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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사도신경 강해2(요한복음 1:1-5)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by 【고동엽】 2021. 10. 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신고리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력을 창녕에 공급하기 위해서 경상남도 4개 군을 통과하는데, 밀양이 한복판에 있습니다. 52개의 송전탑이 건설돼야 한전에서 창녕 지역에 있는 곳에 싼값으로 전력을 공급한다는 명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밀양에서 워낙 반대를 해서 1년 4개월 정도 공사를 진척되지 못했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땅을 수용하는 expropriation 이라는 개념이 국가주의 시대 때, 개인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 시대에 접어든 때는 무수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청풍명월이라고 하는 제천에 가면 댐이 있는데, 그 댐은 4개 마을을 완전히 삼켜 수몰민을 만들었습니다. 충북단양의 그 수몰민들이 시흥에 와 있고 은평에 와 있습니다. 은평구 응암교회는 충복수몰민들의 정신적인 보금자리였고, 시화호, 안산에 갔던 많은 사람들도 사실 수몰민 지역입니다. 그때는 무시무시한 독재정권이었기 때문에 개인이 국가와 맞설 수 있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이고 국가가 개인의 땅을 마음대로 수용할 때 적절한 정신적 위자료와 재산권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밀양에 있는 자치단체 국회의원들, 중간단체장들이 전혀 밀양에 있는 특히 산평, 송전탑이 촘촘히 지나가는 산평리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한전은 밀양지역 사람들에게 가구당 450만원만 주고 무마하려고 합니다. 왜? 750W만 지나가기 때문에, 미미하기 때문에, 그리고 공시지가가 비싼 땅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거기 살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상실감이 큽니다. 송전탑이 지나가면 땅 전체가 송전탑 아래서 이루어지는 노동이 되기 때문에 고향을 사실상 반쯤 잃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을 3한전이나 국가기관들 지방자치단체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숭례문은 누가 불태웠습니까? 일산에 토지수용이 되었던 한 할아버지가 수용지가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분노해서 숭례문을 태워버립니다. 만일 밀양에 유력자의 자녀가 있었거나 산평리 밀양 마을들에 유명한 사람들이 나왔다면 그렇게 못합니다. 울진 양산 영광 모든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 선 곳을 보면, 개인의 땅을 수용한 곳을 보면 유력자가 전혀 나지 않은 불모지입니다. 문제제기 할 수 없는 곳에서 항상 이뤄집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세운 입지조건은 바닷가와 가까움, 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곳 + 영적 인격적 학문적 불모지입니다. 그런 곳이 울진 고리 양산 영광 등입니다. 토지공시지가만 가지고 보상하려고 하는 한전과 국가기관 또는 공공기관의 우매무지함, 그 동네 살았던 사람들의 고향을 잃은 슬픔, 영구적으로 폐기된 듯한 그 땅의 값어치, 이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은 무지막지한 수량경제학, 이것이 오늘날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피해자는 드러나는데 누가 가해자인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한전은 보상할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창녕 사람들이 돈을 내서 밀양 사람들을 도와줘야 합니까? 창녕 사람들은 원자력 아니더라도 그냥 전기가 있어야 합니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누구를 향해서 분노를 터트려야 할 지 모르는 분산된 쟁점들이 너무 많습니다. 강정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먼저 밀양 지방자치단체나 밀양 국회의원들 밀양시장, 이들이 1차적인 중재를 해야 할 집단입니다. 그다음 밀양지식인들 그다음 전국단위 시민단체들은 3자적인 참여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뉴스에 8명이 잡혀 갔다기에 종혁형제와 태철형제가 나오는 줄 알고 계속 쳐다봤는데 일단 안 나와서 안심했습니다. 수녀님들이 밀침을 당하면서 소리 지르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한전이 악은 아닙니다. 밀양이 선이고 한전이 악은 아닙니다. 어둠과 빛의 싸움이 아니고 선과 악의 싸움은 아닙니다. 효율성과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고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싸움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청난 위자료를 물어줘야 합니다. 한꺼번에 돈을 주지 않는다면 그 밀양 사람들에 대해서 장기적으로 고향을 상실한, 좀 과장해서 말하면 영구폐기 된 듯한 땅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위자료가 보상돼야 간신히 토지수용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토지수용의 역사가 국가주의 시대 때 엄청나게 많이 일어난 것을 이해하고 있고, 장항제련소, 이따이 이따이 병이 걸렸던 온산 원양 울산 지역 전부 수용됐습니다. 국가주의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봐야 합니다. 우리가 국가의 보호를 받는 국민이 된 이상 국가가 공적목적을 위해서 토지를 수용하는데 저항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만족해야 합니까? 상당한 정의감이 충족되는 방향으로 절충하는데 만족해야 합니다. 막아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발전소를 지어 창녕에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면 창녕 사람들의 전기가 끊어지고 을과 을의 피해가 일어납니다. 아마 그렇게 논리를 호도해갈 겁니다. 우리 시대에 일어난 이런 복잡하고도 우리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쟁점들이 우리 형제자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 대해서 무기력하게 방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action 해야 하고 response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이번에 애를 많이 썼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효율성과 중앙집권적 국가통치체제에 맞서는 밀양 사람들, 이런 밀양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간 사람들을 위로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에너지도 중앙집권적 체제로 가지 않았나? 그래서 에너지도 지방자치시대로 가야 합니다. 에너지 지방자치시대는 풍력발전소, 태양열발전소, 태양열 발전은 3500만 원 정도 듭니다. 국가 많이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KW에 700원씩 한전에서 사줍니다. 풍력발전소는 설치비가 너무 비싸고 설치하자마자 고장 나면 독일에서 기술자가 와야 합니다. 풍력발전으로 자연경관을 해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송전탑만큼이나 흉물스러운 것이 진부령 대관령에 있는 풍력발전입니다. 결국 에너지주권시대, 에너지를 적게 쓰려면 대규모 중앙집권적 power station이 필요 없으려면 간디가 말했던 마을단위의 에너지수급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볼 때 물레방아 풍력 태양열은 마을단위는 전기는 공급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헤르만하우스는 3분의 1정도가 태양열입니다. 태양열은 하고 나면 남습니다. 그런데 한 번 설치할 때 굉장히 비싼데 여러분 혹시 자택을 살 수 있는 사람이면 사서 태양열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자택을 살 돈이 없기 때문에 사자마자 태양열을 할 겁니다. 3천 5백만원이 들지만 1년 내내 전기가 남아돕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나라는 중앙집권적인 폭압적인 강압적인 행정기구 안에서 우리의 행복권이 좌우되는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케 된 개인들이 외부세력에 의해서 행복의 총량이 가감되지 않는 자유로운 세상입니다. 