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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행위하시는 하나님

by 【고동엽】 2011.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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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하시는 하나님

 

K. Barth에게 있어서의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절대적 은유(Metapher) 관한 이해

[울리히 쾨르트}
우리는 초기 쉴라이어마허의 "종교론(Reden)" 속에 나타난 "역시 하나님(Auch Gott)께서도" 라는 문장에서 "종교 속에서 행동하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존재할 없다" 것을 읽는다. 하나님은 행위하는 주체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생각되어질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속에서 그리고 특별히 기독교적인 신학 내부에서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언급은 특별히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동시에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언급의 중심적인 의미는 쉴라이어마허에 의해서 확실하게 상대화되어졌다. 그리고 의미는, 종교에 있어서의 하나님에 관한 그의 이해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필요없는 것이 되었다. 쉴라이어마허는 그의 종교론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하나님 없는 종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다른 어떤 것보다 나을 있다"는 의도를 변호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에 관해서 언급되어진다면, 쉴라이어마허에 따르면 하나님은 행위하는 본질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생각되어질 없다. 또한 하나님에 관해 언급되어진다는 것은 종교론의 판단에 따르면 종교적인 필연성은 아니다.

 

초기 쉴라이어마허의 의도에 따르면, 행위하시는 하나님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의 은유적인 언설방식이 다루어진다. 행위하시는 하나님은 "하나의 개별적이고 종교적인 직관방식이다." 또는 우리가 말할 있는 것처럼, 행위하시는 하나님은 쉴라이어마허가 보편자 (Universum)라고 명명한 것에 대한 은유이며, 세계, 자연, 인간성, 역사성에 대한 총체(Gesamtheit)이다. "세계 안에 주어진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의 행위로 표상하는 , 바로 이것이 종교이다. 이것은 무한한 전체(unendliches Ganze) 대한 세계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 보편자는 쉴라이어마허에 의해서 스피노자와의 관련하에서 행동 하는 것으로 사고되어졌다. 쉴라이어마허가 이렇게 표현하였듯이, "보편자는 단절되지 않는 활동성(Tätigkeit) 존재한다." 활동성을 통해서 결국 종교는 생성된다. "종교 속에서 보편자는 관찰되어졌다. 보편자는 인간에게서 근본적으로 행위하는 것으로 정립되어졌다." 보편자가 처음에 인용한 각주에서 의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제 하나님이 종교 속에서 행동하는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존재할 없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행위하시는 하나님은 행위하는 보편자, "보편자의 행위"를 위한 은유가 되기 때문에, 인용의 확장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없다." 동시에 바로 이것이 첨부된다: 또한 보편자의 행위 에 관한 언급은 하나의 은유다. 이것은 칸트의 의미에 있어서 상징과 관계된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 59장에서 도출해내었던 것처럼, "완전히 다른 개념을 관찰하는 대상에 대한 반성의 전달(Übertragung der Reflexion) 관계된다. 아마도 이러한 관찰은 결코 직접적으로 완전히 다른 개념과 상응할 없다." 보편자의 영향으로 감지되는 수동성의 경험 (Passivitätserfahrung)으로부터 근거하여 쉴라이어마허는 보편자를 행위하는 주체의 유비로 생각하였다. 행위하시는 하나님은 상징이다. 혹은 우리가 뒤에서 상술하게 근거로부터 자세히 말하겠지만, 행위하시는 하나님은 근원적인 것에 관한 은유이다. 행위하는 보편자가 지닌 은유적인 본성이다.

 

칸트가 말하는 상징개념이라는 의미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에 관한 우리들의 모든 인식은 순수하게 상징적인 것이며, 그리고 단독적으로 세계본질(Weltwesen) 대하여 객관적인 실재성을 증명하는 특성과 이해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도식적으로 파악되는 모든 것은 신인동형론에 빠져들게 한다. 바로 이와 같이 만약 이렇게 파악되는 것이 모든 직관을 무시해버린다면, 이신론(Deism) 빠져들고, 이것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또한 실천적인 의도도 인식되지 않는다." 그의 "종교론"에서 초기 쉴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개념은 이러한 칸트의 상징개념의 의미에서 신인동형론이라는 (Scylla) 이신론이라는 (Charybdis)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부터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길을 닦아 놓았다. 이와 함께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은유는 이미 17세기에 반이신론적인 공격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쉴라이어마허가 보편자에게 언젠가 하나님이 유보해 놓은 이러한 편재와 활동성을 부가함으로써, 한편에서는 프로테스탄트적인 정통주의의 신학에서처럼 유신론이 원칙적으로 떨어져 나가고,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철학 또는 이신론 가운데서 일어나는 종교의 해체(Auflösung)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인식에 전달됨으로써 보편자를 방해하게 된다.

 

쉴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우리들의 행위(Einsatz),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은유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서적인 전통이 일반적으로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을 행위하는 본질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또한 여기에서부터 유대-기독교적인 전통이 그들의 출발점에서부터 하나님에 관하여 신인동형론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아주 친숙한 것이다. 이에 반해서 하나님의 행위 혹은 행위하시는 하나님의 개념 가운데서 이렇게 언급되는 추상적인 것과 사실적인 것을 주제화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적인 전통의 현상은 아니다.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은유가, 은유가 사유되어지고 있는 곳에서 이미 하나의 특별한 역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역사 가 진행되는 동안 은유가 의미하고 있고 응용되고 있다는 관점에서 대부분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오늘날, 행위하시는 하나님의 은유에 관해 질문하는 사람은 은유를 현대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는 것에 대하여, 계몽주의 후기의 나타난 은유의 형태와 응용방법에 대하여 질문하게 된다.

 

만약 바르트에게 있어서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해 진술하고 있는 결과들을 검증할려고 하는 것은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번째 관점에서 바르트가 행위하시는 하나님 에 관해 굴절되지 않는 순수성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나고 있다.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해 외관상으로 완전히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바르트의 언급은 우리들이 그에 대하여 신정통주의라고 비판하는 것들의 구성요소들이다.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바르트의 언급은 우선적으로 계몽주의 뒤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리고 후기 종교개혁적 정통주의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나 어렵게 바르트가 이것을 수용하였는가를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인상은 불트만의 신학적 단초와 그리고 불트만에 의해 해명되어진 비신화화의 논쟁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는 것으로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러한 논쟁의 영역 가운데서 신학적인 자주성과 참뜻에 관한 모순적인 논쟁은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언급의 의미론적인 상황에서와 같이 이해 가능한 현대적인 조건으로 이끌어진다.

