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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짐을 하나님께 맡겨라(시편 5:16-23)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 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편 5:16-23)
우리나라 남성의 사망률이 세계 제 1위라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신문, 방송을 통하여 아실 줄로 압니다. 잘살아보겠다고 무던히도 애를 써오던 40대 남성들의 사망률이 이렇게 높다고 하는 것은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굶어죽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직업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집이 없다든지 입을 것이 없다는 유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것은 특별한 문제입니다. 국제기아대책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일 년에 천삼백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하루에 삼만오천 명이, 일 분에 스물네 명씩 굶어죽는 꼴이 됩니다. 이렇듯 양식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의 수가 부지기수입니다마는 해결의 길은 있습니다. 양식을 주면 됩니다. 그러나 40대 남성들의 높은 사망률에 대해서는 어떤 해결책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서운 경쟁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피곤한 일들, 그 피곤해하는 모습들,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누적된 정신적 피로감을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예배 마치고 나갈 때에 저는 문밖에 서서 교인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많은 교인들이 함께 나가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와는 인사를 하지 못하나 그래도 몇 분하고는 인사도 하고 악수도 합니다. 그런데 인사하면서 보면 어떤 교인은 얼굴이 완전히 삭았습니다. 아주 피곤에 지쳐 있습니다. 간신히 걸어다녀요. 젊은 사람이 그렇게 약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잠깐 입을 열어도 입에서 썩은 내가 납니다. 그리고 손을 잡아보면 젊은 사람의 손이 싸늘하게 식어 있습니다. 이렇듯 피곤해하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죽어 가는 사람의 수는 통계조차도 없습니다. 참으로 귀한 젊은이들이 계속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명예를 지키고, 지위를 지키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더 얻기 위하여, 더 높아지기 위하여 죽을힘을 다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이 경쟁에 승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패자로 남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무서운 정보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알아야 삽니다. 그래서 배우고 또 배웁니다. 정보를 찾아다닙니다. 작은 컴퓨터에 많은 내용을 입력시키면 견디지 못하고 본체가 파괴되는 것처럼 작은 머리 속에 너무 많은 정보를 입력시키다보니 이제는 지쳐서 급기야는 터지고 쓰러지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 많은 정보 속에서 확실한 것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더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변화를 원합니다. 개혁을 원합니다. 때로는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보장이 없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변할는지 나쁜 방향으로 변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변화로 인하여 좋아질 것인지 나빠질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불확실성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를 해야겠다는 강박관념과 함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몸도 정신도 영도 그대로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강한 스트레스로 우리는 중압감에 빠지게 됩니다. 억압의 노예가 됩니다. 의식의 차원을 넘어 무의식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심해지면 성격장애(personality disorders)가 생깁니다. 흔히 말하는 우울증이니 자폐증이니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병이라는 말과 장애라는 말은 다릅니다. 병은 지금도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나을 수도 있고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라고 하는 것은 정지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눈병과 장님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비록 지금은 눈병을 않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나을 수 있습니다. 물론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님은 병이 멎은 상태입니다. 이제는 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애입니다.
성격장애가 문제입니다. 어디까지가 본래의 자기 모습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멀쩡한 사람인데 병신입니다. 정신적으로 병신인 것입니다. 이것을 장애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살도 하고, 극단적인 자기도피에도 빠지게 됩니다. 우울증에 빠져서 초조해하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하고, 스스로 깊은 절망상태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도 합니다. 마약을 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해로운 줄 알면서 담배도 피워봅니다. 일시적으로 현실을 망각하기 위하여 발광을 하고, 사치를 해보고, 서슴없이 욕도 해봅니다. 이 모든 발광이 알고 보면 스트레스의 결과인 것입니다.
