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마 바른이해
교리 존재이유의 타당성은 성경을 아는데 있어서 매우위치를 찾이 한다. 교리를 타당성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생수를 제공하고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교리의 덫에 걸려 무덤이 되고야 만다는점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도 처음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방어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세상 학문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도움 요청 이해 했다.그래서 순교자 저스틴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 이 전에 이미 소크라테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계시되었고 또 알렉산더의 클레멘트는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에게는 율법을 주셨고, 헬라인에게는 철학을 주셨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이나 초대교회의 실천은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만일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면 ‘예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니 말이다.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는 하나님 비슷(homoiousios)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이에 반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는 하나님과 완전한 동일본질(homoousios)이시기에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orthodox)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이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님이 둘인가? 하나님이 둘이라고 하면 다신론(多神論)이 되고, 하나님이 하나라고 한다면 예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예수라는 말이 된다. 후자가 맞다면 십자가에 달린 분은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성부수난설(Patripassionism)이 된다. 그러나 이 둘 다 성서와 일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와 하나님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그럼 대체 뭐냐?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여기에 성령이 더해져서 삼위일체론(Trinity)이 만들어지게 된다.
만일 예수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본질이라면, 마리아가 낳은 아기는 인간인가?, 하나님인가?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므로 마리아가 낳은 자는 하나님이라야 한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옳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자이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시다. 그래서 마리아도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이다.!
칼빈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가? 만일 있다면 전적 타락이 부정되고, 가능성이 없다면 자연히 하나님의 손에 달리게 된다. 만일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달리게 된다면 전적 타락이 부인된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게 된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선물주실 지를 미리 아셨는가? 모른다고 하면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셔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 선택은 아담의 타락 전인가, 후인가? 이 문제를 두고 칼빈주의 에서는 타락 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이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도 전에 미리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것은 타락과 구원받지 못하는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넘어가는 혐의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고 타락 후에 선택하셨다면 역시 또 많은 논리적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죄 없이 무죄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무죄의 상태를 유지하고, 죄 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 없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도덕적 교사라고 했다. 어거스틴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전적 타락설’의 시조였다. 때문에 어거스틴의 도식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가령 가룟 유다는 스스로 예수를 팔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팔게 하셨는가? 또 바로는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는가? 중세 교회는 처음에는 어거스틴주의에서 점차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로, 그리고 나중에는 펠라기우스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경향에 종교개혁자들은 “어게인 어거스틴!”을 외치며 다시금 “오직 은총”(Sola Gratia)의 교리를 다시 붙들게 된 것이다.
에베소서 2장에 따르면 “그 은혜을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엡2:8)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은혜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겠지만, 믿음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믿음을 죄인이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순간 전적 타락설은 부정되고 만다.
타락한 죄인이라도 최소한 구원 얻을 믿음을 가질 수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야 한다. 하지만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순전히 하나님 의지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얼마나 많은 본문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했으며, 또 예수는 얼마나 자주 “믿으라”고 하셨는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뭐하려 인간에게 "믿으라"고 하셨느냐 하는것이다. 또 만일 믿음마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 존재라기 보다는 식물인간에 불과한 것이 아니껬는가?
칼빈주의는 신앙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하고, 알미니우스주의는 신앙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에 인간이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신인협동설(synergism), 혹은 세미 펠라기우스라고 정죄했다. 이에 반해 알미니우스주의는 칼빈주의가 하나님을 아담의 타락과 인간의 죄, 죄인들의 불신앙을 조장한 악신으로 만든다며 비판했다.
성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100% 선한 열매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루터의 지론이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영세, 성체, 견진, 고해, 병자, 신품, 혼배 등 일곱 가지 성사를 정성스럽게 받으면 영혼의 질병을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이 뿐 아니라 마리아와 성인 숭배, 성화상 공경, 자학적 참회, 갖가지 금식과 기도일, 십자군 전쟁 참가 등 갖가지 교회가 만들어 낸 기이한 신앙의 관습들과 유전들과 선행까지 지키도록 했지만 그러나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언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듣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야고보와 바울의 주장은 따지고 보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 2장 24절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분명 야고보의 믿음관이 바울의 믿음관과 상당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음을 무시하기 어렵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루터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 앞에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심판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그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따라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준엄한 의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일 뿐인 인간을 향해 주권적으로 ‘무죄!’라고 선언해 주시는 의라고 ‘깨달아진 것’이다.
개신교인들이 한 번의 체험만으로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껴 분명히 회심 체험은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삶의 변화’가 충분히 일어나지 않는고 생각이 돼 한 번의 체험으로 안 되고 또 한 번의 ‘진짜’ 강렬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를 성령 세례라고도 부르는데 결국 이것이 20세기 오순절 운동을 일으키는 씨앗이 된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수뿐이다. 예수의 몸, 삶, 말이야 말로 끊임없이 교회와 신학을 갱신시키는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몸, 삶, 말로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반성하고 개혁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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