신적 기원을 가진 새로운 신정통치의 나라가 인간나라를 대신해 세워진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성경 독자들로 하여금 세상역사의 진행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바르게 해석하는 가운데, 삶의 방향성과 가치관을 뜨인 돌로 인해 건설 될 새로운 신적 기원의 나라에 정조준(正照準) 할 것을 강력히 시사합니다(마 6:33).
그렇습니다. 역사는 방향 없이 바람 따라 흔들리는 부평초(浮萍草)가 아닙니다. 기원(起原)이 있고 과정(過程)이 있고 최종적인 목표(目標)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부분은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금 저자는 왕의 꿈을 계시의 도구로 사용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마땅히 섬길 자가 누구이며,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될 것인가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인 질문에 진지하고 엄숙하게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니엘을 통해 주신 꿈의 정확한 해석을 들어보겠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의 자세와 가치관과 신앙관을 보다 신중하게 재정립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과 방향성을 제시하기에 말입니다.
3. 왕의 꿈 해석
저자는 다니엘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꿈 해석을 소개합니다. 이 또한 꿈의 내용이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 것을 통해 신상과 뜨인 돌의 이미지를 분리해서 해몽(解夢)합니다. 먼저 39∼43절에서는 신상에 대한 해석입니다. 저자는 신상에 대한 꿈을 해석하는 가운데 신상의 각 부분에 해당되는 금, 은, 놋, 철, 진흙이 의미하는 바가 인간이 통치하는 열방 나라들임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통치의 세상 열국을 총체적으로 의미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다니엘의 해석을 통해 신상의 금 머리 부분이 당시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이 신상이 결국 인간통치의 여러 나라들을 총체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저자는 은, 놋, 철, 진흙의 가치를 따라서 바벨론만 못한 다른 신흥제국들이 끊임없이 흥망성쇠를 거듭할 것임을 예언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바벨론 제국 이후에 페르시아와 희랍과 로마제국의 출현이 이 신상의 나머지 부분을 가리킬 수 있다는 개연성에 대해 조심스러운 해석을 시도해 봅니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의 나중 형편은 강대국(철)과 약소국(흙)들이 공존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며 철저히 독립된 자주국가의 정체성을 띠게 될 것(42∼43절)임을 시사합니다. 참으로 오늘의 세계는 절대강자와 절대약자를 구분하기에는 다양한 측면에서 너무나도 상호 밀접한 의존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상의 현대적 적용과 관련해서 과연 이 시대는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어디쯤을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요. 후에 이 부분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뜨인 돌에 대한 해석입니다(44∼45절).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돌로 인해 세상 가득히 태산을 이룬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신적 기원을 가진 나라 곧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나라를 의미합니다(44절). 이 나라는 그 기원과 출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인간나라들처럼 망하거나 누구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요 10:28∼29; 롬 8:35∼39)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국권(國權)은 영원하고 영속적입니다. 그런데 신상으로 대변되는 인간나라와 뜨인 돌로 대변되는 하나님 나라는 기원과 출처와 성격에 있어서 이질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뜨인 돌이 신상을 철저히 부서뜨리므로 인간나라가 종식을 고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통해 불가분의 관계성과 연속성을 갖는 특징도 있습니다. 저자는 특별히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다는 설명을 통해(45절하) 이 꿈의 궁극적 성취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거듭 강조합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삶의 수단이 아닌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 생활해야 하는 근본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실질입니다. 신앙은 선택이 아닌 인생의 필수적 요소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을 성경을 통해 살피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적 신앙은 그것이 제아무리 하나님의 열심을 띠고 나타난다 할지라도 결국은 불복종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마 7:21∼23; 롬 10:2∼3).