그 말은 성령 충만한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대한 폭압적 행정국가가 필요 없는 고도의 자치, 고도의 자율사회가 하나님나라입니다. 각자의 메시아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에너지 지방자치시대를 생각하면서 밀양사태를 평가해야 합니다. 저는 다만 밀양에 있는 산평리 주민들, 52개의 송전탑이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큰 보상, 정신적 위자료와 공시지가에 대한 보상, 그보다 훨씬 크게 지불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는 본문을 가지고 사도신경 2주 강의를 하겠습니다. 독생자, 오늘 불렀던 찬송은 외아들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건 아닙니다. 외아들은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그 개념보다는 훨씬 정교합니다. 독특하게 형성된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독생자가 어떤 말과 대비되는가를 보아야 하는데,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림 받는 두 그룹이 있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천군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번역됩니다. 출애굽기 13장 2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림 받습니다. 전부 다 집체적인 의미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납득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리하는 존재입니다. 천사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지상에서 육신을 입은 천사들입니다. 하늘의 천군천사나 이스라엘 백성은 집단적인 의미로 하나님 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독자로서 하나님아들인데 독특한 의미, 집단적이지 않은 의미로 하나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외경에 의하면 천군천사 3분의 1이 배반을 합니다. 3분의 1이 사탄의 꾐 빠져서 반역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들도 이미 반역을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반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 뜻에 반역해보지 않은 아들로써의 의미로서도 독생자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독생자를 믿는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알려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건 타 종교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매우 안일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알려준 하나님은 기독교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 죄와 허물은 있지만 기독교 성경이 알려준 이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면 안 됩니다. 기독교도 타락했고 다른 종교도 타락했고 똑같이 죄와 허물로 얼룩져도 예수 그리스도가 알려준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다. 나머지 모든 종교가 말한 하나님은 얼룩진, 계시가 불완전한 하나님입니다. 온전한 예수님이 알려준 하나님, 독생하신 하나님이 알려준 하나님만이 싱크로율 100%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100% 동일체이기 때문에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 뜻과 완벽하게 공감하고 일치하고 서로 교감하면서 하나님 뜻을 수행하는 아들입니다. 독생자, 완전 일치했습니다. 만유인력법칙이 r²이 분모이고, 거리의 제곱의 반비례합니다. M * m이죠. r²이 0가 되면 값이 뭐가 되죠? 분모가 0이 되면 힘이 무한대가 되잖아요. 모든 수를 0으로 나누면 힘은 무한대가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거리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품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결속력은 무한대란 뜻입니다. 무한대에 결속감을 가졌던 친밀감을 가졌던 인격적 교감을 가졌던 그 아들이 이 세상에 파송됐습니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다시 말해서 죄 짓고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방황하던, 궤도를 이탈했던 행성과 유성처럼 우주에 무질서하게 다녔던 별들을 독생자 예수님이 우주의 중심에 다시 소환하여 자신께 결속시켜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낸 겁니다. 독생자의 접촉, 독생자가 붙든 별들, 그 영혼들은 하나님을 따라 중심으로 도는 항성의 궤도로 다시 재진입합니다. 그래서 독생자는 출생과 신분에서 독특한 아들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한 번도 반역하지 않고 극한 순종 100% 순종의 극한성을 대표했기 때문에 또 독생자입니다. 여기 일반원리가 도출됩니다. 하나님께 100% 순종한 사람들이 세상에 나와서 제대로 살면 독생자 주변에 궤도를 이탈했던 항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독생성자급 사람들은 그가 사는 세상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내는 길이요 진리이고 생명이 되는 인생을 시범보인다는 뜻입니다. 이게 일반원리입니다. 우리가 독생성자가 아니라도 독생성자급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 주변에 숱한 우주의 파편처럼 떠돌던 영혼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주님을 발견한 것과 방불한 발견을 한다는 뜻입니다. 너무 중요한 일반원리입니다. 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할 때는 나는 독생성자급 인간이 하나님께 죄인들의 영혼을 소환시켜서 되돌릴 수 있음을 믿습니다, 라는 것과 원리가 같은 겁니다. 나사렛 예수 그 분이 독생자였던 것을 믿는 역사적인 회고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일반 원리가 치환할 수 있는 진리가 이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또 독생자인 이유는 예수님은 출생과 신분에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아들로서 독생자입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 무한대의 결속감을 가진 아들입니다. 두 번째 우리 주님은 한 번도 범죄하지 않고 극한 순종을 드려서 죄 많은 이 세상에 오셔서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의 인생을 되돌린 십자가의 극한순종을 드린 독생자입니다. 순종의 극한성을 통해서 독생자임을 드러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순종의 극한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지금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대리통치자, 지금도 세상을 아버지 하나님 뜻대로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아들로서의 독생자입니다. 하나님의 현재적인 대리통치자로서의 독생자입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를 믿습니다, 하는 것은 세 가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독생자를 믿으면 이런 독생성자 같은 사람이 주형됩니다. 창조됩니다. 이런 독생자를 고백할수록 독생성자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게 돼 있습니다. 왜? 믿음은 모방과 동화와 추종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가 독생자임을 믿는 순간 나한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게 참 중요합니다. 제가 제 경험을 분석해봅니다. 제가 독생자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은 79년 11월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독생자에 대해서 알기 시작하고 6, 7개월 동안 intensive한 공부가 있었습니다. 아주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 정말로 정말로 공부했습니다. 