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면현상
클라인스가 쓴 유명한 책이 있다. 'Imposture phenomenon' 이라고 하는 책이다. 임파스쳐는 사기꾼이라는 뜻이다. 남의 이름, 남의 지식, 남의 명예를 도용했다는 것이다. 사칭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면이 되는 것이다. 무릇 "가면형상(假面現象)" - 이것이 문제이다. 여기서 어느 사이에 우리는 자기 존재와 진실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 대기업의 중역 가운데 70%가 이 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하는 척, 아는 것 없으면서 대단히 아는 것처럼, 알고보면 이렇다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부끄럽기 짝이 없으면서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남의 것, 남의 돈, 남의 지식 가지고 내 것인 양 착각을 하고 있다. 가면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사람은 Hypocrite라고 말한다. 이렇게 거짓된 내가 있는 한 진실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는 한 누구를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받을 수도 없다.
/곽선희 목사 설교예화
2. 사자 가죽을 쓴 나귀
나귀가 사자의 가죽을 쓰고 주위를 돌아다니며, 만나는 어리석은 동물들을 모조리 깜짝 놀라게 하고 있었는데, 여우를 만나자 그도 또한 놀라게 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여우는 나귀의 목소리를 듣자 말했다.
"아냐, 정말이지 나는 네가 짖는 것을 듣지만 못했어도 역시 깜작 놀랄 뻔했을 가다."
* 자기 자신의 것도 아닌 성격을 꾸미는 자는, 대개는 연극을 지나치게 해서 결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3. 위선을 경계하자
로버트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에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계속 나옵니다. 어느 동네에 마음씨 착하고 선행을 많이 베푸는 지킬박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천사처럼 여기며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는 거의 매일 밤 살인과 절도 유괴 등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범인의 단서가 잡혔습니다. 칼 경이라는 유명인사가 지팡이에 맞아 살해되었는데, 범행에 사용된 지팡이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는 앤더슨이란 변호사가 지킬 박사에게 선물한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집니다. 경찰이 지킬 박사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지킬 박사의 옷을 입은 하이드가 자살한 것을 보게 됩니다. 천사 같던 지킬 박사와 끔찍한 연쇄 사건의 범인인 하이드는 같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소설이 보여 주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두 가지 성품의 '끼'가 잠재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선함'과 '악함'의 양면이 두드러지게 표출될 때, 인간은 '위선자'가 되고 '이중 인격자'로 전락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나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게서 위선의 뿌리를 발견합니다. 주님을 판 대가로 은 30냥을 받고서도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입니까?" 하며 가증스런 태도를 보이던 유다에게서도 위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선을 싫어하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하며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오늘의 세태는 가증스런 위선이 더욱 판을 치고 있습니다. 웃음을 띤 얼굴 뒤로 온갖 추악함이 깃들어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오직 선한 양심을 가지고 생활함으로써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내면의 삶을 돌아보고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4. 마음속을 살펴보라
회개는 위선자들에게 필요하다. 위선은 성결을 위장하는 것이며, 위선자 또는 무대 연기자는 도덕가보다 한 술 더 떠 종교의 의상으로 몸치장을 하고 있다. 그는 경건의 형식은 자처하지만 능력은 부인한다(딤후 3:5). 위선자는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집 같지만 모든 방안은 어둡다. 그는 아름답게 금박을 입힌 썩은 기둥이며, 그는 신앙고백의 가면 밑에 자기의 전염병의 상처를 감춘다. 위선자는 얼굴을 화장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거룩을 꾸미는 화장을 한다. 그는 겉으로 선하기 때문에 정말로 악할 수 있다. 위선자는 그의 눈을 하늘나라에 못박아놓고 있는 것 같으나 그의 마음은 불순한 육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그의 양심에 역행하여 비밀한 죄 가운데 살아간다. 그는 말씀을 듣지만 오로지 귀뿐이다. 그는 교회 헌신에 열심이며 그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그를 칭찬하지만 그러나 그는 가정과 골방 기도를 등한시한다. 위선자는 겸손을 가장하지만 이것은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하여서다. 믿음을 자처하지만 그는 믿음을 방패로 삼기보다 오히려 가면으로 삼아 이용한다. 그는 겨드랑이에 성경책을 끼고 다니지만 자기 마음속에는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말씀의 촛대를 가지고 당신의 마음속을 조사해서 혹시 거기서 아무 회개거리도 찾아낼 수 없을지 살펴보라.
/ 토마스 왓슨
5. 현대의 외식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고 있다. 그들은 구세주에 대한 역할의 모델로 세상에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참으로 엄중한 책임이다. 찰스 스윈돌은 "좋든지 싫든지 세상은 마치 갈매기가 얕은 물가의 새우를 찾는 것처럼 우리들을 자세히 주시하고 있다. 신자들은 지속적인 감시 아래 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일에 있어 가장 큰 위험이다. 우리가 세상에 그리스도와 그 삶에 대해 전하는 모든 것은 사람들이 본 우리의 삶이라는 체를 통하여 걸러져 나간다."라고 말했다. 제임스 스핑크는 "기독교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옹호하는 자들로 인하여 크게 해를 받아 오고 있는데 이는 세상이 때로 그들의 말과 삶이 서로 다른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만일 기독교가 우리가 말한 대로 옳다면 마땅히 그들의 삶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이치에 맞는 변론을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허드슨 테일러도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치 성경이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순된 삶이 나의 회의론적 동료들의 강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주 예수께서 잘못 제시되고 있는 예는 아주 많다. 최근에 나는 범퍼에 두 장의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트럭을 본 적이 있다. 하나는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것이었고 오른쪽에 있는 다른 하나는 더 인상적인 이태리식 글체로 "내 차를 건드리면 너의 얼굴을 부셔놓겠다"라고 쓴 것이었다. 아마도 차 주인은 두 스티커의 의미가 크게 대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 몸은 그 사람을 나타내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시려고 택한 하나의 도구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나는 어떤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한다. "그들이 오직 나를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면 과연 그들은 내게서 무엇을 볼 것인가?
