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부모를 공경하라(에베소서 6:1-4)
자녀들이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아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현대 윤리에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빨리 변하고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문화적인 것과 초문화적인 것을 구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변하는 것 속에서 불변하는 것을 찾고, 상대적인 것 속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아가야 합니다.
문화적인 것 속에서 초문화적인 요소를 찾는 것이 현대 윤리의 방향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 변하지 않는 도리, 변하지 않는 당연히 있어야 할 법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변하는 것입니까? 이 변화의 방향을 인도하는 자는 그 누구입니까? 왜 변하는 것입니까? 그 의미는 어디에 있으며 또한 이 변화 속에서 오늘이라고 하는 패턴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찾는 고민입니다.
이런 말씀을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잠깐 한 예만 들겠습니다.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변하는 것같이 느껴집니까? 먼저는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새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벌써 우리 눈앞에 왔습니다. 가정이 파괴되는 것도 이 때문이요.
부모 자식간의 의견이 충돌되는 것도 바로 이 개인주의 철학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평등주의입니다. 상하의 관계가 수평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없는 시대가 옵니다. 바로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종전에는 아내들이 남편을 누구에게 소개할 때 옆에 세워 놓고 "이 분이 제 주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종관계의 표현입니다.
요새는 "아빠"라고 합니다. "주인"이라고 하자니 주종관계 같아서 이것은 일단 타파해 놓고 그렇다고 해서 "친구"라고 하자니 아직 그러기에는 이르고 해서 어정쩡하게 "아빠"라고해 버립니다. 정말 아리송합니다. 왜 "주인"이라고 하던 말이 이렇게 들어가 버리고 말았느냐? 바로 이것도 수평 관계 때문입니다. 이제 머지 않아 "제 친구"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또 하나는 현실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생각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마음의 부담과 고민을 주기 때문입니다. 암담하기만 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현실주의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해지고 불안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실리주의입니다. 얼마나 사람마다 계산이 빠른지 모릅니다. 컴퓨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이득 계산하는 데는 컴퓨터 이상입니다. 누구하고 손을 쥐고 악수하는 때에도 이 사람하고 악수해 주면 얼마나 나에게 이로울까, 먼저 계산이 앞섭니다. 실리주의적인 시대가 되었고 또 계속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효" 라고 하는 것이 있을 곳이 없습니다. 개인주의, 평등주의, 실리주의, 현실주의, 이 속에 어디 효가 놓일 곳이 있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래서 어느 사회학자는 "효"란 군주 제도의 유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무서운 철학이 그대로 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간혹 모성애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도 모성에는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어렸을 때에 그 의미를 따릅니다. 어떤 때는 굉장히 강한 모성애가 동물의 세계에 있는 것을 압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사랑하니까 말입니다.
인간이 다른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동물은 새끼 때 사랑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호랑이도 제 새끼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조금 크면 물어버립니다. 새끼도 자기가 필요할 때에는 어미를 따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크면 떠나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동물입니다.
사람도 덜 된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 때는 그 아이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조금 크면 으르렁댑니다. 부자지간에 만나면 싸웁니다. 그것은 동물성입니다. 결국 인간의 인간 됨이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모를 공경하고, 또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높이 더 깊이 사랑하는 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 '옳다'는 말은 헬라 원문의 뜻에 따른다면 "옳다" "당연하다" "It is right." 즉 옳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일, 마땅한 일을 말합니다.
효는 선행도 공로도 아닙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간혹 신문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봅니다. 택시 운전사가 손님이 두고 내린 돈 얼마를 파출소에 맡겼다 하여 아주 착한 운전사라고 신문에 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착할 것 없습니다. 남의 돈 제가 안 쓰는 것이 당연하지 어찌 착한 일이 됩니까. 내 돈을 남에게 주어야 착한 일이지 남의 돈 내가 안 쓰는 것은 백번 당연할 뿐입니다. 그건 선행도 공로도 아닙니다. 이것이 선행처럼 신문에 나야 한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답답한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효라고 하는 것은 마땅한 선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인간이 못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 자세가 문제입니다.
무슨 큰 일이나 한 것처럼, 무슨 굉장한 선행이나 한 것처럼 효도를 생각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효는 말이 없습니다.
효자는 내가 효자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일뿐입니다.
