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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예수사랑이란 무엇인가 13

by 【고동엽】 2015. 2. 26.
예수사랑이란 무엇인가 13
15. 예수사랑은 나쁜 사람을 용납하는 사랑 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a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8 b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본문 해설
악한 청지기 비유는 15 장부터 시작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관계되는 비유 입니다.
그러므로 1 절에 제자들에게 했다는 진술은 누가가 교훈으로 해석하기 위해 듣는 사람을 정한 것이고 바리새인들에게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잃은 양 비유도 마태는 제자들에게 한 설교라 하고 누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했다고 합니다.
성서 저자가 필요에 의해 청중을 결정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설교는 제자들에게 교훈으로 준 말씀이 아니고 예수가 세리와 죄인을 용납하는 것을 반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하나님의 품성을 알리려는 설교 입니다.(에레미아스)
1-7 절은 청지기가 자신의 해고 뒤의 안전을 위해 횡령하는 범법 이야기이고,
8a는 그 범죄 행위를 주인이 칭찬하는 황당한 이야기 입니다.
8b 이하는 이러한 황당한 이야기를 누가 혹은 초대교회가 해석한 이야기 입니다.
복음서는 예수가 죽으신 후 30 - 70 년 사이에 말씀들이 수집되어 기록되었기 때문에 기록 과정에서 초대교회의 사유가 첨가 되었을 거로 봅니다.
(에레미아스 예수의 비유 분도출판사 241p)
우리의 해석인 하나님나라 정황으로의 해석은 8b의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는 누가나 초대교회의 해석으로 간주하고 제외합니다.(노먼 페린 신약성서개론 한국신학연구소 633p)
20 세기 최고의 신학자 불트만은 이 비유는 해석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게 솔직한 자세 입니다. 그때까지는 하나님나라 신학이 없어서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를 탄압했던 배교자 율리아누스 로마 황제는 횡령범을 칭찬하는 이 본문을 들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기독교라하며 교회를 탄압했습니다.
잘못된 해석
누가의 해석인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해석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누가는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라면서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논리 충돌 입니다.
의적 일지매 식으로 부자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준다는 해석이 있는데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실시되었는지는 의문이 들지만 이스라엘에 50 년 째 되는 해에 빚을 탕감해 주는 희년법이 있습니다.
내로라하는 신학자들은 이 희년법으로 해석해서 가난한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데 이것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청지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행위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정양모 신부는 악한 청지기가 과감하고 민첩하게 실직에 대한 대책을 세웠으므로 그 민첩성을 본받아야 한다고 합니다.(200 주년 성서 주석 누가 16:8 주해 정양모)
이러한 모든 해석은 실정법을 어기는 범법 이므로 청지기는 처벌받아야 마땅합니다. 어떤 해석도 횡령범인 청지기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딜타이는 성서 해석 방법을 설명하면서 해석자는 저자 본인이 스스로 이해한 것보다 저자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빌헬름 딜타이 해석학의 탄생 지식을 만드는 지식 177-178p)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성서를 해석할 때 그 해석이 성서 기록자의 의도와 반드시 같은지를 묻는 것은 무익하다고 합니다.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통한 해석
우리는 이 비유에서 예수가 나쁜 일을 한 청지기를 칭찬한 황당한 행동을 파악하는 것이 목표 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보다 더 황당한 행동을 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함께 잠잤습니다. 예수가 민족 반역자이고 착취범인 세리와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그들을 창찬하고 용납한다는 의미 입니다.
현대의 우리는 횡령범 칭찬이 보다 더 황당하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세리와 죄인을 용납하는 것이 더 황당합니다.
악한 청지기 비유는 하나님이 의롭지 않은 우리를 의롭다고 호칭했다는 칭의로 해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의롭지 않은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칭의 입니다. 즉 칭의가 하나님나라 입니다.(케제만)
1. 악한 청지기 비유는 역설(irony) 입니다
역설은 생각의 정열 입니다. 정열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이런 생각의 정열은 자신을 초월한 어떤 것에 참여한다고 생각할 때 정열이 발생합니다. 단지 우리가 습관화 되어서 발견하지 못할 뿐 입니다.(키에르케고르 황필호 철학적 조각들 133p)
따라서 역설은 뒤집어 말하거나 말하는 이가 극단으로 끝까지 밀어부쳐 가며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악한 청지기 비유는 예수에게서만 볼 수 있는 평화 메시지 입니다
습관화된 우리의 이성으로 볼 수 없는 평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빌4:7)
복음서에 예수의 병 고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병고치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단지 신체의 고통을 치유해 준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절반만 본 것 입니다. 고대에 병자는 부정한 죄인 입니다. 세균과 바이러스가 발견되기 전이라 죄가 있어서 병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부정과 악함을 용납함으로 치유합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자신을 만지는 걸 허락한 것이나 죽은 소녀를 만지는 것은 부정과 정결의 벽을 허무는 것 입니다.
예수는 악한 청지기를 칭찬해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고자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너희가 악하다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죄인들을 하나님은 칭찬하셔서 자기 백성 삼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칭찬하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세리 삭개오를 용납하니 그가 착취한 재물을 토해 내놓습니다.
칭찬, 용납, 칭의는 같은 뜻 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바울은 의롭지 않은 우리를,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는 칭의를 만들었습니다.(로마3:28)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는 데는 재물, 건강, 지식, 권력 등은 필요 없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악하고 선하고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면 됩니다. 그래서 악한 청지기 비유 설교는 악한 사람도 하나님나라 백성된다는 기쁜소식(복음) 입니다.
예수는 정의롭고 의로운, 사회의 강자 편이 아니라 사회제도에 의해 그 강자들로부터 악하고 부정하다고 낙인된 나쁜 사람들 편 입니다.
선을 숭상하고 악을 경멸하는 태도는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어리석은 행위 입니다. 왜냐하면 선 안에도 악이 존재하여 선과악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선을 추구한다면서 차별과 배제를 일삼아서 평화를 깨뜨리기 때문 입니다.
솔제니친은 악을 분리하고 배제한다면 나의 심장에 있는 악은 어떻게 할 건가 묻습니다.
나의 심장도 둘로 쪼개어 낼 것인가 라고 묻습니다.
성서는 선한 사람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쁜 사람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통해 평화를 일구는 이야기 입니다. 즉 화해의 메시지 입나다.
도덕은 모든 것을 상대화 합니다. 예수사랑이란 이 도덕을 극복하는 평화의 메시지 입니다. 정치와 도덕에는 적이 있지만 사랑에는 적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13 편의 예수사랑 이야기에 함께하시며 격려해 주신 페친님들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1 편부터 다시 읽으시면 우리의 가치체계와 하늘의 계시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다음부터는 죄에 대하여를 씁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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