4. 본문의 현대적 적용
그렇다면, 다니엘의 꿈 해석에 대한 실제적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시대는 하나님의 역사진행에 있어서 어느 경점에 해당될까요? 사실 성경의 예언적 계시내용을 역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연대기적으로 적용시켜 해석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시도입니다. 성경의 내용은 세상역사기록의 집대성이라기보다는 세상역사를 무대로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적 진행을 주된 기록의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성경은 종말의 시기나 구체적 날짜의 도래에 대해서는 침묵(마 24:35∼36; 행 1:7)으로 일관합니다. 오히려 종말을 맞는 성도의 신앙적 자세와 태도(행 1:8; 롬 12:2; 마 25:1∼13; 살전 5:1∼8)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신상의 각 부분에 해당하는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를 역사 속에서 찾아서 사사건건 대입시키려는 시도는 사실상 무리입니다. 성경이 침묵하는 부분을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자칫 성경의 의도를 왜곡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성경 신학적 해석방법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에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과 적용은 하나님의 뜻을 결정적으로 왜곡시키는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적 신앙으로 인도하는 첩경이 됩니다. 오히려 다니엘서 저자는 본문을 통해 인간이 통치하는 세상역사는 점진적으로 쇠퇴해 가는 가운데 그 최종적 종말을 맞게 됨을 시사합니다. 반면 세상역사의 종말에 출현할 신적 기원의 가시적 하나님 나라는 인간나라와는 달리 영원하며 영속적이어서 결코 쇠하거나 멸망당할 수 없음을 제시합니다. 이는 성경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적 역사의식의 고취와 필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종말론적 생활자세를 견지케 함으로써 언제라도 닥칠 수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부단히 추구하는 신앙적 삶을 촉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신뢰할 만한 성경 신학자들의 견해로는 바벨론 제국 이후의 신흥제국들의 출현과 관련해서 메대-파사(페르시아), 희랍,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를 조심스럽게 연결시켜 봅니다. 그 후 현재까지의 역사를 신상의 발(철과 진흙의 혼합)과 뜨인 돌의 영적 내지는 불가시적 사역이 공존하는 기간으로 적용해서 해석하려는 시도가 보편적인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 뜨인 돌로 표상(表象) 되는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미 도래해서 신상으로 대변되는 세상역사 속에서 서로간의 치열한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견해는 상당한 성경적 지지를 받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의 초림과 그분의 지상적 사역기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도래했음을 천명(闡明)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 12:28; 눅 17:20∼21).
5.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국면(局面)
우리는 이 시점에서 성경이 자증(自證)하는 바 하나님 나라의 이중 구조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미 다니엘의 꿈 해석을 통해 인간통치의 세상역사는 신적 기원에 근거해 출현한 가시적 하나님 나라의 등장으로 종말을 고할 것임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출현과 관련해서 성경은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미' 도래한 현재적이고 불가시적인 하나님 나라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가시적 하나님 나라로 이원화 시켜 언급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먼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해 살펴봅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비방하는 소리에 답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가 능력 있게 발휘되는 것으로 인해 세상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의 세력이 쫓겨나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능력이 '통치'의 개념으로 나타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세상역사 가운데 실존해 역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본체(빌 2:6)이시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 자체로 존재하고 계심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예시적(例示的) 사건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12절에서는 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주님의 치유사역이 소개됩니다. 이 사건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 담긴 본의가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증명하시는 계시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병자의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하시고, 후에 그의 중풍 병을 고쳐 주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치유된 사실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9절). 객관적인 증거로 봐서는 현실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둘 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사역입니다. 따라서 중풍 병을 고치게 되면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바, 자연히 죄 사함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병자의 중풍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을 통해 그의 죄까지도 용서받은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이 곧 하나님이신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12절에서 그 자리의 사람들이 한결 같이 놀란 나머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고 계심을 증거함과 동시에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확증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세상역사 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침노해 들어와 '통치'의 개념으로 그 천상적 권세와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중에 하나님 나라가 현존하며 활동하고 있음을 확실히 밝히십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불가시성과 현재성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다시 말해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을 통한 '통치'의 개념으로 성도들의 심령과 이들로 구성된 교회공동체 속에서 보이지 않지만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역사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상의 성도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로 여기서부터 그 나라의 실질을 선취적으로 맛보아 체험하는 자들로 존재합니다. 이 사실을 확고부동하게 알고 이를 생명과 신앙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통해 구원을 누리는 삶에 비로소 접촉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날로 진리의 체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자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의 깊은 곳에 날마다 접촉돼 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계시의 정신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심화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돌밭에 심겨진 씨앗과도 같이, 아니면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과도 같이, 말씀을 받을 때는 즉시 기쁨으로 받는 듯 하지만 환난과 시련이 닥치고 염려와 근심이 쌓이면 이내 말라버리 듯 기쁨을 잃고 실족해 버리게 될 뿐입니다(마 13:20∼22). 신앙의 본질은 참으로 진리에 이르는 지식의 체계에 깊이 접촉됨으로 어떤 상황의 변화와 환경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넉넉히 인내하며 극복하는 실제적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정상입니다(마 13:23; 단 3:17∼18). 다음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대해 살펴봅니다. 이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미래적이고 가시적인 실제적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결돼 있음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된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재림으로 그 종말론적 실체를 드러내게 됨과 동시에 일체의 구속사 진행의 지상적 사역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눅 22:18)
