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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행전(사도행전 11:12-18)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내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 운동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싸운 대상은 둘이 있었다고 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로마 가톨릭 구교로부터 기독교를 개혁했다고 간단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성주의와 신비주의 두 가지 신앙 사상으로부터 종교 개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고로 그의 종교 개혁의 적수는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성주의요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입니다.
이성주의라 하면 그것은 스콜라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와 이성을 혼돈하며 인간이 세운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인간적인 생각을 의미합니다. 또 신비주의라고 하는 것은 신비하고도 다릅니다. 신비주의와 신비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표자로서는 문화사에 나오는 것으로 재세례파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소위 아나밥디스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신비의 체험에 집착해서 주관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또 하나의 인본주의입니다.
이렇게 볼 때 루터는 결국 이성주의라고 하는 인본주의와 또 신비주의라고 하는 인본주의 두 가지를 대상으로 해서 싸워 종교 개혁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이란 어느 시대에나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에게 개혁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본주의로 기우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 중심으로 혹은 원점으로 혹은 성서적 신앙에로 돌리는 이러한 수고와 이러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흘러가는 물위에 우리가 서 있다고 한다면 내가 아무리 제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아도 벌써 내 위치는 옮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이 세상, 이 사조, 이 흐르는 세대, 이 사상에 우리가 오염되고 있고 끌려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나도 모르게 인본주의로 혹은 세상적인 것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내 신앙을 개혁하면서 바른 신앙에로 우리의 생각을 돌려야 합니다. 계속적인 개혁적 신앙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성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는 계시보다 이성을 앞세웁니다. 신앙보다 지식에 기웁니다. 이것은 무서운 자유주의로 통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 체험을 소중히 여겨서 주관적 신앙으로 기우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감정을 계시화하고 자기의 신비 체험을 절대화하는 또 하나의 인본주의가 있고 자기 중심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제가 얼마동안 학장 일을 볼 때 이런 경험을 한 번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생전 처음 보는 분이 찾아와서 면회를 청하고 제게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계시를 주셨습니다. 목사님에게 가서 30만 원을 달라고 해라. 그런 계시를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꼭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거기 좀 앉아 계세요. 아무개가 올 테니 30만 원을 주라 하는 계시가 아직 내게 오지 않았으니까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습니다." 그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주관적인 것입니다. 자기 감정을 계시화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꾼 하나의 꿈을 성경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의 경험한 신앙적 조그마한 체험을 진리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 신앙에 빠져 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이성주의에 치우쳐서 지식과 윤리적 종교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도 불가합니다.
따라서 신비적 체험에 지나쳐서 객관성을 상실한 개인 감정이 계시가 되어 버리는 이러한 주관적 신앙도 불가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 중심이요 말씀 중심이요 성령의 감화에 중심을 둔 겸손하고 신앙적이고 순종하는 그러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은 사도행전 10장에서부터 연결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그 말씀처럼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이제 로마 사람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는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간단하게 생각되지만 옛날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선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선민이요 이 사람들, 이 로마 사람은 이방 사람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는 민족적인 원수입니다. 그것도 일반인이 아니고 군인입니다. 이런 로마 장교 군인의 집을 찾아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들과 얘기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근방을 지나가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엄격한 유대 선민의 생활 규례에 따라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갔을 뿐만 아니라 그 집에 유했고 음식을 대접받았고 예수의 복음을 전했고 그리고 모든 규례를 어기고 세례까지 베풀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까다로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의합니다. 사도행전 11:1-3까지 보면 어찌하여 베드로 당신은 우리 민족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했느냐, 규례에 어긋나는 일을 했느냐고 반박하고 나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가 변명하는 내용이 본문에 나옵니다. 