그때는 내 영혼 목이 말랐기 때문에 이분이 그리스도인가 아닌가를 몹시 초조해 하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강렬한 intensive에 사로잡혀 7개월 동안 공부한다면 신앙인이 되거나 불신앙인이 되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됩니다. 제가 그 공부를 어떻게 했느냐? 관악산 기숙사 가동에서 걸어서 142번 버스를 타고 신촌 대현동에 오는 그 먼 거리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목이 말랐느냐면 그 공부하러 간 거리가 지루하지 않고 돌아오는 거리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까 불렀던 찬송가 438장으로 바뀌었는데 옛날에는 찬송가 495장이었습니다. 제가 그 찬송가 참 많이 불렀거든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제가 79년에 이 찬송가를 엄청 많이 불렀던 이유는 처음으로 내 안에 오랫동안 주인노릇 하던 부정적인 원기, 그걸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을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는, 김회권의 인생에 똬리를 틀고 있던 근원적인 지배력이 예수를 믿는 순간, 내가 고백하고 무릎 꿇고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실제로 없어졌습니다. 제가 이 경험을 뚜렷이 한 이유는, 그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세상에 대해서 포괄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늘 웃고 다닌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매우 냉정한, 매우 경쟁심이 심한, 쉽게 말해서 공부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심한 공부를 해서 뭔가를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이 세계에 대해서 메시아적 사명감을 갖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돌볼 여유도 갖지 않았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별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내 안에서 지금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아담 이후 인류 안에 있는 원죄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438장을 너무 많이 불렀고,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보혈찬송 속죄찬송 죄 사함 찬송을 정말 많이 불렀습니다. 왜? 그때 그 찬송 빼고는 나의 경험을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년 내내 그런 경험이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후 하나님께서는 나를 1년 정도 격앙상태에 두신 것 같습니다. 1년 동안 격앙 상태에 있었는데 계엄군이 밀려오고 80년대가 되면서 그 상태에서 신학적으로 성경을 많이 읽는 학문적 모드로 빠졌습니다. 전두환이 탱크로 밀어 붙이면서 우리를 몹시도 괴롭혔기 때문에, 그 격앙상태가 전두환 군부세력이 가져온 검은 흑암에 나의 기쁨이 많이 훼손당했습니다. 그때는 '중한 죄짐 벗고 보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 찬송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금관의 예수>를 불렀습니다. 아아 어둠의 거리, <혀 짤린 하나님> 이런 찬송을 불렀습니다.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을 내가 보고 싶다, 공의로운 역사, 거리와 광장과 도시 한복판에서 우리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있음을, 정의가 살아있음을, 나를 사랑한 그 사랑이 이 도시도 사랑하고 이 대한민국도 사랑함을 알려달라고 소리치는 항거가 시작됐습니다. 제가 속죄를 경험하고 죄사함을 경험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속죄를 받지 못한 상태에 있고, 제 주변의 대부분도 속죄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저만 뜨거웠고 속죄의 능력을 느꼈습니다. 그 상태에서 오랫동안 대치가 계속된 겁니다. 그렇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내 속죄의 보혈의 감격으로 조금씩 바꿔가기 시작합니다. 저랑 지속적으로 접촉한 사람들은 전부 다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랑 지속적으로 접촉한 사람들이 저에게서 들려온 복음을 들으니까 점점 전도가 됐습니다. 점점 전도가 되니 사람들이 이제는 목사가 될 사람이다, 말씀의 종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공동체가 저에게 신학공부를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전도했던 사람, 성경을 가르쳤던 사람들에 의해서 신학교로 가라는 파송을 받았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복음의 사역자로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깨닫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나에게 일어난 일은 완전케 됨도 아닙니다. 그리고 세계가 갑자기 바뀐 게 아닙니다. 저에게 일어난 일은 아담원죄의 파괴력 지배력, 원천 지배력은 없어졌지만 아담 원죄 본성의 잔재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일생 동안 십자가를 지면서 싸워가야 할 몫은 아직도 내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1년 동안 격앙됐을 때는 내가 완전케 됐다고 느꼈습니다. 1년 동안에 하나님께서 구름 위에 사는 것처럼 만들어주셨을 때는 그걸 허니문 피리어드라고 말합니다. 그때는 내가 신선이나 된 것처럼 천사가 된 것처럼 완전케 된 것처럼 느꼈는데, 그 상태가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오니까 내가 아담 원죄의 가장 근원적인 힘은 분쇄했지만 내 존재 안에는 아직도 아담 인류의 죄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고, 경우에 따라서 내 안에 있는 작은 죄들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로마서 6, 7, 8장에서 매번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427장 부를 건데 또 191장으로 바뀌었네요. 제가 번호를 알아 놓으면 바꾸고, 가사를 다 알아놓으면 조사를 바꿔놓고, 누가 이런 농간을 부리는지, 대한성서공회입니다. 그래서 427장 '세상 모든 욕망 다 버리고 나의 모든 정욕은 십자가에 이미 못을 박았네 어둔 밤이 지나고 무거운 짐 벗으니 주의 영이 함께 하리라' 주의 성령의 동행을 성실하게 감당하지 못하면 엄청난 원죄적 죄성이 다시 몰려온 것을 경험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오래 사는 사람일수록 크게 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목회자 수도사들이 넘어지는 이유도 그겁니다. 일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유혹을 받습니다. 전병욱 목사 같은 사람들이 넘어지는 이유, 그 사람들이 기도하는 게 헛것이 아닙니다. 진짜 경건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일탈하면 원시 바다 같은 큰 구름이 와서 덮쳐버립니다. 그러면 실족하는 겁니다. 이런 거룩한 삶의 준위가 낮은 사람들은 덮치지도 않고 성령 충만도 없고 그냥 사탄편 비슷하게 그냥 갑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투항했다가 투항상태를 계속 심화시키지 못하면 어느 순간에 죄가 너무 거세게 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에 수도사들이 사순절 끝에 항상 창녀를 찾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주교라는 사람들이 수도하다가 마지막에 일탈하는 이유도 힘이 있습니다. 이건 찰스 스펄전도 느꼈던 겁니다. 찰스 스펄전도 로마서 7장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이것은 사도바울이 믿기 전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게 아닙니다, 지금 사도바울의 마음에 있는 투쟁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도 이런 투쟁이 있다고 말했거든요. <천로역정>의 존 번연도 말했습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홈 인 하기 전 마지막까지, 처음에 환락산이 있고 절망의 무덤이 있어요. 그런데 천국 들어가기 직전에 내 모든 경건의 일생들을 다 물거품으로 만드는 미끄러지는 길이 있거든요. 이 말은 무얼 가리키느냐?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서 완전케 되지 않습니다. 