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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벌콥-인간론

by 【고동엽】 2009. 6. 4.

 

 
 

루이스 벌콥의 인간론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언제나 철학과 신학의 가장 난해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이 문제가 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악이 가진 힘은 크고 보편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삶 전반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일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늘 긴장감을 가지고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여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세상에 있는 도덕적인 악이 그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악이 삶 그 자체의 일부였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사물의 자연적 구조에서 찾았다.

 

 그러나 한편 어떤 학자들은 악은 자율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어서 현재나 과거를 막론하고 인간의 선택에 좌우된다고 생각했다. 이 관점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진리에 보다 가깝다.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신의 의지로 죄를 선택함으로 죄를 선택함으로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창 2:17; 롬 5:12). 그래서 우리가 짓는 모든 죄들은 공통된 근원 즉,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막 7:21-23). 이렇게 전적으로 타락된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고 모든 악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세상의 죄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으로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미 범법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현재주의자들은 죄를 단지 동료 인간들의 인권을 침해한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들은 죄가 빈번히 자신들의 반역하는 정신을 충동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죄의 개념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과 인간사이의 윤리적, 도덕적 관계로만 해석되고 있다.

 
이제 루이스 벌콥의 인간론을 중심으로 죄에 대해서 살펴보고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바른 개념과 역사적으로 대두되었던 인간론을 살펴봄을 통해 바른 인간관을 정립해 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성경적 죄의 개념

 
1) 죄는 악의 구체적인 형식이다.

 
모든 악이 죄는 아니다. 죄는 물리적인 악, 곧 어떤 해로운 것 또는 재난 등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죄는 악보다 구체적인 개념이다. 죄는 도덕적 악이다. 성경에서 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 대부분의 명칭은 윤리적인 의미를 가진다.

죄는 불시에 인간에게 덮쳐서 인간의 삶에 독을 주고 그의 행복을 파멸을 이끈 재난이 아니라, 인간이 의도적으로 따르기로 선택한 악의 길이요 미증유의 재난을 동반한 길이다. 근본적으로 죄는 우리가 책임을 질 수 없는 연약성, 실수, 불완전성과 같은 수동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이요 그의 율법을 적극적으로 범하는 것으로서 소위 죄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자유로운 그러나 악한 선택이다(창 3:1-6; 사48:8; 롬 1:18-32; 요일 3:4).

 

 2) 죄는 절대성을 갖는다.

 
윤리적인 범주에서 선과 악의 대비는 절대적이다. 선과 악 사이에 중립 지대는 없다. 선한 도덕적 존재는 단순히 자신의 선을 축소시킴으로써 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질적인 변화, 곧 죄로 향함으로써 악하게 되는 것이다. 죄는 선의 정도가 적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악을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행위에 의하여 악으로 규정된다. 성경은 어떤 형태의 중립성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옳은 편에 서든지 아니면 그릇된 편에 서든지 양자 택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마 10:32,33; 12:30; 눅 11:23; 약 2:10)

 
3)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다.

 
죄란 “하나님의 율법에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가장 중심적인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질적인 관점에서 도덕적 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도덕적 악은 그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요, 하나님에 반대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끊임없이 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롬 1:32; 2:12-14; 4:15; 약 2:9; 요일 3:4)

   
4) 죄는 죄책과 부패를 포함한다.

   
죄책은 율법 또는 도덕적 요구를 어긴 행위에 대해서 처벌 또는 정죄를 받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죄책은 인간 안에서 생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수여자가 법적으로 제정한 것이다. 죄책에 대한 형량을 정하는 것 역시 율법 수여자이다. 죄책은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직접 또는 대속적으로 충족시켜 줌으로써 제거된다. 많은 사람이 죄는 죄책을 포함한다는 견해를 부인하나, 이는 죄에 대해서 처벌이 뒤따를 것을 경고하는 현실적 상황과 부합되지 않으며, 성경의 평범한 진술과 어긋난다(마 6:12; 롬 3:19; 5:18; 엡 2:3).

 
부패는 모든 신자에게 생득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부패는 죄책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법적인 관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죄책은 직접적인 부패 없이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죄책에는 항상 부패가 따른다. 아담 안에서 죄책을 진 자는 결과적으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욥 14:4; 렘 17:9; 마7:15-20; 롬 8:5-8; 엡 4:17-19)


5) 죄는 마음속에 거한다.

죄는 혼의 어느 한 기관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거한다. 죄는 인간의 의지에 기원하지만 의지는 인간의 의지적인 본성 또는 의지적인 행위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실제적인 의지의 밑바닥에는 마음의 성향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잠 4:23; 렘 17:9; 마 15:19,20; 눅 6:45; 히 3:12)


6) 죄는 단순히 외적인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습관과 영혼의 죄악된 상태까지도 가리킨다. 죄악된 상태는 죄악된 습관의 기초가 되고, 이것들은 다시 죄악된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거듭되는 죄의 행위는 죄악된 관습을 낳는다. 자연인의 생각과 감정이 “육식적”인 것으로 불릴 수 있으며 동시에 죄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마 5:22,28; 롬 7:7; 갈 5:17,24등을 보면 알 수 있다.


