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I. 들어가는 말
바르트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기초로 성립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분명히 한 획을 그었다. 그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19세기적 낙관주의가 거부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부정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바르트를 오해하게 만드는 것처럼, 바르트가 인간과 세계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하여 반 인간적, 반 세계적이며 하나님의 초월만을 말했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바르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전적으로 대립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인간에 대한 긍정을 단순히 부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너머서서 이 세계와 인간의 부정과 배반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을 더 한층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긍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생겨진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긍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긍정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적인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긍정보다, 더 한층 차원높은 역설적 긍정을 뜻한다. 그의 신학에서는 어느 순간, 어느 구석에서도 인간의 정황과 세계의 상황을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신학과 인간, 세계의 제반문제를 긴밀히 연관시키는 것이 그의 신학에서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바르트는 상대화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절대화하려는 오류에 대해 부단히 경고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와같은 바르트 신학의 특징을 나타내 주는 구체적인 것으로 "로마드카에게 보낸 바르트의 편지"에 얽힌 내용과 문제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우선성과 주권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바르트 신학이 어느 상황에서도 현실과 유리되지 않고 신학과 세계의 유대성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좋은 한 예가 되리라 본다.
로마드카는 우리나라 신학계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바르트와 동시대에 살았던 현대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검토해 볼 만한 인물이다. 그는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19세기적 신학적 배경에서 성장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너머선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하나님을 문화 시민적 이상에로 가두어 버리는 근대 문화 개신교 주의를 탈피하고, 이 두 신학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는 공통의 신학적 기반을 재정립했다. 신학적 작업의 성서적 기초를 중시한 이 두 신학자는 신학과 사회, 세계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신학을 전개하여 나갔는데, 이 글에서는 역사신학문제와 관련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로마드카에게 보낸 바르트의 편지
체코 프라하(Prag)는 한 때 중부유럽 경제의 중심지였으나 근세에 이르기까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침략과 지배를 번갈아 경험해야만 했다. 1918년 제 1차 체코 공화국이 세워질 때까지 체코는 합스부르그 왕가의 지배하에 있었다. 윌슨(W.Wilson)의 민족 자결주의는 신생한 체코 공화국에 희망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고 체코국민은 옛 영화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듯이 생각했다. 그러나 히틀러(A.Hitler)를 중심으로 한 독일 제 3제국의 등장은 이후 체코 민족에게 말 할 수 없는 비극을 가져다 주었다. 체코는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데 특히 독일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체코령 수데텐지역(Sudetenland)은 독일과 체코간의 많은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히틀러는 항상 체코 공화국 전체를 독일화 하고 체코의 민주주의를 짓밟고자 하였다. 1938년 9월 마침내 서구 정치 지도자들은 각기 자기나라만을 지키려는 민족적 이기심에서 독일군의 체코공화국 침공을 인정해 주는 뮌헨협상(Das Münchner Abkommen)에 동의하게 된다. 체코인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채 자신들의 운명을 강대국의 손에 내맡기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다. 로마드카는 이 뮌헨협상을 "자유민주주의의 종말"이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신학계를 너머서서 정치적 영역에서까지 주목을 끌게 되는 편지를 바르트(K.Barth)는 로마드카(J.L.Hromadka)에게 썼다. 바르트는 누구보다도 이러한 사건 배후의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알았다. 그래서 1938년 9월 19일 스위스로부터 바르트는 한 통의 편지를 로마드카에게 보냈다. 그 내용은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나찌주의에 "저항"(Résistez!)하여야만 한다고 독려하는 것이었다. 바르트는 그 무렵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으며 그 해 9월 30일 달력에 뮌헨협상을 현대사의 수치스러운 사건이라 보고 "뮌헨에서의 유럽자유의 위기"라 표현했다.
바르트의 "저항"이라는 이 개념은 허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신학적 정황에서 볼 때 "결단"(Entscheidung)이라는 개념과 밀접히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결단으로서의 종교개혁"(Reformation als Entscheidung)이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종교개혁에 대한 근대개신교적 불성실(die neuprotestantische Untreue)에 책임을 지지않으려는 자는, 종교개혁이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을 통해 힘을 얻어 저항해야만 한다." 바로 이와같이 저항하도록 권고하는 바르트의 외침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근거한 것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공간(Raum)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그 때 까지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Zeit)이다. 때문에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에서 히틀러에 저항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다. 바르트의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사고는 이러한 기본토대 위에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은 단지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분이 아니라, "실제로 변화케하는 사실"(real verändernde Tatsache)이라는 것이다.
로마드카에게 보내는 바르트의 편지는 다양한 반응들을 불러일으켰다. 이 편지를 통하여 독일 고백교회회원들은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다음의 문장들은 많은 신학적 논쟁과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싸우고 고난받는 모든 체코군인들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나는 오늘 아무 조건없이 말하는데), 히틀러와 무쏠리니의 분위기속에서 단지 웃음거리가 되거나 뿌리뽑혀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그러는 것이다."
