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들의 보편적 착각 살전5:19
◑성경에 나오는 3가지 착각의 사례
▶1.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예수님의 가족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들과 함께 길을 떠나지 않고, 성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부모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동행하고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꽤 많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을 사람들 틈에 계셔서,
자기들과 함께 길을 가는 줄로 생각했었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2.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펄쩍 뛰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
죽을지언정 자기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다짐하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3.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내려간 이유는,
뜻밖에도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사울은 그게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 우스운 말이지만, 사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물불 가리지 않고 다메섹으로 내려갔습니다.
▶위 3 사례의 공통점이 뭘까요?
“착각”입니다.
세 경우 다 착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는 예수를 배반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확신했지만
그것은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들이는 것이, 즉 자기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울에게도 착각이 있었습니다.
▶살전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여러분,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뭔가 하면 ‘성령은 잘 소멸된다’ 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소멸’이라는 말은, 굉장히 강한 언어입니다.
아주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잘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건 성령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입니다.
왜 성령은 잘 소멸하는 것인가요? 그만큼 우리가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성령님은, 예수님은,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잘 소멸되십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잘 잃어버리는데, 그런데 문제는
잘 잃어버리는 것도 문제인데
더 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잃어버리는 줄을 알면, 가서 되찾을 터인데
그런데 잃어버린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처럼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거니..’
이렇게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줄을 알면, 다시 찾겠는데
잃어버린 줄을 모르면,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게 신앙인들이 보편적인 착각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늘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정말 잘 살펴야 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가? 내가 지금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나?
예수님을 잃어버리진 않았는가? 성령님은 내게서 소멸되시지 않았는가?’
이것을 늘 확인해야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보여야죠.
근데 우리가 늘 교회도 다니죠.
크리스천이란 호칭도 있죠.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분도 있죠.
그렇기 때문에 내게서 예수님이 잃어버려졌다는 것을 느끼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계시는지, 잃어버려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찾아야 됩니다. 3가지를 점검해 보면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불가능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불가능한 것 1. 불안
그건 불안, 염려, 근심, 걱정입니다.
불안, 염려꺼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똑같이 문제도 생기고, 염려할 일도 생기고, 불안한 일도 생기는데
그게 안 되는게 예수님 때문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염려, 불안이 없어집니다.
▶저희 막내아들이 아주 어릴 때, 6살 때였습니다.
하루는 제가 막내아들을 데리고 집앞 골목을 걸어갈 때였습니다.
그때 마침 저기서 초등학교 5학년짜리 한 학생이 우연히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막내의 눈빛이 갑자기 반짝거려졌습니다.
‘아빠 아빠, 전에 저 형아가 나를 때렸어!’ 제게 복수해 달라는 것이었죠.
저는 못 들은 척 하면서 계속 갔습니다.
막내는 억울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제 손을 뿌리쳤습니다.
그리고 그 5학년 동네 형아에게 다가가더니, 발로 차는 것이었습니다.
막내는 무사했습니다.
바로 곁에 아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가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정리되었습니다.
아빠만 옆에 있으면, 애가 달라지는 겁니다.
‘다윗이 그랬구나’
▶여러분 우리도 다 하나님 믿습니다. 골리앗 없을 때만!
그런데 골리앗만 나타나면,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안 믿어집니다.
골리앗만 보입니다. ‘아, 나는 6살인데, 쟤는 5학년이네’
그 현실적인 판단에, 도망갈 생각만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정말 그게 믿어졌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편은, 기가막힌 시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여러분, 양은 눕지 않습니다.
누워자는 양은, 미친 양입니다.
누워잔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강하다는 뜻입니다.
사자, 호랑이, 사람은 누워잡니다.
공통점은 세다는 것입니다. 누워자도 건들일 동물들이 없습니다.
양, 노루, 토끼, 사슴은 본능적으로 그게 안 됩니다.
그들이 누워자는 것은, 그만 살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동물은 본능적으로 웅크리고 잡니다.
약한 동물인데, 늘어져 자는 것은,
사람 손에 길들여져서 야성을 잃어버려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웅크리고 있다가 바스락 소리만 나도 일단 즉시 뛰어서 도망칩니다.
약하니까 그렇습니다.
양도 냅다 뛰는 과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직이 목동이라서 양을 잘 압니다.
그래서 시23편은 기가 막힙니다. 양은 눕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양과 같아
그래도 나는 누워 자
어떻게 누워자냐?
우리 아버지가 내 목자시거든
▶여러분, 살다가 보면 믿는 사람에겐 어려움이 안 생길까요?
힘든 일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이 생기고, 안 믿는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굉장히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이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믿음 없는 사람은 불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는데
믿음 있는 사람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버텨냅니다.
아버지요, 목자를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도신경 신앙고백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 짧막한 문장 속에 기막힌 단어가 다 들어있습니다.