2. 죄의 기원에 관한 성경적 근거


1)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로 간주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명백히 선언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죄를 만드신 자로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악도 불의도 행치 않으신다(욥 34:10). 그는 거룩하시다(사 6:3). 따라서 그의 안에는 불의가 없다(신32:4; 시 92:16). 그는 악에게 미혹될 수 없으며, 친히 아무도 시험을 하지 않으신다(약 1:13).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선하게 그리고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는 적극적으로 죄를 미워하신다(신 25:16; 시 5:4; 11:5; 슥 8:17; 눅 16:15).


이 모든 말씀을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이 죄를 만드신 자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사물의 본질 안에 이미 내재해 있는 하나님의 필연성으로 생각하는 결정론적인 견해를 거부해야 한다.


2) 죄는 천사의 세계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일군의 천사들을 창조하셨다. 이들이 창조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모두 선했었다(창 1:31). 그러나 천사의 세계에 타락이 있었고, 이때 일군의 천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천사들의 타락을 초래한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딤전 3:6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새로 입교한 자를 감독으로 세우지 말라고 권고하면서 그 권고의 이유를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가능한 추론은 천사를 타락시킨 것은 권능과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의 죄일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들의 욕망이 바로 그들이 특별히 받았던 시험이라면, 이 사실은 인간이 왜 이 점에서 그토록 크게 유혹을 받는가를 알 수 있다.


3) 인류 안에 있는 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은 아담이 낙원에서 범죄함과 더불어 죄기 시작되었다는 것이요, 따라서 죄는 인간의 고의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담이 단순히 하나의 죄를 범했다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최초의 죄로 인해서 아담은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죄는 영원한 부패를 동반했다. 이 부패는 인류의 연대성 때문에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그의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인류의 조상은 타락함으로써 그의 후손에게 부패한 본성을 물려주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으로서 범죄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후손의 대표적인 머리로서 범죄했다. 그러므로 그의 죄책도 후손들에게 전해짐으로써 모든 인류의 후손이 죽음의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롬 5:1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책을 짊어진 죄인이라고 판단하신다. 그것은 그 방법에 있어서 모든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판단받는 것과 같다(롬 5:18,19)

 
3. 인류의 삶에 나타난 죄


1) 원 죄


인간은 죄악된 상태와 조건 안에서 태어난다. 이 상태을 신학에서는 원죄라고 부른다. 원죄는 원초의 죄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죄책은 선천적으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전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인류의 원초적인 뿌리로부터 파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생명 안에 현존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모방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용어를 죄는 인간 본성의 원초적인 구성 요소에 속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죄인으로 창조하셨다는 생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주위해야 한다.

 

 
 
원죄는 자유의 상실 곧 자유 의지의 상실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말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자유를 상실했다. 그러나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를 상실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동인(動因)을 천부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곧 인간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지배적인 성향과 성품에 완전히 일치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부여되어 있다.

 

 
 
인간은 그가 책임적인 도덕적 행위자가 되는 데 필요한 구조적 기능들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이성, 양심, 그리고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에게는 지식을 획득하고 도덕적인 특징과 의무를 느끼고 인식하는 능력이 있으며, 그의 감정?성향 ? 행위는 자발적이어서, 자신에게 적절한 것을 선택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선하고 우호적이며 인애롭고, 정당한 것을 감득(感得)하고 행할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실질적인 자유를 상실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원초적이고 도덕적인 구조적 요소와 조화를 이루면서 최고선의 방향으로 진로를 결정할 수 있는 합리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억제하기 어려운 편견에 사로잡혀 악을 지향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인간에게는 영적인 탁월함을 인식하고 사랑하거나, 영적인 일들 곧 구원에 속한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고 행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2) 자범죄

 

 
 
원죄는 인간의 오염된 자질 또는 상태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책을 짊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내적인 부패가 모든 자범죄의 거룩하지 못한 원천이다.

 

 
 
‘자범죄(실제적 죄)’라는 용어는 몸을 통하여 행해진 외적인 행위들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원죄에서 유래하는 모든 의식적인 사유와 의지를 가리킨다. 그것은 인간의 선천적인 본성 및 경향과 구분되는 개별적인 죄의 행위를 가리킨다. 원죄는 하나요, 자범죄는 다양하다.

 

 
 
자범죄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의식적인 의심이나 악한 계획 또는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특별한 의식적인 욕망이나 탐욕 같은 내적인 자질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속임, 도둑질, 간음, 살인 등과 같은 외적인 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4. 죄의 형벌

 

 
 
1) 형벌의 본질과 목적

 

 
 
“형벌”이란 율법을 범함으로써 침범당하는 공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율법 수여자가 직접 ?간접적으로 가하는 고통 또는 손실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형벌은 하나님의 의 또는 형벌적 정의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거룩한 자로 주장하시며,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에게 필연적으로 거룩함과 의를 요구하신다. 형벌은 죄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가해지는 벌을 말한다.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공의에 기인하는 일종의 빚이다.

