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 Barth의 기독론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인가?
이 제목에서 우리는 적어도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바르트의 기독론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아닌 '아래로부터'나 '안으로부터' 등의 기독론일 수도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위로부터'라고 하는 말이 현대 기독론에서 누구에 의해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하는 점이며, 셋째는 이 논제의 신학적 중요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고로 우리는 이 세 가지 점을 중심으로 본 논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제1장 논제에 대한 최근의 발달
1. 현대 기독론에 있어서의 이 논제에 대한 선구자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위로부터'나 '아래로부터'라는 개념은 간단히 정의하기엔 너무 복잡하다. 이 개념의 모호성과 복잡성은 '위로부터'와'아래로부터'라는 단순비교에서도 나타나지만 각 개념 안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개념적으로나 범주적으로,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를 신성과 인성으로, 혹은 사실과 의미해석으로, 혹은 방법론과 인식론으로 대비해서 묘사할 수 있다. 방법론적으로도 역시 두 형태의 기독론을 서술하는 것은 문제다. 왜냐하면 기독론의 의미를 추구하여 예수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재건하는 '위로부터'의 기독론도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으로 이해되는 예수의 사실 위에 놓여있으며, 오직 이 '아래로부터'가 '위로부터'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콘은 기독론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가 상호 배타적인 게 아니라 포괄적임을 강조하면서 과거를 '위로부터'로, 현재를 '아래로부터'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반면에 로사토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로고스 기독론'으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성령 기독론'으로 말한다. 또한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높은' 기독론으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낮은' 기독론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위로부터/아래로부터'의 개념이 접근방법을 특징 지울 때 사용된 반면, '높은/낮은'개념은 기독론의 현실과의 상관성을 논할 때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몰트만은 기독론의 유형, 곧 성육신과 십자가처형 또는 낮아지심과 승천하심에 따라서, 또는 그리스도의 인성보다는 신성을 강조한 이유나,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묻기 전에 구원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하는 이유로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니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니 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기독론적 답변들은 '위로부터'시작되며, 그런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성육신과 부활 위에서 제시된다. 몰트만은 또한 독일 관념론의 '사색적 기독론'은 이러한 형태 위에서 말해졌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나사렛 예수를 고려한다. 고대 기독교 교리에선 '인식 이성'(ratio cognoscendi)은 '존재 이성'(ratio essendi) 안에서 이뤄졌다. 존재가 우선이고 인간의 인식이 그 다음이다. 이 말은 비록 인간이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알 수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사건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말이다.
몰트만은 존재를 '위로부터'로, 인간의 인식을 '아래로부터'로 분류했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 두 내용과 방향은 상호 깊이 얽혀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유한한 인간적 존재가 무한한 신적 존재에 대해서 질문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고로 몰트만은 판넨베르크가 바르트를 비평함에 있어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의 세상을 향한 길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위치에 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개방의 성취를 인식하기 위해서 자신의 유한한 존재의 개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로 몰트만에 따르면 이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의 문제는 단지 '표면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우선 선험적인 신적 기원,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한 다음, 이 신성의 실재 역사 곧 그의 인성을 논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반면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그리스도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인간적 실재에 우선 초점을 맞춘 후 그가 단지 한 인간이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었는지를 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두 기독론적 파라다이임의 출처는 현대 신학자들이 아니라 성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넓게 말해서 공관복음서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말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서와 바울 서신들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맥콰리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현대의 변증적 창안이 아니고 초대교회 기독론의 복원이라고 지적한다. 초대교회는 먼저 인간 예수를 알았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인간 예수 안에서, 이 인간 예수를 통해서 그의 신성을 알게 되었고 고백하게 되었다. 맥콰리는 변화산 얘기는 이것에 대한 가장 좋은 예로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위로부터'냐 '아래로부터'냐는 문제는 단순히 현대 관념론의 산물이 아니라 성서로부터 이어져 오는 전통적 신앙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통 가운데서 19세기의 기독론적 사상까지 거슬러 가보려 한다. 그 이유는 바르트 기독론적 틀이 성서를 제외하곤 주로 19세기의 사상에서 통합했기 때문이다. 트젤레는 '신학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19세기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그것[19세기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한바 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19세기의 주요사상가라 할 수 있는 F.D.E Schleiermacher(1768-1834), G.W.F. Hegel(1770-1831), 그리고 A. Ritschl (1822-1889), K. Rahner(1905-1984)의 기독론적 틀을 생각해 보려한다.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
슐라이에르마허는 기독론을 논함에 있어서 단순히 거부될 수 없는 계시를 전제하지 않는다. 또한 슐라이에르마허는 기독교의 독특성은 유일신 신앙으로서 이 신앙에 대한 모든 것은 나사렛 예수에 의해 성취된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더 나아가서 '[예수의]제자들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어떤 징후나 예감도 없이 그[인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인식했으며, 우리 역시 같은 인식을 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슐라이에르마허는 예수의 제자들이 '위로부터 아래로'라고 특징 지워지는 예수의 神的 부활과 승천 없이 인간 예수 안에서 '완전한' 기독론을 가졌다고 제의함으로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적 요소를 말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맥콰리는 슐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 '위로부터' 온 신적 존재는 그의 완전한 인간, 곧 '아래로부터'에 의해서 교체되어졌다고 말한다. 크리드에 따르면, 슐라이에르마허는 기독론에 있어서 역사(사실)성이 그 어떤 요소들보다 중요한 토대가 됨을 강조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계시에 대한 전제 없이 역사적 긍정적 종교를 향한 하나의 접근 방법을 열었다'고 말한다.
헤겔(Hegel)
헤겔에 의하면 기독론은 그 내용과 행위와 무시간적 사건들에 있어서 神的임을 말한다. 그러나 헤겔은 또한 기독론은 그 자체가 '현상 영역(phenomenal sphere)' 안에서 발전되기 때문에 신적 행위 이상의 것임을 지적한다. 헤겔에 있어서 이 '현상 영역'이란 기독론에서 결정적 중요성을 가진 '내적 요소'로서, '하나님의 무한한 역사'인 나사렛 예수의 역사를 의미한다.
여기서 주지할 사실은 헤겔은 우리가 논제에서 생각코자 하는 '위로부터' 또는 '아래로부터'라는 말을 명백히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선 큉이 지적한 것처럼 헤겔의 기독론은 지나치게 '위로부터'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헤겔에 있어서의 '위로부터' 또는 '아래로부터'의 개념은 접근 방법적 토대보다는 인식적 토대 위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중요한 점은 기독론은 어떤 경우에도, 만약 실재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 원리에 있어서,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라는 두 틀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이다.
헤겔은 하나님의 성육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향한 존재론적 구원에 대한 유일한 신적 행위의 증거로 보기 때문에 그의 기독론을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헤겔이 우리의 이 '위로부터'에 대한 확인은 한 인간 예수에 의해서 어디서나 모두에게 계속해서 알려지기 때문에 이 '위로부터'의 확인은 계속적으로 인간적 가능성이라고 한 점에선, 그의 기독론을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츌(Ritschl)
리츌에 따르면 원래 역동적이고 역사적인 히브리적 복음이 하나의 사색적 헬라 기독교로 바뀐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고로 리츌은 기독교인이 기독론을 논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신앙의 문제지, 형이상학이나 개념을 추구하는 이성적 탐구가 아님을 강조한다. 리츌은 기독교 교의학에서 원칙적으로 신론을 제외하곤 형이상학적 개념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리츌에게 있어서의 이 말은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고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책임 있게 말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리스도가 '나의 主'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의 인간적 존재와 행위 및 고난'의 영역 안에 달려있다. 리츌은 기독론의 '아래로부터'의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인간적 성취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신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으며 우리의 신앙을 자아내는 것이지, 이해할 수 없는 도그마에 대한 동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고로 땅 위(아래로부터)에서의 신적인 계시와 구원의 효능에 대해서 체험하기 전에 선험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논한다고 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라너(Rahner)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라는 기독론적 틀을 명시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아마도 라너일 것이다. 라너는 '아래로부터'라는 틀을 1954년 Schriften zur Theologie에서 도입했는데, 사도행전 2:36절을 근거로 기독론의 시작을 예수에 대한 인간적 체험으로부터 기술하기 위함이었다. 라너는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근거를 인간의 '위를 향한 개방성' 또는 '초월성'에 둔다. 인간은 단지 이 땅에만 속한 육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 초월이나 최고의 완벽을 추구하는 존재다. 고로 '역동적 인간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부터' 기독론을 짓는 것은 가능하다.
