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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됨을 잃은 제자(마태복음 26:36-46)

by 【고동엽】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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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됨을 잃은 제자(마태복음 26:36-4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교육에서 제자도(弟子道)를 강조하였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일생동안 많은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모름지기 스승을 잘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스승을 잘못 만나면 공부할 마음도 없어지고 학문을 멀리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됨을 포기하는 일마저 생깁니다. 어떻게 보면 내 쪽에서 스승을 택하는 것 같지마는 그실 훌륭한 스승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아주 큰복입니다.

둘째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을 만났어도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셋째로, 열심히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지식만 얻으려드는 제자는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스승의 생활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스승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절대 순종의 자세가 될 때에 비로소 훌륭한 사람,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직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스승 밑에서 3년 동안 나무를 베고, 3년 동안 물을 깊고, 3년 동안을 아무 말 없이 밥짓는 일만 하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10년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선생님, 한마디만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고, 스승을 향하여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비로소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지만 오늘날 우리가 더욱 새롭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열둘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스승을 택한 것이 아니고 스승이 제자를 택한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열두 제자에게 이렇다 할 무슨 자격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보통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스승인 예수님께서 친히 택하셨습니다. 물고기 잡는 현장에서, 심지어 세리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는 현장에서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택하심과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꾸준히 제자됨을 배우고 익혀나가고 다듬어지고 양육됩니다. 엎치락뒤치락 많은 실수도 되풀이하면서 예수님을 배움으로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으로도 가르치시고, 행위로도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정리해보면 그 삼분의 이가 열두 제자 앞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상대로 말씀하신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열두 제자를 똑바로 키워놓으신 것입니다. 3년 동안 가르치시고 제자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열두 제자를 키워나가시는 과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쓸모 없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쓸모 있는 사람들로 만드셨습니다. 마침내는 이 제자들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루어졌고, 오늘에 이르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까뮈(Camus, Albert)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나의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나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절망하게 된다 함입니다. 그러나, 쓸모 없는 자라도 쓸모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어쩌다가 '나는 쓸모 없다. 존재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면 그 때부터 이미 정신적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열두 제자의 '쓸모'는 예수님께서 부르심으로 있게 된 것이지 결코 그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내게 배우라. 나 있는 곳에 있으라.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하라.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는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제자로서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라고 당부하시고 보장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일 따름이었습니다. 절대적 충성입니다. 믿고 의지하고 위탁하고 따르라 하심입니다. 충성 하나를 요구하십니다. 다르게는 믿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작년에 중국을 여러 번 다녀왔었습니다. 한번은 씨안이라고 발음하기도 하는, 중국의 11대 왕조의 서울 서안(西安)을 방문하였습니다. 청나라, 진나라, 당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던 서안은 중국 지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그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에 참으로 경이로운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진시황의 무덤이었습니다. 얼마나 크던지, 무덤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납디다. 현재 이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데, 아직도 한쪽 구석만 발굴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림으로 많이 보시고 직접 가서 보신 분도 있겠지만, 그곳에 병마용(兵馬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병마용은 창이나 활을 들고 있는 군사입니다. 사람의 서 있는 모습 그대로 흙을 빚어서 구운 것입니다. 2천 년 동안을 고스란히 보존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지금은 시커멓게 보입니다만, 자세하게 보면 옛날에는 영롱하게 색칠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병마용의 얼굴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이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것만 하여도4천 개를 넘는다고 합니다. 사람의 크기와 똑같은 병마용이 수없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 가운데에 진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듣자하니, 원래 병마용은 왕을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왕이 죽을 때에 '왕과 함께 평생을 살겠습니다. 오로지 왕을 위하여 함께 죽어서 무덤 앞에 서 있겠습니다'라고 자진하여 맹세한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그렇게 결심한 사람들을 죽여서 몸에 흙을 바르고 구웠습니다. 새까만 숯덩이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속에 시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수백 명의 병마용을 과장하기 위하여 똑같은 모양으로 수천 개를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발굴된 것만도 4천 개라 하니 굉장한 일입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왕이 죽을 때에 함께 죽는 것입니다. 후궁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하들도 왕과 함께 있겠다고 병마용이 되어서 무덤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때의 광경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도덕적으로는 묻지 말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는 그 같은 충성도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순교를 하여야 제자입니다.