이 변명하는 내용은 간단하지만 이것은 사도행전 전체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성령이 이와 같이 하셨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인간 자연인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한 것이다. 즉 사도행전이 아니라 성령 행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17절에 이렇게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셨는데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대항하겠느냐?"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단순한 변명이 아닙니다. 철학적이거나 합리적인 그런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의 사건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좀 무식한 사람이라서 철학적으로 변증적으로 설명할 만한 그런 재질이 부족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말이야 잘했든 못했든 사실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사실처럼 무서운 힘이 없고, 진실처럼 강한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사실에 대하여 진실하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 사건을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여섯 명과 함께 갔다고 그 숫자를 밝혔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해서 7명이 함께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함께 공동적으로 경험한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개인적 경험이 아닙니다. 어느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산에 올라가서 신비로운 경험을 하고 천사와 악수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듬뿍 듣고 내려 왔다는 이런 얘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느 개인의 종교 체험이나 명상이나 환상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사건이요 역사적인 사건이요 공동적으로 경험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처럼 분명하게 역사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다만 베드로는 고용되었을 뿐입니다. 성령이 시켜서 나는 순종했다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위대함이 있고 여기에 창조가 있는 것입니다. 전통과 세습을 따라 나가는 생명 없는 생활의 반복에는 아무런 발전도 없습니다. 이 생명적인 변화가 수천년 동안 내려오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을 깨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관심사는 이것뿐입니다. 좀더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합리적이냐 불합리한 것이냐, 이로우냐, 해로우냐, 도덕적이냐 아니면 도덕적이 되지 못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신다고 할 때에 우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노 커맨트(No Comment), 노 쵸이스(No Choice), 여기 하나님의 뜻이 있고 성령이 이 일을 이루신다고 하면 모든 관습과 규례와 협소한 민족주의와 모든 정욕, 내 좁은 의견을 그대로 다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성령이 내게 명령하셨다. 내게 명하셨다. 나는 다만 순종했을 뿐이다. 의심 말고 가라 하는데 누가 안 가겠느냐. 어찌 안 갈 수 있겠느냐?" 이것이 베드로의 확실한 대답입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기를"이라 했습니다. "말을 시작할 때에," 참 오묘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전체에 흐르는 문맥입니다. 말씀과 성령은 함께 합니다. 성령은 반드시 말씀이라고 하는 방편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성령은 홀로 역사해서 어떤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역사가 없습니다. 언제나 말씀과 함께 하신다고 하는 귀중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전할 때에 성령이 그 듣는 자들에게 감동하시더라고 사도행전 10:44에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어찌 할 수가 없었노라."
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말씀이 전해지며 성령이 감동하고, 이 말씀에 순종하고 구원의 역사가 이미 나타났는데 내가 어떻게 세례를 안 줄 수가 있느냐? 내가 어떻게 가부를 말할 수가 있느냐? 이것이 베드로의 용감한 대답입니다.
말씀과 성령은 동시적으로 역사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오셔서 육신을 입고 역사 하셨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이제는 영으로 오셔서 현존하여 계십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 역사 하십니다. 말씀과 함께 영으로 역사 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또 나아가서는 처음 우리에게 한 것 같이 하신지라, 오순절 교회에서 역사 하신 것처럼 고넬료의 가정에도 역사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 하신 성령의 역사가 이방 사람 로마 군인의 가정에도 역사 하셨습니다. 똑같이 2000년 후인 오늘 이 자리에서도 역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7절에 보면 더욱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같은 선물을 주셨다." 하나님의 이 구원의 역사는 똑같이 말씀과 성령으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마술적이거나 주술적인 역사가 아닙니다. 기계적인 역사도 아닙니다. 어떤 마술사가 사람을 세워 놓고 한번 '어이!' 하고 소리를 지를 때에 사람의 정신이 나가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혹은 주술적으로 역사해서 사람의 정신이 몽롱해진다는 그런 엑스타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와 인격적 관계로 역사합니다. 인격적으로 역사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세계를 받고 주의 사람이 된 사람들은 항상 인격적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중재적 역사를 분명히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당 밖에 나가서 어떤 사건에 부딪칠 때 들은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슬퍼할 수밖에 없을 때에 기뻐합니다. 사면초가로 포로된 상태에 있으나 내 심령은 무한히 자유합니다. 분명히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그 누구도 형용할 수 없는 그런 큰 기쁨과 희열을 맛보게 됩니다. 성령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성령이 나를 부릅니다. 내 마음 문을 엽니다. 나로 하여금 믿게 합니다.
