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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성화론*

by 【고동엽】 201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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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성화론

 

-성결교회와의 대화를 모색하며-

 

I. 머리말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개혁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따라서 성화론을 전개하였다.1) 그러므로 점진적인 성화와 지상에서의 성화의 미완성을 주장하는 개혁신학의 전망 안에서 바르트의 성화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서 바르트 신학의 특징인 그리스도중심주의(christocentrism)가 그의 성화론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교회 교의학> IV/1-4 화해론에서 성령론적인 강조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성화론을 고찰하고자 한다.2)

 

결론적으로 바르트와 웨슬레안 전통 위에 서 있는 성결교회와의 대화를 모색하는 것은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신학적 좌표를 인식하는데 유익할 뿐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촉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결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이 때에 이러한 신학적인 반성을 통해서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 보는데 이 논문의 목적이 있다.

 

II. 성화의 정의

 

일반적으로 성화는 칭의(justification)와 함께 또는 중생(regeneration)과 함께 관계개념으로서 사용된다. 개혁교회는 객관적이고 법적인 상태의 변화인 칭의와 이에 대해 주관적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가리키는 성화를 말함으로써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였다. 즉 하나의 구원이라는 사건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칭의와 성화를 나눈 것이다.

 

반면에 웨슬레안에 의하면 성화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이후에 새 생명이 성장하여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숙 내지는 완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웨슬레안은 내적인 변화를 초기단계와 후기단계로 구별하기 때문에 중생 다음에 성화의 단계가 별도로 와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는 칭의와 함께 성화가 시작하며 이 성화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계속해서 성장해 갈 뿐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성화 이해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개혁교회의 성화는 웨슬레안에서 말하는 중생과 거의 같은 함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예컨데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는 별도의 장(章)으로서의 성화론이 없다.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는 회개와 중생은 오늘날의 성화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의 구원론에서 성화를 나타내는 내용을 추출해서 그의 성화론을 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말하는 성화 역시 웨슬레안에서 말하는 중생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성화(sanctification)와 성결(holiness)이 혼용되고 있는데 거의 동일한 의미이나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성화는 성결에 이르는 과정을 포함하는 개념이요 성결은 성화를 이룩한 상태라고 구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성결하신 분이지 하나님이 성화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성화할 수가 없다. 그는 본래부터 성결하다. 그러나 인간은 성화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성결하기 위하여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개혁교회는 지상에서의 완전한 성화를 부인하고 성화되는 과정을 강조하기 때문에 성결보다는 '성화'를 선호하는 반면에 웨슬레안은 지상에서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성결'을 선호하게 된다고 본다.

 

성화에 대한 정의들을 소개하면, 후크마는 "우리는 우리의 책임있는 참여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의 본성 전체를 새롭게 하시어서 우리가 주님을 즐겁게 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를 성화라고 한다"3)고 하였고 이것을 더욱 더 줄여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켜 우리는 성화라고 한다"4)라고 정의하였다.

 

벌코프는 "성령의 자비로우시고 끊임없는 역사로 죄의 부패에서 죄인의 전 성품을 정결케 하여 줌으로써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5) 요한 웨슬레에 의하면 온전한 성화는 신자가 다시 자기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체험으로서 이 순간적인 체험을 통해서 신자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으며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고 하였다.6)

 

III. 칼빈의 성화론

 

칼빈의 성화론은 칭의와의 밀접한 연관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두 개의 초점이 있는데 그 하나는 죄사함을 받아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요 다른 하나는 성화라고 하는 윤리적인 재생이다. 칭의와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실재요 한 은총으로서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동시에 받는 은총의 두 면인데 이 양자는 결코 분리될 수 없고, 구별되어야 하며, 하나가 될 수 없다. 칼빈의 성화론의 특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화의 주체는 인간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계시이며 신앙의 주체는 나의 종교적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다. 즉 인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성화는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인간에게 부여되는(imputation) 것이다.

 

둘째로, 성화는 칭의와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이중은총(double grace)이다. 그런데 성도의 지상생애에서 이 성화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우리가 성화되어 성령의 인도아래 주의 법도를 따라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자신을 잃어버리고 교만하지 않기 위하여 여전히 불완전한 것의 흔적(trace of imperfection)을 남겨 두어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갈 뿐이지 완전한 성화는 죽음 이후의 일로 남겨두었다.7)

 

셋째로, 성화의 열매인 선행은 구원의 공적과 관계가 없으며 구원은 행함과 관계가 없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선행을 통해서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고 보았다. 즉 성화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단계로서 필요한 것이다.8)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화되어 율법에 순종하여 선행을 실천하는 생활의 거룩함을 나타내야한다. 그러나 이 선행도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justification by faith)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과 함께 성화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말미암는 것은 결코 아니다.9)

 

넷째로, 성화는 자기를 부정하고(renunciation),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10) 이것은 칼빈의 성화론의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하나님의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통해서 자기를 부정해야 하며 자기부정은 이웃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바르게 해 준다고 하였다.11) 그리고 자기 부정의 일부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각각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십자가에는 아픔이 있지만 십자가를 지는 동안 우리는 영적인 기쁨으로 충만해지며 감사하게 된다고 하였다.12)

