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원리 바른이해
이 세계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사역)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이며, 기원을 정확히 밝히는 것이다. 이 창조는 하나님의 필연적 사역이 아니며, 하나님과 세계가 일치되는 것(유출설)도 아니다. 창조의 경륜은 영원하여도, 창조는 영원하지 않다. 창조는 지혜와 권능이 무한하고 그의 경륜이 영원하심으로 현 상태(광활한 우주와 영계)로 창조하신 것이다.
창조는 6일 정비 이전 첫날에 처음 물질의 출현 순간에 모든 물질과 우주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첫 창조 직후로 지구를 중심으로 정비하셨고, 태양계도 조성하셨다. 즉 우주의 전체적인 구조가 첫째날에 완성된 것이다. 시간도 창조되었다. 시간이 피조물의 존재 방식이 되어 시간에 종속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의 진행 또한 시간의 방식으로 진행하셨다. 영의 세계도 처음 창조 시에 창조하셨다. 영의 세계도 피조 세계이므로 창조기간에 창조된 것이고 영원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우주의 크기는 광대하여 측량할 수 없음으로 하나님의 무한성을 알 수 있다. 즉 우주에 펼쳐진 하나님의 전능한 창조를 묵상할 수 있도록 하셨다.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이다. - 창조의 자기 향유(기쁨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단어로는 delectatio, deliciae, exultatio, gaudium, hilaritas, iubilatio)가 하나님의 우주 창조의 목표이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지으실 때,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하시고,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처를 정하시기로 하심으로 합리적이고 영적인 피조물들을 지으시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으셔서 교제할 수 있도록 하셨다. -->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형상 즉 나라는 형상과 대비할 수 있겠으며, 나라의 성취는 형상의 완성에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창조는 백성의 거소이며, 거소에서 백성이 하나님의 섬김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창조의 완성으로 인류 가운데 충만하게 거하심으로 처음 창조의 경륜을 이루신다.
섭리는 하나님이 자기 창조를 다스리고 보존하심을 말한다. 창조주의 피조물의 관계에서 피조물은 항상 창조주에게 의존적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의존하는 피조물을 유지하시는 섭리 또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후 그의 경륜을 따라 모든 창조를 운행하신다. 그러므로 창조에서 순수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인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신다. 이 나라는 죄의 완전한 제거로 이루어진다.
창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큰 사역은 인류의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구속주가 되셔서 사역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 구속주가 되시되, 자기 인격이 친히 일하셨다. 창조주가 구속주가 되실 때 그의 인격에 인성을 입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는 구원의 방식은 신비요 경탄이다. 인간의 언어로 해명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계신 하나님이며, 우리의 구원이시고 참 하나님이시다. 구원을 하나님 자신이 이루시므로 구원은 율법의 길이 아니라 은혜이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거저 받기만 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데 믿음은 거저 받는 것을 뜻한다. 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창조의 완성은 구원의 완성과 창조의 계발로 이루어진다. 종말에는 인류가 처음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새 예루살렘 성에 이른다. 성은 모든 문명의 총화를 지시한다. 구원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령의 역사로 적용되어 모든 택자들이 다 중생하여 거룩한 자들이 되면 구원의 진행이 완료됨으로 이루어진다. 새 인류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살게 된다.
창조의 완성은 창조가 계발되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거의 다 현시됨으로 이루어진다. 창조주의 지혜가 풍성하게 현시되며 사람들의 눈에 확인된다. 그 때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승인되고 넘치게 찬양됨으로 창조의 완성이 된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해져서 하나님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신다. 이 창조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으로 이루어진다. 악을 소제하고 의가 완전히 섬으로 백성들이 영생에 이른다.
하나님 지식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와 구속주 되심을 아는 것이다. 창조주의 엄위와 영광을 아는 것이고, 구속주의 구원 곧 사랑의 큰 역사를 아는 것이다. 이 지식이 영생에 이르게 하는 지식이 된다. -->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이 분리된 지식이 아닌 한 지식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 지식이 된다.
지식의 수납은 논리적으로 창조주 지식이 선행하나, 시간적으로는 구속주 지식이 선행한다. 즉 구속주를 믿음으로 그 구속주가 창조주이심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지식의 시작이고 전부이며 마지막이다. 시작(구속주)과 나중(창조주)이며, 시작(창조주)에서 나중(구속주)로 순환적 지식을 형성한다.
시작과 전부인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지식이 참 신지식(notitia Dei vera)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참 신지식의 표준(norma)이며, 원리(principium)이다. 따라서 모든 신학의 참과 거짓의 여부는 그리스도에 의해 판정된다. --> 신학과 신앙의 판정관이 그리스도이시다. 교리는 그리스도 지식의 집약임으로 교리가 신학과 신앙의 판정의 모범(판례)이 되게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logos, Verbum Dei)이므로 그가 바로 하나님 지식이다. 로고스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 객관화이므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latio ipsius Dei)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영원히 객관화하시는 방식으로 계신다. 이 자기객관화가 한 인격을 이룬다. 이것이 아들의 출생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아들이 하나님의 자기객관화이므로 아버지의 모든 것이 다 아들에게 전달되어 있다.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전달되어 있고 아들 안에 다 있다. 사람의 경우에는 사람의 자기객관화가 하나의 심리적인 과정일 뿐인데 하나님의 경우는 전혀 달라서 하나님의 자기 객관화는 한 인격을 이룬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우리 피조물과의 차이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자기객관화가 하나의 신적 인격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고 아버지의 객관화이므로 로고스이다. 이제껏 해왔던 아들의 출생에 관한 논의는 합당하지 않다.
