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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1-8 우리는 어떻게 보일까
오늘 막1:1-8 말씀으로 우리는 어떻게 보일까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음악가 하이든이
천지창조를 작곡을 하고, 몸이 많이 안 좋을 때 천지창조를 연주하는 연주장에 갔습니다. 연주회가 끝나고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서 관중들이 하이든을 향해 일어나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럴 때 하이든은 휠췌어에 앉아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박수를 치세요.
나는 작곡만 했을 따름이지 영광을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이 천지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까 하나님께 박수를 치세요’라고 말하고
일어서려고 하다가 쓰러져서 얼마 못살고 세상을 마쳤다고 합니다.
하이든의 일생은 모든 음악을 작곡할 때마다 하나님 것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늘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작곡을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날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잊어버립니다. 이 세상이 그것을 잊어버리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절대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날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의 얘기입니다.
이사야에 세례요한이 할 일을 먼저 말씀을 해놨습니다.
앞선 사자가 와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할 것이다.
그리고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어서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라고 얘기를
이사야에서 한 것같이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다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례요한의 옷은 양털옷을 입었고 가죽띠를 띠었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그 일을 감당했던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보다 능력많은 이가 내 뒤에 오신다.
나는 그 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신끈을 풀기도 나는 감당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라고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던 세례요한의 모습 속에 세례요한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였을까 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한 주간 한 주간 삶이 하나님 앞에 보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보이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막1:4-5
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첫 번째 하나님께서 원하는 말을 하고 있다고 보이는가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사람이 다 나와서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그랬습니다.
세례요한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우리 주님이 어떻게 하셨다고 하는 말이 나와야지,
우리는 육신이 얻고 싶고, 편해지고 싶은 말을 하면
우선 듣기는 좋지만 그것은 얼마가지 못합니다.
우리 육신은 한계가 있어서 금방 잊어버립니다.
죽을 병에 들어서 내 목숨만 살려주면 나는 일평생 하나님 것이 되어서 일하겠습니다 하고 눈물을 쏟으면서 얘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사가 강하신 분이 기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나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3개월 있다가 교회를 안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더니 하는 말이 내가 3개월 많이 나가 줬잖아요.
나 지금 괜찮거든요. 하더래요.
육신은 그렇습니다. 코너에 몰렸을 때 그것을 들었는데 들은 거 얼마 못 갑니다.
육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얼마 못 갑니다.
세례요한은 무슨 얘기를 합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얘기를 합니다.
죄사함 받는 회개의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나와서 자복했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영이 잘되는 것입니다.
영이 잘되려면 내가 제일먼저 회개를 해야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 안으로 들어가는 시초가 시작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 육신의 복을 받고 육신의 무엇인가를 누려서 잘살아 보려고 하면서 예수믿는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을지병원 중환자실에 가면 내가 잘못살았다고 후회를 합니다.
육신은 한계가 있고 얼마 안 있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때 자기가 헛 세상 살았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육신이 잘되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죄 사함을 받고 회개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편으로 가라고 얘기하는데 사람들이 다 나와서 자복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입술에서 날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이것도 주님이 하셨습니다.
요것도 주님이 해주셨습니다. 이것도 고맙습니다. 저것도 고맙습니다.
이런 말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광야같은 이 세상은 거칠고 힘들고 어렵습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합니다. 남을 딛고 서야 내가 서는 그런 세상입니다.
경쟁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 문제만 풀려고 말하고 내가 무엇인가 얻으려고 말하고
주님을 무시하는 말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입술에서 항상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이 하게 해주셔서 내가 했다고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셔서 내가 살고 있다고 늘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감사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말 일것입니다.
세례요한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말만 한 것입니다.
우리도 한 주간 살면서 하나님 보시는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수24:14-15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끌고 가서 세겜언약을 하게됩니다.
많은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한 말이 많은 영향을 끼쳐서 백성들이 자복하고 하나님앞에 나왔듯이,
이 여호수아 한사람을 통해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과 세겜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원하는 말을 하므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막1: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두 번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 보여져야 합니다.
요한은 자기의 신분에 맞게 옷을 입고 있습니다. 약대털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세상과 다르게 입고 있는 것입니다.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다고 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털옷입고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으면 고정관념을 다 깨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도를 이루려고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삶이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려고
자기의 삶을 넣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살아가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살면 좋을 줄 알아도
그것은 얼마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진정으로 오래갑니다. 하나님의 가슴에 기억이 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육을 기쁘게 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내가 편하고 내가 호강스럽게 살고 내가 좋은 쪽으로 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좀 불편하고 힘들고 어렵지만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
그 삶은 후회가 없습니다.