 

칼빈은 칭의를 하나님의 은혜의 객관적인 측면으로, 그리고 성화를 주관적인 측면으로 구별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이중성을 말했다. 그리고 성화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장하여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성화는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서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칼빈의 성화론이 바르트의 성화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그리고 바르트의 성화론이 어떻게 발전적으로 전개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IV. 칼 바르트의 성화론

 

바르트의 성화론은 그의 화해론 CD IV/2에서 진술되었다. 즉 바르트의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는 화해론의 체계 안에서 그의 성화론이 해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화해론의 근본도식이 그의 성화론을 정초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이고 창조는 계약의 외적 근거이다.13)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을 위한 것이며 창조는 이 계약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의 구체적인 실현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이다. 그리고 이 화해의 내용은 하나님과 인간의 친교(fellowship) 즉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의 관계의 수립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남편이 되고 인간은 하나님의 아내가 되는 이 동반자관계(partnership)야말로 하나님의 우주창조와 구원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리고 이 장엄한 우주적 드라마의 완성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독론적 구도는 그의 성화론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칼 바르트의 신학이 <로마서 강해>에서의 변증법적 방법으로부터 <교회 교의학>에서는 아날로기아방법(analogia fidei, analogia relationis)으로 변천하면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축(axis)으로 하여 전개되는데 일반적으로 이 시대의 바르트의 신학을 기독론적 신학 내지는 그리스도 중심주의(christo-centerism)라고 일컫는다.14) 그러나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CD IV/1-4에서 특히 CD IV/4에서는 일방적인 기독론적 신학이라고 하기보다는 기독론적-성령론적 신학(christological- pneumatological themes)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성령의 지위와 역할이 크게 강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화해의 사건에서 성령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속물이나 그의 그림자가 아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에 거기에서(there and then) 보편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일어난 화해의 사건이 현재 여기에서(here and now) 특정한 사람들 안에서 실현되게 하는 실존적 사건의 집행자(agent)로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성화론에서도 이러한 성령론적 강조가 어느정도 관찰될 수 있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의 성화론이 기독론적 성령론적 성화론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교회 교의학> IV/2에서 진술된 순서를 따라서 바르트의 성화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1. 칭의와 성화

 

바르트의 성화론은 기독론적이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신-인(God-man)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과 인간의 본래적인 관계로부터 해명된다. 바르트는 인간에게로 향하시는 하나님의 전향(turning to man)이 칭의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전향(conversion)이 성화라고 말한다.1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I will be your God)는 인간의 칭의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You shall be my people)는 성화이다.16)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은 칭의요 하나님의 명령의 실현은 성화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성화의 사건에서 주체가 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칭의가 하나님의 사건이듯이 인간의 성화 역시 하나님의 일이다.

 

더 나아가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칼케돈신조(Chalcedon)의 규정을 따라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해명하고 있다.17)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거나 섞일 수 없듯이 칭의와 성화도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거나 나누이지 않듯이 칭의와 성화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행동이나 사건이 아니다.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의 하나의 사건, 하나의 행동의 두 계기(moments) 내지는 두 국면(aspects)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work)이 두 사건이나 두 행동이 아니고 하나님의 한 행동의 두 요소(elements)와 두 국면(factors)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의 틀은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그 다음에 바르트는 구원의 순서(ordo salutis)를 말한 정통주의를 반대한다.18) 구원의 순서는 시간적으로 구별할 수 없으며 이러한 구별은 심리적인 구별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별은 기독론과 구원론 사이에 이원론을 초래하며 구원의 은혜를 인간의 심리적인 상태로 해소할 위험이 있다. 그리하여 객관적 구원의 성취와 주관적 구원의 획득의 이원론은 극복되고 칭의와 성화의 동시성이 확보된다.19) 칭의와 성화는 한 사건의 다른 국면이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동시에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신 것처럼, 그리고 그가 동시에 낮아지신 분이요 높아지신 분인 것처럼(the Humiliated and the Exalted) 칭의와 성화는 동시에 일어나는 한 사건의 양면이다. 오토 베버에 의하면 바르트는 성화는 칭의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불트만에 반대한다. 불트만은 신앙을 전적인 순종 안으로 해소하였다. 그리고 바르트는 칭의는 성화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젊은 루터와 진첸돌프를 반대한다. 초기 루터는 로마 가톨릭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칭의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20) 바르트가 구원의 순서를 반대하고 칭의와 성화가 동시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은 웨슬레안의 입장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면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무엇인가? 칭의와 성화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종속적인 관계를 가진다.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의 구별은 시간적인 질서가 아니라 내용적인 질서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적에서 본다면 성화는 칭의보다 우월한 상위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발생의 순서에서 본다면 칭의는 성화에 앞선다. 칭의는 기초로서는 첫째요 전제로서는 둘째이며 성화는 목적으로서는 첫째요 결과로서는 둘째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둘 다 우월하며 둘 다 종속적이기도 하다.21) 어쨋든 이 양자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은혜로서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바르트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면서도 연관시키는 것은 루터와 칼빈을 따르는 것이다. 칼빈은 이 양자를 병립시키면서도 양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22) 이 점에서 바르트는 철저하게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뒤따르고 있다.

