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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의 교회개혁

by 【고동엽】 2011. 6. 28.
 
 

              

            

     

   3인의 교회개혁 ♬                

 

         프라하 도서관에는 1572년이라고 찍힌 3인조의 큰메달이 진열되어 있다.

      첫째는-한 돌로부터 불꽃을 튀기는 위클리프 상이고

      둘째는- 그 불꽃에서 불을 점화하는 후스의 상이고

      셋째는 -타오르는 햇불을 높이든 루터의 상이다.

그 큰 메달은 영국인에서→보혜미아인, 그리고→독일인에 의해서 이룩된 교회개혁의 전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후스는 위클리프 영향을 크게 받았고, 위클리프와 루터를 이어주는 고리역활을 했다.교회개혁의 선구자 위클리프 1329년 영국에서 태어나 루터보다 140년 앞서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당시 교황과 교직자들은 자신들이 맡은 영적인 직권을 세속적인 목적을 달성하는데 이용하였다. 그래서 교회의 직분과 지위를 사고팔고 면죄부까지 팔았다. 이같이 모은 수많은 재산들을 통하여 교황청은 매우 화려했으며 교직자들은 사치스러웠고 수도원과 수녀원은 사특하고 음란한 곳으로 변화하고 말았다. 교인들은 성경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맹목적이었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영적인 눈은 밝아지고 있었다. 드디어 1370년(41세때) "교황에 대한 저항"이란 저서를 통해 정면으로 도전했다. 또한 1378년(49세때) "교황의 분립"이라는 책을통해 화체설과 면죄부 판매의 오류를 지적하고 교직자들의 퇴폐생활과 수도사들의 걸식 순례행각 및 성직자들의 독신제를 비판하며 교황의 세속적 통치권과 무오설을 반대하는 등 끊임없이 교회개혁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성경번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을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한 벌게이트 성경이 카톨릭교회 공인 성경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라틴어를 모르는 대부분의 영국국민들은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한채 타락한 목회자들이 전해주는것만을 들을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위클리프 라틴어 영역은 150년후의 윌리암 틴델이 히브리어 성경을 영역하는데 큰 힘이 되기도 했다. "만일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교회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으면 성경을 따라야 한다.양심과 인간의 권위가 충돌할 때는 양심대로 순종해야한다"는 그의 신학논문을 이때 집필했다. 1384(55세)12월31일 세상을 떠난후에 그의 모든 집필들은 발매금지와 불태워졌다. 그러나 위클리프가 떨어뜨리고 간 교회개혁의 불씨는 꺼지지않고 보혜미아인 후스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1378년~1417년까지 약40년간은 교회의 대분열의 시기인데 그 원인은 '교회의 바벨론 유수'에서 찾아볼수 있다. 13세기까지는 교황은 *로마 교황청에 거주했으나 *1309~1376까지 약70년간 교황들은 남프랑스 아비뇽에 거주했다. 교황청이 아비뇽에 있을때엔 교황들은 모두 프랑스인이었다. 호사스러운 궁정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선 주교의 직분과 면죄부를 매매하였고 신도들에겐 무거운 세금 형식으로 십일조를 강요하면서 수탈해 갔다.

이탈리아인들은 교황의 아비뇽에 거주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교황청이 다시 로마로 옮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377년엔 교황 그레고리우스11세때 교황청이 로마로 옮겨졌으나  그 다음해 죽고 말았다. 교황이 죽은후 프랑스 추기경들은 교황청이 다시 아비뇽으로 옮겨지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로마측에서는 교황청을 로마에 그대로 두기로 결의하고 이탈리아인 우르바느스6세를 새 교황으로 세웠다.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4개월후 클레멘트7세를 새 교황으로 세운 뒤 그를 대동하고 프랑스 아비뇽으로 돌아가버렸다. 이에따라 두명의 교황이 아비뇽과 로마에서(클레멘트7세 와 우르바느스6세)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 기간이 교회 대분열기였다. 1409년에 열린 피사 공의회에서 아비뇽과 로마의 두 교황을 퇴위시키고 알렉산더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으나 아비뇽과 로마의 교황들이 교황권을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3명의 교황이 공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1414년 콘스탄스 공의회가 3년5개월동안 계속되면서 1417년 마틴5세를 이탈리아 추기경으로 선출함으로서 교황청의 대분열은 치유되었다.

 

보혜미안 후스는 면죄부 판매에대한 반대운동을 벌인 이유로 추방당해 유랑생활하면서 1413년 '교회' 란 책을 출판하면서 위클리프로부터 전해받은 그대로 '교회는 예정된자들로서만 구성되며 교회의 참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교회의 법은 성경이요 교회의 생활은 그리스도와 같은 청빈의 생활이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1415년 5월4일 콘스탄스 공의회는 위클리프를 정죄하였고 그 시체를 파내어 불사르도록 결정하였다. 두달후에 후스도 체포되어 공의회에 끌려나가 두 쇠줄로 화형주에 묶였다. 후스는 '나는 오늘내가 전한 그 복음의 신앙안에서 즐겁게 죽을 것이다. 그리스도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내게 자비를' 이라고 말하면서 화형당했다.

