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예전, 거듭나야 한다
주 승 중(장신대 예배와 설교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를 방문하여 우리의 예배 예전의 현장을 살펴본 외국의 예배 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에는 집회는 많은데 예배를 찾아 보기가 힘들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전 세계의 어느 교회보다도 모이기를 힘쓰며, 한 주간 동안에도 주일 아침 예배, 주일 저녁(또는 오후) 찬양예배, 수요일 저녁 예배(또는 기도회), 구역예배, 매일 새벽 예배(기도회), 그리고 가정 예배 등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 한국교회에 예배보다는 집회만 있다는 이런 평가를 받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의 예배 예전 현장이 어떤 모습이길래, 우리에게는 집회만 있고, 예배는 찾아보기가 힘이 든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들의 이러한 지적이 과연 타당한지를 점검하기 위하여 우리의 예배 예전의 현장을 심각하게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2. 몸 말
1) 예배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의 행위
우리가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의 현장을 살펴보려면, 무엇보다 먼저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예배 현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통한 성육의 사건과 십자가의 구속 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 속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자들은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분께 "최상의 가치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데"(worship),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그래서 개혁교회 예배학자인 존 버카르트(John Burkhart)는 "예배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기쁨의 응답"이라고 말한다.
2) 기독교 예배는 기쁨과 부활의 잔치
예배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기쁨의 응답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가장 크고 놀라운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기독교 예배의 출발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안식후 첫 날에 부활하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즉 기독교 예배는 안식 후 첫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던 데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요, 성찬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잔치의 자리였다. 즉 초대 교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안식일 대신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모여 예배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매주일의 첫날"에(고전 16:2, 행 20:7-11) 또는 "주의 날"(계 1:10)이라고 불리는 주일에 함께 모여 성만찬을 가지면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기뻐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매주일은 기쁨의 날이요, 부활 신앙을 입증하는 감격스러운 날이 된 것이다. 그래서 매주일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작은 부활주일"(little Easter)이었다. 예배는 이렇게 기쁨의 잔치, 부활의 잔치이다.
3) 한국교회 예배 예전의 뿌리와 문제점들
그런데 이렇게 본래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응답하며, 그의 복음을 선포하는 행위로 시작된 초대교회의 예배가 유럽을 거쳐, 영국 그리고 미국을 지나서 우리에게 전달되어 오는 동안 많이 변질되고 말았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부활의 잔치로서의 예배의 성격이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의식"이 되면서 퇴색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예배가 19세기 미국의 대각성 부흥운동을 거치게 되면서 그 궤도를 많이 이탈하게 되었고, 우리 교회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부활의 잔치와도 같았던 예배에서 많이 이탈된 예배를 전수 받게 되었다. 더군다나 청교도의 후예들이었던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해진 예배는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닌 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1) 19세기 미국의 "변방예배"(Frontier Worship)의 영향
우리가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이 가진 문제점들을 알려면 우리의 예배에 지대한 영향을 준 19세기의 미국의 "변방예배"(frontier worship)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예배는 한국 교회의 예배 예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열린 예배" 또는 "구도자의 예배"로 알려진 새로운 예배의 형태로 한국교회의 예배에 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북미 지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이 변방예배는 두 번에 걸친 대각성 부흥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19세기에 미국이 서부로 땅을 개척해 나가면서 개척지에서는 대규모의 천막집회가 열렸다. 이 때에 드려진 예배는 뜨거운 준비찬송과 예배의 중심부로서 회심을 촉구하는 복음적인 설교,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신자를 불러내는 초청의 순서로 되었다.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과 관련해서 이 예배는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변방예배는 설교 중심의 예배였다. 그리고 그 설교의 특징은 복음적 메시지이다. 즉 설교의 초점은 언제나 복음의 제시에 있었고, 설교의 주제는 주로 구원, 멸망, 회심 등이었다. 당시 이 천막집회에서 헌신을 다짐한 많은 청년들은 후에 전 세계에 선교사로 나가게 되는데, 그 중에 많은 이들이 한국에도 나오게 된다.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가 설교중심으로 되어있는 것은 이들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둘째로 변방예배의 기본 정신은 실용주의였다. 예배의 기본 정신은 하나님께 드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미국의 교회들은 예배를 선교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예배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을 그 예배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결신자를 맺느냐에 두었다. 그리고 이 목적, 즉 예배를 통한 결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들이 동원되었다. 예배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예배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셋째로 이 예배는 개인주의적인 영성을 강조하였다. 이 예배는 신자 개인의 회심과 결단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측면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개인주의 적인 영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은 복음송가들이 불려졌고, 그 중에 많은 복음송가들이 오늘 한국교회의 찬송가에 들어있고, 아직도 애창되고 있다.
(2) 한국교회 예배 예전의 문제점들
문제는 이 변방예배의 전통이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에 그대로 답습되어 내려오고 있다는데 있다. 먼저 한국교회의 예배는 목사 개인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특히 설교자에게 예배가 지나치게 의존되어 있다. 설교가 곧 예배요, 예배는 곧 설교를 듣는 것이라는 인식 하에 모든 것이 설교에 의해서 결정이 난다. 결과적으로 회중들은 "예배를 드리러 가는 존재"(Worshipper)가 아니라, 단지 "교회에 가는 존재"(Church-Goer) 또는 "설교를 들어보는 존재"(Sermon-Hearer)로 머물게 되고 말았다.
두 번째 문제는 회중의 수동적 참여이다. 변방예배에서는 회중들은 예배에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거의 없었다. 예배 시간에 회중들은 스스로 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들려 오는 설교를 들으며, 찬양대의 찬양과 기도자의 기도를 듣기만 하면 되었다. 성찬도 마찬가지였다. 안수 받은 성직자가 모자라는 서부 개척지의 상황에서 성례전은 1년에 두어 번 순회목사가 방문할 때만 집례되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에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회중들은 앉아서 듣고 보기만 하면 된다. 성찬도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의 모습이 아닌가?