 

2. 거룩하신 분과 성도들(The Holy one and the Saints)

 

성화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즉 성화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법적으로(de jure)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으며 실제적으로(de facto) 성화는 성령 안에서 일어난다. 법적으로 성화는 세계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일어났으나, 실제적으로는 신자에게만 인식되고 주어지고 고백된다.23) 여기에서는 성화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의 성취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completed) 성화를 인간 안에서 실제로 이루시는(realization) 성령의 사역을 고찰하고자 한다.

 

성화의 능동적인 주체이신 거룩하신 분은 단수이지 복수가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다른 어떤 것이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것이다.24) 그는 창조자, 화해자, 구속자로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자비와 계시에 의해서 거룩하신 분이다. 그의 자비 안에서 언제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행동으로서의 성화란 하나님의 계약상대(covenant-partner)로서 새로운 실존양식의 창조를 의미한다. 이 하나님의 계약상대로서의 새로운 실존양식 안에서 인간의 지위는 무엇인가? 인간은 여기에서 두 번째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충성되고 기뻐하며 복된 삶을 사는 자유로운 존재인 하나님의 참된 계약상대로서 살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25)

 

따라서 성화는 하나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될 수 없다. 본래적으로 그리고 합당하게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지 인간들의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아들이 되신 것은 인간을 자신에게로 전향시키기 위해서였다. 즉 죄와 그 결과로서의 비참의 나락으로부터 인간을 고양시키고(exalted) 거룩하지 않은 인간을 해방하고 성화하기 위해서였다.26) 이것은 본래적인 성화의 신적 행동이며 유일회적인(once-for-all) 사건이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성화는 이 형식 안에 포함되었다.27)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우선권을 확보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동으로서의 인간의 성화는 인간에 의해서 완성되어야 할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내 너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하였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28) 라고 말하는 것은 성화에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단지 그분의 성화 안에서 우리의 성화가 마찬가지로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을 감사하면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인정과 존중에 의해서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되었으며 이미 성도이다.

 

우리는 모방에 의해서 그것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29)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롭게 하도록 요구받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하도록 요구받지 않았다. 우리의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효용과 계시 안에서 근거되어진 그분의 성화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participation)이다.30) 이것은 바르트가 칼빈의 성화론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31) 이와 같이 인간은 성화의 성취를 위해서 미리 또는 뒤따라(prior or subsquent) 공헌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거룩성(sanctity)에 참여함으로써 그분 안에 이루어진 인간의 성화를 입증하는 것이다. 성화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우리에게는 복종과 최상의 사랑이 요구되어질 뿐이다.32)

 

성화는 인간의 감정, 이해력, 양심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로 오는 지시의 능력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성화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다"(요 1:12f.). 그들의 행동은 주님과 죄악된 인간을 연합하신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신비에 의해서 양육된다(nourished).33)

지금까지 바르트는 성화가 하나님의 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인간이 그것의 완성을 위해서 어떤 공헌도 할 수 없으며 단지 그리스도의 성화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의 성화는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실제로 그리스도의 성화에 참여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에의 참여로서의 성화의 두 번째 국면이다. 이것은 성령론적 성화론이다.

 

성도들은 여전히 부패하고 비참한 죄인이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거룩한가? 그들의 거룩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르트는 성도는 훼방받은 죄인들(disturbed sinners)이고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은 죄인들은 훼방받지 않은 죄인들(undisturbed sinners)이라고 구별하였다.34) 성도는 동시에 죄인이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은 내적 갈등이 있으며 성도들에게도 제약과 동요가 있으며 심각한 불안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훼방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지상에서의 그들의 활동 안에서 그들을 훼방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화란 이렇게 제한된 의미에서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변화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참된 계약상대가 된다고 하는 새로운 실존양식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훼방받지 않은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은 자인데 그는 계약파괴자요 하나님께 쓸모없는(unusable) 자이다.35)

 

성도는 스스로 부패하였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각성하여 자신을 고양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성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을 할 수 있는 수용력(capacity)과 능력(ability)과 자유(freedom)가 필요하다.36) 그것은 여기 아래에서, 육신 안에서 그리고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 영역에서는 그것을 위한 자유가 없다.

 

구원을 위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죄의 노예(prisoner of sin)이며 계속해서 새로운 죄를 짓는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지시는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유케 하시는 새로운 현실(actuality)이다. 그가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해야하기 때문이 아니라 허락되었기 때문이다(He can do this, not because he should, but because he may).37) 이 수용력의 부여가 인간의 해방이며 그의 성화이다.

