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혁명
서론
본론
청교도 혁명의 배경 및 시작
결론
청교도 혁명의 결과 및 의의
서론
영국에서 1640~60년 청교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최초의 시민혁명으로 이 과정에서 영국은 일시적으로 군주정치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되었다.
본론
1. 청교도 혁명의 배경
1) 영국 사회의 변화
영국에서는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으로 이득을 본 세력은 젠트리로 불리는 지방 계층들이었다. 그들은 자영농과 귀족사이의 중간 계급으로서, 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의회의 하원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한편, 도시에서는 상공업의 발달로 시민 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발달한 두 세력 중에는 농촌의 자영농과 함께 칼뱅의 신앙을 가진 청교도가 많았다. 그들은 국왕의 전제 정치와 국교회 강요 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왕권신수설이다.
2) 왕권신수설의 신봉
왕권신수설에 대해 제임스 1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다.
"신이 하는 일에 왈가왈부 하는 것은 무신론이자 신성모독인 것처럼, 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신하가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 역시 주제 넘는 짓이자 엄청난 모독이다."
즉, 왕권신수설은 왕권의 절대성을 옹호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국왕은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이며,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적이다. 또한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을 지고 신하는 오직 복종의 의무만 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은 한편으로는 신이 왕에게 굉장히 커다란 책임감을 준 것으로, 종종 왕이 그의 의무를 매우 신중하게 여기게 하도록 하였다. 문제는 새로운 왕이 의회적 전통이 강한 영국에 왕권신수설을 강요한데서 출발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이 왕권신수설을 강하게 믿었으며, 이를 신하들에게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의회는 반발하였다. 여기에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하는 것이 하나가 더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왕과 의회는 종교적으로 다른 믿음을 지닌 것이었다. 즉 왕은 영국 국교회를, 의회는 청교도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제임스 1세와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현명한 정치를 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정치는 억압적인 전제정치였다. 이는 의회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였다.
3) 전제정치의 강화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다음 왕위는 스튜어트 가문의 제임스 1세가 이어받았다. 제임스 1세(1603-1625)는 당시 영국의 입헌정치의 전통을 무시하고,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면서 전제정치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의회와 국왕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아들 찰스 1세(1625-1649)도 절대왕권을 고집하며 가톨릭을 옹호하여 의회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전제정치를 펼쳤던 것이다. 그는 중세부터 확립되어 온 입헌적 전통을 무시하였고,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징수하는 한편, 일부 귀족과 대상인에게 상업독점권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국왕의 통제 아래 있는 국교를 강제로 믿게 했다. 이에 대해 국민은 강한 불만을 가졌다. 귀족 대상인 등과 달리 도시의 중소상인과 수공업자, 농촌의 젠트리와 요맨 사이에는 국교를 기피하고 칼뱅파의 흐름인 청교주의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국왕과 늘 대립했다. 찰스 1세의 행동에 항의하여 의회는 권리 청원을 가결하였다. 왕은 마지못해 그것을 승인하였으나, 다음 해에 의회를 해산하고 그 후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11년간 찰스 1세는 이럭저럭 의회 없이 잘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영국 국교회의 교리를 스코틀랜드에게도 강제로 믿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에 영국 정치는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2. 청교도 혁명(Civil War)의 시작
1) 청교도 혁명의 시작
스코틀랜드는 영국 국교회가 아닌 청도교의 한 분파인 장로교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왕은 영국 국교회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에 스코틀랜드는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당황한 찰스 1세는 이를 막을 군대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는 군대가 없었다. 그리고 돈도 없었다. 할수 없이 왕은 11년 만에 의회를 다시 열 수 밖에 없었다. 왕과 의회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청교도 혁명의 시작이 된 것이다.
2) 청교도 혁명의 전개과정
스코틀랜드의 무장 봉기에 대처하기 위한 전비 마련을 이유로 찰스 1세는 11년만에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11년 동안 의회를 열지 않고, 왕이 독단적으로 정치를 하였던 것에 불만을 품은 의회는 왕의 정치 행동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왕을 지지하던 왕당파와 의회를 중심으로 왕을 비판하던 의회파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분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종교적으로 영국 국교회를 믿은 사람은 국왕을 추종하였다. 반면에 청교도들은 의회를 추종하였다. 이외에도 재정에 대해 왕이 재정권을 지녀야 한다는 사람들은 왕을 중심으로, 의회가 재정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은 의회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1642년 왕과 의회를 중심으로 갈라진 두 파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였다. 바로 이것이 청교도 혁명이다. 이 내분은 처음에는 왕당파가 유리하였다. 왜냐하면 왕당파에게는 전쟁에서 유리한 기병대가 있었으나, 의회파 에게는 그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의회파의 군대를 재조직하면서 전세는 차츰 뒤집혀졌다. 크롬웰은 신형군이라 불리는 규율이 잘 잡힌 기병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전쟁으로 승리로 이끌었다. 더구나 의회파는 종교적인 이유로 스코틀랜드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해상권 또한 장악하고 있어 해외원조를 받기에도 쉬웠다. 결국 왕당파와 의회파의 전쟁은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건을 청교도 혁명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왕의 전제정치에 맞선 의회파들 대부분이 청교도들이었기 때문이다.