 

 
 
형벌의 목적은 거룩한 의도는 정의의 수호이다. 율법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서있다. 그러므로 형벌의 목적은 위대한 율법 수여자의 의와 거룩함의 수호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필연적으로 죄에 대항하며, 이와 같은 대항은 죄를 처벌하는 데서 그 모습이 드러난다(신 32:4; 욥 34:10,11; 시 62:12; 119:137; 렘 9:24; 벧전 1:17)

 

 
 
오늘날 전면에 크게 부각되고 있는 형벌의 목적은 죄인의 처벌을 가차없이 요구하는 형벌적 정의가 없으며, 하나님은 죄인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며, 죄인에게 역경을 주시는 것은 다만 그를 교화 시키고 그를 아버지의 집으로 돌이키게 하기 위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형벌이 교정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의로운 것으로 곧 정의에 입각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미 교정된 죄인은 더 이상 처벌될 수 없으며, 인간에게 교정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결국 사탄에게도 형벌이 있을 수 없으며, 사형이라는 형벌은 폐지되어야만 하고, 영원한 형벌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또 오늘날 보편화된 또 하나의 이론은 어떤 죄인이 범한 비슷한 죄를 다른 사람이 범하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사회를 보전하기 위하여 형벌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형벌을 가하실 때 자비롭게 뒤따르는 부수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죄인은 언제나 자기 죄 때문에 처벌되며, 이것이 부차적으로 사회를 유익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이론이 참되다면, 어떤 범법자가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그를 처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죄에서 돌이키게 할 수 없다면 그를 내보내야 한다. 더욱이 형벌을 기꺼이 견디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범죄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2) 죄에 대한 실제적인 형벌

 

 
 
성경은 죽음이 죄를 통하여 들어왔으며(롬 5:12),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롬 6:23) 말한다. 죄에 대한 형벌에 육체적인 죽음이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여기는 그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영적이 죽음이 있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킨다. 이 같은 분리는 죽음을 의미한다. 살아 계산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초래된 죽음의 상태 안에서 우리는 죄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죄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를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

 

 
 
둘째로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초대되는 삶의 고통도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가 된다. 죄는 인간의 삶 전체를 교란시킨다. 인간의 육신적인 삶은 연약성과 질병의 포로가 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불안과 쓰라린 고통이 초래된다. 그의 정신 생활도 그를 좌절하게 만드는 갖가지 방해거리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오늘날 홍수, 지진, 태풍, 화산 폭발등 이런 사건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읽지 않으며, 그 재난들이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같은 사건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재난들을 개별화 시켜서, 재난이 일어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범한 심각한 죄에 대한 특별한 형벌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늘에 서 불이 내려와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죄와 재난의 인과 관계를 무시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못 된다. 우리는 언제나 집단적인 책임 의식을 느껴야 하며, 하나님께서 어느 도시들, 구역들, 그리고 국가들을 재난으로 벌하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셋째로 육체적인 죽음이다. 몸과 영혼의 분리도 또한 죄의 형벌의 일부이다. 교회의 입장은 언제나, 육체적인 죽음을 포함하여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의 죽음은 죄의 결과인 동시에 죄의 형벌이라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창 3:19; 롬 5:12-21; 고전 15:12-23)

 

 
 
마지막으로 영원한 죽음이다. 이 죽음은 영적인 죽음의 절정이요,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속박이 제거되고 죄로 인한 부패가 완성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저주받은 인간에게 임한다. 인간이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다. 이것이 가장 두려운 의미에 있어서 죽음이다.

 

 
 
5. 교리사적 인간론

 

 
 
1) 교부시대의 인간론

 

 
 
(1) 헬라 교부들의 인간론

 

 
 
그들의 죄관과 은혜관에는 이원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사상보다는, 후년의 펠라기우스 사상에 더 가까운 교리들을 강조함으로써 마침내는, 교리상의 혼란을 빚게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윤리적인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성질 안에 도덕적 완전의 가능성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아담은 범죄할 수 있었으며, 또 범죄 했다. 그래서 그는 사단과 죽음과 죄악적 부패의 권세 아래 들어갔다.

 

 
 
그들은 이 물질적 부패는 인류 안에서 널리 만연 번식하였으나. 그 자체가 죄는 아니며, 또 그것 때문에 인류가 정죄받은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원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인류의 연대성을 인정하여, 인류와 아담과 물질적 관련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이 관계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것과 같은,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성경을 띤 관계일뿐, 하나님의 직접 창조인 인성의 고등한 이성적인 면에까지 미치는 그런 관계는 아니다. 그것은 의지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지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그 효력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죄는 항상 인간의 자유 선택에서 오며, 그것은 허약과 무지의 결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아들이 물질적 부패만을 유전받았기 때문 죄가 있다는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리겐은 일정한 유전적인 부패는 인간이 나면서부터 타고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고, 그 이유를 영혼의 출생전 타락에서 찾았다. 이것은 원죄 교리에 매우 가깝다.