바르트는 복음과 독일 역사철학을 혼합시켜버리는 독일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처음부터 철두철미 비판적이었다. 이것은 1933년과 1934년의 바르트와 브룬너의 자연신학논쟁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그러나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던 것과는 다를 지라도 위에 조금 인용한 그의 편지에서 바르트는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유사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게되었다. 즉 그것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에로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이 위험스런 시도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식의 복음과 역사의 혼합주의와 독일역사철학을 무척 비판했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이 비난을 받게끔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바르트의 이 편지를 "바르멘 선언 제 1항의 명백한 추락"(offenkundiger Abfall von der Barmen I)이라고 까지 비난했다. 이것이 당시 교회 지도층의 입장이었다. 바르트는 이 편지문귀로 인하여 더 이상 신학자로서 존경 받을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른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편지의 내용으로 그는 신학의 스승이 아니라, 단순한 정치가라고 사람들은 낙인 찍었다. 당시의 분위기는 바르트의 발언의 정당성을 논의하는 것이라기 보다 바르트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정치사안에 어느 쪽을 위한 입장을 취했는가 하는 것에 촛점을 마추었다.
바르트의 판단에 따르면 1938년의 상황은 침묵으로써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바르트는 1938년 12월 위핑겐(Wipkingen)에서 행한 "교회와 오늘의 정치적 문제"(Die Kirche und die politische Frage von heute)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이 시기에 더 이상 눈과 귀를 막은 채 침묵하고만 있을 수는 없음을 밝혔다. 그는 나찌주의가 특히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규정할 뿐만 아니라, 그 자유를 말살하는 독재주의임을 말하였다. 교회와 인간에게 향하는 교회의 사신(Botschaft)은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묵과 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1938년의 정치적 상황을 이렇게 판단했다. 그는 또한 이 시점에서 어떤 정치적 조처와 결단이 있어야 된다고 확신했다. 바르트는 여기에서 복음과 역사철학과의 혼합물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상황과 연관지어 해석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의 한 예는 바로 신학계를 너머서 유럽사회의 관심을 순식간에 끌게한 이 편지였다. 그것은 한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한 신학자로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부터 취한 증언이며 행동이었다.
바르트와 로마드카사이에 오고 간 편지는 그렇게 많지 않다. 특히 주목을 받게 된 1938년의 문제의 편지외에도 그 이전과 이후에 두 사람은 여러 통의 서신을 주고 받았다. 각각의 편지들에는 심오한 신학적 고민의 흔적들이 보이고, 또한 두 사람이 처한 사회 정치적 상황에 대한 분석적 내용이 들어있다.
III. 바르트와 로마드카의 만남
로마드카는 놀라을 정도로 바르트의 신학과 유사성을 지닌 채 그의 신학을 전개해 갔다.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로마드카 역시 19세기 문화 개신교주의의 스승들로부터 그의 신학수업을 받았다. 바르트가 빌헬름 헤르만(W.Herrmann)의 영향으로 기독교 윤리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면, 로마드카는 에른스트 트뢸치(E.Troeltsch)의 영향을 무엇보다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종교철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20세기 초에 전쟁으로 빚어진 세계의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이 배후에 놓여진 기독교의 책임을 인식하면서 신학적 사고의 대전환을 가져온다.
즉 신학의 근거로서 철학이나 역사 혹은 다른 학문의 내용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자체에 귀 기울이게 된다. 바르트와 로마드카는 이 때로부터 다른 학문과의 연합이 신학의 주요과제가 아니며, 철학으로부터의 신학의 유추가 신학의 핵심이 절대 아니라, 성서의 말씀의 토대 위에 신학을 형성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신학의 중심과제로 내세우면서, 19세기 자유주의적 근대 개신교주의의 사고 방식에 따라 하나님을 문화나 역사, 시민적 정신과 이상과 동일시하는 모든 시도에 비판적으로 대응하였고 이러한 굴레로부터 하나님을 자유케 하였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Gotteserkenntnis)하게 하라는 종교개혁의 원칙을 철저히 이어받은 것이다. 19세기 근대개신교주의 사상을 소화하여 정리하고 난 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진 바르트는 중세 스콜라주의의 안셀름적 사고를 재해석하여 수용하며 자신의 신학적 토대로 삼는다.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책인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1931)은 바르트 자신이 말하듯 그의 저서 중 그가 가장 애정을 갖는 책이며, 이것은 바르트로 하여금 "기독교 교의학"이라는 자신의 교의학 책의 제목부터 "교회 교의학"으로 바꾸게 할 만큼 신학이 교회를 위한 학문이어야 함을 다시금 확인케한 계기가 되었다. 바르트의 이러한 사고가 심화되고 본격화된 것이 안셀름연구서라면, 이에 상응하는 로마드카의 저서는 "기독교와 학문적 사고"(Das Christentum und das wissenschaftliche Denken)(1922)이다. 이 책은 로마드카에게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획을 그으며 그것을 극복하려는 교의학적 연구와 저술의 사상적 토대이다. 로마드카가 이 책을 썼던 1922년에 바르트의 신학은 그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로마드카가 프라하의 후스 신학부에서 현대신학의 기독론에 관한 강의를 하던 1923년, 그는 특히 스위스의 젊은 신학파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 때 처음으로 바르트의 로마서주석과 접함으로써 그의 신학과 간접적으로 만난다.