여러분,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까? 내가 내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하는 동안 죄와 교만과 그리고 세상에 매여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절망의 노예가 되는 것을 압니다.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무저갱 같은 함정에 빠져 내려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제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에 내 마음을 붙들어 주시고, 나에게 가득한 말씀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담력을 얻게 됩니다. 용기도 지혜도 얻게 됩니다. 같은 성령의 선물 같은 은사로 역사 하십니다. 협소한 민족주의나 정욕이나 자기 중심적 욕망과 모든 교만을 깨끗이 제거해 주십니다. 마치 그 어떤 사람의 입맛이 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의지로 먹을 수 있고 안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 입맛이 확 변하는 데는 도리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마음의 성향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려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유대주의적 규례와 전통, 이런 것들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합리주의와 혹은 내 철학, 내 규례, 내 고집, 이런 것들은 내 스스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이것들을 다 타파해 버릴 때 비로소 내 것을 내 것이라 하는 자가 없더라 하시던 초대 교회에 나타났던 그 귀중한 은혜의 윤리가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부르시고 맞아 주시고 새롭게 하시고 확정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감사하게 합니다. 원수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모든 역경을 이기게 합니다.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감사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게 하고,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하던 스데반처럼 원수를 사랑하며 천사의 얼굴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옛날부터 사랑의 신비를 말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 할 때에 이것이 합리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치로 따져서 이로우니까 하는 등의 얘기는 사실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옛날 일입니다. 요새 말로 말해서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제가 너무 답답해서 "이 사람아, 이렇고 저렇고, 이거고 저거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랑해선 안 될 일뿐인데 왜 사랑하느냐?" 했더니, 그 처녀가 제게 설교를 합니다. "목사님은 사랑이 무엇인지 영 모르시는군요. 사랑이란 이렇다 저렇다, 불구자다 건강하다, 돈이 있다 없다, 결혼할 수 있다 못 한다, 이런 것 다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그래서 그 말만은 맞다고 그랬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합리주의적인 것입니까?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사랑을 말할 때에 다이아나 여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다 화살을 쏘아서 사랑에 미쳐 사랑하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옛날 우리 어른들은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인연, 전 생애에서부터 어떤 인연이 있어서 서로 만나서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합리적인 얘기입니다. 이건 어떤 체험에 의한 것도 아니고, 어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사랑에는 사랑 외의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이 사랑하게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누구나 원수를 사랑할 것입니까? 누가 나를 배신한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성령, 같은 은혜의 선물이 함께 할 때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한 성령 안에서 흑과 백이 없습니다. 동과 서가 없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없습니다.
같은 말씀과 같은 성령의 감화로 인하여 하나 되고 사랑의 줄로 묶여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8절에 보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규례에 맞지 않는 일을 베드로가 했다고 해서 여론이 분분했습니다.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이와 같이 하셨기에 나는 순종했노라 하는 말을 듣고 저들은 잠잠했습니다. 다시 아무 말 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서로 의견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고 세계관이 달랐습니다만, 성령 안에서 마음을 열고 다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고, 말씀의 능력이 성령과 함께 함을 알고, 그로 하여금 나를 온전히 순종하게 할 때에 크신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기도 :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에게 성령 감화를 계속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간구하옵는 것은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시고, 성령이 탄식하는 자리에 있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성령의 은사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시는 말씀과 성령에 순종함으로써 더욱더 충만하여 성령과 말씀의 열매로 사는 하나 되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담대하게 하시고, 지혜롭게 하시고 오직 성령에게 순종함으로써 주의 뜻을 이루는 자유함이 우리에게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령 행전(사도행전 11:12-18)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내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 운동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싸운 대상은 둘이 있었다고 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로마 가톨릭 구교로부터 기독교를 개혁했다고 간단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성주의와 신비주의 두 가지 신앙 사상으로부터 종교 개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고로 그의 종교 개혁의 적수는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성주의요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입니다.