 

 
 
헬라 교부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크게 중점을 두었다. 중생의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의지와 협력하여 인간 의지로 하여금 악에서 떠나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교부들은 자연인이 행할 수 있는 선과, 성령의 능력이 요구하는 선을 분명히 구별하지 못했다.

(2) 서방에서 점진적으로 나타난 다른 견해

 

 
 
터틀리안은 헬라 신학의 창조설 대신에 영혼 유전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기의 유전설과 실재설을 결부시켰는데. 이 실재설이란 하나님께서 육체와 영혼을 가진 보편적 인간성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생식에 의하여 개화하였다고 하는 이론이다. 이 과정에서 있어서도 본성은 그 특질을 잃지 않고 계속하여 모든 점에서, 또는 개인화하는 모든 점에서 이성적 책임적인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적인 인성의 죄는 모든 개개인의 본성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영아들은 죄가 없다고 말하였으나 아마 이것은 본죄가 없다는 상대적인 의미일 것이고,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최소한도까지 제한하기는 하였으나 합력적 중생론의 색채를 띤 언어를 가끔 사용하였는데, 이 설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중생에서 협력하여 일한다는 것이다.

 

 
 
키푸리아누스는 원죄의 죄책은 본죄의 죄책만큼 크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암브로스와 힐라리는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고, 그러므로 죄 속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인간 의지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지 아니하여, 결국 합력적 중생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2)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인간관

 

 
 
(1) 펠가기우스의 인간관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원상태는 거룩하지도 않고 죄성을 갖지도 않았으며,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중성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의지와 미정적 의지를 가졌는데, 이 양자 중 어느 것이라도 편의한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죄를 선택할 수 있었어도 이미 숙명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창조 되었기 때문에 죽음 문제만은 임의로 선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아담의 범죄 타락은, 자기 자신만을 해하였을 뿐,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본성에는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않았서 죄악적 성질이나, 죄책에 대한 유전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원죄와 같은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금도 아담의 타락 이전과 같은 상태로 출생한다고 하였다. 다만 인간과 아담의 차이는 인간이 자신 이전에 범죄한 악의 사례를 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는 어떤 경우이든지 인간 스스로 선택하여 이루어지며 어느 때에든지 선과 악을 자유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죄가 보편적이고 하면, 그것은 다만 그릇된 교육과 악한 전레, 또 죄에 젖어든 오랫동안의 습관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어거스틴의 인간관

 

 
 
어거스틴은 죄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는데, 이 죄는 필연적으로 악을 수반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죄는 인간에게 주어진 실질적인 악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죄의 근본원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자기를 사랑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인간 배반에서 오는 일반적 결과는, 음욕과 또 이성의 법칙에 반대되는 과도한 육적 욕망이며, 죄와 그 죄가 가져오는 무절제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간다고 하였다.

 

 
 
그는 아담이 후손과 유기적 관계에서 죄와 부패성을 가진 타락한 그의 본성을 후손들에게 전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인류의 단일성을 언약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실재론적으로 생학하였다. 온 인류는 아담 안에서 어린 싹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또한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다는 것이다.

 

 
 
죄의 결과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어떤 영적 선도 행할 수 없으나 의지가 아직도 일정한 본래적 자유를 지고 있어 세속적인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이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것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갱신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불가항력적 은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강제성을 띠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을 택할 수 있도록 그 의지를 변화시키신다는 의미이다.

 

 
 
(3) 반펠라기우스주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어거스틴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의 양극단 사이에서, 그 두 파 사이를 중재하고자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인간을 갱신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동등한 요소라고 하였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과 순종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다고 주장하므로 양파간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무익한 시도를 했다.

 

 
 
이들은 인간의 부패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그 인간 본성은 타락으로 인해서 치명적인 상처을 받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약화 되었거나 병든 것으로 보았다. 타락한 인성은 아직도 자유의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해준다는 것이다. 중생은 그 두 요인이 연합하여 산출한 것이며, 그러나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은 인간이요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였다.

 

 
 
3) 중세기의 인간론

 

 
 
(1) 그레고리의 인간론

 

 
 
그레고리는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인간의 허약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는 자유행위였으며, 이 행위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영적 맹목과 영적 사망의 노예가 되었고, 이 최초의 죄 때문에 인류는 모두 죄인이 되었고 정죄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죄를 죄책이라기보다는 허약과 질병으로 보았으며, 또 인간의 어떠한 공로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구속의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은혜는 인간이 실지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변화는 세례에서 시작되는데. 이 세례는 믿음을 만들어내고, 과거의 죄에 대한 죄책도 말살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지는 다시 새로워지고,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여지며,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만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은혜의 불가항력성을 말하고, 또 예정을 확실한 수의 선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계획이라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예정은 결국 예지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일정수의 사람들을 구원받데 하

 

 
 
신 것은, 그들이 장차 복음을 받으리라는 것을 아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의 선택이나 타인의 선택을 확실히 알 수는 없다고 하였다.

