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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고백교회와 바르멘 신학 선언

by 【고동엽】 2011.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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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교회와 바르멘 신학 선언

 칼 바르트의 교회론 중에서

 

 

1. 정치와 교회의 상황

 

1920년대에 이르러 '독일과 독일국민'이라는 개념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혐오하던 독일인들에게 하나의 고백적인 언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경제적, 정치적, 정신적인 어려움에 맞서서 이 개념을 이상화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말미암아 겪게 된 민족적인 모욕감, 정치적인 혼란, 경제 공황을 통해 발생한 6백만 명 이상의 실업자 등으로 인해 야기된 감정은 독일을 하나의 비합리적인 이상(理想)으로 끌어올렸다. '국민교회'(Volkskirche)의 이념도 은근히 혹은 분명히 이 이상과 결합되어 있었다. 교회에 속한 자들 중에서는 국민과 신앙이 분리되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를 종교적으로 이해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국민들의 운동이 점차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면서, 독일 국민, 독일 성서, 독일 전통을 모든 비독일적인 것과 대립시키려는 열망이 일어났고, 급기야는 독일 게르만적인 종교를 열광적으로 숭배하려는 경향이 일어났다. 점점 더 분명하게 독일 국민은 그 자신의 구원자로서 등장했고, 히틀러(Hitler)라고 하는 인물 속에서 그 구원의 창조자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른바 '독일 그리스도인들'(Deutsche Christen)의 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27년에 레플러(S. Leffler)와 로이트호이저(J. Leutheuser)라는 이름의 두 목사가 고백적인 신앙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루터 교회로부터 탈퇴한 후, 튀링엔(Thüringen)의 자유스러운 교회에서 봉사했다. 이 교회의 강령은 '개신교회의 자유와 관용의 안식처'였다. 그들은 학생 그룹에 소속되어 노래와 무용, 오락 등을 통해 교회를 지도하는 방법을 배웠다. 교회 활동은 처음부터 인간을 그 자연적인 특성으로부터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의 관심은 음악, 놀이 외에도 국가 문제에 관한 토론에 있었다. 그들의 그룹에는 농부, 수공업자 및 각종의 노동자들도 속해 있었다.

 

이 교회 주변에서 일어난 노동 운동은 다분히 계급 의식을 띠고 있었고, 사회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비라탈(Wiertal)에 국가사회주의 노동당(NSDAP)의 첫 지구당이 창당된 지 3년 후, 레플러, 로이트호이저 두 목사는 동일한 목적(특히 맑스주의 타도)을 가지고 이에 합류했다. 국가 사회주의 노동당과 교회의 활동 사이에 교류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동일한 사람들이 두 단체에 속해 있었고 정신적인 지도자들도 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931년에 이들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명칭 아래 교회의 대표 선거에 참여하여, 60석 중에서 5석을 확보했다. 그 이후 이 운동은 다른 교회에서도 조직되었고, 1933년 1월경에는 주(州) 지방 차원에서 30%의 찬성을 획득하였다. 그에 앞서 열렸던 집회에서 이 새로운 운동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사람들의 인기와 관심을 모은 적이 있었다. 그 성명서에서 그들은 "우리는 창조자를 통하여 독일 국민의 피와 운명의 공동체 속으로 태어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이 운동은 교회 안에서 교회정치 활동을 통해 다수의 지원자들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운동의 종교적인 핵심 사상은 레플러 목사를 통하여 표명되었다.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과제는 독일이고 그 능력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신학 체계를 비방하였고, 자연적인 국민 의식을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그것은 브룬너(E. Brunner)나 아퀴나스(T. Aquinas)가 말한 '자연신학'이 아니라, 모든 신학적인 성찰을 벗어난 광신주의와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로이트호이저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독일인은 히틀러 운동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새삼 감지할 수 있었다.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과 영원과의 유대감을 상실해 버린 수백만의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통해 다시금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믿는 법을 배웠다... 예수의 영이 독일을 통해 나타났고, 지옥의 권세를 압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에 대한 신앙이 출현했다.

 

 

또 레플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도자인 인물 속에서 독일을 역사의 주(主) 앞에 세우고 말의 예배, 레위인과 바리새인의 예배로부터 사마리아인의 거룩한 예배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위해 목사가 되려고 결심한다.

