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래 엎드린 여인
눅 10:38-42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
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
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본문은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3남매가 살아간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나사로의 집은 예루살렘 동쪽 3km지점에 있는 베다니 동네에 있었는데 예수님은 오고 가시며 이 3남매가 살아가는 가정을 자주 방문하여 쉬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 나사로의 부모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가정의 모습을 우리에게 성경에서 소개하는 것은 이 가족 이야기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정의 구성원은 세 사람입니다.
나사로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입니다. 그는 죽었다 나흘 만에 예수께로부터 은혜를 입고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나사로는 그리스어로 “나자로스”이고 유대명으로 “엘르아살”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그래서 그런지 나사로는 예수께로부터 큰 은혜를 입고 죽었다 다시 살아났습니다. 성경에 나사로가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하나는 거지 나사로이고 또 하나는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내 친구(요 11:11)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나사로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사람이면서도 그 후 큰 행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다만 그가 살아남으로 사람들이 그를 살려낸 예수를 메시아로 보기 시작하였고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나사로를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도 그 점이 더 큰 역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르다
마르다는 마리아의 자매였고 나사로의 누이입니다. 일설에는 문둥이 시몬이 그의 남편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르다라는 말은 “숙녀”라는 뜻인데 그래서 그런지 그는 살림을 도맡아 하던 충실한 주부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오셨습니다. 마르다는 혼자서 음식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분문을 보면 마르다가 “마음이 분주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사방에서 끌어당기다”라는 뜻입니다. 바쁠 때는 사방에서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르다는 행동파입니다. 손 대접을 도맡아 했습니다. 이것은 큰 은사입니다. 그런데 혼자 열심히 음식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는데 동생 마리아는 방에 앉아서 도와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께 마리아를 내 보내 달라 요구합니다. 왜 보고만 있느냐고 불평을 했습니다. 혼자서 음식을 만드느라 바빠 죽겠는데 나 몰라라 하고 있는 마리아가 얄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다 보면 사람들이 협조를 안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일러바치고 싶어집니다. 비난하게도 됩니다. 그래서 불평하게 됩니다. 성경은 마르다의 속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마르다의 심정이 곧 우리들의 심정일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마리아는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 듣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여기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엎드려 머리털로 발을 닦아냈던 여인입니다(요 12:). 그 마리아가 오늘도 또 예수님의 발앞에 앉아 집중하여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부엌에서 음식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고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를 내 보내 나를 도와주라 하지 않으시냐고 불평을 할 때 그때 예수님은 마리아를 두둔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이 두 여인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음식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아래 앉아 말씀 듣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서가 아니고 예수께서 드실 음식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음식 만드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라아를 명하여 도와주라 하지 않느냐고 서운해 하고 있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그 시간 음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여기 이 두 자매의 생각의 차이가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여기 마리아의 모습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39절을 보면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이 구절이 부각되고 강조되는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은 이 말씀을 대하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매일 듣고 사는 소리가 세상의 소리뿐입니다. 세상의 소리는 즐거운 소리가 얼마 없습니다. 모두 우리 마음을 삭막하게 하고 걱정되게 하고 메마르게 하는 소리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말씀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열심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한편 마음으로 마르다가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 감사했을 것입니다. 누구를 정성껏 대접한다는 것은 참 귀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더 따뜻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해 우리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답이 나옵니다.
예배에 전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나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나의 전존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나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 예배에 목숨을 걸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분주해도 예배생활에 등한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내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행위와 수고와 보답의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은 이 예배가 경시되는 시대입니다. 독일교회는 5%만 교회에 나간다고 합니다. 영국교회는 10년 전에 5%만 나간다는 통계가 나왔는데 오늘은 더 떨어졌을 것입니다. 미국교회는 날마다 쇠퇴해서 오늘은 그리스도인 중에서 20%만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한국도 이제는 쇠퇴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증가율이 저하되고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도 예배보다 행사를 우선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간단히 드리고 행사에 치중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새해 예배에 전념하십시오.