완전케 되는 그 일은 지상에 남아 있는 동안 살아가면서 성령의 도움 받으면서 채워가야 할 미래의 과업이지, 완전케 됐을 때 얼마나 기쁜가를 맛보게는 해줍니다. 완전케 되는 것은 긴 지상 시간의 순례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한 겁니다. 저는 빌립보서 3장 14-21절을 요즘 많이 깨닫습니다. 제가 옛날에는 저한테는 없는, 제가 20대 때는 느끼지 못한 싸움이 있습니다. 왜? 지금 저는 권력도 있고 돈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 권력을 남용하고 싶은, 남용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옛날에는 내가 권력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때는 절망하지 않는 것이 매우 좋은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단계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업이 다릅니다. 10대, 20대 때는 지금 이 세상의 부조리성에 짓눌리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주는 것만 해도 굉장한 겁니다. 그러나 50, 60대 때는 인생의 완성기에 들어가고, 굉장히 보유한 것이 많을 때는 절제하고 겸손하고 나누고 베풀고 엄청난 덕목이 개발되지 않을 때는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옛날에는 나에게 나눌 것이 없었기 때문에 누가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런데 굉장히 도와달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장애인 단체도 어떻게 알았는지 핸드폰 번호를 알아서, 한 번 인연이 맺어져 계속 도와줍니다.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까 설명하기가 매우 복잡하다고 합니다. 인천에 있는 비누 만드는 다울장애인협회라고 매번 전화를 합니다. 그런데 거절할 수 없는 애절함으로 합니다. 우리 나이에서는 자기의 권력을 비신화화시키고 해체할 만큼 과감한 급진적 결단을 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전부 다 무너질 수 있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출세하고 높아지는 것은 굉장한 경건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지금 가난한 실업자들, 매우 적은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적게 먹고 살아가는 것도 인생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누지 않으면 망한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독생자는 지금 현재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통치합니다. 그런데 독생자의 통치가 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가? 여기가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이래로 당신이 한 행위를 사람을 통해서 완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주님은 통치하지만 인간이 통치를 재현해주지 않으면 주님이 통치하지 않는 것처럼 되는 그 계약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지금 주님이 우편보좌에서 통치합니다만, 주님의 영에 공감하는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집단적으로 개별적으로 각 처에서 순종해주지 않으면 주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계약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주님은 분명히 교회를 돕고 계십니다. 저는 압니다. 제가 불순종하는 가운데 있을 지라도 저는 압니다. 주님은 저에게 숱한 감동을 주시고 제게 순종을 유발하시고 순종을 설득하십니다. 저는 대부분 순종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주시는 순종의 마음이 교회에 주시는 순종의 마음이고, 이것이 성도들의 순종의 마음인데 우리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주님의 감동을 받자마자 즉각적으로 순종한다면 주님이 우편보좌에서 통치하심을 사람들은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불용성처럼 순종하고 불균등으로 순종하고 비대칭적으로 순종합니다. 순종을 너무 많이 한 사람들은 순종하고 대부분은 순종하지 않고, 주님의 성령에 감동을 받지 못한 채 무덤덤하게 하루하루를 무감동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의 우편보좌 통치는 비실재하고 현실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입니다. 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는 마지막 고백은 이런 뜻입니다. 제가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지금도 성령을 보내셔서 감화감동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다음 각주가 붙어서, 그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은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당신의 통치를 드러내길 기뻐하는 독생자를 믿습니다, 이 고백이 진짜 마지막 고백입니다. 이 마지막 고백을 해야만 사도신경을 고백한 겁니다. 저는 이 마지막 고백, 우리 주님은 왜 우리를 매개하지 않고 직접 통치하지 않고 왜 성도를 매개해서만 통치하기를 원하시는가? 우리 주님이 우리를 너무나 존귀하게 대우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나라 하나님 나라 통치에 공동통치자로 초청하려는 원대한 목적 때문에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자로 불러내시기 위하여 우리의 매개된 순종, 자발적 순종, 공동체적 순종을 통해서만 주님이 이 세상을 돌보고 자애롭게 다스리심을 보여준다는 거죠. 이걸 믿는 것이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독생자를 믿습니다, 마지막 뜻입니다. 마지막 뜻 여기가 가장 방점이 찍혀야 합니다. 좀 어렵습니까? 저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려울지 몰라요. 저는 이걸 깨닫고 정말 감격합니다. 이걸 10년 전에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5년 전에도 깨닫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이 깨달음이 저한테는 깊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나날이 수첩을 적고 깨닫습니다. 제 마음은 항상 뜨겁습니다. 그런데 6-7년 전에 일산 두레교회에서 제가 가르칠 때 이렇게 깊게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이렇게 깨닫습니다. 마무리합니다. 나는 우리 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는 마지막 신조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성령 감화감동을 통하여 세상과 교회와 성도를 통치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는 사람들의 순종을 통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와 같은 죄인을 독생성자로 형질변화를 시키고 독생성자 같은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셔서 죄를 극복하고 죄를 흡수하고 죄의 피해자가 되고 죄의 모순에 짓이겨지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세상을 끌어안는 무한책임적인 참여를 통하여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라고 저는 믿는 거죠. 결국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독생성자급 성자로 형질 전환시켜서 파송함으로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믿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이 우리를 상시적으로 많이 감동시켜야만 우리는 독생자가 되고, 독생성자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거룩한 피로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키듯이 우리 집안 우리 회사에 독생성자급 인물이 나타나면 그 주변이 전부 다 영생의 통치권 내로 접수가 됩니다. 