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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행진을 계속합시다 (히11:39∼40)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웃나라 일본의 성자요 일본의 사도 바울이라고 불리우는 가가와 도요히코는 빈민 운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시 첩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게다가 그는 부모님 두 분을 일찍 여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15살이 되었을 때 그의 고향 고베를 떠나서 동경으로 무작정 올라왔습니다. 그는 어느 인쇄소에 취직을 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20대 초반에 폐병에 걸렸습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의사로부터 전연 희망이 없다며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그가 출석하던 교회의 성도들이 찾아와서 마지막 예배까지 드려 주었습니다. 성도들이 돌아가고 난 그날 그는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이 더 남자답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그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모든 희망이 사라져서 자살을 계획하고 있다. 만일 내가 믿는 예수님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도 자살을 생각하셨을까? 그렇지는 않겠지. 그러면 예수님은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러 오셨다고 했으니까 예수님은 분명 마지막 순간까지 섬길 자를 찾아가셨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는 자신의 자살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남은 날까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살리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빈민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자살을 계획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이제 나는 사선을 넘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사선을 넘어서." 이것은 훗날 그의 유명한 자서전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빈민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폐병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다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그곳으로 찾아 간 것입니다.
그는 빈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술주정뱅이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술주정뱅이는 그에게 돈을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빙긋이 웃으면서 달라는 대로 돈을 주었습니다. 그 술주정뱅이는 그 길로 술을 사 마셨습니다. 그러더니 돌아와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이 그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여보시오, 저런 몹쓸 인간에게 돈을 주는 것은 그를 돕는 것이 아니라오. 도리어 그를 깊은 죄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 된다오."
그때 가가와 도요히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사람들에게서 속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비로소 작은 사랑의 씨앗이 싹트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폐병으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유학도 했습니다. 돌아오고 난 뒤에도 그는 일생토록 빈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는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습니다. 그가 머물다 간 자리에도 작은 사랑의 씨앗들은 무수히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믿음으로 기적을 이루어 내며, 또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바꾼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어려운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으로 모든 역경을 다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자신이 바라던 것을 실상으로 얻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눈에 보이는 증거로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믿음의 역사가 그들에게만 국한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믿음의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 이라고 했듯이 "믿음으로 아무개는"하면서 우리도 이 믿음의 역사를 계속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선진들처럼 날마다 힘차게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본문의 말씀을 간단하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학식이나, 우리의 외모나 우리가 가진 재물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9절 상반부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이 사람들"은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구약 시대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증거를 받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히11:4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는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히11:5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여기에서의 증거는 영어로 approval, 곧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에 대한 case study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31절에 나오는 라합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기생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그는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부도덕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생 라합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옛날 유대 나라의 한 청년이 자신이 사랑하는 처녀와 약혼을 했습니다. 그는 장사를 떠나면서 자기 약혼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한바퀴 돌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돌아오겠소. 그때 가서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립시다."
두 사람은 행복한 가정을 꿈꾸면서 서로 다시 만날 것을 굳게 약속했습니다. 청년은 먼 도시에 도착해서 즉시 자기의 약혼녀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자기가 돈을 많이 벌어 꼭 돌아가서 행복한 가정을 꾸밀테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는 사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에 청년이 하던 일이 잘못 되어 버렸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을 다 날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약혼녀에게 면목이 없어서 편지도 쓰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청년은 10년 만에 겨우 재기를 했습니다. 청년이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그의 약혼녀는 그때까지 그를 변함 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약혼녀의 손을 잡고 감격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동안에 숱한 유혹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지금까지 10년 동안이나 참고 나를 기다려 주었소?"
그러자 그의 약혼녀는 빛 바랜 편지 한 장을 끄집어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10년 전에 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입니다. 여기에 분명히 당신은 꼭 돌아오겠다고 내게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당신의 약속을 믿고 위로를 받으면서 당신을 지금까지 기다려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과 믿음도 이토록 소중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서 그 약속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하십니다.
어떤 손님이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기사가 손님을 기다리면서 열심히 성경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손님은 기사에게 묻습니다.
"성경책을 왜 그렇게 열심히 봅니까?"
기사는 즉시 대답합니다.
"예, 저는 성경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손님이 또 묻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택시 기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믿음이야 간단하지요. 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대로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말씀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기대하면서 바라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한마디로 total acceptance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우리에게 역설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십시다. 믿음 위에 굳게 서십시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영화롭게 해 드리는 우리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보다도 더 나은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선진들은 대단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믿음의 자세가 그들보다도 더 나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9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받지 못했던 약속이 무엇입니까?