/ 윌리암 맥도날드
6. 신약 속의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구약을 정경으로 여겼으며 풍유법을 사용하여 구약을 해석했다. 형식이나 관습을 중요시 하였고(마 23:23; 눅 18:11) 철저하게 금식을 지켰다(눅 18:12). 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행 26:5; 빌 3:5)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연구했고, 레위기의 청결 의식(레 11장)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점차 전통이나 장로들의 유전(the tradition of the elders)을 중요하게 여겨(마 15:2; 막 7:3, 5-8) 거의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 철저하게 외적인 면을 중요시한 결과 안식일 준수에 얽매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거나(요 9:13, 16) 이삭을 잘라 먹는 것(마 12:1; 눅 6:1-11)까지 죄로 간주할 정도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6천 명 가량이었다(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는 2만 5천에서 3만 명으로 본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은 천사와 영의 존재, 부활 등을 믿었으며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었으나 헬라 문화에 대해서는 거부했다.
복음서엔 예수님과 바리새인 간의 갈등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모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생에 대해 물었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잡으려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항변했고(요 7:50-51) 후에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장사지내기도 했다(요 19:38-42). 처음엔 예수님을 대적했으나 후엔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된 바울 같은 사람도 있었다(행 9:1-30; 빌 3:5-21).
/비전성경 사전 중에서
7. 표리부동
한국말 잘 하기로 이름났던 미국 선교사 김기수 박사의 일화 중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숭실대학 교수로 있을 때 한번은 시험기간이 되었다. 앞뒤로 앉은 두 학생이 시험지를 보고, 보여주는 장면을 목격한 김기수 선교사는마침 그들이 하나는 표씨요. 다른 한 학생은 이씨임을 알고 즉석에서 문자를 활용하여" 표리부동이요"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표리부동은 속과 겉이 다르다는 뜻이다.
8. 이단의 위선
성경: 고후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사람들은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쉽게 해치우는 이들에게 존경과 경외의 감정을 지니게 마련입니다. 샘 패치(Sam Patch)라는 사람이 1829년, 높이 48미터나 되는 나이아가라폭포에 뛰어들었다가 살아나왔을 때, 당시의 미국인들은 미친 듯이 열광했고 그로 인하여 '샘 패치 흉내내기'가 열병처럼 전미국을 휩쓴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이런 심리를 간파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고행이나 금욕적인 행위를 강요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야만 그 종교를 신봉하는 일반 신도들에게 그들이 신성하고 거룩해 보이고 또 권위가 있겠기 때문입니다. 고로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건전한 인간관계를 파괴하거나 또는 비인격적인 인간 활동을 권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비록 천사의 모습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위선자요 가짜 크리스천이라고 정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9. 못박히는 소리가 들리는가?
전도를 하다 보면 “저는 교회 안 갑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이 더합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세요”라고 그들을 설득해 보지만 참 안타깝습니다.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타종교인…. 참으로 안타까운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전도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별로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정말 악영향을 끼치는 이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누구냐구요? 바로 모든 가치는 이 세상에 두고 이름만 신앙인으로 사는 반(半) 그리스도인들이지요. 자신들의 생활로 예수님을 모욕하고, 기독교에 먹칠하며, 복음 전파를 저지하는 데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부류입니다. “당신의 종교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기독교”라고 대답하지만, 그들에게는 진급하고 출세하는 것이 예수님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박수와 칭찬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돈, 명예, 욕심으로 가득 찬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차지할 공간이 없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남들도 천국에 가지 못하도록 막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진노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고춧가루를 뿌리는 반(半)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내 맘에 그린 예수 / 방선오
10. 주머니 속의 금 십자가
어느 때 친구가 전에 없이 커다란 금 십자가를 가슴에 단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붙들고 한 마디 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어느 사람이 쓴 논문을 보았더니 가슴에 단 십자가가 크면 클수록 위선도가 높다 그러더구만” 그랬더니 그는 당장 떼서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마디 더했습니다. “주머니에 떼서 넣는 사람은 더 위선자라고 그러더구만.”
/ 곽선희 목사 설교중
11.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본문: 마 15;1∼9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8절)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건강하지 못한 사회를 ‘적대감 불신감 도구화’라는 세 단어로 특징지어서 말합니다. 적대감은 미워하게 만들고 불신감은 믿지 못하게 만들며 도구화는 사람을 이용하도록 만듭니다. 심히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사회는 적대감 불신감 이기심이 팽배합니다. 그래서 믿음도, 존경도, 신뢰도, 예의도, 인격도 없는 악하고 슬픈 세대가 되고 만 것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처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병든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전통을 따지며 예수님의 제자들을 책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질을 망각한 채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일축하십니다. 주위에 병 가난 절망으로 허덕이는 자가 많은데 종교적 논쟁을 하고 있겠느냐는 질책입니다.