라너는 이 '아래로부터'의 틀을 1972년 '위로부터'라는 틀과 대조시켜 더 발전시킨다. 라너에 따르면 기독론엔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있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내려오는' 기독론 또는 '형이상학적' 기독론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올라가는' 기독론 또는 '구원역사'의 기독론으로 부른다.
한편으론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에 있어서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단지 하나의 선언이 아니라, 그 결정적, 종말적 선언이다. 고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출발점은 인간 나사렛 예수의 체험이다. 달리 말해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처음부터 인간의 구체적 삶에서의 구원에 대한 개인적 질문 안에서 시작된다. 다른 한편으론 만약 기독론이 예수에 대한 첫 체험을 넘어간다면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불가피하다. 분명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안에 있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단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도치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로고스의 先在나 그의 神性 등은 처음부터 그에게 속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선재 하신 로고스,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
이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삼위일체 교리라는 성서의 가르침에 있기 때문에, 구원사 안에서의 예수의 체험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기독론의 최우선, 최고의 '公理(axiom)'다 (비록 우리가 이 공리 뒤에 계시의 역사가 있음을 알지만).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하나님의 성육신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시대나 공간의 범주에 속하는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신적 로고스의 최고의 초월적 관계점이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이 초월적, 그러나 자유로운 관계 안에 포용되어 있고 통합(integration)되어 있다.
2. 본 논제(위로부터/아래로부터)의 등장의 신학적 배경과 이유
기독교 신학에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관심을 끌고 논지가 신학 전면에 등장한 데는 약간의 배경과 이유가 있다. 그 배경과 이유들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바르트의 신학적 파라다임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19세기의 서구 신학계는 낙관적 인본주의와 슐라이에르마허의 자유주의적 경향이 주도하는 시대였다. 이에 따라서 기독론 역시 알 수 없고 표현키 어려운 그리스도의 神性에 대한 얘기보다는 人性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인간이 역사의 중앙에 하나님은 변방에 밀려났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론적 인간관과 자유주의적 사상은 1.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더 나아가서 1.2차 세계대전 뒤에는 서구교회들이 각자의 여건에 따라서 지지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서구교회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서, 그들의 신앙과 교회, 그리고 경건 및 역사관 등에 대해서 할 말을 잃었다.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깊은 회의에 빠져 있을 무렵, 바르트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신앙과 경건, 교회의 활동, 그리고 (기독교) 문화 및 역사와는 동일시 될 수 없는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외치고 나왔다. 결국 모든 신학적 기독론적 축은 '위로부터'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바르트가 나중에 그의 '絶對他者'로서의 하나님관은 부분적으로 틀렸다고 말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강조가 신학계에 재등장하게 되었다.
둘째는,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신약학계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예수는 단지 신비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라, 특정한 전통과 문화에 속했던 한 인간이었다. 이 관점은 결국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결론은 현존하는 자료로서는 역사적 예수를 재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부정적 결론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초대교회의 신앙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역사관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과 같다고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주된 이유는 그의 삶과 행위의 독특함에 있기 때문에 그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누구'였는가에 대해서 묻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이 '어떻게' 기독론은 결국 이 땅위에서 실현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관심은 또한 그의 가르침과 삶은 또한 그의 인격(품)을 잘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가지게 된 것이기도 했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재등장하게 된 셋째 이유는 막스의 기독교 神觀에 대한 비평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막스주의는 전통적 기독교 신관은 인간의 사회 경제적 문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런 관점에서 막스주의는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적 정신적 가치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 인간 현실에 더욱 상관 있는 하나님 모델을 찾기 위한 노력은 막스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심을 갖게 했다. 참으로 역사적인 예수는 당시의 특정한 문화와 장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므로, 온당한 기독론을 다룬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전제되거나 미리 알게된 사상보다는, 무엇보다도 문화와 역사에 한정된 예수의 인성과 행위를 다루는 것을 의미했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재등장하게 된 넷째 이유는 변증론적 이유다. 세속시대에 있어서의 기독론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가정된 신적 측면이나 교회의 도그마보다는 모든 인간과 함께 진정으로 나눈 그리스도의 인성을 논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얘기되어 왔던 하나님에 대한 언어의 부적합성과 불가지성에 대한 반동이기도 했다.
다섯째 이유는 교리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 만약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을 능가한다면 이러한 기독론은 인류의 현실과는 무관한 일종의 가현적(docetic) 기독론이나 영지주의적(gnostic) 기독론에 불과하다는 이유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재등장하게 된 여섯째 신학적 배경은 서구 신학과 철학의 성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의 자료의 의미심장성에 대해서 초월적(영적/신앙적)세계로 돌린 전통적 방법들이 자신감의 상실에 직면하자 신학자들은 신적인 것을 역사와, 인간의 지성과, 도덕적 노력 안에서 추구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서 어거스틴 이후 서구신학은 신앙을 개념화했다: 신앙이나 계시 만으론 확신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신앙과 계시는 이성에 의해서 명료화되어야만 했다. 그 결과 신학을 한다고 하는 것은 이론과 실천(praxis)에 대한 전인적인 훈련으로서보다는 개념화에 대한 훈련으로 흔히 이해되었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재등장은 방법론과 인식론의 질문에 의해서다. '위로부터 아래로'의 기독론은 先在한 존재를 전재한다. 문제는 우리는 이와 같은 존재가 선재 했는지 알 수 없으며, 또한 설혹 이러한 존재가 선재 했다 하더라도 이 분을 하나님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고로 우리가 그 선재 하신 존재가 이 땅으로 내려오는 과정에 참여치 않는 한 기독론을 할 수도 알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 특정한 인간 나사렛 예수로부터 기독론을 다루는 것이다.
제 2장 바르트 해석자들이 '위로부터'라고 말하는 관점들에 대한 분석
1. 로고스 기독론으로서의 '위로부터'의 기독론 - 접근방법의 관점에서
바르트 기독론을 '위로부터'의 기독론으로 보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바르트가 '로고스 기독론'을 견지한다는 점이다. 지상의 존재가 아니어서 볼 수 없으며 개념화 될 수도 없는 '하늘 위에'서 삼위일체로 선재하든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음을 강조하는 바르트의 기독론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바르트의 기독론이 '위로부터'의 기독론인 것은 로고스의 성육신이란 대전제가 그의 기독론의 출발점이요 내용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들을 들자면 Pannenberg, Rosato, Calvert, Hodgson, Puffenberger, Macquarrie 등이다.
바르트가 전통적인 로고스 기독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적어도 세 가지 질문을 가지게 된다. 첫째 질문은, 바르트가 자신의 기독론의 틀(접근방법)을 결코 절대화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단순히 바르트의 기독론을 평가함에 있어서 단순히 그의 접근방법에 의존하여 그의 기독론을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바르트에 있어서 기독론의 내용(Sache)이 기독론의 방법론을 정의하고 규정하는 것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둘째 질문은, 바르트가 삼위일체나 선재하신 로고스는 다름 아닌 계시에 대한 해석, 즉 그 특정한 인간 나사렛 예수의 삶과 행위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한 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셋째 질문은, 우리가 바르트의 기독론을 책임있게 해석하려면 표면에 드러나는 기독론의 외형적 유형에 준하기보다는 이 형태나 틀이 지향하는 바 신학적 의미와 이유와 목적에 준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2. 자연신학을 거부하는 것으로서의 '위로부터'의 기독론
바르트 기독론을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부르는 다른 이유는 그가 자연신학을 거부한다는 관점에서인데 맥콰리와 젠슨 및 틸리히가 주장하는 바다. 바르트에 있어서 인간이나 자연으로부터 하나님 인식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길이나 접촉점은(Anknuepfungspunkt) 전혀 없다는 것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만약 하나님이 세상의 인간과의 소통을 원하신다면 무엇인가에 의해 접촉되어져야 한다. 이 접촉점들은 문화나, 역사나, 이성이나 종교철학 등이 될 수 있다. 만약 계시가 이들에 의해 받아들여 질 수 없다면 그 계시는 단지 '하나의 파괴적 낯선 실재'거나 '분열적 비존재의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문제는 계시가 역사적 테두리 안에 있는 증언들에 의해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바르트의 자연신학이나 문화신학에 대한 전적인 거부는 잘 못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3.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을 주도한다는 관점으로서의 '위로부터'의 기독론
왈드롭에 따르면, 바르트의 기독론은 그 기본적 특징에 있어서 안디옥적이기 보다는 알렉산드리아적이라고 말한다. 두 특징 사이의 근본적 쟁점은 안디옥 기독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두 인격(persons) 또는 두 주체(subjects)의 일치(unity)로 본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의 본질적 자질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이나 역할로 연루되어 있다고 본 점이다. 결과적으로 안디옥 기독론이 두 아들 또는 두 그리스도를 고백한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기독론은 단일신론적 교리(monophysite doctrine)를 띄고 있다고 비평받았다.