우선 33절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여기에서는 우리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9절에서는 그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33절의 약속은 복수형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관사가 없습니다. Promises, 곧 약속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주신 이런 저런 약속들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믿음으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칠일 동안 두루 돌아라. 그리하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리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칠일 동안 여리고 성을 두루 다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리고 성은 그들이 보는 눈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33절과는 달리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약속이라는 단어는 단수형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The promise, 곧 그 약속입니다.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받지 못한 그 특정한 한 가지 약속은 무엇입니까? 이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다 죽었습니다. 약속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믿음의 눈으로 멀리서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은 그 약속을 붙들고 핍박과 환난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에서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약속을 받지도 못하였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실 메시야가 아니라 이미 오신 메시야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그들보다 더 나은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16세기에 영국을 다스렸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인품과 덕망이 깊은 여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여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권 초기에는 내란이 있어서 다소 어려움이 겪기도 했습니다. 그때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한 여자 자객이 경비병처럼 남장으로 변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몰래 왕궁 속으로 잠입했습니다. 여왕을 암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사전에 발각이 되어 그 자객은 여왕을 암살하지 못하고 체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왕은 직접 그 여자 자객을 심문했습니다.
"너는 왜 나를 죽이려고 했느냐?"
이 여자 자객은 이미 여왕의 깊은 인품에 감화를 받고 난 뒤였습니다. 자기의 잘못된 것을 깊이 뉘우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못된 사람의 꾀임에 빠져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그러나 여왕 폐하의 자비로운 은총에 따라서 저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의 말대로 너를 살려준다면, 너는 그 대가로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자 그 여자 자객은 뜻밖에도 담담한 어조를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폐하, 조건이 있는 은총은 참된 은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왕은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한 끝에 여왕은 그 여자 자객을 석방시켰습니다. 그의 말대로 아무런 조건 없이 석방을 한 것입니다. 뒤에 그 여자 자객은 스스로 여왕의 몸종이 되었습니다. 그 여종만큼 신실하게 헌신하며 여왕을 잘 섬긴 사람은 없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무조건적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는 보혜사 성령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완성된 성경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하늘과 새 땅, 찬란한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핍박과 환난속에도 믿음을 굳세게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약속을 받은 우리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무조건적으로 받은 우리들은 당연히 그들보다 더 나은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는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합니다.
40절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보면 "우리"와 "저희"가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의 성도들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반면에 저희는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옛 언약의 백성입니다. 약속을 아직도 받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저들보다 나은 상황에 있습니다.
예컨대 구약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매번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야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 새 언약의 백성들인 우리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번에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멀리서 바라보면서도 자신들의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메시야에 관한 한 자기들이 바라던 것을 실상으로 얻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지 못하는 것을 증거로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이 바라는 것을 실상으로 얻었습니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증거로 얻었습니다. 말하자면 구약 성도들의 믿음이 우리들에게 와서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그들의 믿음보다도 훨씬 더 나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신구약 66권으로 이미 완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계속해서 기록되어지기를 바라는 성경이 두 곳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사도행전입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점차로 확장되어 나가는 내용을 기록한 성경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이 역사는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히브리서 11장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하듯이 "믿음으로 아무개는"하면서 우리 모두도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장을 기록하기에 앞서서 히10:37∼38에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히10:37∼38의 말씀입니다.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믿음에서 후퇴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언제나 힘차게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큰 부자가 살았습니다. 인심이 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거지들이 찾아와서 동냥을 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거지 아이가 밥을 얻어먹으러 왔는데 가만히 살펴 보니까 행색이 좀 특이합니다. 보통 거지 아이들은 깡통을 들고 다니는데, 그 아이에게는 깡통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다 낡아빠진 병풍 하나를 등에 걸머지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그 어린 거지를 집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에게 밥상을 차려 주고서, 부자는 그 아이의 이름은 무엇이며, 고향은 어디고, 아버지는 누구인가를 꼬치꼬치 물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아이의 아버지는 부자의 절친한 친구로서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음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깜짝 놀라면서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에게는 형들이 있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 하다가 너의 모양이 이처럼 되었느냐?"
아이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얼마 안 있어서 어머님도 돌아가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큰 형님 집에 머물렀습니다. 한동안 머물다 보니까 작은 형님 집으로 가라고 해서 쫓겨났습니다. 또 한동안 작은 형님 집에 있으니까 큰 형님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집 저집에서 쫓겨다니다가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또 부자가 물었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본시 큰 재산가였다. 많은 재산을 물려 주셨을 텐데, 너에게는 아무런 재산도 물려주시지 않았단 말이냐?"
아이는 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땅과 집은 형님들에게 다 물려주시고 제게는 이 낡은 병풍 하나만 유산으로 물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디를 가든지 이 낡은 병풍을 항상 제 몸에 꼭 붙들고 다닌답니다."
그 말을 들은 부자는 무언가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병풍을 내어놓으라고 해서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칼로 찢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속에서 땅문서가 나왔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대단히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막내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다가는 형들에게 빼앗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낡은 병풍 속에 땅문서를 감추어서 그 낡은 병풍을 막내아들에게 물려주었던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서 언젠가는 그 낡은 병풍 속을 들여다볼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이 낡은 병풍만을 내게 주셨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틀림없이 병풍 속을 들여다볼 날이 올 것이라고 아버지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 부자는 땅문서를 아이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후견인이 되어서 아이가 훌륭하게 잘 자라도록 키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때에 따라서 이런 저런 시련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시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할 날이 오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믿음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계속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돈독해지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행진을 날마다 계속하십시다.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실상으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증거로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기적을 일구어 내십시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바꾸십시다. 날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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