한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회사에 한 사람 집안에 한 사람 교회에 한 사람, 그 언저리 주변은 주님의 우편보좌의 통치를 받는 직할 영역, 즉 성령의 감화감동이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곳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가향교회가 가향교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성령의 상시 감화감동을 받는 공동체가 되는 것, 이게 하나님께서 가향교회를 통해서 통치권을 확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가향교회에서 배출된 인물들은 세상에 파송된 독생성자급 제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을 통치하기 원하시는 겁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 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이 우리에게 독생성자급 형질전환한 성도가 되어서 세상에 파송당하는 감격으로 초대하는 고백임을 믿습니다. 주님이여 우리 안에 아담 인류의 원죄를 부수시고 성령의 통치에 감동감화 받는 본성 그런 성향을 훨씬 많이 창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계명을 듣습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만날 때마다 사랑을 설렘을 얻습니다. 우리가 우주적 공교회에 속할 때마다 이 교회가 하나님 우편보좌 통치의 거점이 되어서 이 세계의 모든 문제를 흡수하고 분석하고 분해하여 하나님 통치를 관철시킬 거룩한 전임기관이 된 걸 믿습니다. 주님 지금 우리교회는 그 이상에 접근하지 못했지만 주님이여 성령께서 자애로운 우리를 통치해주시면 우리가 주님의 통치 대행기관이 될 줄 믿습니다.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우리 신앙고백은 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고 돼 있는데 오늘 부른 찬송에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돼 있죠? 외아들은 독생자라는 개념과 조금 다릅니다. 외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외’가 ‘아들’을 수식하잖아요. 그런데 독생자에서는 를 수식하지 않고 을 수식합니다. 독특하게 하나님 아들이 된 자, 독특할 독자는 생을 수식한다, 이렇게 설명했죠. 독생자라는 말은 요한복음 3장 16절과 1장 18절에 나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 품속에 있는 완벽한 영적연합과 인격적 결속 상태에 있는 아들이 독생자입니다. 한 번도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아들입니다. 독생자 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천군천사들에게 집단적으로 쓰인 말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창세기 6장에도 나오죠.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예정된 천사들, 하나님의 대리자들, 이런 뜻입니다. 두 번째로 출애굽기 13장 1-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내 맏아들 이라고 말합니다. 천사들을 가리켰을 때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켰을 때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집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관련해 이 단어가 사용됐을 때는 개인을 가리킵니다. 단독자, 특별한 개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독특하게 관계가 된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천사들과 이스라엘 백성은 둘 다 죄를 범했습니다. 완벽하게 하나님을 대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독생자는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진 적 없는, 진리 속에 있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다는 말이 시적인 표현이죠. 아버지 품속에 있는 아들이라는 말은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의가 상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들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막힘없는 교제가 있었습니다. 막힘없는 교제는 아버지 하나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감하고 아버지 하나님 뜻을 완벽하게 순종하고 대리하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걸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었으니 그 교제를 우리는 생명이라 말한다, 그 안에 하나님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부단한 교제가 있었으니 이 교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나누었던 교제 확인이 사람들의 무얼 비추느냐? 우리가 얼마나 일탈되었고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와 등지고 사는가를 순식간에 조명하는 빛이 됐다는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가는 방식을 볼 때 내가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순식간에 탐조할 수 있다는 거죠. 그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볼 때,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막힘없는 교제를 볼 때 내 인생이 얼마나 일탈되고 타락됐는가를 순식간에 깨달았으니까 그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사람들의 일탈 타락 죄악됨을 순식간에 비추는 빛이 되었다는 겁니다. 독생자란 말을 다시 정의하면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계시면서, 아버지 품속에 계시면서 한 번도 하나님과 의가 상한 적이 없는, 완벽한 순종과 대리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는 말 안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한 번도 의가 상하지 않은 독생자가 인류에게 가져온 선물, 구원을 믿습니다, 이걸 일반 원리로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가져온 엄청난 혜택들을 나는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가까운 분,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인류에게 가져온 빛, 그것은 집단적으로 인류가 얼마나 잘못됐는가를 순식간에 탐조하는 빛이 되니까 나는 하나님과 한 번도 의가 상한 적이 없는 독생자가 인류에게 가져온 구원을 나는 믿습니다, 이런 뜻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짓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과 한 번도 의가 상한 적이 없는 이 독생자는 모든 인류의 죄를 상쇄하고도 남는 순종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99.9, 독생자 뺀 모든 인류가 다 범죄하여 하나님께 엄청난 치명적 손상을 입혔습니다. 치명적 손해를 입혔어요. 하나님의 명예, 하나님의 맘을 분노로 이글거리게 만들었습니다. 만민이 하나님께 끼친 손해를 보상하고도 남는 순종을 독생자가 바쳤다는 것이죠. 7남 3녀 중에 2남 3녀가 일탈된 삶을 살더라도 한 의로운 삶을 사는 아들이 순종을 하면 나머지 형제들의 죄가 대속되는 효과가 있는 거죠. 그래서 노아의 아들 중 셈과 야벳과 함이 있었는데 야벳과 함은 죄악된 길로 갔지만 셈의 장막에 있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면서 셈 족속은 두 아들의 죄를 대속하는 순종의 도를 보였고 그 셈족속의 후손에서 아브라함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는 독생성자급 인류의 부단한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망하지 않고, 독생자 아닌 모든 인류가 분탕치고 죄악된 역사를 일으키고 온갖 나쁜 짓을 다해도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께 여전히 유지되는 이유는 독생자급 인류의 순종이 부단히 부단히 축적돼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원리는 역사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노예로 살 때 극소수만이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극소수만이 해방을 기다리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잖아요. 대부분 일본순사하고 일본 면서기하고 독립군 때려잡는 관동군 장교가 돼 살았잖아요. 극소수만이 역사의 의를 바로 세웠잖아요. 