 

튀링엔서 일어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운동은 1932년에 베를린에서 동지를 얻게 되었다. 나치(Nazi) 정당의 지도자들은 교회 단체를 정복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한 후, 호쎈펠트(J. Hossenfeld) 목사의 주도 아래 신앙 운동을 일으키게 했다. 이들은 튀링엔 사람들과 제휴하여 그들이 쓰던 '독일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명칭을 채택했다. 그 후 이 운동은 여러 운동권으로부터 많은 회원들을 영입하여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조직의 가장 중요한 교회 정치적인 목표는 루터적인 특징과 아리안 종족의 통일 제국 교회를 설립하려는 데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1933년 5월에 이 운동에 저항하는 '젊은 개혁자들의 운동'(Jungreformatorische Bewegung)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니묄러(M. Niemoller), 야코비(G. Jacobi), 퀸네트(W. Kunneth), 하임(Heim)과 같은 여러 교회적, 신학적인 특징을 갖춘 인물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운동은 국가 감독직 선거의 후보자로 보델쉬빙흐(F. von Bidelschwingh)를 내세워 당선시켰으나, 몇주 후 그는 온갖 조작과 음모에 의해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대신에 히틀러가 배후에서 교회의 끄나풀로 삼기 위해 지목한 군목 뮐러(L. Muller)가 1933년 9월 27일에 열린 국가 총회에서 국가 감독에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나치당의 도움을 받아 교회 선거에서 독일 개신교회(DEK)의 실권을 장악하여 놓은 후의 일이었다.

 

1933년 11월 13일에 되어 '독일 그리스도인들' 운동의 가담자들은 베를린 체육관에 모여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그들의 정체를 여실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하였다. 이 성명서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교회가 아리안 조항*을 속히 촉진시키고... 핏줄이 다른 모든 개신교인들을 그들 자신의 교회 안으로 결집시키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도와주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교회가 독일국민의 교회로서 예배와 신앙 고백에서 다른 모든 비독일적인 교회, 특히 구약성서와 그 유대적인 보응 윤리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독일교회가 동양적으로 왜곡된 모든 요소를 청산한, 단순하고 기쁜 복음과 영웅적인 예수상을 진정한 기독교의 기초로 선포하길 요구한다. 이 기독교에서는 부끄러운 종의 영혼 대신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그 백성에 대한 의무를 절감하는 자랑스러운 인간이 등장해야 한다. 우리는 유일한 참 예배가 우리 백성들에 대한 예배라고 고백하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오직 국가사회주의 국가의 절대적인 주장에 걸맞은 진정한 국민의 교회를 세우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투쟁의 교회로서 의무감을 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 놀라운 선언을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목적이 실로 무엇인지를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선언서가 온 교회에게 던진 충격은 굉장한 반응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운동으로부터 탈퇴했고, 이 운동은 여러 갈래로 찢겨졌다.

이 즈음에 '고백 교회'(Bekennende Kirche)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1933년 7월에 예정된 '젊은 개혁자들의 운동'의 선거 소집서에서 처음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백하는 교회를 위해 싸운다. 우리의 고백이 침해받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다. 교회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증거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신앙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법을 다시 새롭게 배워야 한다.

 

1933년 9월에는 베를린에서 니묄러 목사의 호소에 따라 '목사긴급동맹'(Pfarrernotbund) 이 결성되었다. 1934년에는 7,000명 이상의 목사들이 이 조직에 가담했으며, 그 이후로 독일 전역에 고백 교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

그러자 1934년 1월 4일에 국가 감독의 훈령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교회가 예배를 교회정치의 토론 목적을 위해 악용하지 말 것, 또 교회당이나 교회의 장소를 교회정치 집회의 통보 수단으로 허용하거나 이용하지 말 것, 그리고 문서, 비라, 회람을 통해 교회의 체제와 그 조치를 공공연히 혹은 공격하지 말 것을 명시했다. '목사긴급동맹'은 이에 맞서서 격렬한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자 연이어 파면, 교육, 침묵강요 등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가감독은 교회에 대한 간섭을 더 강화하였고, 합병시도를 계속 추구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고백총회를 형성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니뮐러 목사의 주도 아래 코흐(P. Koch)는 1934년 5월 29일-31일 간에 바르멘(Barmen)에서 열릴 고백교회의 총회를 소집했다. 25개 주(州) 교회와 지역교회로부터 139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신학의 문제점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법적, 영적인 문제에 합의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로 종교개혁 이래 처음으로 독일 개신교인들은 '성서와 고백'이라고 하는 공동유산의 토대 위에 집결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입에 의탁하셨다고 확신한 신앙 고백서를 온 세계 앞에서 천명하였다. '바르멘 신학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는 하나님의 기적과 같이 나타났고, 교회 고백의 대헌장(大憲章)로서 기념비적인 가치를 갖게 되었다.