인간의 인격은 자기객관화이다. 그리고 인간은 출생방식으로 자기객관화를 잉태한다. 즉 자기인격과 출생방식의 이중의 자기객관화 과정을 거치지만, 하나님은 유일한 자기객관화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자기객관화로서 계시의 원천이 됨으로 그리스도를 떠난 종교는 - 유대교와 모하멧교- 참 종교(religio vera)가 아니다. 유대교는 기독교 정경인 구약을 갖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거짓 종교가 되며, 모하멧은 그리스도까지 포함한 정경을 갖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한 선지자로 여김으로 자연종교(religio natrualis)가 된다.
기독교 신학은 구속주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임을 인정하는 신학,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신학이 바른 신학이며 성경적인 신학이다. 이 진리는 자연이성으로 수납할 수 없는 믿음(영적)에 의한 진리이다.
저자는 신학의 출발점과 표준을 그리스도의 계시(특별계시)로 주장합니다. 반대로 일반계시(창조계시, 자연계시)를 출발점으로 삼을 때에는 영광의 신학, 즉 인간의 영광을 위한 신학이 되어 하나님은 한가한 신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학은 중세 스콜라 신학(아리스토텔레스를 근거로 신학함, 피조물에서 출발함)과 근세 신개신교주의 신학(칸트를 근거로 신학함, 초자연적 요소 배제한 이성을 근거)입니다.
신학은 계시(일반계시revelatio generalis가 아닌 특별계시revelatio specialis)에 의존하고 계시에 근거한다. 특별계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한 그리스도 계시이다. 모든 신학은 그리스도 계시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 계시에서 출발할 때 바른 신학에 이른다.
창조계시(일반계시, 자연계시)에서 신학을 시작하면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 되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창조계시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 이성에 신학함으로 그리스도 계시(특별계시)에 이르지 못한다. 첫째, 희랍의 존재의 동참도식에 근거한 것이다. 신은 존재일반을 창조한 존재가 아니고 존재일반에 동참이 최상이기 때문에 최고 존재인 것이다. 이 도식이 스콜라 신학에 도입되어 존재의 사다리를 따라 최고 존재인 신에게 이를 수 있다고 하여 자연신학을 발전시켰다.
자연신학은 낮은 단계에서 시작하여 피조물의 성질을 부정함(자기부정, via negativa, via negationis)으로 신의 성품(하나님의 존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피조물의 성격인 물질성, 유한성, 시간성의 부정은 영성(spiritualitas), 무한성(infinitas), 영원성(aeternitas)이라는 것이다. 또한 적극적인 방법(via positiva)에 의해 피조물에 나타난 선, 아름다움, 거룩등의 성격은 긍정으로 배가됨으로 존재의 유비에 의해서 하나님께 이르러 간다. 이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는 웅장한 신학을 이루고 영광의 신학을 이루지만, 성경의 하나님에 이르지 못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성한 신학이 되고 만다.
자연이성에 구성된 자연신학은 비중생자의 신학임으로 특별계시는 전적으로 배제된다. 개신교에서도 특별계시를 배제한 신학은 자유주의(신개신교주의)이다. 이러한 신학은 중세의 자연신학의 귀결로 도달한다. -> 이것은 현재 자유주의 신학에서 추진하는 로마교회와 일치운동에서 증명되어지고 있다. 통합과 합동이 분열될 때 믿음의 선배들이 우려했던 것이기 도하다.
신학은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 출발하지만, 또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어떤 신학이 기독교 하나님 지식을 바로 표현했는지의 여부를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 판단한다. 그리스도 계시가 신학의 출발점이고 그 근거이면서, 또 신학을 판단하는 표준이고 원리이다. 신구약의 중심(scopus)인 그리스도에 의해 다른 모든 부분이 해석되고 조명되는 신앙 유비(analogia fidei)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믿음은 이성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수납하는 도구이지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유비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 다른 모든 종교를 평가한다. 즉 그리스도 계시가 없는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동일 선상에 놓일 수 없는 이유이다. 다른 종교는 이방 종교, 우상 종교, 참 종교에서 변형된 종교이다. 이방 종교들을 우상 종교로 바라 볼 수 있는 길은 성경의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פרופסור שְׂצְליוּן)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철원-개혁파 교회 바른이해 (0) | 2009.03.19 |
---|---|
앵무새 신학과 화석 교리(신성남) (0) | 2009.03.12 |
십일조영웅 록펠러의 불법과 악행 (0) | 2009.03.10 |
칼빈의 인간론 (0) | 2009.03.04 |
서철원-육체와 영혼 바른이해 (0) | 2009.03.02 |
댓글