효는 주는 사랑이 아니고 받는 사랑에 대한 마땅한 태도일 뿐입니다.
성경은 가르칩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 주 안에서, 신앙적 차원에서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느 조건이나 혹은 어느 한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고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은 우리 자신들을 위해 있고, 그 속에 깊은 사랑이 있고, 약속이 있고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주신 계명들입니다. 이제 이것을 믿고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향한 신앙적 순종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향한 사랑,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더욱 효도해야 합니다.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막살이 앞을 지나가는데 거기에 소녀 하나가 추운 겨울날에 문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서 있더랍니다. "왜 그렇게 서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가 나를 때리며 나가라고 내쫓아서 지금 문 밖에 서 있습니다" 하더랍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버지께서 잠든 다음에 들어가려고요."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잠든 다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고 새벽 일찍이 아침상을 준비해 가지고 아버지 방에 들어갔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때려서 내쫓았는데 너는 왜 오늘 집에 들어 왔으며 또 아침상을 차려서 가지고 오는 거냐? 이 못난 아버지가 밉지도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하더랍니다.
어째서일까요? 이 소녀의 말을 들어봅시다. "어머니가 세상 떠날 때에 내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기만 하면 저 모양이 된다마는 본심은 착한 사람이다. 언젠가는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런고로 너도 너의 아버지를 사랑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의 말씀이 참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그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아버지가 회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더욱 효도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이기적이고 실리적입니다만 효는 이득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초월하여 실리와 무관한 것이 효도입니다.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다만 받은 마음에서 감사하는 행위가 효도입니다. 내가 효도할 만한 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를 가려서 효도하는 것은 효가 아닙니다.
본문 성경에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 공경이란 또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 관계의 사랑이란 세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보다 못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영어로 mercy라고 합니다. 불쌍히 여긴다, 긍휼히 여긴다는 그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나와 같은 위치에서 수평으로 사랑하는 것을 친구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friendship, 곧 친교입니다. 그리고 나보다 상대방을 더 높이는 마음을 공경한다,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부모는 공경해야 됩니다. 늙은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도가 아닙니다. 효란 존경이 앞서야 합니다. 높이는 마음, 존경과 순종을 겸한 사랑이 공경입니다.
우리는 노인들의 지혜를 높여야 합니다. 그들은 깊은 지혜가 있습니다. 젊은이에게는 이상과 현실은 있으나 과거가 없습니다. 화려한 꽃은 있으나 뿌리가 없습니다. 지식은 많으나 지혜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지혜를 들어야 합니다. 그 지혜를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듣는 마음을 가지고 노인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 귀한 지혜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는 노련한 성장처럼 우리에게 귀중한 지혜를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들 생각에는 나만 가진 고통이요, 나만 가진 눈물이라고 울부짖지만 노인에게 물어보세요, 일찍이 그 같은 것을 다 겪어 왔습니다.
왜 내가 귀담아 듣지 않고 똑같은 체험을 또 해야 하고, 어리석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지혜자의 말을 듣지 아니한 결과입니다. 노인의 지혜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합니다. 한없이 주고 주고 또 주고 우리를 아쉬워합니다. 이것을 "내리 사랑"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자식이 어린아이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육십이 넘은 아들을 놓고도 "길조심 해라," "여자 조심해라" 그럽니다.