우리가 유신의 억압아래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자기 먹고 살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극소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23일 동안 단식투쟁을 했던 김영삼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김대중 대통령, 그 사람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민주주의를 외쳤거든요. 서슬 퍼런 독재시대 때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투쟁합니다. 그 의로운 자들, 상대적으로 의로운 자들의 순종과 희생이 역사가 영구적으로 도탄에 빠진 것을 막아줬거든요. 우리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를 일반적 원리로 치환하자면 상대적으로 의로운 자들의 희생의 역사가 인류역사를 지탱시키는 역사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잊지 않게 만드는 덕이 될 만한 것을 믿습니다, 이런 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죠. 희생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사람이 희생할 때만 파장이 큽니다. 아버지 품속에 없는 사람이 희생을 하면 그 희생의 의미는 모릅니다. 엄마 아빠와 사이가 매우 좋은 사람이 아프리카로 선교를 갈 때 집안이 눈물바다가 되지, 어차피 내 놓은 자식이 마사이족한테 가서 죽어라, 그럼 아무 걱정이 없어요. 아버지 품속에 있던 독생자가 세상에 내려왔을 때 엄청난 파장이 있는 것이고, 일탈된 모든 개인들이 독생자의 순종의 영향권 내로 들어와서 그 안에 있는 생명을 보면서 구원을 받는 것이거든요. 독생자라는 말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태초부터 계셨던 그 신분 때문에 독특한 아들입니다. 둘째 극한의 순종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바쳤기 때문에 독특한 아들, 즉 극한 순종을 바친 아들 독생자입니다. 첫째 품속에 있는 아들 독생자, 둘째 독특한 순종을 바쳐서 순종함으로 아들됨을 완성하신, 후천적 독생자의 권리를 획득한 것, 즉 선천적인 독생자의 신분을 후천적인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후천적인 순종을 통하여 독생자임을 입증하는 의모로 독생자입니다. 셋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여 지금도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통치하고 있는 대리자로서의 아들로 독생자입니다. 세 가지 다 고백하는 거죠. 주님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면 왜 주님의 통치혜택이 이렇게 나타나지 않을까? 제가 지난 강의시간에 그러지 않았습니까? 사도신경의 핵심은 주님이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 신앙고백이라고요. 둘째로 지금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통치하시는 그 통치의 결과를 일괄정산하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을 믿는 것이 사도신경에 포함된 고백이라고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편보좌에서의 통치와 재림을 믿는 신앙고백이라고 했죠. 신앙고백 한다는 말은 굉장히 급진적인 거죠.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세상을 통치하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할만한 effect 효과 impact, 이게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참 문제거든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을 아담인류에게 위임했습니다. 땅을 관리하고 통치하고 정복하고 이 땅을 다스리는 사명을 사람에게 위탁했기 때문에 이 원리를 폐기하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리 이 세상을 바로잡고 싶어도 사람에게 일단 위임된 책임의 관계성을 없는 것처럼 여기면서 직접 예수님께서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성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급하다고 갑자기 구름으로 나 예수다, 하고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반드시 성도를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내려오셔야 합니다. 즉 인간의 자발적 순종,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았던 개개인의 자발적 분할된 순종을 적분해 합하여 주님의 통치로 비로소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는 방법은 각처에 있는 개개인을 매순간 감동시켜야 할 의무가 있고, 감동시키면서 cumulative, 누적적인 순종을 합해서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을 입증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도 마음이 답답한 겁니다. 우리도 답답하지만, 왜 주님의 통치가 안 나타나느냐고 호소하지만 하나님 우편보좌에 안 계신 주님도 왜 나의 통치를 대리할만한, 내 통치에 공감하면서 성육신적 결단을 할 사람이 왜 이렇게 없는가가 항상 주님에게는 목마른 겁니다. 주님은 사람을 창조했을 때 자기가 원맨쇼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 근본 원리를 훼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은 안 다스리는 것처럼 이렇게 방치되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인다고 무신론이 기승을 부려도 그걸 교정을 못합니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십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에도 당신이 만드신 원칙을 폐기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순종을 끊임없이 찾고, 전심으로 당신께 기도하는 사람을 찾고, 전심으로 기도하는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세상을 통치하는 증거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주님의 독생자, 완벽한 순종을 하시는 대리자를 믿는다는 그 말에는 나의 완벽한 주님에 대한 순종을 당부한다는 말도 들어간다는 거예요. 이 고백은 주님에게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순종과 실천도 다그치는 고백도 되는 겁니다. 어쨌든 저에게도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한 번도 저는 주님의 하나님 우편보좌 착석과 통치가 의심되지 않습니다. 제가 성령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은 제가 성령의 감화감동을 무시로 부단히 받고 있는 한 주님의 하나님 우편보좌 통치를 불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통치의 파장이 너무나 빨리 확장되지 않는 것은 나의 불순종과 내가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성령의 통치 안에 초청하고 흡인시킬 수 있을 만큼 순도 높은 순종을 드리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하나님 나라 운동에 쓰임 받을 때 근원적 한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제가 예수님을 믿으면, I believe in 하면 제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그 교제 안에 participated in, 참여한 게 되거든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던 천인무궁한 사랑과 신뢰의 연합 상태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 내가 독생자를 믿는 즉 독생자급 순종에 참여한다는 말이거든요. 독생자급 희열에 내가 들어간다는 말이거든요. 이건 무슨 원리와 같느냐? 만유인력법칙 가운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 한다는 거 있죠. 분모는 r², 거리의 제곱, 분모는 n*M, 큰 질량과 작은 질량을 곱합니다. 거리가 0가 되면 분자가 무엇인가 상관없이 무한대가 돼버리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는 거리가 없습니다. 완전한 결속상태이기 때문에, 항상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는 서로 강력하게 이끄는 향도하는 힘과 위임하는 힘과 완벽한 결속이기 때문에 무한대의 힘으로 끌어당긴다는 겁니다. 무한대의 힘으로 끌어당기는 인격적 신뢰 속에서 독생자가 무한대의 인력을 배척하고 내팽개쳐졌습니다. 이 내팽개쳐진 예수를 보는 순간, 주님이 나를 위해서 저주 받았다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내 죄에 대한 심판을 보는 거거든요. 