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명을 이루는 의
동유럽의 어느 나라에 공산군이 쳐들어와 때마침 예배를 드리고 있던 교회당을 포위했다. 단 한 사람도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교회당을 여러 겹의 공산군으로 둘러싸였다. 장교 한 사람이 차에서 내리더니 예배당 문을 활짝 열었다. 순간 긴장하고 있던 교인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것을 깨닫고 모두들 벌벌 떨기만 했다.
"예수를 버릴 사람만 밖으로 나가시오 ! 그리고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은 예배당에 남아 죽음을 기다리시오 !" 예배당 안으로 쩌렁쩌렁 울리는 공산군 장교의 명령은 그야말로 저승사자의 목소리였다. 한두 사람이 예배당 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저마다 앞을 다투어 문으로 향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예배당에는 이들을 지키던 장교와 열댓 명의 신자가 남게 되었다. 장교는 예배당 문을 닫고서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저들은 죽은 목숨이오. 우리의 계획은 예배당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오. 나도 그리스도인이오. 차마 당신들마저 죽일 수는 없었소. 하나님이 살려 주신 목숨이니 어서 뒷문으로 가시오 !"
한편 예배당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는 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야말로 귀중한 것으로, 이생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까지 그 생명은 우리를 살리게 될 것이다.
2. 의인은 없다
성경: 롬3:10-12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선행을 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얼음판에서 놀던 아이 하나가 엷은 얼음을 딛고 물에 빠졌습니다. 곁에 있던 소년이 얼른 가서 건져주었습니다. 물에 빠졌던 아이의 어머니가 와서 칭찬했습니다. "정말 너는 용감한 소년이야. 얼음물에 뛰어들어 내 아들을 건져주다니!"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가 내 스케이트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예요." 웃기는 이야기로만 들을 것이 아닙니다. 양심적으로 따져볼 때 우리가 하는 소위 선행이라는 것이 결국은 나의 유익이나 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눈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합니다." 하는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이 진실한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진실한 믿음 안에서 참된 선행을 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성경: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다가 마실 물이 동이 났습니다. 물은 찾을 길이 없고 목은 점점 말라왔습니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가 타고 있는 낙타를 죽여 그 속에 있는 물을 마시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자살 행위와 같다는 것을 알았지만 타는 듯한 목마름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배고픔과 갈증은 이렇게 강렬합니다.
주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물과 지식과 명예와 이성은 추구할지언정 가장 중요한 의를 위해서는 작은 희생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의'입니다. 우리는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죄와 싸워 이겨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배부름입니다.
* 기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우리가 의를 추구함으로 영적인 배부름을 얻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의로운 삶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하느니라” (잠 11:4)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 위해 무척 애를 쓰던 젊은이가 어느 날,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젊은이를 두 개의 방에 차례차례 데리고 가셨는데 첫 번째 방은 화려했으며 방에 있는 책상에는 많은 돈이 쌓여 있었으나, 두 번째 방은 전혀 볼품이 없는데다 방에 놓여있는 책상 위에는 몇 푼 되지 않는 돈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책상 위의 돈은 당신이 지금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 돈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본 첫 번째 방 책상 위의 돈은 당신이 당신을 위해 사용한 돈입니다’ 그 날 이후 젊은이는 돈을 쓸 때마다 ‘나는 지금 이 돈을 나 자신만을 위해 쓰는 것인가,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인가’라고 생각한 다음 신중하게 사용했습니다. 재물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우리를 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의리, 즉 죽음을 면케 하는 의로움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는 의를 가리킵니다. 행위로써 의롭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의 옷을 입고,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용서받은 의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5. 정의로운 교회
교회는 연약한 사람들이 종교를 의지하러 가는 곳이라고 비하하며 무시했던 아인슈타인이 활동할 당시에 독일에서 나치스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대학의 지성인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대학 교수들은 즉시 나치즘에 무릎을 꿇고 아첨했다. 그들은 나치즘이 주장하는 잘못된 인종이론을 마치 옳은 것인 양 떠들어댔다. 또 나는 신문과 언론인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신문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필봉을 놓았다. 그런데 오직 교회만이 독재자에 항거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줄지어 감옥으로 향했다. 나는 교회에 한없는 찬사를 보낸다.”
교회가 불의하면 이 사회는 아예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교회조차 불의하다면 이미 다른 집단은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항상 정의롭고 공의롭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사회를 향해 광야의 소리를 발할 수 있습니다.