이처럼 각기의 삶의 영역에서 비슷한 신학적 사고를 가지고 활동하던 두 사람이 직접 만난 것은 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던 1935년의 일이었다. 이미 그 이전에 레온하르드 라가쯔(Leonhard Ragaz)(라가쯔는 1932년과 1934년에 체코를 방문하였고, 바르트는 처음으로 1935년에야 체코를 방문한다.) 프리쯔 립(Fritz Lieb), 에두아르드 투르나이젠(Eduard Thurneysen), 루돌프 리히텐한(Rudolf Liechtenhan) 등의 스위스 신학자들이 체코를 다녀갔고, 이 신학자들은 강연을 통해 체코신학계에 알려져 있었던 터였다. 이들에 비하면 바르트의 체코여행은 오히려 늦은 것이었다. 체코 사람들에게는 외국의 신학자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대로 이들과의 교류를 원했다. 바르트도 그러한 상황하에 체코에서 신학적 강연을 위하여 초청된 것이고 바르트와 같이 명망있는 신학자의 견해는 이들 체코인들에게 무척 중요한 것이었다. 바르트는 그 후에도 여러차례 체코로 초청되었으나 그의 바쁜 학문연구일정때문에 응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바르트는 그가 죽을 때까지 관심있는 눈길로 계속하여 체코의 신학적, 정치적 발전과 변화를 지켜보았다.
바르트는 칼빈(J.Calvin)의 후예이고 로마드카는 후스(J.Hus)의 후예이다. 칼빈의 터전 스위스와 후스의 모국인 체코는 교회사적으로 서로 긴밀한 연관을 지녔다. 후스 사후 그의 처형의 부당성이 문제가 되어 이를 다시 논의하며 교회의 갱신을 위한 목적으로 제 1차 공의회(Konzil)가 바젤(Basel)에서 열렸고 그 간접적인 영향의 하나로 스위스에서 최초로 교육을 위한 대학이 1460년 바젤에 세워지게 되었다. 칼빈은 후스가 처형당한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시인한 바젤공의회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칼빈이 간접적으로 후스의 개혁적인 의지와 개혁의 내용에 공감했음을 뜻한다. 후스 사후 개신교 신앙을 원했던 후스의 후예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고향을 등져야만 했다. 코메니우스(J.A.Comenius)는 이러한 신앙의 순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후스의 개혁의지를 체계화 시키고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모라비안 공동체들은 진젠도르프(N.L.Zinzendorf) 백작의 도움으로 삶과 신앙의 안식처를 찾았으며 독일 경건주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렇게 생겨진 보헤미안 형제 공동체(Unitas Fratrum)의 신앙적 삶의 모습에 바르트는 굉장한 관심과 경외심을 가졌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려는 후스의 후손들에게 신학적인 영향을 입혔다. 이미 16세기에 바젤에만도 체코의 뵈멘(Böhmen)과 메렌(Mähren)지역에서 160명의 학생들이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두 국가간에는 종교개혁적 유산과 이것을 공유하려는 연대성이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였다. 바르트가 칼빈의 유산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면, 그에 못지 않게 로마드카는 이러한 스위스 개혁교회의 유산과 더불어 체코 개혁교회적 유산을 철저히 이어나갔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기독론중심주의적 신학의 지평은 삼위일체신학에로 이어지는데 이는 특히 삼위일체에 대한 고대교회의 교리와의 연관성속에 성립된 1575년 뵈멘 고백서와 1662년 체코 형제단의 신앙고백신조에 바탕을 둔다.