핍박이 가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순교도 하지 못하였다면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살아도 순교적으로 살아야 제자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열왕기하 22절로 6절에 보면 엘리야를 따르는 제자 엘리사의 간절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승천하려 할 때, 제자 엘리사는 엘리야를 쫓아갑니다.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결코 스승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서 따라갑니다. 이렇듯 스승을 배우고 따르며 함께 살고 함께 죽고--그러해야 진정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충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때에 제자됨에 실패했습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양옆에 강도 둘만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유감스럽습니다. 한쪽에는 강도가 있더라도 한쪽에는 베드로나 어느 제자 하나라도 함께 있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신학적으로 문제되었던 것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 홀로 십자가를 지셨느냐? 제자라는 사람들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요, 수제자라 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부인하고 도망갔으니,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에게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하며 메시야의 위상, 메시야의 메시야됨에 이의를 제기하게 됩니다. 시원치 않은 제자 둔 탓에 예수님께서 욕을 입으시는 셈입니다. 아무튼 당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부인하고 다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제자 됨에 실패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의 본문말씀은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베드로같이 자기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스승 앞에서 '난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저를 가르쳐주시고 인도하여주십시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제자는 늘 배우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따르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호언장담합니다. 심지어 주위 사람과 비교하여 잘난 척합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22:33)"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가장 잘난 척하던 베드로가 가장 못난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능력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가장 무능한 사람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헬라철학의 비조(鼻祖)라고 하는 탈레스(Tales)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자기를 아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남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무책임한 짓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보아하면, 잘난 척하는 사람들 참 많아요. 어떤 분은 제 앞에서도 실수합니다. "누구누구는 대학 다닐 때 별것 아니었는데 요새 보니 돈 좀 벌었다고 까불어요." 정작 본인도 별것 아니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배웠다고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별것 아닙니다. 많이 가졌다고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부끄러운 줄 아셔야 합니다. 가정에 화목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잘난 척하는 것 때문입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이 불편한 것도 남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낫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좀더 진실하게 나를 드러내고 인정하세요.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더 못나면 못났지 잘난 것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추호라도 자신을 귀족으로 여기지 말 것입니다.

예로부터 봉건주의 문화에 젖어온 탓으로 우리에게는 걸핏하면 양반이랍시고 잘난 체하는 못된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한국인이 외국의 식당에 가서 한국에서 하는 버릇대로 종업원들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 XX 가져와. 빨리 가져오지 못해?" 그러자 지배인이 와서 떡 버티고 서더니 "나가십시오. 당신 같은 사람에겐 식사대접 안 합니다"하고 쫓아내더랍니다. 외국에 나가서까지 그런 망신을 당하다니, 참으로 창피한 일입니다. 여러분, 어디에서고 큰소리칠 자격 없습니다.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특별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 같은 죄인이요, 다같이 형편없는 인간입니다.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특별히 잘난 척하더니 그만 특별히 못난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자기가 얼마나 비겁하고 얼마나 나약하고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더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를 몰랐기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26:35)"하고 큰소리까지 쳤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비자(婢子)가 베드로를 보고 "너도 갈릴리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26:69)"하니까 아니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망신 중의 망신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26:34)"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렇습니까'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그저 '예수님이 나를 참 모르시는구먼. 나를 고작 그런 사람으로 보신단 말인가'라는 생각만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결과는 형편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시는 나, 다른 사람이 아는 나, 나 자신이 아는 나는 다릅니다. 나 위주로 나를 보기 때문에 불만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까지 왜 나를 몰라주시느냐고 원망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주님께서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낙향해 있는 베드로를 찾아 가셨습니다. 제자됨에 실패한 베드로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7)" 그제야 베드로는 자신을 깨닫고 제대로 대답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아시고 계십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비로소 제자가 된 것입니다. 나는 나를 모릅니다, 오직 주님께서 아십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내가 있을 뿐입니다---여기서부터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부활에 대하여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성찬식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십니다(26:26-28). 또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하고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못알아들었습니다. 말씀을 못알아듣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알아서 읽을 수 있어야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제자들은 말씀의 뜻을 몰랐습니다.