 

이와 반대로 바르트의 작품을 표면적으로 읽을 ,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은유적인 언급의 역사에서처럼 하나님의 행위 안에서 현대적으로 이해 가능한 조건이 계속해서 희미해져가는 것처럼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행위는 단지 표면적으로 쇠퇴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행위하시는 하나님의 은유는 직접적으로 성서적인 진술방식과 결코 상응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과 고유한 특성 속에서 만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러한 고유한 특성이 은유의 신계몽주의적(neuaufklärerische) 역사 속에서 배열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특성은 특별히 현대적인 문제제기에 기인하고 있다. 명제는 교회 교의학에서 검증되어져야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은유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전체적으로 아주 중요한 열쇠라는 것이 드러나게 것이다. 렌트로프의 도움으로 교회 교의학이 일반적으로 "신적인 행위에 관한 언급의 배경적인 은유법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확정되어졌다. 그리고 은유법은 개별적인 완성의 지류들 내부까지 관찰하도록 하며, 우리들에게 은유법의 중심주제에 관한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은유법을 통하여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언급의 기능을 질문하게 한다.

 

우리는 번째 장에서 어떻게 바르트가 교회 교의학에서 하나님의 행위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 것이다. 번째 장에서 우리는 어떠한 이해를 가지고 바르트가 하나님의 행위를 인간의 이해로 접근시키고 있는지를 질문해 것이다. 가지 경우에 있어서, 바르트 작품의 넓이는 이것을 해석하고 단순화시켜야 하는 부담으로 우리에게 작용할 것 이다. 우리가 바라고 있는 바와 같이, 작품을 해석하고 단순화시키는 것은 해석의 폭력으로는 이끌지 않을 것이다. 번째 장에서,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언급의 비 판적 가치를 평가할 것이다. 바르트와의 대화 속에서 반론의 결과물들이 생기게 것이다. 이러한 반론들은 번째와 마지막 장에서 바르트에 반대해서 행위하는 하나님에 관한 다른 이해를 시도하기 위한 단초들에 대해 질문하게 것이다.

 

I. 활동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 존재

하나님의 행위는 바르트의 신론의 근본동기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그의 이론으로 이미 나타났다. 동시에 바르트의 하나님 말씀론은 "하나님의 현실성"에 관한 교회교의학의 번째 장에서 하나의 주제로 명백하게 드러났다. 장에서 바르트의 번째 명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다: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의 행위 속에 존재하신다" 신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언급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결정적이 되었다. 바르트의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진술은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이러한 진술로부터 획득되어질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존에 관한 진술은 단지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진술의 형태로만 형성되어질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 속에 존재하신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언급으로부터 하나님의 실존에 관한 언급을 전통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현실성을 포함하는 가지 관점을 통해서 본질(eseentia) 개념을 보충하였다. 바르트에 의하면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의 행위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 없이 존재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존재하시는 분은 단지 자신의 사역 속에서만 존재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그러나 또한 그는 자신의 사역 안에 계시는 이외에 자기 자신 속에서 다른 분으로 존재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신학적인 인식은 하나님 자신의 행위에 관한 인식을 지시하는 것으로 머문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행위이다.

 

바르트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특성화시킬 뿐만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서 행위개념(Handlungsbegriff) 전제로 하는 논리적 관계를 주제화하고, 이러한 논리적 관계로부터 신론에 상응하는 일관성을 이끌어 낸다. 면에서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행위개념은 하나의 단순한 역사 또는 사건으로부터 계시를 경계지우는 것이다. 다른 면에서는 그의 신론에 있어서의 이러한 행위개념의 응용은, 하나님을 행위하는 주체로서, 현대적인 의미로 인격으로 사고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앞으로 자세하게 말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우리는 행위 개념의 중요한 특징을 현재화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행위 가운데서 통상적으로 의도되어지거나 요구되어진 목적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실제적으로 이해할 있다. 이와 함께 "프락시스"의 의미에서의 행위와 "포이시스"의 의미에서의 요구 사이는 항상 엄격하게 구별되어지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종결된 행위를 일반적으로 행위의 결과를 포함하여 의식적인 행위(Tat)라고 표현한다면, 의식적인 행위의 개념은 행위과정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게 된다. 아주 일반적으로 어떤 하나의 행위 가운데서 각각의 반성적이고, 계획적이고 목표지향적인 활동성은 단순한 자연사(Naturgeschehen) 반대로 이해되어질 있다. 여기서 어떤 경우에라도 다양한 행위이론이 철학과 행동학(Handlungswissenschaft) 영역으로 근접해야 여지가 존재 한다. 어쨌든 우리들의 관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미가 존재한다. 행위나 의식적인 행동은 의미있게 단지 인간에게만 부가되어질 있다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인격적인 주체에 대해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인격적인 주체 아래에 사고, 의지 선택의 자유가 자리할 있다. 반성적이고, 계획적이고, 목표지향적인 활동성으로서 하나의 행위가 단순한 사건으로 부터 구별되듯이, 또한 행위는 사건 또는 과정으로부터도 구별된다.

 