/피영민 목사(강남중앙침례교회)
6. 의가 있는 나라
중국 춘추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노(魯)나라의 한 마을에 가난한 여자가 하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웃 제(齊)나라에서 노나라를 정복하려고 이 마을에도 쳐들어왔습니다. 그녀는 한 아기를 안고 한 아기는 손목을 잡은 채 이끌고 난리를 피하여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적은 점점 가까이 쫓아옵니다. 그러나 여자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느라 도저히 빨리 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잡혔구나 싶었을 때, 여자는 부득불 한 아기를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얼른 내려놓고, 손목을 잡고 있던 아기만 데리고 뛰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차라리 손목잡고 있던 아기를 버리고 안고 있던 아기를 데리고 가야 빨리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적의 장군에게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조금전에 아기를 버리는 그녀를 보았던 장군은 이상하다는듯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품에 안고 있던 아기는 내려놓고 손목 잡고 있던 아기를 데리고 도망을 쳤느냐?” 여자는 조용히 설명했습니다.
“내가 품에 안고 가던 아기는 내 아이요, 손목을 잡고 가던 아기는 내 형님의 아이입니다. 난 내 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사적인 사랑이고, 형님의 아이를 돌보는 것은 공적인 의입니다. 의를 버리고 사적인 사랑을 택하여 형님의 아이를 버리고 내 자식을 구원한다면 나는 좋겠지요. 허나 그렇게 한다면 우리 집안꼴은 어떻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나라 꼴은 또 무엇이 되겠습니까?”
제나라 장군은 크게 감동하여 “의를 아는 여자가 있는 도성은 쳐들어갈 수 없다. 의가 있는 나라는 공격하지 못하는 법이다”라며 철수를 했다고 합니다.
7. 공명정대한 나라
배고픈 것을 참는 것도 힘들지만, 억울함을 참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배고픈 사람보다 억울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많은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정부는 국민들을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공명정대하게 나라를 다스려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입니다. 그동안은 우리가 너무 못 살았기 때문에 경제발전에 우선순위를 두었다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된 이제는 공명정대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부하는 자는 불법을 저질러도 출세하고, 정직한 사람은 능력이 있어도 무시당한다면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돈 있는 자는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권세를 부리고, 돈 없는 자는 있는 것마저도 빼앗긴다면 그 백성의 억울함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정부의 역할은 국민들 중에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공명정대, 공정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먼저 정부가 공정하고 깨끗해야 억울한 사람이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 최용우
8. 정의의 심판
성경: 잠24: 19- 20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전 보르도 지역 경찰 책임자인 모리스 파퐁(87세)은 반인류적 범죄로 징역 20년을 구형 받았습니다. 파풍은 나치의 프랑스 지배가 끝난 뒤에도 샤를 드골 대통령의 밑에서 파리 경찰국장을 지냈으며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시절에는 예산 장관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려왔습니다. 그가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계기는 81년 한 신문에 의해 유대인들을 대거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 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입증하는 서류들이 공개되면서부터 입니다.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그였지만 유태인 희생자 가족과 단체들의 고발에 따라 지난 83년 정식으로 기소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의 반인류 범죄로 프랑스 전직관리가 법정에 선 것은 파퐁이 처음입니다. 악인 중에는 당대에 재앙을 받아 죄 값을 치르는 사람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형통하고 잘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날 그가 평생 누렸던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는 빈손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드시 악의 실체는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 묵상: 혹시 당신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공의의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까?
9. 정의와 믿음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서 팥 난다고 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엔 꼭 그렇게 도식적이고 기계적으로 원인과 결과가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가령 약하고 소박하지만 양심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든지,불치의 병에 걸려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반면에 알게 모르게 부정을 저지르거나 부실공사를 한 사람은 편안하게 더 오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예언자 하박국이 하나님한테 항의했습니다.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고통을 받느냐고….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노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 일시적으로 어둠의 권세가 지배한다고 해서,선한 사람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김성수 <성공회대학교 총장>
10. 진리와 정의를 위해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야훼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16:2)
노르웨이의 작가 입센의 작품 중 ‘민중의 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노르웨이 남부의 해안 거리에 스토크만 형제의 힘에 의해 온천이 개발되고, 그 온천은 그 거리를 발전시킬 것이 확실했으므로 시민 모두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학 실험실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는 온천에 독물이 포함되어 있어 매우 위험하다는 결과를 전했습니다. 토마스는 형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서너 명을 제외한 모든 시민들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점차 소동의 진폭이 커지자 진상을 가려내기 위한 시민대회가 열렸고, 토마스는 여지없이 온천과 거리를 파괴하려는 ‘민중의 적’으로 낙인찍히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의 가족들까지 모두 생매장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다수자로부터 갖가지 압력을 당하면서 끝까지 진리와 정의를 위해 맞서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고 공정하며 정확한 하나님의 자를 가지고 우리를 재십니다. 우리가 행위에 대해 재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 즉 심령을 꿰뚫어 보십니다. 과연 정의에 서서, 진리에 서서, 거룩함에 서서 행하였는가를 보십니다. 이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입장을 변명하고 자신의 의와 깨끗함을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11. 바른 길
가을 한 철에만 농어낚시가 허용되는 호수에 아버지와 열 살 배기 아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농어잡이가 허용되기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밤이 으슥할 무렵 드디어 아들의 낚싯대 끝이 둥그렇게 구부러지며 큼직한 놈이 한 마리 걸려들었습니다. 농어였습니다. 아버지는 시계를 보았습니다. 밤 10시 30분, 농어잡이는 내일부터 허용되었고 지금은 농어 이외의 고기만 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호수엔 낚시꾼도 배도 없었습니다.