“계명의 참뜻을 이해하고 그대로 행하라” 먼저 신앙을 핑계로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죄를 지적합니다(5∼6절). 이는 신앙을 핑계로 가족과 이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외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외식이라는 말은 ‘두 얼굴을 가진 배우’라는 뜻입니다. 남에게는 바르게 살라고 하면서 스스로는 거짓되게 사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15:8).
‘피해자’(이범선 저)라는 소설에 보면 요한의 아버지 최 장로는 고아의 아버지로 칭송 받습니다. 요한도 고아들과 똑같이 자랐기에 고아에 대해 어떤 편견도 없습니다. 그래서 같은 고아원의 명숙을 사랑하고 그녀를 아내로 삼고자 아버지께 허락을 청합니다. 그러나 고아를 며느리 삼을 수 없다는 한 마디에 명숙은 자취를 감추고 20년 후 술집 마담으로 나타나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알맹이를 잃은 껍데기만의 기독교를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오늘 이 소설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또 하나의 최장로가 아닐까’‘우리의 교회가 껍데기만의 교회가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망각한 채 비본질적인 것(교리 교파 제도 권위 건물 성도 수 등)에만 신경 쓰는 것은 아닌지,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는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됩니다. 진정 우리 모두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야 하겠습니다. 전통 제도 습관 등 부수적인 것은 모두 내려놓고 순수하게 하나님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손이 증명하자/신앙을/발이 증명하자/참 신앙을 코가 증명하자…그리고 주일이 아닌 월요일 아침에도/금요일 밤에도 증명하자”(박목월)
* 기도: 주님,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 같은 종교인이 아니라 삶으로 진실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석년 목사(서초교회)
12. 현대판 클레망스
‘전락’은 1956년에 발표된 실존주의 문학가 카뮈의 대표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의 술집에서 전직 변호사 클레망스라는 사나이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클레망스는 오래전 한 여인이 센강에서 투신자살하려는 것을 보았으나 자살 목격자로서의 불편함을 생각해 그 여인의 죽음을 방조했다. 그는 자살을 방조한 이후 자신의 명성과 덕행이 얼마나 기만적이었나를 깨닫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살한 여인의 소리가 귓전에 들려와 고통을 당한다. 그는 세상에서 진정한 결백이나 정의 등은 모두 위선이라고 단정한다. 클레망스는 스스로를 정신적 범죄자라고 말하고 인간의 위선을 깨닫게 하고 죄인으로서의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려고 한다.추운 겨울날 구걸하는 손을 동전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하는 현대의 클레망스는 인간이 죄인으로 전락한 존재임을 증명한다.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죄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고 한다.
13. 천국의 문
세계적인 부흥사 무디(D.L.Moody)는 하루에 1명씩 개인 전도를 한다는 기본 방침을 세우고 노력한 분입니다. 하루는 교회에 대해 대단히 나쁜 감정을 갖고 있던 한 불신자를 만났습니다. 무디 선생이 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교회에 나올 것을 요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는 교회에 나가고 싶어요. 그러나 저는 많은 위선자들이 말과 행실이 틀리면서 교회 생활을 하고 있기에 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군요. 저는 그 위선자들이 골도 보기 싫거든요." 그러자 무디 선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순간적인 지혜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도 보기 싫은 위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 가운데도 유다라는 위선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것은 당신도 알고 있으시지요? 그리고 그 위선자들은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들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도 교회를 부정하고 나가지 않는다면 분명히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지옥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당신이 그렇게 싫어한 위선자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교회에 나온다면 잠시 위선자들과 만나겠지만 교회 출석을 거부한다면 영원히 그들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교회 생활을 잘해서 천국에 가게 된다면 거기에는 위선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삶이 되겠습니까? 당신이 진정 위선자들을 중오하고 그들과 함께 살기를 원치 않는다면 부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래서 위선자들과 영원히 헤어지는 기쁨을 맛보십시요." 무디의 지혜로운 대답에 감동을 받은 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착실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비록 교회 안에도 많은 문제와 거짓과 부정이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교회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인 것입니다.
14. 위선
위선은 한자로 ‘거짓 위(僞)’에 ‘착할 선(善)’을 쓴다. 즉 선한 것인 양 위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위선이란 결국 도덕적 결벽성 때문에 생긴 것이다. 미국 서부의 한 대형 교회에서 과거에 치명적인 도덕적 죄를 지은 적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더니, 이들 중 대부분이 평소에 “나는 절대 그런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치던 도덕적 결벽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개혁을 한다. 부정부패를 척결한다. 새 역사를 만든다”고 하면서 정의의 칼을 높이 드는 사람들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개혁되어야 할 대상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목사는 자신이 하는 설교를 자신이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부족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참된 목자의 자격을 갖게 된다. 남편이 잘못했다고 사과할 때 아내는 비로소 남편을 존경하고 위하게 된다. 부모가 말만큼 살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 때문에 자녀들이 제대로 못 크고 있음을 인정할 때, 그 자녀는 비로소 부모의 마음으로 몰입해 들어온다. 인간은 한없이 약한 존재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약함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 우리의 어줍지 않은 자존심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한 대로 일일이 다 보응하시면 우린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뻔히 아시면서도 모르는 척 우리 잘못을 덮어 주시고, 속아 주시고, 끊임없이 사랑해 주셨다.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때다.
- 「칼과 칼집」/ 한홍
15. 편리한 관계?
1991년 1월의 어느 주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태 신앙의 훌륭한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답게 나는 그 주일 아침에도 교회에 가려고 아내와 집을 나섰다. 물론 여느 주일 아침과 마찬가지로 내 몸에서는 지난밤의 잊혀질 수 없는 추억의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주일이고 일주일에 한 번쯤은 하나님을 위하는 척해야 크리스천이라는 관계가 유지되겠지...’. 나는 그 편리한 관계를 한 번도 깬 적이 없었다. 그날 하루의 만남으로 인해 내가 다시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짓더라도 주님이 용서해 주시리라.