왈드롭은 지적하기를 바르트가 그의 기독론에서 두 주체(subject) 또는 실체(hypostasis)의 하나 됨(oneness)에 우선적 관심을 가진 결과, 예수의 인성이 그의 신성 안에서 용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의 신성이 기독론의 참 주체인 반면에 그의 인성은 그의 신적 존재에 있어서 두 번째 단계에 불과하다. 예수의 인성은 하나의 완전히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부분적 인간이다.
바르트의 기독론에 있어서 예수의 신성이 결정적 주체인 반면, 그의 인성은 소위 말하는 하나의 '보조적 기능'이다. 왈드롭은 만약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진정 하나님의 존재론적 존재요 인식론적 존재라면 예수의 인성을 보조적인 존재로 다룰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요약하자면 맥콰리와 왈드롭이 바르트의 기독론을 '위로부터'의 기독론으로 부르는 것은 신성과 인성사이의 불균형, 즉 신성으로 치우친 기독론을 가졌다는 이유다. 왈드롭의 바르트 기독론 해석과 비평은 대체로 바르고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질문은 바르트가 신적인 주체에 대해서 강조한 그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바르트가 강조하고 있는 신적인 주체의 바탕인 이 계시에 대한 인식적 토대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바르트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다루면서 기독교 교의학 역사는 그리스도의 인성보다는 신성에 더 흥미를 가지는 경향이 있었다고 비평적으로 지적한 점은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왈드롭의 바르트 비평에서 더욱 심각한 것은 신학적 문제는 바르트가 하나의 '기능적 기독론'(functional Christology)을 말하고 있다는 含意이다.
4. 사실보다는 의미해석에 대한 선호라는 측면에서의 '위로부터'의 기독론
로버트 젠슨은 바르트의 기독론에 대해서 거칠면서도 반박키 어려운 비평을 한 사람이다. 물론 젠슨은 바르트의 기독론을 비평함에 있어서 명시적으로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의 논지는 결과적으로 바르트의 기독론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는 점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젠슨에 따르면 바르트는 19세기의 기독론이 먼저 예수의 역사적 언행들을 논한 후 그 의미를 추구한 순서를 단순히 바꿔버렸다고 지적한다. 19세기 기독론이 사실로부터 의미로 진행했다면 바르트는 의미, 즉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 되심을 전제한 후 그의 역사를 논했다는 말이다. 바르트의 기독론은 그 특성상 '의미추구 기독론'이지 '사실추구 기독론'이 아니었다. 젠슨이 말하는 의미는 '위로부터'를 가리키며, 사실은 '아래로부터'를 가리킨다.
또한 젠슨에 따르면 바르트가 '예수는 하나님이다'고 말할 때 이 '이다'는 단지 '유비'(analogy)나, '이미지'(image)나, '반영'(reflection)에 불과하다. 이 '이다'의 최고의 의미를 구태여 따진다면 하나님은 예수와 '매우 같다'(God is very like Jesus)는 말이다.
젠슨의 견해에 대한 타당성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우리는 왜 젠슨이 바르트의 추상적인 영원으로부터 구체적인 역사적 나사렛 예수에로의 파라다임 이동을 심각히 보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쩌면 젠슨은 바르트의 계속되는 사상의 발전을 지나치게 단순화 한 게 아닌가? 둘째 질문은 만약 바르트가 사용한 '이다'라는 繫辭(계사)에 대한 젠슨의 해석이 옳다면, 바르트가 하나님은 인간이다 혹은 인간은 하나님이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또는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다 그리고 우리와 다르다'라는 對等重複的 틀에서 기독론을 다루고 있음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해야할 것인가? 그리고 만약 바르트가 말한 '이다'라는 계사가 존재론적이지 않고 단지 기능적일 뿐이라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全 敎義學의 해석학적 원리(hermeneutical principle)인 삼위일체론을 약화 내지는 해체하는 게 아닌가? 더욱 놀라운 점은 젠슨은 바르트의 기독론을 거칠게 비평하면서도, 바르트가 그의 기독론에서 그토록 중시하는 '王的 人間'(Der koenigliche Mensch)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제 3장 바르트의 기독론 안에서의 '위로부터'의 기독론 검증
I. 방법론에 우선하는 인식론
앞서 지적한바와 같이 바르트의 기독론을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말하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가 그의 기독론적 접근방법이다. 말하자면 바르트는 위로부터의 로고스가 아래로 성육신 했다는 고전적 유형을 따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 평가는 바르트의 기독론을 지나치게 단순화 한 것으로서, 바르트의 이러한 접근방법이 말하는 함축된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 과학이나 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 신학은 바른 지식과 신학적 내용을 규명하기 위해서 어떤 특정한 방법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연구에 도입된 방법론에 따라서 같은 대상도 다르게 이해되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해석의 한 기능으로서의 방법론 그 자체도 前 이해나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으로서 어떤 의미로던 그 결과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고로 방법론은 우리의 인식(이해)을 결과적으로 결정할 뿐만 아니라, 사전에 이미 결정하고 방법론은 다만 이미 결정된 것에 대한 증명이나 추인 과정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방법론이 언제나 우리의 바른 인식(이해)을 위해서 결정적인 공리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방법론이 인식에 있어서 결코 절대적일 수 없음은 특히 바르트의 기독론이 잘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방법론이란 그 자체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사용된 접근방법의 방향과 목적과 전제들에 대해서 물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우리는 바르트의 기독론의 바른 이해와 관련하여 단순히 그의 로고스 기독론이란 틀을 넘어서 그가 왜 이런 방법을 썼는지, 그 방법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바르트가 로고스의 성육신으로부터 그의 기독론을 기술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기독론의 존재론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바르트는 기독론의 주체를, 즉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기독론을 논하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명하기 위해서 이 방법론을 사용한 것이다. 이 규명의 필요성을 위해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신성은 하나님 자신이 자신 안에서 주권으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주체라는 사실 안에 구성되어있다.
그가 계약의 주도자요, 제작자요, 유지자며, 성취자다. 그가 주권적 주시다. 하나님의 내려오심 없이 인간의 올리움도 없다'고 말한다. 바르트에 있어서 기독론의 근본적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요 화해자라는 데 있다. 그래서 바르트는 '만약 하나님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세상과의 화해를 무슨 의미로 말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한다. 바르트가 화해의 사건이 '이 인간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일어났다'고 분명히 말한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아들의 낯선 나라에로의 길'을 논하면서 이것은 '위로부터 아래를 향한' 기독론적 이동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바르트의 기독론을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말하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이 '위로부터'의 신적 이동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다른 목적과 영역(Skopus)과 의미(Sinn)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KD IV/1, 231). 말하자면 바르트는 이 접근방법을 통해서 이 '위로부터'의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종이 누구며, 이 분이 바로 참 하나님임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위로부터'의 성육신 얘기는 그 일차적 목적이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말하려는 데 있지 않고 화해사건의 기원을 말하려는 데 있다.