이미 체코인들과 깊은 유대감을 갖고 활동했던 프릿쯔 립과 에드아르드 투르나에젠은 체코 사람들로 하여금 바르트 신학에 관심을 갖게하고 또 올바로 이해하도록 도왔다. 특히 프리쯔 립의 주선으로 바르트는 체코 개신교 목사협의회의 초청을 받게되고 1935년 8월 메렌지역의 미실리보시체(Mysliborice)에서 "교회 형성의 신학적 전제들"(Die theologischen Voraussetzungen kirchlicher Gestaltung)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게된다. 로마드카는 이때 처음 바르트와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고, 바르트를 "스위스 종교개혁의 후손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뜻깊은 봉사들 가운데 최고봉"이라고 극찬하였다. 강연 뿐만 아니라, 강연에 이은 질의응답을 통해 바르트는 로마드카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고 그들은 서로 많은 공감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로마드카는 신학자이며, 신앙고백자이자 학자로서의 바르트를 이렇게 알게 되었다. 둘 사이에 생겨진 우정과 비판적 연대성은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IV. "제 2의 로마드카 편지"
위에서 언급했던 1938년의 편지에서 바르트는 체코 공화국의 저항의 정당성을 말했으며 이를 더욱 고무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발언은 체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힘을 북돋우게 하는 반가운 일이었겠으나,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문제적으로 비추인 것이 당연하였다. 독일 사람들과 그들의 언론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담은 기사들이 제목만 조금씩 바꾸어 진 채로 여기 저기에 보도되었다. 예를 들어 "전쟁을 부추키는 신학교수","유대인-체코인-칼 바르트","칼 바르트의 진짜 얼굴"등이 그러한 기사들의 제목이었다.
히틀러 치하의 절망과 곤경의 시기에 바르트가 보여준 두려움 없는 연대감을 위한 용기는 이들 체코인들에게 말 할 수 없는 격려가 되었다.
그러나 1947년과 1948년 체코가 공산화 되었을 때 바르트는 또 다시 로마드카편지를 쓰지 않았다. 이는 서방세계매스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바르트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히틀러주의와 마찬가지로 공공연하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비방하는 일을 하지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에 바르트가 당시 정치정세나 세계상황에 대해 무감각해 졌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의 깊은 관심으로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어려운 상황이라 할 지라도 체코의 신학생들이 그들의 모국에 돌아가 활동해 주기를 바랬고 이들의 상황을 애정어린 연대감으로 계속 지켜보았다.
1950년 강대국의 이권 다툼에 꼭둑각시가 된 한국인이 동족상잔의 비극인 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전 세계는 3차 세계대전 발발의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한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서부독일의 군대를 포함한 "유럽군대"(Europa Armee)와 독일 재무장 문제 전반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독일 수상인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는 의회에 묻기도 전에 독일 재무장과 전쟁참여 준비를 해나갔다.
냉전체제가 더 악화되어가는 이러한 정세 속에서 독일 재무장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다양했다. 독일의 유력한 주간지 스피겔(Der Spiegel)에서는 히틀러와 아데나워에 대한 바르트의 당시 반응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바르트는 서독이 2차 세계대전이후 너무 빨리 대서양연안국가쪽으로 연합하려한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서독의 재무장에 특히 반대하였고 포괄적으로는 핵무기구축에 반대하였다. 고백교회의 대표들은 1950년 10월 12일 독일 스튜트가르트(Stuttgart)에서 발행된 "그리스도와 세계"(Christ und Welt)라는 주간신문을 통하여 수상인 아데나워를 맹렬히 공격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당시 내무부장관이었으며 고백교회의 일원으로 독일개신교연합총회의 총대였던 하이네만(G.Heinemann)은 이에 책임을 느끼고 사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회퍼의 제자이자 베를린에서 간행되는 잡지 "도중에서"(Unterwegs)의 편집자였던 찜머만(W.D.Zimmermann)목사는 "고백교회의 정신적 아버지"인 바르트에게 그의 예언자적 입장을 표명하는 글을 부탁한다. "그리스도와 세계"지의 편집장도 바르트의 입장표명을 요구하며 1938년의 "로마드카에게 보낸 바르트의 편지"를 이 신문에 게제하며, 이번에는 동일한 바르트가 스탈린의 위협적 위기상황에 처한 독일 국민들에게 왜 "제 2의 로마드카 편지"를 쓰지 않는가 비판하였다. 편집장에 따르면 12년 전 1938년에는 체코국민이 히틀러의 위협하에 놓여있었지만, 1950년 이 상황에서는 독일국민이 스탈린의 위협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제 2의 로마드카 편지"를 통해 바르트는 독일 재무장을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체코 군인들"이 들어갔던 대목에 "독일 군인들"을 적어 넣으면 되고, "독일 나찌주의 위협"대신 "공산주의의 위협" 앞에 라는 말을 적어 넣으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르트의 의견은 아주 달랐다. 바르트가 한국전쟁의 원인과 경과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생각했는지를 파악해 낼 수 있는 자료는 무척 빈약하다. 한가지 분명한 점은 바르트가 한국전쟁발발의 책임이 단지 소련에게 있다고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련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최후 통첩(ein Ultimatum)을 보내지 않았으며 - 나는 한국을 그 한 예라고 생각지 않는데 - 또 이에 상응하는 침략을 하지도 않았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바르트의 발언 구석구석에서 냉전시대에 소련을 더욱 자극하는 말을 피하려는 흔적들이 보인다.