본 절은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잡히시기 전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시는 사건의 기록입니다. 주께서는 유월절 절기 때 사용하는 포도주 잔을 나누시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다시는 유월절 잔을 마시지 않겠다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죽음이 구약의 유월절 절기를 실체로 성취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십니다(고전 5:7). 따라서 주님의 죽으심은 구약의 유월절을 폐하시고 성찬식을 통해 새 언약을 세우는 새로운 계시시대의 서막(눅 22:19∼20)을 알리는 셈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 봐야 할 대목은 주님께서 언급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 성격이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으로 지적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18절). 주님의 지상적 사역에 있어서 가르침의 중심내용은 천국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입니다(마 4:17, 23; 막 1:14∼15; 눅 4:43). 그러나 그분의 전(全) 공생애 사역의 내용을 통해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이중 구조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이미'(already)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재림으로 이루어 질 '아직'(not yet) 도래하지 않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그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소위 천국비유들이 가르치는 주제와, 마태복음 24장 30∼31절의 종말론적 기사내용이나, 25장의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등등은 한결 같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성격을 다양한 측면에서 시사하는 전형적인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가 두 가지 국면에서 소개되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지상적 삶이란 여전히 불신자와 방불한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실로 인해 삶의 내용과 성격과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삶의 가치관과 인생관조차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현세 지향적 삶에서 천상 지향적 삶(엡 4:22∼24; 골 3:1∼3)으로 바뀝니다. 마태가 그의 산상수훈의 내용 속에서 천국백성들의 삶의 특징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차별화해서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기인합니다(마 6:33). 그렇습니다. 성도는 세상 가운데 침노해 들어 온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소속돼 하나님의 백성 된 특별한 신분으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적 신앙이란 다른 무엇에 앞서 이런 구체적인 구속사적 내용이 우리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생명으로 믿고 확신하는 데서부터 비로소 정상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물론 이들 나라는 서로 다른 독립된 별개의 두 나라는 아닙니다. 한 나라의 두 국면(局面), 다시 말해 현재적 측면과 종말론적 측면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두 나라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으며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통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 나라의 이중 구조적인 성격을 아주 작은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해 설명합니다.
"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라."(마 13:31∼32)
본 비유는 하나님 나라로써 천국의 모습이 이중 구조적으로 구성돼 있음을 보여줍니다. 천국의 두 측면인 현재성과 미래성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국면은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불가분의 관계성을 띠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자들만이 결국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 참여할 수 있음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천국은 죽어서 영혼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여기'서부터 살아서 전인적으로 그 나라를 맛보아 체험해 가는 현재적인 경험의 나라입니다(요 11:25∼26, 17:3).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경험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실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는 삶을 통해 이런 사실이 실제적으로 확인됩니다. 말씀을 생명과 신앙과 삶의 도리로 붙잡고 거기에 자신의 생애를 바쳐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는 능력 있게 발휘되며 경험됩니다. 성경이 우리 안에서 응해지고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성경을 응하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는 왕성하게 현시(顯示)되며 확장돼 갑니다. 마치 차량을 운행 시 도로교통법을 생명의 원리로 삼아 준수하는 데서 자신의 생명과 안전운행이 보장되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그 나라를 친히 경험하며 운반하는 자들로서 세상 가운데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 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일련의 사실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분명한 확신과 자태를 견지하며 그 나라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드는 자들로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시는지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며 이 시대의 하나님의 남은 자로 존재합니다. 성경적 참된 신앙의 본질과 자태가 이렇습니다. 따라서 제반 기독교적 신앙활동은 한결 같이 이상의 사실의 터 위에서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구현을 목적으로 전개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사실 속에 담긴 의미가 이렇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의 심성 속에 내재된 타락한 종교심을 만족시키는 단순한 기독교적 종교활동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과는 관계도 분깃도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6. 본문이 제시하는 신학적 명제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통해 다니엘의 꿈 해석 속에 담긴 몇몇 신학적 명제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현장에서 생명의 도리와 신앙의 근거가 될 뿐 아니라, 삶의 이치이며 존재의 의미가 되는 신앙의 전제들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⑴ 세상역사는 목표 지향적입니다.