방법론보다는 인식된 내용이 결정적 요체임을 암시하는 말들을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존재(Sein)와 되심(Werden)에 대한 우리의 유비의 부적합성을 처음부터 모르고는 그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말한 점이나(KD IV/2, 62), 교의학의 특별한 위험은 계획(Schema)적으로 생각하는 것(KD IV/2, 6)이므로 기독론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태도는 개방성이라고 한 점이라든지(KD I/2, 954-990), 교의학의 설계(방법)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 권위를 주장해선 안됨을 주지한 점등이다. 요약하자면 '위로부터'의 접근방법의 최우선 목적은 화해사건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질문하고 이 화해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1. 신학적 결단
앞서 논한바와 같이 바르트에게 있어서 화해론, 곧 기독론은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를 전제한다. 이 전제는 두 가지 점을 의미하는 바, 첫째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타락한 존재며, 둘째로, 성육신은 '진화론적 가능성들' 중의 하나가 아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바깥으로부터, 위로부터' 자신을 비하하셨다.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일어났기에 바르트는 이제 그리스도의 비하와 관련하여 기독론적 현상들을 생각키 전에 '참 하나님'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참되고 거룩한 하나님이 죄된 인간이 되신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것은 '새로운 신비(Novum mysterium)'요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만약 신적인 성육신이 진정 '불가능한 가능성'이라면 이 성육신은 역설적으로 가짜 하나님들과 참 하나님을 구분하는 신학적 기준이다.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서 위대하고 참된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으로 비하하시길 원하시고, 비하 할 수 있으며, 비하하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가짜 하나님들은 모두가 저 세상적, 초월적, 他者的으로서 이러한 신들은 인간들의 교만함의 投射에 불과하다.
참 하나님은 세상 위에 군림하는 거룩한 하나님이 아니라, 죄 된 세상 안에 들어오신 겸손한 하나님이다. 이제 바르트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관점 아래서(unter diesem Aspekt)' 구속의 역사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KD IV/1, 173). 요약하자면 바르트가 로고스 기독론의 틀을 사용한 것을 단순히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보기보다는 기독론을 신학화 함에서 온 신학적 관심과 결단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2. '아래로부터'의 비전으로서의 '위로부터'
방법론보다는 인식론이 우선한다는 우리의 앞선 주장은 바르트가 기독론을 '위로부터'접근하는 동안 이미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적 운동을 마음에 그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바르트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이미 상상하고 있었음은 그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해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신성에 대한 의미는 ... 높고, 절대적이며, 비 세상적 존재 개념으부터 모아질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부터 배워질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신성의 신비는 우리 맘대로 상상한 신비, 거짓 신비일 것이다. ... 그가[예수] 하나님이고 신적 본성임을 알게되고 알게 되어질 수 있는 거울은 그의 육신 되심이며 육 안의 그의 존재다'(KD IV/1, 193). 이 진술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바르트가 '위로부터'의 신적 운동에 대해서 주로 얘기하면서 그리스도의 人性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全 '위로부터'에 대한 논쟁은 '아래로부터' 위에 기초하고 있다.
둘째로, 우리는 바르트가 기독론을 쓴 기간들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그의 기독론 첫 권은 1953년에, 둘째 권은 1955년에, 셋째 권은 1959년에 썼다. 그런데 바르트는 기독론 2권과 3권 사이인 1956년에 'Die Menschlichkeit Gottes'를 선언했다. 첫째 권은 성육신 얘기를, 둘째 권은 승천얘기(올리우심)를, 셋째 권은 성육신과 올리우심의 예언적 측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르트는 1953년 그가 아직도 '위로부터'의 성육신 얘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아래로부터'를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의 非 他者性(non-otherness)과 非 超自然性(non-supernaturalness)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바르트는 기독론은 하나님의 아들의 비하하심과 인자의 올리우심의 교환(exchange)으로 구성되었음을 상기하면서 '첫째는 분명 둘째에 대한 수단이나 길'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의 '위로부터'는 '아래로부터' 안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아래로부터 위로'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선 비록 우리가 우리의 신앙과 교회에 대해서 깊이 연루되었다 하더라도 '위로부터 아래로'에 대해서 한 줄조차도 쓸 수 없다고 지적한다(KD IV/2, 8).
II. 임마누엘의 의미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육신은 임마누엘을 의미한다. 성육신의 신적 행위에 대한 개념적 해석으로서의 임마누엘은 성육신의 모든 내용과 의미와 방향을 요약하고 있다. 고로 바르트의 임마누엘 이해에 대한 탐구는 불가피하다.
1. 임마누엘의 주체
바르트에 따르면 '위로부터'의 신적 성육신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자유행위'다. 이 행위는 임마누엘을 가리키며, 임마누엘은 인간의 영생을 취급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요, '중심'이며, '심장'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설정하시고 주도하시는 신적 행위이기에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관한 진술이며, 오직 그런 후에 우리 인간에 대한 진술이다(KD IV/1, 1-8).
2.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비중과 자리의 의미심장성: 성육신의 목적
그러나 우리는 임마누엘의 의미에 대한 바르트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만약 임마누엘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미한다면 우리 인간 역시 이 사건의 한 부분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 없이 하나님 되시길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의 삶을 인간들과 나누기 위해서 인간들을 창조하셨다.
고로 하나님은 그의 역사를 그의 것으로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역사로 하지 않고 하나의 '공동역사가 되게 하셨다. 물론 우리가 이미 지적한대로 바르트는 임마누엘을 해석하면서 이 운동의 주체와 으뜸은 하나님임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 임마누엘이 기독론에서 중심 축 역할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이 말이 단지 기독론적 방향만을 제시하는 게 아니고 전 인류가 연루되어 있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기 위한 스스로의 복종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입증하고 변호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은 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심이 아닐 것이다. 정말이지 하나님은 '이 한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구주 되심과 구원의 바로 그 내용인 우리의 참 인간의 확립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기독론의 중심에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기독론, 즉 임마누엘의 중심에 있음을 강조키 위해서 바르트는 우리의 참 인간 됨의 확립은 '작은 것이 아니라 가장 큰 것이다'라고 말한다.
바르트의 화해에 대한 이해 역시 우리의 논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시사해 주는바가 있을 것이다. 화해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7:23, 11:4 등)하신 계약의 예수 안에서의 실현이다. 화해가 오래전 계약에 대한 예수 안에서의 실현이란 말은, 계약은 이미 창조 이전에 인간 그리스도와 계약을 설정했음을 의미한다. 창조이전의 계약 설정은 또한 그 계약이 우주적 계약임을 뜻한다. 더 나아가서 만약 우주적 계약이 인간 그리스도 안에서 체결된 우주적 은혜를 드러낸다면 모든 인간 역시 기독론의 중심적 내용이어야 한다. 우리가 기독론과 구원론에 대해서 헌신적 자세로 임하는 근거도 바로 이 중심 때문이다(KD IV/1, 22, 52-53).
더 나아가서 바르트의 기독론의 제목에서도 그가 단순히 '위로부터'의 기독론 만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대변한다. 바르트는 기독론을 논하면서 소위 말하는 '기독론'이란 제하에서 다루지 않고 '화해의 교리'라는 틀에서 다룬다. 신적 화해의 주권적 행위와 화해된 인간 둘 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바로 이 사람으로서 그는 화해 행위의 주체다.'
이것이 바로 화해는 하나님의 비하와 인간의 올리움의 교환이라는 바르트의 말의 의미다. 임마누엘의 내용인 이 교환의 중요성 곧 인간이 이 교환의 중심에 있음을 강조코자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처럼 되셨기에 인간도 하나님처럼 되었다. 예수 안에 하나님이 제한 되셨기에 인간은 예수 안에서 자유로워졌다. 그 안에서 主가 종이 된 것과 같이 그 안에서 종은 주가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계약을 맺은 모든 인간이 임마누엘의 중심에 서 있지 못한다면 임마누엘에서 하나님이 주도와 행위의 주체라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바르트는 거듭 강조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기독론의 '그 중심에' 있다. 한 마디로 과장되게 (강조의 의미로서) 요약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을 神化키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II. Anhypostasis와 Enhypostasis
지금까지의 우리의 논지 중에 하나가 바르트는 그의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전통적으로 논쟁이 되어왔던 Anhypostasis와 Enhypostasis를 재 언급하면서 인자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존재함으로서 존재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논지를 어떻게 변호할 수 있는가?
전통적으로 anhypostasis (against the person) 이론은 '아래로부터'의 접근에 적대적이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오직 말씀이 인성과 함께 하는 한에서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비 자율적 비인격적(impersonalitas) 존재다. 반면에 enphypostasis (into the person) 이론은 '아래로부터'의 접근과 양립할 수 있다. 물론 enhypostasis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참 인성은 그것의 로고스와의 연합(union)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 안에 인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자율적인 존재로 인격적(personalitas) 존재다. Enphypos- tasis 이론의 매력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배제하지 않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참 인성을 말한다는 점이다.
