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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의 목사와 장로

by 【고동엽】 2010. 4. 10.
 

                           교회에서의 목사와 장로의 직임

 

 

 

그리스도가 자기 피를 지불하시고 교회를 사셨다. 그래서 교회가 그의 소유이기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성령을 통해 오시고 성령이 가져 오신다.  이렇게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채워지고 성령으로 지배받으니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고 모든 권세의 원천이시다 .  그런 생명의 원천의 권위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이런 권위로 교회를 설립하시고, 직원(목사, 장로, 집사 등)들을 세우시고 자기의 권위로 옷을 입히신다. 그런데 그 권위는 신령한 권위이고 말씀의 권위이지 육체적인 세상적인 권위가 아니다.  말씀의 권위이고 봉사자의 권위인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그리스도가 일곱 촛대 사이에 계시다는것은 그리스도가 지금도 교회에 현존해 계시고 교회를 말씀으로 이끄신다.  그런데 직접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봉사자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교회 직원(목사, 장로, 집사 등)의 권위는 봉사하는 권위이다.  세상적인 권세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다스린다.   

말씀을 선포할 때 말씀의 봉사자로서의 권위는 사도와 선지자로서의 권위를 계승하지만 그 말씀의 권위 때문에 기타 다른 모든 것까지 다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교회의 설립자가 자기를 희생해서 교회를 세웠고 은혜로 지금도 다스리신다.  

그러니 교회 봉사는 희생하고 남을 봉사하는 일이다. 말씀의 봉사도 교인들의 영혼을 살려내기 위한 봉사이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시민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목사가 말씀에 충실하면 그 신령한 지혜 때문에 기타 다른 일들도 지도할 수 있고 조언할 수 있다. 

 "장로" 라는 이 말은 때로는 신자들의 단체에서 연장자를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장로제도는 구약 유대교의 장로제도 유산이 아니고, 종교개혁의 산물이다. 칼빈은 장로를 세울 때에 목사가 말씀을 선포한 대로 성도들의 바른  삶을 살피기 위해 장로들을 세웠다.  장로는 목사의 조력자로서 심방은 장로의 몫이다. 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하면서 구교의 감독제도를 버렸다.    

장로는 한 개인의 종신직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개혁정신이라면, 항존직으로 되어 있는 장로의 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만이 신령한 유익을 위해서  장로의 빛바램이 아닌 본래의 장로의 직임을 수행할 수 있다. 그래야 장로와 목사간의 분란도 없앨수 있다. 장로는 목사의 보조자이다.

장로는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게 하는 책임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에서는 사장이 더 높겠지만 교회에서는 신앙의 덕이 있고 영적 지도력이 있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해야 한다.  

사회에서 부요한 자가 신앙에서도 부요하란 법이 없다.  각 영역에 영역주권이 있는 것이다. 장로는 치리장로와 강도장로가 있는데 치리장로는 장로를 말하며 강도장로는 목사를 가리킨다.  장로와 감독 명칭은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장로는 주로 연령을 강조하고 감독은 사역면을 강조한다.

 장로가 교인을 심방해서 일상적인 이야기 즉 가정문제,자녀문제,재정문제,직장형편을 이야기하고  기도해야 한다.   장로가 심방후 특별한 가정이 있을 경우엔 그때엔 목사에게 보고해서 최후 목사가 심방토록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이라면 회계담당 집사에게 알려서 돕도록 해야한다. 