이 말은 역사는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확실한 최종적 목표를 향해 역사는 오늘도 쉼 없이 자신의 수레바퀴를 진행시켜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막연한 것이 아닌 확실하고 분명한 종말을 향해서 호리만큼의 차질도 없이 정해진 룰을 좇아서 그렇게 운행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역사의 시작과 함께 활동했으며 역사의 마감과 함께 그 중보적 기능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는 순환도 반복도 아닙니다. 직선적이고 점진적입니다.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서 중단 없이 달려갑니다. 이 역사의 끝을 바라보는 영적 안목을 소유하는 일이 신앙을 승리로 이끄는 관건이 됩니다.
"내 눈을 여셔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⑵ 세상역사의 성격은 점진적입니다.
세상역사가 목표 지향적이다라는 사실은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의(含意)합니다. 마치 백 층 건물의 계단을 하나 하나 밟아 올라가는 것을 통해 마침내 최상층에 도달하듯 말입니다. 그러기에 지난해와 올해가 겉으로는 1년 365일로 다를 바가 없고, 사시사철이 맴돌며 순환하는 것 같이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의 크신 경륜 속에서는 결코 같은 한해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의 운반자인 시간의 흐름은 마치 물의 흐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제의 그 강가에 나가보면 여전히 거기에 물이 흐르고 있지만 오늘의 물이 어제 보았던 그 물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시간을 벗삼아 하루 하루를 연결시켜서 머나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 최종적 목표를 향해 점진적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점진적이란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이 암시적인데서 명시적인 것으로, 모형에서 실체로, 역사의 진행을 따라서 점차 구체화되며 사실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례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과 성막과 율법의 제반 제사와 의식과 절기들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화(갈 4:4; 요 2:19∼21; 골 2:16∼17; 히 9:11, 10:1)됩니다. 나아가 구약의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신약의 성도들, 곧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통해 참 이스라엘과 참 아브라함의 후손들로 사실화(갈 3:7, 29, 6:16; 롬 9:6∼8; 엡 2:12∼19)됩니다.
⑶ 세상역사의 최종적 목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점진적 계시역사진행의 결국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꿈 해석을 보면 세상역사의 종말에 뜨인 돌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것을 묵시적 예언을 통해 계시하고 있습니다. 인간통치를 대신해서 신적 기원에 의해 출현할 신정통치의 하나님 나라의 출현입니다. 성경계시의 총체적 주제는 바로 이 하나님 나라에 모아집니다. 이 나라는 그 기원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기초되었기에 그 국권이 영원하고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세상나라와는 본질에서 다른 탁월한 능력과 가치와 성격을 지닌 특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장 1∼4절에는 이 나라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에덴에서의 처음 창조의 원리가 막힘 없이 시행되는 곳입니다. 회복된 에덴입니다. 회복된 가나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동일한 천상적 본향입니다. 죄와 사망이 역사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성도가 성령 안에서 실질로 연합돼 임마누엘화 하는 곳입니다(계 21:3). 때문에 이는 성경계시역사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약속된 신적 언약(하나님-백성의 관계)의 최종적 성취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곧 성령의 내주 하심의 역사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누리고 경험하는 천상적 삶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는 언약의 본질이 최종적으로 실제화 되는 곳입니다. 땅의 모든 수고와 슬픔과 애통과 아픔이 다시 있지 않은 곳입니다. 불완전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간 곳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실질을 '여기'서부터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누리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그 분의 대속적 죽음 안에서 도말(塗抹) 해 주신 것입니다. 구원의 보증의 영이신 성령의 인 침과 내주 하심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우리 안에서 선취(先取)적으로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성도들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기쁨의 감격을 여기서부터 미리 맛보아 체험합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마음껏 누리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빌 1:6, 2:13). 그렇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여기서부터 선취적으로 받아 누리는 실제적 경험입니다. 신앙과 삶이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⑷ 세상역사의 본질은 구속사입니다.