예배가 시작되었다. 몸은 여전히 힘들었다. 취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사도신경을 외우고 나서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아내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술 냄새 나니까 입 다물어욧!”
나는 그때 마치 커다란 돌문 같은 것이 내 머리를 콱 찍어 내려 누르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너무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숨이 턱 막혔다. ‘내가 교회 집사라는 사람인가? 교회 집사가 주일 아침에 찬송도 부르지 못할 정도로 술과 담배 냄새에 찌들어서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는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시험에 들게 하니까 아예 입을 다물라고?’ 나는 그제야 몸에서 확 풍겨 나오는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성전이라는 몸과 마음을 나는 얼마나 더럽혀 왔는가. 어떻게 이제까지 아무 부끄럼 없이 이 찬송을 부를 수 있었단 말인가. 그날 아내가 손으로 술 냄새 나는 입을 틀어 막았을 때, 그래서 내가 비로소 창피함에 몸을 떨구었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믿음의 씨앗을 떨구어 주신 것이었다.
- 「새벽형 크리스천」/ 문봉주
* 기도: 주님 앞에 드리는 저의 봉사와 헌신이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길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어리석은 일을 행치 않게 하소서.
16. 체면과 형식
성경: 마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서양에서 전해오는 재미있는 실화가 있습니다. 스페인 남단에 있는 지브롤터는 영국에서 유럽 대륙 진출의 교두보적인 요새였습니다. 스페인은 무려 4년 동안이나 이 지역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만 하였습니다. 스페인 여왕은 "지브롤터 성에 스페인 깃발이 나부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며 억지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 사령관은 어느 날 아침 성벽에 스페인 국기를 1분 동안 휘날리게 했습니다. 그러자 여왕은 군대를 철수시켰고,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실리와 체면, 진실과 형식의 기로에서 인간은 진실의 탈을 쓴 체면을 택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동일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목사인데, 혹은 장로인데, 누구인데 .... 라는 인간 유전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보다 중요하게 여깁니다. 헌금은 이 정도 해야 하고, 차는 이 정도를 타야 하고, 예배는 이만큼 참석해야 하고.... 체면과 형식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참된 행위보다 더 위에 둡니다. 오직 거듭나는 체험과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외식과 거짓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 기도: 순수하고 참된 믿음을 갖게 하소서.
17. 칼 막스의 부친
오래 전 독일의 어느 마을에 자기 아버지에 대해 자랑스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 소년이 살고 있었다. 유태교 신앙을 가진 그의 부모는 열성 있는 신자였기 때문에 안식일마다 열심히 회당에 참석하여 십일조와 예물을 드리며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였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다가 이 소년이 10대가 되는 때에 가족들은 다른 마을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새로 이사한 마을에는 개신교인 루터파 교회뿐이었다. 짐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부친은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다음 주부터 우리들은 유태교의 전통적인 신앙을 포기하고 루터파 교회에 출석하자."고 했다. 갑작스런 부친의 태도에 놀란 소년은 교회를 옮겨야 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그 아버지의 대답은 "우리 사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말에 이 소년은 크게 당황하고 실망하게 되었고 그 실망은 점차 신앙에 대한 의심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그 의심은 일생토록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후 그는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 날마다 영국의 대영 박물관에 앉아 헤겔의 철학을 연구하게 되었고 1875년에는 자기의 사상을 총정리 하여 '범철학비판'이란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책의 내용은, 첫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둘째, 인간의 양심도 부정하였다. 셋째, 종교는 아편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공산주의를 재창하였다. 부모의 위선적인 종교 생활이 엄청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칼 막스였다.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시고 좋은 열매를 맺는 자가 될 것을 강조하셨다. 야고보 장로님은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0-25)고 하였다.
18.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성경: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세계 여성의 애인으로 불리던 미남 록 허드슨의 병든 초라한 얼굴이 TV 화면에 나타나고 그가 에이즈 환자라는 것이 공개되었을 때 세계는 처음으로 그가 동성연애자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35년간이나 이중 생활을 하였습니다. 친구들은 대부분 그의 곁을 떠났고 죽기 전에 도리스 데이가 "천국에서 만나자"고 한 마디를 던져 준 것이 유일한 위로였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오늘도 빛된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 하나님이 웃으시지 않겠는가?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수도원의 재정이 바닥났다. 수도원 기물은 낡고 끼니를 잇기도 어렵게 되었다. 그때에 젖소를 먹이는 목동이었던 고셰는 약초를 이용하여 술을 만들게 된다. 그가 만든 ‘불로 장생주’가 날개 돋친 듯 팔리자, 수도원은 활기를 띤다. 고셰는 그 공로로 신부가 되나 계속하여 술을 만들며 시음하므로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고셰는 미사 중에 술주정을 하여 귀신들렸다는 말을 듣고 감금되어 술만 제조한다. 고셰는 젖소만 키우게 해달라고 애원하나 거절당한다. 저녁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는 고셰의 영혼을 위하여 합심기도를 드리자고 한다. 그 시간에 술 만드는 낡은 건물에서 술에 취한 고셰의 슬픈 노래와 고함 소리가 들어온다. 이때 신부들은 염려하며 말한다. “이를 어쩌나! 교구의 신도들이 알면 큰일인데….” 이것은 알퐁스 도테의 단편 「고셰 신부의 불로 장생주」의 줄거리로 신앙인의 위선과 독선을 잘 깨우쳐 준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웃으신다는 표현이 나온다. 웃음은 기쁨에서 나오는 웃음도 있으나 그 반대로 너무나 기가 막혀서 나오는 웃음도 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4). 물론 성경엔 주로 악인(불신자)들의 행태를 보시는 하나님의 비웃음이다. 그런데 나는 신앙인들의 불신앙적인 행태에 대한 비웃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교회 안팎의 생활에 이중성을 가질 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보며 웃으시지 않겠는가?