 

 
 
(2) ?쇌크파 논쟁

 

 
 
그는 어거스틴의 선택 교리를 통해서 얻은 구원받은 자와 멸망자의 예정을 말하는 이중예정성를 열렬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을 구속하시고 거룩하게 만드는 그런 정도로 제한 시켰고, 또 죄를 허용적 작정의 대상으로만 보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정은 죄를 확실케 한다).

 

 
 
그는 예지에 기초를 둔 예정성를 부인하였다. 왜냐하면 이 설은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예지는 단순히 예정에 따르며, 또 예정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 뿐이라고 하였다.

 

 
 
그의 교리는 하나님을 죄의 조작자로 만들었다고 비난 받았다. 그의 교리는 A.D. 848년에 메이언스에서 정죄 받고, 그 다음 해는 그 자신이 고형(苦刑)을 받고, 일생동안 금고의 생활을 하였다. 그 결과 논쟁이 계속 일어나게 되었는데, 프루덴티우스, 라트람누스, 레미기우스와 그 외 몇몇 유력한 신학자들은 어거스틴파처럼 이중예정설을 옹호하였고, 한편 라바누스, 라임스의 힌크말은 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논쟁은 결국 언어에 대한 싸움에 불과하였다. 이 교리의 옹호자나 반대자도 그 중심에 있어서는 반 어거스틴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동일한 사상을 다르게 표현하였을 뿐이다. 전자는 어거스틴처럼 이중예정을 말하였으나, 유기의 기초를 예지에다 두었으며, 후자는 “예정”이라는 말을 생명의 선택에만 적용하고, 유기의 기초를 선견에다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 같이 성례적 은혜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면서도, 엄격한 예정설이 성례의 영적 가치를 빼앗아, 그것들을 단순한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지 않을까 두려워 하였다.

 

 
 
치얼시 회의와 발레스 회의(A.D 853년)의 결정은 위의 두 견해들과 전적으로 조화되었는데, 전자는 반대자의 견해를 후자는 옹호하는 자들의 입장을 각각 재생하였다.

 

 
 
(3) 안?의 인간론

 

 
 
a. 안?의 죄관

안?은 원죄의 교리를 강조하였으나 그 “원”(orignal)이라는 말은 인류의 기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태에 있는 개인의 기원을 의미한다고 역설했다. 비록 원죄는 인간이 본래 타고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창조된 후에 인간에게 들어온 한 상태라고 하지만 그것은 또한 본래적 죄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유죄하고 부패하여졌으며, 그 죄책과 오염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유전되어진다고 하였다. 원죄와 본죄의 모든 죄는 죄책을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죄가 자유에서 나온 행위라고 가정하면 어떻게 유아들이 죄가 있고, 그들의 사죄를 위해 유아세례을 베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해답을 인간 본성이 창조 이후에 변절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그는 어거스틴처럼 어린아이들은, 아담이 가졌던 보편적 인간성의 개체화된 부분들로 보고, 그러므로 그들도 아담 안에서 실제적으로 범죄하고, 유죄하며 부패하였다고 보았다.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성은 악변하지 않았을 것이며, 성성(聖性)이 그대로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죄는, 그 기원을 본성의 죄에다 두고 한편 본죄는 성질상 전혀 개체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안?은 가까운 선조들의 죄도, 인류의 첫 조상의 죄처럼, 그 후손에게 전가되는가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여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죄들은 아담 안에 있는 공통적인 성질에 범한 것이 아닌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죄는 독특하였으며 그것과 결코 같은 죄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전 인류를 대표한 한 개인의 범죄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 사상은 그 후에 범한 모든 죄들이 비록 개별적인 것이라도, 똑같은 인간 본성에 의하여 범하여지기 때문에 이며, 또 왜 아담의 최초의 죄만이 후손에게 전가되고, 그 후의 죄는 전가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못하였다.

 

 
 
그는 아담에 있어서 본성의 죄책 즉 원죄는 개인의 죄책에 머무르나, 그 후손에 있어서는 개인의 죄책이 본성의 죄책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주의시켰다. 아담의 인격 안에서 전 인류는 시험을 받았다고 하여 그가 후대의 언약관념에 접근하였다고 하겠다.

 

 
 
b. 안?의 자유의지관

 

 
 
그는 자유를 범죄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어떤 힘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타당치 않다고 선언하였다.

 

 
 
안?은 인류 조상의 행위는 분명히 자발적이며, 순수한 자의지의 행위였으나, 진정한 자유의 행위는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들이 범죄한 것은 자유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분명 자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의 가능성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행동하려는 힘은, 그들의 자유에 아무것도 가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유가 없이도 임의로 거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참 자유와 자발적 능력 자체를 구별하였다. 전자는 상실되었으나, 후자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의지의 참 목적과 목표는 선악간에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선을 택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자발적 능력은 하나님께서 다만 의를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셨을 뿐, 결코 다른 것을 위해 주신 것은 아니며 그것의 참된 자유는 성(聖)을 스스로 결정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하나의 대상, 즉 성(거룩함)만을 택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이 목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반드시 자결정이어야 하며 어떤 외부적인 강요에 의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악을 택하는 능력이 시련을 목적으로 하여 주어졌을 때 그것은 완전한 참된 자유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리에 맞지 않는 선택의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4) 로마교회의 인간론

 

 
 
로마 캐톨릭은 반어거스틴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 사상를 가졌다. 그 중에서도 후자가 점진적으로 세력을 얻었다.