나름대로의 숨은 욕망과 자기 사랑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경고도, 말씀의 깊은 뜻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까지 다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지금은 너희들이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세속적인 인간이기에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 듣고 있지만, 장차 어려움을 다 겪고 자기를 부인하게 될 때에는 내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깨달을 수 있을 때에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게 와서 내 마음 사로잡을 때에 제자가 될 수 있고 권능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정신 못 차리고 쿨쿨 자기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돌아오셔서는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40)"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래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두 번째 기도하시고 다시 와보시니, 피곤한 모습으로 아예 널부러져 자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씀도 없으셨지만 침묵 속에도 분명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침묵의 뜻을 제자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 기도하시고 돌아오셔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고 쉬라." 풍자적이고도 체념 섞인 듯한 말씀입니다. 다 끝났으니 마음대로 쉬어라 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 저 어리석은 제자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는 자고 쉬라(45)"---기회는 이미 지나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시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기도해야 했는데, 기도 없이도 시험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반드시 기도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기도로써 응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라고 말씀하시고 산을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기도하시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한 십자가를, 하물며 제자가 기도 없이 어찌 같이 질 수 있겠습니까? 기도할 시간에 함께 기도하지 않고는 어려운 시험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두 나무꾼이 숲 속에서 하루종일 장작을 팼습니다. 한 사람은 쉬지 않고 하루종일 장작을 패고, 한 사람은 50분 일하고 10분 쉬고, 다시 50분 일하고 10분 쉬고, 이렇게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일을 하였습니다. 저녁이 되어 두 사람이 패놓은 장작이 각각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종일 일한 사람의 장작보다 쉬면서 일한 나무꾼의 장작이 더 많이 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약이 오른 나무꾼이 물었습니다. "나는 쉬지 않고 일하고, 자네는 쉬엄쉬엄 일했는데 어떻게 자네가 나보다 장작을 더 많이 팰 수 있었는가?" 쉬면서 일한 나무꾼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쉴 때에 도끼 날을 갈았거든." 여러분, 아무리 바빠도 기도는 쉴 생각 마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자동차는 주유소에 들러야 하듯이, 바쁘다고 해서 기도시간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드시 기도하여야 합니다. 위험한 때일수록 더욱 기도하고 바쁠수록 더욱 기도하여야 합니다. 실수하기 쉬운 인간이므로 더 많이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 없이 무엇이 되리라고는 착각하지 마십시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Lincoln, Abraham)은 전쟁터에 나가서도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시간에는 대통령이 있는 천막 문간에 흰 손수건을 걸어놓았습니다. 손수건이 걸려 있는 시간에는 아무리 급한 일도 여쭐 수가 없고 참모조차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답니다. 시간을 항상 정해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손수건을 걷은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기도가 절대 우선이요, 기도 시간은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른 기도생활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마땅히 예수님의 본을 따라 새벽에 기도하고 때마다 기도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와 함께 하는 생활만이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실패한 원인을 이것이다 저것이다 생각하지만, 그실 기도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할 줄 모릅니다. 기도하지 않은 것은 교만의 죄가 되고,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제자됨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기도하지 아니한 제자들은 이 명령에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나 자신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면서 주님 앞에서 성실하게 기도생활을 하십시다. 그리하고야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으며, 함께 고난을 당할 수 있으며,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됨을 잃은 제자(마태복음 26:36-4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교육에서 제자도(弟子道)를 강조하였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일생동안 많은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모름지기 스승을 잘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스승을 잘못 만나면 공부할 마음도 없어지고 학문을 멀리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됨을 포기하는 일마저 생깁니다. 어떻게 보면 내 쪽에서 스승을 택하는 것 같지마는 그실 훌륭한 스승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아주 큰복입니다.