바르트가 계시를 우선적으로 "결과" 혹은 "사건"으로서 완전히 무규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제 그는 하나님의 행동에 관한 개념을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하나님의 행동의 결과"에 관해 말해지는 곳에,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언급이 처음부터 개념적으로 불명료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의 행위를 신학적으로 제공되어진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불명료한 것을 제거하고, 계시사건이 결정적으로 행위로 이해될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행위개념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 안에 있는 존재'"로 이해될 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신적인 결과와 행위 그리고 생명의 특수성은 인격 존재의 특수성이다." 분명히 바르트는 인격에 대한 개념규정을 다음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인격은 인식하고, 자의적이고 행동하는 자아(Ich)이다." 그리고 "하나님 자아이다." 최종적으로 보에티우스(Boethius)에로 귀결된 인격 개념은 필수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계시를 행위로 인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르트가 확정한대로, 인격은 "근원적이고 고유한 이고, 의지이 며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앎과 의지 그리고 행위는 자아를 그것(Es)으로부터 구별시키고, 또한 의식적인 행위를 단순한 사건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또는 바르트가 형식화하였듯이, 인격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의적인 주체이다."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바르트는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결과로 하나님의 행위는 결단의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행위는 "자신의 고유하고 의식적이고 의 지적이고 그리고 완성을 이루어가는 결단(Entscheidung)이다." 이러한 개념 규정에서 통상적인 행위개념의 요소가 재발견되었다. 결단으로서 행위는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고유한 행위와 관계한다는 명백한 반증들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위개념을 결정하는 주체적인 행위를 고려할 있는 요소와 부딪힌다. 다시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행위를 실현할 있는 완전한 의식과 자유를 전제로 한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행위를 의식적이고 의도된 결단이라고 해석하고, 행위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자유 가운데의 존재로 묘사한다면, 그는 바로 이러한 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진술은 바르트를, 하나님을 인격으로 사고하도록 하는 신학적인 과제 앞에 세운다. " 하나님을 자신의 고유한 사고와 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 속에, 그리고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자아로서 사고하도록 하는 과제 앞에 세우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자신의 계시 가운데서 만나신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아존재(Ichsein)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자의대로 행하고, 스스로 규정하고 결정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의 절대적 권력의 행위 가운데서, 완전한 만족한 가운데서 스스로 존재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규정이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고유한 의도에 적합하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바르트에 의하면 이러한 의미는 신적인 삶의 자기반성과 원칙적인 자기만족에 대한 진술로부터 이루어졌다. 이러한 명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바르트는 신적인 인격에 관한 고대교회의 개념을 가지 신적인 존재방식을 통해서 분명하게 대체하였 다.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자기 자신을 알고, 자의대로 행하고, 그리고 결정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바르트의 신론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언급의 일관성은 명백해진다.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언급은 하나의 인격개념(Personenbegriff), 그리고 개별적인 행위주체라는 의미 속에 있는 인격의 개념(Begriff der Person) 포함한다. 또한 개념은 삼위일체론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언급은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개념에 반대해서 사용하고 있다. 존재론적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흔적 위에서 하나님을 제일원인자로 부동자의 동자라는 의미에서 사고해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하나님의 행위에 존재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는 자기 자신을 통해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로 알려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르트는 이러한 신학적인 진술에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진술을 가지고 신학적인 기본결단 뿐만 아니라 인간학적이고 윤리적인 기본결단이 이루어졌기 때문 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스스로 움직이시는 인격이라는 사실은 바로 인격의 존재는 인격의 행위로 이루어지는데, 다른 모든 인격들에 대해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 다. 다시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단지 하나님만을 인격적인 존재로 진술되어질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신적인 자아의 말걸음(Anrede) 통해서 (Du)로서의 인격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걸어 오는 인격으로서 "인격화하는 (personifizierende) 인격"이라는 완전한 의미에서 유일하고 실제적인 인격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인간은 오직 인격화된(personifizierte) 인격이다. 우리는 바르트에 의하면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인 계시의 근거 위에서만 인격의 적절한 개념을 발전시켜 나갈 있듯이, 또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동하시는 자로서 보여 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없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로 이해되어지는 관계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언급이 인간학 속에서 해결되는 신학을 제지 하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주체이며, 또한 활동적 인 인격이라는 표상은 우선적으로 아주 까다로운 신인동형론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신인동형론은 종교비판적으로 쉽게 가면을 벗길 있다. 쉽게 비판할 있는 신인동형론을 포기하라는 요구에 반대하여 바르트의 다양한 반증들이 존재한다. 또한 반증에 의하면 성서를 기회에 적절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신인동형론적으로 읽어야 하며, 자신에게 확신을 주는 논증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있어서 자신의 작업의 완전한 완성에 관한 "결정적인 성과물"이 존재한다. 그의 작업에 있어서의 완성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성서에 관한 인격적인 진술방식은 "결코 유아적이거나, 천박하거나 신인동형론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서에 관한 인격적인 진술방식은 완전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상응한다: 하나님은 무엇(Etwas) 아니라, 바로 유일하신 (Einer)이시다. 하나님은 분이라 할지라도, 분에 의해 인간은 무엇을 생명으로 옮긴다." 바르트는 하나님에 관한 인격적인 진술방식이 억제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확장될 있는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일관성을 이끌어 내었다. 바르트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제공되어진(geboten) 어떤 것으로 간주하였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는 요한일서 416절의 의미자체로부터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이해될 있다는 것이 제공되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Liebende)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는 "신인동형론"이라는 용어가 단지 인용부호(Anführungszeichen)에서만 유효하게 하였다.

 

하나님에 관한 인격적인 진술방식을 위한 바르트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인상을 준다. 이미 무엇이 기정사실로 주장되어진 것으로, 또한 이것이 실제로 논증적으로 명백하게 것으로 비추어진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바르트가 신학적인 근거들로부터 교의학의 내부에서 각각의 방법론을 포기하려고 것에 놓여져 있다. 이것은 바르트가 실제로 방법론과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방법론적으로 방향을 잡은 길을 숨겼다는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언급에서 바르트가 순수하고 무반성적으로 하나님을 결코 행위하는 주체로 사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는 그는 이러한 진술방식의 의미론적인 문제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위에 관하여(De facto) 그는 하나의 해결점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불충분하게 존재하는 한에서, 해결점을 그는 개념적인 정확함으로 깨닫게 하였다. 바르트는 개념적인 정확함에 신학적인 방법을 결핍되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시작할 때부터 정확함을 그의 교의학적인 작업으로부터 스스로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바르트의 이해는, 나타난 바와 같이, 종교적인 진술의 의미론에 속한 공헌으로 해석하게 하였다.

 

우선적으로 바르트는 결정적으로 성서의 인간학적인 진술방식이 신적인 존재의 인격화로 평가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하나님의 존재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존재에의 관점에 서…'인격화'에 관해서 말할 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는 바르트는 결국 "하나님에 관 한 인격적인 진술방식의 사용" 혹은 "하나님 말씀에 관한 개념의 인격화"에 관해서 말한다. 의미론적 개념성에서 해석되어진다는 것은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진술에 있어서 은유적인 진술방식이 다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에 바르트는 스스로 분명하게 은유 의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에 따라서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은유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 관한 은유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인격적인 진술방식은 사용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증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동의이어(同意異語) 반복이 문제가 되고 있다. 동일하게 틸리히에게서 우리는 입장에서 바르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의 나은 이해로, 하나님 위의 하나님의 사고에 대한 이해로 이끌어갈 있다. 그래서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인격적인 진술방식은 하나님 위의 하나님을 위한 하나의 은유이다. 틸리히가 상징이라고 말하듯이. 바르트가 "이러한 우리 들의 표상언어(Vorstellungssprache) 너머에 있는 하나님"에 관해 말할 , 사실에 의해서 하나님 위의 하나님은 바로 바르트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바르트에 의하면 이러한 하나님은 " 무엇이 아니라 분"이시다. 그러므로 바르트에 의하면 기독교적인 신론 내부 에서 신인동형론적-은유적인 진술방식은 허락된 무엇이 아니라, 철저하게 필연적인 것이 다. 나사렛 예수의 운명이 하나님의 계시로 여겨졌기 때문에, 예수의 운명은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에게 "인간적인 것의 흔적에서 진리 말하는 것으로 허락되어졌고, 제공되어졌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 하나님으로, 또한 분에 대하여 인격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바로 이것은 우리들에게 허락되어졌고, 제공되어졌다. 신론의 내부에서 하나님 위의 하나님에 관해 참다운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 행위하시는 하나님의 주체의 은유는 바르트에 의하면 필수적인 것이다.