그의 일관된 입장은 히틀러주의는 기독교의 복음을 해치는 것이었지만, 제도화되지 않은 원래 사회주의의 이념은 기독교의 복음이 추구하려는 방향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공산주의는 단순히 히틀러주의와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교회가 반공주의의 선봉에 나서 투쟁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 말은 바르트가 용공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그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문제는 총칼로써가 아니라, 더 나은 경제정의 실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적 개혁으로써 극복되야 됨을 말한다. 그는 무비판적인 자본주의 신봉가로서 반공주의의 불꽃에 기름을 갖다 부어대는 짓을 거부했다. 그것은 바르트가 "원칙적 반공주의를 공산주의 자체보다 더한 악"(ein noch größeres Übel) 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입장은 1956년 헝가리사태에 대한 겉으로 드러난 바르트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일어난 사태에 대하여 겉으로 보기에 침묵으로 일관한 바르트의 태도에 많은 사람들은 신랄히 그를 비난하였다. 부르너(E.Brunner)와 니이버(R.Niebuhr)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1930년대에 히틀러주의 문제를 옳게 보지 못했고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던 부르너는 바르트의 1948년 헝가리 여행 이후 사회주의문제를 놓고 또 한번 논쟁을 벌렸었다. 그는 철저히 반공주의를 지향했기 때문에 바르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 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자로서 초기에 맑스주의 신봉자였다가 후기에 180도 그 태도를 바꾼 니이버도 역시 헝가리 사태에 대해 침묵하는 바르트를 정면적으로 비난했다.
냉전시대에서는 미국적 가치관은 기독교적이고 선한 것이며, 소련의 가치관은 반 기독교적이고 악한 것이라는 이원론적 구조가 지배적이었다. 미국적 가치관, 미국적 꿈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생각하고 상대방은 악이라고 비방하는 흑백논리 속에서 미국인들은 세계를 주도하고 이끌어 나갔다. 바르트는 소위 기독교적 이라는 명분아래 미국이 이처럼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을 염려하였다. 바르트가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교의적으로 재해석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선택하는 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영원히 버림받을 것을 몸소 감당하셨기 때문에 칼빈적 이중예정은 바르트에게서 달리 해석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척도로 선택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를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를 수정케하는 좋은 지침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바르트는 냉전시대의 산물로써 생겨진 선택받고 축복받은 미국적 자본주의와 저주받고 버림받은 소련식 공산주의라는 이원론적 사고를 지양하도록 촉구했다.
1930년대에 바르트가 "예언자적 외침"을 통하여 그의 입장을 드러냈다면 1950년대에 그는 "예언자적 침묵"을 통하여 그의 태도를 밝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역설적 태도가 보편적으로 이해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신학적 신념을 바탕으로 취한 그의 행동과 태도는 초기의 바르트로부터 후기의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1920년대의 "자펜빌의 빨갱이 목사"(der rote Pfarrer von Safenwil)는 1950년대에도 여전히 "빨갱이 목사"(ein roter Pfarrer)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V. 바르트와 로마드카의 공통점(Konvergenz)과 차이점(Divergenz)
바르트와 로마드카 사이에 보여지는 공통성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출발했으나 이것을 거부하고 너머선 점에서 그들의 신학적 연대성은 시작되었다.
?터 포이리히(W.Feurich)목사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바르트는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내가 95% 충분히 애정을 갖고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은 로마드카인데, 또한 나머지 5%도 마저...그를 이해하고 박수를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
실제로 바르트와 로마드카 사이에 항상 100%의 일치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각각의 특성을 살린채 다양성과 상반되는 모순성을 지녔으면서도 그 안에서 공통점을 찾는 우정을 지속시켜갔다. 로마드카에 대한 바르트의 변증법적 관계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내가 로마드카의 글을 읽을 때면, 나는 좌우로 지평선까지 뻗쳐있고, 태양에 의해 놀랍도록 비추어진 구름바다를 미끌어져가는 비행기에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산인가? 이것이 산맥의 줄기인가? 골짜기 많은 계곡인가? 한 평지인가? 아마도 육지가 아니라, 진짜 바다인가? 비행의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나의 방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도 같이 비행하련다." 이 싯적인 표현에 바르트가 로마드카를 생각하는 심정이 잘 묘사되어있다고 본다. 바르트는 때로는 로마드카의 의견에 의구심도 갖었지만 분명하게 로마드카와 자신의 기본입장이 같다는 것을 알았다.