때로는 이 스트레스로 인하여 공격적 행동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과 사회에 대하여 공격적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목적 없는 반항이요 이유 없는 폭력입니다. 완전히 병적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더이상 강건너 불구경일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스트레스의 유형을 심리학적으로 몇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불안--threat입니다. 위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의식입니다. 대상이 없는 걱정입니다.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왜 걱정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유를 모르는 근심입니다. 대상이 있는 근심을 공포라 하고, 대상이 없는 근심을 불안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좌절--frustration입니다. 이것은 목적지향적인 행동에 대한 실제적인 방해에서 비롯합니다. 결과에 대한 불만과 동기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모든 것을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또하나의 스트레스입니다. 모든 사물은 언제나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양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나쁜 면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기우(杞憂)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중국 고사에 있는 기인우천(杞人憂天)의 약자입니다. 기나라 사람 하나가 나무 밑에 앉아서 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자네,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나?"하고 물어보았더니 그 대답이 걸작입니다. "저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입니다." 고래로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하늘이 무너지다니요. 이것이 바로 쓸데없는 걱정, 곧 기우입니다. 요즘도 보면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꼭 실패할 방향으로, 안될 방향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괴롭히고, 모처럼 누린 남의 행복에도 시쳇말로 초 치고 맙니다.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아주 겁이 납니다. 나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병입니다. 그래서 자기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좌절시키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갈등--conflict입니다. 두 개의 상반된 목표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할 때에 우리는 갈등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선택의 능력이란 아주 제한적인 것입니다. 늘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미련하게 선택하려는 사람입니다. 결정적 현실에 대한 확실한 인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여기 이미 결혼한 사람이 있습니다. 결혼식도 끝났고 신혼여행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할 것 다해놓고는 "아차, 결혼 잘못했구나. 안했어야 하는 건데"라고 후회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점은 제쳐놓고 상대의 나쁜 점만 생각하면서 마치 이혼하고 다시 결혼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자신의 운명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하건 부하건 현실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런데 늘 모든 것을 다시 선택하려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선택을 뒤집어놓고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끝이 없습니다. 이것이 갈등이며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것이 큰 병입니다. 선택한 것에 대한 갈등 때문에 고민에 빠집니다. 여기서 인지부조화의 현상이 비롯됩니다. 무거운 짐입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마음이 눌리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억압을 받고,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농촌에서 소달구지 모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소달구지에 소 멍에 매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먼저 소달구지를 갖다놓고나서 소를 끌고와 달구지에 매려고 할 때에 보십시오. 소가 약아서 빈 달구지일 때는 잘 매입니다. 스스로 다가와서 매입니다. 그러나 달구지에 짐을 가득 실어놓고 소를 매려고 하면 무거운 줄을 미리 알고는 매이려 하지 않습니다. 얻어맞으면서도 안매이려고 합니다. 마침내는 두 사람이나 달라붙어 소를 꼭 붙들고는 간신히 멍에를 씌웁니다. 멍에를 씌우자마자 주인은 부리나케 목줄을 맵니다. 목줄을 고리에 딱 매어놓으면 소는 꼼짝을 못하게 됩니다. 이제는 멍에를 벗을 수가 없습니다. 죽는다 해도 멍에를 메고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는 "이랴"하면 앞으로 갑니다. 그 무거운 달구지를 끌고갑니다. 여러분, 인생도 그렇습니다. 이제는 벗을 길이 없습니다. 그대로 짐을 지고 죽어야 합니다. 문제는 얼마까지 끌고갈 수 있느냐뿐입니다. 어디서 죽느냐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자신이 진 무거운 짐과 고생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윗 왕은 책임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왕된 자로서 국방과 안보를 책임져야 하고 경제를 책임져야 하고, 심지어는 백성의 도덕성까지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기 하나에 의해서 나라가 잘되기도 하고 백성이 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저주를 받기도 합니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 앞에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책임까지 졌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쓴 시편이나 그 밖의 역사를 자세히 보면 다윗은 때때로 왕의 지위를 내놓고 도망가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무거운 짐을 지고 40년 동안이나 고생할 게 무엇입니까? 어쨌든 다윗은 왕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에게는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죄책감에 잡혀 있었습니다. 