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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3:13-22 변화된 자
오늘은 베드로전서 3:13-18까지 말씀으로
‘변화된 자’라고 하는 제목으로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토마스 모나한 이란 사람은 유명한 도미노피자 사장입니다.
그 사람은 어려서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말썽부리고 계속 일만 저지르다가 결국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어린나이에 피자만드는 곳에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모나한은 열심히 피자를 만들어서
11초만에 피자를 한 장 만드는 최고의 기술을 갖게 되었습니다.
빨리 만들뿐만 아니라 어느누구도 흉내 낼수 없는 맛도 낼 수 있었던
토마스는 가게를 내게 돼서 큰 돈을 벌었습니다.
번 돈으로 디트로이트라고 하는 프로야구 구단까지 샀고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에게 장학혜택을 주는 일을 했습니다.
토마스는 어렸을 때 말썽부리고 싸우고 해서 많은 사람들은 토마스를 싫어했지만,
어느 한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토마스에게 ‘하나님은 널 사랑하신다. 그러니 큰 꿈을 가지고 있으면 그 꿈은 이루어 질 것이다’라고 해준 말이 크게 가슴에 새겨져서 늘 기억하고 살면서 변화되어
미국뿐아니라 세계에서 많은 피자점을 운영하고 많은 사람을 돕게 된 사람이
도미노피자 사장인 토마스 모나한 이란 사람입니다.
한 선생님의 말에 변화되어서 사람들에게 골치 아팠던 사람이 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기 본문 베드로전서3:13-18까지의
베드로전서 전체의 내용은 무엇을 말하냐면 옛날에 베드로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것은 육적인 이름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라고 이름을 바꿔줬습니다. 반석이란 뜻입니다.
여기에 베드로 전서는 전부 베드로의 간증문입니다.
옛날 자기가 잘못했던 부분을 이해하고 쓴 것입니다.
여기다가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나그네와 행인같은’ 그런말을 2:11에 얘기를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나그네와 행인인줄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우리주님이 돌아가시고 성령받고 난 이후에 깨달은 겁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리 무엇이 되려고 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그네가 고향에다 집을 짓지 잠깐 들린 곳에 집을 짓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구나,
이 세상은 잠깐 왔다 간다는 걸 몰랐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잡혀가니까 멀찌기 따라가잖아요. 왜 멀찌기 따라갑니까? 혹시라도 손해날까 싶어서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요한복음 21장만 봐도 물고기 잡으로 갑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가서 만나주잖아요. 그리고 나서 사도행전 1장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지요.
2장에 보면 성령받지요. 3장보면 나는 아무것도 없거니와 내게 있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합니다. 그때부터는 나그네와 행인인줄을 알았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걸 얘기합니다.
의를 위해서 고난받는 거 아주 복이 있다고 하면서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야 된다.
선을 행하므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악행하며 고난받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그리스도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어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였는데 그것은 곳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그런 것이다. 육체로 죽임을 당했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은 그분을 우리는 잘 이해를 해야 된다.
지금 베드로가 변화되고 난 이후에 쓰고 있는 겁니다. 그전에는 베드로도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데 까지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는가?
베드로가 지금 하는 말은 자기가 지금 거기까지 변화됐다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어떤데 까지 변화가 돼야 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벧전3:13-14절 보겠습니다.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첫 번째는 핍박에도 의를 위해서 고난받는 데까지 변화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베드로는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 할꺼냐?
그러나 의를 위해서 고난 받는 다고 하면 그것은 슬픈 일이 아니라 도리어 복된 것이다.
그러니 핍박자의 두려워함을 두려워하지 말고 소동치 말고 어떠한 핍박에도 의를 위해서 고난받는데 까지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거기까지 갔다는 겁니다.
베드로 전서를 쓴 것은 자기가 옛날에 엉터리인 것의 끝을 보고 어떻게 해야 가치 있는 삶이고 어떻게 해야 진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인가를 알고 쓴 것입니다.
자기가 나그네와 행인이라 이 세상에 무엇을 쌓아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가슴에 있는 것 같이 귀한 일이 없는 것을 알고 베드로는 죽을 때 우리주님은 올바로 십자가에 메달렸지만 자기는 죄송하니까 거꾸로 십자가에 메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멀찌기 따라가고, 거짓말하고, 저주하고 할 때는 어땠을 까요.
그때는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정돈되고 나서 베드로가 고백하는 말들이 베드로전.후서에 따 써져있어요.
옛날 자기가 한 것을 뒤돌아보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의를 위해서 고난받는데 까지 내려가 봤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때 유대교는 믿기 쉬어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음하고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일도 많이 있었던 걸 알아야 됩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죠. 예수님 믿는다고 누가 시비를 겁니까?
세금을 더 많이 냅니까? 그런거는 안잖아요.
그런데 베드로는 많은 핍박에도 의를 위해서 고난받는데 까지 내려가 봤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거기까지 변화되라는 겁니다.