이성주의라 하면 그것은 스콜라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와 이성을 혼돈하며 인간이 세운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인간적인 생각을 의미합니다. 또 신비주의라고 하는 것은 신비하고도 다릅니다. 신비주의와 신비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표자로서는 문화사에 나오는 것으로 재세례파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소위 아나밥디스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신비의 체험에 집착해서 주관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또 하나의 인본주의입니다.
이렇게 볼 때 루터는 결국 이성주의라고 하는 인본주의와 또 신비주의라고 하는 인본주의 두 가지를 대상으로 해서 싸워 종교 개혁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이란 어느 시대에나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에게 개혁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본주의로 기우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 중심으로 혹은 원점으로 혹은 성서적 신앙에로 돌리는 이러한 수고와 이러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흘러가는 물위에 우리가 서 있다고 한다면 내가 아무리 제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아도 벌써 내 위치는 옮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이 세상, 이 사조, 이 흐르는 세대, 이 사상에 우리가 오염되고 있고 끌려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나도 모르게 인본주의로 혹은 세상적인 것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내 신앙을 개혁하면서 바른 신앙에로 우리의 생각을 돌려야 합니다. 계속적인 개혁적 신앙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성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는 계시보다 이성을 앞세웁니다. 신앙보다 지식에 기웁니다. 이것은 무서운 자유주의로 통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 체험을 소중히 여겨서 주관적 신앙으로 기우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감정을 계시화하고 자기의 신비 체험을 절대화하는 또 하나의 인본주의가 있고 자기 중심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제가 얼마동안 학장 일을 볼 때 이런 경험을 한 번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생전 처음 보는 분이 찾아와서 면회를 청하고 제게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계시를 주셨습니다. 목사님에게 가서 30만 원을 달라고 해라. 그런 계시를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꼭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거기 좀 앉아 계세요. 아무개가 올 테니 30만 원을 주라 하는 계시가 아직 내게 오지 않았으니까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습니다." 그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주관적인 것입니다. 자기 감정을 계시화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꾼 하나의 꿈을 성경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의 경험한 신앙적 조그마한 체험을 진리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 신앙에 빠져 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이성주의에 치우쳐서 지식과 윤리적 종교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도 불가합니다.
따라서 신비적 체험에 지나쳐서 객관성을 상실한 개인 감정이 계시가 되어 버리는 이러한 주관적 신앙도 불가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 중심이요 말씀 중심이요 성령의 감화에 중심을 둔 겸손하고 신앙적이고 순종하는 그러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은 사도행전 10장에서부터 연결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그 말씀처럼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이제 로마 사람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는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간단하게 생각되지만 옛날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선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선민이요 이 사람들, 이 로마 사람은 이방 사람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는 민족적인 원수입니다. 그것도 일반인이 아니고 군인입니다. 이런 로마 장교 군인의 집을 찾아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들과 얘기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근방을 지나가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엄격한 유대 선민의 생활 규례에 따라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갔을 뿐만 아니라 그 집에 유했고 음식을 대접받았고 예수의 복음을 전했고 그리고 모든 규례를 어기고 세례까지 베풀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까다로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의합니다. 사도행전 11:1-3까지 보면 어찌하여 베드로 당신은 우리 민족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했느냐, 규례에 어긋나는 일을 했느냐고 반박하고 나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가 변명하는 내용이 본문에 나옵니다. 이 변명하는 내용은 간단하지만 이것은 사도행전 전체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성령이 이와 같이 하셨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인간 자연인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한 것이다. 즉 사도행전이 아니라 성령 행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17절에 이렇게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셨는데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대항하겠느냐?"