십자가를 처음 보는 순간,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내 맘의 큰 고통이 사라지는 이유는 이렇게 아버지 품속에 있던 독생자가 하나님 아버지와 누렸던 엄청난 생명력을 십자가의 극한 순종을 통하여 당신의 아들됨을 드러내시는 그 독생자를 볼 때 내 인생이 완전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되고 내가 주 앞에 휩쓸리더라고요. 저는 79년 11월 17일에 일어났다고 기억하는데요. 이런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제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높이 응시하는 가운데 495장 찬송을 많이 불렀습니다. 내 영혼에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지금은 438장입니다. 그 찬송을 너무 많이 불렀는데, 이 세상에 주님과 함께 가는 곳은 천국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죄악된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수에게 집행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 내 죄에 대한 미움을 보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과 결렬된 상태, 내팽개쳐진 예수의 심판 받은 육체와 영혼을 보는 순간 내 죄가 용서 받았다는 확신을 했습니다. 그때 바로 저에게 마귀적인 죄성이 빠져나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마귀가 빠져나갔습니다. 마귀적 죄악 충동, 그때 이후로 제가 새롭게 됐습니다. 그때 그 시기를 제 인생의 AD와 BC로 나눈다고 본 이유는 그때 이후의 제 인생은 그때 이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때 이후에도 제가 완벽해지진 않았습니다. 순간이동으로 천국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죄악의 인력권 내에서 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저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가 누렸던 무참한 냉정함 속에서 극한 순종을 보면서 내 인생의 일탈, 내 인생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누추하고 지저분한 인생인가를 순식간에 깨닫고 통곡을 했습니다. 11월에 너무 많은 통곡을 했습니다. 박득훈 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저는 뒤에 앉아서 통곡을 했는데 70명의 형제, 지금 이 만큼 된 형제들이 모여 제 등을 두드리면서 회권 형제 큰 죄인이 돌아왔다면서 덩실덩실 춤을 췄습니다. 제가 그때 이 정도 되는 작은 모임에서 저 뒤에 앉아 통곡하면서 울고 있으니까 형제들이 와서 큰 죄인이 돌아왔다면서 좋아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제가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주님을 영접한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응시할 때 내 영혼 내 죄가 예수님 때문에 심판받아서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들면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거거든요. 그게 바로 아담의 죄성을 해체하는 겁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말은 예수가 극한 순종, 독생자급 순종을 드리는 십자가에 달리는 그 심판의 자리에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 저주를 받아 죽는 그 죽음을 보면서 내가 주를 영접한 겁니다. 영접을 하고 나서 성령의 사람이 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여러분이 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겁니다. 예수를 믿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말씀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면서 전도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네가 더 이상 말을 하면 내가 예수를 믿을 것 같으니까 더 이상 나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아달라고 참 많은 친구들이 저에게 그만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교수들에게도 복음을 전했거든요. 백낙청 교수 황동규 교수가 저의 지도교수였습니다. 지금 황동규 교수는 아들에게 붙잡혀 완전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이분이 우리 숭실대 교수한테 최근에 김회권 때문에 혼났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황동규 교수에게 시집을 들고 가서, <삼남에 내리는 눈> <나는 바퀴를 보면서 굴리고 싶어진다> 이런 시집을 썼습니다. 주 예수를 믿지 않고 구원을 받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독교인 좀 제대로 예수 믿어라, 손봉호처럼 예수 믿으면 안 돼? 왜 그렇게 엉망이야? 남의 죄를 탓하지 말고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정진홍 교수에게 정병학 교수에게 가서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했더니 김군도 예수 오래 믿어보면 알 텐데 종교 다원주의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윤이영 교수 수업마다 다 그 만큼 열정적으로 종말이 올 줄 믿고 전도를 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그 열정을 가졌는데 우리가 주 예수의 복음을 믿으면 예수님의 우편보좌 통치를 확실하게 믿게 되고, 세계가 주님의 이름으로 복속되고 종합되고 수렴될 걸 믿게 되거든요. 이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것, 독생자 주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십자가에 달려 저주 받은 그 죽음이 사실상 하나님과의 분리가 아니라 더 극적인 연합 상태임을 보여준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죄 아담의 원죄가 심판 받아서 더 이상 아담 안에 죄성 원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성령이 자유롭게 지배하고 통치하는 감화감동의 영향권 내에 진입하는 경험을 한다는 말이에요. 그게 바로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를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 안에 한 가지 실천적 의미는 이런 겁니다.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그 모방과 추종을 통하여 나도 주 예수님의 독생자급 순종을 모방하여 형질 전환하여 세상에 파송당할 때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독생자급 순종의 힘으로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주님께 돌아가 내 안에 주님의 반사된 빛을 보고 예수 믿게 만드는 힘을 나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이 실천적 함의가 되는 거죠. 예수를 옳게 믿으면 반드시 나 때문에 덕 보는 사람이 나타나고 나를 중심으로 영적 대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감출 수가 없어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 영혼의 불이 커져 있으면 사람은 그 불빛을 보고 반드시 오게 되고 영적인 주제로 대화를 하게 됩니다. 회사에서 내가 아무리 기독교인인 것을 감추려고 하더라도 내 영혼에 켜진 등불 때문에 내 중심으로 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거룩한 광채가 빛나는 사람보고 술 먹으러 가자, 이런 초청이 불가능합니다. 보자마자 술맛이 사라집니다. 그 광채를 볼 때, 일단 거룩한 광채가 빛을 발하면 그런 이상한 어색한 분위기에 가지질 않고 오히려 자기 술자리를 깰까 싶어 나는 초청을 안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가 가야합니다. 가서 분위기를 흐려놔야 합니다. 