 

지금 나타난 바와 같이, 바르트에 의하면 행위하시는 하나님은 신학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은유이다. 브루멘베르크(H. Blumenberg) 의미로 해석되어진 바와 같이, 하나님은 절대적인 은유이다. 브루멘베르크의 의미 안에 있는 절대적인 은유는 칸트(Kant) 그의 판단력 비판에서 상징으로 표시되어진 것과 상응한다. 칸트는 상징을 유비형성(Analogiebildung)으로 정의되었다. 그리고 유비형성의 도움으로, "견해를 완전히 적절하게 주어질 없게 되는" 순수한 이성개념(Vernunftbegriffen) (이념)으로 하나의 "의미화(Versinnlichung)" 얻게 된다. 칸트의 의미 안에 있는 상징은 여기서부터 개념을 통해서 대체되어지지 않는다. 완전히 브루멘베르크는 절대적인 은유에 관하여 말하였다. "이러한 은유가 절대적으로 명명되 어진다는 것은, 전문학술적인 요구에 반해서 은유를 내구성(resistent) 있는 것으로 증명되 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개념으로 해결되어질 없다. 그러나 은유는 다른 무엇을 통해서 대체되어질 없거나 혹은 변호되어질 없거나 또는 정확하게 수정되어질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여기에서부터 절대적인 은유는 역사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있다: 바르트는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언급을, 틸리히가 하나님 위의 하나님을 명명하는 무엇을 위해 절대적인 은유로 사용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바르트 이해의 실현이 통시적(通時的)으로 은유의 역사에서 제기된다는 점에 있어서, 절대적인 은유에 관한 브루멘베르크의 개념은 이러한 바르트의 이해에서 밝혀졌다. 그리고 쉴라이어마허에게서 대체되어졌듯이, 우리가 이미 은유의 역사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었다.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은유의 역사의 내부에서 하나님에 관한 바르트의 묘사는 행위하는 주체로서, 후기 계몽주의의 특별한 조건하에서 수정된 의도를 지닌 은유의 새로운 이해로서 개념화되었다. 바로 바르트의 신론에서 행위하시는 하나님 에 관한 은유가 무시간적으로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변화와 변천이 의도되어 있 다는 것을 나타내 주었다. 그래서 이제 표면적으로 바르트는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자신의 은유를 결국은 하나님에 관한 성서적인 진술의 근거 위에서 발전시켰다. 실제로 바 르트에게 있어서 이러한 은유는 주체에 관한 현대적인 사고라는 의미를 지닌 인격성의 개념 의 영향 가운데서 획득되었다. 바르트는 다양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교의학의 내부에서 행위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인격개념의 역사를 따르고 있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의식하였다. 신론에서 그에 의해 사용되어진 인격개념은 특별히 현대적인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그 는 행위하는 주체의 개념을 그는 완전한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개념의 현대적인 의미에서 인격성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에 관한 표현으로 생각될 있는 "참되고 중요한 것은 명백하게 삼위일체론과 아주 밀접하게 뿐만 아니라 분리되지 않게 결합되어 있 다." 확실히 바르트는, 인격성의 개념이 하나님의 인격성에 관해 19-20세에 일어난 논쟁의 영역에서 단지 전문학술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자신의 진술을 제한하였다. 또한 바르트의 의미에서 행위자로서의 하나님은 현대적인 인격성 개념과의 관계없이 진술 없다는 사 실에서 아무 것도 변화되지 않았다. 만약 바르트가 하나님의 인격성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포기할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 점에 있어서 그는 자기 기만에 놓여있다. 이것은 하나 님의 행위의 은유에 관한 바르트의 새로운 이해의 필수적인 관계이다.

 

우리는 이러한 확정과 더불어 우리들의 번째 단계의 목표에 도달하였다. 우리가 이제 검증을 위한 번째 걸음을 뛰기 전에, 우리는 한번 때까지의 결과를 현재화해야 한다. 이것은 우선 하나님의 행위가 계시론에서처럼 바르트 신론의 기본적인 동기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진술이 교회 교의학의 건축을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확정하였다: 한편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하였던 행위개념은 정확히 행위를 개념화하는 각각의 요소 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요소들은 인간의 행동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가능한 개념을 결정한다. 다른 면에서 바르트는 인격 혹은 행동하는 주체에 관한 현대적인 개념의 의미에서 행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였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행위하시는 하나님의 의미론적인 상황에 관한 우리들의 검증은 이러한 진술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가 최상적으로 절대적인 은유의 개념을 통해서 해석되어졌다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행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유는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바르트의 해석 하나의 특별 한 현대적인 가능성으로서 역사 속으로 도달되어졌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들의 검증에 대 한 번째 발걸음이 시작된다. 어떻게 바르트에게 있어서 행위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이러 한 현대적인 주체와 관계되어졌는가? 여기서 바르트의 이러한 개념이 하나님에 관한 그의 은유를 발전시켰다.

 

II. 주체에 상응함

하나님의 존재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도 바르트에 의하면 행위 안에 있는 존재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존재와 같이 바르트는 인간의 존재를 역시 활동하는 존재로 이해한다. "인간이 기 때문에," 바르트의 기본적인 개론서(Auskunft)에서는 "그가 행위하기 때문에, 인격으로 실존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상세하게 형식화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은 물론 행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위는 선택을 의미한다. 결단을 의미한다." 자신의 행위를 통해 규정되는 인간의 본질은 바르트의 인간학에서처럼, 그의 신학적 윤리학에서도 규정되었다. 인간이 행위자로 규정되기 때문에, ", 가치, 정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참 다운 연속성에 대한 질문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윤리적인 질문은 이상 그리고 다소 간에 , 가치, 정의 그리고 자신의 실존에 대한 참다운 연속성에 대한 질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인간학은 윤리학과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그러므로 윤리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트는 인간을 인간학적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주체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의 행위는 선택과 결단으로서, 정확하게는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선택과 결단으로서 그리고 자기규정으로 개념화되어진다. 바르트는 우리들의 실존을 현상학적(phänomenologisch)으 로 행동으로서 해석한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의 자율적인 주체이다. 그러나 자율성의 문제 는 이러한 방법에서 하나의 특별하고 현대적인 질문이 된다.