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단순한 변명이 아닙니다. 철학적이거나 합리적인 그런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의 사건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좀 무식한 사람이라서 철학적으로 변증적으로 설명할 만한 그런 재질이 부족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말이야 잘했든 못했든 사실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사실처럼 무서운 힘이 없고, 진실처럼 강한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사실에 대하여 진실하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 사건을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여섯 명과 함께 갔다고 그 숫자를 밝혔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해서 7명이 함께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함께 공동적으로 경험한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개인적 경험이 아닙니다. 어느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산에 올라가서 신비로운 경험을 하고 천사와 악수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듬뿍 듣고 내려 왔다는 이런 얘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느 개인의 종교 체험이나 명상이나 환상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사건이요 역사적인 사건이요 공동적으로 경험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처럼 분명하게 역사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다만 베드로는 고용되었을 뿐입니다. 성령이 시켜서 나는 순종했다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위대함이 있고 여기에 창조가 있는 것입니다. 전통과 세습을 따라 나가는 생명 없는 생활의 반복에는 아무런 발전도 없습니다. 이 생명적인 변화가 수천년 동안 내려오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을 깨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관심사는 이것뿐입니다. 좀더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합리적이냐 불합리한 것이냐, 이로우냐, 해로우냐, 도덕적이냐 아니면 도덕적이 되지 못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신다고 할 때에 우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노 커맨트(No Comment), 노 쵸이스(No Choice), 여기 하나님의 뜻이 있고 성령이 이 일을 이루신다고 하면 모든 관습과 규례와 협소한 민족주의와 모든 정욕, 내 좁은 의견을 그대로 다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성령이 내게 명령하셨다. 내게 명하셨다. 나는 다만 순종했을 뿐이다. 의심 말고 가라 하는데 누가 안 가겠느냐. 어찌 안 갈 수 있겠느냐?" 이것이 베드로의 확실한 대답입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기를"이라 했습니다. "말을 시작할 때에," 참 오묘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전체에 흐르는 문맥입니다. 말씀과 성령은 함께 합니다. 성령은 반드시 말씀이라고 하는 방편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성령은 홀로 역사해서 어떤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역사가 없습니다. 언제나 말씀과 함께 하신다고 하는 귀중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전할 때에 성령이 그 듣는 자들에게 감동하시더라고 사도행전 10:44에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어찌 할 수가 없었노라."
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말씀이 전해지며 성령이 감동하고, 이 말씀에 순종하고 구원의 역사가 이미 나타났는데 내가 어떻게 세례를 안 줄 수가 있느냐? 내가 어떻게 가부를 말할 수가 있느냐? 이것이 베드로의 용감한 대답입니다.
말씀과 성령은 동시적으로 역사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오셔서 육신을 입고 역사 하셨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이제는 영으로 오셔서 현존하여 계십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 역사 하십니다. 말씀과 함께 영으로 역사 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또 나아가서는 처음 우리에게 한 것 같이 하신지라, 오순절 교회에서 역사 하신 것처럼 고넬료의 가정에도 역사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 하신 성령의 역사가 이방 사람 로마 군인의 가정에도 역사 하셨습니다. 똑같이 2000년 후인 오늘 이 자리에서도 역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7절에 보면 더욱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같은 선물을 주셨다." 하나님의 이 구원의 역사는 똑같이 말씀과 성령으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마술적이거나 주술적인 역사가 아닙니다. 기계적인 역사도 아닙니다. 어떤 마술사가 사람을 세워 놓고 한번 '어이!' 하고 소리를 지를 때에 사람의 정신이 나가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혹은 주술적으로 역사해서 사람의 정신이 몽롱해진다는 그런 엑스타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와 인격적 관계로 역사합니다. 인격적으로 역사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세계를 받고 주의 사람이 된 사람들은 항상 인격적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중재적 역사를 분명히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당 밖에 나가서 어떤 사건에 부딪칠 때 들은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슬퍼할 수밖에 없을 때에 기뻐합니다. 사면초가로 포로된 상태에 있으나 내 심령은 무한히 자유합니다. 분명히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그 누구도 형용할 수 없는 그런 큰 기쁨과 희열을 맛보게 됩니다. 성령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성령이 나를 부릅니다. 내 마음 문을 엽니다. 나로 하여금 믿게 합니다.