 

 

 

 

2. 바르멘 신학선언

 

<제1항>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이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요 10:1,9)

 

성서에서 우리에게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하며, 사나 죽으나 신뢰하고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그 선포의 원천으로서 이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 외에, 그리고 그것과 나란히 다른 사건들, 권세들, 형상들 및 진리들도 하나님의 계시로서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제2항>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판결인 것처럼, 또한 그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우리의 온 생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주장이기도 하다.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 얽매인 불신앙적인 예속으로부터 기쁘게 해방되어, 그분의 피조물에게 자유스럽게, 감사하면서 봉사하게 된다.

우리는 마치 우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주(州)들에게 속하는 영역, 그분을 통한 칭의와 성화가 필요 없는 영역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제3항>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상합하여..."(엡 4:15-16)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님으로서 현존하면서 행동하시는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은총을 입은 죄인들의 교회로서 죄많은 세상의 한 복판에서 그 신앙과 순종으로써, 그 사신(使信)과 직제로써 증거해야 할 것은, 자신은 오직 그분의 소유이며,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오직 그분의 위로와 교훈으로 살고 있고, 또 살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그 사신과 직제의 형태를 자신의 기호에, 혹은 때때로 지배하는 세계관적, 정치적인 확신들의 변화에 내맡겨도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제4항>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으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 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 20:25-26).

 

교회 안의 다양한 직책들은 어떤 직책들이 다른 직책들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 공동체에 위탁되고 명령된 봉사를 수행하기 위한 기초이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이 봉사를 떠나서 통치권을 부여받은 특별한 영도자들을 허용하거나 허용하게끔 할 수 있고 또 해도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제5항>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7)

 

성서는 우리에게 말한다. 국가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다음과 같은 과제, 즉 교회도 속해 있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서 인간의 통찰과 능력의 분량에 따라 권력으로써 위협하고 권력을 행사하면서 정의와 평화를 보호할 과제를 가진다. 교회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경외하면서 이러한 그분의 섭리의 은혜를 인정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계명과 그분의 의, 그리고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들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유지하시는 수단인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고 이에 복종한다.

 

우리는 마치 국가가 그 특별한 임무를 넘어서 인간 생활의 유일하고 전적인 조직이 되고, 그래서 교회의 사명까지 실현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그 특별한 임무를 넘어서 국가적인 형태, 국가의 과제와 국가의 위엄을 취하고, 또 그리하여 자신이 유일한 국가의 기관이 되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제6항>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교회의 자유의 근거이기도 한 교회의 임무는 그리스도 대신에, 그리고 설교와 성례전을 통하여 그분의 말씀과 사역에 봉사하면서,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인간을 스스로 높이면서, 주님의 말씀과 사역을 인간들이 임의로 선택한 어떤 소원, 목적 및 계획에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3. 바르트의 투쟁

 