 

인간을 자율적인 행위의 주체로서 규정함으로써 인간은 행위하시는 하나님 다음에 번째 주체 위치하게 된다. 인간이 "첫번째가 아닌 두번째 주체"가 됨으로써, 바르트는 확실하게 주체의 순서로 정하였다. 이러한 주체에 대한 규정은 신학적인 윤리를 위한 중대 한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결과로 인해 제기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신적인 행위의 객체로서 인간이 바로 이러한 인간의 측면에서 자율적인 주체가 있는가? 하나님과 인간이 외관상으로 단지 경쟁하고 상대방을 억압하는 주체로만 사고되어질 있게 됨으로써, 우선적으로 신학적인 윤리의 기본적인 문제가 표현되었다. 실재로 바르트의 이해에 의해서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신학과 철학이 이러한 딜렘마 속에 빠져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사고의 결별과 한편에서는 기독교의 유한성(finis Christianismi) 다른 편에서는 모든 윤리의 파괴 사이에서 양자택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딜렘마로부 터 바르트는 주체로서 사고된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자신의 절대적인 은유를 통해서 신학을 이끌어내고 싶어하였다. 그는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을 자율적인 주체로 묘사함으로써,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 사이의 관계를 바로 경쟁관계로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교의학과 윤리를 선험(Aporie)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시도하였다. 또한 이점에 있어서 바르트의 윤리적인 교의학의 프로그램이 신학의 영역 안에서 자율성의 현대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시도로서 이해되어졌다. 여기서 그의 윤리적인 교의학은 교의학적인 것으로부터 윤리적인 원리가 분열되는 것을 극복해야만 했다.

 

바르트는 주체의 관계를 번째로 상응관계(Entsprechungsverhältnis) 재구조화함으로써, 그는 이와 같은 문제해결을 시도하였다. 행위하는 인간은 하나님에 상응하는 주체이 다. 그래서 하나님뿐만 아니라 인간도 신학적인 윤리의 고유한 주체가 아니며, 또한 신학적 인 윤리는 본질적으로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론이며 "신적인 윤리"임으로, 신론은 본질적으로 단지 윤리로만 형식화되어질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적이다. 인간이 하나님에 상응하게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은 행위하신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우선 보편적인 인간학의 명제로서가 아니라 기독론에 관한 진술로서 유효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에 상응하는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하나님에 상응한 본질이며, 이것은 행위하는 인간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인간 예수가 하나님에 상응하게 행위하심으로써,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선 행위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상응하게 행동하는 인간은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상응하는 인간이다. 이렇게 상응하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율성의 기초를 놓는 것이다. 바로 신적인 행위의 객체로서 인간은 실제로 주체가 된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에 행위에 관한 진술은 자율성에 관한 사고에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인간이 없고, 하나님의 자기 규정(Selbstbestimmung)안에서 인간은 …신의 예정(Vorherbestimmung) 대상이 된다." 이에 따라서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들의 자기규정을 규정하는 (Bestimmtwerden)" 위한 은유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진술은 신율로써 우리들의 자율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율은 일정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향해 방향지워진 자율성을 의미한다. 신율은 우선 자기 모순과 같이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이고, 자유로운 순종이다. 신율에 관한 바르트의 개념은 다시 행위 개념으로부터 해석되어진다. 바로 이와 같이 신율이 하나의 목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의 행위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이것은 인간의 행위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행위에 유효하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율적 인 자율성의 신학적인 구조는 예수의 인격을 인식할 있다. "예수가 인격으로 규정되고, 언제나 방향으로만 활동하심으로써, 그는 전적으로 실존하신다." 이와 상응하게 인간의 신율적인 실존은 "규정된 결단에서, 일정하고 참되고 유일한 자유에서, 그리고 자유 를 통해서 내용적으로 채워진 실존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방식으로 신율은 바르트에 의하면 자율과 타율의 해결 불가능성(Aporie) 극복한다. 그리고 여기서 해결 불가능성은 신적인 주체와 인간적인 주체 사이의 경쟁의 경우에 있어서 불가피한 것이다. 신율은 "권위와 자유의 통일성이다."

 

이러한 통일성은 명백하게 "단지 신앙 안에서만" 현재화된다. 그러나 이것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앙은 행동으로 그리고 규정되고 신학적으로 방향지워진 행위로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적인 신앙은 자유롭고 인간적인 행위이다."

 

신율적인 주체는 하나님의 주체성에 상응하는 주체이다. 이러한 상응관계는 이제 정확하게 검증될 있다. 알려진대로 바르트는 이러한 상응관계의 밀접한 규정을 위해 신앙의 유비 혹은 관계의 유비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개념이 존재의 유비와 유비의 연관관계에 반대하여 사용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있어서 이러한 전문용어는 개념 적으로 명확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바르트의 진술에서 상응의 개념 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상응이라는 용어는 하나님 의 행위 혹은 "동형일치(Konformität)" 비슷한 우리들의 "동형(Gleichförmigkeit)" 의미하고 있다. 반대로 바르트의 하나님의 행위를 형상화하여 하나의 거울에 비교할 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행위 안에서 행위주체로 반사되고, 그래서 그의 실존에 대한 규정(Verfaßtheit) 행동(Akt) 행위(Tat) 인식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상응의 개념은 인간을 같은 방식으로 능동적인 본질과 마찬가지로 수용적(rezeptives) 본질로 특징화하는데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행위에 관해 말해지고 있 다는 점에서 인간은 우선 행위의 객체로, 그리고 순수한 수동적 혹은 수용적 본질로만 비쳐진다. 여기에서부터 바르트에 의해 정립되었던 인간의 자율성이 파괴되어짐으로써, 우리가 이미 말했던 주체의 경쟁은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체의 자발적 행위(Spontaneität) 관해 말해지지 않고는, 동시에 자율성은 말해질 없다. 그러므로 바 르트는 한편에서는 계시사건과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기독교적인 신앙과 결합한 사고를, 인간의 기본적인 수동성과 수용성에 관한 사고를 확정하려고 했고, 또한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을 행위주체로 해석하려고 하였고, 또한 그렇게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인간의 수용성을 원인과 영향의 도식을 가지고 설명할 없었다. 도식은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은유를 통해서 철저하게 결정되어졌다. "인간존재(Menschensein)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한다"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이것은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처럼" "하나님에게로부터 오는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함께하는 존재라는 개념은 자발성과 같이 수용성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으 로부터 오는 존재로서 인간의 실존은 "순수한 수용성(Rezeptivität) 안에 있는 객관이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가는 존재로서 인간의 실존은 순수한 자발성(Spontaneität) 안에 있는 주체로 이해되어진다." 인간의 존재는 "능동적으로 함께하는 존재(ein aktives Dabeisein)이다. 인간은 확실히 하나님으로부터 순수하게 수용적이다. 그리고 그는 순수하게 자발적으 로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게 바르트는 신앙인의 존재를 "하나님의 은혜에 상응하는 보완적인 존재"로 나타낼 있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은혜에 상응하 는 보완적인 존재를 위해서 "하나님의 파트너"라는 은유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우리들의 검증은 걸음 나아갔다. 신인동형론의 문제가 교회 교의학의 중심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신인동형론의 현대적인 문제는 하나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바르트는 인간이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고를 긍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고를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사고에서 확정함으로써, 인간학 안에서 신학이 해결되는 것을 막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교회 교의학은 신학적으로, 다시 말해, 현대적인 주체성에 대해 하나님의 사고로부터 시작되어지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교회 교의학은 이러한 과제를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의미심장한 은유의 도움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인간과 하나님의 주체 사이의 경쟁 없이, 하나님과 인간의 주체가 서로 서로 평행적으로 존재함으로써, 이러한 은유는 정립되어진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은유를 해석함으로써 신학의 해체 혹은 윤리의 해체로 이끌어가는 주체들 사이의 경쟁을 극복한다. 또한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은유는 원인-영향-관계로서의 이해를 제외시킨다. 동시에 전제되어진 사용방법을 반대하여 은유 자체가 수정되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변화된 형식 속에서 바 르트는 신인동형론에 관한 현대의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은유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시도를 확신할 있는가를 질문해야만 한다.

