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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은 무엇인가 12

by 【고동엽】 2015. 2. 26.
예수사랑은 무엇인가 12
14. 예수사랑은 세상으로 흐르는 사랑 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해석의 유형
마태와 누가(누가19:11-27)는 하나님은 각자에게 재능(talent)을 주셔서 마지막 날에 그 재능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심판하신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마지막날 그 행위에 따라 성과급을 준다는 이 해석은 유대교 사상이고 기독교 복음은 아닙니다. 성서저자가 예수설교를 바르게 해석하지 못했다는 나의 언술에 당황할 텐데요. 다음회에 더 심각한 오해를 해설하며 해명하겠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성서 저자의 해석에 따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계발하여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책망받는 것으로, 즉 자신 안에 내재되 있는 선의 본질을 최대한 계발하여 선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임마누엘 칸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아카넷 232p)
달란트가 영어의 재능인 탤런트(talent)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일반적이고, 현재 거의 모든 설교자가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의 병폐인 성과주의나 도덕주의의 바탕이 될 염려가 다분합니다.
재능으로 파악하더라도 그 재능을 세상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재능으로 사용하는데 대한 책망으로 해석하는 것은 좋습니다.
이스라엘의 폐쇄성
1 달란트는 근로자 30 년 임금으로서 과도한 액수 입니다. 5 달란트는 정말 큰 돈 입니다. 이렇게 큰 돈을 종에게 맡기는 정신 나간 주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걸 투자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요, 이렇게 엄청난 재능을 주었다는 것도 다른 예수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또한 이러한 해석은 비유의 역설을 보지 못하고 표현된 이야기만을 보려는 해석 입니다. 달란트는 감추어서 다른 뜻을 나타내려고 하는 은유(隱喩 metaphor) 입니다.
우리는 1 달란트 받은 종이 다른 종들과는 다르게 땅에 파묻은 것을, 유대인들이 세상에 대한 제사장 역할로 준 하나님의 선물인 율법과 성전을 땅에 파묻은 것으로 비유했다고 해석합니다.
이에 견주어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자기만의 유익으로 삼지 말고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톰 라이트 마태 2 IVP 195p)
예수가 1 달란트를 땅에 파묻고 안전을 선택한 종을 책망한 것은, 세상에 이롭게 하라고 주신 것을 자기들만의 것으로 삼은데 대한 책망 입니다. 즉 유대인들의 폐쇄성에 대한 책망 입나다.
예루살렘 성전은 차별의 상징 입니다.
남자만 성소 안에 자리가 있고 여인들은 밖에 뜰이 따로 있고요, 개종한 외국인의 뜰이 있고 장애인과 십일조를 못내는 등 상습적으로 율법을 어기는 가난한 사람은 성전에 올 수 없습니다. 외국인도 물론 올 수 없습니다. 바울은 외국인을 성전에 데려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율법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세상을 돌보는 제사장 국가가 되라는언약으로 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 복받는 기재器才로 삼았습니다.(출19:5-6)
기독교의 개방성
1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은 자신의 주인(하나님)을 두려운 주인으로 알아서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고 안전을 택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바(아빠)라 부르며 진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 임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하나님의 복음과 사랑이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선물이므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 말고 세상으로 흐르게 하라는 말씀 입니다.
교회는 멤버십 클럽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존재 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바르고 절제있게 덕을 행하고, 그 고귀한 길을 찾으려고 항상 애쓴다면 아무도 이런 사람을 자기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윤리학 창 351p)
인류에게 도덕을 가르친 훌륭한 도덕사상 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도덕이 11 세기 스콜라신학자들에 의해 기독교 신앙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이 도덕주의가 기독교의 수도원주의, 금욕주의, 영지주의 영성, 엄숙주의, 경건주의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이념은 신앙인을 심미적이고 정태적 상태에 머물게 해서 세상을 배제하고 떠나 홀로 존재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책임성과 신이 부여한 삶의 기쁨과 평화를 잃었습니다. 복음서가 증언하는 것으로서, 현재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을 잃어버린 까닭에서 온 결과 입니다.
18 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며 인간성 회복을 꾀하는 볼테르를 비롯한 지성인들로부터 이러한 기독교가 외면되기 시작했습니다.
니체는 당시의 기독교를 반대한 것 입니다.
기독교를 싫어한 니체는는 종교란 고독, 단식, 성적금욕이란 3 가지 섭생 규정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발전하여 '세계부정'과 '인간의지 부정'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그가 보는 기독교는 '생기 없음' 입니다.(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책세상 84, 95p)
루드비히 포이어바흐는 '기독교 본질'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 최초의 책인 '신성한 가족'이 출간되자,
이제야 비로소 독일 청년들이 자기할 일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사랑한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어는 타락한 기독교를 공격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 당시의 뮌스터 대주교의 훌륭한 인간성과 교양은 기독교를 엄숙한 기독교로 발전시켰습니다. 엄숙한 도덕은 삶의 기쁨과 평화를 외면한 처사 입니다. 그가 비판한 것은 성직자들은 교리의 엄숙한 요구에 응답할 수도 없으며, 스스로 응답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 입니다.(피터 P 로드 키에르케고르 실존철학의 아버지 집문당 49-51)
키르케고오가 비판한 기독교는 삶을 떠난 기독교 입니다. 키르케고어는 사유가 자신을 증명할 수 없고 실존에 의해서만, 즉 자신의 삶을 통해서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 철학자 입니다.
그는 기독교가 타락과 부패는 쉽게 알아차려 저항하지만(오늘날은 저항하지도 않습니다)
도덕이 믿음으로 들어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도덕이 기독교를 구렁텅이로 끌고 간다고도 합니다.
기독교가 도덕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도덕화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신앙을 도덕화하면 차별하고 배제하여 불화가 일어납니다. 믿음도 도덕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죽도 밥도 안됩니다. 바리새인들의 실패로 우리가 익히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도덕화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세상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유익을 꾀하는 행위 입니다.
즉 땅에 파묻는 행위 입니다.
예수사랑을 세상으로 흐르게 하라
행복이 어떤 특정한 상태가 지속되는 하나의 정체停滯 속에 있다는 견해는 틀린 생각 입니다. 정체해 있다는 것은 경직화와 죽음을 말하고, 정체는 전제주의의 특징 입니다.
따라서 세계사 전체를 볼 때 모든 사상을 개방한다는 것이 보다 높은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 입니다.(야콥 부르크하르트 세계사적 성찰 성신원 321p)
마르틴 부버는 정신이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정신은 몸 안에 흐르는 피와 같은 것이 아니라 숨 쉬고 있는 공기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그의 관계 능력에 의해서만 정신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마르틴 부버, 나와 너, 문예출판사 54p)
예수는 오늘날의 성직자와는 거리가 한참 먼 분 입니다. 예수는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겼습니다. 세상과 소통하고 관계하기를 즐겼다는 말 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따뜻하고 솔직합니다. 교회가 화려하고 성직자가 위엄있고 폼나면 세상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이러한 교회와 성직자를 원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기 때문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쁨과 평화의 삶을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 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심 같이(요한3:16-17) 그리스도인도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사랑을 세상으로 흐르게 하는 사람 입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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