세 번째 문제는 개인주의적이고 "참회적 영성"이다. 변방예배는 사실상 예배라기 보다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집회였다. 따라서 예배의 초점은 언제나 참석자들의 회심에 있었다. 그러나 보니 메시지의 초점도 항상 죄에 대한 회개와 회심을 강조하는데 두어졌다. 그리고 성만찬에서도 언제나 강조된 것은 갈보리 산상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이었다. 이 전통은 엄격하고 경건한 청교도의 후예들이었던 선교사들에 의해서 한국교회에 거의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여전히 무겁고, 참회를 강조하며, 복음과 은혜보다는 율법적인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한국교회를 방문하였던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Moltmann)은 "한국교회에는 십자가의 신학은 있으나 부활의 신학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한국교회가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은 강조하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상실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성찬식을 생각해보자. 한국교회의 성찬식에서는 대게의 경우 항상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만이 강조될 뿐이다. 그래서 마치 성찬식만 하면 그 날의 예배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어둡고, 마치 장례식과도 같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미 필자가 지적한대로 우리 기독교의 예배의 출발은 안식 후 첫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던 데서 시작되었다. 초대교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성찬을 나눌 때에도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념하고 더 나아가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축하하고 감사함으로 재현하였다.
4) 예배 예전 거듭나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은 초대교회의 그 기쁨의 예배, 환희의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부활의 감격과 앞으로 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참 소망을 계속해서 확인하며 재현할 수 있는 그런 예배로 다시 거듭나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제일 먼저, 우리의 예배에 있어서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초대교회가 균형 있게 가지고 있었던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 예전"의 균형이 회복되어져야 한다. 초대 교인들은 주일이면 모여서 성만찬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감사하며 감격적으로 예배를 드렸다. 그들에게 예배는 주님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장이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감격의 자리였다.
그러므로 오늘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성만찬을 예배 예전의 자리에서 회복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미 현현된 하나님 나라와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과 기쁨과 소망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지나치게 엄격한 청교도들의 후예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한국교회는 이 천국 잔치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일년에 두 번 내지는 네 번 정도의 성만찬이 마치 하나의 엄숙한 장례를 치르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쁨과 소망의 자리가 되어야 할 성찬이 슬픔과 죽음의 자리만으로 가득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성만찬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그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재현한다. 그러나 우리가 참여하는 성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우리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영광스럽게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기억하는 자리요, 주님의 부활에 우리도 동참하게 될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요, 이제 머지 않아 맞이하게 될 기쁨의 천국잔치를 미리 맛보는 소망과 기쁨의 자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초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종교개혁가들이 그렇게 회복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매주일을 작은 부활주일로 지키면서 성만찬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므로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참 소망과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감격에 회중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예배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바람직한 예배는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회중이 능동적이고 온전하게 참여하는 예배이다. 그러면서 부활의 기쁨과 천국의 대망이 있는 예배여야 한다. 이러한 예배가 될 때에 예배가 회중들에게 감동과 감격을 주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예배에 회중의 능동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열린 마음이 요청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회중들이 예배드릴 때에 자신들이 직접 드릴 수 있는 기회를 더욱 많이 제공해야 한다. 즉 예배 중에서 회중의 능동적인 참여를 최대한 확대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예배에서 회중들이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야 한다. 회중이 찬양대의 아름다운 찬양을 하는 것을 듣고만 있다면 그것은 회중이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찬양의 행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회중들이 자신들의 입술을 열어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는 순서를 가능하면 많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다른 예는, 한 사람의 대표가 길게 기도하는 것보다는 인도자와 회중이 상호 응답하는 방식의 "연도"나, 회중 전체가 동시에 통성으로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도 필요하다. 그리고 예배 중간에 회중들로 하여금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예를 들어 복음서를 낭독할 때에는 회중이 일어서서 말씀을 듣게 한다든지, 복음서를 읽은 뒤에 인도자가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하면, 회중이 "주님께 감사합니다" 또는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과 같은 고백으로 말씀에 대한 응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인들에게 예배에 대한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성만찬의 의미가 무엇인지, 세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 순서 하나 하나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회중들이 예배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알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중세시대의 교회는 회중들이 예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몰랐다. 평신도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말로 집전되는 예배, 회중들에게 등을 보이며 사제가 혼자 중얼거리며 집전하는 성만찬, 그 나마 평신도들에게는 떡만을 주고 잔은 주지 않았던 그런 중세의 미사는 그야말로 예배자들을 구경꾼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의식이었지, 회중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회중들은 예배의 각 순서들은 무엇을 하는 것이고, 무엇 때문에 예배에서 그 순서가 들어가며, 그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그 의미를 알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예배에 대한 교육은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의 거듭남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3. 나가는 말
초대교인들은 매주일을 "작은 부활주일"(little Easter)로 지키며, 그 날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말씀을 들으며, 떡과 잔을 나누는 가운데 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늘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감격하고 축하하는 현재적 행위인 예배를 통하여 항상 새로운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 그 고난의 세월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새천년의 첫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될 한국교회는 종교개혁가 칼뱅이 그렇게 회복하기를 원했던 초대교회의 예배 예전을 다시 한번 회복해야 한다. 성만찬을 통한 부활의 감격을 나눌 수 있는 예배, 회중들이 부활의 기쁨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예배,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중들이 그 의미를 알고 참여하는 예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거듭나야 할 한국교회의 예배의 모습이다.
출처 : 하얀 비둘기
글쓴이 : 하얀비둘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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