3) 군대의 장악
전쟁에서 왕에게 대항한 의회파가 승리를 하였으나, 그들은 왕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회파는 곧 신앙의 미묘한 차이와 군인과 의원간의 차이 등으로 인해 장로파와 독립파로 분열되었다. 보통 장로파는 의원들이 많았으며, 독립파는 크롬웰 하의 군인들로 이루어 졌다. 분열이 일어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고 오히려 급료도 지불해주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의회는 결정하였다. 또 군인들과 의회는 모두 청교도 였으나, 둘간은 다른 종류의 청교도를 믿고 있었다. 군인들이 믿은 청교도는 더욱 퓨리탄적인 것이었는데, 의회는 군인들의 종교적 차이를 인정해 주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였다. 물론 이 외에도 권력에 대한 욕구 등도 작용하였다. 이에 군대와 의회는 함께 왕과 싸웠지만, 전쟁이 끝난 후 대립하게 되었다.
4) 크롬웰의 집권
이 분열을 틈타 국왕 찰스 1세는 다시 한번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왕은 또 다시 크롬웰이 이끈 군대에 의해 패하였다. 그리고나서 크롬웰 대부분 군인인 독립파를 이끌면서 의회 의원들인 장로파를 몰아내고 의회를 장악하였다. 이후 크롬웰과 독립파는 국왕인 찰스 1세를 전쟁의 책임을 물어 사형시키고, 영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크롬웰은 이후 장로파인 스코틀랜드와 왕당파 세력이 강한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항해조례를 제정하여 영국의 무역활동을 신장시켰다. 그러나 공화정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하고 호국경이 되어 금욕적인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당시 크롬웰의 정치권력은 사형을 당한 찰스 1세의 권력보다 더욱 강한 절대적 통치권이었다. 크롬웰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리처드가 호국경에 취임했으나 그는 재간이 없었고 국민의 불만은 이 이상 더 호국경 정치를 지속시킬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결론
1. 청교도 혁명의 결과
크롬웰이 죽자 영국 국민들은 그의 지나친 금욕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예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좀 더 여유 있는 삶, 즐거운 오락이 존재하는 삶을 원했던 것이다. 이에 찰스 1세의 아들로 프랑스로 망명가 있던 찰스 2세가 귀국하면서, 영국은 다시 왕정으로 돌아갔다.
2. 청교도 혁명의 의의
튜더왕조 이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귀족 계급을 잠식하면서 성장과 발전을 계속해 온 젠트리 계층을 주도로 하여 절대왕권의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의회를 중심으로 영국 고유의 전통적인 의정상의 자유와 종교적 자유를 확립하려는 혁명이었다.
왕정복고로 그 뜻의 달성은 일시 중단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명예혁명으로 그 뜻이 이루어지고 더군다나 당시 상황은 절대왕권이 더욱 그 기반을 굳히면서 전성기로 향하고 있던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청교도 혁명의 의의는 자못 다고 하겠다.
청교도 혁명에 있어 사회경제적 요인이 직접적으로는 크게 작용하지 않았고, 혁명 자체가 이 분야에서 달성한 것도 큰 것이 없으며, 젠트리나 부르즈와지가 다 같이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누어지기도 하였으나, 긴 안목에서 본다면 청교도혁명은 자본주의로의 발전을 위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의회파의 중심이 된 젠트리나 부르즈와지는 근대사회의 발전을 지향하는 진보적 세력이요, 계층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청교도혁명은 프랑스혁명과 같이 그렇게 선명하지는 않으나 넓은 의미로 시민혁명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혁명기간 중에 당시로서는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던 근대사회발전의 밑거름이 된 사회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이 힘차게 그리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청교도혁명은 근대사회와 민주주의가 싹트고 성장할 기름진 사상적 옥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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