 

III. 은유적인 진리

우리가 하나님을 "유일하신 분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인간의 제한성에서 진리를 언급하는 것이 제공되어졌고, 허락되어졌다는 것을 바르트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몇가지 점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만 한다: 리꾀르(Paul Ricoeur) 의해 언급되었듯이,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진술의 은유적인 진리가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를 질문해야 만 한다.

 

바르트의 교의학이 정신사적으로 특수한 현대적인 토론들의 관계 속에서 결합되어진 것처럼, 그리고 이렇게 토론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충분하게 명확하여졌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가 완전히 행위존재(Tätigsein) 규정된 인간학에서 특별하게 나타났다. 융엘(E. Juengel) 생각한 것처럼, 여기서 실존주의와의 관계만 명확해진 것이 아니라, 바르트 스스로 이러한 의견의 수렴에 있어서 독일 이데올로기와의 접촉점을 보았다. 불가피하게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바르트의 인간학과 윤리학이 어느 점까지 실제로 신학적으로 기초되어지는가, 또는 이러한 인간학과 윤리가 신학 외적인 원천으로부터 비밀스럽게 공급될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사고에 대하여 융엘은 다음과 같이 반대하였다. 우리는 바르트의 인간이해가 바로 "전제되어진 하나님 개념의 결과라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자기평가에 따르면 이것은 의심 없이 이러한 경우이다.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그의 은유를 세밀하게 검증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전제되어진 하나님의 개념, 하나님의 행위의 주체에 관한 개념은 실제로 바르트의 인간학의 가정 인지 혹은 그의 생산물이 아닌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포이에르바허(Feuerbacher) 종교비판적인 반론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도 종교비판은 바르트 가 자기 입장에서 집약적으로 분석하였다. 서로 서로 하나의 상응관계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주체의 평행선은 이러한 사고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체에 있어서 단지 현대적인 주체의 이중화(Verdopplung)라는 문제로 다루어진다는 사고이다. 하나님 존재 에 대한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격화로부터 이루어진 우리들의 존재라는 관점에서 존재가 상응할 있다는 주장에서 종교 비판적으로 아주 쉽게 반박되는 요구와 관계될 있다.

 

그러나 종교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규정의 반증들은 인격적으로 유효하게 만든다. 현대적인 주체성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에 관한 사고는 상술한 바와 같이 창조에 대한 창조의 하나님의 독자성을 위험스럽게 만든다. 창조의 우연성은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없이 실존한다는 가능성을 포함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제 가능성은 이것으로부터 이루어졌고, 바로 바르트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유가 하나님의 창조에 반대해서 강조되어졌다. 그러나 바르트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인격성이 하나님 본질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면, 이론적으로 하나의 인격은 홀로 실존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우가 아니다.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사고가 창조의 우연성을 위험스럽게 한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인격존재를 내적인 삼위일체의 자기 관계로 표시함으로써, 이러한 위험을 피하려고 하는 바르트의 시도는 실제로 효과 없는 표면적인 해결이다.

 

신학적으로 질문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단지 인간의 행위를 통한 자신의 인간학적 규정뿐이다. 기독교적인 신앙이 인간의 자기구원의 모든 가능성을 제외한다는 점에 있어서, 기독교적 구원론은 인간을 수동성에 대한 고유한 방법을 통해 규정한다. 에벨링(G. Ebeling) 융엘이 이러한 상황에 대한 상이한 평가를 내리는 있어서 서로 일치하게 확정했던 것처 럼, 이러한 입장에 있어서 바르트와 루터 사이의 강한 대립이 고려된다. 루터는 인간을 행위자로 정의하지 않았고, 오히려 인격과 사역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인간학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루터에 따르면, 인격존재는 모든 사역에 선행한다. 다시 말해 사역은 인격을 구성할 없다는 것과 같다. 이에 의해서 신앙에 관한 인간학적인 인식은, 루터에 따르면, 융엘이 "근본적인 수동성(Grundpassivität)"라고 명명했던 것을 발견하는데서 이루어진다. 근본적인 수동성은, 에벨링이 말했던 바와 같이,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수동성"이다. 이와 반대로 바르트는 선행하는 은혜(gratia praeveniens)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태도가 하나님의 모든 가능성에 필연적으로 일치할 있는 것처럼 이해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태도가 경우에 따라서는 보다 하나님의 모든 가능성에 상응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질문할 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진술의 은유적인 진리는 무엇을 통해 존재하는가? 다시 말하자면, 은유는 무엇을 주제화하는가?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할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행위하시는 하나님은 특히 우리들의 고유한 행위를 규정하는 방향성의 유래(Vonwoher) 관한 절대적인 은유로 존재한다. 바르트의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진술은 우리들의 실존이 확실한 결단에서, 그리고 명백하고, 올바르고 보편적인 자유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진술은 우리들의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중적인 의미로 "방향지워졌다" 는 것을 말한다. 진술은 달변이 아닐 뿐만 아니라 목적론적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이러한 이해는 루터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많이 쉴라이어마허에 대해 반대한다. 나에게 나타난 것처럼, 바르트는 그의 일생동안 이러한 신학적인 입장들과 싸웠다. 이미 초기 쉴라이어마허는,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행위 혹은 활동적인 보편성에 관한 진술을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현존재 상태의 유래에 관한 은유적인 진술로 파악하였다. 우리들의 현존재에 관한 이러한 수용적인 근본이해는 후기 쉴라이어마허의 신앙론 속에 서 알려진 대로 절대적인 의존성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절대적인 의존성의 유래로서 하나님은 쉴라이어마허에 의해서 절대적인 근거로서, 다른 말로 하자면, 절대적인 원인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성에 관한 쉴라이어마허의 이론은 신적인 근거에 관한 이론의 총체이다.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은유가 원인과 영향의 의미에서, 그리고 원인에 관한 범주의 도움으로 이해되어지지 않음으로써, 보았던 바와 같이, 바르트는 하 나님의 행위에 관한 은유를 쉴라이어마허와 구별하는데서 해석하였다. 하나님의 행위에 관 한 바르트의 진술은 분명하게, 쉴라이어마허가 은유를 사용하였던 것에 반대해서 은유를 수정하려는 시도이다. 반대로 하나님과 인간의 행위주체 사이의 상응관계에 관한 바르트의 명제는 수동적인 경험으로서,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서의 신앙 혹은 종교에 관한 쉴 라이어마허의 정의를 분명하게 거절하였다.