부모는 언제나 선합니다. 적어도 부모가 자식에게 행한 마음만은 선한 것입니다. 이 의로움을 높이높이 존경해야 합니다. 혹 그 방법은 마음에 안 든다 하더라도 그 중심은 여전히 귀한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은 지향적입니다. 먼 미래를 염려합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는 "고려장"이라는 못된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노인이 나이가 많아 쓸모 없어지면 깊은 산 속에 내다 버리고 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고려장을 지내려고 어머니를 지게에 걸머지고 깊은 산 속으로 올라가는데 어머니가 나뭇가지를 꺾습니다. 그 아들의 등에진 지게에 얹혀 가면서도 부지런히 계속 나뭇가지를 꺾고 나뭇잎을 흩어서 땅에 떨어뜨리며 갑니다. 아들은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자꾸 나뭇가지는 꺾습니까?" 어머니는 "산이 너무 깊어서 너 돌아갈 길 잃어버릴까봐 그런다." 그 아들은 회개하고 어머니를 다시 업고 내려왔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은 이제 이 세상을 이렇게 끝내도 자식만은 영원히 바로 되기를 바라고 그 미래를 염려하는 그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아버님이 십년동안 와병 중에 있었습니다. 장로님 부인은 어지러워진 것을 다 치워야 했습니다. 그 동안 한 번 일어나 앉지도 못했습니다. 가난한 살림을 꾸러 나가는 며느리로서 시아버지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저희가 보기에 딱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어느 장로님이 그 사모님에게 그만 이런 말을 해 버렸습니다. "아이고, 이제 시원하시겠습니다." 그러나 그 며느리 되는 분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제 누가 돌아가신 아버님처럼 나를 사랑해 주시겠습니까? 아버님은 누워 계시면서도 '내가 빨리 일어나서 저 며느리를 좀 돌보아 주어야겠는데'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효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첫 계명"이란 무슨 뜻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그 계명들보다 더 중요한 첫 계명이 "효도" 란 말입니다. 불효는 간음보다도 살인보다도 더 큰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효도에 가장 큰 축복이 약속되었는가 하면 가장 큰 죄도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노인네를 골방에 모셔놓고 밥그릇이나 들여놓는 것이 효도가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형통과 장수의 복이 있습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내 자식이 나에게 효도를 해 주지 않는다는 원망을 맙시다. 내가 부모에게 얼마나 효도했는가만 생각합시다.
나도 어떻게 효도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하면 효를 다할 수 있는가만 생각합시다. 효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순종하여 지혜를 얻읍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천륜은 불변합니다. 효는 여전히 당연한 도리입니다. 공경하여 축복을 받고, 이 효의 덕을 세워서 길이길이 아름다운 축복을 가정에 이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기도 : 자비하신 주님,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부모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효도하지 못하고 그 은혜에 보답지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결단이 있게 하시고,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며 가정가정마다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 하시며, 부모를 공경하여 지혜를 얻고 주의 거룩한 은총을 길이길이 이어가는 가정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부모를 공경하라(에베소서 6:1-4)
자녀들이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아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현대 윤리에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빨리 변하고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문화적인 것과 초문화적인 것을 구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변하는 것 속에서 불변하는 것을 찾고, 상대적인 것 속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아가야 합니다.
문화적인 것 속에서 초문화적인 요소를 찾는 것이 현대 윤리의 방향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 변하지 않는 도리, 변하지 않는 당연히 있어야 할 법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변하는 것입니까? 이 변화의 방향을 인도하는 자는 그 누구입니까? 왜 변하는 것입니까? 그 의미는 어디에 있으며 또한 이 변화 속에서 오늘이라고 하는 패턴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찾는 고민입니다.
이런 말씀을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잠깐 한 예만 들겠습니다.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변하는 것같이 느껴집니까? 먼저는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새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벌써 우리 눈앞에 왔습니다. 가정이 파괴되는 것도 이 때문이요.
부모 자식간의 의견이 충돌되는 것도 바로 이 개인주의 철학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평등주의입니다. 상하의 관계가 수평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없는 시대가 옵니다. 바로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종전에는 아내들이 남편을 누구에게 소개할 때 옆에 세워 놓고 "이 분이 제 주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종관계의 표현입니다.
요새는 "아빠"라고 합니다. "주인"이라고 하자니 주종관계 같아서 이것은 일단 타파해 놓고 그렇다고 해서 "친구"라고 하자니 아직 그러기에는 이르고 해서 어정쩡하게 "아빠"라고해 버립니다. 정말 아리송합니다. 왜 "주인"이라고 하던 말이 이렇게 들어가 버리고 말았느냐? 바로 이것도 수평 관계 때문입니다. 이제 머지 않아 "제 친구"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또 하나는 현실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생각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마음의 부담과 고민을 주기 때문입니다. 암담하기만 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현실주의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해지고 불안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실리주의입니다. 얼마나 사람마다 계산이 빠른지 모릅니다. 컴퓨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이득 계산하는 데는 컴퓨터 이상입니다. 누구하고 손을 쥐고 악수하는 때에도 이 사람하고 악수해 주면 얼마나 나에게 이로울까, 먼저 계산이 앞섭니다. 실리주의적인 시대가 되었고 또 계속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효" 라고 하는 것이 있을 곳이 없습니다. 개인주의, 평등주의, 실리주의, 현실주의, 이 속에 어디 효가 놓일 곳이 있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래서 어느 사회학자는 "효"란 군주 제도의 유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무서운 철학이 그대로 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간혹 모성애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도 모성에는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어렸을 때에 그 의미를 따릅니다. 어떤 때는 굉장히 강한 모성애가 동물의 세계에 있는 것을 압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사랑하니까 말입니다.