바르트는 anhypostasis-enphypostasis 논쟁을 그의 교의학 여러 곳에서 다루고 있다. 우리는 바르트의 이 논지를 제대로 파악키 위해선 각 논쟁들의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 논쟁에 대한 바르트의 첫 견해는 교의학 I/1에서 화해자(예수 그리스도)와 창조자(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 화해자는 '창조자에 종속한다'로 나타난다. 그러나 바르트가 이 종속론과 신적 활동의 순서에 대한 논지는 하나님의 인성과 신성을 구분하고 인성을 하위에 두려는 데 있는 게 아니고, 단지 '존재의 양태(Seinweise)'라는 관점에서 신성과 인성, 화해자와 창조자를 구분하려는 데 있음을 상기하고 있다.
Anhypostasis-enhypostasis에 대한 두 번째 논쟁은 교의학 I/2의 '계시의 신비'라는 제하에서 등장한다. 여기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의 신격의 술부(Praedikat)임을 지적한다 (KD I/2, 178). 그러나 바르트의 '술부'에 대한 진술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인성을 격하시켜 배경 없이 불쑥 내던진 말이 아니라, 그의 신학적 해석학의 열쇠인 삼위일체의 틀 안에서 다룬다는 사실이다. 그의 인성이 신격의 술부라는 말은 '이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identisch)하다'는 전제하에서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살지 않는다. 그[이 사람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다.' 바르트의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단일성에 대한 강조는 그의 인성이 어떤 경우에도 약화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교의학 III/2, 78-81쪽에서 anhypostasis-enhypostasis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그의 논지를 대변하는 아래의 말에서 바르트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약화시킴으로서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곤란할 것이다: '이 피조물[인간 예수]은 신적 도움의 기구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인간 예수]를 통해서 인간 모두와 개인을 돕는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이 목적을 위해서 사용함을 뜻하지 않는다. ... 이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그가 그 안에서 하시는 일 사이를 구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기 때문이다'(KD III/2, 81).
더욱 중요한 것은 이 Anhypostasis-enhypostasis 논쟁은 무엇이 기독론으로 하여금 기독론이 되게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기독론이 단지 하나의 일반적 인간론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 화해자와 피화해자를 분명히 구분키 위해서 이 논쟁을 다뤘다는 사실이다. 기독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주부(체)인 반면 인성은 술부임을 강조하는 데 대해서 신학적 이유를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네 가지 위험과 문제로 말할 수 있다.
첫째로, 개혁신학 자체를 포함하여 지난 두 세기 동안의 경건한 사람들의 내재주의자 신학(immanentist theology)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생각하는 데 실패한 것과; 둘째로, 실존신학과 실존주의는 하나님이 인간 위에 으뜸 되심을 거부함으로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은혜의 비하가 불가능케 만든 것과; 셋째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에 의해서 화해된 인간이 흔히 인간이 종교적이고, 자기 만족적이며, 자기 설명적 자신과 화해한 것으로 된것과; 넷째로, 로마 카톨릭에서 자주 보이는 십자가의 신학 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참 영광의 신학이 거짓 영광의 신학으로 쉽게 파괴된 것으로부터 기독론을 보호키 위한 신학적 의도에서 인성에 대한 신성의 우선 됨을 역설한 것이지, 단순히 '위로부터'의 신학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고로 바르트의 기독론은 신성을 강화시켜 인성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단일신론적 기독론이며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한 것은 그 설득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겠다. 요약하자면 바르트의 Anhypostasis와 Enhypostasis의 이해는 단지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옹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 두 본성의 하나라는 관점에서의 기독론의 존재론적 토대를 명시코자 하는 데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 4장 기독론의 한 가운데 서있는 '王的 人間(koeniglicher Mensch)'
I. 기독론의 중심으로서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의 틀을 넘어서 있는 십자가
바르트의 기독론을 그의 기본적 틀 위에서 보면 그의 기독론은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의 둘 다의 기독론이라는 톰슨의 이해는 옳다. 그 이유는 바르트가 그의 기독론을 크게 세 권으로 나눠 다루며, 이 세 권은 각각 그리스도의 왕적 기능(KD IV/1), 제사장적 기능(KD IV/2), 및 예언자적 기능(KD IV/3)이라는 틀에서 논하면서, 이 세기능을 결국 하나님의 아들의 내려오심(von oben)과 인자의 올리우심(von unten)의 교환(exinanitio)으로 해석하면서, 이 교환이 곧 기독론의 중심내용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환이 기독론의 중심내용임을 강조한 나머지 바르트는 '아들 하나님(Gott der Sohn)'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바르트의 기독론을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일축하는 비평은 지나치게 단순한 견해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바르트의 이 두 기독론적 틀을 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 틀이 서있는 토대에 대해서 물어야 할 것이다. 이 틀에 대한 질문과 관련해서 우리는 바르트가 '성육신의 의미는 예수의 십자가위에서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질문 속에 평이하게 계시되어있다'는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두 가지 점을 제안한다.
첫째, 하나님은 오셨고 진짜 육신이 되셨다는 말이다. 인자의 영광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수치가 골고다와 겟세마네에서 동시에 드러났다. '이제 유일한 문제는 신적인 것은 어떠해야 한다는 우리의 前 이해로 그를 측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 이해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에 의해서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고로 만약 우리가 바르트의 신론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오직 참 하나님만이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죽게 내버려 둘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바르트가 우리의 화해는 십자가의 사건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함으로서 십자가의 사건이야말로 그의 기독론의 존재론적 사건이라는 점이다. 이 십자가는 인간 예수의 전 존재와 활동이 하나님과 같다(Gottaenlichkeit)는 사실을 '조종하고(beherrscht)' '관통하며(durchdringt)' '규정하는(bestimmt)' 전체적이고도 자세한 것을 보여주는 싸인(Vorzeichen)이다(KD IV/2, 276). 예수를 믿고 사랑하고 소망한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 예수를 믿고 사랑하고 소망하는 것이다.
복음의 모든 긍정적이고 밝은 면은 오직 이 부정적이고 어두운 죽음의 빛 아래서 볼 수 있으며 보아야 한다(KD IV/2, 277). 기독론의 목적이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에 있다면 이 십자가 처형은 기독론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모든 기독론적 운동('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의 목적과 의미는 이 십자가 안에 있다 (KD IV/2, 324). 이것이 클라퍼트가 판넨베르크의 바르트 기독론 비판, 즉 바르트가 로고스 기독론을 가졌기 때문에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는 해석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클라퍼트에 따르면, 바르트의 기독론은 성육신과 승천의 일체성 안에 있다. 고로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육신의 중요성은 내려오심에 강조를 두고 내려오거나 올라가는 역사를 해석하는 데 있지 않다. 이 신적 운동의 중요성은 오히려 십자가가 선 그 자리(locus)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의 자리야말로 두 기독론 운동의 내용이며 계시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모든 예수 그리스도 역사의 통합(Integral)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계시의 자리(Ort)다. 고로 클라퍼트는 바르트의 기독론은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임을 함축적으로 역설한다.
인간 그리스도야말로 화해의 존재론적 사건인 십자가의 존재적 토대다. 이 인간 그리스도가 없이는 십자가의 능력과 효능과 상관성은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 나아가서 바르트가 십자가를 논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인간 그리스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논하는 것(KD IV/1, 254-301)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존재론적 토대임을 주지함에 있어서 바르트는 하나님이 단순히 하나님으로서 이 사람의 자리를 취하신 게 아니라 사람으로서 취하셨다고 말한다(KD IV/1,. 258-9). 바르트는 십자가가 이 땅위에서의 시공간적 사건임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바르트가 이 강조를 '위로부터'가 주제인 그의 기독론 제 일 권에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 안에서 신을 발견'하기 때문에, 책임 있는 기독론은 이 '아래로부터'의 토대와 내용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르트는 오래 전의 개혁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의 신적 현존'에 대해서 동일하게 단호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바르트의 기독론이 단지 그의 외형적 틀인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이상으로 보는 다른 이유는, 그의 전 기독론적 주제가 '아래로부터'인 기독론 이 권에서도 역시 십자가가 기독론의 중심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모든 것[기독론]은 이 십자가를 향해 움직인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 십자가 안에서 일어났다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전적 화해와 평화의 전적 복원이.'