그래서 장로는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 예배 참석인원수 15000 명 정도 되는데 이 상태에선 장로는 1000명정도, 그리고 집사는 한 20명 정도만 선출해서 실질적인 업무를 관장해 나가야 한다.그래서 교회마다 장로가 집사보다 더 많아야 한다.   집사는 교인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몇명으로 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질적으로 교회의 회계로서 돈 관리와 그리고 구제사업만 담당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의중이 뜨중이 거의 모두를 집사 세워서 모두가 집사 천지이다. 옛날에 종로에 나가서 사장님하고 부르면 거의가 뒤를 쳐다보았다. 요즈음 교회에서 집사님 하고 부르면 교인전체 모두가 바라다 보는 처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그의 영으로 다스리시는데 말씀을 수단(전에 애기했던 cum verbum)으로 하여 다스리신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큰 소리로 기도를 많이 하고 손뼉치고 해야 하는 줄로 알지만 그것은 감정의 자기 도취에 빠지는 것이지 말씀이 가져오는 생명과 말씀이 가져오는 기쁨이 아니다.  자기 도취, 자기 스트레스 해소, 자력에 의한 카타르시스,정화 작업일 뿐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역사하신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면 성령께서 그 회중에 역사하신다.  말씀이 바로 성령이 역사하는 방법이다. 

목사가 하나님 말씀으로 다스리고 말씀을 선포할 때만이 그리스도의 권위를 옷입는다.선포된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었는지 살피는 그런 식별 능력이 교인에게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개신교회의 모습이다.  감히 목사가 말씀하시는데 왜 따지느냐고 말해서는 안된다.  

성도는 다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목사의 사역의 소명을 위해서 말씀의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평신도들도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말씀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목사 자기만이 옳은 줄로 생각하면 큰 실수이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는곳에는 항상  성령께서 힘있게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의 표준이어야지 내 의견과 내 판단이 가끔 절대적인 것으로 빠져 버리면 큰 일이다.    교회에는 자유가 있고, 장로 정치가 대의 정치가 되고 회중 정치가 되어야 한다.  

장로 자체에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견해를 표명하고 그 타당한 견해를 좇아서 결정하는 것이다.  장로정치는 장로가 마음대로 하는 그런 정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로 시무 제도를 도입해서,  3~4년  지나면 자동적으로 장로직에서 물러나 일반 성도로 갈아 타야 한다. 마치 화란의 자유대학을 세운 아브라함 카이퍼처럼 말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런데 의회에서 목사는 국회의원이 될 수 없다고 하니까 목사 사표냈다.  사표내면 목사가 아니다. 장로 직분 수행했다.  4년정도 장로직임 활동하고 또 끝났다.카이퍼가 목사로서 당수가 되고 수상까지 된 것이 아니다.  평신도로 되돌아 와서 칼빈주의적 세계 신학 석학들이 모이는 자유대학을 세우고 그곳에서 조직신학을 20년간 가르쳤다. 

그러다가 나중에 화란에 수상까지 되다보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헤르만 바빙크를 데려와서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게 하고 그후 안심하고 수상직으로 갔던 것이다.  장로의 임기는 헌법적으로 70세(합동)까지 되어 있지만, 만일에 40세에 장로로 선출 됐으면 3~4년 장로직하고 다른이에게 인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장로의 권위도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교회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장로뿐 아니라 집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는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필요한 권세를 교회에게 주셨다.  교회의 직원은 교회에 의해서 선출되지만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직원들에게 베푸신 이 추가적 권세는 신령한 권세이지 세상의 계급적인 그런 권세가 아니다.  권면하고 위로하고 신앙으로 성장하게 하는 그런 권위이다.  

말씀전하는 장로는 가르치는 권위이고 말씀을 바르게 해명하는 권위이지 목을 뻣뻣하게 한다든가 게시판등 댓글 달때 상대방 상처 입는 감정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들쑥 날쑥 예의없이 거친말등을 하라는 장로가 아니다는 것이다. 치리 장로는 약한 자를 권면하고 위로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 봉사하는 권위이지 당회를 열어 제명하고 말썽부리고 시비하고, 돌아 다니면서 파당짓는일이나 일반 성도들부터 존경 인사나 받는 또 목사에게 절대 맹종하는 허수아비 바지 저고리 장로 그런 권위가 아니다. 