인간이 다른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동물은 새끼 때 사랑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호랑이도 제 새끼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조금 크면 물어버립니다. 새끼도 자기가 필요할 때에는 어미를 따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크면 떠나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동물입니다.
사람도 덜 된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 때는 그 아이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조금 크면 으르렁댑니다. 부자지간에 만나면 싸웁니다. 그것은 동물성입니다. 결국 인간의 인간 됨이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모를 공경하고, 또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높이 더 깊이 사랑하는 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 '옳다'는 말은 헬라 원문의 뜻에 따른다면 "옳다" "당연하다" "It is right." 즉 옳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일, 마땅한 일을 말합니다.
효는 선행도 공로도 아닙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간혹 신문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봅니다. 택시 운전사가 손님이 두고 내린 돈 얼마를 파출소에 맡겼다 하여 아주 착한 운전사라고 신문에 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착할 것 없습니다. 남의 돈 제가 안 쓰는 것이 당연하지 어찌 착한 일이 됩니까. 내 돈을 남에게 주어야 착한 일이지 남의 돈 내가 안 쓰는 것은 백번 당연할 뿐입니다. 그건 선행도 공로도 아닙니다. 이것이 선행처럼 신문에 나야 한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답답한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효라고 하는 것은 마땅한 선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인간이 못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 자세가 문제입니다.
무슨 큰 일이나 한 것처럼, 무슨 굉장한 선행이나 한 것처럼 효도를 생각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효는 말이 없습니다.
효자는 내가 효자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일뿐입니다.
효는 주는 사랑이 아니고 받는 사랑에 대한 마땅한 태도일 뿐입니다.
성경은 가르칩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 주 안에서, 신앙적 차원에서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느 조건이나 혹은 어느 한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고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은 우리 자신들을 위해 있고, 그 속에 깊은 사랑이 있고, 약속이 있고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주신 계명들입니다. 이제 이것을 믿고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향한 신앙적 순종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향한 사랑,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더욱 효도해야 합니다.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막살이 앞을 지나가는데 거기에 소녀 하나가 추운 겨울날에 문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서 있더랍니다. "왜 그렇게 서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가 나를 때리며 나가라고 내쫓아서 지금 문 밖에 서 있습니다" 하더랍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버지께서 잠든 다음에 들어가려고요."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잠든 다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고 새벽 일찍이 아침상을 준비해 가지고 아버지 방에 들어갔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때려서 내쫓았는데 너는 왜 오늘 집에 들어 왔으며 또 아침상을 차려서 가지고 오는 거냐? 이 못난 아버지가 밉지도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하더랍니다.
어째서일까요? 이 소녀의 말을 들어봅시다. "어머니가 세상 떠날 때에 내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기만 하면 저 모양이 된다마는 본심은 착한 사람이다. 언젠가는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런고로 너도 너의 아버지를 사랑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의 말씀이 참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그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아버지가 회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더욱 효도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이기적이고 실리적입니다만 효는 이득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초월하여 실리와 무관한 것이 효도입니다.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다만 받은 마음에서 감사하는 행위가 효도입니다. 내가 효도할 만한 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를 가려서 효도하는 것은 효가 아닙니다.
본문 성경에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 공경이란 또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 관계의 사랑이란 세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보다 못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영어로 mercy라고 합니다. 불쌍히 여긴다, 긍휼히 여긴다는 그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나와 같은 위치에서 수평으로 사랑하는 것을 친구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friendship, 곧 친교입니다. 그리고 나보다 상대방을 더 높이는 마음을 공경한다,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부모는 공경해야 됩니다. 늙은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도가 아닙니다. 효란 존경이 앞서야 합니다. 높이는 마음, 존경과 순종을 겸한 사랑이 공경입니다.