- 「한 날라리 집사의 격려」/ 박찬규
20. 위선적인 삶
나다니엘 호오돈이라는 작가가 쓴 주홍글씨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여주인공의 이름은 미모의 여인 헤스터 프린입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강요로 돈이 많고 나이도 많은 의사 칠링워드와 결혼하여 남편의 권유로 먼저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와 보스턴의 한 작은 마을에 정착합니다.곧 뒤따라오겠다던 남편이 세월이 꽤 흘러도 오지 않자 헤스터는 남편이 죽은 줄로 생각하고 마을의 목사인 아서 딤스데일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맙니다. 그리고 딸 펄을 낳습니다.남편이 없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조그만 마을에 금새 퍼지고,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라고 판단한 동네 주민들이 헤스터를 감금하고 엄격한 재판을 합니다.하지만 헤스터는 끝내 불륜의 상대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습니다.그러자 그 재판은 헤스터에게 딸을 안고 3시간 동안 교수대 위에서 만인의 구경거리가 된 뒤 주홍색의 'A'자를 가슴에 달고 다니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A'는 '간통'을 의미하는 영어'Adultery'의 머리글자로, 나는 간통한 여자라는 것을 온 동네방네에 알리고 다니라는 것입니다. 간음죄로 몰린 헤스터는 판결대로 'A'자를 달고 당당히 그 마을에서 살아갑니다.
그로부터 7년 뒤, 헤스터가 교수대에 섰던 바로 그 자리에 선 딤스데일 목사는 마을 축제를 시작하는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마친 딤스데일 목사는 갑자기 헤스터와 그녀의 딸을 부르며 바로 자신이 그 상대라고 외치곤 양심의 가책 속에 살아온 자신의 죄를 고백한 뒤 숨을 거둡니다.
이 소설은 청교도적인 신앙이 가치를 이루는 당시 미국 사회의 허상을 꼬집는 소설이었습니다. 실상은 간음하는 여인보다 더 위선적인 죄악의 삶을 살면서도 남의 죄를 쉽게 정죄하는 당시의 사람들의 이중성을 꼬집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을 보면 정죄는 잘 하고 파해치는 잘 합니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우리 자신의 위선과 죄악들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박춘수 목사
21. 철야기도 시간에
우리나라 초창기에는 밤 12시에 시작하는 자정기도가 있었습니다. 매주 금요일 밤 12시에 드리는 자정기도를 철야기도라 하였습니다. 그 철야기도의 전통이 요즘에는 사람들의 편의를 생각해 시간을 조금씩 앞당기다가 아예 저녁 7시 예배로 드리는 교회까지 생겼습니다. 그것이 불만이었던 어느 교회에서는 옛날 전통대로 되돌아가자고 하여 밤 12시부터 철야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대부분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인지라 밤 12시 이후부터 새벽까지 기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기도하면서 졸았습니다. 코를 골면서 잠에 떨어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경건한 사람이 열심히 기도를 하다가 눈을 뜨고 보니 모두 자고 있는지라 "쯧쯧 사람들하고는... 아무도 기도할 마음이 없군! 차라리 이불을 덮고 누우시지. 저게 뭐야, 어이고 저 장로님은 아예 시체처럼 누워 있군!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네... 오 주님... 얼마나 보기에 민망하십니까?" 그때 하늘에서 낮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이여! 그렇게 깨어서 하는 일이 남 흉보는 일이라면, 차라리 너도 얼른 자거라..."
/최용우
22. 체면과 웃음
아이들은 쉽게 잘 웃어요. 조금만 얼굴 표정을 이상하게 지어 보여도 까르르르 목소리를 조금만 바꾸어 말해도 깔깔깔깔...
그러다가 자라면서 어느 틈엔가 웃음을 잃어버립니다. 웃음을 잃어버리는 시점은 대략 '체면'을 차리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그 체면이라는 가면이 참 고약한 것입니다.
어떤 교장선생님들의 모임에서 강사가 뒤집어지게 웃기는 강의를 하는데도 체면으로 똘똘 뭉친 교장선생님들은 표정하나 안 바뀌는데... 그래도 사람인지라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꼭 다물고 음 프프프프 큭큭큭큭... 그러더군요. 아이고.. 그냥 우화화화화 하하하하 웃어버리세요. 웃는다고 누가 안 잡아먹어요. 에라... 모르겠습니다. 그분들이야 체면을 차리면서 웃든지 말든지 저는 오늘도 실컷 웃으렵니다. 그리스도인의 별명은 '웃는 사람들'입니다. 그 별명답게 웃고 살렵니다.