로마드카는 참으로 동구유럽의 입장과 사회주의 체제 속의 교회의 입장을 대표하던 신학자였다. 1956년 헝가리사태가 일어나게 되자 서구유럽은 이구동성으로 소련을 비난하게 되는데, 로마드카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사회주의 체제가 개혁적으로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같은 해 일어났으되 오히려 서구세계매스컴의 주목을 그다지 받지 못한 영국과 프랑스의 수에즈운하 침입을 비판한다. 바르트는 1956년의 헝가리사태에 대한 로마드카의 입장표명에 대해서 상당히 우려하였으나, 서방의 다른 신학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비방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로마드카는 내게 동시대의 다른 동료들보다 새끼 손가락만큼이래도 더 낫다.
나는 그를 그들에게 어떤 말로써도 내맡기고 싶지않다." 바르트는 로마드카가 신학적으로 고정관념을 지니고 때로는 정치적으로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감이 있다는 것을 간혹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로마드카의 입장을 중재해 주었던 인물이 그의 제자이자 동료인 신약신학자 소우첵(J.B.Soucek)이다. 소우첵은 로마드카와 바르트사이에서 둘 사이의 끊임없는 연결고리역할을 해냈던 체코의 명망있는 신약신학자였다. 이들 체코신학자들은 물론 바르트역시 복음과 교회의 내용을 자유민주주의와 서구권의 운명과 동일시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맞섰다. 그것은 단순히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계의 내용을 복음과 동일시 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 반대로 사회주의적 체계를 단순히 비 복음적, 반그리스도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38년이 뮌헨협정으로 인해 체코인에게 치욕스럽고 배반감을 느끼게하는 어려운 시기였다면 그로부터 30년 뒤 1968년에 8월에 소련의 프라하 침공으로 인하여 체코인들은 또 한번 다른형태의 배반감을 맛보게 되는 어려운 시기를 맞게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상에 누워있던 바젤의 신학자 바르트는 그를 방문하여 안부를 묻는 로흐만을 비롯한 체코신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잘 지내는데, 내 체코친구들이 잘 못 지낸다네."
1968년 8월 로마드카는 체코에 주재하는 소련 대사를 통하여 소련의 침공에 대하여 격렬하게항의하였다. "인간의 얼굴"(Sozialismus mit dem menschlichen Gesicht)을 한 사회주의에 너무나도 큰 기대감을 가지고 기독교인과 맑스주의자와의 대화를 이끌어가며 애써왔던 로마드카였기에 그 실망감은 더욱 컸던 것이다. "내 생애에 이 사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었다...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도덕성은 오랜시간동안 실추되었다." 그러나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국면을 맞았다. 그 해 1968년 12월 바르트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로마드카는 동구유럽의 신학자를 대표하여 바르트를 기념하며 조문을 읽었다. 그 이듬해인 1969년 자신의 꿈을 실망감에 묻어둔 채 로마드카도 세상을 뜨게된다.
나는 바르트와 로마드카의 수제자이며 조직신학자로서 바젤에서 활동한 로흐만(J.M.Lochman)의 견해에 따라 바르트와 로마드카의 기본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1. 두 신학자는 문자의 뜻 그대로 개혁주의 신학자(evangelischer Theologe)였다. 이들은 단호하게 복음으로부터 상황을 생각한다. 바르트의 신학적 확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바르멘 선언 제 1 항은 "예수 그리스도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드카의 교의학적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인 "인간에로의 도상위에 있는 복음"(Das Evangelium auf dem Wege zum Menschen)에서 보여지고 있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복음에서 부터 인간에게로라는 신학적 원칙은 이 두 신학자의 기본입장인 것이다. 도식적으로 이에 대치되는 방향에서의 신학적 시도란 19세기 근대 문화 개신교 주의에서 이끌어 냈던 방법이고 이에 맞서 바르트와 로마드카는 정열적으로 "복음으로부터"라는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관철시켜 나가고자 탖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시도했던 바 모든 "운드"(Und-Theologie)신학은 그들에게 문제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2.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바르트와 로마드카의 교회적 실천을 위한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란 단순히 전승된 질서나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조건들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 문명"(christliche Zivilisation)의 특권과 결부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어져 있는 어떤 세계 질서와 더불어 서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는 모든 체제들을 너머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우선성에 대한 믿음이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다. 전체주의적 체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삶의 공간으로써 교회는 존재했고 그 역할의 중요성을 로마드카와 또한 "철의 장막" (eiserner Vorhang)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난 바르트는 인식하였다.
3. 복음의 우선성이라는 이들의 전제는 신학 내적으로도 일관성을 지닌다. 율법과 복음이냐, 복음과 율법이냐하는 논쟁은 루터교와 개혁교의 오래된 견해차이를 드러낸다. 칼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바르트는 두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자신 루터교에 속한 로마드카 역시 이 점에서 공통되게도 복음에서 율법에로의 방법을 택하여 복음의 우선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교회와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하나님의 자유케하는 긍정(Ja)의 빛 안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이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비교회적이고 심지어 무신론적인 이웃과도 관계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로마드카의 소책자 가운데 하나인 "무신론자를 위한 복음"(Evangelium für Atheisten)은 이러한 그의 관점을 잘 드러낸다. 때문에 맑스주의적 이데올로기도 소홀히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드카는 체제와 주어진 상황에 병합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긴장과 갈등의 터전에서 복음의 자유를 선포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로마드카의 의도에 철저히 동감하므로 바르트는 함께 "비행할 수"있는 것이었다.