핍박을 받으면 억울하고, 힘들고, 어렵고, 이해가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신앙생활도 못하는 것 같은데 자식도 잘되고,
주식투자만 하면 주식이 오르고, 집도 사기만 하면 집값이 오르고 뭐든 잘되는 것 같은데,
나는 한다고 하는데 힘들고 어렵고 할 때 그럴때 우리마음이 한쪽으로 속이 상할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보고 어디까지 내려가라고요. 의를 위해서 고난받는데 까지 내려가라는 겁니다. 베드로가 거기까지 내려가 봤다는 겁니다. 거기까지 변화되라는 겁니다.
우리가 한번 내려가 보면 그 길을 압니다. 삶에서 만나서 내가 거기를 가보면 압니다.
제가 가락동 시장에 가서 배추를 자르고 나면 얼마나 허리가 아픈지 압니다.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요. 거기서 새벽2시에 국밥 한 그릇을 주면 얼마나 맛있는지 저는 압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자고 있는 사람에게 국밥주면 아마 미쳤냐고 할겁니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에게 국밥주면 잘먹습니다.
가락동시장에 지금 배추 한참 다듬겠네요.
힘들게 일한 사람에게 국밥 한 그릇을 주면 꿀같이 맛있어요.
해본 사람이 그 다음에 또 할 수 있습니다.
핍박에도 의를 위해서 고난받아서 한번 슬쩍 지나본 사람은 또 할 수 있는데,
해보지도, 만나지도, 그 속에 들어간 적도 없는 사람은 접목이 어렵습니다.
영적인 것은 내가 만나지 않고는 내 귀에 바로 들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손에 쥐어줘도 내가 그 속에 들어갔다 오기전에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애로사항이 있으신 겁니다.
경험한 적도 없고, 만나본 적도 없는 것은 이론입니다.
영적인 일이란 것은 그래서 어려운 것이고 그래서 하루아침에 안 되는 것입니다.
핍박이 오면 도망가지요. 그런데 고난받는 자리에까지 있는 것은 정말 귀중한 것인데
베드로는 자기는 거기까지 갔다는 겁니다.
14절에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들어가 봤기 때문에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복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됩니까?
고난을 받아야되지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은 복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고난이냐 복을 받아야지 합니다.
아닙니다. 고난 뒤에는 복이라 하는 것이 딱 붙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마5:10-12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여기서 의를 위하여 핍박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천국백성의 진정한 자격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8복의 마지막이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8복의 종점입니다. 먼저 심령이 가난해져야 되지만 결론은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론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거기까지 변화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암 소경도 출교를 시키든지 말든지 관계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날 때부터 소경으로 살았던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만나보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어떤 핍박이 와도 다 뛰어넘습니다. 우리주님의 성품을 만나버리면 다 뛰어넘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삶에서 우리주님을 만나라고 하는 겁니다.
능력도 없는 것 같고, 되는 것도 없는 것 같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같이 큰 행복도 복도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핍박에도 고난받는 자리까지 가는 사람은 평소에 주님을 많이 느낀 사람이 갈 수 있습니다. 평소에 주님과 관계없이 산 사람은 아픔이 조금만 오면 도망가고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뜬 소경같은 사람은 아무리 누가 위협하고 물어도 한결같이 이야기를 하지만,
그 부모는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먼저니까 모르겠으니 아들한테 물어보라고 합니다.
자기 부모가 아들이 눈떳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들의 눈을 누가 뜨게 해줬는지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부모는 알지요. 자기아들의 제일 큰 문제인 눈을 떳는데 그것을 아들한테 물어봤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와서 어떻게 눈떳냐고 물으니까 출교시킬까 두려우니까
아들한테 물어보라고 합니다.
실로암 못에서 고침받은 소경이 말하듯이 어떠한 환경이 와도 주님이 하셨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야지 그 부모처럼 자기만 생각해서 피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핍박에도 의를 위해서 고난받는 자리까지 변화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3:15-16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소망두는데까지 변화되야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간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는 가이샤랴 빌립보에 가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하잖아요. 왜 예수님이 가이샤랴 빌립보까지 올라가서 제자들에게 물어봅니까?
그 곳은 교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에요.
교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에서 물어야 진짜를 알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 가서 물어보는 거에요. 그런데 거기서 베드로가 멋지게 말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다 안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우리주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멀찌기 좇아 가다가 꼬끼오 거치고,
요한복음 21장, 물고기 잡으러 가자 거치고, 숯불 거치고, 승천한 것 거치고,
마가의 다락방 거치고, 성령받고 나니까 전혀 다른 얘기를 베드로가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나서 거기에다 소망 두는데 까지 간 것입니다.
그리니까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설교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다 너희들이 죽인 그분이 구세주라는 것을 설교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러니 그분께만 소망을 두고 가는 겁니다.