 

이 수용력 안에서 그는 죄인으로서의 그의 존재에 대한 주권적인 반립(antithesis)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죄를 범하도록 강제되지 않게 된다. 그는 이제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고 그 반대를 행할 수도 있다. 그에게 부여된 수용력 안에서, 그에게 주어진 허락의 기초 위에서 그는 그 반대를 할 수가 있다. 이 자유와 이 허락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 자유의 부여가 성령의 부으심이다. 비록 그들이 모든 다른 사람들처럼 여전히 이 세계 안에 있을지라도 그들에게는 성령의 전체적이고, 무제한적이고 주권적인(total, unlimited, sovereign) 자유가 주어졌다.38) 다시금 말하거니와 이 자유는 인간의 수용의 능력이나 위엄 안에 근거된 것이 아니고 이 은사의 수여자이신 예수 안에 근거된 것이다.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서 그분과 연합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도 자유한 것이다.39)

 

바르트의 그리스도에의 참여는 이와 같이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자유 안에서 인간이 죄를 극복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는 적극적인 성령론적 성화론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이미 죄없는 완전한 성도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수동적으로 지켜야 된다고 하는 정적인 자세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와 계속해서 싸워가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성화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수용해 가야 된다고 하는 긴장과 투쟁의 삶을 지향하는 동적인 성화론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한 객관적인 성화의 성취와 성령에 의한 주관적인 성화의 실현을 말함으로써 바르트의 성화론은 기독론적-성령론적 성화론으로 발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3. 제자직에로의 부르심(The Call to Discipleship)

 

성화란 역사적 정치적 현실을 떠난 개인들의 내적인 경건의 한 단계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앙은 인간 사회의 현실을 떠난 개인적이고, 내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우주공간 속으로의 위험한 여행을 하려는 경솔한 신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그분에 대한 복종을 포함한다. 즉 신앙이란 이론만이 아니라 실천을 요구하는 종합적인 것이다.40) "나를 따르라"가 예수가 인간들(men)을 그의 성도들(saints)로 만드시는 부르심의 실체(substance)이다.41)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제자직의 복종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복종을 의미한다. 이것은 본회퍼가 말하는 단순한 복종이다.42)

 

복종은 우리가 들은 것을 실천할 때 단순하다. 그 복종 이상도 그 이하도 다른 것도 아니다. 구체적으로 단순한 복종이란 자기 부정(self denial)과 예수를 믿는 신앙의 용감한 행위(brave act of faith in Jesus)이다.43) 그것은 느낌도, 생각도, 고려(consider)도, 명상도 아니고 단지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예수에 대한 단순한 복종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파괴(break)를 일으킨다. 이 파괴는 복종하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다. 이 부르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계시되는데 그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들 가운데(among) 있지만 이 나라는 세상나라들과 대치하고, 모순되고, 반대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쿠데타(coup de d'etat)이다.44)

 

하나님의 쿠데타는 인간 예수의 실존 안에서 이미 선포되고 성취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깨뜨리시는 혁명이며 예수는 그들의 정복자(conqueror)이다.45) 정복자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그의 동료들 사이의 중보자요 신적 실재(divine reality)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증언해야 하는 그의 제자이다. 예수 안에서 되어진 하나님의 파괴는 [구체적인] 역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거짓된 절대들의 상대화에 관한 단순한 이론이나, 단순한 마음의 태도나, 내적 자유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될 때, 만약 우리에게 맡겨진(assume) 공적 책임(public responsibility)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리게 되고 영원한 구원도 위험하게 된다.46)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의 증언자로서 전혀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단지 조용히 참가하는 자는(quiet participant) 어느 누구도 공격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그에게 요청되어진 복종역시 기피하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복종은 반드시 공적으로 그의 주변세계에 대해서 불가피하게 공격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자굴 속에 있는 다니엘과 같이 그는 사자의 꼬리를 잡아다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견뎌야 할 것을 견뎌야 하며 부닥칠 것에 부닥쳐야 한다. 그를 전사(warrior)라고 묘사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전쟁(militia christi)이 일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추방되기도 한다.47) 우리는 그들과의 전투에서 이미 승리하였으며 그들의 힘은 이미 분쇄된 것이다. 세상의 폭력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대립은 원수 사랑의 계명 안에 나타났는데 이 사랑의 계명은 친구와 원수관계의 종식 즉 폭력사용의 종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화의 본질은 사랑에 있다.

 

결론적으로,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육성된 권위들과 신성들에 대한 존경과 복종을 거부하며 옛세계와 싸워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된 하나님의 승리가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우정어린 행복한 공격이라고 말함으로써 비폭력적인 사랑의 삶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유 안에서 행동하는 삶이다. 그리고 이 삶은 개인의 내면으로 물러가는 정적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다하는 공적인 행동 안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4. 십자가의 존엄성(The Dignity of the Cross)

 

이제 마지막으로 바르트 성화론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십자가를 지는 삶은 기독교 성화론의 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러면 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성화의 삶인가? 성화론에서 십자가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태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으로 끌어올리는 것으로서의 성화의 한계를 표시하기 때문이다.48)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육체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되면 성도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이며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상태 및 앞으로 영생하게 될 모습 사이의 모순이 끝나게 될 것이다. 즉 현실세계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의 삶의 불완전성과 한계가 십자가를 통해서 해명될 수 있다고 바르트는 보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십자가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의 참여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인간의 성화가 저 그리스도를 향한 성도의 운동이 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위대한 기독교의 소망의 빛 안에 자리매김한다고 하는 것이 십자가에 대한 관련(reference)과 더불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화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지도록 명령받고 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친교의 가장 구체적인 형태이다.49)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십자가 없이는 그의 제자들의 십자가도 없다. 그들이 성화되고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회심하며 선행을 하도록 자유가 부여된 것은 그분이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당했다고하는 사실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다.