"얘야, 그 농어는 풀어주고 우리 다른 것을 잡도록 하자꾸나" 안돼요 아버지, 이렇게 큰 물고기를 잡은 건 처음이예요" 하지만 아버지의 단호한 결정에 아들은 농어를 놓아주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흐른 뒤 사업가가 된 아들은 정직하고 모범적인 경영자로 뽑힌 자리에서 열 살 때의 그 사건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진정한 정직'을 배웠노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 정의는 바른 길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에 입각해서 살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바른 길을 따라 정의를 가지고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입니다. 불의는 굽은 길이요, 불의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스스로 사람다워지기를 거부하고 파멸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잠10:9)
12. 의로운 재물
"곰쓸개는 쓸개 빠진 사람이 먹어야 하는데 엉뚱한 사람이 먹는답니다.” 몇 년 전 ‘신바람 건강학’이란 강의로 세인의 주목을 받은 황수관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이 말을 하곤 그도 같이 웃더군요. 그분의 강의 테이프를 들으면서 황 교수가 평신도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중 하나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돈으로 마련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은 진리입니다. 의롭지 못한 재물은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의롭지 못한 재물로 자녀를 교육시키면 자녀가 사기꾼이 되고, 의롭지 못한 재물로 음식을 사 먹으면 몸에 해가 됩니다. 의롭지 못한 재물로 아내에게 옷 사주고 차 사주면 그 옷 입고 그 차 타고 딴 남자 만나러 다닙니다. 그 돈으로 자녀를 결혼을 시켜요? 그럴 순 없지요. 의로운 재물은 유익합니다. 땀 흘려 얻은 재물은 유익합니다. 정직한 재물은 유익합니다. 누가 밥 사준다고 해서 생각 없이 얻어먹지 마세요. 어떤 돈으로 사는 밥인지 알아보고 먹어야지요. 노름해서 딴 돈으로 한턱내는 음식 먹으면 몸에 해롭습니다. 도적질한 돈으로 차린 진수성찬은 독입니다. 김치 한 보시기에 밥 한 그릇을 먹더라도 그 음식을 마련한 돈이 정직하고 의로운 돈이라면 가장 좋은 약이 됩니다. 어떤 음식이 몸에 좋은가를 살피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음식을 마련한 돈이 어떤 돈인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파이프 행복론」/ 조현삼
13. 기독교인들의 정의 실천
일제의 억압 속에서 독립을 얻으려는 몸부림은 신앙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인들을 몹시 핍박했습니다. 80여 개의 교회가 파괴 혹은 전소되었으며 기독교 계통의 학교 8곳이 폐교를 당했습니다. 3.1운동 때에 옥에 갇힌 신도는 3,373명이었으며 목사는 54명, 전도사는 127명, 장로는 63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총독부의 기록이기 때문에 실제의 수는 더욱 많으리라 추정됩니다. 독립 선언서에는 이런 소망이 들어 있습니다.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구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새 문명의 사관이 인류의 역사 위에 던져지기 시작하구나....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고 거리낄 것이 없도다."