말씀에 전념
마르다는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를 더 칭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주님 곁에 앉아서 ... 말씀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안에서 봉사도 참 중요한 일입니다. 먹는 일도 참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간직하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은 말씀이 없는 예배와 봉사는 허구라는 말입니다. 봉사도 헌신도 말씀 다음에 할 일입니다. 오늘은 이 예배에도 점점 말씀이 희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에 폭발력이 없고 변화와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섭리하시고 일하시고 계시하시고 인도하시고 알게 하시고 변화하게 하시고 깨지게 하시고 불을 붙여주십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은 잃어버렸던 율법책을 성전을 수리하다 발견해서 읽고는 그동안 무지하게 살았던 것을 생각하고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역대하 34:8). 주의 말씀은 우준한 자를 깨닫게 하십니다(시 119:130). 주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습니다(전도 12:11).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을 내좆으셨습니다(마 8:16). 사도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예수를 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18:5).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고 사람의 마음을 판단하신다(히 4:12)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있는 곳에 회복이 일어나고 깨달음이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자신을 향한 뜻을 발견하고 이해하게 하고(시19:8) 하나님의 뜻 발견하게 하고(롬 12:2) 부정적 사고방식에서 긍정의 생각으로 변화도 주시고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삶이 건강하게 균형 잡힌 삶으로 인도하셔서 복종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죄의 억제와 속박에서 풀어지고 순종하여 자유하게 되게 하시고 영이 즐거워지게 하셔서 우울함과 절망과 의욕상실과 무관심에서부터 외부상황에 영향 받지 않는 내면의 기쁨과 자유로운 상태로 바뀌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인은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요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시19:10-11)”고 말씀을 칭송하였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갈 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A. J 제이콥스가 “미친 척 하고 성경말씀대로 살아본 1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패션잡지 에스콰이어 편집자인 주인공은 성경을 읽어가며 700여개의 계명들을 정리하여 일 년 동안 그 계명대로 실행하여 보았습니다. 왜 그런 착안을 하였는가 하면 성경말씀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에서 “거짓말 하지 말라”는 계명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식당에서 가족과 식사하고 나오다가 부인의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그때 상대방이 아내에게 “조만간 또 다시 봅시다”하고 말했습니다. 이 남편이 생각해 보니 얼마 후에 다시 만날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정직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아내 동창에게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럴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그냥 약속하지 말고 헤어집시다.” 그리고 아내에게 핀잔을 받았습니다. 주일날 뉴욕 거리를 거닐면서 주일날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말씀 그대로 실행한 것입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미친 척 하고 말씀 그대로 실행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얻은 것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도하면서 위로받게 된 것,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하고 흠이 많은 사람인가를 비로소 알게 된 것, 성경에서 이렇게 안식을 찾고 기쁨을 누리게 된 것, 그리고 한 가지 부작용도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너무 자주 하찮은 것에도 감사하게 되는 부작용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줄이 끊어져 지하 바닥에 메다꽂지 않은 것 등을 감사하고 매일 삶에 무탈하게 해준 수천가지의 사소한 일들에 감사하다 보니까 결국 감사에 중독이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눈을 뜨게 해 주는 섭리의 힘이 들어 있습니다.
갈림길에서 과감한 결단
한해를 살아가다가 보면 몇 번의 갈림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때가 몇 번은 반드시 올 것인데 그때마다 갈등이 올 것입니다. 결과가 클수록 갈등도 커질 것입니다. 그때는 과감하게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원칙이고 순리입니다. 그러면 당장은 손해일 수도 있지만 멀리 보면 반드시 합동해서 좋은 결과를 주실 것입니다. 마르다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때 마리아도 부엌에 가서 언니를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여기도 있어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생각하다가 여기 주님의 발 앞을 택한 것일 것입니다. 그 선택이 후에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일로 연결됩니다. 그것이 선택의 삶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이렇게 갈림길을 만나게 될 때를 만나게 됩니다. 그 때는 내게 유리한 길을 찾기 보다는 하나님께 유리한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을 듣고 행동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절친한 친구 두 사람이 한 학교 한 기숙사에서 생활했습니다. 친구 둘 다 교회에 잘 다녔습니다. 하루 저녁에는 술이나 마시러 가자하고 둘이 기숙사를 나섰다가 길가 옆에 있는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술은 내일하고 오늘은 부흥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또 한 친구는 부흥회는 무슨 부흥회냐 술이나 마시러 가자하고 앞서 갔습니다. 그 길로 이 두 사람의 운명은 갈라졌습니다. 그날 부흥회에 참석한 친구는 후에 미국의 22대, 24대 대통령이 된 클리 브랜드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술집으로 갔던 친구는 후에 술로 살인을 하고 사형수가 되어 옥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사형수가 그때 헤어진 친구의 대통령 취임식날 감옥에서 TV를 통해 그 모습을 보고 그동안의 삶을 고백해서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이 같은 결단이 요구되는 때가 여러 번 주어질 것입니다. 그때는 과감하게 말씀을 따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편을 따르십시오.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영적 실력
오늘은 실력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자꾸 도태됩니다. 기업도 실력이 없으면 도태됩니다. 직장에서도 실력이 없으면 밀려나게 됩니다. 경기에서도 힘이 약하면 패배하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도 영적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영적 실력은 우리로 하여금 힘을 주고 능력을 주고 담대함을 줍니다. 성령의 충만이 없으면 성경의 말씀은 분명 생명의 말씀이지만 잠이 오는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에 충만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쩌면 인간은 성령 충만의 삶이 본능의 삶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영적으로 고갈상태에 빠지면 병들게 되어 있고 무력감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 충만은 인간이 누리는 본능입니다.
연어는 3년 마다 태어난 곳으로 회귀합니다. 그래서 30미터나 되는 거센 폭포를 치고 올라갑니다. 그것은 연어가 갖는 본능의 힘 때문입니다. 그 본능을 과학으로 증명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을 사모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본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본능적으로 천국을 사모하게 되고 말씀과 예배를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그 영적 실력이 약화되면 다 싫어집니다. 하나님도, 예배도, 말씀도, 모든 관계도 싫어집니다. 그것은 영적 본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삶이 기름 없는 기계처럼 빡빡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결혼행활 30년 한 10쌍 부부에게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겠는가”고 물었더니 10쌍중 2쌍만 다시 결혼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두 쌍에게 “정말 남편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니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 다른 놈을 다시 길들이려면 힘드니까, 이왕 길들여진 놈이 낫지 않겠느냐”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일치되는 삶을 살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도 원만하게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에 충만해지는 방법뿐입니다. 그때 말씀은 우리에게 이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말씀을 경청하는 모습을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해 더 많은 시간을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립시다. 그리고 거기서 말씀을 얻고 예배에 동참하고 영적 실력을 축적하십시다. 그러면 금년도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한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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