 

그러나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다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간접적으로 연결되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분 자신의 십자가이며, 그분 혼자만이 지신 것이지 그리스도인들의 십자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지더라도 그것은 또다시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되는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받으신 그 고통을 또다시 인간이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구별성 내지는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강조하였다.50)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완성된 인간의 높임 즉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화는 그분 안에 근거를 가지며 인간의 높임은 하나님이 예수를 높임에서 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높임 없이 인간의 높임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와 인간의 성화는 동일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높임과 성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높임과 성화에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어쨋든 그리스도에의 참여는 십자가를 견딤이다. 십자가는 단지 곤고, 고뇌, 슬픔, 고통, 죽음 자체(itself) 내지는 그러한 것들 일반(in general)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의문이요 파괴이며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고통, 고난, 죽음 같은 것들을 사랑할 수 없다. 그는 거기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그는 그것을 원하거나 추구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가운데서 긍정적인 해결책을 찾는다.51)

 

그가 십자가를 긍정하는 것은 그것이 그에게 삶의 문제 이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행해져야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성화인 것이다(살전 4: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특별한 친교를 맺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고 하는 십자가의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소유이며 그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그의 뜻 즉 성화를 행해야 하는데 그것은 죽음 이상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조차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죽음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 안에서 견디는 것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 있는 그의 성화의 행동으로서 생명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긍정(affirm)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긍정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긍정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52) 따라서 자연적인 죽음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 놓여있는 긍정의 빛에서 보아야 한다.53)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되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상응(correspond)하는 것으로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에 의해서 고양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짐으로써 성화된다고 보았다. 십자가는 성화의 완성이다.54)

그러면 성도들에게 십자가는 어떠한 유익이 있는가?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십자가의 유익을 진술한다.55)

 

첫째로, 십자가를 짐으로써 우리는 겸손하게(humility) 된다. 우리는 아무도 자연적으로 겸손하지 못하지만 계속해서 그것에로 부르심을 받으며 십자가에 의해서 그것을 견디게 된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와 함께 형벌(punishment)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성화에 유익하다. 예수 자신은 세상을 위해서 큰 형벌을 받았으며 예수를 따르는 자는 작은 형벌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큰 형벌을 기억하게 되고 그의 감사를 새롭게 하고 그의 전환에 새로운 자극과 진지함을 줄 것이다.

 

 셋째로, 십자가는 우리의 믿음과 복종과 사랑을 훈련하고 강화하는 강력한 능력이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십자가는 성령에 의한 충동과 더불어 공동의 동인이 된다. 그리고 이 성령의 충동은 인간의 영의 충동으로 번역되어서는 안된다. 십자가가 올 때 비로소, 인간자신의 영은 성령에 의해서 올바르게 지시를 받게 된다. 마지막 네 번째로, 우리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검증이 가능하게 된다. 좋은 시절에 즉 상황이 조용하고 호의적일 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과 사랑의 선행이라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울 때 즉 심각한 공격을 받을 때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검증하고 정화하고 심화시킨다.

마지막으로 바르트는 십자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첫째로,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로 보냄을 받은 세상과 유대인과 이방인들에 의해서 받는 박해이다.56) 신약성서와 그 이후의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고백과 삶은 억압의 위협과 신체적 폭력아래 서 있었다. 그 이후 그리고 우리의 시대에는 박해는 드물게 되었고 우리는 유비들의(analogies) 빛 안에서 박해를 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인은 소수이며 때로는 개인주의자로 때로는 집단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자로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자로, 때로는 부르주아로 때로는 무정부주의자로 비난받기도 한다. 확실히 그들은 대체로 다수가 아니며 주류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참견과 비방을 견뎌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수에 의한 따돌림, 고립, 수치 등을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부의 십자가를 넘어갈 수 없다.

 

둘째로, 십자가는 우리가 피조물로서의 존재와 삶에서 경험하는 압도적인 힘으로 닥아오는 불행들, 사고들, 질병과 노쇠,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인간관계의 단절과 적개심, 일용할 양식에 대한 염려, 굴욕감, 무능력,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죽음 등이다.57) 만약 예수자신이 고통받는 피조물이었다면, 그와 같이 모든 피조물들의 주님이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의 고통은 그와의 친교 안에서 그와의 고통으로 간주하도록 허락되고 명령받았다. 그래서 그 고통을 이 친교의 표지로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위엄의 발현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 세번째로, 십자가는 죄의 유혹아래 있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해석하였다.58)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나이가 많고, 성숙하고, 진지한 성취를 이룩했더라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 안에서, 예수의 대속의 죽음 안에서 완전히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취 가운데서도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지적이거나 이론적인 의심은 상대적으로 무해한 형태의 십자가이다. 그런 것은 올바른 연구와 반성에 의해서 질서있게 답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문제가 되는 유혹은 점진적으로 또는 갑자기 기독교의 진리가 삶의 진리인가?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권위가 있으며 유효하며 조명하는 진리인가? 라고 하는 의심이다. 이것은 가장 극심한 형태의 십자가이다. 막 15:34에서 예수는 마지막으로 그리고 최고조로 이러한 형식으로 십자가를 경험하였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렇게 물어야 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자리에서 의심과 실망의 고통을 당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그분이 버림을 받았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의 질문에 답하시고 그를 들어올리신 분에 의해서 우리가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하다.