물론 의로운 일도 많았지만 불의한 일도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이 밧세바 사건으로,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선지자를 보내시어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댓가로 아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압살롬에게 배반을 당하는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아가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궁들을 공개적으로 욕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을 추방했습니다. 다윗 가까이 있던 신하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힘을 모아서 다윗에게 대항했습니다. 아직까지 다윗은 남은 병사를 모아서 얼마든지 아들 압살롬을 죽일 수도, 몰아낼 수도 있었습니다마는 이 역시 하나님 앞에 징계받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들에게 대항하지 아니하고 도망만 다녔습니다. 다윗이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도망을 다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삼하 15:30). 울면서 맨발로 도망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렇듯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고 다시 환궁할 때까지 광야를 헤매면서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나아가 다윗은 배반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밑에 있던 충신들이 하나둘 압살롬 편에 붙어버립니다. 배반당하는 아픔이 그렇게 쓰릴 수가 없습니다. 충신 중의 충신인 아히도벨마저도 압살롬에게 붙어서 다윗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닙니다. 이런 극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다윗이 병들어 고생하고 있을 때에 충신 하나가 병문안을 왔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이런저런 걱정을 해주고는 돌아갔습니다 그 신하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던 중에 소문이 들려옵니다. 그 소문에 의하면 다윗에게 그 신하가 인사하러 왔던 것이 아니라 죽이러 왔었다는 것입니다. 그 신하가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하는 말이 "죽어가는데 뭐 손댈 것 있습니까? 기다리면 되겠습니다" 하더랍니다. 이런 말이 들려올 때에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이에 대하여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20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말씀합니다.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21절)"----이 얼마나 가슴아픈 이야기입니까? 과거 자신의 충신이었던 많은 사람들의 억압 속에서 다윗은 무진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해결의 길을 얻었기에 다시 소망을 찾습니다.
먼저 다윗은 기도합니다. "오직 하나님 전에 나아갈 때에만 그 결국을 알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만납니다 여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장수(長壽)의 비결 가운데 말을 적게 하고 적게 들을수록 오래 산다는 것이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아도 귀머거리, 벙어리가 오래 삽니다. 특별히 은둔자나 수도사 같은 분들은 경제적으로나 위생적으로 더 나은 속세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오래 삽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마는 북한에 계셨던 저희 어머님께서도 94세까지 생존하셨습니다. 만약 제가 남쪽에서 어머님을 모셨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못사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아주 단순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마음 하나만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보면 누구 할 것 없이 많이 돌아다니면서 구경 많이 하려고 하는데 그거 병입니다. 적게 듣고 적게 말하십시오. 대신 하나님과 이야기할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침묵하고 대신 하나님께로 마음의 문을 열 것입니다. 여기에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이제 다윗은 기도하면서 과거에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많은 전쟁과 사건 속에서 건져주시고, 그 많은 죄를 사해주시고, 그 많은 고통속에서 구속해주신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게 될 때에 비로소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처음 시작될 무렵에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미국인 선교사가 한국에 나와서 선교를 할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자동차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미국인 선교사는 선교를 보다 빨리, 많이 하기 위하여 지프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어느날엔가 지프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다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가는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가는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차를 세우고 여기에 타시라고 권합니다. 그 할머니, 몇 번 사양을 하다가 고맙다고 하고 올라탔습니다. 얼마쯤 운전하고 가다보니 그 할머니가 보따리를 그냥 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본 선교사가 "할머니, 무거우실텐데 그 짐 내려놓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내가 자동차에 탄 것만도 죄송스러운데 어떻게 보따리까지 올려태워유?"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벌써 몸은 자동차 위에 있습니다. 그러니 몸 위에 있는 것도 자동차 위에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벌써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근심걱정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고 홀로 웅크리고 있습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내 생명을 주께 맡겼듯이 내 근심도, 내 걱정도, 내 의도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아니, 이미 맡겨져 있습니다. 다윗은 이를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동안에 자기 존재와 본래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 과거의 삶은 '나'로서 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늘 "내가 원하는 바 선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한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새로운 비결을 깨닫습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생각합니다. '내 의로 내가 존재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사 당신의 필요에 의하여 들리어 쓰임 받았을 뿐'이라고. 