하늘에 소망을 두었던 신앙의 선배들은 이 땅에서도 그 소망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신의 희생될지라도 정의의 실현을 위한 몸부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빛의 임무는 춥고 어두운 시대에서 더욱 밝게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14. 정의의 원칙
생명윤리의 마지막 원칙은 정의의 원칙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료자원은 제한되어 있는데 이를 필요로 하는 환자가 많은 경우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가령 응급실로 동시에 여러 명의 환자들이 실려왔을 때 누구를 먼저 진료해야 하나? 또는 기증 받은 장기를 누구에게 먼저 이식해야 하나? 이는 매우 쉬운 일 같지만 실은 대단히 복잡해 수많은 법령이 필요할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 한달 수명연장을 위해 쓰는 의료비를 후진국에 사용한다면 수천만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의학연구비와 관련된 윤리적 논쟁도 한창이다. 하지만 오늘날 첨단의학의 혜택은 대부분 가진 자에게 집중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모든 환자가 골고루 치료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의료 공공성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박상은(샘안양병원장)
15. 의는 행복의 요소
나는 한 성도와 신앙 상담을 했습니다. 그는 얼마 전 부인이 오랜 투병 끝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 깊은 수심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때 함께 간호한 젊은 간호원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 사람을 끊임없이 유혹했습니다. 결국 그는 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간호원의 유혹을 못이겨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두고 그 간호원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간호원과 생활한다면 참으로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행복이란 일순간 육체의 쾌락에 지나지 않는것이었고 그 뒤에 다가온 벌거벗은 수치로 말미암아 그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 제 나이 오십을 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래도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순간적인 과오로 말미암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정신적인 고뇌 속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는 참 행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의로움이 없는 곳에는 순간적인 향락이 있을지 몰라도 그 뒤에 다가오는 슬픔과 비애는 순간의 향락을 능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하셨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버림받아 마땅할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시며 돌아가게 하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도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인류의 죄를 다 감당하게 하셨으므로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듯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주님을 구주로 모셔들이면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의로움을 선물로 얻어서 죄악의 수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의 죄악을 다 회개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의 모든 죄악의 수치가 벗겨지고 성령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용서받고 정결하게 된 것을 마음에 깊이 느끼게 된 그는 환한 얼굴을 다시 갖게 되었습니다. 행복이란 의를 동반할 때 가슴속에서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의가 없는 곳에는 결단코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16. 옳은 것의 차이
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에 왔을 때 어떤 유태인이 대왕에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우리가 가진 금과 은이 갖고 싶지 않으신지요?"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금과 같은 보화는 많이 가지고 있어, 그런건 조금도 탐나지 않소. 다만 당신들 유태인들의 전통과 당신들의 정의는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이오."하고 말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곳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두 명의 사나이가 어떤 일을 상담하기 위하여 랍비를 찾아갔다. 내용인즉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넝마더미를 샀는데, 그 넝마 속에서 많은 금화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는 넝마를 판 사람에게, "나는 넝마를 산 것이지 금화까지 산것은 아니요. 그러니 이 금화는 마땅히 당신 것이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넝마를 판 사람은 그것을 산 사람에게, "나는 당신에게 넝마더미 전부를 판 것이니, 그 속에 들어 있는 것도 모두 당신 것이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랍비는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판정을 내렸다.
"당신들에게는 각기 딸과 아들이 있으니, 그 두 사람을 서로 결혼시킨 후, 그 금화를 그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옳은 사리일 것이오." 그리고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물어보았다. "대왕님, 당신의 나라에서는 이런 경우 어떤 판결을 내리십니까?"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은 아주 간단하게 답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두 사람을 함께 죽이고 금화는 내가 갖소.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정의요."
17. 악인과 의인을 구별하는 방법을 아세요?
악인과 의인을 구별하는 방법을 아세요? 사람들은 말은 안 하지만 내심 스스로 나는 '의인'일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비추어 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인'입니다. 성경 시편 1장에 보면 의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며 악인은 꾀를 내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대로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대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그대의 꾀(수단, 요령)으로 살아가는 오만(傲慢)한 자입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주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즉시로 대답할 수 있다면 '의인'이지만, 성경을 펼친 일이 없으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면 '악인'입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한 사람만이 그나마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晝)-오늘 아침 무슨 말씀을 묵상하였나요?
야(夜)-오늘 밤 묵상할 말씀은 어디인가요?
두 말 할 것 없이 얼른 성경을 펼치세요.
ⓒ 최용우
18.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지팡이
당신은 낚시바늘과 지팡이로 성공한다.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나의 설명을 들어보라. 나는 낚시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고기가 내 배 속으로 뛰어들어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는 적극적 사고를 믿는 위대한 신자이다. 노력하고 행동해야 한다. 낚시바늘을 물속으로 던져야한다. 낚시바늘을 던진다는 것은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 다음에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지팡이는 양치는 목자의 구부러진 것으로, 양이 멀리 가거나 빠져나오기 어려운 장소에 있으면 목자는 그 지팡이로 양을 구한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낚시바늘과 지팡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에서 성공하게 되어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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