 

십자가는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요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임시적이며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임시적인 특징을 가리킨다. 생명의 면류관은 그 이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가운데서도 기쁨을 미리 맛보게 된다고 하였다. 바르트에 의하면 십자가는 영원한 면류관에 의해 극복될 것이다. 이러한 소망가운데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완성과정 즉 성화라고 보았다.

 

V. 결론

 

1. 바르트 성화론의 특징과 문제점

 

바르트 성화론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칭의와 성화는 동시에 일어나는 한 사건의 양면으로서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칭의 다음에 다른 사건으로서 성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칼빈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성화는 점진적으로 완성을 향해서 성장하는 것이지 순간적으로 지상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화란 죄없는 상태가 아니라 죄있는 상태이다.

 

둘째로,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성령은 인간 안에서 이것을 성취하신다. 인간을 성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화를 위해서 어떤 공헌도 할 수 없다. 단지 그리스도의 성화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과 사랑이 요구되어질 뿐이다.

 

셋째로, 바르트는 거룩한 삶이란 이 세계를 떠난 비 현실적인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사회적인 현실 가운데서 악한 세력과의 투쟁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전통적인 성화론과의 차별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와 싸웠던 사회주의자로서의 그리고 히틀러와 대결하였던 바르트 자신의 삶의 반영이기도 하다.

 

넷째로,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삶이며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견디는 삶이다. 이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는 하위개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비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성화론은 칼빈주의신학의 영향을 받은 개혁신학의 범주 안에 있다. 이것은 성화가 점진적인 성장을 의미하며, 칭의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객관적인 칭의사건의 주관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 등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성화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사건으로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는 기독론적 성화론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 역사적으로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써 기독론적 성령론적 성화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성화론에서는 나중에 쓰여진 CD IV/4(1967) 세례론에서만큼 강력하게 성령의 기능과 역할이 강조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이것은 그의 신학의 성령론적 발전과정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이다.

 

지금까지 바르트 성화론의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바르트의 성화론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바르트는 20세기에 삼위일체론의 부흥을 가져온 신학자이다. 19세기 자유주의신학자들에 의해서 100년간 무시되어 왔던 삼위일체론을 조직신학의 기본틀로서 재확립한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종속 내지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동일화(identify)로 말미암아 사실상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속물에 불과하게 되었다.59) 그리하여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이위일체론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60) 이와같이 존재론적으로 성자에 대한 성령의 종속이 계속되면서 성령의 사역론에서 성령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모순된다. 로사토는 이러한 바르트를 기만적(deceptive)이라고 비판하였다.61)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의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성령의 사역만 강조하는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논리적인 난점을 야기하게 된다. 앞으로 이 문제가 적극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62)

 

둘째로, 바르트의 성령이해는 웨슬레안에 비해서 역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바르트는 성령을 삼위일체의 한 존재양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계시의 주관성으로서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가 인간 안에서 실현되게 하는 동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결과 성령은 개인의 내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받아들여지게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더 나아가서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자유를 부여하시는 분으로 이해되고 있다.

 

 바르트의 초기신학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세계와 역사와 자연을 창조하는 창조자로서의 위엄과 능력에 대한 강조는 사라지고 단지 어떤 특정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그는 주권적이고 삼위일체적인 성서의 주님이 될 수 없다.63) 전반적으로 바르트신학에서 기독론적 강조의 위세에 가려 성령론적 강조는 빛을 잃고 있다. 바르트에게는 성령이 이 세계의 창조자일뿐만 아니라 교회를 변혁시키는 원동력을 공급하는 분이라고 하는 확신과 이해가 부족하다. 특히 18-20세기에 일어난 부흥운동과 오순절운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하다. 그 결과 바르트의 후기 저술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과연 바르트의 성령이 교회를 변혁시킬 원동력으로서의 감동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셋째로, 바르트는 기존의 성화론에서 거의 등한시하였던 성도의 공적인 책임성에 대해서 강하게 주장하였다. 거룩한 삶이란 사회적 현실 가운데서 악한 세력과의 투쟁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성화론의 지평을 확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성화론은 웨슬레안에 비해서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개혁신학의 전통을 따르는 바르트가 말하는 성화는 웨슬레안의 중생과 거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웨슬레안이 주장하는 성화는 중생의 단계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인의 완전, 동기의 순수성, 순수한 사랑, 원죄의 소멸까지 포함하는 강력하고 철저한 변화를 주장한다. 비록 성화의 단계에서 다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급격한 변화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안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점진적인 성장과 함께 순간적인 변화를 강조한 웨슬레안의 성화론에 의해서 바르트의 성화론은 보완되고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2. 성결교회와의 대화를 위하여