II. '위로부터'의 유일한 통합자(Integrator) '王的 人間'(koeniglicher Mensch)
지금까지 우리는 가시적이고 책임 있는 기독론의 토대는 하나님의 인성에 대한 관심이지 인간의 신성이 아님을 말해왔다. 바르트 역시 '왕적 인간'을 '신적 인간(Gottmenscheit)'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바르트는 '왕적 인간'을 '인간적 신'이라고 묘사함으로서 단지 그의 기독론이 '위로부터'의 기독론임을 말하려는 데 있지 않고, '왕적 인간'이 기독론의 중심임을 말하고 있다. 이 '왕적 인간'은 '위로부터'뿐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도 대표하는 두 운동의 통합자다. 중요한 것은 바르트가 이 두 운동을 천상적 존재나 로고스 안에 두지 않고 '왕적 인간'의 땅의 실재 안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바르트는 '왕적 인간'을 그의 기독론 제 이권에서 다룬다. 이 이권의 주제와 방향은 '아래로부터'로서 인간 그리스도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것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틀은 인성인 반면에 내용은 신성이다. 반대로 그의 기독론 제 일권의 주제와 방향은 '위로부터'로서 하나님 그리스도다. 그러나 그 내용과 비중에 있어선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신적 운동과 틀 안에 인성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바르트가 그의 전 기독론을 통해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점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땅의 실재인 나사렛 예수, 곧 왕적 인간을 빼고는 기독론이 성립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서 바르트가 '왕적 인간'을 제사장적 주제와 예언자적 주제 한 가운데 두고 다루고 있다는 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으나 바르트가 무엇보다도 왕적 인간을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에 대한 기독론적 전체(Gestalt)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 '왕적 인간' 안에 전체를 통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왕적 인간'은 그의 기독론의 중심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논제를 명료히 하기 위해서 바르트가 과연 어떤 종류의 계시를 말하고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란 구체적으로 이 '왕적 인간(koeniglicher Mensch),' 곧 나사렛 예수다. 고로 인간 그리스도만이 기독론의 객관적 내용이며 '존재적 관심(ontisches Interesse)'이다.
이러한 논지에서 바르트는 이 '왕적 인간'의 삶과 언행을 분석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첫째로, '왕적 인간'은 하나님의 놀라운 즉 이해키 힘든 운명을 나눈다: 가장 전능하고, 높고, 영광스럽고, 부요한 하나님이, 가장 무능하고, 낮으며, 수치스럽고, 가난한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에 순응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성육신을 의미한다(KD IV/2, 186-8). 둘째로, 이 '왕적 인간'은 하나님의 강하고 높고 가진 자를 거의 무시한 반면에,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해 편애(parteiisch)한 것에 동참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바꿨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가난한 자들 중의 한 사람과(Parteigaenger der Armen), 이처럼 혁명적인 사람으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를 진짜로 모른다(KD IV/2, 200). 셋째로, '왕적 인간'이 하나님의 운명에 순응함에 있어서의 하이라이트는 하나님의 세상의 가치와 삶의 질서 및 구조들에 대한 '혁명적 특성(revolutionaeren Charakter)'을 나눔에 있다. 그는 어떤 당을 조직했거나 가담치 않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의 모든 정치, 종교, 도덕적 제도의 원리와 관행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KD IV/2, 191-200). 넷째로, '왕적 인간'의 이해키 힘들고, 혁명적이며, 편애적인 언행은 궁극적으로 인류를 위한 것이다. 세상의 참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했다. 다섯째로, '왕적 인간'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통치(나라)였으며, 그의 모든 언행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구체적 내용들이다(KD IV/2, 214-33). 고로 바르트는 '왕적 인간'은 전 기독론의 실체/내용(Substanz des Ganzen)인고로, 과거 신학처럼 예수의 인성보다는 신성에 더 관심을 둘 게 아니라 인성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즉 동일한 비중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때문이다(KD IV/2, 174).
Ⅲ. 바르트의 역사적 예수 이해
만약 우리가 바르트에게 있어서 '왕적 인간'의 역사적 삶과 언행이 그의 기독론의 토대임이 옳다면 아래와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바르트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가? 왜 그가 '역사적' 예수로부터 그의 기독론을 개발하지 않고 로고스의 성육신으로부터 개발했는가?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의 역사성은 기독론의 전제조건이다. 바르트는 현대적 역사이해의 관점에서 순서적이며 자서전적인 역사적 예수를 재건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했다. 신약성서는 단지 '조각난 그림'들만 제공하기에 '내적 연결'이 결여됐다. 고로 현대의 자서전적 역사적 관점에서 그것의 역사적 연속성이나 내적 통일성을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성서는 단지 특징을 그린 책인가?
바르트는 성서 증언 안에는 참 인간이 보이고 묘사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참 인간은 너무도 독특하고 유일하며 낯설기 때문에 일반적인 범주 안에 넣을 수 없다. 그러나 성서의 신뢰성의 근거는 그것의 '외적 불일치성(aeussren Uneinheitlichkeit)'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내적 통일성'이다. 신약성서의 중요한 점은 그것이 단지 '왕적 인간'에 대해서 말 할뿐만 아니라, '왕적 인간'으로부터 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서의 기원으로서의 주제며, 그것의 공리로서의 이론이기 때문이다(KD IV/2, 185). 신약성서는 그를 한 인간 존재로 증언할 수 있었다.
'역사'에 대한 화제는 오래된 논쟁의 주제다. 그러나 바르트는 역사를 시공간 안에서의 '실재적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가 앞서 본바와 같이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육신 사건의 주체는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역사 문제와 관련해서 이 말은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성서도 물론이고 어떤 現代史家들도 하나님의 수직적 운동에 대해서 자서전적으로 묘사할 수 없음을 뜻한다. 만약 '왕적 인간'이 단지 한 인간에 불과했다면 그를 역사적으로 기술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현대적 역사개념으로 그의 삶과 언행을 그리려는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고로 우리가 이 독특한 삶과 언행을 문서나 사진적 예술 안에서 역사적으로 제시하려는 것은 재앙일 뿐이다(KD IV/2, 113-4). 바르트는 우리의 화해의 진리성과 사실성이 화해사건의 역사성 위에 놓여 있음을 말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예수가 전제되었음을 강조한다(KD IV/2, 175). 이러한 전제는 바르트로 하여금 '왕적 인간'의 삶과 언행을 논함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복음서 설화를 그 자료로 삼게 했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무관심했다거나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예수 안에서의 성육신과 언행은 역사적 사실 위에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구태여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역사적 예수를 재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바르트는 더 나아가서 인간적 묘사의 수단이 사건의 진리를 대변하는 최후의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이것은 단지 인간 이성과 언어의 한계 때문만이 아니라 그 사건(계시) 자체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바르트가 계시는 일반 역사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기독론은 역사적 계시를 다룬다는 가정 위에서 개발할 수 있었는가 하는 어려운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 특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역사적이라고 하면서도 신학에서의 역사비평 방법(historical critical method)을 허용하지 않을 수 있는가? 왜냐하면 비록 역사비평 방법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으로 믿게 하는 신앙을 양산할 순 없다 하더라도 역사비평 방법을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에 대한 이해의 수단으로 허용되어야 하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의 근본적 관심은 계시와 역사라는 또 하나의 주제를 논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질문들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대체적으로 얘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시를 전달함에 있어서 인간 언어의 부적합성은 이미 1923년 그의 하르낙과의 성서해석에 대한 논쟁에서 잘 지적되었다. 바르트에 따르면 성서는 참 계시에 대해서 증언한다. 이 말은 성서는 인간 안에 감춰진 종교적 가능성에 대해서 증언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가능성에 대해서 증언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 인간 실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 실재에 하나님이 연루된 이상, 이 실재는 결코 인간의 역사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고로 만약 이 역사적 실재에 대해서 역사적 이해가 가능하다면 이것은 인간적 가능성의 실현일 것이다. 성서자료들 자체가 계시로서의 그리스도역사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 연구를 거부하고 있다. 그럼에도 모두가, 하르낙은 말할 것도 없고, 계시로서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를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손안에 넣고 결국 상상의 그리스도를 그리려했다고 지적한다. 계시로서의 역사적 예수는 '역사적(historic)' 예수 그리스도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는 자신의 계시론을 바울의 기독론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바르트의 啓示觀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이 계시는 역사적으로 조사되거나 확인될 정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다. 계시와 역사사이엔 연속성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란 없으며 단지 신으로 가장한 인간이나 인간의 상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바르트의 역사 안의 계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어쩌면 바르트의 계시에 대한 이해를 그의 성서론에서 좀더 명확히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성서는 계시의 말씀 자체가 아니라 이 계시에 대한 인간 증언들(witnesses)이다. 증언은 증언의 대상과 절대적으로 동일치 않다. 그러나 동시에 이 한계 안에서 성서는 우리에게 계시로 다가오기 때문에 단순히 계시다(KD I/2, 505-12). 우리가 참으로 이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계시의 실재적 현존과 사건이 된다. 고로 우리가 성서를 신적 계시에 대한 참 증언으로 이해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계시와 이 계시에 대한 증언과의 구별사이의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바르트에 따르면 우리가 계시의 신성을 위해서 인성을 무시하지 않으면 이 딜레마를 피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오직 이 안에서 그의 신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KD I/2, 512-3). 물론 성서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람에 의해서 특정한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서를 역사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은 완벽하게 합법적이다(KD I/2, 513). 그러나 이 합법성은 인간이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관통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계시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음을 뜻할 뿐이다.