우리는 노인들의 지혜를 높여야 합니다. 그들은 깊은 지혜가 있습니다. 젊은이에게는 이상과 현실은 있으나 과거가 없습니다. 화려한 꽃은 있으나 뿌리가 없습니다. 지식은 많으나 지혜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지혜를 들어야 합니다. 그 지혜를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듣는 마음을 가지고 노인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 귀한 지혜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는 노련한 성장처럼 우리에게 귀중한 지혜를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들 생각에는 나만 가진 고통이요, 나만 가진 눈물이라고 울부짖지만 노인에게 물어보세요, 일찍이 그 같은 것을 다 겪어 왔습니다.
왜 내가 귀담아 듣지 않고 똑같은 체험을 또 해야 하고, 어리석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지혜자의 말을 듣지 아니한 결과입니다. 노인의 지혜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합니다. 한없이 주고 주고 또 주고 우리를 아쉬워합니다. 이것을 "내리 사랑"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자식이 어린아이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육십이 넘은 아들을 놓고도 "길조심 해라," "여자 조심해라" 그럽니다.
부모는 언제나 선합니다. 적어도 부모가 자식에게 행한 마음만은 선한 것입니다. 이 의로움을 높이높이 존경해야 합니다. 혹 그 방법은 마음에 안 든다 하더라도 그 중심은 여전히 귀한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은 지향적입니다. 먼 미래를 염려합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는 "고려장"이라는 못된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노인이 나이가 많아 쓸모 없어지면 깊은 산 속에 내다 버리고 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고려장을 지내려고 어머니를 지게에 걸머지고 깊은 산 속으로 올라가는데 어머니가 나뭇가지를 꺾습니다. 그 아들의 등에진 지게에 얹혀 가면서도 부지런히 계속 나뭇가지를 꺾고 나뭇잎을 흩어서 땅에 떨어뜨리며 갑니다. 아들은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자꾸 나뭇가지는 꺾습니까?" 어머니는 "산이 너무 깊어서 너 돌아갈 길 잃어버릴까봐 그런다." 그 아들은 회개하고 어머니를 다시 업고 내려왔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은 이제 이 세상을 이렇게 끝내도 자식만은 영원히 바로 되기를 바라고 그 미래를 염려하는 그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아버님이 십년동안 와병 중에 있었습니다. 장로님 부인은 어지러워진 것을 다 치워야 했습니다. 그 동안 한 번 일어나 앉지도 못했습니다. 가난한 살림을 꾸러 나가는 며느리로서 시아버지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저희가 보기에 딱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어느 장로님이 그 사모님에게 그만 이런 말을 해 버렸습니다. "아이고, 이제 시원하시겠습니다." 그러나 그 며느리 되는 분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제 누가 돌아가신 아버님처럼 나를 사랑해 주시겠습니까? 아버님은 누워 계시면서도 '내가 빨리 일어나서 저 며느리를 좀 돌보아 주어야겠는데'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효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첫 계명"이란 무슨 뜻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그 계명들보다 더 중요한 첫 계명이 "효도" 란 말입니다. 불효는 간음보다도 살인보다도 더 큰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효도에 가장 큰 축복이 약속되었는가 하면 가장 큰 죄도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노인네를 골방에 모셔놓고 밥그릇이나 들여놓는 것이 효도가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형통과 장수의 복이 있습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내 자식이 나에게 효도를 해 주지 않는다는 원망을 맙시다. 내가 부모에게 얼마나 효도했는가만 생각합시다.
나도 어떻게 효도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하면 효를 다할 수 있는가만 생각합시다. 효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순종하여 지혜를 얻읍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천륜은 불변합니다. 효는 여전히 당연한 도리입니다. 공경하여 축복을 받고, 이 효의 덕을 세워서 길이길이 아름다운 축복을 가정에 이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기도 : 자비하신 주님,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부모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효도하지 못하고 그 은혜에 보답지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결단이 있게 하시고,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며 가정가정마다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 하시며, 부모를 공경하여 지혜를 얻고 주의 거룩한 은총을 길이길이 이어가는 가정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때를 위한 신앙적 결단(에스더 4:10-17) (0) | 2023.02.12 |
---|---|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사도행전 1:6-14) (0) | 2023.02.12 |
은총에 사는 사람들(사무엘하 9:1-8) (0) | 2023.02.12 |
아브라함의 자손(누가복음 19:1-10) (0) | 2023.02.12 |
성령 행전(사도행전 11:12-18) (0) | 2023.0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