‘전능하사’ 얼마나 전능하신가 하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분이 내 아버지 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내가 믿습니다... 굉장한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골리앗이 닥쳐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는데
십자가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는데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시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내 속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구나,
내 속에서 성령님을 소멸하기 시작했구나’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매달려서
‘하나님 믿음 주세요, 평강주세요!’ 기도하셔야 합니다.
◑2. 예수님이 안 계실 때 나타나는 굉장히 보편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욕심입니다.
예수를 진짜로 믿었던 바울은, 이런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참 부럽습니다.
‘예수를 믿고 났더니 욕심이 없어졌어요!’
이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서
그 전에 귀히 여겼던 것, 로마시민권, 학문, 지식, 돈, 명예..
이런 것들을 다 배설물 같이 내버렸다는 것입니다.
아주 근사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므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데,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다 부자되는 것도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 가운데도 부자가 많습니다. 그건 사람 나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특징은
욕심이 없어집니다. 그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부한데도 처할 줄 압니다. 부하게 살았던 적도 있었으니까요.
비천에 처할 줄도 압니다.’
믿음은 욕심을 없애게 합니다. 그래서 욕심에 얽매이지 않게 합니다.
물질이 있으면 좋지요. 그러나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러고 욕심 때문에 죄 짓지 않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청량리중앙교회 임택진 목사님 얘기를 늘 하게 되는데요.
그 사모님 얘기입니다.
그 교회에 조그만 사택이 있었는데, 임택진 목사님 내외분이 거기서 사실 때입니다.
제 김동호 목사가 그 교회 전도사 시절이었습니다.
사모님이 그 사택 마루에 걸터앉으셔서 채소를 다듬고 계셨습니다.
사모님이 저를 굉장히 아껴주셨어요.
그때 사모님이 했던 말을, 제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그게 무섭지는 않아!
가난하게 살면 또 살지 뭐!’
제가 청년 시절이라서, 그때 한국 상황이 다 그랬지만
목사님이 쪼들리게 살고 계신 것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가난이 두렵지 않다는 그분의 말씀이,
큰 북소리로 제 속에 울려서
지금까지도 마치 어제일처럼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욕심이 없어지고, 물질이나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이 벗어져서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니라
여전히 가난은 있는데, 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정직하게 인정하는데
그걸 무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난이 무섭지 않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쓸데없이 욕심 때문에 죄 짓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욕심 때문에 자꾸 죄를 짓거든요.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서도, 집착하는 사람, 어떤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
돈에 대해 너무 집착하는 걸 보면, 내 마음에 그런 마음이 있다면
자기 마음속을 점검해 봐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 마음에 계신 분은, 돈에 대해 안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욕심을 버리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제가 산상수훈 중에 참 좋아하는 구절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입니다.
하나님을 뵙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욕심이 없으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왜요? 자기 속에 계시니까요!
하나님이 보인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제가 어깨너머 바둑을 배웠습니다.
제가 어느 날 상대방에게 제 수준을 물어보니
‘너 한 10급 쯤 될 것이라’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내 바둑을 두면 10급인데,
남의 바둑 훈수 두면 8급 정도 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진짜 실력은 8급인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바둑을 직접 두면, 8급이 아니라 10급 실력이 나옵니다.
훈수 두는 실력이 안 나오는 겁니다.
이창호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바둑 해설은 기가 막히게 하지만, 실제로 바둑을 두면
자기 실력 이하로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승부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렇죠.
남들은 빤히 보는 것을 자신은 못 봅니다.
그런데 남의 바둑을 지켜보면, 욕심이 없어지니까
묘수가 잘 보이는 겁니다.
승부는, 어떻게 깨끗한 마음을 갖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수를 읽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바둑을
목회의 바둑을
하나님의 수로 풀 수 있다면, 그건 백전백승이죠.
자꾸 꼼수를 둡니다.
악인의 꾀를 좇아 삽니다.
그건 얕은 수입니다. 곧 들통납니다.
나중에 다 물어내야되고, 대패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수로 인생의 바둑, 사업의 길, 목회의 길, 자녀양육의 길
그러면 백전백승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욕심을 살펴서, 하나님이 계신가를 살피고
욕심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수로
인생의 바둑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세 번째는 예수님이 계시면 절대 불가능한 것이
“오만함(교만)”입니다.
이게 제가 30년 전에 했던 설교입니다.
1982년 10월 말에, 그때 영락교회에서 제가 주일설교를 했었는데
이 본문 가지고, 이와 똑같은 설교를 했었습니다.
뜬금없이 32년이나 지났는데, 그 설교가 자꾸 생각이 납니다.
이유는, 우리나라처럼 정의로운 나라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별로 동의가 안 되시죠?