 

 
 
원시적 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은혜라는 생각이 점점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에 따르면 본래 인간은 육신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두 이질적인 상반되는 성질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서 때때로 선행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이 본성의 원시적인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은사 즉, 원시적 의를 주셨다. 이 본래적인 의는 적극적인 의도 적극적인 불의도 없이 창조된 인간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선물이라는 것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인간은 이 원시적인 의를 상실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어떤 자연적인 천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과는 별 상관이 없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죄악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룩한 상태도 아닌 중립적인 상태로 돌아왔으나, 성질의 구조상 육신과 영혼은 서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그의 모든 후손들의 대표자가 되었으므로 인류는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고 원죄를 짊어지고 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원죄가 어떤 적극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뭔가 꼭 있어야 할 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특히 그것을 원시적 공의의 결여라고 말하였다. 이 죄는 인류 조상에게서부터 나온 것으로 보편적이요, 자원적인 것이다. 그것은 현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현세욕이나, 악한 욕망, 정욕들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정당한 의미의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 캐톨릭 교회는 인간의 영적 무능력과 또 갱신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야 한다는 관념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이 영적으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는 협력 중생논을 채택하였다.

 

 
 
4) 종교개혁기의 인간론

 

 
 
(1) 개혁자들의 인간론

 

 
 
종교 개혁자들은 실재설을 대신하여 언약설을 주장하여 아담의 죄와 그 후손의 죄와의 관계를 더 명백히 정의 하였다. 베자는 아담이 인류의 자연적인 시조일뿐 아니라 언약적 대표였으며 따라서 그의 최초의 범죄는 그의 모든 후손에게 죄책으로 전가된다고 하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유죄하기 때문에 또한 부패한 상태에서 출생되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로마 캐톨릭을 반대하여 원죄는 단순한 원시적 공의의 결핍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과, 또 죄로 향하는 그 최초의 단계들로 비록 그것들이 의지의 동의를 받기 전에라도 현실적으로 죄요, 다만 죄가 되게 하는 연료뿐만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것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있게 하고 정죄받게 하는 내재적 죄들이다. 일반적으로 칼빈과 개혁자들은 원죄란 인성의 유전적인 패괘요 부패로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하며, 육신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개혁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유력했던 견해는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져서, 어떠한 영적 선도 행할 수 없으며,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회복을 위해 최소한의 전진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쯔빙글리도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견해였으나, 원죄를 정당한 의미의 죄라기 보다는, 오히려 질병이나 한 상태로 보는 듯하였다. 멜랑톤도 처음에는 생각을 같이 했으나 나중에는 그의 견해를 수정하였다.

 

 
 
개혁자들은 전적 부패의 교리를 주장하면서도, 한편 중생하지 못한 자라도 사회적인 대인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세속적인 의는 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적 부패의 교리는 자연히 인간의 갱신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에 귀결된다. 하지만 멜랑톤은 처음에는 루터와 완전히 견해를 같이 했으나, 의지의 속박 교리를 강하게 반대하는 점에서 의지에는 얼마쯤은 구체적인 자유와 영적 자유가 있다 하여 합력중생론을 주장하였다.

 

 
 
개혁자들은 엄격한 예정론자였고 루터도 칼빈 처럼 이중예정을 믿었으나 때로는 유기의 교리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거나 혹은 그것을 하나님의 예지에 의존케 하기도 했다. 쯔빙글리는 유기를 효과적 작정이라 주장하였고 멜랑톤은 이 문제에 대해 죄와 중생에서처럼 확고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가능한 예정의문제를 피하려 했다.

 

 
 
종교개혁 이후 아담은 인류의 자연적 머리일 뿐만 아니라, 언약적 머리, 다시 말해서 그의 모든 후손의 도덕적 및 법적 대표자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그결과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문자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범죄하였다는 관념은 그들이 대표적으로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다는 사상에 양보하였다.

 

 
 
(2) 소씨니안파의 입장

 

 
 
이들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급 피조물을 지배하는 인간의 단순한 주도권일 뿐이요, 어떤 도덕적 완전성이나, 성질의 우월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아담은 적극적인 의나 거룩함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죄의 결과를 그것을 상실할 수가 없었다.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으나, 그의 도덕적인 성질은 해를 입지 않은 채 그 후손에게 전달되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이 아니고 가사적(可死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담과 같은 상태이나 그들이 보고 듣는 죄의 실례 때문에 다소 더 나쁜 환경 속에 처하게 되었다. 이 환경은 사람들에게 죄로 떨어지는 기회를 더하게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죄를 전적으로 피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어떤 이들은 피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실 뿐만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유죄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진노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데 구주나 혹은 하나님의 어떤 비상한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3) 쏘우물 학퍄의 입장