교회는 신령한 성격이어서 신령한 권세와 신령한 봉사임에도 오늘의 일부교회 목사는 칼의 권세를 쥘려고 한다.  로마교황만 그런게 아니고 목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천명 이상의 교회만 되면 당회장의 권한을 장관도 따라오지 못한다.  15000 여명 이상 모이는 교회 목사는 황제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 대리자이다.그리스도의 종은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평신도 위의 특권층이  아니라 봉사자이다.  그래서 목사는 말씀을 선포하는 면에서 교인과 다르지만 목사라고 해서 기타 다른 면까지 교인과 다르거나 교인보다 능하지는 않다. 단지 목사가 말씀에 충실하면 그 신령한 지혜 때문에 다른 일을 지도할 수 있고 조언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있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인간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신실하게 신앙으로 감화와 평안을 주어야 한다.  목사가  설교하면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안이 생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말씀과 함께 친히 오시기 때문이다.  기적같은 것이 생겨야 하나님을 만나는 줄로 생각하는데 복음을 선포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그리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며 기쁨과 평안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 연구하고 바르게 선포해야 한다. 

교회 예배는 어떤 화려한 쑈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것이다.칼빈은 초대 교회가 가졌던 내용을 되살리는 예배를 회복하기를 원했으며, 은혜의 방편이 말씀과 성례전인 것을 강조하였다.그는 예배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 회복에 그의 생명을 걸었다.오늘의 교회에서 예배의 대상은 삼위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예배의 무게 중심이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에게보다는 예배를 드리는 자 쪽으로 잘못 이동해 와 있는 듯하다. 

칼빈은 그리스도 교회의 성도가 일요일을 지키는 까닭은 "우리는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의식으로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거기 영적 신비가 상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교회 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대책으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또한 그는 그런데 예배를 드림으로 무엇인가 소위 "복"을 받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라 했고, 의에 대한 자발적이요 기꺼운 사랑으로 하나님과 동여매려는 뜻에서 우리의 구원의 바탕이 되는 달콤한 은혜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신다.  그러나 불렀다고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른 그들을 새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으신다.  그리고 이 씻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결합시킨다.  

생명적 연결을 시키는데 그런 자들의 모임이 곧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이다.  그러니까 어느 면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가 일치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을 고리로 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이 별도의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려고 애쓰는데 성령의 능력이 무엇인가?  방언, 치병(신유), 투시, 예언, 입신등인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성령이 가져온 은혜는 다른 은혜가 아니라 다 그리스도에게 있는 은혜이다.  다른 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게로 가져온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자기와 교회를 일치시킨다.  다른 생명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동일한 생명으로 우리가 살고 있다.  
  
교회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거룩하며, 그 생명의 연결 때문에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신비한 연합, 생명의 연합 때문에 자기와 교회를 하나로 일치시킨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이 생명적 관계 때문에 그리스도를 머리 라고 하고 교회를 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체와 머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가 된 것이다.   

이 신비한 연합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칼빈인데 그가 이 신비한 연합에 대해 보통으로 감격해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이 교회의 통일성을 제일 많이 강조했는데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신비한 연합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칼빈의 마음을 감동으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또 지체간의 연결 때문에 상호 교제가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지체간의 상호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이 연합을 전제하지 않고 교회가 개별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유기체라는 의식이 없고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는 것이다.  

교회는 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고,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심기워져 있고,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교회의 분열은 불가하다.  왜냐하면 교회를 나눔은 곧 그리스도를 나눔이 되기 때문이다. 

개신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교회의 조직이 아니라 성도들의 내면적 영적 교통에서 찾는다.  교회의 제일 근본되는 것은 거룩이다.  그러니 성도들의 거룩한 교제가 교회의 본질이다.  외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교회의 특성이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내적인 영적 교통에 속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으므로 교회가 되고 그러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가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말은 키프리아누스가 한 말인데 칼빈이 반복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여서 모든 신자들이 다 교회에 와서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화된 사람이라도 설교가 필요없는 사람은 없다고 칼빈은 말했다. 

