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계략에 놀아나는 목사들
다윗이 아비새에게 말하기를 "그를 죽이지 마라. 누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자에게 손을 대고도 무죄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또 말했다."여호와께서 살아계시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을날이 이르러 죽든지 전쟁에 나가 죽을 것이다.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자에게 내 손을 대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셨으므로 이제 우리가 그의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더나가자" 다윗이 사울의 머리 맡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갔지만 이를 보거나 눈치채거나 깨는 사람이 없었으니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삼상26장9절~12절)"
이 구절은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는 쫒는 사울 왕에 대해서 아주 관대하게 처신하는 장면이다.관대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결코 해할 수 없다는 다윗의 신앙고백으로 유명한 구절이기도 하다. 자신 역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의 집요한 기도였지만 항상 가까스로 피해 도망 다니는 경황 중에도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해하지 않으려는 놀라운 신앙적 행동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윗의 아름다운 신앙적 행동은 오늘날 많은 목사들에게 아주 귀중한 재료가 된다. 그래서 목사들은 이구절을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그대로 주입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는 방패막이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감히 기름 부음을 받은 주의 종 목사에게 해가 될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엄포적 족쇄로 이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윗이 과연 진정으로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그렇게 이야기 했을까 하는것이다. 어떤 말이든지 그 말을 이해 하려면 그 말을 한 동기가 무었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다윗이 사울에 대해 그렇게 관대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을 이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하 1:14-16" 에서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네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병사들 중 하나를 불러 말하기를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 병사가 치니 그가 곧 죽으니라.다윗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 피가 네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이는 네 입으로 증언 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였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하였다.
전쟁에 지고 중상을 입은 사울을 사울 왕의 명령에 따라 왕의 안락사를 집행했다고 보고하는 자를 다윗이 처형하는 장면이다. 처형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가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고 사울의 명령에 따라서 그렇게 했을뿐이다라고 했다. 전쟁에 패하고 중상을 입은 사울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고 적에게 피살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며 내린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그가 사울 왕을 죽인 행위는 어찌 보면 사울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절망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사울 왕의 입장에서는 적에게 잡혀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명예로운 죽음이기도 했다. 게다가 사울 왕은 이미 스스로 죽기로 다짐하고 자기 칼을 취해 스스로 그 칼 위에 엎드러진 후였다. 어찌 보면 사울 왕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기도 했다.
"삼하 4:8-12" 에서도 그들이 이스보셋의 머리를 헤브론의 다윗에게로 가져가 왕에게 말하기를 "보십시오, 왕의 생명을 노리던 왕의 원수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입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내 주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습니다."라고 고하니,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했다. "모든 환란 가운데서 내 생명을 구속하신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니, 전에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보십시오 사울이 죽었습니다.' 말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으나, 내가 그를 붙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으로 그의 소식에 대한 보응을 삼았다.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에서 죽였는데, 내가 어찌 그의 피를 너희의 손에서 찾지 않겠으며, 너희를 땅에서 없애 버리지 않겠느냐?" 다윗이 병사들에게 명하여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손과 발을 잘라 헤브론 연못가에 매달았으며,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 있는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했더라.
아직까지도 사울 가의 형세는 사울의 업적으로 살아 있었다. 사울이 죽은 후에도 기존의 사울 가와 다윗 가의 정쟁속에서도 사울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때까지도 다윗은 사울 가에게 관대하게 해야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울 가의 위세는 기울어지고 다윗 가의 기세가 점점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휘하에 있던 두 군장이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다윗에게 투항해온다. 그런데 다윗은 이 두 군장을 처형한다. 다윗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사울의 죽음이 내게 좋은 소식이 아니었듯이 이스보셋의 죽음도 자신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적 이스보셋을 죽이고 투항해온 자들에게까지 불의의 살인방조했다는 이유로 죄를 물어 죽였다. 주인을 한번 배신한 자는 언제든 또 배신할 것이기에 미리 선수를 친 것일수도 있다.
그리고 삼하 19:21-23" 에서도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저주하였으므로 시므이는 이 일로 죽어야 마땅치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다윗이 말하기를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오늘 나의 대적이 되려고 하느냐 ? 오늘 같은날 어떻게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일수 있겠느냐 ? 내가 지금 이스라엘 왕임을 어찌 모르느냐? 하고, 시므이에게 너는 죽지 아니할것이다." 하고 말하며 그에게 맹세하였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겨갈 때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사울의 일가 친족)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비새를 꾸짖는 장면이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한 자에 대해 마땅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아비새의 간언에 분노하며, 오히려 자신을 저주했던 시므이를 두둔하고 그를 결코 죽이지 않으리라 맹세하는 장면이다.
예전에 사울을 죽이자고 간언한 부하도 바로 아비새였다. 그때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해하여서는 안 된다며 아비새의 간언을 물리쳤다. 아마도 아비새는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이번에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저주한 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간언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도리어 그런 말을 하는 아비새에게 분노를 드러낸다.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부터 자신을 수행해온 충복에게 말이다.
위 세 사건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윗은 사울의 집안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이중적 행동에 애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랬을까? 다윗이 비록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거품과 비슷하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받았던 그 환호와 열광이 거품이었듯 말이다. 유대 권력자들이 예수를 결박하고 골고다로 끌고 가자 그 환호하던 백성들은 어디 온데간데도 없이 보이질 않았다. 대제사장에게 매수되어 예수의 죽음을 외치는 무리들의 목소리만이 사방에서 소리쳤다. 정작 권력 싸움이 벌어지면 백성들은 눈치를 보며 힘이 센 자쪽으로 붙게 마련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가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설령 다윗이 사울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다윗에게는 득이 될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왕을 죽인 반역자라는 죄목이 더할 뿐이다. 사울이 다윗을 일방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보고, 좀 너무한다 싶어 다윗에 동정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감히 왕을 죽여'라며 돌아서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을 죽일 수 없다는 말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나름대로 정당화하는 정치적 의미가 담긴 말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결코 사울을 죽일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약자 다윗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던 것이다. '사울을 죽였다간 내가 도리어 죽고 말거야'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훨씬 세련된 계산이 함축되어 있는 말인 것이다. 도덕적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호소한다. 제가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안 죽였으니 나를 좀 좋게 봐주세요 하고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사울에 대한 충성 서약이었다. 사울의 죽음을 알려온 자를 죽인 이유도 실은 자신이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사울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향한 일종의 화해 제스처였던 것이다.
이런 다윗의 행태는 시므이에 대한 대응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상황에서, 자신을 저주한 시므이에 대해서도 결코 처벌하지 않겠다던 다윗이 늙어 죽을 날을 앞둔 시점에 이르러서는(물론 시므이도 늙은 노인이 되었고)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처형할 것을 명한다(왕상 2:8-9). 이제 이스라엘은 다윗가에 의해 완전히 점령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어 대대로 이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사울가의 세력을 단도리할 필요가 있다는 계산인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저주하며 박대했던 원한도 남아 있으니 한풀이도 해야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에 감히 해꼬지해서는 안 되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감히 해꼬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함축된 참된 의미인 것이다.'사람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에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 죄와 비판과 벌에 대한 면죄부일 수는 절대 있을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목사들은 자신들만이 스스로 자칭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았다는 억지 해석도 어불성설일 뿐 아니라 또 기름부음받은 자신 목사들을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다윗의 정치적 계략이라는 술수는 알지 못하고 그것이 옳은양 거기에 빗대어 뜯어 맞추는 행위는 어리석기 그지없다.목사들은 제발 특권의식을 갖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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