 

필자는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바르트와 성결교회 사이에 대화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바르트의 성화론은 그리스도 중심주의 내지는 하나님 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신학의 대전제 위에 서 있다. 성화는 인간의 수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되었으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사상은 은총의 신학을 강조한 웨슬레안이나 성결교회의 입장과도 괴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성화론은 복음주의 신학의 범주 내에서 성결교회와 연대할 수 있다고 본다. 바르트의 신학이 기독론중심주의로 기울기 때문에 성령의 지위가 약화되어 온전한 삼위일체론적 신학을 수립하는데 한계가 있는 점은 앞으로 극복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 삼위일체론적 신학의 수립을 위해서 바르트는 성결교회신학을 위한 유용한 레퍼런스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둘째로, 성결교회에서 주장하는 중생 다음의 2차적인 은혜로서의 성화는 분명히 칼빈이나 바르트와는 다른 급진적인(radical) 성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64) 이러한 철저한 성화론은 그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체험을 통한 삶의 변화가 있을 때 그것은 큰 감동과 변화를 유발할 수가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성화의 모델이 없을 때 성결교회는 깊은 감동이나 강력한 설득을 하기가 어렵게 된다(ex, 이명직, 이성봉).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과제이다. 그러므로 성결교회가 급진적인 변화와 함께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을 함께 강조하고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상황에 응답하는 것은 시대적인 요청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우리의 전통에 대한 찬양에 파묻힌 과거회상형 교회를 지양하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현실적 대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실천신학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이런 통합적 모델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바르트의 성화론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성화의 사회적 해석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성화가 개인의 내면의 차원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공적인 생활에서 표현되는 용기있는 복종의 행동이 될 때 교회는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결교회를 포함한 복음주의진영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무책임성은 앞으로 극복되어야 할 과제인데 바르트가 그의 삶을 통해서 보여준 악에 대한 투쟁과 불복종의 모델은 우리가 다시금 곰씹어 보아야 할 신학적인 과제라고 하겠다.

 

넷째로, 바르트 성화론의 기독론적 강조는 하나님의 은총의 객관주의에 대한 강조이며 이것은 경건주의의 은총의 주관주의와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그리스도의 능력(power) 내지는 에너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인간이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다고 하는 정도의 성령의 사역은 성경에서 묘사된 역사적인 성령의 사역에 비해서 너무 미미한 것처럼 보인다. 순간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고귀한 전통으로서 계승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삼위일체신학은 구호나 알맹이 없는 뼈대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교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신학이 되어야 한다. 성결교회의 성화론의 다이나믹이 함축되는 그런 삼위일체신학이 수립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바르트와 성결교회는 연대할 수 있다고 본다.

 

3. 맺는 말

 

전쟁, 혁명, 쿠데타, 대재난 등 급격한 사회변동의 시기에 과격한 종교적 체험에로 탐닉하는 경향을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럴 경우 개신교회의 신앙지상주의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할 때 종교적인 수련의 고통은 많은 사람들에게 덜 매력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우리나라 개신교회의 성장사에서 검증될 수 있고 필자가 수년간 체제하였던 영국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교회출석률은 60%를 상회하였으나 지금은 7.5%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지나간 10년간 교회출석률이 22%감소하였으며 앞으로 40년 후에는 0.5%만이 교회에 출석할 것이라는 암울한 미래가 예상되고 있다. 그런데 복음주의 교단인 침례교회만이 이 기간에 2%가 성장하였다고 한다(<목회와 신학>, 2000. 6월호 참조). 그리고 이런 번영의 시대에는 급진적이거나 과격한 개신교회보다는 온건하고 덜 엄격한 가톨릭교회가 보다 쉽게 호응을 받는 것 같다. 따라서 개신교회는 21세기의 시대상황에 맞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창출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신학이나 루터의 신학이 지나치게 신앙일변도를 지향한 것으로 해석된 것이 깊이 반성되어야 하며 신앙과 행위를 포괄하는 제 3의 신학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65)

 

우리가 성결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45; 19:2; 20:7)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우리는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서운 명령이기 때문에 억지로 복종하기 위해서 성결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구약적이고 율법적이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인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결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결해야 할 것이다. 성화의 본질은 참되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요 성화의 유일한 자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를 성화의 창시자이자 근원으로 보며 성령을 그 집행자로 볼 때 우리는 성화의 올바른 근거를 가지게 된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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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 Barth, Church Dogmatics IV/2 (Edinburgh: T. & T. Clark), 499-613, §66 "The Sanctification of Man" 참조. 앞으로 CD로 약어 표기함. 김광식교수는 바르트의 성화론이 루터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칼빈의 영향이 강하다고 본다. 김광식, <조직신학> III (기독교서회, 1997), 316 참조.