심지어 바르트는 신적 계시와 나사렛 예수의 동일시(identification)를 거부하는 데, 이 거부는 예수가 역사 안에 계시된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 예수의 언행을 보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고백케 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다. 성서가 스캔들이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다. 또한 바르트가 이 동일시의 거부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은 신적 계시는 세상의 어떤 실재와도 동일시 될 수 없음을, 그래서 창조자는 창조자요 피조물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다. 고로 계시는 매순간 새로운 것이다. 말하자면 그 나사렛 예수나 성서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개입하지 않거나 말씀치 않으면 단지 한 인간일 뿐이거나 과거의 역사책일 뿐이라는 논지다. 이것이 바르트로 하여금 역사비평 방법에 대해서 아주 회의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바르트가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무관심했다고 보기보다는 신학(교의학)적 원리나 공리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지 모른다. 이러한 한가지 관점에서의 그의 신학적 논의는 1956년 이전까지 계속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제 5장 바르트의 기독론의 파라다임 이동과 다시 연 자연신학의 지평
I. 기독론의 방향전환 - 신성에서 인성으로
우리는 바르트 해석자들이 바르트의 기독론을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말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 차이'에 대한 강조 때문임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바르트가 1956년 9월 25일 스위스 아라우(Aarau)의 스위스 개혁교회목사협회에서 행한 '하나님의 인간성'에 대한 강연은 그의 기독론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해석적 길로 보이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르트는 이 강연에서 지금까지 그의 신학은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全的他者'임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신성을 중심에 둔 반면에 그의 인성은 가장자리에 둬왔음을 시인한다. 이 말은 제대로 된 기독론이라면 어떤 것이든 예수의 인성을 기독론의 한 가운데서 다뤄야 한다는 의미다.
바르트는 그의 '전적타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강조는 19세기와 20세기초까지의 하나님을 인본주의적 또는 종교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들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HoG 39). 신학 연구의 주제가 하나님의 자유와 은혜대신에 문화와 인간의 경건이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기독교의 종교적 인간에 의해서 대치되었다.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인간의 계시들과, 기적들과, 신앙과 공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창조주요 화해자요 주이신 하나님은 단지 인간의 경건 개념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르트에 따르면 성서의 주제는 인간의 경건이나 도덕이나 종교심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인간을 향한 독특한 하나님의 행위다. 고로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적인 것들에 용해되어버려 결국 하나님의 주되심이 부정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질적 차이'나 '전적타자'를 외치는 것이 필요했다. 다라서 바르트는 그의 초기 신학이 다분히 '비판적'이며 '변증적(polemic)' 특색을 지녔다고 술회한다(HoG 38).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자신의 'Die Menschlichkeit Gottes' 강연은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진정한 교정(Retraktation)'임을 강조한다(HoG 41). 이 교정은 그의 초기 신학에 대해서 보다 낫고 더 완벽한 이해를 위한 새로운 출발을 뜻한다.
바르트는 그가 초기 신학에서 강조한 '전적타자,'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들어오심,' '무한한 질적 차이,' '진공,' '수학적 점,' '탄젠트,' 그리고 성서의 오직 하나의 신학적 관심 즉 위로부터 아래로의 즉각적 사죄 등은 부분적으로 옳았다고 시인한다. 또한 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보다는, 철학적 신에 훨씬 유사한 인간 반대편에 서있는 하나님을 절대화하고 추상화했음을 인정한다(HoG 42-5).
이러한 결과적 실수는 당시에 계시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너무 놀라와서 일거에 바르게 다뤄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수를 인정한 바르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적 능력과 의미는 그의 인성과 함께 고려함으로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파트너로서 존재한다. 이것은 참 하나님은 그가 인간을 위한 존재임을 도외시하고는 생각되어질 수 없음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신격을 바로 이해하는 한 그의 인성은 당연히 포함됨을 뜻한다(HoG 51).
II. 자연신학을 향한 새 지평
우리의 앞선 분석에서 여러 신학자들이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즉 자연으로부터 하나님에로의 길이나 가능성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의 기독론을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칭했음을 봤다.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거부한 것은 신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그의 브룬너와의 논쟁은 아직도 신학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자연신학이란 한 마디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인데, 바르트는 이 가능성을 강하게 부정했다. 바르트의 자연신학에 대한 브룬너와 논쟁점은 여섯 가지인데,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두 번째 부분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성서적 계시가 하나님 지식과 인간 구원에 대한 인간의 유일한 규범이며 자료인 한에는 역사나 양심이나 자연 안에서의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성서적 계시만이 하나님 지식에 대한 인간의 유일한 규범이다.
그러나 브룬너에 따르면 자연과 양심과 역사 안에 '일반계시'가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모든 일들을 통해서 알려진다. 하나님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자신의 흔적(Stempel)을 남긴다. 고로 세상 창조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기교류요 하나의 계시다(Nature und Gnade 12). 성서 어디에도 인간의 죄가 하나님 지식에 영향은 줬어도, 하나님 일 안에 있는 하나님 지식을 파괴했다는 말은 없다.
양심이나 책임의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Ibid.). 고로 어려운 문제는 두 종류의 계시가 있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자연 안에 있는 계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가 연결되어 있는가 이다. 그러나 브룬너는 동시에 자연 안에 있는 계시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줄 만큼 충분치 못함을 지적한다(Ibid., 13-5).
브룬너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바르트는 그가 전형적인 '타협의 신학'을 하고 있다고 비평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자연신학이란 신적 계시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제도 형성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에 따르면 브룬너는 불행하게도 이런 제도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참 신학 안에서는 자연신학이 독립적 주제가 될 수 없는 까닭에 브룬너가 자연신학을 독립적 신학주제로 삼은 것은 치명적 실수다. 만약 자연신학이 흥미 거리가 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그 신학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기독교 신학이 아니다. 결국 브룬너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특별한 계시나 성령 없이 알려진 하나님 외에 다름 아니다. 바르트는 더 나아가 브룬너가 심지어 계시에 대한 능력을 인간에게 첨가한 것이 아닌가하고 놀라워한다. 요약하자면 바르트는 계시신학의 관점에서 자연신학의 실재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조차도 거부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30년 후에 바르트가 이토록 거부했던 자연신학의 가능성과 실재를 그의 기독론 제 삼권(KD IV/3,1 106-188)에서 인정 한 것이다. 이 기독론 제 삼권의 주된 강조는 화해사건은 단지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건 스스로가 전시대에 걸쳐서 계속해서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 스스로의 의사소통은 인지적(noetic) 사건인 부활에 의해서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이 스스로의 의사소통은 성서와 교회 밖의 세속적 사건들 안에서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말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한 말씀과 관련하여 진리의 말들과 계시들로 간주되는 것들이 교회와 성서 밖에서도 말해진다(KD IV/3.1, 122-8).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말들을 통해서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말들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도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한다(KD IV/3.1, 128). 교회 ?동체가 성서와 교회 밖의 진리의 말씀들을 거부하는 것은 너무 경직된 태도다. 교회는 전 세계를 그 어깨에 지고 있는 지구의 신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르트는 교회가 세상에 있는 진리의 말씀들에 대해서 귀를 닫는 행위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KD IV/3.1, 129).