교회가 생명을 갖고 거룩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 연합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리고 연합이 강화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이다.  말씀으로 성도들의 내적인 영적 교통이 이루어진다.  말씀과 함께 성령께서 역사하신다(일전에 말했던 CUM VERBUM).  그렇지 않으면 참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씀의 선포와 교제가 약화되면 조직을 강화한다.  성도들의 교제가 없어지면 조직화 추세가 강해진다.  그리고 은혜가 감소되고 영적 역사가 후퇴한다. 성도들의 교제가 잘 되려면 항상 말씀이 있어야 한다.   말씀이 없어지면 곧 세속화이다.  교회는 말씀을 떠나서 존속하지 못한다. 말씀이 없어지면 교회가 곧 사람들의 조직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럴 때 교회가 기업이 된다.  말씀 없이 모이고 말씀 없이 흩어지면 그것은 완전히 세상단체이며 사교 단체이다.  그냥 모일 수는 없으니까 의식만 남는다. 

말씀이 없으면 성령만 강조하고 결국 체험으로 되돌아간다.   자기의 체험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개신교의 생명은 말씀의 선포에 있다.  교회가 거룩하고 바른 교회가 될려면 말씀을 바로 선포해야 한다, 그럴려면 목사가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데만 바빠야 한다.  

설교를 너무 여러번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설교하는 데 두려움과 긴장이 있어야 한다.  입만 벌리면 잘 나오니까 기도, 성경 읽기, 명상, 참고 독서도 하지 않고 적당히 하면 설교가 세속화되고 은혜가 없게 된다.  많은 교회들이 우리 목사님 제발 그만 돌아다니고 설교준비하고, 기도하고 공부했으면 하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재정은 집사에게 맡겨야 한다.  헌금 관리는 사도들도 하지 않았다.  사도들도 구제와 돈 관리를 집사에게 맡겼다.  목사는 주는 사례만 받고 만족해야 한다. 목사 봉급도 항목을 여러개 구분해서 많이 받을 것이 아니라 단일화 시켜서, 목사 생활수준은 교인들의 중간에서 약간 웃도는 정도가 바람직하다. 바울이 평균케 함이라 한 것 같이 말이다. 교회 성도수에 따라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영국교회같이 월200만원 정도가 가장 바람직하다. 이러한 삶이 바로 청교도적인 삶이라 하겠다.

그리고 목사는 사도들처럼 말씀 연구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해야 한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고 핑계하여 억지로 꾸민 거룩은 거룩이 아니다.  죄의 옛사람을 죽이지 않고 새사람이 사는 법이 없다.  그 일이 일어나도록 설교가 밀어야 하는 것이다.  거룩하게 되는 비법이 성령 받아 방언을 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선포로 된다.  말씀 선포도 막연한 소리, 뜬 구름을 잡는 소리가 아니라 참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면 사람들이 죄와 투쟁한다. 그러니 목회자는 설교에 전부를 걸어야 한다. 

교회가 거룩하기 위해서는 권징을 해야 한다.  먼저 윤리적인 권징을 시행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면 교리적인 권징도 안되기 때문이다.  거룩의 특징이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면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새사람이 되었으니 새법으로 살아야 한다. 

 별짓 다하면서 겉으로만 거룩, 거룩하면 안된다. 목사의 제 1 계명은 참을 말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60년~70년대 목사가 미국 가려고 비자 신청하면 아예 나오질 않았다. 한국의 목사들은 거짓말 쟁이라고 미 대사관 사람들에게 못이 밖혔기 때문이다. 교육차, 혹은 무슨 집회차 간다고 거짓말 해놓고 그냥 거기서 눌러 않기 때문이란다. 요즈음도 가짜 박사 학위 제일 많은곳이 목사들이란다. 또 그 가짜 박사 학위 가지고 예배때마다 박사학위 후드를 두르고 있는 것은 더욱 가관이다. 그리스도인은 정직이 생명이다.   

계시록의 천상 예배를 보면 찬송의 두 주제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이고, 둘째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이다.  우리는 구속의 은혜만을 찬양하는데 하나님의 창조도 찬양해야 한다.  창조가 있으니까 구속이 있다.  창조를 소홀히 하고 구속만을 강조하면 새창조가 되어 새로운 창조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새 창조가 아니라 처음 창조의 회복이다.  그러니 창조가 늘 전제되어 있다.  우리의 예배는 천상 예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을 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의 본분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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