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장 14절
제목: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는 다시 성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성탄절은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신비한 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되어 오시되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을 크리스마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 혹은 크리스마스는 풀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을 어떻게 사람의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이 신비를 어떻게 사람이 그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사람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이 신비는 지성으로 이성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가 결코 아닙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머리로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하면 불합리하고 부당하다고 배척할 수밖에 없는 진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이 진리는 머리로 받아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이 성육신의 신비는 세상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배척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신비는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계시하시고 조명하셨습니다. 조명은 하나님이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조명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깨달아 믿게 하므로 이 신비를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성경의 저자는 이 신비에 깊이 침잠하였습니다. 이 신비가 사실로 자기 앞에서 이루어진 것을 인해서 깊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너무도 큰 신비가 사실로 이루어졌음을 인해서 감탄과 경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 신비를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사도요한도 사람인데 이 진리를 그냥 자기의 지성으로 파악하고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사도요한의 눈을 여시고 이 신비를 보게 하시고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이 크고 놀라운 신비는 사람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진리가 전혀 아닙니다. 이 진리를 사람이 자기의 지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알게 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은 평생이 신비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비 앞에 감탄과 경탄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복음서 외에도 편지들을 썼습니다. 그 첫 번째 편지가 바로 요한일서입니다.
사도는 편지를 쓰면 인사를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도가 편지를 쓰면서 은혜와 평화를 비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편지를 쓸 때는 그 편지로 서로가 사귀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귐도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로 그의 편지를 시작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나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요한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신비에 사로잡혀 있어서 은혜와 평화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여러분에게 있을찌어다 라고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자기들 가운데 오셔서 사셨는데 그 진리를 증명하는 사례들을 말하였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주목하여 보고 손으로 만져서 하나님이 확실하고 분명하게 사람으로 되어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를 말하면 사귐을 갖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의 사귐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그냥 사람끼리의 사귐이 아니라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라고 하였습니다.
은혜와 평강을 빌므로 사귐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의 성육신의 신비를 말하므로 사귐이 시작됩니다.
사도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그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으니라.
성육신하여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은 바로 창조주 곧 창조 중보자이라고 사도요한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적인 존재가 성육신하여 우리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하나의 명절로만 즐기고 기뻐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어 오신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경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을 생각하면 경탄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세상 어느 종교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므로 생겨난 종교입니까? 기독교만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므로 생겨난 종교입니다.
이 크리스마스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그 하나님은 그냥 사람이 되시어 낮아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선언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함이 아니고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려고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오시되 죽어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으면 이 크리스마스를 세상 사람들처럼 기뻐 날뛰는 날로 보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탄생의 날에 그의 고난을 생각하고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여 고난 받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경탄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서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주를 깊이 고개 숙여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이 크리스마스에 우리 모두 일어나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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