노래방에 가서도 주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심지어 룸살롱 안에서도 예수와 룸살롱에 대해서 강해를 해야 하고, 이 세상에 모든 형제가 그리스도 예수의 광채를 가지고 공세적으로 대하면 이 공세적 친절과 이 공세적 자애와 공세적 사랑의 시도 앞에 사람들은 영의 눈을 뜨게 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으로 터치함을 당하면 그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아무리 겉으로 볼 때 죄인이고 인간성 말종이라도 그 말종 같은 인간성도 성령의 비췸을 당하면 바로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얼 깨달아야 하느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교제 앞에 가서 생명 교제를 누릴 뿐만 아니라 독생자이기 때문에 내가 오히려 하나님의 시퍼런 냉대와 거절을 당하면서까지 예수를 믿어야 하는 시련까지도 내게 올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믿는다는 말은 십자가에 내 몰리는 궁지까지 가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의 교제를 여전히 향유할 수 있는 그런 아들이 되는 것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모방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 살다 보면 그걸 믿으셔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과 나누는 생명력이 작동하면 반드시 그 생명의 빛을 보고 혜택을 볼 사람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 그럼 전도가 된다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빛을 감추려고 해도, 내가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태산같은 평화를 누리고 나면 반드시 믿게 됩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이 일화는 별로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사령관 사모님이 유제숙이라는 불교 사모님입니다. 항상 염주를 가지고 돌리는 분입니다. 제가 그집에 몸종으로 6개월 동안 당번병으로 근무했습니다. 정말 항상 청소하고 화장실 청소하고 칵테일 만들고 이런 걸 다했습니다. 사령관 집에서 6개월 동안 몸종이 되고 나면 유명한 모든 사람을 다 만나서 술을 부어줬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전두환 노태우 박태기 정호용 이런 사람들을 늘 만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체포돼서 종 짓을 하는데, 항상 기도하면서 주님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이 모든 일들을 기쁨으로 감쌀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제일 마지막에 제대를 하는데 한 달 앞두고 사령관 부인이 불러서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아저씨는 뭐가 그렇게 좋아서 항상 웃음이 가득 차요? 항상 충만한 기쁨이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저에게 묻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제일 마지막에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겁니다. 국세청에요. 제가 국세청에 취직했으면 여러분과 영원히 못 만났을 겁니다. 그때 14기 안무혁이라는 사람이 국세청장이었는데 사령관 동기였습니다. 전화 한 통화만 하면 국세청에 특채가 되는 겁니다. 정말 정직한 사람이 있으니까 이 사람을 뽑아가라고, 아마 지금쯤 집을 네댓개 가지고 있을 텐데 그다음 몇 년 있다가 감옥 가겠죠. 제가 국세청에 취직할 뻔한 사람입니다. 그 사모님이 너무 날 사랑했습니다. 불교도인데도 기독교인 안에 있는 기쁨의 광채를 눈치챘습니다. 여러분 실제로 여기서 깨닫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독생자와의 교제를 하면 감출 수 없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불을 감출 수 없어요. 반드시 내 안에 있는 광채를 덕볼 사람이 내 주변에 나타나서 전도적 인생을 살 수밖에 없고 사랑과 희생을 시범을 보일 수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독생자를 믿는 것, 독생자를 믿어서 독생자를 모방하여 형질전환하여 세상에 파송당하는 신앙고백을 할 때 나는 독생자를 믿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의 참된 완성이 일어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각 처에서 미분의 분활된 순종을 끊임 없이 모아드리지 않으면 이 세상을 주님이 통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렇게 당신의 통치를 우리에게 매개하고 위임했기 때문에 우리의 순종이야말로 주님의 세계통치, 우편보좌 통치를 진짜 믿게 만들어줄 핵심적인 요소라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쉬운 자리에서 요구하고 부탁하고 호소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일주일 동안 주님이 이 대한민국 우리 삶의 자리를 통치하고 계심을 확신시키는 분할된 순종의 대리자들 독생자급 성자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성령의 감화감동을 주셔서 부단히 우리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감미로운 순종 받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여전히 세계를 통치하고 교회를 인도하시건만 저희들 순종이 미흡하고 불연속적이라서 주님은 이 세계를 통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저희를 독생성자급 연합과 하나님과 영적 결속을 허락하셔서 저희를 파송해주셔서 세상 사람들이 저희들 안에 빛나는 생명의 빛을 덕보고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들이 감격하여 바쳤던 귀한 헌물을 하나님 당신의 백성들 위해서 거룩하게 낭비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밀양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애썼던 민초들의 삶을 붙들어주시고, 효율성의 이름으로 강압적인 행정기구의 이름으로 아우성을 가로막는 자들이 회개하여 그들의 마음에 진정한 위로가 있을 수 있도록, 정의감이 충족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직장의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에게 하루에 한 데나리온 벌 수 있는 일터를 주시고, 연기가 꺼져버린 가난한 가정에 연기가 다시 피어오를 수 있도록, 일 때문에 인간성 훼손되지 않도록 자애로운 일터를 많이 만들어주시길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특별히 우리에게 직장을 위해서 자발적 실업상태를 유지하면서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 있사오니 주님이여 문을 열어 주시길 원합니다. 직장이 불안정하여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암중모색하는 아들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 담대함을 주시고 주님의 성령 통치를 믿으면서 수련의 길을 감히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아버지 하나님 저희 교회에 처음 온 형제자매들을 축복해주시고 우주적 공교회에 속한 이 귀한 지체들이 순례하는 나그네처럼 예배드리는 처소마다 단을 쌓는 처소마다 주님의 나타나심이 있게 도와주시고, 아브라함이 세겜 모렛땅에서 헤브론에서 브엘세바에서 단을 옮길수록 하나님과의 심화된 만남이 있었던 것처럼 낯선 곳에서 예배드리는 아들딸들에게 하나님 만나는 감격이 끊이지 않고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들 모두 우주적 공교회에 속한 형제자매들로써 거룩한 낯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중하고 낯설지만 우애와 자애롭게 친교하게 도와주소서. 유학 간 아들딸 출장중인 아들딸 장기체류중인 주님의 아들딸 있습니다. 하나님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몸이 아파서 외롭고 쓸쓸한 병상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고, 시들어가는 육신의 고통 속에서 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반추하는 고독한 영혼도 있습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일일이 그들을 찾아가셔서 어루만져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가 성령의 감화감동 없이는 인생을 살기가 힘들고 고독합니다. 우리 어린 아이들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교우들도 성령의 어루만짐이 필요합니다. 주님 보혈이 묻은 손으로 저희들 영혼을 따뜻하게 덥혀 주소서. 싸늘함과 무관심과 적대감이 넘치는 세계에서 인간성을 보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마음 따뜻하게 해주심이 소율이와 어린 새싹들과 예배 드리는 모든 가향지체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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