이러한 일들은 후에 독일의 개혁가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뒤 보혜미아엔 폭동이 일어나 교황제도의 존속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보혜미아 형제단이라는 종교단체가 생기게 되었고 나중에 진센돌프 백작의 지도아래 모라비안 형제단이란 그리스도교 분파가 생겨났다.

교황은 전 기독교 국가들를 지배하고 있었고 '교황은 해' '황제는 달' 로서 정치.졍제. 문화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1000년의 세월을 유럽교회는 교황이 절대 통치였다. 하나님의 침묵은 계속되자 그 역반응은 두가지로 뻗혔다.

하나는 남부 유럽중심으로 루네쌍스(고전재현), 또 하나는 북부유럽 중심으로 시작된 교회의 각성이었다. 이때 조그마한 수도원의 신부였던 루터(1483-1546)가 교권 남용에 대한 날카로운 항의운동의 햇불을 들기 시작했다. 철저히 숨겨졌던 죄악성들을 낱낱히 들춰내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의 생명력에 강하게 접붙임으로 그의 강한 힘은 수그려 들지 않았다.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만을 의지하라! 나의 체험으로 얻은 그 진리를 믿으라!' 그의 어린생활의 가난은 그의 검소와 절약정신을 낳았으며 그의 교회교육은 율법적으로 굳어져서 그리스도를 심판자로서 설명하였기 때문에 사랑이기 보다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 보다는 자비로운 성모마리아를 흠모하는 예배가 성행하였다.

21세때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 순종과 청빈, 순결등을 배웠다. 그리고 명상에만 젖어있었다. 탄식, 고행 참기 어려운 채찍질등은 오히려 자신의 무거운 짐만 될뿐이었고 자신의 수많은 죄 덩어리는 고해성사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자신 내부의 기대할만한 의가 전혀 없음만을 발견했을 뿐이다.

라테라노 성당은 가장오래된 교황의 저택으로서 이곳을 찾는 순교자들에겐 많은 속죄가 이뤄진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곳은 그리스도가 해받을 때 빌라도의 궁전에 들어가는 스칼라 산타 계단이었다. 이 계단은 천사에의해 온전한 모습으로 로마에 옮겨졌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무릎으로 한계단씩 오를 때마다 9년간의 속죄를 보증받는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여러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은 반드시 이 계단을 오르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루터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계단을 무릅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이 계단을 올라갔을까? 그들은 진정 속죄를 받았을까?

오르던 계단들이 몹시 닳아서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다. 이 계단이 바로 그리스도가 무릅을 꿇은 계단으로서 십자가 표시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이 계단만은 속죄의 기간이 2배로 계산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을 떠올리며 십자가 표시를 바라보던 루터에게 문득 로마서의 한구절이 떠 올랐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거의 외우다시피한 구절인데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성경말씀인 것처럼 새롭게 느껴졌다. 루터는 계속 외워보았다. 그는 새파랗게 되어서 계단 중간에 우뚝섰다. 그리고 뒤에서 올라오는 순례자들을 밀치듯이 뛰어 내렸다. '아무리 예수님의 발자취가 남아있다고 하지만 그 계단끝까지 올라가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밖혀셔서 죄인의 대신이 되신것만 믿으면 충분하다'. 이는 루터의 깊숙한 영혼으로부터 울려나는 밝고 강한 외침이었다.

그는 일일이 열거하여 사죄받는 어떤죄보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인간 성품자체가 타락한 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수도원으로 돌아와 롬1:17절에서 완전한 은혜를 맛보았다. [롬1:17]"(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천국에 들어가는듯한 새로운 느낌을 받았으며 성경 전체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루터의 설교에 청중들은 매 주일마다 꽉꽉 찼다. 로마교황 레오10세는 베드로 성덩 건축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면죄부를 발행해서 대 웅변가 도미니크파 신부 요한 티첼을시켜서 판매토록 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사실에 대해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결국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95개조 선언' 이란 논문을 쓰게 되었다.

27조: 돈을 일단 궤에 넣으면 그 영혼이 곧 연옥을 면하여 나온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억지설이다.

36조: 누구든지 진심으로 구주를 영접하고 회개하면 그 죄와 심판을 온전히 면할수 있다. 그런데 연보함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설이다.

76조: 교황의 면죄부는 사람이 날마다 짓는 지극히 작은 죄나 허물을 능히 없애 주지 못한다.

10월31일 아침 비텐베르크의 교회 대문의 게시판에 그 선언문을 붙였다. 이것을 붙인후 그는 위클리프, 죤 후스, 샤보나롤라 등이 교황으로부터 화형당한 장면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서 비쳐오는 밝고도 향기로운 빛을 깨닫고 기쁨이 넘쳤다. 이 라틴어로 기록된 선언문은 독일어로 번역이되어 삽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팔리고 있었다. 읽는 어떤사람 가운데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스도만 의지해도 구원을 받을수가 있다면 성경을 읽어야 할거야. 성경책을 사러가야지' 그러나 독일어 번역된 성경은 없었다. 공격해오는 수많은 적들이 있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는 루터는 멜랑톤의 위로에 큰 용기를 얻기도 했다.

루터는 그후 튜빙겐 숲속에서 숨어지내면서 신약성경을 11주만에 독일어로 번역했다. 루터의 남은 생애는 교회의 질서와 복음주의자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으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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