과거나 현재나 미래,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스스로를 향하여 선포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바울은 '내 짐'이라 하지 않고 '네 짐'이라고 객관화하고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이것은 곧 기도를 말씀함입니다. 자기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요, 내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요,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 내 마음을 내가 지킬 수 없습니다.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평안할 수 있고,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짐을 하나님께 맡겨라(시편 5:16-23)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 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편 5:16-23)
우리나라 남성의 사망률이 세계 제 1위라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신문, 방송을 통하여 아실 줄로 압니다. 잘살아보겠다고 무던히도 애를 써오던 40대 남성들의 사망률이 이렇게 높다고 하는 것은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굶어죽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직업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집이 없다든지 입을 것이 없다는 유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것은 특별한 문제입니다. 국제기아대책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일 년에 천삼백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하루에 삼만오천 명이, 일 분에 스물네 명씩 굶어죽는 꼴이 됩니다. 이렇듯 양식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의 수가 부지기수입니다마는 해결의 길은 있습니다. 양식을 주면 됩니다. 그러나 40대 남성들의 높은 사망률에 대해서는 어떤 해결책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서운 경쟁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피곤한 일들, 그 피곤해하는 모습들,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누적된 정신적 피로감을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예배 마치고 나갈 때에 저는 문밖에 서서 교인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많은 교인들이 함께 나가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와는 인사를 하지 못하나 그래도 몇 분하고는 인사도 하고 악수도 합니다. 그런데 인사하면서 보면 어떤 교인은 얼굴이 완전히 삭았습니다. 아주 피곤에 지쳐 있습니다. 간신히 걸어다녀요. 젊은 사람이 그렇게 약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잠깐 입을 열어도 입에서 썩은 내가 납니다. 그리고 손을 잡아보면 젊은 사람의 손이 싸늘하게 식어 있습니다. 이렇듯 피곤해하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죽어 가는 사람의 수는 통계조차도 없습니다. 참으로 귀한 젊은이들이 계속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명예를 지키고, 지위를 지키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더 얻기 위하여, 더 높아지기 위하여 죽을힘을 다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이 경쟁에 승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패자로 남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무서운 정보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알아야 삽니다. 그래서 배우고 또 배웁니다. 정보를 찾아다닙니다. 작은 컴퓨터에 많은 내용을 입력시키면 견디지 못하고 본체가 파괴되는 것처럼 작은 머리 속에 너무 많은 정보를 입력시키다보니 이제는 지쳐서 급기야는 터지고 쓰러지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 많은 정보 속에서 확실한 것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더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변화를 원합니다. 개혁을 원합니다. 때로는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보장이 없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변할는지 나쁜 방향으로 변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변화로 인하여 좋아질 것인지 나빠질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불확실성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를 해야겠다는 강박관념과 함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몸도 정신도 영도 그대로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강한 스트레스로 우리는 중압감에 빠지게 됩니다. 억압의 노예가 됩니다. 의식의 차원을 넘어 무의식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심해지면 성격장애(personality disorders)가 생깁니다. 흔히 말하는 우울증이니 자폐증이니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병이라는 말과 장애라는 말은 다릅니다. 병은 지금도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나을 수도 있고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라고 하는 것은 정지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눈병과 장님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비록 지금은 눈병을 않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나을 수 있습니다. 물론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님은 병이 멎은 상태입니다. 이제는 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애입니다.
성격장애가 문제입니다. 어디까지가 본래의 자기 모습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멀쩡한 사람인데 병신입니다. 정신적으로 병신인 것입니다. 이것을 장애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살도 하고, 극단적인 자기도피에도 빠지게 됩니다. 우울증에 빠져서 초조해하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하고, 스스로 깊은 절망상태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도 합니다. 마약을 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해로운 줄 알면서 담배도 피워봅니다. 일시적으로 현실을 망각하기 위하여 발광을 하고, 사치를 해보고, 서슴없이 욕도 해봅니다. 이 모든 발광이 알고 보면 스트레스의 결과인 것입니다.