4. 바르트는 로마드카가 역사적 정치적 사건과 사태들을 때때로 복음의 관점과 일방적으로 동일화시켜버리는 듯한 인상을 받게되었는데 이것이 둘 사이에 견해차이를 보이게 만들었다. 바르트는 특히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였다. 즉 첫째로, 서구 유럽 정치가들의 뮌헨에서의 파렴치한 태도를 경험하고난 뒤 로마드카가 일괄적으로 서구에 대한 일방적인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가난한 자와 착취된 자를 위한 복음의 파당성을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인 것으로만 해석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전환을 세계정치를 개관하는 초석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내용들이 신학적으로 너무 불분명하고 단견적인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물론 바르트도 로마드카의 책 제목이자 그의 구호가 되어버린 "역사를 정면으로 바로보기"(Der Geschichte ins Gesicht zu sehen)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구체적인 문제상황에서 파당적으로 입장을 표현하는 것도 마다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1938년에 로마드카에게 보낸 편지가 이를 증명해 준다. 그러나 바르트는 구체적인 입장표명이 이 편이나 저 편의 역사주도세력을 위한 고정된 선입관으로 작용하지 않고 또 역사의미의 운명을 예견하도록 짜맞추지 않게 노력하였다. 복음에 우선성을 둔다는 것이 한가지 선택가능성에 아주 밀접히 매달린다는 것과 혼동되어질 수 없다.
VI. 역사철학 혹은 역사신학의 문제
역사철학이라 함은 간단히 말해 철학을 역사와 결합하여 보는 시도로써 역사사건에 대한 철학적 관조라 하겠다. 칼 뢰비트는 이 역사의 철학을 "역사적 사건이나 결과를 서로 연관시켜 궁극적 의미와 관련지어 주는 원리를 단서로 한 세계사에 대한 체계적 해석"이라 정의한다. 이 용어는 볼테르에 의하여 18세기에 신학적 역사해석과 구별되어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즉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의지와 예정의 의미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이성적 능력이 보다 더 강조되는 시기에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별에도 불구하고 흔히 역사철학이라는 용어는 신국론에 드러난 대로 어거스틴으로부터 비롯된 역사신학이라는 용어와 분리되지않은 채 사용되기도 한다. 이 때 주의할 것은 역사신학이 독어개념으로 구분해 볼 때 과학적, 역사적으로 논증가능한 교회사적 의미의 역사신학(Historische Theologie)이 아니라, 역사적 논증보다는 역사사건과 역사전반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역사신학(Geschichtstheologie)으로 사용되어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조명해 내는 이 방법을 바르트는 상당히 조심스레 취급하였다. 이 문제는 바르트가 역사를 어떻게 정의하며 세속사와 구속사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구속사가 세속사와 구분되어 평행선으로 진행되어지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루터적 두 왕국이론이 자리차지할 여지가 없다. 구속사는 세속사와 구별되어 혼합되지 않으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inconfuse, indivise). 비록 혼돈스러운 인간의 역사(Hominum confusione) 일지라도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섭리(et dei providentia)를 바라보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바르트 신학의 한 빛깔이기도 하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역사는 계시의 술어이고, 계시는 역사의 주어"가 된다. 신학적 사고에 있어서 그 반대의 경우를 바르트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역사는 계시가 일어난 현장으로서, 즉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몸을 입으신 곳으로써 중요하다. 그렇지만 역사 사건을 읽어내는 것이나, 혹은 "역사로서의 계시" 즉, 역사사건 자체가 계시의 원천(Quelle)일 수가 없다. 계시가 역사가 되었지, 역사가 계시가 된 것은 아니다. 바로 이 계시사건을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계시의 원천이다. 바르트의 교의학적 설명에 의하면 말씀은 삼중성의 형태를 지니는데, 즉 "계시된 말씀(das offenbarte Wort Gottes), 기록된 말씀(das geschriebene Wort Gottes), 선포된 말씀(das verkündigte Wort Gottes)"이다. 바르트가 하나님 말씀의 선포로써 설교를 강조하는 것을 이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그가 행한 수많은 설교를 분석해 본다면, 한국교회 강단에서 대부분 행해지는 주제 설교가 아니라, 철저한 성서분석을 토대로 한 주석 설교라 할 수 있다. 한 예로서 보면, 바르트 자신이 정치적으로 말 할 수 없이 중요한 영향을 끼치던 1930년대의 히틀러 치하에서도 그는 설교가 정치 사태에 대한 강연이나, 정치적 현안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의견표명의 장이 되어서는 안됨을 자주 강조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최대한 정확히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성서 주석이었다. 성서이외에 다른 역사, 정치, 문화, 전승,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등이 계시의 원천일 수 가 없고, 이러한 요소들을 "제 2의 계시의 원천"으로 인정하려는 카톨릭주의와 근대 개신교주의에 바르트는 완강히 맞섰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인 우리가 언제 어떻게 또 다른 우상을 하나님의 계시라 부를 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르트는 19세기 근대 개신교주의의 산물이며 히틀러의 제 3 제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독일 기독교적 역사신학"을 단호히 비판했다. 