국가사회주의가 대두하고 독일교회가 이에 호응하려는 즈음, 스위스 출신으로서 독일의 본 (Bonn) 대학에서 강의하던 바르트는 가급적 정치 활동을 멀리하면서, 오직 신학 연구에만 몰두하고자 했다. 그러나 무능하고 술에 취한 자가 운전하는 위험한 차 속에 앉았을 때와 같이 위급한 독일의 정치적 상황 앞에서 바르트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해야 할 필요성을 점점 더 절감하기 시작했다. 1931년 5월에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가입했다. 그에게서 정당 가입은 사회주의 이상과 세계관에 대한 신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실천적인 결단이었다. 그가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한 것은, 그것이 노동자 계급의 정당, 민주주의 정당, 비군국주의적인 정당, 독일 민족을 긍정하는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스위스 사람이었지만, 독일 속의 스위스 사람이라는 자각 속에서 독일에 대한 그의 사랑과 소속감을 잊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동료 덴(G. Dehn)이 전쟁에 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할레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다가 습격을 받고 퇴진을 강요당했을 때, 바르트는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는 파시즘을 하나의 종교로 규정하고서, 기독교가 거기에 적응하려는 유혹에 빠져드는 위험에 처해 있음을 경고하기 시작했다.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고 독일 백성이 우상을 경배하기 시작하자, 바르트의 태도는 현저히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시간들 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라는 잡지의 협력자인 고가르텐(F. Gogarten)이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운동에 가담하자, 바르트는 그를 나치의 지성적인 선동자로 간주하고, 그로부터 공개적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는 학생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수업에 충실하도록 지도한 반면, 교회로 하여금 지배적인 세계관에 대항하여 복음에 따라 자신을 보존하도록 돕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했다. 1933년에 두 차례 행한 강연 '신학적 공리로서의 제1계명'에서 바르트는 계시의 개념을 인간의 실존, 질서, 국가, 민족 등과 같은 어휘들과 연관시키려는 모든 신학의 우상숭배적인 위험을 지적했으며, 모든 종류의 자연신학으로부터 결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독일의 교회-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바르트의 최초의 공개적인 태도 표명은 1933년 7월에 출판된 소책자 '오늘의 신학적 실존!'(Theologische Existenz heute!)에서 나타났다. 이 책은 히틀러에게도 증정되었으며, 압수되기까지 3.700 여부가 인쇄되었다. 여기서 바르트는 "교회가 신학적인 실존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정치적인 판단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다가 교회가 자신의 본질을 망각했다. 하지만 성서가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신학적인 실존이 있고, 교회개혁이 가능하다"고 외쳤다. 그 밖에도 그는 유대인 문제, 나치당의 독재적인 주장, 야당 탄압 등을 언급하면서, 나치에 도전했다. 1933년 10월에 행한 강연 '결단으로서의 개혁'(Reformation als Entscheidung)에서도 바르트는 "오늘날 교회에서 지배하는 운동은 종교개혁에 대한 불충실의 최종적 형태임"을 지적하고, 이에 맞선 저항을 호소했다.

 

바르트는 1934년 5월 31일에 채택된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하는 작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브라이트(T. Breit)와 아스무쎈(H. Asmussen)도 기초 위원으로 위촉되어 문안 작성에 참여했다. 그리고 사쎄(Sasse)와 알트하우스(P. Althaus)의 듯대로 '성례전'이라는 낱말도 문안에 추가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내용으로 판단하면, 이 선언서는 실제로 바르트 자신의 문장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전형적으로 칼빈주의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진 기초안을 총회는 채택하였다.

 

그 후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거부한 이유로 바르트는 교수직에서 해직을 당하였고, 1935년 2월에 학생들에게 이별사를 남기고, 강단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충고는 " 주석, 주석 그리고 또 한번 주석! ...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 성서를 굳게 붙들라"였다고 한다. 같은 해에 그는 홀랜드 우트레히트(Utrecht) 대학에서 16회에 걸친 강연 'Credo'(사도신경 해설)를 행하였다. 여기서 그는 신앙을 하나님의 현실의 인정, 결단 및 고백으로 정의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창조 신앙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1935년 5월에 바르트는 독일을 떠나 스위스로 되돌아갔으며, 바젤(Basel) 대학의 교수가 되어 온 세계로부터 몰려오는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5년에 독일로 다시 여행할 수 있었던 그 때까지 그는 10여년 동안 뜨거운 애정과 비판적 동정을 가지고 독일과 함께 호흡하며 살았다. 스위스에 있으면서도 그는 매우 적극적으로 말과 문서로써 정치적인 투쟁에 참여했으며, 방송과 편지 등을 통하여 독일인을 비판하고 격려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한 스위스인의 목소리'(Eine Schweizer Stimme)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주요 참고문헌들

 

1. K. Barth, How my mind has changed.

2. K. Barth, Texte zur Barmer Theologischen Erklärung, Hrsg. von M. Rohkrämer, Zürich 1984.

3. K. Barth, Theologische Existenz heute! München 1984.

4.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5. A. Burgsmüller/R. Weth(Hrsg.), Die 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Einführung und Dokumentation), Neukirchen-Vluyn 1983.

6. D. Cornu, Karl Barth und die Politik, Wuppertal 1969.

7. K. Kupisch, Karl Barth in Selbstzeugnissen und Bilddokumentation.

8. R. Weth, "Barmen" als Herausforderung der Kirche, ThExh. Nr. 220, München 1984.

9. E. Wolf, Barmen, Kirche zwischen Versuchung und Gande, München 1957.

10. E. Wolf, Karl Barth zum Kirchenkampf, München 1956.

11. M, Schoch, Karl Barth: Theologie in Aktion, Frauenfeld/Stuttgart 1967.

 

이신건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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