물론 바르트는 자신의 이와 같은 견해가 반드시 '자연신학'에의 호소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KD IV/3.1, 130). 바르트는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능력이 결코 성서나 교회 공동체나 과거의 몇몇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증언 안에만 갇힐 수 없으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함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밝힌다(KD IV/3.1, 131). 그래서 누구도 자신들의 불신앙에 대해서 변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화해사건의 예언자적 힘, 곧 선포하는 힘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 진리의 말씀은 세속세계 안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에 교회는 여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자연신학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실재하고 있음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잇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성서나 교회 밖의 말씀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들, 곧 '계시들'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知的인존재다. 세상 속의 사건들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대화는 그 일치성(Einheit)과, '계속성'(Konstanz)과 '우주적 타당성'(Universalitaet)이 그 자신의 계시보다는 결여된 것으로 다가온다(KD IV/3.1, 148).
고로 때로는 이 말씀들을 이해하는 데 수 십년 혹은 수 세기가 걸리기도 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인간의 한계나 우둔함 때문만이 아니라 자명하지 않는 이 말씀들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KD IV/3.1, 14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화해사건의 場(Schauplatz)으로서 사용하신다는 점이다(KD IV/3.1, 154). 그 결과 우주는 인간이 이 지식을 인정하고 안하고 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빛들과 진리들과 말씀들과 선포를 가지고 있다. 이 말씀들은 인간의 죄와 부패 때문에 소멸되지 않았다(KD IV/3.1, 157). 오히려 이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顯現 前과 中과 後에도 계속해서 존속해왔다. 그 이유는 신적 화해사역이 신적 창조사역과 그 의미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화해는 창조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진리의 빛들과 말씀들을 뺏어가지 않는다.
이 말씀들은 피조 세계의 발광체(Helligkeit)이기에 피조 세계는 존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말한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는 또한 읽혀지고 이해되어져야 할 하나의 교과서며 동시에 교과서 자신의 독체요 해석자다. 우리는 실재로 이 말씀들과 살고 있으며 이 말씀들 없이는 살 수 없다. 하나님은 이 말씀들을 때로는 도전하고 상대화 하지만 때로는 이들을 설정하고(instauriert) 완전하게(integriert)한다(KD IV/3.1, 174). 하나님은 이 말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사용되어지길 원하시며, 도한 이 기능을 부여했다(KD IV/3.1, 178). 은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원의 중심이라면, 이 말씀들은 이 원의 가장자리다(KD IV/3.1, 133).
자연신학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쟁을 요약하자면 비록 바르트가 세상의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과는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나 이들을 통해서 화해의 진리가 말해진다면 이것은 결국 자연신학을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브룬너 역시 자연신학을 주장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하나님 지식은 질적으로 다름을 전제했다는 사실이다.
이 전제는 바르트에게 있어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많은 바르트 학자들이 바르트의 이러한 변화를 간과하거나 너무 가볍게 취급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큉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많은 신학자들이 자연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이와 같은 변화를 명시한 그의 교의학 삼 권(1959년)에 대해서 너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바르트는 여기서 그가 이전에 그토록 강하게 견지해 왔던 '오직 예수만이 삶에 있어서 유일하다'는 주장에서 이 예수와 함께 '다른 참 말씀과 빛들'도 있다고 말한다(KD IV/3.1, 40-188). 이것은 분명 '자연신학'과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로부터, 그리고 철학과 인간의 경험으로부터의 하나님 지식을 새롭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이것은 그가 초기에 단지 인간의 義며 우상이라고 했던 세상 종교들에 대한 간접적이고도 감춰진 형태 안에서의 새로운 평가다.
결 론
1. '바르트의 기독론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인가?'에 대한 답변은 해석자나 독자의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바르트에 있어서 그의 全 기독론의 주체가 하나님이며 이 하나님의 '위로부터'의 성육신이 기독론의 시발점이며 필요조건이란 점에서 그의 기독론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바르트가 동시에 그의 기독론의 핵심적 구성요소와 내용은 다름 아닌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의 교환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음에 비추어 그의 기독론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는 극히 일부의 견해이긴 하지만 바르트의 기독론은 창조이전에 삼위의 신격 안에서 성자 아들을 선택하심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의 기독론을 '안으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더 나아가서 바르트의 기독론을 직선적이고 취사 선택적 성격을 가진 분석적(analytical) 관점에서가 아닌 전체적(wholistic) 관점에서 이해할 때, 이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전혀 다른 기독론으로 등장한다. 이 비평은 서구신학계의 지나친 분석 지향적 방법에 대한 간접적 비평이기도하다. 바르트의 기독론은 그 틀과 내용에 있어서 단순히 직선적(linear)('부터-에로')이지 않고 삼위론적, 곧 원적(circular)이다. 말하자면 우선 바르트의 기독론은 삼위일체론의 틀 위에 세워져 있다. 또한 기독론의 내용은 세 직능, 곧 제사장적, 왕적, 예언자적 직능으로 구분(분석)해서 논의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체를(totus Christus)이루고 있다.
여기서 주지해야 할 사실은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啓示에 대한 해석이며, 이 계시는 바로 그 나사렛 예수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고로 만약 바르트 해석자들이 바르트의 기독론을 단지 그의 접근 방법이나 神的인 主導를 이유로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바르트의 기독론은 물론 그의 全 敎義學의 해석학적 핵심인 삼위일체론을 무시한 데 따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2. 바르트가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 혹은 '안으로부터'의 기독론을 역설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끊임없이 가졌던 질문은 이러한 기독론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며, 그 목적이 무엇이며, 이러한 기독론이 서있는 토대(Grund)가 무엇이냐 하는 점들이었다. 이 질문들은 결국 기독론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상관성(relevance) 있느냐는 것으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누구보다도 바르트 자신이 인간과 무관한 기독론은 아무리 실재고 위대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그의 전 기독론에서 계속해서 상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밝혔듯이 기독론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이것이 인간을 위한 사건으로서 인간이 이 땅에서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영역에서 한 인간에 의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이 상관성의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라는 인식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바르트에 따르면 그의 기독론 인식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계시나 모호한 로고스 개념으로부터 온 게 아니고, 이 땅의 존재인 '나사렛 예수'(왕적 인간)를 통해서 온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대변하는 '왕적 인간'은 단지 '아래로부터'만을 대변하지 않고, '위로부터'와 '안으로부터'의 통합함으로서의 기독론 전반에 대한 내용증명이다.
3. 바르트는 그가 한 때 그토록 반대했던 '자연신학'을 새롭게 개방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많은 바르트 신학자들이 초기 바르트와 후기 바르트를 논하면서도 실상 그의 사상의 발전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고로 바르트의 기독론을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칭하는 것은 편향된 이해거나 단순화한 이해라고 봐도 타당할 것이다.
4. 이 논제의 중요성은 이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야말로 모든 기독론에 대한 해석학적 필터(hermeneutical filter)라는 신념에 있다. 타락한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적 존재며 동시에 지적인 존재다. 고로 인간은 자신의 관심과 의도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하고 이해하며, 심지어 인간이 원하는 기독론(신론)을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타락한 인간은 개인적 악과 구조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데 있다. 또한 타락한 인간이 완벽한 제도, 관습, 관행을 만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자들은 현상유지(status quo)를 추구한다. 반복 누적된 악은 전통과 관행이 되어 또 하나의 신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러한 신은 당연히 성서의 하나님, 즉 '왕적 인간'이 보여주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우상 일뿐이다. 하나님의 통치 그 자체로서의 '왕적 인간'의 언행은 하나님의 통치 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끊임없는 개혁) 함으로서 이 '왕적 인간'이야말로 우리가 믿는 주가 누구며,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고로 우리의 모든 신관과 신앙관은 항상 이 '아래로부터'의 '왕적 인간'의 삶과 말씀의 빛 아래서 새롭게 조명되어져야 할 참 기독론적, 그래서 신학적 해석학의 보루다.
5. 바르트에게 있어서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그의 기독론에 있어서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이 필요조건 만으론 그의 기독론은 충분치 않다. 그의 기독론의 충분조건은 바로 이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의 기독론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손영진 박사(Ph.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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