이 점에서 역사신학은 자연신학의 변형된 새로운 형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한 관념주의나 형이상학들과 동일시 될 수 없다. 복음의 진리는 이념이나 관념 혹은 세계조망이 아니다. 때문에 신학이 단지 역사신학에 휘말려 있을 수 없다. 즉 신학이 역사와 인간의 정황문제를 강조하여야 하지만, 역사문제를 이끌고 나아가야지 그 안에 휩싸여 버릴 수 없다. 역사는 과정적이고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보면, 바르트를 "계시 실증주의"(Offenbarungspositivismus)라는 용어로써 초월적 하나님만을 고집하는 상황과 관련없는 비세계적 신학자로 비판하는 것이나, 또한 그 반대로 1938년의 로마드카편지와 관련된 경우와 같이 바르트가 신학의 문제를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역사신학화 했다는 비판모두 정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바르트는 기회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리 행동을 취했을 뿐이고 그것이 때로는 정치적 효과로 확산되기 까지 하였다. 바르트의 신학적 연구는 사회정치적 정황과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역사와 사회에로의 방향성을 항상 잃지 않는 신학적 감각을 지니며 세계 역사의 지평속에서 신학적으로 숙고하던 그의 자세는 높이 평가될 만하다.
VII. 나오는 말
자연신학적 이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 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계시신학적 이해는 바르트 신학의 핵심이다. 이러한 사고에 기반을 둔 그의 신학은 탈세계적이거나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상황과 연관되어 전개되었다. 바르트와 동시대에 살면서 공간적으로 다른 여건에서 살았지만, 바르트의 신학적 내용과 유사하게 자신의 신학을 전개해 나간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로마드카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역사신학문제와 관련된 "로마드카에게 보낸 바르트의 편지"와 그에 얽힌 몇가지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바르트와 로마드카를 연결짓는 것은 신학적 작업의 성서적 기초를 새로이 닦는 일이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한 계시를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이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관념, 명상적 관조를 통한 인간의 정신적 산물이 아님을 명백히 한 것이 이들 신학의 구체적 특징이다. 로마드카는 물론 바르트는 그들의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역사현실문제를 상당히 중시하였기 때문에 때로는 이들이 역사철학이나 역사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드러난 한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 주어로 삼고 있는 이들의 신학은 역사의 내용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아내려는 역사신학을 추구했다고 볼 수 없다. 다만 이들은 신학하면서 역사정황을 중시하고 직시하자는 것을 남달리 강조했을 뿐이다.
냉전체제가 끝났고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영원한 승리를 가져온 것으로 착각되기 쉬운 이 때 바르트의 목소리는 다시 들려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전히 국내적으로 빈부간의 격차를 줄이는데 힘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야하는 노동자들이 불이익을 당하고 살아야 하는 것을 그냥 바라만 본다. 경제정의 실현을 위하고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구조를 바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통일을 염원한다고 빈번히 말하면서도 통일이후를 내다보는 구체적인 준비도 못하였다. 멀티미디어와 첨단과학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이 시대에도 인간은 인간답게 살고 자연은 자연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위해 해결해야 할 많은 사회적 과제들이 우리앞에 놓여있다. 지금은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 21세기의 새로운 멀티미디어의 세계만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남북문제로서 경제문제와 환경문제가 결합된 20세기의 숙제를 풀지 못한 채 21세기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와 세계의 문제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자체는 신학하는데 있어서도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주객도식이 뒤바뀌어지는 것은 문제이다. "계시는 역사의 주어이고, 역사는 계시의 술어"이기 때문이다. 정치문제가 복음을, 문화가 복음을, 종교가 복음을, 역사가 복음을 삼켜 버리는 우를 그래서 피해보자는 것이다.
바르트는 특정 정치제도에 대한 낙관주의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정부주의적 회의주의자도 아니었다. 민주자본주의에 대한 우월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맹신주의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인간의 정치제도는 어떤 형태이건 그 한계와 모순을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 희망을 지니며 인간으로서의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보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이 역사상황을 비추이며,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소처럼 부지런히 자신의 신학을 정립해 나간 바르트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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