 

순간적으로 이것은 바르트 교회 교의학의 원칙적인 윤리의 범위 속에 놓여있는 입장에서 명확해졌다. 이곳에서 바르트는 절대 의존의 감정에 대한 쉴라이어마허의 진술을 "인간의 본질을 암살하는 것으로 비판하였다. 그리고 본질은 단지 어떤 하나의 인간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적인 통찰에 의해서도 허용될 없고, 또한 거절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절대 의존의 감정에 관한 쉴라이어마허의 명제에 대하여 바르트는 결정적으로 "인간의 이름으로," "인간성의 이름으로" 반대한다. 인간 본질을 암살하는 것으로서의 쉴라이어마허의 신학적 사고를 부인하는 바르트의 시도는 헤겔의 알려진 논박에 아주 특별 하게 근접하여 있다. 그의 논박에 따르면 개가 매우 훌륭한 기독교인이 있다. 왜냐하면 개는 절대의존의 감정을 매우 강하게 그의 모든 가운데서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개가 뼈다귀를 가지고 자기의 배고픔을 면할 있다면, 그는 구원의 경험을 가졌다고 있다.

 

이와 반대로 헤겔에 있어서 이것은 다음과 같이 결정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단지 자유로운 정신만이 종교를 가질 있고, 종교를 가진다." 바르트가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은유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정한다면,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은유사적(metapherngeschichtlich)으로 적어도, 하나님에 관한 쉴러이어마허의 진술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광범위한 결과와 결합한 수정(Korrektur)으로서 이해되어질 있다.

바로쉴라이어마허로부터하나님의행위에관한진술에대하여바르트가새롭게시작하게것은정당할수가있다. 다른면에서바르트의입장에서쉴라이어마허는정해진방법과방향성에대하여질문하는것이아니라, 우리들의행위그리고행위하는자로서정립된조건에관하여질문한다. 조건은절대의존의감정의유래로주제화되어진다. 쉴라이어마 허에의하면절대의존의감정은우리들의현존재의기본적인이해이다. 그러므로현존재의기본적인이해는자신의감수성에존재하는것이아니라, 바로자신의자기활동성안에존재 하는것이다.

절대의존의감정을통해서다음과같은현상이나타난다: 이것을바르트와함 께말하기위해, 우리가행위함으로써, 우리는실존할있고, 스스로우리들의행위를통 해서만오직행위하는주체로서정립되어질없다는것을나타내고있다. 그리고우리들의실존의적합성은항상우리들의현존재속에존재한다. 그러므로만약우리가행위한다면, 우리는현존한다. 모든행위들은자유로운행위를할수있는영역가운데서생각하게한다.

이제쉴라이어마허의신학적인기본사고는다음과같은것을말하고있다: 우리들에게고유 한현존재의구조는유래를가지고있고, 그리고유래는우리들의행위로부터-세계이 외에다른- 완전히벗어나있다. 쉴라이어마허는우리들의실존의유래를하나님으로명 명하고있다. "하나님"은 "민감하고자기활동적인(!) 현존재에관해우리들의자기의식속에서정립된유래를지칭하는말이다."

점에있어서쉴라이어마허는동의한다. 하나님의행위로존재하는나사렛예수그리 스도의운명과의관계그리고우리들앞에선행하시는은혜의계시로존재하시는예수그리스도의의미와의관계는우리들의행위를구성하는조건을은유적으로주제화하는것으로존재하는하나님의행위에관한진술의이해를필요로한다는것에동의한다. 동의는자 신의방향성에서이루어지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이렇게질문된다: 어느범위까지바르트는우리들의행위를구성하는조건을신학적으로적합하게말할있는가.

이것은사정이그렇지않는것처럼비춰진다. 바르트가바로행위하는주체로서의활동적인인간이 "순수한수용성안에있는객체"라는명제를주장하는점에있어서, 더욱이바르트는하나님의행위에관한진술을전적으로우리들의행위의방향에관한은유로뿐만아 니라행위하는주체의기본이해로지시한다. 그래서쉴라이어마허와같이바르트는순수한수용성에관한특별한신학적인사고를자율적인주체에대한현대적인계획에관계시키려 고시도한다. 우리들의검증이요약되어진바와같이, 이러한은유적인진리가다음과같은것을통해서흐려진다.

행위의방향에대한사고가우리들의행위의조건을궁지로몰아 감으로써, 진리는흐려진다. 이것은인간의수용성혹은근본적인수동성의유래에속해있는인간관계의의미를통해서평행적인상응으로일어난다. 하나님과인간의관계가상응 관계로해석되어짐으로서, 바르트에게있어서유비는다의성(Äquivokation)원천이되어 지는것에위협을받게된다. 여기에서다의성은행위하시는하나님의은유에대한진실 된가치를모험하고, 가능하게신학의윤리화의발전을촉진시킨다. 그러므로다음과같 은질문이제기된다: 하나님의행위, 그리고특별히예수의운명속에있는하나님의행위에관한절대적인은유는다시한번쉴라이어마허에의해서증명된방향에서새롭게해석되 어질있는가?