세상역사는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세 전 영원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창조되었으며, 그리고 그 목적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절대 주권에 의해 섭리적으로 간섭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역사는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돼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 11:36). 세상역사의 본질이 구속사란 의미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구속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최종적으로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세상역사의 본질이 구속사란 말의 의미는 이런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구속사의 성취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일어나 인간 통치 역사와 대체(代替)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미 인류 초기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창 3:15; 4:1; 눅 2:1∼7; 미 5:2)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세상역사는 구속사 진행의 현장과 무대로 선용되고 있을 뿐이라는 지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지막 완성의 때가 차면 자연스럽게 인간의 통치역사는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실체를 드러내는 가운데 창세 전 삼위의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영원하신 목적이 비로소 원형(prototype)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본래의 천상적 질서가 완벽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재창조의 궁극적 실현 말입니다.
⑸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세상역사와 구속사를 통 털어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역사란 구속사일 뿐이기에 말입니다. 다니엘서 기자는 왕의 꿈을 다니엘을 통해 해석하면서 다니엘 2장 45절에서 이렇게 마칩니다.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그 이유를 저자는 29절에서 하나님께서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셨다"는 내용을 통해 사전에 알리고 있습니다. 이는 왕이 꾼 꿈의 내용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역사를 마음의 원대로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입안되고 섭리적으로 시행되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만사의 주권자(主權者)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입안자(立案者)이시며, 창조자(創造者)이시고, 섭리적으로 역사를 통치하시는 주관자(主管者)이심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과 원리에 의해 하나님의 구속사는 세상역사를 도구 삼아 한치의 오차도 허락함이 없이 창세 전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대로 최종적 목표인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향해 오늘도 당신의 친 백성들을 통해 남은 구속사를 집행해 가십니다.
Ⅲ. 결론 꿈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顯現)과 선지자들을 통한 신탁(神託)과 함께 구약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세상 가운데 계시하시는 요소 중 한 방식입니다. 다니엘서 기자는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계시로 주신 꿈을 해명함으로 세상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을 묵시적 방법을 통해 기록합니다.
저자는 지금 꿈의 내용을 해석하므로 독자들의 시선과 관심을 하나님의 구속사에 집중시킬 것을 의도적으로 시사합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며 모든 역사의 진행이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진행되고 있음을 피력하면서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을 통해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에 접촉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例證)으로 저자는 인간통치를 상징하는 신상의 운명적 한계와, 뜨인 돌로 표상(表象) 된 신정통치의 영원한 우월성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가운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독자들의 신앙적 관심을 유도합니다. 이는 역사를 당신의 신정적 정권(政權)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들의 생애를 섭리적으로 주관하셔서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확약인 동시에 구원의 절대안전에 대한 보장을 시사합니다. 계속해서 저자는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하나님을 향해 보인 초지일관한 신앙자세를 통해 풀무불의 형벌로부터 안연히 보호받는 다니엘서 3장 사건을 이런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당신의 남은 구속사를 세상역사 속에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집행해 가십니다. 성도들은 바로 이 구속사 진행의 한 시점(時點)에 접촉돼 하나님의 남은 구속사를 세상역사 속에서 운반하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이 시대의 남은 자들임을 자각해야 할 줄 압니다(롬 11:4∼5). 베드로 사도는 이런 우리의 변화된 신분과 구속사적 사명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의 신분과 소속과 사명을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체계를 통해 바르게 해명하고 인식할 때 그로 인해 합당한 성경적 바른 신앙이 성립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지식을 좇는 신앙에 굳게 접촉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으로 즐거워하는 실제적 신앙으로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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