둘째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을 만났어도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셋째로, 열심히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지식만 얻으려드는 제자는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스승의 생활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스승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절대 순종의 자세가 될 때에 비로소 훌륭한 사람,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직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스승 밑에서 3년 동안 나무를 베고, 3년 동안 물을 깊고, 3년 동안을 아무 말 없이 밥짓는 일만 하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10년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선생님, 한마디만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고, 스승을 향하여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비로소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지만 오늘날 우리가 더욱 새롭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열둘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스승을 택한 것이 아니고 스승이 제자를 택한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열두 제자에게 이렇다 할 무슨 자격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보통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스승인 예수님께서 친히 택하셨습니다. 물고기 잡는 현장에서, 심지어 세리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는 현장에서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택하심과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꾸준히 제자됨을 배우고 익혀나가고 다듬어지고 양육됩니다. 엎치락뒤치락 많은 실수도 되풀이하면서 예수님을 배움으로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으로도 가르치시고, 행위로도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정리해보면 그 삼분의 이가 열두 제자 앞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상대로 말씀하신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열두 제자를 똑바로 키워놓으신 것입니다. 3년 동안 가르치시고 제자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열두 제자를 키워나가시는 과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쓸모 없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쓸모 있는 사람들로 만드셨습니다. 마침내는 이 제자들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루어졌고, 오늘에 이르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까뮈(Camus, Albert)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나의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나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절망하게 된다 함입니다. 그러나, 쓸모 없는 자라도 쓸모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어쩌다가 '나는 쓸모 없다. 존재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면 그 때부터 이미 정신적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열두 제자의 '쓸모'는 예수님께서 부르심으로 있게 된 것이지 결코 그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내게 배우라. 나 있는 곳에 있으라.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하라.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는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제자로서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라고 당부하시고 보장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일 따름이었습니다. 절대적 충성입니다. 믿고 의지하고 위탁하고 따르라 하심입니다. 충성 하나를 요구하십니다. 다르게는 믿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작년에 중국을 여러 번 다녀왔었습니다. 한번은 씨안이라고 발음하기도 하는, 중국의 11대 왕조의 서울 서안(西安)을 방문하였습니다. 청나라, 진나라, 당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던 서안은 중국 지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그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에 참으로 경이로운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진시황의 무덤이었습니다. 얼마나 크던지, 무덤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납디다. 현재 이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데, 아직도 한쪽 구석만 발굴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림으로 많이 보시고 직접 가서 보신 분도 있겠지만, 그곳에 병마용(兵馬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병마용은 창이나 활을 들고 있는 군사입니다. 사람의 서 있는 모습 그대로 흙을 빚어서 구운 것입니다. 2천 년 동안을 고스란히 보존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지금은 시커멓게 보입니다만, 자세하게 보면 옛날에는 영롱하게 색칠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병마용의 얼굴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이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것만 하여도4천 개를 넘는다고 합니다. 사람의 크기와 똑같은 병마용이 수없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 가운데에 진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듣자하니, 원래 병마용은 왕을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왕이 죽을 때에 '왕과 함께 평생을 살겠습니다. 오로지 왕을 위하여 함께 죽어서 무덤 앞에 서 있겠습니다'라고 자진하여 맹세한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그렇게 결심한 사람들을 죽여서 몸에 흙을 바르고 구웠습니다. 새까만 숯덩이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속에 시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수백 명의 병마용을 과장하기 위하여 똑같은 모양으로 수천 개를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발굴된 것만도 4천 개라 하니 굉장한 일입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왕이 죽을 때에 함께 죽는 것입니다. 후궁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하들도 왕과 함께 있겠다고 병마용이 되어서 무덤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때의 광경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도덕적으로는 묻지 말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는 그 같은 충성도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순교를 하여야 제자입니다.