어느때인가 정말로 귀한 삶이라고 뒤돌아보면서 간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었고, 가죽띠를 띠었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입는 것, 갖추는 것, 먹는 것 모든 삶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 때문에 입는 것도 조금 덜 입는 것도 괜찮습니다.
먹는 것도 조금 덜 먹어도 괜찮습니다. 갖추는 것도 우리 주님 때문에 조금 못 갖추어도 괜찮습니다. 그것보다는 내 삶이 어느쪽으로 향하고 있는 가를 하나님이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이 세상을 향하고 있느냐 하나님을 향하고 있느냐는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는 삶, 우리 각자가 다 다릅니다.
왜냐면 나이, 출신성분, 성별, 취미도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도 각자 다 다릅니다.
각자의 현실속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좋을 것 같아도 얼마 못 가면 후회합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부인하고 속이 상해도 내가 원하는 쪽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쪽으로 가다보면 언젠가는 잘 했구나 라고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삶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삶이지 자기가 영광 받는 삶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3절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라고 나와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삶은 광야에서 외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좋은 곳이 아니라 나쁜 광야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을 말하는 사람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이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가입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 영적으로 죽는다 이 말입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반대로 영이 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삶이 편안하고 좋게 살아도 영이 죽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좀 불편하고, 힘들어도 내 영이 살면 그 사람은 성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육신적인 삶이 편해지려고 하고 조건이 좋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히 오는 것이지 우리의 목표가 되면 안됩니다.
우리주님 때문에 내가 조금 힘들게 살아도 그것은 곧 주님이 원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2장에 가면 미가야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아합 때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 아합 때는 많은 400백명 넘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아합의 권력이 워낙 세니까 많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지 않고
아합의 비위를 맞춰서 살아가는 불쌍한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오직 한 사람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서 아합의 비유 맞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합이 아람과 전쟁에서 돌아와 미가야를 죽이려고 가둬놨지만,
아합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미가야가 말한 그대로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미가야와 같이 우리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산다고 하나님 앞에 보여야 될 줄 믿습니다. 그 삶이 가치가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그런데도 그 삶이 모든 조건을 내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가방들고
바울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랬더니 그 결론이 신약성경을 분량으로 가장 많이 쓴 누가입니다.
바울은 13권의 책을 썼지만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2책을 썼지만
양으로는 바울보다 더 많이 쓴 것입니다.
그 당시 의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가를 비웃었을 겁니다.
그러나 누가는 절대로 거기에 따라가지 않습니다.
일생동안 바울의 가방쟁이로 보냈더니 너무나 귀하고 가치 있는 삶으로 결론이 맺어져서
이 세상에 성경이 있는 한 신약성경을 가장 많이 쓴
누가는 없어질래야 없어질 수 없는 너무나 귀한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이 누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어느때인가 결산할 때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주님 품으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주 간에도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막1:7-8
7 그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세 번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고 있다고 보여야 됩니다.
세례요한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
그러면서 나는 그 분의 신끈도 풀만한 사람이 못된다. 주님을 소개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면 그분은 성령세례를 주실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무가치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기가 가야할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가면 돌아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가고 있을 때는 나중에 보면 후회도 없고,
실패도 없고 그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점점 더 가까이 달려갈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길로 갔을 때는 간만큼 거꾸로 나와야 합니다. 헛세상 사는 것입니다.
운전하는 분은 이정표를 운전합니다. 우리의 이정표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나에게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그 길은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내 경험으로 내 고집, 생각으로 가다보면 엉뚱한 길로 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안가고 내가 원하는 길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삼상17:45-47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이 골리앗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오지만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간다고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는 방향은 하나님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칼, 창으로 못이깁니다.
하나님으로 이깁니다. 골리앗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삼상17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항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한다.
하나님을 향해서 나는 간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는 간다. 하나님을 좇아간다.
이 길로 가야 성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가야될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있습니다.
저도 내가 원하는 길을 가다보니까 하나님이 딱 막고 섰는데
나는 그 길을 어떻게 해서든 뚫고 가려고 했습니다.
교회는 다니고 있었거든요. 날마다 해 달라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그 길이 아니었어요. 그때 딱 막히니까 제 머리는 깨져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아퍼서 뒤도느라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여러분들도 자기 원하는 길을 가려고 하나님 벽에다 머리 박지 마세요. 너무 아픕니다.
내가 원하는 길 열심히 해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면 일이 잘됩니다. 편안하고 좋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보이는 가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사람에게 이웃에게 교회안에서 가정안에서 회사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는 가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 가,
목사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 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말을 하고 있는가 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가 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고 있는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고, 삶을 살고, 길을 가고 있는가
이번 주간에도 나를 다시 점거하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길을 가시다가
하나님 앞에 발견되는 또 그것 때문에 칭찬 듣고
하나님 가슴에 기억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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