 

 
 
쏘우물 학파의 아미랄두스는 보편적 및 조건적인 작정과 제한적 및 무조건적인 작정을 구별하였다. 전자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하여 신앙을 조건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보편적 구원을 주기로 작정하셨고, 후자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을 아신 때문에 얼마를 영생하도록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신앙과 회개의 필요한 은혜를 주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또 폴라카에우스는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직접 전가된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인간은 유죄하여, 그것 때문에 부패한 상태로 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성질의 부패를 받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죄책으로 인간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간접적 및 결과적 전가)

 

 
 
5) 종교개혁 후기의 인간론

 

 
 
(1) 웨슬레파 알미안주의

 

 
 
원죄는 엄밀한 의미에서 죄라고 불리울 수 없는 성질의 질병이나 부패가 아니라, 참으로 진정한 죄이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유죄되게 하는 것이라고 그들을 주장하였다. 아담의 죄책은 참으로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원시적 죄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됨으로 말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은혜와 합력할만한 아무런 능력도 없으며, 인간은 전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여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보편적인 취지에서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능력있는 은혜를 주셨으므로, 인간은 신앙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알미안파들과 달리 그들은 인간이 믿고 회개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거저 주시는 은혜라고 보았다.

 

 
 
2) 뉴 잉글랜드에 있어서의 개혁파 견해의 수정

 

 
 
죠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인간의 타락과의 관계에서 효능의 항목을 제거하고 통상적인 칼빈주의적 어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 중 어떤 이들은 인간이 범죄하는 데는 신적 효능이 분명히 있다고 암시하였다.

 

 
 
후대에 티모디 뜨와이트와 테일러와 같은 인사를 대표로 한 뉴 잉글랜드 신학, 혹은 뉴 헤이븐 신학에서는 죄가 세상의 최저 가능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들어오는데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되어 있다고 하는 강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도덕적 우주를 창조하려는 결정에는 필연적으로 정반대의 것을 선택하려는 힘을 가진 자유로운 도덕적 동인의 창조를 내포하였으며, 그렇게 때문에 죄가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거의 확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듯 하다. 동시에 죄는 가장 좋은 조직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죠나단 에드워즈는 의지의 결정적 성경을 좀 지나치게 강조하여 결정론자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인간은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셨을 때부터 도덕적 자유를 가졌으며, 현재도 가지고 있다. 죄악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은 인간이 이 자유를 행사함에서부터 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참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 인간의 의지는 본성의 원시적 구조에 의하여 선과 성의 방향으로 결정 되었다고 한다. 이 참자유는 죄로 인하여 상실 되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뉴 잉글랜드 신학자들은 자유와 책임을 가진 도덕적 존재에는 정반대의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갖는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에드워즈는 실재설을 채용하였다. 나무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우리는 아담과 밀접하게 상관되어 있으며, 그 결과로 아담의 죄는 우리의 죄이고, 마찬가지로 그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하였다. 우즈나 타일러 같은 뉴 잉글랜드 신학자들은 폴라카에우스파의 간접적 전가설을 옹호하였다. 인간은 아담과의 자연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에게서 도덕적 부패를 이어받고 이것이 죄책으로 그에게 전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죄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3) 현대의 죄관

 

 
 
a. 철학적 죄관

 

 
 
라이쁘닛츠는 세상의 악을 윤리적인 것보다는 형이 상학적인 것으로 보고, 피조물의 필요한 제한에서 생긴, 단순하고도 자연적인 결과로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존의 세계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 안에 죄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을 원인자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부정 또는 결여라고 보아야 한다. 죄에 대하여 어떤 유효한 원인도 상정할 필요가 없다.

 

 
 
피조물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죄는 불가피하다. 이 이론에서 죄는 필요 악이 된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필연적으로 유한한 존재요, 죄는 이같은 유한성의 불가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원인자로 만들지 않으려는 이 이론의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왜냐하면 죄가 어떤 유효한 원인도 요구하지 않는 단순한 부정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의 유한성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이론은 도덕적 악과 육체적 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이론이 죄를 인간에게 임한 하나의 불행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이론은 악과 죄의 부패에 대한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킴으로써 죄 의식을 파괴하고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박탈해 간다.

 

 
 
칸트는 인간 속에 인간으로서는 근절할 수 없는 근본적인 악에의 성향, 즉 근본악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였다. 그는 이 근본악을 일반적으로 원죄라고 부르는 어떤 것과 동일시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원죄의 역사적 근거와 물질적 유전의 관념을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죄라는 것이 설명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헤겔은 죄를 자의식적 정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발전과정에 필요한 한 단계로 보았다. 인간의 원시적 상태는 천진난만한 무죄의 상태, 곧 짐승과 거의 같은 상태였으며, 이 상태에서 인간은 선과 악을 모르고, 단순히 자연과 일치하여 존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동물들에게는 자연적일 수 있으나, 인간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고, 비이상적이었다. 인간은 이런 상태에서 떠나, 자의식적 정신을 가져야 하도록 운명지어졌다. 이런 자연적인 상태에서 도덕적인 상태로 옮겨지게 된 것은 지식에 의함이었다.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 인간은 축복의 낙원에서 쫓겨났다. 자의식적 생명을 깨달음과, 자아의식이 시작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의 자연적인 욕망을 따르기 시작하였으며, 이 새로 발견된 자아가 이것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이기적이고 악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간이 자기 발전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한 과정이다.