/최용우
23. 돈을 찾고 믿음을 잃어버린 권사
어느 권사님의 가정에 복면강도가 들어왔습니다. 잠자고 있던 권사님이 일어나 보니 복면한 사람이 가슴에 칼을 겨누며 말하기를 "조용히 하시오!" 라고 했습니다. 권사님은 태연한 자세로 강도의 손을 잡고 "하나님,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앞으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친 권사님은 강도에게 말하기를 "나는 ㅇㅇ 교회 권사인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라고 묻자 강도는 권사님의 행동에 당황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며칠 전에 교도소에서 출감해 나왔는데 갈 곳은 없고 직장도 없는지라 손수레를 하나 구해서 장사하면서 살아가야겠구나 생각하다가 이렇게 권사님의 집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강도의 말을 들은 권사님은 손수레 값을 주면서 말하기를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고 부디 성공하여 잘 살아보라" 고 했습니다. 강도는 권사님의 말에 감동되어 복면을 벗고 엎드려 절하며 말하기를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강도가 밖으로 나가자 권사님도 따라 나왔습니다. 날씨도 차가운데 들어가시라 했지만 괜찮다며 사거리까지 나온 권사님은 부디 성공하라며 손을 흔들어주며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즉시 그 옆에 있던 파출소에 들어가 신고하여 그 강도를 잡게 했습니다. 권사님의 얼굴을 본 강도는 어이없어서 입술을 깨물며 지긋이 떨었습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천사 같은 모습으로 기도해주며 성공하라 했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경찰들은 "저런 게 무슨 교회 권사야?" 하면서 욕했습니다. 권사님은 돈은 찾았지만 믿음과 사랑은 영원히 잃고 말았습니다.
24.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네
두 천사가 여행을 하다가 어느 부잣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집 주인은 매우 거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 못해 나그네들로 하여금 묵어 가도록 했지만 편안한 방을 쓰도록 하지 않고 차갑고 비좁은 지하실의 한 구석에서 자도록 했습니다. 딱딱한 바닥에 누워서 잠을 청하던 늙은 천사가 문득 벽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고는 그 구멍을 메워 주었습니다. 젊은 천사가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네...”
그 다음 날 두 천사는 아주 가난한 사람의 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 집 주인인 농부와 아내는 그들을 아주 친절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그들에게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침대를 쓰도록 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집 주인 내외가 울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젖을 짜서 팔아 생계 유지에 큰 보탬이 되었던 암소가 밤 사이에 갑자기 죽었던 것입니다. 화가 난 젊은 천사가 늙은 천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뒀느냐고 따졌습니다. 인색한 부자는 도와 주면서 나그네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눈 가난한 농부의 귀중한 암소를 왜 죽게 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늙은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네. 우리가 부잣집 지하실에서 잘 때에 나는 벽 속에 금덩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지. 그 집 주인은 탐욕으로 가득 차서 자신의 부를 나누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벽에 난 구멍을 메워서 그가 금을 찾지 못하게 한 걸세. 그리고 어젯밤 우리가 농부의 침대에서 잘 때 죽음의 천사가 그의 아내를 데려 가려고 왔었네.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 농부의 아내 대신 암소를 데려 가라고 했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네...”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특히 그런 것 같습니다.
25.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사람이 살다 보면 누구나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러나 아예 겉 다르고 속 다르게, 그것도 눈에 띄게 노골적으로 표현을 해대는 사람들을 보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A지역의 주위 상황을 B지역에서 전혀 다르게 말한다. 얼굴색도 안 변하고...
또 갑과의 대화는 좋게 해 놓고 을과 대화할 때는 갑을 강력히 비난하는 이를 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평안하던 조직이 술렁이게 되고 우리 사회 구성원 간의 믿음이 깨지고 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러지는 말자! 이런 유형은 거의 평생
그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가 옳다고 주장만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누구에게나 겉과 속이 다르게 해야 할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아예 생활 자체가, 말 자체가 신뢰를 잃을 정도로 다르게 행동 한다면, 이건 모순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진실을 향하여 고개를 듭시다.
- 겉과 속이 같은 자는 쓰임을 받아요. -
26. 외식과 위선을 벗자
어느 마을에 거대한 참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있었고, 또한 그들보다 오래 살아 남을 것으로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찬 폭풍이 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나무의 썩은 속이 훤히 드러났습니다. 겉으로는 힘과 장수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병들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겉과 속이 다른 모순된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속일 수 없는 우리의 실체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양 할렐루야와 아멘을 외치지만 내면은 더럽고 추한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사회로부터 영향력과 신뢰성을 하나하나 잃어가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회칠한 무덤일 뿐입니다. 말과 믿음과 행함의 균형 있는 성장이 타락한 이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진실과 겸손으로 옷입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교만과 외식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외식하는 자를 향한 주님의 책망을 듣지 않고 칭찬을 듣기 때문입니다.
/한태완 목사 설교중에서
27. 쯧쯧쯧쯧
남의 종교 이야기하기가 거시기 하지만, 오늘 어떤 신문에 난 글을 읽고 느낀 것이 있어서 한마디 합니다. 원래 스님들 옷은 똥걸레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옷이 낡으면 걸레로 만들어 쓰다가 걸레로도 쓸 수 없을 만큼 닳아지면 똥걸레로 쓰다가 똥걸레로도 쓸 수 없게 되면 그걸 덕지덕지 기워서 스님들의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일부러 최고급 소재의 천을 가위로 잘라 누더기 옷을 만들어 입는데, 그 누더기 패션 옷 한 벌에 몇 백만원짜리도 있다고 합니다. 참, 어이가 없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하품이나 하자.
성경에서는 이런 모습을 가리켜 '바리새인의 위선'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도 이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모습 솔직히 많죠?