 

IV. 수한수용성의유래

하나님에관한진술은바르트가인간의 "순수한수용성"으로나타내었던것을, 그리고융엘이나에벨링의기본적인수동성혹은쉴라이어마허의절대의존을가지고명명했던것을주제화하였다. 하나님의행위에관해말해지는곳에서, 우리들의행동에대하여, 그리고행위 자로서요구되는조건에관하여질문되어진다.

하나님의행위로서기독교적인신앙은나사렛예수를지시한다. 은유는가지방향으로분석되어진다. 한편에서는, 은유는예수그리스도안에계시는하나님을의미하고, 다른편에서는하나님께서예수그리스도에게관계하신다는것을의미한다. 나사렛예수안 에계시는하나님의행위에관한절대적인은유는예수의운명을우리들의실존에관한질 술로지시한다. 또한우리가우리들의실존을불합리한방법으로우리들의고유한행위를통해형성하는것을시도함으로써, 우리들의행위를벗어난존재를우리들의실존이항상부인하는시도를통해진술은알려지게된다. 예수의운명은이제단지우리들의근본적 인수동성의표현일뿐만아니라, 고난의표현이며, 고유한행위의완전한실패의표현이다.

 

점에있어서예수의운명은, 고유한행위를통해형성시키려는모든시도는불합리하게그리고실패로판단되어진다는것을말하고있다. 하나님께서예수그리스도에게관계하시고계신다는은유는부활에대한절대적인은유와관계한다. 은유는, 우리들의실존이우 리들의능동적인거부에도불구하고자신의현존재의조건으로부터벗어나지않는다는것을말한다. 그러므로계시가운데서기독교적인것으로이해되어지는것은, 우리들의의해서항상부정되고자신의폐지될없는것에서능동적으로부인되는것으로서, 그리고우리들의유래를부정함에도불구하고여전히남는것으로서우리들의유래가현상화되는(In-Erscheinung-Treten unseres Vonwoher)이다. 하나님의행위혹은하나님의계시로서예 수의운명은우리들의실존이명백하여지는것이다. 이것은우리들의실존을명백하게우리 들의불합리한모순에반대하고있는실존으로만든다. 이와같은방법으로우리는구원혹 은은혜를, 그리고실현된실존은우리를위해전적으로우리들의유래에대한긍정에서동 시에우리들의실존에있어서그런방식으로명백하게되어진적합성에서이루어진다는것을알고또한인식한다.

행위하는하나님에관한은유의이해에의하면 "하나님"은우리들의고유한현존재구조의유래를지칭하는단어이다. 이러한해석은쉴라이어마허의신론에연결된다. 해석에따르면, "하나님"은우리들의자기의식속에 "정립된민감하고자기활동적인현존재의유래"를지칭하는단어이다.

단지신학의해체가인간학속에서명백하게조성되었다. 실제로우리는쉴라이어마허에게있어서이미틸리히가하나님과하나님위의하나님사이를구별하는것과만난다. 우리는틸리히의이러한구별을바르트가말한하나님의행위에관한은유의해석에관련시켰다. 쉴라이어마허에의하면하나님은우선하나의단어(Vokabel)이며우리들의언어에있어 서의하나의언어이다. 행동하는분으로사고되어진하나님은우리들의절대의존의감정의유래에관한은유이다. 그러나여기서이제고려해야것이있다. 만약내가올바르게보았다면, 그렇게보여질있는것처럼, 쉴라이어마허는행위하시는하나님에관한은유를개념적으로분해하려고시도했다는점을고려해야한다. 더욱이개념은하나의유래 에관하여개념적인측면에서은유적이진술을통해새롭게해석되거나설명된다. 유래에관한사고의측면은의존성의개념속에포함되어지고, 또한사고는다시 "절대적" 이란말이덧붙여져서은유로된다. 이점에있어서쉴라이어마허의하나님의행위에관한진술은하나님위의하나님에관한은유이다. 하나님은개념적인것이아니라, 단지은유 적으로만말할있다. 우선적으로하나님에관해명백하게말해지는곳에서아니라, 오히려하나님이진술되어지는곳에서, 이미절대의존의감정에대한쉴라이어마허의사고는하나의신학적인진술이된다.

또한우리들에의해서암시되어진해석의시도에서유래는우리들로부터절대적으로이탈되어진무엇에대한절대적인은유이다. 우리들로부터이탈된무엇은자신의이탈성 에서이상인간학적으로진술되어지지않는다. 공언할있는바와같이, 이것은절대적 인은유의형상속에존재하며, 기독교적으로하나님의행위에관한진술속에존재한다. 행 동하는주체로서우리들스스로의유래에관한진술이진술의해석으로서진술과관 계하고있다. 여기에서하나님은, 쉴라이어마허가형식화한바와같이, 행위속에, 종교속 에, 적어도기독교적인것으로, 행동하는외에다른어떤것으로선행될없다. 만약신앙의진리가어떤다른것으로말하고자한다면, 하나님이이러한것에서선행한다는것 은그리고행동하는분으로존재한다는것은, 바르트가자신의방법으로명백하게나타내것처럼, 절대적으로필연적인것이다.

요약

논문은행위하시는하나님에대한언설이은유(metaphor)새로운이론들가운데서절대적은유라는것에서부터진행된다. 그리고또한논문은이러한은유의역사속으로하나님의행동에대한바르트의이해를통합한다. 논문은바르트가행위하시는하나님에대하여조심스럽게현대(modern) 주체성의개념속에서사유했다는것을논증한다. 행위하시는하나님의절대적은유에관한그의해석에따라바르트는현대자율의문제에답변한다. 이와동시에바르트는비평적으로슐라이어마허와논쟁하고있다. 왜냐하면바르트는하나님행동의절대적은유를인간행동에있어서하나의특정한기초(certain orientation)명명하기때문이다. 그렇지만슐라이어마허는하나님행동의절대적은유를우리의행동의조건(condition)으로, 행위하는주체인우리들의기질의조건으로명명한다. 바르트는인간의근본적수동성속에존재하는이러한조건들을어느선까지적절하게끌어올렸는지가문제 로남는다. 필자의견해에의하면불충분한케이스이다. 왜냐하면논문은슐라이어마허의해석에따라하나의새로운방법속에서하나님의행위의절대적은유를해석하려는시도로마치기때문이다.

출처

Ulrich H. J. Körtner, Der handelnde Gott. Zum Verstaendnis der absoluten Metapher vom Handeln Gottes bei Karl Barth, NZSyThRPh Bd. 31 Heft 1, 1989, 18-40.번역: 이장섭(케리그마신학연구원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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