정의에 대해서 민감한 나라
온 세상에 정의를 부르짖는 나라..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저도 페이스북을 하는데요, 대단합니다.
저는 옳다고 생각해요. 정의를 얘기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뜻밖에 제가 이렇게 조금 객관화시켜서 보는데요
내가 얼마나 객관화 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자꾸 무슨 느낌이 드는가 하면
‘이 세상은 불의에 의해서 망가지고, 정의에 의해서 한 번 더 망가지는구나!’
이런 생각이 자꾸 느껴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정의 justice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의에도 두 종류의 정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정의,
또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정의! 입니다.
그런데 정의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다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정의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정의를 압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정의가 없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정의로운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정의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불의와 싸우는 사람들 참 많습니다.
그러니까 정의는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의 것이다
– 이건 굉장히 어리석고 오만한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의는 다 똑같은데,
뭐가 다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Limit이 다릅니다. 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정의는, 선 Limit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없습니다.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는, 불의에 대해서 잠잠한 게 아닙니다.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싸워야 됩니다. 불의는 반드시 심판해야 합니다.
여러분, 심판이 없는 세상은 정말 살 맛 안나는 세상입니다.
그건 나쁜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불의한 일은, 말하고, 심판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누가 심판하려 합니까?
자기가 심판하려 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까요. 불의를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 심판을 하다가 자기가 다치는 데도 불구하고
용기 있는 사람은 합니다. 용기까지는 좋은데,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서게 됩니다. 모든 일에서.
불의할 때도 그렇지만, 욕심 부릴 때도 그렇지만 여러분,
정의를 부르짖을 때에도 믿음이 없으면 선을 넘게 됩니다.
문제는, 인간의 정의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 보면
샤일록이 빚을 못 갚는 사람에게 살을 도려내어 갚는 계약을 했습니다.
그때 재판관이 명 판결을 내렸습니다.
계약대로 살을 떼라고, 그렇지만 피를 흘리지 말고 살만 도려내라고,
그렇게 뗄 수는 없습니다. 이게 인간이 심판을 한다고 나서는데,
심판하는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심판이 정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심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수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수도 너희가 갚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불의를 내버려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나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셔야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 높은 뜻 교회에서 설교했는데,
‘가인의 표’에 대해서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가인을 손대서 죽이면 벌이 칠배야!’
가인을 보호한 게 아닙니다. 우리를 보호하신 겁니다.
함부로 섣불리 손대고 하다보면, 인간은 실수하게 됩니다. 그걸 막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불의와 싸우다가 어느 선에서 딱 그칩니다.
항거하는 일, 지적하는 일, 싸우는 일, 비판하는 일.. 가능합니다.
그건 인간의 한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거 안 하면 비겁한 거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딱 끝내야 합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비겁하다 그럽니다.
아닙니다. 비겁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고, 나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의 편에 서다가,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참 역설적인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그러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 삼는 것은, 크리스천 중에 정의로운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정의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과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을 잘 잃어버립니까?
-욕심 부릴 때, 위험한 일 만날 때 잘 잃어버리지만
-정의의 편에 설 때, 하나님을 가장 잘 잃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릅니다. 자기가 정의 편에 섰기 때문에요!
불의에 대해서, 용기 있게 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리를 넘어서서
▶늘 살펴야 됩니다.
그러니까 죄지을 때만 조심하면 되는게 아니라
의를 행할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도,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그러다가
하나님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거든요. 잘 살펴야 합니다. 그게 겸손함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입니다.
저도 살다보면 화 나는 일이 많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많습니다.
어느 순간에 생각에서 지워버립니다. 어느때부터 그게 가능해 지더라고요.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이 풀어주시겠지.’
하나님이 없으시면 억울하겠지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저도 이런 저런일 많이 당하는데, 억울한 일 그다지 많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걸 깨달았을 때 제가 굉장히 좋은 말을 배웠습니다.
제가 기껏 사람에 대해 실망하고 화날 때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에이, 사람이 그렇지 뭐!’
그런데 억울하지 않습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아멘! 하고 끝내버립니다. 하나님이 계시니까요!
그러니까 불의한 세상을 보고도, 괜찮다며 그냥 지내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실 테니까, 이 세상은 문제 없어
너무 억울해 할 것 없어, 너무 화낼 필요 없어’
다 풀 수 있습니다. 그렇게 풀 때,
이 세상 사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요!
▶마치는 말
신자는 자기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신다고 착각하기 쉬워요.
저도 마찬가지로 목사이기 때문에 착각하기 쉽습니다.
늘 살펴야 합니다.
-불안하지 않나
-쓸데없는 욕심에 너무 집착하지 않나
-내가 너무 행악자에 대해 오만하지 않나
순간순간 살펴서 여러분,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과 늘 주님과 동행하는
그런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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