때로는 이 스트레스로 인하여 공격적 행동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과 사회에 대하여 공격적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목적 없는 반항이요 이유 없는 폭력입니다. 완전히 병적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더이상 강건너 불구경일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스트레스의 유형을 심리학적으로 몇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불안--threat입니다. 위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의식입니다. 대상이 없는 걱정입니다.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왜 걱정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유를 모르는 근심입니다. 대상이 있는 근심을 공포라 하고, 대상이 없는 근심을 불안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좌절--frustration입니다. 이것은 목적지향적인 행동에 대한 실제적인 방해에서 비롯합니다. 결과에 대한 불만과 동기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모든 것을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또하나의 스트레스입니다. 모든 사물은 언제나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양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나쁜 면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기우(杞憂)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중국 고사에 있는 기인우천(杞人憂天)의 약자입니다. 기나라 사람 하나가 나무 밑에 앉아서 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자네,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나?"하고 물어보았더니 그 대답이 걸작입니다. "저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입니다." 고래로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하늘이 무너지다니요. 이것이 바로 쓸데없는 걱정, 곧 기우입니다. 요즘도 보면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꼭 실패할 방향으로, 안될 방향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괴롭히고, 모처럼 누린 남의 행복에도 시쳇말로 초 치고 맙니다.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아주 겁이 납니다. 나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병입니다. 그래서 자기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좌절시키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갈등--conflict입니다. 두 개의 상반된 목표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할 때에 우리는 갈등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선택의 능력이란 아주 제한적인 것입니다. 늘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미련하게 선택하려는 사람입니다. 결정적 현실에 대한 확실한 인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여기 이미 결혼한 사람이 있습니다. 결혼식도 끝났고 신혼여행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할 것 다해놓고는 "아차, 결혼 잘못했구나. 안했어야 하는 건데"라고 후회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점은 제쳐놓고 상대의 나쁜 점만 생각하면서 마치 이혼하고 다시 결혼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자신의 운명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하건 부하건 현실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런데 늘 모든 것을 다시 선택하려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선택을 뒤집어놓고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끝이 없습니다. 이것이 갈등이며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것이 큰 병입니다. 선택한 것에 대한 갈등 때문에 고민에 빠집니다. 여기서 인지부조화의 현상이 비롯됩니다. 무거운 짐입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마음이 눌리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억압을 받고,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농촌에서 소달구지 모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소달구지에 소 멍에 매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먼저 소달구지를 갖다놓고나서 소를 끌고와 달구지에 매려고 할 때에 보십시오. 소가 약아서 빈 달구지일 때는 잘 매입니다. 스스로 다가와서 매입니다. 그러나 달구지에 짐을 가득 실어놓고 소를 매려고 하면 무거운 줄을 미리 알고는 매이려 하지 않습니다. 얻어맞으면서도 안매이려고 합니다. 마침내는 두 사람이나 달라붙어 소를 꼭 붙들고는 간신히 멍에를 씌웁니다. 멍에를 씌우자마자 주인은 부리나케 목줄을 맵니다. 목줄을 고리에 딱 매어놓으면 소는 꼼짝을 못하게 됩니다. 이제는 멍에를 벗을 수가 없습니다. 죽는다 해도 멍에를 메고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는 "이랴"하면 앞으로 갑니다. 그 무거운 달구지를 끌고갑니다. 여러분, 인생도 그렇습니다. 이제는 벗을 길이 없습니다. 그대로 짐을 지고 죽어야 합니다. 문제는 얼마까지 끌고갈 수 있느냐뿐입니다. 어디서 죽느냐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자신이 진 무거운 짐과 고생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윗 왕은 책임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왕된 자로서 국방과 안보를 책임져야 하고 경제를 책임져야 하고, 심지어는 백성의 도덕성까지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기 하나에 의해서 나라가 잘되기도 하고 백성이 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저주를 받기도 합니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 앞에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책임까지 졌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쓴 시편이나 그 밖의 역사를 자세히 보면 다윗은 때때로 왕의 지위를 내놓고 도망가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무거운 짐을 지고 40년 동안이나 고생할 게 무엇입니까? 어쨌든 다윗은 왕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에게는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죄책감에 잡혀 있었습니다. 물론 의로운 일도 많았지만 불의한 일도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이 밧세바 사건으로,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선지자를 보내시어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댓가로 아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압살롬에게 배반을 당하는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아가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궁들을 공개적으로 욕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을 추방했습니다. 다윗 가까이 있던 신하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힘을 모아서 다윗에게 대항했습니다. 