 

 
 
이기주의가 죄악이기는 하나, 인간이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과 그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이기주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 그것을 고의로 선택하지 않는 한, 그것을 인간에게 죄로 돌릴수는 없다. 이 이기주의와의 싸움은 덕행으로 향하는 길이다.

 

 
 
b. 신학적 죄관

 

 
 
슐라이어막허는 죄를 인간의 육감적 성질의 필요한 산물, 즉 영혼과 육체의 물질적 조직과의 관계에서 생긴 결과라고 보았다. 그것은 육욕이 정당한 일울 수행하려는 정신적인 결정력을 방해하며 감성적인 본성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서 발견된다.

 

 
 
그는 죄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인하고, 그것을 주관적인 존재, 즉 우리의 의식 내면에 있는 것으로만 보았다. 죄의식, 즉 인간 안에서의 고투의식은 감성적인 본성이 우세하는 동안 신의식이 불충분한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부족감을 죄로 여기도록 제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죄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속을 위한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원죄”는 단순히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후천적 습관이며, 그것은 결국은 현재 모든 본죄의 원천이 되었다.

 

 
 
칸트의 제자요, 조정학파의 대표자인 쥴리어스 뮬러는 죄를 도덕률에 불순종하는 의지의 자유행위라고 본 칸트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뮬러는 칸트가 말하는 이 “근본 악”은 출생 때부터 인간 안에 나타나는 것이며, 적어도 의지의 어떠한 의식적 결정보다 우선하며, 또 이것이 없으며 죄도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죄의 기원을 시간 속에서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것을 의지의 비 현세적, 혹은 전현세적 결정에서 찾았다. 어떤 이전 존재에서, 이미 선택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유죄하게 출생되었고, 또 부패하여졌다는 것이다.

 

 
 
릿츌은 죄를 헤겔 처럼 일종의 무지요, 인간의 도덕적 발전에 꼭 필요한 필연적 과정으로 보았다. 슐라이어막허와 같이 인간은 종교적 의식을 통하여서만 죄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신국을 최고선으로서 찾아야 하나, 그 완전한 선을 알지 못함으로 오히려 그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본죄(릿츌은 이것만을 유일한 죄로 인정했다)를 범하고는 신국에 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상적인 지식이 많아질수록 죄의식도 증가되는데, 이죄의식이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죄를 벌하지 않으시며,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노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상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테난트는 죄의 교리를 진화론적 견지에서 전개하였다. 인간의 마음 속의 야수성에서부터 온, 충동이나, 욕망, 특성 등을 죄악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들은 죄의 소재가 될 뿐이요, 인간이 윤리적인 존재가 되어 가는데, (테난트는 어떻게 그런 의지가 진화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존재에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 의지가 유일한 죄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죄는 개개인의 양심, 선, 정의의 개념, 또는 도덕률과 신의에 반대되는 사상과, 언어와, 행위를 나타내는 의지의 행동이라 하였다. 인류의 발전의 정도에 따라서, 윤리적 표준이 더 정확하여 지며, 죄의 흉악성도 증가되는 것이다. 테난트는 죄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또 우리의 본성과 환경은, 우리의 보다 나은 자아를 형성해 가는데 엄청나게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하였다.

 

 
 
Ⅲ. 결 론

 

 
 
모든 사람이 아담과 관계로 인해서 타락한 후 죄의 신분과 상태에서 태어난다. 이것은 아담의 죄의 죄책이 우리에게 전가됨을 뜻한다. 아담이 우리의 대표자로 범죄한 이래, 우리는 아담 안에서 유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태어난 상태가 율법에 대한 고의적 위법의 상태라는 점, 그러므로 우리는 본래 형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의 죄책으로 무거운 짐을 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로부터 도덕적 오염을 상속받았다. 그들은 원시적 의를 박탈 당하는 동시에 죄에 대한 적극적 경향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그로 인해 전적을 부패 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는 바가 악하여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선을 행할 수 없다든다, 또는 절대적으로 진, 선, 미에 대한 예찬의 감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고유의 부패가 인간성의 모든 부분에 미쳐서 그에게는 영적, 선, 곧 하나님과 관계된 선이 조금도 없으며 다만 도덕적 왜곡만이 있음을 의미한다.

 

 
 
죄인도 자연적인 선, 세속적인 선을 행할 수 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려는 참다운 선을 행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를 이런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인간과 인간사이에 해가 되는냐 안되느냐에 따라 죄가 정해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죄는 하나님의 요구를 불이행하는 것이 죄라고 하였다. 범법한 죄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거나 혹 순종하는 것이 부족할 때 죄가 되는 것이다.     신원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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