핍박이 가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순교도 하지 못하였다면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살아도 순교적으로 살아야 제자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열왕기하 22절로 6절에 보면 엘리야를 따르는 제자 엘리사의 간절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승천하려 할 때, 제자 엘리사는 엘리야를 쫓아갑니다.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결코 스승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서 따라갑니다. 이렇듯 스승을 배우고 따르며 함께 살고 함께 죽고--그러해야 진정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충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때에 제자됨에 실패했습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양옆에 강도 둘만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유감스럽습니다. 한쪽에는 강도가 있더라도 한쪽에는 베드로나 어느 제자 하나라도 함께 있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신학적으로 문제되었던 것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 홀로 십자가를 지셨느냐? 제자라는 사람들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요, 수제자라 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부인하고 도망갔으니,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에게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하며 메시야의 위상, 메시야의 메시야됨에 이의를 제기하게 됩니다. 시원치 않은 제자 둔 탓에 예수님께서 욕을 입으시는 셈입니다. 아무튼 당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부인하고 다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제자 됨에 실패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의 본문말씀은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베드로같이 자기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스승 앞에서 '난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저를 가르쳐주시고 인도하여주십시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제자는 늘 배우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따르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호언장담합니다. 심지어 주위 사람과 비교하여 잘난 척합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22:33)"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가장 잘난 척하던 베드로가 가장 못난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능력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가장 무능한 사람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헬라철학의 비조(鼻祖)라고 하는 탈레스(Tales)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자기를 아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남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무책임한 짓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보아하면, 잘난 척하는 사람들 참 많아요. 어떤 분은 제 앞에서도 실수합니다. "누구누구는 대학 다닐 때 별것 아니었는데 요새 보니 돈 좀 벌었다고 까불어요." 정작 본인도 별것 아니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배웠다고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별것 아닙니다. 많이 가졌다고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부끄러운 줄 아셔야 합니다. 가정에 화목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잘난 척하는 것 때문입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이 불편한 것도 남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낫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좀더 진실하게 나를 드러내고 인정하세요.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더 못나면 못났지 잘난 것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추호라도 자신을 귀족으로 여기지 말 것입니다.

예로부터 봉건주의 문화에 젖어온 탓으로 우리에게는 걸핏하면 양반이랍시고 잘난 체하는 못된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한국인이 외국의 식당에 가서 한국에서 하는 버릇대로 종업원들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 XX 가져와. 빨리 가져오지 못해?" 그러자 지배인이 와서 떡 버티고 서더니 "나가십시오. 당신 같은 사람에겐 식사대접 안 합니다"하고 쫓아내더랍니다. 외국에 나가서까지 그런 망신을 당하다니, 참으로 창피한 일입니다. 여러분, 어디에서고 큰소리칠 자격 없습니다.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특별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 같은 죄인이요, 다같이 형편없는 인간입니다.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특별히 잘난 척하더니 그만 특별히 못난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자기가 얼마나 비겁하고 얼마나 나약하고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더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를 몰랐기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26:35)"하고 큰소리까지 쳤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비자(婢子)가 베드로를 보고 "너도 갈릴리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26:69)"하니까 아니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망신 중의 망신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26:34)"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렇습니까'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그저 '예수님이 나를 참 모르시는구먼. 나를 고작 그런 사람으로 보신단 말인가'라는 생각만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결과는 형편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시는 나, 다른 사람이 아는 나, 나 자신이 아는 나는 다릅니다. 나 위주로 나를 보기 때문에 불만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까지 왜 나를 몰라주시느냐고 원망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주님께서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낙향해 있는 베드로를 찾아 가셨습니다. 제자됨에 실패한 베드로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7)" 그제야 베드로는 자신을 깨닫고 제대로 대답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아시고 계십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비로소 제자가 된 것입니다. 나는 나를 모릅니다, 오직 주님께서 아십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내가 있을 뿐입니다---여기서부터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부활에 대하여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성찬식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십니다(26:26-28). 또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하고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못알아들었습니다. 말씀을 못알아듣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알아서 읽을 수 있어야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제자들은 말씀의 뜻을 몰랐습니다.