2) 칼 바르트신학의 성령론적 강조에 대해서, 전성용, <칼 바르트의 성령론적 세례론>(한들출판사, 1999), 48ff.

3)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1), 316.

4)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입장" in 멜빈 디어터외 저, <성화에 대한 다섯가지 견해>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1991), 77.

5) 루이스 벌코프, <신학개론> (서울: 세종문화사, 1976), 246.

6)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대한기독교서회, 1984), 135f.

7) Calvin, Institutes, III. 3. 10; Ibid., III. 17. 15;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84), 143 참조.

8) 예컨데, 대학입시에서 수석으로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 있는 반면에, 겨우 합격하는 자의 영광이 다른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9) 후크마, ibid., 84 cf.

10) Institutes, III. 7; Ibid., III. 8.

11) 칼빈, <기독교 강요> III (서울: 로고스, 1991), 194ff.

12) Ibid., 220.

13) "계약은 창조의 목표이며 창조는 계약에 이르는 길이다." CD III/1, 97.

14) 이 시대의 바르트의 신학을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편파적인 감이 있다.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을 그리스도 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CD III/3, xi 참조.

15) CD IV/2, 500.

16) Ibid., 499. 하나님의 직설법(indicative)은 하나님의 명령법(imperative)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단순한 미래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윤리적인 명령이기도 하다.

17) CD IV/2, 503.

18) CD IV/2, 507; vocatio-illuminatio-iustificatio-sanctificatio-regeneratio-conversio-unio mystica-glorificatio

19) CD IV/2, ibid.

20) Otto Weber,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대한 기독교서회, 1976), 375.

21) CD IV/2, 508.

22) Ibid., 506.

23) Ibid., 511.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화의 인식론적 측면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러나 실제로 인식론적 측면에 대한 강조는 점점 약화되고 윤리적 측면이 점점 강조된다.

24) Ibid., 513.

25) Ibid., 514.

26) Ibid.

27) Ibid., 515.

28) Ibid., 516; 찬송가 185장 참조.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그러나 찬송가 185장을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로 해석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명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29)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 바르트는 경건주의가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총의 객관주의 즉 하나님의 주권과 우선권이 손상될 우려가 있다고 본다.

30) CD IV/2, 517.

31) Ibid., 518; participatio christi라고 하는 칼빈의 공식을 바르트는 여기서 인용하고 수용하였다.

32) Ibid., 516.

33) Ibid., 529.

34) CD IV/2, 524.

35) Ibid., 525.

36) Ibid., 530.

37) Ibid., 531.

38) Ibid.

39) Ibid., 533.

40) Ibid., 537.

41) Ibid., 533.

42) Ibid., 540.

43) Ibid.

44) Ibid., 543.

45) Ibid., 544.

46) Ibid., 545.

47) Ibid., 546. 바르트는 1935년 히틀러에 대한 충성구호를 거부함으로써 본대학교의 교수직이 박탈되었다.

48) Ibid., 598.

49) Ibid., 599.

50) Ibid., 바르트는 신비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동일시하는 관념을 거부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할 것이다.

51) Ibid., 602.

52) 오토 베버,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383.

53) CD IV/2, 603.

54) 오토 베버, ibid; 왜 성도는 십자가를 져야하는가?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듯이 부활에 상응하는 성화를 위해서 십자가의 삶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연적인 죽음을 넘어가며 죽음조차도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된다.

55) CD IV/2, 607ff.

56) Ibid., 609.

57) Ibid., 611.

58) Ibid., 611f.

59) Hendrikus Berkhof,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John Knox, 1982), 29; CD IV/2, 522. "The Holy Spirit is the living Lord Jesus Christ Himself in the work of the sanctification of His particular people in the world, of His community and all its members."

60) Moltmann,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대한기독교서회, 1982), 176.

61) P. Rosato, Spirit as Lord (Edinburgh: T. & T. Clark, 1980), 115.

62) 전성용, ibid., 297ff.

63) Ibid., 169.

64) 마틴 로이드 존스, <성령세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134, 138. 개혁파 신학자 존스는 중생하는 순간 성화는 시작되었고 성화는 진보한다고 전통적인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성령세례와 성화는 직접 상관이 없으며 성령세례의 목표는 성화가 아니라 능력세례요 증언이라고 하였다(행1:8).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을 때 굉장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때 성화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그렇게 느낄 뿐이지 실제로 성화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성령세례받았을 때 성화되었다고 느끼는 것이 단지 느낌에 불과한 것인지 웨슬레안의 주장처럼 실제로 성화된 것인지 논구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에게 있어서 성령세례가 가져다 준 성화의 느낌은 단지 감정에 불과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것은 진정하고, 실제적이고, 진실한(real, actual and sincere) 것이었다고 본다.

65) 전성용, "디다케(Didache)의 구조연구 2", <신학과 선교> 제25집 (서울신학대학교, 2000년 간행예정)을 참조하라.

66) 싱클레어 퍼거슨, <성령> (한국IVP, 1998), 164.

 

전성용(서울신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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