여러분,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까? 내가 내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하는 동안 죄와 교만과 그리고 세상에 매여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절망의 노예가 되는 것을 압니다.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무저갱 같은 함정에 빠져 내려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제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에 내 마음을 붙들어 주시고, 나에게 가득한 말씀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담력을 얻게 됩니다. 용기도 지혜도 얻게 됩니다. 같은 성령의 선물 같은 은사로 역사 하십니다. 협소한 민족주의나 정욕이나 자기 중심적 욕망과 모든 교만을 깨끗이 제거해 주십니다. 마치 그 어떤 사람의 입맛이 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의지로 먹을 수 있고 안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 입맛이 확 변하는 데는 도리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마음의 성향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려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유대주의적 규례와 전통, 이런 것들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합리주의와 혹은 내 철학, 내 규례, 내 고집, 이런 것들은 내 스스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이것들을 다 타파해 버릴 때 비로소 내 것을 내 것이라 하는 자가 없더라 하시던 초대 교회에 나타났던 그 귀중한 은혜의 윤리가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부르시고 맞아 주시고 새롭게 하시고 확정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감사하게 합니다. 원수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모든 역경을 이기게 합니다.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감사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게 하고,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하던 스데반처럼 원수를 사랑하며 천사의 얼굴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옛날부터 사랑의 신비를 말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 할 때에 이것이 합리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치로 따져서 이로우니까 하는 등의 얘기는 사실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옛날 일입니다. 요새 말로 말해서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제가 너무 답답해서 "이 사람아, 이렇고 저렇고, 이거고 저거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랑해선 안 될 일뿐인데 왜 사랑하느냐?" 했더니, 그 처녀가 제게 설교를 합니다. "목사님은 사랑이 무엇인지 영 모르시는군요. 사랑이란 이렇다 저렇다, 불구자다 건강하다, 돈이 있다 없다, 결혼할 수 있다 못 한다, 이런 것 다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그래서 그 말만은 맞다고 그랬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합리주의적인 것입니까?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사랑을 말할 때에 다이아나 여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다 화살을 쏘아서 사랑에 미쳐 사랑하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옛날 우리 어른들은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인연, 전 생애에서부터 어떤 인연이 있어서 서로 만나서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합리적인 얘기입니다. 이건 어떤 체험에 의한 것도 아니고, 어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사랑에는 사랑 외의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이 사랑하게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누구나 원수를 사랑할 것입니까? 누가 나를 배신한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성령, 같은 은혜의 선물이 함께 할 때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한 성령 안에서 흑과 백이 없습니다. 동과 서가 없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없습니다.
같은 말씀과 같은 성령의 감화로 인하여 하나 되고 사랑의 줄로 묶여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8절에 보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규례에 맞지 않는 일을 베드로가 했다고 해서 여론이 분분했습니다.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이와 같이 하셨기에 나는 순종했노라 하는 말을 듣고 저들은 잠잠했습니다. 다시 아무 말 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서로 의견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고 세계관이 달랐습니다만, 성령 안에서 마음을 열고 다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고, 말씀의 능력이 성령과 함께 함을 알고, 그로 하여금 나를 온전히 순종하게 할 때에 크신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기도 :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에게 성령 감화를 계속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간구하옵는 것은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시고, 성령이 탄식하는 자리에 있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성령의 은사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시는 말씀과 성령에 순종함으로써 더욱더 충만하여 성령과 말씀의 열매로 사는 하나 되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담대하게 하시고, 지혜롭게 하시고 오직 성령에게 순종함으로써 주의 뜻을 이루는 자유함이 우리에게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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