나름대로의 숨은 욕망과 자기 사랑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경고도, 말씀의 깊은 뜻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까지 다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지금은 너희들이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세속적인 인간이기에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 듣고 있지만, 장차 어려움을 다 겪고 자기를 부인하게 될 때에는 내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깨달을 수 있을 때에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게 와서 내 마음 사로잡을 때에 제자가 될 수 있고 권능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정신 못 차리고 쿨쿨 자기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돌아오셔서는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40)"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래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두 번째 기도하시고 다시 와보시니, 피곤한 모습으로 아예 널부러져 자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씀도 없으셨지만 침묵 속에도 분명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침묵의 뜻을 제자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 기도하시고 돌아오셔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고 쉬라." 풍자적이고도 체념 섞인 듯한 말씀입니다. 다 끝났으니 마음대로 쉬어라 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 저 어리석은 제자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는 자고 쉬라(45)"---기회는 이미 지나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시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기도해야 했는데, 기도 없이도 시험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반드시 기도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기도로써 응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라고 말씀하시고 산을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기도하시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한 십자가를, 하물며 제자가 기도 없이 어찌 같이 질 수 있겠습니까? 기도할 시간에 함께 기도하지 않고는 어려운 시험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두 나무꾼이 숲 속에서 하루종일 장작을 팼습니다. 한 사람은 쉬지 않고 하루종일 장작을 패고, 한 사람은 50분 일하고 10분 쉬고, 다시 50분 일하고 10분 쉬고, 이렇게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일을 하였습니다. 저녁이 되어 두 사람이 패놓은 장작이 각각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종일 일한 사람의 장작보다 쉬면서 일한 나무꾼의 장작이 더 많이 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약이 오른 나무꾼이 물었습니다. "나는 쉬지 않고 일하고, 자네는 쉬엄쉬엄 일했는데 어떻게 자네가 나보다 장작을 더 많이 팰 수 있었는가?" 쉬면서 일한 나무꾼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쉴 때에 도끼 날을 갈았거든." 여러분, 아무리 바빠도 기도는 쉴 생각 마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자동차는 주유소에 들러야 하듯이, 바쁘다고 해서 기도시간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드시 기도하여야 합니다. 위험한 때일수록 더욱 기도하고 바쁠수록 더욱 기도하여야 합니다. 실수하기 쉬운 인간이므로 더 많이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 없이 무엇이 되리라고는 착각하지 마십시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Lincoln, Abraham)은 전쟁터에 나가서도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시간에는 대통령이 있는 천막 문간에 흰 손수건을 걸어놓았습니다. 손수건이 걸려 있는 시간에는 아무리 급한 일도 여쭐 수가 없고 참모조차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답니다. 시간을 항상 정해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손수건을 걷은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기도가 절대 우선이요, 기도 시간은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른 기도생활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마땅히 예수님의 본을 따라 새벽에 기도하고 때마다 기도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와 함께 하는 생활만이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실패한 원인을 이것이다 저것이다 생각하지만, 그실 기도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할 줄 모릅니다. 기도하지 않은 것은 교만의 죄가 되고,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제자됨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기도하지 아니한 제자들은 이 명령에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나 자신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면서 주님 앞에서 성실하게 기도생활을 하십시다. 그리하고야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으며, 함께 고난을 당할 수 있으며,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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