아직까지 다윗은 남은 병사를 모아서 얼마든지 아들 압살롬을 죽일 수도, 몰아낼 수도 있었습니다마는 이 역시 하나님 앞에 징계받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들에게 대항하지 아니하고 도망만 다녔습니다. 다윗이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도망을 다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삼하 15:30). 울면서 맨발로 도망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렇듯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고 다시 환궁할 때까지 광야를 헤매면서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나아가 다윗은 배반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밑에 있던 충신들이 하나둘 압살롬 편에 붙어버립니다. 배반당하는 아픔이 그렇게 쓰릴 수가 없습니다. 충신 중의 충신인 아히도벨마저도 압살롬에게 붙어서 다윗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닙니다. 이런 극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다윗이 병들어 고생하고 있을 때에 충신 하나가 병문안을 왔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이런저런 걱정을 해주고는 돌아갔습니다 그 신하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던 중에 소문이 들려옵니다. 그 소문에 의하면 다윗에게 그 신하가 인사하러 왔던 것이 아니라 죽이러 왔었다는 것입니다. 그 신하가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하는 말이 "죽어가는데 뭐 손댈 것 있습니까? 기다리면 되겠습니다" 하더랍니다. 이런 말이 들려올 때에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이에 대하여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20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말씀합니다.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21절)"----이 얼마나 가슴아픈 이야기입니까? 과거 자신의 충신이었던 많은 사람들의 억압 속에서 다윗은 무진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해결의 길을 얻었기에 다시 소망을 찾습니다.
먼저 다윗은 기도합니다. "오직 하나님 전에 나아갈 때에만 그 결국을 알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만납니다 여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장수(長壽)의 비결 가운데 말을 적게 하고 적게 들을수록 오래 산다는 것이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아도 귀머거리, 벙어리가 오래 삽니다. 특별히 은둔자나 수도사 같은 분들은 경제적으로나 위생적으로 더 나은 속세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오래 삽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마는 북한에 계셨던 저희 어머님께서도 94세까지 생존하셨습니다. 만약 제가 남쪽에서 어머님을 모셨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못사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아주 단순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마음 하나만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보면 누구 할 것 없이 많이 돌아다니면서 구경 많이 하려고 하는데 그거 병입니다. 적게 듣고 적게 말하십시오. 대신 하나님과 이야기할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침묵하고 대신 하나님께로 마음의 문을 열 것입니다. 여기에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이제 다윗은 기도하면서 과거에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많은 전쟁과 사건 속에서 건져주시고, 그 많은 죄를 사해주시고, 그 많은 고통속에서 구속해주신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게 될 때에 비로소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처음 시작될 무렵에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미국인 선교사가 한국에 나와서 선교를 할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자동차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미국인 선교사는 선교를 보다 빨리, 많이 하기 위하여 지프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어느날엔가 지프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다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가는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가는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차를 세우고 여기에 타시라고 권합니다. 그 할머니, 몇 번 사양을 하다가 고맙다고 하고 올라탔습니다. 얼마쯤 운전하고 가다보니 그 할머니가 보따리를 그냥 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본 선교사가 "할머니, 무거우실텐데 그 짐 내려놓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내가 자동차에 탄 것만도 죄송스러운데 어떻게 보따리까지 올려태워유?"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벌써 몸은 자동차 위에 있습니다. 그러니 몸 위에 있는 것도 자동차 위에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벌써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근심걱정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고 홀로 웅크리고 있습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내 생명을 주께 맡겼듯이 내 근심도, 내 걱정도, 내 의도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아니, 이미 맡겨져 있습니다. 다윗은 이를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동안에 자기 존재와 본래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 과거의 삶은 '나'로서 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늘 "내가 원하는 바 선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한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새로운 비결을 깨닫습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생각합니다. '내 의로 내가 존재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사 당신의 필요에 의하여 들리어 쓰임 받았을 뿐'이라고. 과거나 현재나 미래,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스스로를 향하여 선포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바울은 '내 짐'이라 하지 않고 '네 짐'이라고 객관화하고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이것은 곧 기도를 말씀함입니다. 자기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요, 내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요,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 내 마음을 내가 지킬 수 없습니다.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평안할 수 있고,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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