/최용우
28. 화장은 지워진다
화장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 여인들이었다고 한다. 자기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천연두가 유행하던 중세에는 마마 자국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진하게 했다. 서커스단의 도화사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피에로 화장을 한다. 아프리카나 뉴기니 원주민들은 전쟁을 할 때 무섭게 보이려고 화장을 한다. 마치 카멜레온이 상대방과 싸울 때 붉은 색을 진하게 내는 것처럼 말이다.
화장을 하는 경우들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그 이유를 다져보면 남을 속이기 위한 것으로 집약된다. 화장을 잘 하면 얼굴의 결점도 감춰지고 더 아름답게 보인다.
화장은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만 그 형태가 다를 뿐이다. 남자 여자 가리 것 없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화장을 한다. 학벌, 가문, 지역, 돈 명예 등 여러 가지 다양한 화장 도구들을 사용한다. 그것으로 자기의 본성을 가리고 남 앞에서 멋진 사람으로 내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얼굴에서 화장이 지워질 때 추한 모습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지워진 자국에서 차츰 드러나는 본래의 얼굴이 곱기는 어렵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얼마든지 화장을 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화장은 언젠가 지워지게 마련이고 이땅에서 지워지지 않는다해도 하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지워질 것이다. 위조 화폐가 통용되지 않듯 하늘 나라에서는 거짓이나 위선이 통하지 않는다. 교회에서나마 참 모습으로 살 수 없을까!
-톨스토이 얼굴이 빨개진 이유/ 양참삼
29. 화장
[10,20,30,40,50,60대의 화장법]
10대가 화장하면 꽃단장
20대가 화장하면 치장
30대가 화장하면 화장
40대가 화장하면 분장
50대가 화장하면 변장
60대가 화장하면 환장
30.비난은 거룩하지 못한 것
시골 고향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고향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주일 낮예배 기도를 인도하실 때마다 항상 ‘… 하옵시며’ 등 과 같이 ‘며’로 발음해야 할데를 ‘면’으로 발음하시곤 했다. 나는 그 ‘면’이라고 발음되는 게 왜 그렇게 싫던지, 거룩한 척 외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장로님 앞에서는 감히 아무 말도 못하고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만 역겨운 감정을 말하곤 했다. 그 때 고향 교회에는 세 분의 장로님께서 돌아가며 낮 예배 기도를 인도하셨기 때문에 대략 3주마다 한번씩 ‘며’를 ‘면’으로 발음하는 기도를 들어야만 했고 나는 나대로 예배 후에 ‘면’자 비난을 쉬지 않았다. 물론 내가 ‘며’를 ‘면’으로 쓸 때 고등학교 시절 그 장로님을 비난하던 일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로마서 2:1을 읽으면서 성경이 어쩌면 나 자신도 잘 알지 못했던 내 마음을 이렇게 정확히 말하고 있을까 생각하며 놀랐다. 비난은 곧 죄이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것이다. 비난하는 자가 비난받는 것은 그 일 자체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양승훈 목사
31. 사랑을 실천하자
얼마 전 타임지에서 앙상하게 뼈만 남은 우간다의 한 어린이가 비어있는 그릇 바닥을 들여다 보며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진을 보고 너무 측은해서 보는 이마다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습니다. 한해 동안 우간다에서 굶어 죽는 사람 수는 무려 1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오늘날 기아 문제는 날로 극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잘먹고 잘입고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통계 자료에 의하면 92년도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만 7천만 명이 굶주림 속에 있었으며, 서기 2천 년에 이르면 배고픔 속에서 잠자리에 들어야 할 사람이 무려 6억 4천 5백만 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낮은 곳에 처한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나만 잘입고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어 비판하면서 그냥 지나치면 안 됩니다. 외식주의자가 되어 풍경 구경하듯 바라보면서 그냥 지나쳐도 안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행위로써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증거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사랑과 화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서 사랑을 생활 가운데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32. 인면수심(人面獸心)
영국 대영 박물관에는 옛날 앗수르 제국이 왕궁 입구에 세워놓았던 수호신 형상이 있다. 돌에 새긴 얼굴 형상은 사람이고 몸은 독수리 날개로 덮여 있고 발은 사자이다. 사람의 지혜와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의 날개와 힘이 센 사자를 통합한 그 형상이 앗수르를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조화와 불행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변질시킨 데 있다. 사람과 독수리 그리고 사자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고 우상숭배다. 사람 속에 짐승의 형상이 있는 것이 죄로 타락한 인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굴은 사람인데 속에는 돼지 염소 공작 뱀 호랑이 같은 짐승이 들어 있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을 가리켜 화가 임할 외식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사순절에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짐승들의 형상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33. 외식
성경: 마6: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유치원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다가가 "이제 장난감을 치우세요"라고 하면 두 종류의 아이들이 생겨납니다. 한 부류는 선생님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어지럽히면서 놀다가 비로소 선생님이 매를 들고 나타나면 열심히 정리를 하는 척합니다. 아니면 사탕을 준다거나 하는 보상이 따를 때 열심히 합니다. 또 한 부류의 아이들은 선생님이 계실 때나, 안 계실 때나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장난감을 치웁니다. 물론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어린이들이 좀더 성숙된 성품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하는 봉사, 기도, 금식, 헌금생활 등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외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꾸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합니까? 보이지 않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변함 없이 행하는 신실한 신앙의 모습입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바라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34. 외식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외식이다. 왜냐하면 외식은 천국 가는 길을 막는 마지막 전술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성경 읽는 것,교회 가는 것과 봉사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막을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마지막 무기가 바로 외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기도를 외식으로 하게 하고 성경을 외식으로 읽게 한다. 교회 출석을 외식으로 하게 하고 봉사를 외식으로 하게 한다. 여기서 바리새인 같은 신자가 나오고 위선자가 나온다.