처음부터 베드로가 그랬나요? 아닙니다. 베드로가 온전히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걸 알았으니까 죽을 때 거꾸로 죽은 겁니다. 그걸 알고 온전히 그분께 자기를 다 드려버린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거기에다 소망을 두는데 까지 변화되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자기가 옛날 변하지 않은 자기에서 변화된 자기를 보면서 간증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옛날 나와 변화된 나를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믿기는 60-70년을 믿으면서 변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 많이 있습니다. 자기자신을 변화되지 않으니까 주변사람들이 쉬쉬하며 다 도망가 버려요.
복받으려고 하기전에 내 가슴부터 바뀌어야 됩니다.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복 받으면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곱창이 맛있습니다. 그러나 먹으려면 뒤집어야 합니다.
뒤집어서 안에 있는 것을 깨끗이 처리하고 나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아주 맛있습니다.
우리가 뒤집어 지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합니다. 안 뒤집어 지면 냄새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변한 사람같이 좋은게 없어요.
베드로도 옛날에는 그리스도를 주로 생각지 않았어요.
자기가 최고에요. 거기다가 소망 안뒀어요.
그런데 이제 부활하신 주님에다가 소망을 두게 된거에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거기까지 변화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여기까지 변화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에게 발견되잖아요.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는 말이 삭개오가 뒤집어 지는 소리에요. 삭개오는 세리가 아니라 세리장이에요.
그때는 로마에다 어느구역을 갖고 세금을 바치면 그 구역에서 얼마든지 돈을 뜯어낼수 있었어요.
기름짜듯이 사람들에게 세금을 뜯어내면 얼마나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겠어요.
그런데 거기 대장인 삭개오가 변화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것이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인이니까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고 변화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도 나는 조금 더 갖고 싶어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이다 라는 것입니다.
로마서14:8절 말씀대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라고 하는
이 말이 우리가 변화되는 내 가슴 안에서 늘 인정되어지고,
고백되는데 까지 변화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무엇에 목표를 두지 말고, 주님을 주로 삼고 거기에도 소망두는데 까지 변화되길 원하는 걸 기억하고 날마다 우리가 변화되어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소망두는데 까지 변화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세 번째는 주님의 죽으심을 이해하는데 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우리주님이 죽는다고 얘기할 때 주님 죽으시면 안돼요 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 살아계실 때 자기가 한자리 차지할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죽으시면 안된다고 그랬죠. 그렇다면 베드로가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아는 겁니까? 모르는 겁니까? 우리주님을 뭐 하실려고 오셨죠?
주님은 죽어야 우리가 구원받으니까 죽으러 오셨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죽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나 구원 안받을래요 그 말과 같아요. 베드로는 그것을 모른겁니다.
도마도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만져보지 않고는 못믿겠다고 그러잖아요.
부활하시고 난후에도 베드로와 7명의 제자는 고기잡으로 갑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주님이 왜 죽었는가를 모르니까 그런겁니다.
그 죽음 때문에 내가 살았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니까 그러는 겁니다.
베드로는 벧전3:18절에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인도하려고 그랬다고 베드로가 간증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인도하려고 그분이 죽으셨다 이걸 내 가슴속에서 깨닫고 이해하고 인정한다고 하면 나를 위해 복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안하죠? 어떻게 하면 나를 더 드려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까 하겠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지면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 그분이 죽었다니 하고
눈물이 글썽글썽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53:3
3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분이 누군데)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했냐)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런데 주님은 실상 이랬다는 겁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감기하나 걸렸어도 나으면 우리 주님 때문에 나았지 라고 느끼는 겁니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분이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분이 상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고,
우리에게 나음주려고 맞은 우리 주님을 삶에서 더 많이 이해하는데 까지 변화되라고
베드로는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주님이 죽으신 이유가
더 많이 깨달아 지는데 까지 나보고 변화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도 거기까지 변화되기를 원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주님 동생 야고보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미쳤다고 잡으러 다닌 사람중에 한 명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야고보서를 쓸때에는 야고보도 예수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만큼 변화됐습니다. 그분이 나랑같이 자란 형이었는데 알고보니 그리스도고 그분이 죽으셔서 내가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됐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도 그렇게 까지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주님이 죽으신 이유를 이해하고 깨닫고
그것을 내가 인정하고 만나고 이해하는데 까지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도 날마다 야보고가 변화되고 나니까 종이라고 고백하듯이,
우리도 변화되면 변화된 만큼 누구의 종이됩니까?
세상의 종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종이 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어떤 핍박에도 의를 위해서 고난받는데 까지 변화되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소망을 두는데 까지 변화되라는 겁니다.
세 번째는 주님의 죽으심을 이해하는데 까지 변화돼서,
그것을 이해하고, 삶에서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고, 고백하며,
인정하다가 변화된 부분이 하나님에게 발견되어져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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