종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외식주의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한 것은 그들이 일반 사람보다 더 악하거나 잘못되어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지도자로 있으면서 외식에 사로잡힐 때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외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사탄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방법이다. 우리가 이단을 구별하기 어렵고 막기 힘든 것은 외식 때문이다. 그들의 간판은 항상 정통이고 성경이며 경건이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무엇이 되기보다는 어떻게 보이기를 더 원한다는 데 있다. 행복하게 되기보다는 행복하게 보이기를 더 원하고 선하게 되기보다는 선하게 보이기를 더 원한다. 우리의 유교적 전통과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외식주의적인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외식이란 누룩과 같아서 그냥 있지 않고 점점 부풀어 번져 가기 때문에 신앙인에게 가장 무서운 독소인 것이다. 베드로의 편지를 보면 말세의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외식이라고 했다(벧전 2:1). 그러므로 사탄의 외식전술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신성종 목사<대전 월평동산교회>
35. 외식
성경: 마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1453년 회교 군대가 콘스탄틴노플을 포위했습니다. 콘스탄틴노플은 로마와 함께 중세 기독교의 성도(성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발칸인들이 앞으로 수세기 동안 기독교의 지배를 받느냐, 회교의 지배를 받느냐의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는데도 교회의 사제들이 모여서 성모 마리아상의 눈의 색을 무슨 색으로 할 것이냐, 천사는 남성적이냐 여성적이냐, 성수(성수)에 파리가 빠져 죽었는데 성수가 오염됐느냐, 파리가 성화(성화)됐느냐하는 문제로 싸웠습니다. 외식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오늘도 외식하는 신앙이 아니라 진실을 가지고 참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36. 청중에게 바쳐진 기도
오래 전 미국 보스톤에서 전도집회가 열렸는데,주최측은 그 도시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학자를 대표기도자로 선정하였다. 예상대로 그는 보통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는 수식어를 사용하여 기도문을 훌륭히 낭독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솜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음을 알았다.한 신문기자는 “이 위대한 학자의 기도는 아마도 보스톤 시가 창설된 이래 청중에게 바쳐진 가장 웅변적이고 가장 지성적인 기도였다”라고 평가하는 글을 썼다. 때떄로 우리는 과연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신을 과시하려는 기도, 주위 사람들을 의식한 기도는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바리새인의 외식적인 기도다. 이제 허위에 찬 옷을 벗어버리고,진솔하게 하나님 앞에 고백하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장학일목사(예수마을교회)
37. 영혼의 호흡
호흡을 뜻하는 프뉴마는 영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뒤 코에 불어넣은 생기가 바로 프뉴마인 것이다. 우리가 공기를 들이마셔야 사는 것처럼 영혼도 호흡을 해야 살 수 있다. 이 영혼의 호흡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숨이 드나드는 기관지에 장애가 생기는 병을 천식이라 한다. 들이마실 때는 문제가 없는데 공기를 내뿜으려 하면 잘 나가지 않고 소리만 요란하게 된다. 영혼의 호흡인 기도에 장애가 생기면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못하게 되고 우리는 겉모습만 요란한 외식적인 삶에 빠지게 되고 만다. 중보기도를 통해 기도의 영역을 넓힌 분들의 삶을 보면 두려울 것이 없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든 새로운 뉴스를 접하면 먼저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이다. 신문의 모든 이슈를 기도 제목으로 삼아 전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후배 의사가 있다. 그는 이미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선교사이며 그의 영혼은 영의 호흡을 통해 늘 맑게 보존될 것이다.
/박상은 박사(샘안양병원장)
38. 위선적 그리스도인
토머스 왓슨은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생명을 잃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의 보상을 잃을 수는 없다. 그는 자기의 머리를 잃을 수는 있을지언정 면류관을 잃을 수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생명은 잃지만 보상은 잃지 않고,머리는 잃지만 면류관은 잃지 않는 경우는 한없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핍박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참성도를 구별해내는 방법입니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위선자들은 감람산까지는 그리스도를 따라가겠지만 갈보리산까지는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숨을 내놓는 체하면서 내놓지는 않고,희생하는 체하면서 희생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하나님도 이런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는 체하시면서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면류관의 상을 얻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39. 누룩이라는 이름의 위선 신앙
스펄전 목사는 위선적 신앙을 빗대어 ‘비 없는 구름과 같고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이 바짝 말라버린 개울과도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 ‘그것은 마치 연극 배우가 왕의 복장으로 분장하여 무대 위를 늠름히 거닐다가 연극이 끝난 후에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가난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여 설교하였다. 위선자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뿐더러 명예를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외양은 마치 미려한 양장본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은 형편없는 책들처럼, 내적인 면을 소홀히 하고 외적인 면에 더욱 관심을 쏟는 사람이다. “하루살이는 걸러서 먹고 낙타는 삼킨다”는 중동의 속담처럼, 위선자의 특성은 큰일을 등한히 하고 사소한 일에 구애된다는 점이다. 또 하나 위선자의 특징은, 남에 대해서는 신랄할 만큼 비판적이고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치리 만큼 관대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금욕적 생활과 경건한 외모로 신앙의 빛 좋은 허울을 쓰고 있어도 결코 속일 수 없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음속에서 발아하는 위선의 싹을 애초부터 뽑아버리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 위선적인 신앙이야말로 복음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거짓된 삶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김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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